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이는 넋을 잃었다. 설영준이 별장 밖에 있다는 사실은 잠시 후에 받아들였다. 심장은 불안정하게 뛰기 시작했다.그녀는 설영준이 찾아온 이유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심호흡으로 애써 진정할 수밖에 없었다.박윤찬이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가서 물었다.“재이 씨, 왜 그래요? 어디 불편해요?”송재이는 머리를 흔들었다. 박윤찬을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괜찮아요. 그냥 좀 피곤했나 봐요.”말은 이렇게 해도 그녀의 눈빛에는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박윤찬은 빤히 보고 있으면서도 계속 묻지 않았다. 그는 이만 쉬는 뜻으로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송재이는 침대에 누웠다. 몸과 마음이 전부 지쳤는데도 정신은 또렷했다. 그녀는 한참 뒤척이면서 설영준이 보낸 메시지에 대해 생각했다.어떻게든 고민을 해결하지 않으면 오늘 밤 자기는 틀린 것 같았다. 야심한 밤, 그녀는 결국 결심을 내렸다.외투를 걸친 그녀는 조용히 침실에서 나갔다. 잠든 박윤찬을 깨우지 않고 말이다. 밖으로 나가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니 정신은 더 또렷해졌다.설영준의 차는 대문 밖에 세워져 있었다. 헤드라이트는 꺼져 있었지만 차 안에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송재이는 한숨을 쉬며 차 곁으로 걸어가서 짧게 노크했다. 차창이 천천히 내려가더니 설영준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주 피곤한 모습으로 말이다.설영준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정말 내려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송재이?”그는 헛것이라도 본 것처럼 물었다. 송재이는 그를 빤히 바라보면서 덤덤하게 물었다.“여긴 또 왜 왔어? 우리 끝내기로 했잖아. 서로 끝내기로 합의 본 게 아니었나?”그녀가 말을 마치기 바쁘게 설영준이 손을 뻗어서 차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녀가 정신 차리기도 전에 설영준의 숨결이 가까이에서 느껴지더니 폭풍과 같은 키스가 시작되었다.송재이는 머릿속이 창백해졌다. 팔이 붙잡힌 탓에 반항은 전혀 할 수 없었다. 반항은 무슨,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웠다.그의 키스에서는 절대적인 소유욕이 느껴졌다. 그녀를 있는
설영준의 품에서 송재이는 결국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소리 죽여 우는 그녀는 아주 안쓰러워 보였다.절망적인 눈물은 볼을 타고 끝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약혼녀도 있으면서 왜 나한테 온 건데?”설영준은 복잡한 표정으로 멈칫했다. 하지만 금방 고통으로 대체 되었다.그는 송재이의 어깨를 꽉 잡으며 깊은 눈빛을 보냈다.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신경 쓰여? 나한테 다른 여자가 있는 게?”송재이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영준이 이런 식으로 물을 줄은 몰랐다. 분노, 슬픔, 절망... 수많은 정동이 한데 엉켜서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심호흡하고 나서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끝났어. 너한테 다른 여자가 있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야. 그러니 내 생활도 방해하지 마.”설영준의 질문은 비수처럼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서도 고집스럽게 흘리지 않으려고 했다.그녀는 가볍게 설영준의 손을 밀어냈다. 그러고는 해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영준 씨한테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이야. 근데 다른 여자 때문은 아니야. 전에 같이 보냈던 행복한 기억이 이제는 고통이 되어서 신경 쓰인 것뿐이야. 그러니 이젠 제발 끝내고 각자 갈 길을 가자.”설영준의 안색은 아주 창백했다. 그는 불만을 표출하려는 듯 송재이의 턱을 꽉 잡았다.“꺼져, 내 차에서.”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감정 없는 말투는 마치 낯선 사람을 명령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송재이가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또다시 고요함을 깼다.“잠깐만.”송재이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머리는 돌리지 않았다. 심장은 그의 말을 기다리면서 세차게 뛰고 있었다.설영준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용기를 내서 지금껏 생각하고 있던 것을 물었다.“너... 진짜 임신이 아니야?”그의 질문은 망치처럼 그녀의 심장을 후려쳤다. 그녀는 흠칫 떨며 침묵에 잠겼다. 그러고는 억지라도 부리는 셈으로 단호하게 말
