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 도경욱의 상태는 많이 호전되었다. 송재이는 그제야 마음이 점차 놓였다.다시 학원으로 돌아온 그녀는 수업을 준비하며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가려고 시도했다.어느 하루, 송재이는 학원에서 저녁에 아주 중요한 광고주가 올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고 저녁 식사도 예약되어 있다고 했다.이 소식을 듣고도 그녀는 처음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단지 학원에서 일상적인 업무 활동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오후에 광고주가 학원에 도착한다는 소식에 그녀도 다소 호기심이 생기게 되었다.송재이는 수업을 마친 뒤 화장실로 가 화장을 고치고 나왔다. 그러다가 우연히 복도에서 익숙한 형체를 발견했다.그녀는 멈칫했다. 학원에 온다던 광고주가 설영준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설영준은 정장을 입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다소 이번 우연한 만남이 흥미로운 듯한 눈빛으로 말이다.“재지야, 우리 또 만났네.”설영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도 모르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송재이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예의 있게 대답했다.“영준 씨, 이런 우연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학원에서 맞이한다는 중요한 손님이 영준 씨일 줄이야.”설영준은 미소를 지으며 한참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나도 몰랐어. 이런 즐거운 우연이 있을 줄은.”송재이는 심란했다. 설영준이 왜 갑자기 그녀가 일하는 곳에 나타났는지 그 의도를 몰랐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녀는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한 명의 교사로서의 직업 소양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설영준 씨, 어떤 업무상 요구이든 최선을 다해 협조할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수업이 있으니 이만 먼저 갈게요.”송재이는 예의 있게 말하곤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고 했다.설영준은 그런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보았다.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뭔가를 계획하는 듯한 눈빛이었다.저녁 식사는 학원 근처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진행되었다. 송재이는 제때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깔끔한 정
서연청은 자연스럽게 설영준의 팔에 팔짱을 끼며 그에게 물었다.“영준 씨, 우리 룸이 어디에요? 지금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설영준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복도 끝에 있는 룸이에요. 연청 씨, 먼저 가 있어요. 전 송재이 선생님이랑 할 말이 조금 있네요.”서연청은 고래를 끄덕인 후 송재이를 향해 예의상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우아한 모습으로 룸으로 갔다.송재이는 조용히 서서 멀어져가는 서연청의 뒷모습을 보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서연청과 설영준의 사이가 아주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형언할 수 없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설영준은 고개를 돌려 침묵하고 있는 송재이를 발견하곤 물었다.“재이야,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픈 거야?”그제야 정신이 든 송재이는 고개를 저으며 감정을 감추려 했다.“괜찮아요, 영준 씨. 그냥 뭐가 생각나서 조금 멍 때리고 있었네요.”설영준의 시선이 여전히 그녀의 얼굴에 닿아 있었다.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려고 하는 것처럼. 하지만 결국 그는 묻지 않았다.“재이야, 혹시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말해도 돼. 내가 도와주고 싶어.”송재이는 설영준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설영준과 업무 외의 대화를 나눠서는 안 되었다.그래서 예의상 대답했다.“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설영준 씨. 나중에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할게요. 지금은 일단 룸으로 돌아가요. 다들 우리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설영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송재이는 여전히 여러 생각이 들었다. 저녁 식사에 집중하며 생각을 비우려고 했지만 설영준과 서연청의 다정한 행동이 자꾸만 눈에 띄었다.두 사람이 룸으로 돌아왔을 때 식사는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서연청은 그녀의 상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하는 행동마다 자신이 넘치고 매력적으로 보였다.송재이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그러나 그녀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자꾸만 서연청과 설영준이게 향했다.식사가 이어지고 분
