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이는 설영준의 키스에 점차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그의 품에 안긴 그녀는 긴장이 풀리면서 잠들어버렸다.설영준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고 안방으로 들어간 뒤 침대에 눕혔다.그리고 침대에 앉아 물끄러미 잠든 송재이의 모습을 복잡한 감정이 담긴 시선으로 보았다.밤이 깊어졌다. 설영준도 송재이의 곁에 누웠다. 그는 다른 행동은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그녀의 곁에 누워있을 뿐이다.그날 밤, 두 사람은 그렇게 나란히 누워 잤다. 설영준은 마음이 편안했다.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송재이를 뼛속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하지만 송재이의 아픔과 두려움도 알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 창문 커튼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에 송재이는 천천히 눈을 떴다. 숙취 탓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고개를 돌리니 자신의 옆에서 자는 설영준을 발견했다. 어젯밤의 기억이 점차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볼이 빨갛게 물들고 가슴이 쿵쾅쿵쾅 뛰면서 심란하게 했다.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 뒤 설영준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녀는 지금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창가로 온 그녀는 커튼을 열었다. 따스한 햇볕이 그녀의 온몸으로 쏟아져 내리고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쉬면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보려고 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와 설영준의 사이에 이미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그녀는 결정해야 하고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설영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다소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받았다. 이내 그녀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도경욱의 집에 화재가 일어났다는 소식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비록 도경욱을 볼 때마다 심란하긴 했지만, 화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으니 그녀는 여전히 그가 걱정되고 초조했다.“네? 화재라니요... 누군가 일부러 불을 지른 건가요?”송재이는 다소 믿기지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고 의문이 생겨나면
송재이의 시선이 도경욱에게 닿았다. 너무도 심란했다.비록 도경욱을 미워하고 있긴 했지만,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가슴이 아프면서 불쌍하게 느껴졌다.짙은 한숨을 내쉰 그녀는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때 도경욱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재이야...”도경욱은 힘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의 눈빛은 막막하면서도 초조함이 담겨 있었다.“재이 맞니?”송재이는 가슴이 조여왔다. 도경욱이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이름부터 부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그녀는 두 손을 꽉 마주 잡으며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말을 하려고 했다.“네, 맞아요. 저 재이예요. 아빠가 지금 계신 곳은 병원이고 집에 불이 났어요.”도경욱의 눈빛에 두려움이 가득해졌다. 버둥거리며 일어나 앉으려고 했지만 허약해진 탓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움직일 수 없었다.“화재라니... 나 때문이니? 누군가 나한테 앙심을 품고...”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도경욱이 이렇듯 빨리 진상을 추측할 줄은 몰랐다. 침묵하던 그녀는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 누군가 고의로 불은 지른 거라고 했어요. 경찰이 지금 조사하는 중이라고 해요.”도경욱은 다소 절망적인 눈빛이었다. 그는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언젠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예상했지. 다 내 잘못이다. 내가 업보를 만든 거야...”송재이는 형언할 수 없는 심란함을 느꼈다. 도경욱이 바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도경욱을 보니 머릿속마저도 복잡했다.“아빠는... 아빠는 과거에 한 잘못을 전부 만회할 생각이 있으세요?”도경욱은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리곤 눈을 감았다.“그래. 과거에 한 잘못을 전부 만회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거다.”그녀는 도경욱이 이렇듯 빠르게 대답할 줄은 몰랐다.속으로 다소 희망을 품기도 했다. 어쩌면 이것이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도경욱이 과거의 잘못을 만회
