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감정은 마음속에 묻어둘 뿐 결실을 보기 어려웠다.물론 박윤찬도 잘 알고 있다. 송재이는 설영준의 여자이며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사실 처음부터 그에게 송재이를 좋아할 자격은 주어지지 않았다.박윤찬은 카페에 앉아 이따금 창밖을 내다보았다.화창한 날씨에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날이지만 기분은 괜스레 씁쓸하고 울적했다.그러다 송재이를 발견하는 순간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택시에서 내린 그녀의 주변으로 강한 바람이 불자 하얀 원피스가 펄럭거렸고, 서둘러 치맛자락을 부여잡으면서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고작 단순한 동작에도 침울했던 마음이 단번에 힐링 되는 듯싶었지만 어디까지나 한순간에 불과했다.송재이는 회전문을 통과해 카페로 들어섰고, 구석에 앉아 있는 박윤찬을 한눈에 발견했다.옥 펜던트의 의미를 파악하기 전까지만 해도 줄곧 박윤찬을 친구로 여기고 상대방도 같은 마음일 거로 생각했다.그녀는 뻔히 알면서 모른 척할 수 없는지라 비로소 허심탄회하게 터놓는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정교한 선물 상자는 다시 주인의 품으로 돌아갔고, 송재이는 박윤찬의 앞에 천천히 내밀었다.“물건이 너무 귀해서 다시 돌려줄게요.”어차피 예상했던 일이라 박윤찬은 놀라울 정도로 무덤덤했다. 그리고 잔에 담긴 커피를 휘저으며 나지막이 물었다.“왜요?”“알잖아요.”송재이가 대답했다.“워낙 귀한 옥 펜던트이다 보니 저보다 더 어울리는 분한테 줬으면 좋겠어요.”물론 가격이 비싸서 귀하다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이제 그의 마음까지 거절하겠다는 사실을 공식 선언한 셈과 다름없었다.박윤찬은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미소를 지으며 선물 상자를 받아들이고 무심하게 말했다.“그래요.”송재이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박윤찬의 표정을 발견했지만 마음을 받아줄 상황이 아니었다.“변호사님이랑 류지안 씨가 다시...”“우린 이미 끝난 사이죠.”박윤찬이 불쑥 끼어들었다.착한 사람끼리 만난다고 해서 끝까지 행복할 거라는 보장은 없
“윤찬 씨 생각해?”휴대폰 너머로 설영준은 송재이의 생각을 훤히 꿰뚫어 본 듯싶었다.그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갑작스러운 질문에 송재이는 제 자리에서 넋을 잃고 말았다.“응?”사실 미처 반응하지 못해 무의식중으로 되물은 거였지만 설영준에게는 제 발 저린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이내 이를 꽉 악물었다.그는 전화를 걸기 전까지만 해도 화를 내면 안 된다고 스스로 다독였다.어쨌거나 따지고 보면 이건 송재이의 잘못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박윤찬이 그녀를 좋아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받은 옥 펜던트이지 않은가?게다가 옥 펜던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이제 물건을 다시 돌려줬으니 사실 그녀의 마음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그러나 설령 그를 좋아한다고 해도 친구의 고백은 쉽게 잊히는 게 아니었다.송재이를 향한 박윤찬의 마음은 일찌감치 눈치챘지만 여태껏 까밝히지 않은 이유도 바로 후환이 두려워서였다.만약 그녀가 알게 된다면 무의식중이라도 상대방을 신경 쓰기 마련일 테니까.“오늘 몇 시 퇴근이야? 데리러 갈게.”설영준이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차분한 말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송재이는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퇴근 시간을 알려주고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했다. 둘 다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지라 어차피 길게 얘기해봤자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컸다.저녁 6시쯤 건물 밖으로 나오자 길 건너편에 멈춰 있는 설영준의 차가 보였다.송재이를 발견한 그는 차 문을 열고 내려와 손을 흔들었다.그녀는 무의식중으로 주변을 살피고 나서야 길을 건너 설영준의 앞으로 재빨리 걸어갔다.설영준의 눈살이 잔뜩 찌푸려졌다.“다른 선생님의 눈에 띌까 봐 걱정돼?”그가 이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일 줄 몰랐던 송재이는 즉시 부인했다.“아니야.”설영준은 콧방귀를 뀌더니 돌아서서 차 문을 열었다.그리고 둘 다 차에 타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이제 우리가 무슨 관계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설령 숨기려고 해도 이미 늦었어.”지난번에 설영