차 안에는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뒷좌석에 앉은 송재이는 불편해 미칠 것 같았다.서연청과 설영준은 앞 좌석에 앉아 있었다. 서연청은 침묵하고 있었고 설영준은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송재이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창밖으로 향했다. 은은한 가로등 불빛이 빠르게 지나가면서 그녀의 머릿속에 든 잡생각도 함께 점차 사라져버렸다.그녀는 설영준이 자신을 데려다주겠다고 한 의도를 몰랐다. 서연청이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차 안에선 이따금 숨소리와 가끔 지나가는 차 소리만 들려와 송재이는 더 불편했다.그녀는 대화거리를 찾으며 이 침묵을 깨보려고 했지만, 행여나 말실수하게 될까 봐 걱정되었다.“송 선생님은 어디 사세요?”설영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조용한 차 안에서 그의 목소리는 아주 또렷하게 들려왔다.정신이 든 송재이는 얼른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러나 다시 침묵에 빠졌다.그녀는 조수석에 앉은 서연청이 자세를 살짝 바꾸는 것을 발견했지만 서연청은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송재이는 다소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설영준과 서연청이 정말로 결혼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이 소식은 그녀에게 충격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저 설영준이 서연청에게 관심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아주 친근해 보였고 이미 결혼까지 논할 사이가 되어 있었다.송재이는 심란해졌다. 설영준과 서연청의 결혼을 축하해줘야 할지 아니면 느껴지는 실망감에 슬퍼해야 할지 몰랐다.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이런 잡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했다.“송 선생님은요? 결혼식에 대한 로망이 있어요?”설영준은 거울로 힐끔 송재이를 보며 물었다. 송재이는 순간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멈칫하던 송재이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전 딱히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어서 모르겠네요. 하지만 어떤 결혼식이든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설영준은 거울을 통해 차가운 눈빛으로 송재이를 보았다. 꼭 심문하는 듯한 눈빛이었고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 전
남자들은 28살이 넘으면 다들 그쪽으로 욕구가 강렬한 걸까?오늘 밤만 해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송재이는 더 이상 감당이 안 됐다.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설영준을 잘 알기에 가느다란 손으로 그의 척추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서툰 솜씨로 더듬거리며 끝내 그의 성감대를 찾았고 설영준의 무거운 신음과 함께 뜨거웠던 섹스도 마침내 끝났다.“나 다음 달이면 25살이야.”송재이는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널브러진 속옷과 원피스를 주워서 하나씩 챙겨입기 시작했다. 뒤에 달린 지퍼가 손이 닿지 않아 고개 돌려 침대 머리맡에 기댄 설영준을 힐긋 쳐다봤는데 그는 한창 담배에 불을 지피고 뽀얀 연기를 내뿜으며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송재이는 우아한 자태로 자리에 앉아 긴 머리를 쓸어넘기고 새하얀 등을 훤히 드러냈다.설영준의 눈빛이 그녀의 몸에서 맴돌았다.잠시 후 그나마 신사답게 담배를 지그시 물고 몸을 일으키며 제법 자연스럽게 그녀의 지퍼를 올려주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공기 속에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나도 이젠 어린 나이가 아니야. 나만의 가정을 차리고 싶어.”그녀가 답했다.설영준은 담뱃재를 톡톡 털었다.“우리가 처음 섹스할 때 내가 했던 말을 까맣게 잊었나 봐?”