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밤이 되었다.아까 레스토랑에서 성수연과 옥 펜던트 사건 때문에 송재이는 딴생각에 정신이 팔려 입맛이 별로 없었다.두 사람 모두 배불리 먹은 건 아닌지라 이제 슬슬 허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 한 시라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설영준은 뒤돌아서 계단으로 올라가는 송재이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기분이 울적한 탓에 그녀가 말을 섞기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강제로 돌려세웠다.송재이는 계단에 선 덕분에 설영준과 키가 비슷하고,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이때,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야식 만들어줄까?”“아니...”“같이 도와줘.”그리고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1층 주방으로 끌고 갔다.방금 외출했다가 돌아온 설도영은 집안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이내 침실로 가서 샤워하고 다시 내려왔는데, 그제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다.비록 평소에도 설영준과 송재이는 과묵한 편에 속하지만 지금처럼은 아니었다.그는 거실에 앉아 아까 사 온 과자를 먹으며 두 사람을 힐끔힐끔 관찰하기 바빴다.결국 참지 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형! 선생님, 혹시 싸우셨어요?”옆에 앉아 책을 보던 송재이는 그의 말에 고개를 들었고, 곧바로 호기심 어린 눈동자와 마주쳤다.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시원한 답변보다 침묵이 더 무서운 법이다.설도영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갔다.설영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국수를 삶고 있었다.저기압이 따로 없는 분위기에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다가갔다.“형, 선생님이랑 무슨 일이 있었어요?”설영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힐긋 쳐다보자 설도영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고, 이내 억지로 미소를 쥐어 짜냈다.“알았어요. 입 다물고 있으라면 조용히 해야죠, 뭐. 난 먼저 올라가서 쉴 테니까 야식은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돼요. 그럼 안녕!”말을 마치고 나서 눈치 빠르게 뒤돌아서 쏜
어떤 감정은 마음속에 묻어둘 뿐 결실을 보기 어려웠다.물론 박윤찬도 잘 알고 있다. 송재이는 설영준의 여자이며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사실 처음부터 그에게 송재이를 좋아할 자격은 주어지지 않았다.박윤찬은 카페에 앉아 이따금 창밖을 내다보았다.화창한 날씨에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날이지만 기분은 괜스레 씁쓸하고 울적했다.그러다 송재이를 발견하는 순간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택시에서 내린 그녀의 주변으로 강한 바람이 불자 하얀 원피스가 펄럭거렸고, 서둘러 치맛자락을 부여잡으면서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고작 단순한 동작에도 침울했던 마음이 단번에 힐링 되는 듯싶었지만 어디까지나 한순간에 불과했다.송재이는 회전문을 통과해 카페로 들어섰고, 구석에 앉아 있는 박윤찬을 한눈에 발견했다.옥 펜던트의 의미를 파악하기 전까지만 해도 줄곧 박윤찬을 친구로 여기고 상대방도 같은 마음일 거로 생각했다.그녀는 뻔히 알면서 모른 척할 수 없는지라 비로소 허심탄회하게 터놓는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정교한 선물 상자는 다시 주인의 품으로 돌아갔고, 송재이는 박윤찬의 앞에 천천히 내밀었다.“물건이 너무 귀해서 다시 돌려줄게요.”어차피 예상했던 일이라 박윤찬은 놀라울 정도로 무덤덤했다. 그리고 잔에 담긴 커피를 휘저으며 나지막이 물었다.“왜요?”“알잖아요.”송재이가 대답했다.“워낙 귀한 옥 펜던트이다 보니 저보다 더 어울리는 분한테 줬으면 좋겠어요.”물론 가격이 비싸서 귀하다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이제 그의 마음까지 거절하겠다는 사실을 공식 선언한 셈과 다름없었다.박윤찬은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미소를 지으며 선물 상자를 받아들이고 무심하게 말했다.“그래요.”송재이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박윤찬의 표정을 발견했지만 마음을 받아줄 상황이 아니었다.“변호사님이랑 류지안 씨가 다시...”“우린 이미 끝난 사이죠.”박윤찬이 불쑥 끼어들었다.착한 사람끼리 만난다고 해서 끝까지 행복할 거라는 보장은 없