전화 건너편에서 설영준은 무거운 목소리로 설명했다.“재이야, 난 네가 휘말리는 게 싫어서 말 안 했던 거야. 그게 너한테 무슨 의미인지 잘 아니까. 네가 쓸데없는 일로 골치 아파지는 건 싫었어.”송재이는 모순적인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크게 심호흡하고 난 그녀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말했다.“영준 씨의 뜻은 알겠어요. 하지만 저는 이미 휘말린 것 같은데요. 저한테도 진실을 알 권력이 있어요.”한숨을 내쉰 설영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이해해. 내가 다 설명해 줄게. 근데 전화로 할 말은 아니야. 우리 만나서 얘기할까?”송재이는 잠깐 고민하다가 허락했다.전화를 끊은 다음에도 그녀는 한참이나 진정하지 못했다. 이번 일로 그녀와 설영준의 사이를 비롯한 많은 것이 바뀔 것 같았기 때문이다.카페에서 설영준과 송재이는 마주 앉아 있었다. 설영준은 미안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네가 어떤 마음으로 나왔는지 잘 알아. 궁금한 거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봐. 나는 제민에서 집 지을 줄 모르고 토지를 매입했어. 그리고 내가 알게 됐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때였어.”송재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런데 왜 계속 가만히 있었어요? 얼마든지 공사를 멈출 수 있었잖아요.”이때 송재이의 핸드폰이 울렸다. 도정원의 전화였다.수락 버튼을 누르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재이야, 큰일 났어! 아버지가... 아버지가 자살 시도를 했어!”송재이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부리나케 몸을 일으키면서 설영준에게 말했다.“지금 당장 병원에 가야겠어요! 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설영준은 안색이 확 변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부랴부랴 병원으로 향했다.차 안에서 송재이는 마음이 아주 무거웠다. 이번 일이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녀는 당당히 직면해야 한다. 설영준과 제민그룹 사이의 분쟁은 물론 도경욱의 목숨도 엮여 있었다.병원에 도착한 다
설영준이 말을 마치자마자 송재이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익명으로 온 메시지였다. 메시지를 확인한 송재이는 숨이 탁 막혔다.[진실을 알고 싶다면 병원 뒤뜰의 폐창고로 와요.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요. 영원히 속고 싶지 않다면요.]송재이는 주저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메시지는 함정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중요한 단서이기도 했다.그녀는 고개를 들며 설영준에게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저 화장실 다녀올게요. 여기서 기다려줘요.”송재이가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것을 보고, 설영준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몰래 쫓아가서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려고 했다.송재이는 혼자서 병원 뒤뜰의 폐창고로 갔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고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창고 문을 열어보자, 어두운 조명 아래에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누구세요? 왜 저를 부르신 거예요?”상대는 송재이의 목소리를 듣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상대는 다름아닌 서도재였다.송재이는 의심스러우면서도 놀라웠다. 서도재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이해가 안 되는 한편 그의 의도가 궁금하기도 했다.그는 설영준의 사업적 라이벌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이가 안 좋았다. 그녀도 휘말린 적 있기에 잘 알고 있었다.“전무님이 어떻게 여기 있어요?”송재이는 경계하는 목소리로 말하며 뒷걸음질 쳤다. 서도재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다.반대로 서도재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목소리에는 위협으로 가득했다.“오래 기다렸어요. 재이 씨, 설마 아직도 설영준의 말을 믿고 있어요? 거짓말을 얼마나 잘하는 사람인지 알고 있으면서도?”송재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은 서도재의 말에 신뢰가 없었다.“전무님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영준 씨를 해칠 생각이라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서도재는 피식 웃으며 주머니에서 종잇장을 꺼냈다.“이거 봐요. 이 서류가 답을 알려줄 거예요. 설영준이
