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술에 취해서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건 아니겠죠?" 상상치 못한 사실을 들은 고은영은 크게 놀랐다.에이, 설마... 고작 그 잠깐 사이에 그런 일이 생겼다고?정말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배준우는 다시 한번 물었다."언니가 주량이 약한거 아니야?""그, 그때... 제가 방을 떠났을 때에는 언니가 이미 잠 들었었어요!"고은영은 당시, 술을 거하게 마신 고은지에게 해장국을 전해주려 했지만 조영수가 왔다는 얘기를 듣고는 방에 돌아가지 않았다.그날 밤을 떠올린 고은영은 억장이 무너지는 듯 했다.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얘졌다.그녀는 그제서야 그날에 발생한 모든 일의 퍼즐을 맞추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내가 그때 방에 가 봤어야 했는데!"고은영이 울먹이며 말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배준우는 착잡하게 말했다."설령 네가 방에 갔더라도 그 상황을 통제하진 못했을거야."놈은 분명 나쁜 의도를 품고 일을 저질렀기에 그 누구라도 말리지 못했을 것이다.고은영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이런 일이 있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제가 진작 알았더라면...!"알았더라면!!!고은영은 아예 넋이 나가버렸다.마음속으로 계속해서 자책하며 그 날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그러다 갑자기 배준우의 옷자락을 덥석 잡아당기며 물었다."그 남자는, 찾았어요?""이미 진청아한테 맡겨서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반드시 찾아내서 그 자식 갈기갈기 찢어줘요." 고은영은 씩씩 화를 내며 말했다.생각할수록 미칠 지경이었다.결혼식 전날 밤에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분노가 극에 달한 고은영의 모습을 본 배준우는 그녀를 달래주었다."괜찮아, 이젠 화내지 마. 응?""제가 지금 어떻게 화를 안 낼 수가 있어요? 그딴 변태가 우리 언니를 괴롭혔는데.” 변태라는 두 글자를 들은 배준우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얘 좀 봐라, 못하는 말이 없네. ......한편 그 시각, 시간을 확인한 고은지는 황급히 퇴근하였다.그녀는 곧바로 아직 유치원에 있는 딸
잠시 고민에 잠긴 고은지는 겨우 입을 열었다."저기, 혹시 저한테 하시고 싶은 말이 따로 있으신가요?""상무부 창산 프로젝트의 계약에 대해서 얘기 좀 해보려고. 얼른 타."역시나 일 때문이었어!고은지는 저절로 머리가 아파났다. 상사가 일 때문에 자신을 부른거라면 이건 거절할 수가 없는 상황이니까.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안고는 나태현의 차에 올라탔다.폭우를 가로지르는 차 안에서, 나태현은 창산 프로젝트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사실 고은지 또한 계약 판매부가 서명한후 뭔가 문제를 발견하였었다.판매부가 혼자서 몰래 일부 수치를 고친 탓에 사장이 요즘 꽤나 욕을 먹었었다. 그러나 이젠 수습할 수 없는 일이 되어, 창산 프로젝트 1기가 빨리 완공되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그리고는 2기와 3기 계약 때, 다시 얘기를 나눠볼 생각이었다.고은지는 조심스레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그러자 나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지금은 당장 멈출 수가 없어."당장 계약을 취소하여 위약금을 물게 되면 천락 그룹의 이미지에도 좋을게 없었다. 어느덧 차는 한 회소에 도착했고,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고은지는 조급해나기 시작했다.이때 나태현이 말했다."오늘 밤은 나랑 같이 여기서 손님을 맞이해야 돼."그 말투는 매우 단호했다. 그러자 고은지는 초조해났다.“대표님, 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핸드폰이 울렸다. 바로 딸의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선생님은 좀 언짢은 말투로 말했다."희주 어머니, 언제 데리러 오세요? 벌써 7시나 됐어요!"정상적이라면 딸은 6시 쯤이면 하교할 시간이었다.지금 당장 학교로 서둘러 가도, 거의 30분이 걸릴테고, 또 30분 정도가 걸려야 집에 도착할테고... 이거 어떡하지?그런데 이 시간까지도 부모가 데리러 오지 않으니,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급할수 밖에 없었다.고은지는 다급히 사과했다."선생님 죄송해요. 저 인차 도착해요. 여기 차가 좀 막혀서요."이때 나태현이 난감해하는 고은지의 통화 소리