“윤찬 씨 생각해?”휴대폰 너머로 설영준은 송재이의 생각을 훤히 꿰뚫어 본 듯싶었다.그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갑작스러운 질문에 송재이는 제 자리에서 넋을 잃고 말았다.“응?”사실 미처 반응하지 못해 무의식중으로 되물은 거였지만 설영준에게는 제 발 저린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이내 이를 꽉 악물었다.그는 전화를 걸기 전까지만 해도 화를 내면 안 된다고 스스로 다독였다.어쨌거나 따지고 보면 이건 송재이의 잘못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박윤찬이 그녀를 좋아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받은 옥 펜던트이지 않은가?게다가 옥 펜던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이제 물건을 다시 돌려줬으니 사실 그녀의 마음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그러나 설령 그를 좋아한다고 해도 친구의 고백은 쉽게 잊히는 게 아니었다.송재이를 향한 박윤찬의 마음은 일찌감치 눈치챘지만 여태껏 까밝히지 않은 이유도 바로 후환이 두려워서였다.만약 그녀가 알게 된다면 무의식중이라도 상대방을 신경 쓰기 마련일 테니까.“오늘 몇 시 퇴근이야? 데리러 갈게.”설영준이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차분한 말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송재이는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퇴근 시간을 알려주고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했다. 둘 다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지라 어차피 길게 얘기해봤자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컸다.저녁 6시쯤 건물 밖으로 나오자 길 건너편에 멈춰 있는 설영준의 차가 보였다.송재이를 발견한 그는 차 문을 열고 내려와 손을 흔들었다.그녀는 무의식중으로 주변을 살피고 나서야 길을 건너 설영준의 앞으로 재빨리 걸어갔다.설영준의 눈살이 잔뜩 찌푸려졌다.“다른 선생님의 눈에 띌까 봐 걱정돼?”그가 이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일 줄 몰랐던 송재이는 즉시 부인했다.“아니야.”설영준은 콧방귀를 뀌더니 돌아서서 차 문을 열었다.그리고 둘 다 차에 타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이제 우리가 무슨 관계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설령 숨기려고 해도 이미 늦었어.”지난번에 설영
산에 오르니 역시나 쌀쌀했다. 두꺼운 외투를 입었음에도 송재이는 두 손으로 옷을 단단히 여미었다.설영준은 그녀가 추워한다는 것을 눈치챈 듯 손을 뻗어 자연스럽게 품에 끌어안았다.두 사람을 제외하고 산에 다른 커플도 군데군데 보였다. 송재이는 그들을 훑어보다가 다시 설영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순간, 이루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밀려왔다. 그동안 좋아하는 사람과 여느 커플처럼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어쩌면 가장 대중적이고 무난한 생활이야말로 영원한 사치일 줄 알았지만 지금은...그녀는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무슨 생각해?”설영준은 송재이의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고 넌지시 물었다.이내 코를 훌쩍이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대답이 들려왔다.“응? 아니야.”설영준이 피식 웃었다.“설마 별을 처음 보는 건 아니겠지?”이번에 송재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당연하지. 어렸을 때 자주 봤어.”어린 시절을 언급하는 송재이의 말에 설영준은 흠칫 놀라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옛날 일을 자주 얘기하는 편은 아니잖아.”뜻인즉슨 알려 줬으면 한다는 건가?송재이는 그동안 설영준이 자신의 과거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녀도 먼저 언급하지 않았고, 지금처럼 흥미진진한 반응을 보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송재이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그제야 대답했다.“어렸을 때 엄마가 살아계실 적...”단 한 마디로 설영준은 그녀가 왜 말을 아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왜냐하면 어머니와 관련된 일이었고, 어머니라는 존재는 곧 송재이의 아킬레스건이기 때문이다.“매년 여름방학이 되면 엄마는 날 데리고 시골로 가서 피서했는데 단순한 일상이 때로는 지루하게 느껴졌어. 낮에는 엄마를 따라 강에 가서 물고기를 잡았고, 밤에는 지붕에 앉아 별을 봤는데 시골은 공기가 워낙 맑아서 미세먼지 따위 없었기에 별이 엄청 잘 보였어. 엄마는 성격이 좋을뿐더러 박학다식한 편이라 별을 보면서 이