산에 오르니 역시나 쌀쌀했다. 두꺼운 외투를 입었음에도 송재이는 두 손으로 옷을 단단히 여미었다.설영준은 그녀가 추워한다는 것을 눈치챈 듯 손을 뻗어 자연스럽게 품에 끌어안았다.두 사람을 제외하고 산에 다른 커플도 군데군데 보였다. 송재이는 그들을 훑어보다가 다시 설영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순간, 이루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밀려왔다. 그동안 좋아하는 사람과 여느 커플처럼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어쩌면 가장 대중적이고 무난한 생활이야말로 영원한 사치일 줄 알았지만 지금은...그녀는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무슨 생각해?”설영준은 송재이의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고 넌지시 물었다.이내 코를 훌쩍이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대답이 들려왔다.“응? 아니야.”설영준이 피식 웃었다.“설마 별을 처음 보는 건 아니겠지?”이번에 송재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당연하지. 어렸을 때 자주 봤어.”어린 시절을 언급하는 송재이의 말에 설영준은 흠칫 놀라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옛날 일을 자주 얘기하는 편은 아니잖아.”뜻인즉슨 알려 줬으면 한다는 건가?송재이는 그동안 설영준이 자신의 과거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녀도 먼저 언급하지 않았고, 지금처럼 흥미진진한 반응을 보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송재이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그제야 대답했다.“어렸을 때 엄마가 살아계실 적...”단 한 마디로 설영준은 그녀가 왜 말을 아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왜냐하면 어머니와 관련된 일이었고, 어머니라는 존재는 곧 송재이의 아킬레스건이기 때문이다.“매년 여름방학이 되면 엄마는 날 데리고 시골로 가서 피서했는데 단순한 일상이 때로는 지루하게 느껴졌어. 낮에는 엄마를 따라 강에 가서 물고기를 잡았고, 밤에는 지붕에 앉아 별을 봤는데 시골은 공기가 워낙 맑아서 미세먼지 따위 없었기에 별이 엄청 잘 보였어. 엄마는 성격이 좋을뿐더러 박학다식한 편이라 별을 보면서 이
송재이가 이원희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녀는 여전히 학교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우선 그녀가 가장 조심해야 할 건 무엇일까?송재이와 문예슬은 이미 완전히 사이가 틀어진 사이였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접점이 생길지는 송재이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송재이는 이원희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네, 조심할게요.”이원희는 진심으로 송재이가 걱정돼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영준을 갖고 싶어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던 문예슬이 완전히 본모습을 드러냈으니 말이다.설영준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원희의 호기심이 다시 발동했다.“지금 설 대표님이랑은 잘 지내고 계시죠?”며칠 전, 설영준과 함께 언덕 위에서 별구경을 했던 그 밤이 송재이에게는 아주 특별했다. 잠시 입술을 깨물던 송재이가 입을 열었다.“저랑 영준 씨... 정말 잘 지내죠.”설영준이 송재이에게 얼마나 마음을 쓰는지 이원희는 다 알아볼 수 있었다.특히 송재이가 구치소에 갇혔을 때, 설영준은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다녔지만 뒤에서는 송재이를 빼 내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그와 박윤찬이 아니었다면 송재이가 그렇게 이른 시일 안에 구치소를 벗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다.송재이는 이미 문예슬이 다시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것에 대해 각오를 하고 있었다. 역시나 하루가 지나자 문예슬이 점심 무렵에 건물 아래에 와 있었다.“재이야, 시간 괜찮아? 같이 점심이라도 먹으러 갈까?”지금 송재이는 문예슬을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이제 송재이는 억지웃음을 지으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문예슬의 말을 듣는 순간, 표정을 굳힌 송재이가 그 자리에서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니, 싫어. 약속이 있어서.”송재이가 자신을 불편해한다는 것을 뻔히 보아낼 수 있었지만 문예슬은 여전히 얼굴에 철팔을 깔고 뻔뻔하게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송재이는 자동반사적으로 문예슬의 손을 뿌리쳤다.“이미 약속이 있어서, 미안해.”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는 송재이의 말투와 표정