누구보다도 조급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아이를 생각하면서,고은지는 나태현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후, 서둘러 우산을 펴고 학교로 들어갔다.지금 이 시각, 학교에는 경비원만이 남아있었다.양 선생은 조희주를 경비실에 혼자 덩그러니 남긴 채 이미 퇴근까지 한 상황이었다. 아이의 손에는 만두 하나가 들려있었다. 아마도 경비원이 준 것 같았다."희주야.""엄마." 그제서야 엄마를 만난 아이는 울먹였다.몹시 마음이 아파난 고은지는 재빨리 아이를 품에 안았다."괜찮아, 엄마가 왔잖아."그때 40대 정도로 보이는 경비원이 나타났다.그는 고은지를 보고 언성을 높였다."어떻게 당신 같은 것들이 부모가 되는건지... 일이 아무리 바빠도 아이를 챙겨야지! 지금 학교에 남아있는 사람도 없는데!” "죄송합니다. 비가 너무 세게 내려서 오는 길에 좀 늦었습니다. 저희 아이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은지는 경비원에게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녀의 상황이 이해가 되기도 했던 경비원은 더이상 뭐라 하지도 않았다.자신의 친구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선생님도 자신을 버리고 퇴근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는 얼마나 외로웠을가.“얼른 애 데리고 돌아가세요. 방금 밖에서 넘어져서 몸이 다 젖었어요.”심지어 조희주의 몸이 젖었다는 말을 듣고는 고은지는 더욱 마음이 아파났다.아이의 상태를 확인해보니 역시나 바지가 크게 젖어있었다.경비원 아저씨는 그런 아이가 혹시나 감기라도 걸릴까 봐 난로를 켜주기도 했다.고은지는 다시 한번 경비원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면서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어 조희주에게 입혔다.아이의 손을 꼭 잡고 학교에서 걸어나오는 순간,학교 앞에는 여전히 나태현의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태현은 아이와 함께 나오는 고은지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고은지는 한 손으로는 우산을 쓰고 한 손으로는 아이를 안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너무나도 안쓰러워 보였다.이게 바로 위대한 어머니의 모습이었다.곧이어 그녀는 아이를 안고 차 옆
딸조차 무서워한다는 말을 하자 더욱 마음이 아파난 고은지는 아이의 작은 얼굴을쓰다듬어주었다."걱정 마. 하늘이 무너져도 엄마가 네 옆에서 널 지켜줄거야.”아이의 친부에 대해서 여전히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지만 고은지는 단단한 멘탈로 여태 버텨왔다. 다른 사람들은 조희주의 존재를 부정하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혹시라도 만약 아이의 친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동네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그녀는버티지 못하고 진작 아이를 데리고 떠났을 것이다.그렇게 어떻게든 무슨 일이 있어도 딸을 잘 지켜내고 싶었다."응, 난 엄마 믿어."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다사다난했던 하루에 피곤했던 고은지는 아이를 달래주었다."오늘 저녁에는 대충 먹고, 내일 주말이니까 엄마가 너한테 맛있는 것 좀 해줄까?""좋아."기특하게도 조희주는 결코 편식하지 않는 아이었다.게다가 엄마가 혼자서 키운 아이라 그런지, 딸은 세상에 대해서 이미 많이 알게 되었고 한순간에 철도 많이 들었다.전에 조씨 집안에서 지낼 때, 조희주는 자주 떼를 쓰며 일부러 편식까지 하며 소란을 피웠었다.그런데 놀랍게도 눈 깜짝할 사이에 아이는 크게 변화하였고, 그 변화를 알아챈 고은지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얼마 후, 두 모녀는 집에 도착했다.이때 마침 고은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은영아.""얼굴 상처는 괜찮아?"하루동안 혼란스러운 일을 겪었던 고은영은 너무 정신이 없어 고은지에게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고은지가 그런 그녀를 위로해줬다. "안심해. 나는 괜찮아. 그냥 살이 좀 벗겨졌을 뿐이야."사실 그녀의 입가에는 멍이 들었고 목덜미에는 긁힌 자국도 있었다.다행히 오늘은 안지영이 도와주기도 했고 조보은도 이미 심하게 다친 상황이었기에 그나마 일이 이 정도로 끝날 수가 있었다. "다행이야. 희주는 어때?"“별 문제 없으니까 안심해.”"내일 내가 가봐도 돼?""그래, 와.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고은영이 온다는 말을 들은 고은
