회의가 끝난 다음 설영준의 목소리가 박윤찬의 뒤에서 들려왔다.“박 변호사, 잠시만요. 제안할 게 있어요.”박윤찬은 몸을 돌려서 설영준을 바라봤다. 대답 대신 덤덤한 표정으로 계속 말하라는 듯이 말이다.“저희 밥이나 먹죠. 일 얘기는 내버려두고 친구 만난다는 생각으로요. 재이도 같이 만나요.”설영준은 미소 지은 얼굴로 말했다. 박윤찬은 본능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친하게 지내던 세월과 이익적으로 연결될 미래를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밥 먹죠.”박윤찬은 송재이에게 돌아가서 초대받은 일을 알렸다.이 말을 들은 송재이는 만감이 교차했다.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이지연이 떠올랐다. 이지연은 설영준이 선보는 중이라는 말을 한 적 있다. 혹시 그녀 몰래 박윤찬에게 다른 여자를 소개하려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조심해요, 윤찬 씨. 아무래도 평범한 초대가 아닌 것 같아요.”박윤찬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면서 위로했다.“걱정하지 마요. 저도 다 생각이 있어요. 옛정 때문에 판단이 흐려지는 일은 없을 거예요.”박윤찬이 위로했는데도 그녀는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설영준이 무슨 의도로 그를 초대했을지, 그리고 그와 그녀의 사이에 어떤 영향을 줄지 걱정되었다.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불안해할 필요 없다는 건 당연히 알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생각을 통제할 수 없었다.송재이는 결국 주의력을 피아노 레슨에 돌렸다. 일로 생각을 줄이는 건 언제나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녀는 다음 연주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성심성의껏 고른 곡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말이다.손가락이 건반에 닿아 선율이 흘러나올 때마다 그녀는 평정심을 되찾았다. 물론 설영준의 초대가 떠오른 순간 사라지는 평정심이었다.며칠 후, 송재이와 박윤찬은 함께 설영준이 예약한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전부터 음식과 환경으로 꽤 유명한 번화가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이었다.안으로 들어가자 멀지 않은 곳에 함께 서 있는 설영준과 서연청이 보였다. 서연청은 서진그룹 서씨 가문의 딸로 아주 유명했다.
서연청은 두 사람의 과거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송재이와 대화를 나눴다.송재이도 별다른 티를 내지 않았다. 그렇게 식사가 계속되고 있을 때, 새로 나온 음식을 먹어보려던 순간 송재이가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요즘 들어 위가 계속 불편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녀는 크게 개의치 않고 약도 먹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보고 서연청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재이 씨, 혹시... 임신했어요?”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박윤찬과 설영준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설영준의 안색이 아주 어두웠다.송재이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 아니에요! 요즘 계속 속이 안 좋았던 것뿐이에요.”박윤찬도 말을 보탰다.“맞아요. 재이 씨 요즘 연주회 준비한다고 밥도 잘 안 먹었어요. 그것 때문에 그랬을 거예요.”자신이 말실수했음을 깨달은 서연청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래요? 죄송해요, 제가 넘겨짚었어요. 재이 씨 건강 관리하세요. 밥도 잘 챙겨 먹고요.”설영준의 눈빛은 예리한 칼같이 송재이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그녀의 표정에서 대답을 구하려는 모양이었다.그의 강렬한 눈빛을 발견한 송재이는 심장이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금방 감정을 조절했다. 그를 무서워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크게 한 번 심호흡 하고 난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당당한 눈빛으로 설영준을 직시했다. 흔들림이라고는 추호도 보이지 않는 평온한 눈빛이었다.그녀는 시선으로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재이 씨가 어떤 추측을 해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야.’식탁 위의 세 사람 모두 그녀의 시선을 발견했다. 분위기는 더욱 미묘하게 번졌다.설영준과 송재이 사이의 팽팽한 기운을 느낀 서연청은 화제를 돌리며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했다.“다들 긴장한 모양이네요. 재이 씨, 얼른 뭐 좀 먹어요. 그래야 연주회 준비할 에너지가 생기죠.”송재이가 불편해하는 것을 느끼고 박윤찬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소리 없는 응원이었다.설영준은 결국 먼저 시선