송재이 역시 그 자리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그녀가 건물 1층으로 내려온 이유도 식사를 위해서였다. 다만 중간에 문예나라는 방해물이 등장해 불쾌한 일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금방 잊어버렸다.근처 식당으로 가 밥을 먹던 중 우연히 동료 두 명을 만났다.평소에 그다지 친하게 지내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함께 같은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하며 꽤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송재이의 기분은 문예슬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송재이와 헤어진 후, 문예슬은 직접 차를 몰고 남도 시내를 쭉 돌아다녔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는 못 돌아갈 것 같았다.지난번에도 설영준의 지사에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한 후로 다시 가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문예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민효연....민효연에게서 온 메시지를 받은 설영준은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아직 그 둘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건 아니었지만 설영준에게서 민효연은 이미 믿음을 잃은 지 오래였다.민효연이 또 무슨 일로 자신을 찾는지 설영준은 알 수 없었다.역시나 민효연에게서 온 메시지가 심상치 않았다.“설 대표, 재이 씨랑 헤어졌어? 남도로 출장 왔는데 재이 씨가 박윤찬 차에 타는 걸 봐서. 두 사람이 막 웃고 떠드는 게 엄청 친해 보이더라. 재이 씨는 남녀관계에 엄청 개방적인 편이신가 봐. 대표님이랑 박윤찬이 절친이라는 걸 뻔히 아는 사람이 두 사람 사이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왔다 갔다 하잖아. 내가 재이 씨를 너무 과소평가했나?”이 말은 마치 송재이에게 “줏대 없는 여자”라는 꼬리표를 직접 단 것과 다름없었다.설영준이 빠른 속도로 답장했다.“안 헤어졌습니다. 재이가 윤찬이 차에 탔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고요.”이 말의 숨겨진 뜻을 해석해 보자면 송재이는 아직 내 사람이니 민효연이 자신의 앞에서 그녀의 험담을 더 늘어놓는 것은 무례한 일이라고 경고 중이었다.민효연은 지금 설영준이 송재이를 감싸주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설영준은 자신의 소유물을 항상 지나칠
그 순간, 문예슬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더 날아왔다.“대표님, 사실 저도 다른 의도는 없어요. 우리에게는 설영준이라는 공공의 적이 있잖아요. 우리가 손을 잡아야 서로에게 제일 큰 이득을 줄 수 있다고요. 저는 지금 협박하는 게 아니라 협업만이 우리에게 최선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은 겁니다...”민효연은 뒤의 내용까지 읽어내릴 정신이 없었다.평생 누군가에게 협박당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민효연이었다. 하지만 이 문예슬은...민효연의 손이 절로 천천히 굽어들며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상대에게 약점을 잡혀버린 지금, 무턱대고 감정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내가 뭘 더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야?”민효연은 가까스로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문예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휴대폰 화면을 보고 있던 문예슬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민효연의 문자에 답장을 보내지는 않았다.문예슬은 그저 이런 식으로 민효연을 압박하고 싶었다. 둘의 관계에서 누가 갑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문예슬에게 이런 사진 있는 이상, 민효연은 절대 그녀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민효연은 문예슬에게서 아무런 답장을 받을 수 없었다.그녀도 문예슬의 의도를 알아챘다.하지만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듯한 기분은 정말이지 불쾌했다.민효연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그는 몸을 뒤로 기대며 가늘게 실눈을 떴다.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져야만 한다.곰곰이 생각하던 민효연의 결론은 이러했다. 설영준을 증오하는 것은 맞지만 문예슬 같은 사람에게 휘둘릴 바에는 차라리 더 강력한 권력과 힘을 가진 사람에게 기대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사실 문예슬과 비교했을 때, 민효연은 설영준을 더 믿고 있었다.생각을 마친 그녀는 차키를 들고 곧장 설영준의 회사로 향했다.설영준도 민효연이 자신을 찾아온다는 소식에 조금은 놀랐다.하지만 직감적으로 중요한 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민효연이 일관되지 못하는 태도를 보였던 탓에 그녀는 설영준과 민효연은