서도재는 괴이한 미소를 지었다. 뒤로 몇 발짝 물러난 그는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을 끌어냈다. 상대는 다름 아닌 도정원이었다.도정원은 입에 테이프를 붙이고 있었다. 손발이 단단히 묶인 그는 두려움에 떠는 눈빛으로 송재이를 바라봤다.“도 전무님?”송재이는 서도재와 도정원을 번갈아 쳐다봤다. 기분은 아주 복잡했다. 이때 서도재가 날카로운 비수를 그의 목에 가져다 댔다.“재이 씨가 생각보다 똑똑하네요. 하지만 진실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에요.”설영준은 예리한 눈빛으로 침착하게 말했다.“억울한 사람한테 이러지 마.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직접 얘기해.”“드디어 나타났네. 형이 재이 씨 따라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 정도 수작질은 나한테 통하지 않아.”송재이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영준이 몰래 그녀를 지켜주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설영준에 대한 신뢰는 더욱 깊어졌다.“원하는 게 뭐예요?”송재이는 어떻게든 말을 걸어서 서도재의 주의력을 분산하려고 했다. 서도재는 광기 서린 표정으로 말했다.“간단해요. 저는 설영준의 패배를 원해요. 모든 것을 잃었으면 좋겠어요.”설영준은 주먹을 꽉 쥐면서 힘 있게 말했다.“서도재, 너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괜한 사람 괴롭히지 말고 그만해.”이때 경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은 포위됐다! 당장 무기를 내려놓고 인질을 내보내!”서도재는 안색이 확 변했다. 경찰이 벌써 찾아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는 더욱 흥분하면서 도정원의 목에 상처를 냈다.“오지 마! 가까이 오면 죽여버릴 거야!”설영준과 송재이는 너무 긴장되었다. 이런 식의 압박은 서도재를 더욱 자극할 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송재이는 크게 심호흡하며 무엇이라도 해보려고 했다.“전무님은 진실을 밝히고 싶지 않아요? 도 전무님을 풀어주고 저랑 얘기해요, 네?”서도재는 주저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해관계를 따지고 있는 듯했다.이때 도정원이 벗어나려는 듯 강렬하게 발버둥 쳤다. 깜짝 놀란 서도재는 실수로 그의 목을
취조실의 조명은 아주 어두웠다. 그만큼 분위기도 무거웠다.설영준과 송재이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침묵은 갑작스러운 전화벨 소리가 울리면서 깨졌다.설영준은 핸드폰을 꺼내서 확인했다. 익명으로 온 메시지가 있었다.[사람을 살리고 싶으면 항구의 폐기된 유람선으로 와. 신고는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후회하게 만들어줄 테니까.]설영준은 긴장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서 송재이에게 말했다.“재이야, 이 문자 거짓말 아닌 것 같아. 빨리 가봐야겠어.”문자를 확인한 송재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이대로 찾아가는 건 위험해요. 함정일 수도 있잖아요.”설영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송재이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도정원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위험한 일인 거 알아. 근데 도 전무님이 그곳에 있을 수도 있는 거라면 가만히 있을 수 없어.”송재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확고하게 말했다.“그래요, 저도 같이 가요. 대신 준비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요.”두 사람은 경찰서에서 나가 항구로 가기 시작했다.저녁의 항구는 유난히 고요했다. 폐기된 배는 마치 커다란 그림자처럼 바닷가에 있었다.설영준과 송재이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시선은 어둠 속에서 인기척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이때 그들은 동시에 미약한 신음을 들었다. 아주 깊은 곳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소리를 따라가니 의자에 묶인 도정원이 보였다. 낯선 남자는 그의 머리를 향해 총기를 겨누고 있었다.몸을 돌린 남자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역시 왔구나. 용기는 가상해. 지능은 좀 떨어지는 것 같지만.”설영준은 차가운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인질을 당장 풀어줘.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낯선 남자는 피식 웃으며 광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간단해. 설영준, 회사를 포함한 너의 모든 재산을 나한테 넘겨줘. 그러면 이 사람을 풀어줄게.”송재이는 화난 표정으로 외쳤다.“말도 안 돼요! 저희는 절대 굴복하지 않을 거예요!”