송재이의 마음은 이 밤의 색깔만큼이나 무거웠다. 그녀가 설영준에게 한 거짓말은 시한폭탄이었다. 언제든지 터질 수 있다는 말이다.거짓말 때문인 것도 있고, 몸 때문인 것도 있어서, 그녀는 한방병원으로 가서 도움을 청했다. 약재의 향기로 가득한 곳에 들어가자 마음은 훨씬 안정되었다.그녀의 앞에 앉은 의사는 신미현이라고 했다. 송재이가 증상을 대충 설명한 다음 신미현이 직접 맥을 짚어봤다. 잠시 후 신미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진지하게 말했다.“자궁이 많이 망가져 있어요. 초보적인 진단으로는 습관성 유산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그건 한약을 먹으면서 천천히 치료해야 할 부분이에요.”‘습관성 유산’이라는 말에 송재이는 심장이 아팠다. 지난번에 겪은 유산은 꿈으로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지옥 같았기 때문이다.그러나 마음속의 두려움은 금방 견고함으로 대체 되었다. 어찌 됐든 그녀는 더 건강해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감사합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천천히 치료해 볼게요.”송재이는 신미현이 건네는 처방을 받아서 들며 굳게 결심을 내렸다.그녀는 약을 들고 한방병원에서 나갔다. 모자를 꾹 눌러쓰고 머리를 숙인 채 타인과의 시선 접촉을 피했다.그렇게 복도를 걷고 있을 때 한 사람이 그녀의 곁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몰랐지만, 상대는 다름 아닌 양은서였다.양은서는 사무실에서 앉아서 한참이나 생각했다. 송재이가 왜 이곳에 있는지를 말이다. 그녀는 결국 신미현을 직접 찾아가서 묻기로 했다.신미현을 통해 그녀는 송재이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습관성 유산이라는 것까지 말이다. 양은서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설영준과 송재이 사이의 복잡한 관계는 그녀도 알았다. 그러나 송재이 혼자 이토록 큰 문제를 품고 있을 줄은 몰랐다.양은서는 자신이 알게 된 것을 설영준에게 알리기로 결심했다. 이렇게라도 두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그녀의 말을 듣고 난 설영준은 적지 않게 놀랐다. 그리고 이제야 송재이가 임신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젠 그녀가 왜 거짓말을 했는지 궁
송재이는 설영준과 서연청이 천생연분이라는 칭찬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져 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그녀는 무대 뒤에서 저도 모르게 설영준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설영준은 관객석에 앉아 있었다. 그의 곁에는 한눈에 봐도 아름답고 매력적인 서연청이 앉아 있었다.두 사람의 등장에 아무리 음악 소리가 커도 사람들은 이 결혼에 대해 수군대고 있었다.송재이는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때에 절대 연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 이 음악회를 끝까지 참석해야 했다.심호흡한 뒤 최대한 진정하려고 애를 썼다.사회자의 소개에 따라 송재이는 무대로 올라왔다.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리 심란해도 그녀는 여전히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피아노 앞에 앉아 두 손을 건반 위에 올렸다. 이윽고 부드러운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지며 연주에 빠져 음악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냈다.그녀의 손가락이 마지막 건반에 닿았다. 사람들은 열렬한 환호를 하며 박수를 쳤다.송재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관객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하지만 일부러 설영준과 서연청이 있는 곳은 피해 고개를 돌렸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음악회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첫 시작일 뿐 아니라 유일하게 감정을 전부 쏟아낼 방법이라는 것을.그러나 무대로 내려간 후 대기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려 할 때 그녀는 우연히 서연청과 마주쳤다.서연청은 아주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채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은 싸늘했다.“송재이 씨, 오늘 연주 완벽했어요.”서연청은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아주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송재이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서연청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으니까.“칭찬 고마워요, 서연청 씨.”그녀는 예의를 지키며 인사를 하곤 거리를 유지했다.서연청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눈빛은 더없이 싸늘했다.“커피 한잔 사주고 싶은데, 재이 씨