박윤찬이 돌아왔을 때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서로 대화가 아주 잘 통하는 송재이와 성수연의 모습을 발견했다.박윤찬이 돌아온 것을 확인하자 둘의 미소가 금세 사라졌다.그 모습에 박윤찬은 그 둘이 분명 자신의 얘기를 나누고 있었으리라 확신했다.박윤찬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내 얘길 하고 있었던 거라면 그냥 앞에서 하죠?”두 사람은 눈빛을 교환하더니 성수연의 눈짓에 송재이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그제야 용기를 낸 송재이가 말했다.“사실 아주머니께서 윤찬 씨한테 물어보고 싶으셨던 게 있대요. 윤찬 씨랑랑 류지안 씨 다시 만날 가능성은 없는지 말이에요.”그 말에 잠시 놀란 박윤찬이 이내 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성수연은 지금 박윤찬의 결혼 문제가 급해 보였다.전에는 송재이를 며느리로 점찍어 두었지만 송재이에게서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류지안에게 관심을 돌렸다.박윤찬이 힘없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저랑 지안이는 이미 끝났다고...”박윤찬은 말하던 도중 성수연의 얼굴에 서서히 드러나는 자책과 슬픔의 감정을 발견했다. 또 저 표정이었다.박윤찬에게는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계산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이 식사는 전체적으로 봤을 때, 꽤 즐거운 편이었다.모두가 솔직한 얘기를 나눌 만큼 송재이나 박윤찬도 더는 서로를 신경 쓰지 않았다.성수연을 집까지 데려다준 후 박윤찬은 다시 차로 송재이까지 데려다주었다.돌아가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어색한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앞에 신호등이 나타나자 박윤찬은 무심코 송재이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우리 엄마는... 신경 쓰지 마요.”송재이 역시 함께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요, 아주머니 귀여우신데요, 뭘.”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아마도 정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성수연이 송재이를 좋게 보고 있는 것처럼 송재이도 성수연을 좋아하고 있었다. 둘은 시어머니와 며느리
그녀의 교육방식은 생모와 완전히 달랐다.오서희는 설영준에게 상업적 능력을 더 강조해왔고 그가 가업을 이어받아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길 원했다.시간이 지나며 설영준도 점차 성장했고 그러던 중 오서희의 다른 모습도 알게 되었다.오서희는 설씨 가문의 회사에 아주 강한 통제력을 행사하고 싶어 했고 모든 결정적인 사안에 어떻게든 자신의 영향을 받게 하려 애썼다.설경철 역시 오서희의 영향 아래, 점차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업가도 변해가기 시작했다.회사는 그들의 손에서 점차 따뜻한 인간미를 잃어갔다.가족회의에서 설경철은 오서희의 몇 가지 결정들을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규탄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오서희에게 어쩌면 전에 없던 위협으로 다가온 것일지도 모른다.그녀는 점점 더 적극적으로 설영준을 완전히 통제할 기회를 엿봤다.그러던 바로 그때, 설경철이 갑자기 설씨 가문의 모든 사업을 공식적으로 설영준에게 넘기고 자신은 영국에 이민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돌발적인 결정으로 권력을 잃게 된 오서희는 마치 자신이 발붙일 곳을 빼앗긴 듯한 배신감에 휩싸였지만 그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비록 그녀에게는 친정에서 물려받은 유산이 남아있었지만 그동안 설씨 가문을 위해 열심히 일해온 자신이 이렇게 빈손으로 남겨졌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게다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자식도 낳지 못한 탓에 여생 동안 오서희의 부귀영화는 모두 설영준의 손에 달려있었다.박윤찬의 말을 다 들은 송재이는 오서희가 왜 처음부터 자신과 설영준의 관계를 반대해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오서희가 그토록 가문과 가문의 지위를 중요하게 여겼는지도 알게 되었다. 단지 명문 가문 때문이 아니라 설영준이 부와 능력을 겸비한 여자를 만나길 원했던 것이다.설씨 가문을 더 강하게 만들어줌으로써 자신의 안전도 보장될 수 있는 그런 가문 말이다.송재이가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서서히 많은 일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전에 경주에 있을 때, 둘은 서로 만나는 것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는 송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