“안 잊었어. 나랑 결혼 안 한다고 했잖아.”송재이는 치맛자락을 꽉 잡고는 애써 담담한 척 웃어 보였다.“사실 이 3년 동안 너에게 무척 고마웠어. 내가 가장 힘들 때 나 대신 중병에 걸린 우리 엄마를 위해 신장을 찾아주고 병원비도 대줬잖아. 비록 살려내진 못했지만...”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목소리가 슬픔에 잠겼다.6개월 전, 그녀는 엄마의 장례식을 마치면서 설영준과 이별할 결심을 했지만 마음속에 줄곧 일말의 미련이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어제 그가 조건이 비슷한 집안의 주현아 씨와 함께 반지를 고르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완전히 단념했다.애초에 송재이가 설영준과의 이런 관계를 시작하기로 했을 때 두 사람 다 솔로였다. 설영준은 의젓했고 그녀는 돈이 시급했기에
미행은 절대 아니다. 송재이는 자신이 그럴만한 매력이 없다는 걸 잘 아니까.설영준을 본 순간 그녀는 왜 가슴이 찔리는지 이해되지 않았다.일정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그녀는 설영준의 눈에 담긴 웃을 듯 말 듯한 기운을 바로 알아챘고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났다.“아는 사이에요?”맞은편에 앉은 지민건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뒤쪽을 바라봤다.하지만 그는 근시이고 오늘 급하게 나오느라 깜빡하고 렌즈를 착용하지 못해서 눈앞이 희미할 뿐 아무것도 안 보였다.송재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전화를 끊었다.“아니요, 몰라요.”곧이어 저번에 쥬얼리샵에서 본 주현아 씨가 나타났다.이제 막 화장실을 다녀온 모양인지 하이힐을 신고 새하얀 롱 원피스를 하늘거리며 설영준의 옆으로 걸어갔다.설영준도 송재이한테서 시선을 거두고는 맞은편에 앉은 주현아만 쳐다볼 뿐 더는 곁눈질하지 않았다.방금 마신 커피가 입맛에 안 맞았던지 혹은 또 설영준을 마주쳐서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별안간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지민건은 그녀의 안색이 안 좋은 걸 보더니 집으로 바래다주겠다고 했다.마침 그녀도 같은 생각인지라 가방을 챙기고 그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가게 문 앞까지 가려면 설영준과 주현아를 스쳐 지나야 하니 그녀는 무심코 두 사람을 힐긋 쳐다봤는데 주현아가 한창 수줍은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설영준의 손가락을 매만졌다.설영준도 거침없이 바로 주현아의 손을 꼭 잡았다....돌아가는 길에서 송재이는 유은정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소개팅을 잘했냐고 물었다.“어때 재이야? 마음에 들어?”지민건은 옆에서 운전에만 집중했다.송재이는 그를 힐긋 쳐다보다가 입을 막고 솔직하게 대답했다.“괜찮은 분 같아. 성실하고 착해 보여.”적어도 처음 봤을 때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 어차피 그녀도 결혼할 생각이 있었던지라 인연이 닿으면 지민건과 더 가깝게 지내볼 의향도 있었다.여기서 제일 뿌듯한 건 당연히 유은정이다. 그녀는 먼저 설영준의 험담을 잔뜩 늘려놓고
그 생각이 든 순간 송재이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고 벼락을 맞은 것만 같았다.지금 이 추측을 입증하기 위해 송재이는 당일 밤에 바로 약국에 가서 임테기를 샀다.빨간 줄 두 줄이라니!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몇 번이고 더 테스트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이제 막 힘겹게 설영준을 단념하고 그와의 관계에 마침표를 찍었는데 왜 또 이런 치명타를 주는 걸까?임신한 몸으로 남자의 집까지 찾아가 결혼을 다그치는 파격적인 스토리는 많이 들어봤지만 그녀는 늘 그런 방식이 존엄도 없고 멍청해 보였다.게다가 그녀가 마주해야 하는 건 설씨 일가와 같은 재벌 가문이다.막강한 권력으로 서민의 삶을 처참하게 짓밟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만약 설영준이 그녀가 임신한 걸 알면 기뻐할까?어휴, 당연히 아니겠지.그와 함께한 3년 동안 이 남자가 처음부터 섹스와 결혼을 철저하게 갈라놓는 인간이란 걸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안다.설영준의 아내가 될 사람은 오직 그와 조건이 대등한 정략결혼 상대일 것이다. 주현아와 같은 재벌가 따님이 제격이다.송재이처럼 바람이 불면 휙 쓰러지는 하찮은 존재는 가당치도 않다.그녀는 설영준에게 끌려가 낙태를 당하고 싶지 않았다. 이 세상에 그녀의 가족은 단 한 명도 없다.배 속에 아이는 유일한 핏줄이니 그녀는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았다....설도영의 과외를 관둔 송재이는 친한 선배에게 또 다른 학생들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선배는 아주 열성적으로 곧장 그녀에게 학생을 찾아줬다.이런 1대1 레슨은 시간을 많이 차지하지 않아 낮에는 밴드에 가서 공연 리허설을 하고 밤에는 또 아르바이트를 한 건 할 수 있다.