송재이는 넋을 잃었다. 설영준이 별장 밖에 있다는 사실은 잠시 후에 받아들였다. 심장은 불안정하게 뛰기 시작했다.그녀는 설영준이 찾아온 이유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심호흡으로 애써 진정할 수밖에 없었다.박윤찬이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가서 물었다.“재이 씨, 왜 그래요? 어디 불편해요?”송재이는 머리를 흔들었다. 박윤찬을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괜찮아요. 그냥 좀 피곤했나 봐요.”말은 이렇게 해도 그녀의 눈빛에는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박윤찬은 빤히 보고 있으면서도 계속 묻지 않았다. 그는 이만 쉬는 뜻으로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송재이는 침대에 누웠다. 몸과 마음이 전부 지쳤는데도 정신은 또렷했다. 그녀는 한참 뒤척이면서 설영준이 보낸 메시지에 대해 생각했다.어떻게든 고민을 해결하지 않으면 오늘 밤 자기는 틀린 것 같았다. 야심한 밤, 그녀는 결국 결심을 내렸다.외투를 걸친 그녀는 조용히 침실에서 나갔다. 잠든 박윤찬을 깨우지 않고 말이다. 밖으로 나가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니 정신은 더 또렷해졌다.설영준의 차는 대문 밖에 세워져 있었다. 헤드라이트는 꺼져 있었지만 차 안에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송재이는 한숨을 쉬며 차 곁으로 걸어가서 짧게 노크했다. 차창이 천천히 내려가더니 설영준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주 피곤한 모습으로 말이다.설영준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정말 내려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송재이?”그는 헛것이라도 본 것처럼 물었다. 송재이는 그를 빤히 바라보면서 덤덤하게 물었다.“여긴 또 왜 왔어? 우리 끝내기로 했잖아. 서로 끝내기로 합의 본 게 아니었나?”그녀가 말을 마치기 바쁘게 설영준이 손을 뻗어서 차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녀가 정신 차리기도 전에 설영준의 숨결이 가까이에서 느껴지더니 폭풍과 같은 키스가 시작되었다.송재이는 머릿속이 창백해졌다. 팔이 붙잡힌 탓에 반항은 전혀 할 수 없었다. 반항은 무슨,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웠다.그의 키스에서는 절대적인 소유욕이 느껴졌다. 그녀를 있는
설영준의 품에서 송재이는 결국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소리 죽여 우는 그녀는 아주 안쓰러워 보였다.절망적인 눈물은 볼을 타고 끝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약혼녀도 있으면서 왜 나한테 온 건데?”설영준은 복잡한 표정으로 멈칫했다. 하지만 금방 고통으로 대체 되었다.그는 송재이의 어깨를 꽉 잡으며 깊은 눈빛을 보냈다.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신경 쓰여? 나한테 다른 여자가 있는 게?”송재이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영준이 이런 식으로 물을 줄은 몰랐다. 분노, 슬픔, 절망... 수많은 정동이 한데 엉켜서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심호흡하고 나서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끝났어. 너한테 다른 여자가 있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야. 그러니 내 생활도 방해하지 마.”설영준의 질문은 비수처럼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서도 고집스럽게 흘리지 않으려고 했다.그녀는 가볍게 설영준의 손을 밀어냈다. 그러고는 해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영준 씨한테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이야. 근데 다른 여자 때문은 아니야. 전에 같이 보냈던 행복한 기억이 이제는 고통이 되어서 신경 쓰인 것뿐이야. 그러니 이젠 제발 끝내고 각자 갈 길을 가자.”설영준의 안색은 아주 창백했다. 그는 불만을 표출하려는 듯 송재이의 턱을 꽉 잡았다.“꺼져, 내 차에서.”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감정 없는 말투는 마치 낯선 사람을 명령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송재이가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또다시 고요함을 깼다.“잠깐만.”송재이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머리는 돌리지 않았다. 심장은 그의 말을 기다리면서 세차게 뛰고 있었다.설영준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용기를 내서 지금껏 생각하고 있던 것을 물었다.“너... 진짜 임신이 아니야?”그의 질문은 망치처럼 그녀의 심장을 후려쳤다. 그녀는 흠칫 떨며 침묵에 잠겼다. 그러고는 억지라도 부리는 셈으로 단호하게 말