그는 차마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설영준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위로했다.“괜찮아요. 이제 다 지난 일이에요.”송재이도 곁에서 말을 보탰다.“맞아요. 저희가 있잖아요. 이제 괜찮아질 거예요.”구급차에서 세 사람은 이제야 약간 안심된 표정을 지었다.이때 설영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고 난 그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뭐? 확실해?”그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도정원과 송재이 중에서 도정원이 먼저 물었다.“영준 씨,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설영준은 한숨을 쉬며 천천히 말했다.“방금 소식을 받았는데, 도씨 가문 저택 토지의 소유권이 확실히 저한테 있대요.”도정원과 송재이는 넋이 나갔다. 송재이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물었다.“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영준 씨가 왜 그걸 가지고 있어요?”설영준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사실 그 토지는 내 아버지 명의로 있었어. 후에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도씨 가문에 가게 됐대. 토지를 회수할 생각은 나한테도 있었어. 근데 그게 잘 안됐었거든.”송재이는 창백한 안색으로 말했다.“영준 씨 설마 토지를 회수하려고...”그녀는 놀랍기도 하고 배신감이 들기도 했다. 눈빛은 의혹에서부터 분노로 변했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저희한테 다가와서 도와준 이유가 그 땅을 회수하기 위해서였어요?”설영준은 황급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아니야, 오해했어. 토지를 회수하고 싶었던 건 사실이지만 너희를 추호도 이용할 생각은 없었어. 난 그런 식으로 목적을 이루는 사람이 아니야.”송재이는 흥분한 듯 언성을 높였다.“그럼 지금 상황 어떻게 설명할 건데요? 도 전무님을 구하고 나서 도씨 가문의 라이벌이라고 인정하는걸, 제가 어떻게 받아들이냐고요?”“진정해. 너도 힘든 거 잘 알아. 근데 난 진심으로 도 전무를 구하고 싶었던 거야. 빼앗긴 자산은 법적으로 해결할 생각이었어. 이런 식이 아니라.”곁에서 듣고 있던 도정원도 복잡한
송재이는 소파에 앉은 채 부정적인 생각에 휩싸였다. 너무나도 외롭고 무기력했다.이때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설영준에게서 문자가 왔다. 문자 내용은 간결하면서도 단도직입적이었다.[영상 메시지 받은 거 알아. 나한테도 설명할 기회를 줘.]송재이는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 몰라서 한참 방황했다. 그녀는 결국 심호흡하며 이렇게 타자했다.[좋아요. 설명 들어볼게요.]몇 분 후, 설영준이 그녀의 집 앞에 나타났다. 그는 피곤하고도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송재이가 문을 열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애매한 분위기가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들어와요.”송재이의 목소리는 아주 태연했다. 그러나 눈빛은 분명히 경계하고 있었다.안으로 들어간 설영준은 주변을 빙 둘러봤다. 그리고 송재이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그 영상 때문에 놀란 거 알아. 근데 네가 본 건 사실이 아니야.”송재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냉정하게 물었다.“그럼 사실은 뭔데요?”“하아... 그 직원이 책임진 프로젝트가 실패해서 회사에 큰 손실을 입혔어. 그 뒤로도 나는 몇 번이나 기회를 줬어. 하지만 변화는 없었어. 해고는 나한테도 힘든 결정이야. 회사와 다른 직원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송재이는 주저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마음에 걸린 것은 떨어지지 않았다.“그렇다고 해도 너무 잔인한 해고였어요.”“인정해. 내가 너무 단도직입적이었어. 근데 나도 사정이 있었어. 감정과 책임 사이에서 평형을 찾아야 했다고.”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아주 팽팽했다. 송재이는 모순적인 기분이 들었다. 설영준의 말을 믿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머릿속에서 영상이 지워지지 않았다.그녀가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핸드폰이 울렸다. 긴급 뉴스 알림이었다.[긴급 뉴스! 제민그룹 저택 토지 분쟁 소송으로 이어져... 설영준 대표 부정당한 수단을 쓴 것으로 밝혀졌다?!]송재이와 설영준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송재이는 놀란 눈빛으로 물었다.“영준 씨, 이건...?”설영준의 안색은 아주 어두웠다. 그는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