그녀는 배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어쩌면 요 녀석을 위해서라도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더 열심히 살아가야 할 듯싶다.지민건은 송재이가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구했다고 하니 축하하는 의미로 밥 한 끼 사주겠다고 했다.송재이는 수업을 마친 후에야 그 문자를 확인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알겠다며 단답형으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송재이는 짜증이 확 밀려와 고개를 돌리고 거들떠보지 않았다.이에 설영준은 아무렇지 않은 듯 휴대폰을 거둬들이고는 거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타!”전 애인을 마주할 때 누군들 화려하게 빛나고 싶지 않을까?하지만 오늘 밤 룸에서 그와 마주친 광경은 더할 나위 없이 초라하고 난감했다!송재이는 입술을 꼭 깨물고 휴대폰 앱을 열어서 콜택시를 부르려고 했는데 설영준이 차에서 내려와 긴 다리를 내뻗으며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그의 손에 검은색 큰 우산이 쥐어져 있었다.계단 위에 서 있는 송재이는 그를 내려다보고 있지만 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압적인 포스에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이때 설영준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말 안 들어?”거만하기 짝이 없고 뭐든 당연하다는 듯한 이 말투, 그녀는 순간 두 사람이 이별하지 않은 줄로 착각할 뻔했다.다만 송재이는 곧바로 사색을 가다듬고 말했다.“설영준 대표님, 고맙지만 나 혼자 할게...”“새 남친 별로던데.”설영준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야유의 뜻이 살짝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의 다른 한 손을 잡아당겨 그녀를 더 가까이 다가오게 했지만 송재이는 여전히 머리를 높이 들었다.“나랑 헤어지고 결혼한다더니 고작 저딴 자식을 찾아? 재이 쌤, 누굴 엿 먹이는 거야?”설영준은 지금 그녀를 비웃기도 하고 방금 그녀의 처지를 비웃기도 했다.송재이의 얼굴이 처참할 정도로 벌게졌다.그녀는 발끈 화내며 설영준을 째려봤다.“내가 어떤 사람을 찾든 너랑 뭔 상관인데? 오늘 밤에 네가 여기 있단 걸 알았다면 오지도 않았어.”그녀는 지민건에게 속아서 이리로 왔다.다만 이 점은 굳이 설영준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설영준이 그녀의 손목을 확 잡고 두말없이 차 쪽으로 끌어갔다.아무리 몸부림을 쳐봐도 그에겐 전혀 소용이 없었다.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조수석에 앉아 있었고 설영준은 안으로 차 문을 잠가버렸다.설영준은 줄곧 차가운 표정이었다.매번 이런 표정을 지
지금 이건 그와 주현아가 곧 결혼할 사이라는 걸 묵인한 셈이다.그들과 같은 상류층 사람들은 결혼과 연애에 관해서 자신만의 기준과 계획이 다 있다. 송재이는 이 점을 매우 잘 안다.그럼에도 직접 그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마음이 복잡미묘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그녀가 아무 말 없자 설영준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 했는데 이번에 송재이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옆으로 피했다.“주현아 씨는 괜찮을지 몰라도 난 아니야.”송재이는 다시 한번 고개 들어 여전히 눈물을 머금고 있었지만 말투는 좀 전보다 단호하고 강인했다.“설영준 대표님, 난 어릴 때부터 엄한 가정에서 자라서 누군가의 내연녀로 살 순 없어. 그런 여자를 원하는 거라면 사람 잘못 찾았어.”그녀는 이를 악물고 설영준이 차마 입밖에 내뱉지 못한 말을 거침없이 쏟아부었다.그는 지금 송재이의 몸에 대해 조금 관심이 남아 있다. 그가 완전히 질리기 전까지 송재이는 도둑고양이처럼 숨어 지내야 한다.이게 바로 그와 함께한 대가이다.전에는 그의 ‘스폰’이 필요했다. 엄마의 병을 치료해야 하니까. 다만 이젠 유일한 아픔인 엄마가 없으니 송재이는 더는 저 자신을 속상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평소에 고양이처럼 얌전하던 그녀가 대뜸 발톱을 드러내자 설영준은 마냥 흥미진진할 따름이었다.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진한 미소를 보이더니 목소리를 한껏 내리깔았다.“내연녀는 하기 싫고 떳떳하게 여자친구가 되고 싶은 거야? 지민건의 여자친구?”그는 또다시 송재이를 비꼬았다. 결국 골랐다는 게 고작 그런 쓰레기냐고 비아냥댔다.송재이는 그런 설영준이 너무 이상했다. 이번엔 그녀도 발끈한 게 아니라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내 눈엔 너나 그 인간이나 다 거기서 거기야. 아무도 선택 안 해.”그녀는 화난 기색 없이 진지하게 말했다.“여자는 다양한 남자를 만나보는 것도 일종의 성장 경험이야. 너희들을 떠난 건 내게 해탈이지. 난 아직 젊고 예뻐. 성격도 나쁘지 않고. 이런 내가 나한테 꼭 어울리는 진짜 인연을 못 찾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