송재이의 마음은 이 밤의 색깔만큼이나 무거웠다. 그녀가 설영준에게 한 거짓말은 시한폭탄이었다. 언제든지 터질 수 있다는 말이다.거짓말 때문인 것도 있고, 몸 때문인 것도 있어서, 그녀는 한방병원으로 가서 도움을 청했다. 약재의 향기로 가득한 곳에 들어가자 마음은 훨씬 안정되었다.그녀의 앞에 앉은 의사는 신미현이라고 했다. 송재이가 증상을 대충 설명한 다음 신미현이 직접 맥을 짚어봤다. 잠시 후 신미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진지하게 말했다.“자궁이 많이 망가져 있어요. 초보적인 진단으로는 습관성 유산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그건 한약을 먹으면서 천천히 치료해야 할 부분이에요.”‘습관성 유산’이라는 말에 송재이는 심장이 아팠다. 지난번에 겪은 유산은 꿈으로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지옥 같았기 때문이다.그러나 마음속의 두려움은 금방 견고함으로 대체 되었다. 어찌 됐든 그녀는 더 건강해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감사합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천천히 치료해 볼게요.”송재이는 신미현이 건네는 처방을 받아서 들며 굳게 결심을 내렸다.그녀는 약을 들고 한방병원에서 나갔다. 모자를 꾹 눌러쓰고 머리를 숙인 채 타인과의 시선 접촉을 피했다.그렇게 복도를 걷고 있을 때 한 사람이 그녀의 곁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몰랐지만, 상대는 다름 아닌 양은서였다.양은서는 사무실에서 앉아서 한참이나 생각했다. 송재이가 왜 이곳에 있는지를 말이다. 그녀는 결국 신미현을 직접 찾아가서 묻기로 했다.신미현을 통해 그녀는 송재이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습관성 유산이라는 것까지 말이다. 양은서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설영준과 송재이 사이의 복잡한 관계는 그녀도 알았다. 그러나 송재이 혼자 이토록 큰 문제를 품고 있을 줄은 몰랐다.양은서는 자신이 알게 된 것을 설영준에게 알리기로 결심했다. 이렇게라도 두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그녀의 말을 듣고 난 설영준은 적지 않게 놀랐다. 그리고 이제야 송재이가 임신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젠 그녀가 왜 거짓말을 했는지 궁
송재이는 설영준과 서연청이 천생연분이라는 칭찬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져 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그녀는 무대 뒤에서 저도 모르게 설영준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설영준은 관객석에 앉아 있었다. 그의 곁에는 한눈에 봐도 아름답고 매력적인 서연청이 앉아 있었다.두 사람의 등장에 아무리 음악 소리가 커도 사람들은 이 결혼에 대해 수군대고 있었다.송재이는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때에 절대 연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 이 음악회를 끝까지 참석해야 했다.심호흡한 뒤 최대한 진정하려고 애를 썼다.사회자의 소개에 따라 송재이는 무대로 올라왔다.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리 심란해도 그녀는 여전히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피아노 앞에 앉아 두 손을 건반 위에 올렸다. 이윽고 부드러운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지며 연주에 빠져 음악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냈다.그녀의 손가락이 마지막 건반에 닿았다. 사람들은 열렬한 환호를 하며 박수를 쳤다.송재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관객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하지만 일부러 설영준과 서연청이 있는 곳은 피해 고개를 돌렸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음악회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첫 시작일 뿐 아니라 유일하게 감정을 전부 쏟아낼 방법이라는 것을.그러나 무대로 내려간 후 대기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려 할 때 그녀는 우연히 서연청과 마주쳤다.서연청은 아주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채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은 싸늘했다.“송재이 씨, 오늘 연주 완벽했어요.”서연청은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아주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송재이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서연청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으니까.“칭찬 고마워요, 서연청 씨.”그녀는 예의를 지키며 인사를 하곤 거리를 유지했다.서연청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눈빛은 더없이 싸늘했다.“커피 한잔 사주고 싶은데, 재이 씨