송재이가 이원희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녀는 여전히 학교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우선 그녀가 가장 조심해야 할 건 무엇일까?송재이와 문예슬은 이미 완전히 사이가 틀어진 사이였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접점이 생길지는 송재이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송재이는 이원희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네, 조심할게요.”이원희는 진심으로 송재이가 걱정돼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영준을 갖고 싶어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던 문예슬이 완전히 본모습을 드러냈으니 말이다.설영준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원희의 호기심이 다시 발동했다.“지금 설 대표님이랑은 잘 지내고 계시죠?”며칠 전, 설영준과 함께 언덕 위에서 별구경을 했던 그 밤이 송재이에게는 아주 특별했다. 잠시 입술을 깨물던 송재이가 입을 열었다.“저랑 영준 씨... 정말 잘 지내죠.”설영준이 송재이에게 얼마나 마음을 쓰는지 이원희는 다 알아볼 수 있었다.특히 송재이가 구치소에 갇혔을 때, 설영준은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다녔지만 뒤에서는 송재이를 빼 내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그와 박윤찬이 아니었다면 송재이가 그렇게 이른 시일 안에 구치소를 벗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다.송재이는 이미 문예슬이 다시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것에 대해 각오를 하고 있었다. 역시나 하루가 지나자 문예슬이 점심 무렵에 건물 아래에 와 있었다.“재이야, 시간 괜찮아? 같이 점심이라도 먹으러 갈까?”지금 송재이는 문예슬을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이제 송재이는 억지웃음을 지으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문예슬의 말을 듣는 순간, 표정을 굳힌 송재이가 그 자리에서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니, 싫어. 약속이 있어서.”송재이가 자신을 불편해한다는 것을 뻔히 보아낼 수 있었지만 문예슬은 여전히 얼굴에 철팔을 깔고 뻔뻔하게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송재이는 자동반사적으로 문예슬의 손을 뿌리쳤다.“이미 약속이 있어서, 미안해.”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는 송재이의 말투와 표정
송재이 역시 그 자리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그녀가 건물 1층으로 내려온 이유도 식사를 위해서였다. 다만 중간에 문예나라는 방해물이 등장해 불쾌한 일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금방 잊어버렸다.근처 식당으로 가 밥을 먹던 중 우연히 동료 두 명을 만났다.평소에 그다지 친하게 지내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함께 같은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하며 꽤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송재이의 기분은 문예슬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송재이와 헤어진 후, 문예슬은 직접 차를 몰고 남도 시내를 쭉 돌아다녔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는 못 돌아갈 것 같았다.지난번에도 설영준의 지사에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한 후로 다시 가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문예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민효연....민효연에게서 온 메시지를 받은 설영준은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아직 그 둘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건 아니었지만 설영준에게서 민효연은 이미 믿음을 잃은 지 오래였다.민효연이 또 무슨 일로 자신을 찾는지 설영준은 알 수 없었다.역시나 민효연에게서 온 메시지가 심상치 않았다.“설 대표, 재이 씨랑 헤어졌어? 남도로 출장 왔는데 재이 씨가 박윤찬 차에 타는 걸 봐서. 두 사람이 막 웃고 떠드는 게 엄청 친해 보이더라. 재이 씨는 남녀관계에 엄청 개방적인 편이신가 봐. 대표님이랑 박윤찬이 절친이라는 걸 뻔히 아는 사람이 두 사람 사이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왔다 갔다 하잖아. 내가 재이 씨를 너무 과소평가했나?”이 말은 마치 송재이에게 “줏대 없는 여자”라는 꼬리표를 직접 단 것과 다름없었다.설영준이 빠른 속도로 답장했다.“안 헤어졌습니다. 재이가 윤찬이 차에 탔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고요.”이 말의 숨겨진 뜻을 해석해 보자면 송재이는 아직 내 사람이니 민효연이 자신의 앞에서 그녀의 험담을 더 늘어놓는 것은 무례한 일이라고 경고 중이었다.민효연은 지금 설영준이 송재이를 감싸주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설영준은 자신의 소유물을 항상 지나칠