영문을 모르던 고은지는 궁금했다."무슨 일인데 그래?"갑자기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는 진지하게 얘기를 꺼내는 고은영의 모습을 본 그녀는내심 불안했다.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듯 했다.고은영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물었다."언니 6년 전 결혼식 때 말이야, 전날 밤 결혼식 호텔에서 묵었던거 기억해?""그럼, 기억하지!"“근데 그 날, 조영수는 그 호텔에 가지 않았어.” "뭐, 뭐라고?" 고은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순식간에 얼굴색은 하얗게 질려버렸다.조영수가 호텔에 온 적이 없다고?결혼식 전날 밤, 방에 들이닥쳤던 그 사람은 조영수가 아니었던거야? 그럼 누구지? 크게 놀란 고은지의 안색을 본 고은영은 겨우 입을 열었다."언니도 알다시피 그때 조영수의 결혼은 집안의 압박 때문이었어. 그래서......"맞아, 그랬었지!사실 두 사람은 양측 집안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혼인 관계를 맺은 것이었다. 진여옥은 애초에 자신의 아들인 조영수가 강성에서 장가 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고은지가 외지인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못해 받아들였고, 조보은은 마침 조영수가 강성 사람이라는 것이 맘에 들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우왕좌왕 결혼식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여태 어머니의 말이라면 뭐든 다 잘 듣던 조영수가 대체 왜 그랬을가? 사실 그의 마음 속에는 고은지가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그렇게 둘은 결혼을 하고 나서도 줄곧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다.조영수가 호텔에 찾아오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나서야 고은지는 뭔가를 깨달았다. "그럼 그날 밤 내가 만난 사람은 대체 누구야?" 고은지는 덤덤하게 물었다.과거에 대해서 잠시 잊고 있었던 그녀는 이렇게 된 이상 6년전의 그날 밤의 진실을제대로 알고 싶었다.고은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몰라. 하지만 언니가 기어코 알아내고 싶다면 인차 알아낼 수 있어.” 진청아에게 도움을 청하면 이 일은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날 밤 호텔에 드나든 모든 사람들의
어느덧 닭은 먹음직스럽게 잘 익혀졌고,고은지는 또 두 가지 반찬까지 준비하여 대접했다. 조희주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순순히 먹고 있었다. 그런데 고은지가 갑자기 닭다리하나를 그릇에 넣었주자,철이 든 아이는 눈치를 보고는 닭다리를 다시 고은지에게 건네주었다."엄마랑 이모가 먹어. 이건 너무 커서 난 못 먹어!"당연히 못 먹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눈치가 보여서였다.그런 아이의 모습을 볼 때마다 고은지는 마음이 좀 아팠다."희주야, 넌 지금 한창 클 때야. 얼른 먹어."그리고는 또 다시 닭다리를 딸의 그릇에 넣어주었다.하지만 아이의 고집은 얼마나 센지!바로 그때, 고은영이 재빨리 말했다."희주는 이거 먹고, 이모가 엄마한테 닭다리 줄게. 이모 뱃속에 있는 아기가 닭고기 싫어하거든.” 조희주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고은지를 바라보기만 했다.고은지는 그런 고은영을 말렸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동생으로서는 언니가 잘 챙겨먹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으니까.그제서야 고은지는 울컥한 마음으로 닭고기를 한 입 먹었다."얼른 먹어.""응." 그러자 아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냠냠 먹기 시작했다.점심을 다 먹고 난 후, 조희주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고은지는 그런 아이의 모습이 매우 안타까웠다.자신의 어리석음이 아이를 이렇게까지 해친 것 같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훔쳤다.고은영은 그런 그녀를 달래주었다. "울지 마 언니. 응?""은영아, 그 남자 꼭 찾아줘!"이 순간만큼은, 고은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무슨 일이 있든 반드시 그 남자를 찾으려 마음 먹었다.그러자 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꼭 찾아낼거야."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는 고은지의 모습을 처음 본 고은영도 스스로 자책했다.그날 밤 난 왜 그 방에 가 보지 않았을까? 난 왜 소홀했을가? ......얼마 뒤, 오후 4시가 되었고, 고은영은 집에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고은지는 그녀에게 저녁까지 해 주고 싶었지만 고은영은 사양했다. 언니에게 조금이라도 혼자서 마