카페에 나온 서연청의 표정은 한껏 굳어져 있었다.설영준이 상대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느끼는 그에 대한 감정도 복잡하고 모순이었다.한편으로는 그의 사랑과 미래에 대한 약속을 받고 싶으면서도 그의 권력과 싸늘한 성격을 두려워하기도 했다.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이 설영준이라는 것을 확인한 서연청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여보세요, 영준 씨.”서연청는 다소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연청 씨, 나예요.”설영준의 목소리는 냉담했다.“재이 만나러 갔다고 들었어요.”서연청은 순간 긴장해졌다. 그녀는 설영준이 이렇게나 빨리 이 사실을 알게 될 줄은 몰랐다.“네, 전... 전 그냥 공연 잘 봤다고 축하해주러 만난 거예요.”“그래요?”설영준은 다소 의심스러운 어투로 말했다.“그래도 이것 하나만은 알고 있어요. 재이는 내 친구에요. 그러니 재이를 쓸데없이 찾아가 귀찮게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네요.”서연청은 그의 목소리에서 싸늘함을 느꼈다. 설영준이 자신에게 경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영준 씨, 전... 전 별다른 뜻은 없었어요. 전 그냥...”“됐어요. 연청 씨 변명은 듣고 싶지 않네요.”설영준은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오늘 저녁은 내가 살게요. 저녁 먹으면서 우리 대화를 나눠보죠.”서연청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녁 식사 자리 분위기가 얼마나 숨 막힐지 예상이 갔다.“영준 씨, 저... 저 오늘은 안 될 것 같아요. 몸이 안 좋아서 그러는 데 다음에 같이 먹으면 안 될까요?”“연청 씨, 자꾸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말아요.”설영준의 목소리가 티가 나게 차가워졌다.“항상 먹던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늦지 않길 바라요.”이 말을 끝으로 그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서연청은 멍하니 제자리에 서서 다소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설영준의 말은 부탁이 아닌 명령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반드시 가야 했다.저녁, 서연청은 그가 말한
송재이와 박윤찬도 쇼핑몰에 있었다. 두 사람은 식기 코너에서 그릇을 열심히 고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퍽 다정해 보였다.송재이가 박윤찬의 집으로 이사한 뒤 두 사람은 점차 서로의 생활에 적응되어 가고 있었고 사소한 일에도 의미가 가득하게 느껴졌다.그러나 송재이가 고개를 돌렸을 때 무심코 설영준과 마주치게 되었다. 설영준은 다소 심문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어 저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졌다.설영준은 송재이를 빤히 보지는 않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서연청을 보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송재이는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그녀는 설영준과 서연청의 사이가 복잡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와 설영준의 사이에도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서연청도 그녀를 발견했는지 다소 불쾌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그녀는 여전히 설영준 곁에 서 있으면서 설영준과 얼마나 친한 사이인지 송재이에게 보여주려고 했다.박윤찬은 멍 때리고 있는 송재이를 발견하곤 걱정스럽게 물었다.“재이 씨, 왜 그래요? 혹시 몸 안 좋은 거예요?”송재이는 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윤찬 씨. 그냥 조금 으슬으슬해서요.”박윤찬은 더 묻지 않았다. 그저 더 열심히 식기구를 고를 뿐이다. 송재이도 두 사람에게서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그들은 계속 쇼핑몰을 구경했지만 송재이의 기분은 이미 전과 달라져 있었다. 저도 모르게 자꾸만 설영준과 서연청이 있는 쪽을 보게 되었고 의아함과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설영준과 서연청도 쇼핑몰을 구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분위기는 송재이와 박윤찬처럼 다정하지 않았다.서연청은 최대한 그와 친근하게 보이려고 애썼지만 설영준은 계속 그녀에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그의 시선도 자꾸 저도 모르게 송재이와 박윤찬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꼭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송재이는 설영준과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린 후 계속 박윤찬과 그릇을 골랐다.두 사람의 분위기는 아주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