카페에 나온 서연청의 표정은 한껏 굳어져 있었다.설영준이 상대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느끼는 그에 대한 감정도 복잡하고 모순이었다.한편으로는 그의 사랑과 미래에 대한 약속을 받고 싶으면서도 그의 권력과 싸늘한 성격을 두려워하기도 했다.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이 설영준이라는 것을 확인한 서연청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여보세요, 영준 씨.”서연청는 다소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연청 씨, 나예요.”설영준의 목소리는 냉담했다.“재이 만나러 갔다고 들었어요.”서연청은 순간 긴장해졌다. 그녀는 설영준이 이렇게나 빨리 이 사실을 알게 될 줄은 몰랐다.“네, 전... 전 그냥 공연 잘 봤다고 축하해주러 만난 거예요.”“그래요?”설영준은 다소 의심스러운 어투로 말했다.“그래도 이것 하나만은 알고 있어요. 재이는 내 친구에요. 그러니 재이를 쓸데없이 찾아가 귀찮게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네요.”서연청은 그의 목소리에서 싸늘함을 느꼈다. 설영준이 자신에게 경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영준 씨, 전... 전 별다른 뜻은 없었어요. 전 그냥...”“됐어요. 연청 씨 변명은 듣고 싶지 않네요.”설영준은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오늘 저녁은 내가 살게요. 저녁 먹으면서 우리 대화를 나눠보죠.”서연청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녁 식사 자리 분위기가 얼마나 숨 막힐지 예상이 갔다.“영준 씨, 저... 저 오늘은 안 될 것 같아요. 몸이 안 좋아서 그러는 데 다음에 같이 먹으면 안 될까요?”“연청 씨, 자꾸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말아요.”설영준의 목소리가 티가 나게 차가워졌다.“항상 먹던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늦지 않길 바라요.”이 말을 끝으로 그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서연청은 멍하니 제자리에 서서 다소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설영준의 말은 부탁이 아닌 명령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반드시 가야 했다.저녁, 서연청은 그가 말한
송재이와 박윤찬도 쇼핑몰에 있었다. 두 사람은 식기 코너에서 그릇을 열심히 고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퍽 다정해 보였다.송재이가 박윤찬의 집으로 이사한 뒤 두 사람은 점차 서로의 생활에 적응되어 가고 있었고 사소한 일에도 의미가 가득하게 느껴졌다.그러나 송재이가 고개를 돌렸을 때 무심코 설영준과 마주치게 되었다. 설영준은 다소 심문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어 저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졌다.설영준은 송재이를 빤히 보지는 않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서연청을 보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송재이는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그녀는 설영준과 서연청의 사이가 복잡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와 설영준의 사이에도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서연청도 그녀를 발견했는지 다소 불쾌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그녀는 여전히 설영준 곁에 서 있으면서 설영준과 얼마나 친한 사이인지 송재이에게 보여주려고 했다.박윤찬은 멍 때리고 있는 송재이를 발견하곤 걱정스럽게 물었다.“재이 씨, 왜 그래요? 혹시 몸 안 좋은 거예요?”송재이는 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윤찬 씨. 그냥 조금 으슬으슬해서요.”박윤찬은 더 묻지 않았다. 그저 더 열심히 식기구를 고를 뿐이다. 송재이도 두 사람에게서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그들은 계속 쇼핑몰을 구경했지만 송재이의 기분은 이미 전과 달라져 있었다. 저도 모르게 자꾸만 설영준과 서연청이 있는 쪽을 보게 되었고 의아함과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설영준과 서연청도 쇼핑몰을 구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분위기는 송재이와 박윤찬처럼 다정하지 않았다.서연청은 최대한 그와 친근하게 보이려고 애썼지만 설영준은 계속 그녀에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그의 시선도 자꾸 저도 모르게 송재이와 박윤찬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꼭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송재이는 설영준과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린 후 계속 박윤찬과 그릇을 골랐다.두 사람의 분위기는 아주