그 순간, 문예슬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더 날아왔다.“대표님, 사실 저도 다른 의도는 없어요. 우리에게는 설영준이라는 공공의 적이 있잖아요. 우리가 손을 잡아야 서로에게 제일 큰 이득을 줄 수 있다고요. 저는 지금 협박하는 게 아니라 협업만이 우리에게 최선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은 겁니다...”민효연은 뒤의 내용까지 읽어내릴 정신이 없었다.평생 누군가에게 협박당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민효연이었다. 하지만 이 문예슬은...민효연의 손이 절로 천천히 굽어들며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상대에게 약점을 잡혀버린 지금, 무턱대고 감정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내가 뭘 더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야?”민효연은 가까스로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문예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휴대폰 화면을 보고 있던 문예슬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민효연의 문자에 답장을 보내지는 않았다.문예슬은 그저 이런 식으로 민효연을 압박하고 싶었다. 둘의 관계에서 누가 갑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문예슬에게 이런 사진 있는 이상, 민효연은 절대 그녀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민효연은 문예슬에게서 아무런 답장을 받을 수 없었다.그녀도 문예슬의 의도를 알아챘다.하지만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듯한 기분은 정말이지 불쾌했다.민효연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그는 몸을 뒤로 기대며 가늘게 실눈을 떴다.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져야만 한다.곰곰이 생각하던 민효연의 결론은 이러했다. 설영준을 증오하는 것은 맞지만 문예슬 같은 사람에게 휘둘릴 바에는 차라리 더 강력한 권력과 힘을 가진 사람에게 기대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사실 문예슬과 비교했을 때, 민효연은 설영준을 더 믿고 있었다.생각을 마친 그녀는 차키를 들고 곧장 설영준의 회사로 향했다.설영준도 민효연이 자신을 찾아온다는 소식에 조금은 놀랐다.하지만 직감적으로 중요한 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민효연이 일관되지 못하는 태도를 보였던 탓에 그녀는 설영준과 민효연은
박윤찬이 돌아왔을 때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서로 대화가 아주 잘 통하는 송재이와 성수연의 모습을 발견했다.박윤찬이 돌아온 것을 확인하자 둘의 미소가 금세 사라졌다.그 모습에 박윤찬은 그 둘이 분명 자신의 얘기를 나누고 있었으리라 확신했다.박윤찬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내 얘길 하고 있었던 거라면 그냥 앞에서 하죠?”두 사람은 눈빛을 교환하더니 성수연의 눈짓에 송재이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그제야 용기를 낸 송재이가 말했다.“사실 아주머니께서 윤찬 씨한테 물어보고 싶으셨던 게 있대요. 윤찬 씨랑랑 류지안 씨 다시 만날 가능성은 없는지 말이에요.”그 말에 잠시 놀란 박윤찬이 이내 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성수연은 지금 박윤찬의 결혼 문제가 급해 보였다.전에는 송재이를 며느리로 점찍어 두었지만 송재이에게서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류지안에게 관심을 돌렸다.박윤찬이 힘없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저랑 지안이는 이미 끝났다고...”박윤찬은 말하던 도중 성수연의 얼굴에 서서히 드러나는 자책과 슬픔의 감정을 발견했다. 또 저 표정이었다.박윤찬에게는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계산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이 식사는 전체적으로 봤을 때, 꽤 즐거운 편이었다.모두가 솔직한 얘기를 나눌 만큼 송재이나 박윤찬도 더는 서로를 신경 쓰지 않았다.성수연을 집까지 데려다준 후 박윤찬은 다시 차로 송재이까지 데려다주었다.돌아가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어색한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앞에 신호등이 나타나자 박윤찬은 무심코 송재이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우리 엄마는... 신경 쓰지 마요.”송재이 역시 함께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요, 아주머니 귀여우신데요, 뭘.”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아마도 정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성수연이 송재이를 좋게 보고 있는 것처럼 송재이도 성수연을 좋아하고 있었다. 둘은 시어머니와 며느리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