기사의 연락을 받자마자 고은영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나왔다. 문 앞에서 대기 중이던 량천옥은 그녀를 발견하고도 아무 말 않았다.웬일로 자신을 난처하게 하지 않는 량천옥의 태도를 확인한 고은영은 한숨을 내쉬었다.곧이어 기사가 차문을 열어주었다."타세요, 사모님."사모님이란 세 글자를 어렴풋이 들은 량천옥은 마음이 복잡했다.이전과 같았으면 애초에 벌컥 화를 내고 혼쭐을 냈을 것이다.배항준의 부인인 자신이 멀쩡이 아직 살아있는데, 배준우의 여자를 사모님이라 모시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젠 차마 뭐라 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은영이 자신의 딸이니까...어쩌다 둘의 운명이 이렇게까지 되었을가.차에 오른 뒤, 고은영은 긴장감을 풀고는 잠시 한숨 돌렸다. "차 브레이크 같은건 다 검사해봤어?"비록 량천옥이 자신을 가만히 놔두긴 했지만 그런 그녀의 태도가 익숙치 않았던 고은영은 여전히 내심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있었다.이 여자가 얼마나 광기 가득한 미친 여자인데, 한시도 방심할 수는 없어!그러자 기사는 고은영을 달래주었다."안심하세요. 오늘 아침 란완에서 떠나기 전에 한번 검사을 마쳤어요. 전 그 후로 줄곧 차에서 내리지 않았고요."그 말을 들은 고은영도 그제서야 좀 안심이 되었다."그래도 돌아가는 길, 천천히 조심해서 운전해."순간 그녀는 전에 겪었던 교통사고를 떠올렸다.그 날, 택시 기사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괜히 억울한 누명을 쓸게 뻔했다."네, 알겠습니다."평소보다 예민해있는 고은영을 안심시키기 위해 기사는 매우 느린 속도로 운전하였다.그렇게 그들은 순조롭게 란완으로 돌아왔다.방금 무려 두차례의 국제회의에 참석한 배준우는 안색이 좋지 않은 고은영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얼른 물었다. "무슨 일이야?""아, 깜짝이야.""어?""량천옥 그 여자, 지금 단단히 미친 것 같아요. 글쎄 오늘 그린빌까지 찾아왔더라고요.왜 그랬겠어요? 당연히 날 죽이려고 그러는거지.”분노가 극에 달하면 눈에 뵈는게 없는
저녁에 배준우는 주방에 고은영을 위한 만두를 준비해 주라고 일러 두었다. 밀가루 음식을 전혀 선호하지 않는 배준우를 위한 스테이크도 주방에서 착실히 함께 준비해둔 건 물론이었다.고은영이 언니의 이야기를 꺼낸 건 한창 저녁을 먹으며 배준우가 와인 한 잔을 즐기던 도중이었다.“언니는 아무래도 6년 전의 그 남자가 대체 누군지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아이의 아빠가 누군지 정도는 당연히 알아 둬야지.”어떤 여자가 제 아이의 친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 상태로 멀쩡할 수 있겠는가? 그런 공허함도 세상에 더는 없을 것이다.누가 됐다고 한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정도는 당연히 알아야 할 터.“그러면 그냥 슬쩍 한번 알아봐 주시면 안 될까요?”고은영의 말투는 다소 조심스러웠다.그럴만했다. 제대로 알아내기 전까지는 무조건 모든 것이 비밀이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면 애꿎은 고은지와 조희주 모녀에게 2차 가해가 될 것이다. “걱정하지 마.”저녁을 다 먹고 난 후, 배준우는 고은영을 데리고 산책에 나섰다.둘을 위한 란완 리조트는 승마장과 수영장은 물론이고, 골프장까지 풀 옵션으로 갖추어져 있는 개인 별장이었다.멀리서 털이 부드럽고 반짝이는 게 언뜻 봐도 잘 관리된 듯한 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은영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승마도 하실 줄 아세요?”“응. 아이 낳고 나면 가르쳐 줄게.”낳고 나면, 가르쳐 준다고?마음 한구석이 뭔가 봄바람이 분 양 간지러워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해진다.그 둘은 아직 미래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정해지지 않은 사이였다.미래, 그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당장 그녀 본인조차 어떠한 갈피를 잡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그러나 불안한 와중에도 미래에 결국 이 남자와 떨어지게 될 수도 있다는 것만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어딘가 떨어진 듯 아파지는 것이었다.란완 리조트 내부에는 잘 가꿔진 정원들도 있었는데, 그 정원 안에는 세상 온갖 곳에서 온 신기한 화초들이 다수 재배되고 있었다. 가까워지지 않았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