설영준은 복잡함이 담긴 눈빛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소 놀라기도 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질투의 감정이 더 컸다.그는 박윤찬이 송재이의 앞에서 반성하고 있는 모습이 다소 웃기게 느껴졌고 형언할 수 없는 쓸쓸함이 밀려왔다.송재이가 입술을 틀어 물고 있고 박윤찬이 풀 죽은 채로 사과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박윤찬이 ‘아내'에겐 꼼짝도 못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두 사람의 모습으로 인해 설영준은 다시 질투에 휩싸였고 이성도 점점 질투로 지배되어 화까지 나게 되었다.설영준은 충동이 일었다. 지금 그녀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저도 모르게 얼른 두 사람에게로 다가가 갈라놓고 싶었다.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결국 그의 질투가 이성을 지배해버렸다.차 문을 열고 성큼성큼 두 사람에게로 다가갔다.두 사람 앞까지 온 설영준에게선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내뿜었다.그는 송재이와 박윤찬을 번갈아 보다가 송재이에게 시선을 고정하곤 말했다.“재이 씨, 그날 연청 씨가 재이 씨 찾으러 간 일에 대해 대신 사과하려고 왔어요. 연청 씨가 재이 씨를 찾으러 오는 일은 앞으로 더는 없을 거예요.”설령 설영준이 사과하고 있어도 그의 표정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고 두 사람 앞에 우뚝 서서 여전히 약자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는 사과하는 모습마저도 위엄이 있어 보였다.송재이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투덜댔다.‘왜 전혀 사과를 받는 듯한 기분이 들지 않는 거지?'그러나 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며 긴장감이 넘치는 분위기를 깨버렸다.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담담하게 확인했다. 이내 그녀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송재이는 전화를 받았다. 다소 다급하면서도 엄숙한 도정원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재이야, 아버지가 뇌출혈로 입원하셨어. 상황이 많이 안 좋은데 지금 와 줄 수 있을까?”송재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잘 못 들은 것이 아닐까 귀를 의심하기도 했다.도경욱은 그녀의 아버지였다. 그런데 이런 소식을 듣게
남자들은 28살이 넘으면 다들 그쪽으로 욕구가 강렬한 걸까?오늘 밤만 해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송재이는 더 이상 감당이 안 됐다.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설영준을 잘 알기에 가느다란 손으로 그의 척추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서툰 솜씨로 더듬거리며 끝내 그의 성감대를 찾았고 설영준의 무거운 신음과 함께 뜨거웠던 섹스도 마침내 끝났다.“나 다음 달이면 25살이야.”송재이는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널브러진 속옷과 원피스를 주워서 하나씩 챙겨입기 시작했다. 뒤에 달린 지퍼가 손이 닿지 않아 고개 돌려 침대 머리맡에 기댄 설영준을 힐긋 쳐다봤는데 그는 한창 담배에 불을 지피고 뽀얀 연기를 내뿜으며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송재이는 우아한 자태로 자리에 앉아 긴 머리를 쓸어넘기고 새하얀 등을 훤히 드러냈다.설영준의 눈빛이 그녀의 몸에서 맴돌았다.잠시 후 그나마 신사답게 담배를 지그시 물고 몸을 일으키며 제법 자연스럽게 그녀의 지퍼를 올려주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공기 속에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나도 이젠 어린 나이가 아니야. 나만의 가정을 차리고 싶어.”그녀가 답했다.설영준은 담뱃재를 톡톡 털었다.“우리가 처음 섹스할 때 내가 했던 말을 까맣게 잊었나 봐?”“안 잊었어. 나랑 결혼 안 한다고 했잖아.”송재이는 치맛자락을 꽉 잡고는 애써 담담한 척 웃어 보였다.“사실 이 3년 동안 너에게 무척 고마웠어. 내가 가장 힘들 때 나 대신 중병에 걸린 우리 엄마를 위해 신장을 찾아주고 병원비도 대줬잖아. 비록 살려내진 못했지만...”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목소리가 슬픔에 잠겼다.6개월 전, 그녀는 엄마의 장례식을 마치면서 설영준과 이별할 결심을 했지만 마음속에 줄곧 일말의 미련이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어제 그가 조건이 비슷한 집안의 주현아 씨와 함께 반지를 고르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완전히 단념했다.애초에 송재이가 설영준과의 이런 관계를 시작하기로 했을 때 두 사람 다 솔로였다. 설영준은 의젓했고 그녀는 돈이 시급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