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웅이 나가고 배준우는 휴게실로 향했는데, 고은영은 목도리를 뜨고 있었다.지금은 손놀림이 예전처럼 어리숙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전보다 훨씬 빨라진 것 같았다.배준우가 들어오자 고은영은 서둘러 손에 들고 있던 뜨개질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진짜 모르는 사람이에요.”배준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아직도 그걸 말하고 있는 거야?“모르면 모르는 것이지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거야?”“어쨌든 민감한 신분을 가진 분이니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배준우가 무서웠다.조금 전 로비에서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잡아 먹을 기세였기 때문이다.듣고 있던 배준우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를 품에 안은 그는 사슴처럼 순진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입맞춤을 했다.부드럽게 그녀를 탐하는 그의 모습은 아까와는 완전 다른 모습이었다.“읍!”고은영이 신음을 터뜨렸다.그녀의 입술은 배준우 때문에 따끔거렸다.그녀의 신음에 배준우는 살며시 그녀를 놓아주었다. 빨개진 그녀의 입술을 살짝 만지던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가 그렇게니 무서워?”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무서워요. 진짜 너무 무서워요...!”“바보야, 난 너의 남편인데 그렇게까지 두려워할 필요 있어?”남편이라는 두 글자에 더욱 힘을 주며 말하는 배준우에 고은영은 마음이 무거웠다.“하지만 우리는 결국...”“그만!”뭔가 말하려는 그녀를 배준우가 제지했고, 고은영은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그와의 긴 시간 동안 고은영도 어떤 말들은 아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특히 그들의 가짜 결혼은 회사에 비밀로 해야 했다. 여기저기 다니며 떠벌이면 그녀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지금 반복적으로 그녀에게!“그럼 매일 밤 일어나는 일에 대해는 책임지실 건가요?”“뭐?”“그러니깐 당신이...”고은영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고, 얼굴도 이미 붉게 달아올랐다.그녀는 배준우보다 8살이 어렸기에 아주 성숙하고 노련
서류를 든 진청아가 사무실 밖에서 문을 여러 번 두드렸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감히 들어갈 엄두는 나지 않았기에 그녀는 결국 몸을 돌렸다....고은영이 자리를 떠나고 량일은 카페에 오랫동안 앉아있다가 넋을 잃은 모습으로 카페를 걸어 나갔다.동영그룹에서 걸어 나오는 배윤을 보자 그녀의 심장이 떨려왔다.“윤아!”그리고 배윤에게로 걸어갔다.그녀의 목소리에 배윤도 량일을 발견했다. 침울한 표정이었던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할머니.”배윤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량일을 부르자 량일이 물었다. “준우를 만나러 온 거야? 다음에는 혼자 오지 마.”그녀는 단호했다. 요즘 그들은 매우 불쾌한 일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량천옥이 물러서지 않으려 하는 것도 배윤을 위해서이기도 했다.배준우는 비록 전에 배윤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되찾으려는 배준우의 태도에 어느 정도 경계해야 했다.“네, 형 만나러 온 거예요.”배윤이 ‘형’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량일의 마음이 복잡했다.“형이라고 생각하는 너를 그 애는 동생이라고 생각해?”그녀는 거침없었다.이것은 그녀와 량천옥이 배윤에게 주입하고 있는 개념이기도 했다.배항준의 기분이 어떻든, 배준우에 대해서 그녀들은 항상 이런 태도였다.하지만 배윤은 그녀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배준우와 가까이 지냈다. 그러는 배윤이 그녀들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래도 내 형인데 할머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얘는...”량일이 노했다.배준우를 선택한 고은영 때문에 이미 머리가 아픈 상태인데 배윤도 이 모양이다.하늘의 뜻인지, 아니면 그녀들이 보복당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량일의 낯빛은 점점 어두워졌다.“집에는 들른 거야?”“아직이요.”배윤이 고개를 저었고, 량일은 아주 불만스러웠다.“집에도 들르지 않고 준우를 만나러 왔단 거야?”배윤의 이런 무심한 행동이 그녀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공항이 동영그룹과 가깝잖아요.”대충 둘러대고 있는 배윤의 변명에 넘
“이미 한두 번 만난 게 아니지 않아요? 그 여자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 같던데요?”듣고 있던 량일은 깜짝 놀랐다.“네가 어떻게 여러 번 만났단 것을 알고 있는 거야?”그녀는 아주 예민한 사람이어서 조금만 이상함을 느끼면 바로 짚고 넘어가야 했다.“형이 그 여자를 빌미로 아버지를 협박하고 있으니, 어머니와 할머니도 이렇게 서두르는 거 아니에요?”배윤의 물음에 량일은 숨이 탁 막혀왔다.급한 정도가 아니었다. 지금은... 이미 아주 난처해진 상황이였다.고은영에 관한 일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빨리 처리해야 한다....배씨 가문.배윤과 량일이 막 저택에 도착했을 때 량천옥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시선을 주고받은 둘은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진짜 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을 거예요?”량천옥은 배항준을 잡고 바락바락 악을 쓰고 있었다.그런 그녀때무에 배항준은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당신이 먼저 천의를 준우에게 넘기라고 내가 말했잖아.”“먼저 넘기고 그다음은요? 그다음엔 진짜 다시 돌이킬 수 있나요? 당신의 아들이 어떤 자식인지 아직도 모르겠어요?”량천옥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배항준이 그녀를 보는 눈빛도 매서웠다. 하지만 이런 그의 모습에도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울먹이기 시작했다.“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 왜 넘기라고 하는 거예요? 넘기고 나면 윤이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요!”량천옥은 어이가 없어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그동안 야금야금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는 배준우 때문에 그녀는 점점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었다. 장항 프로젝트가 시작임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배항준은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했고 장항 프로젝트만 손에 넣으면 배준우가 잠잠해질 것이라고 믿었다.그런데 잠잠해졌는가?지금은 천의에까지 손을 뻗고 있다.“어쨌든 준우와 그 여자는 결혼하면 안 돼!”지금 배항준은 고은영에 대해 점점 더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결혼을 결사 반대하고 있었다.“
배윤과 량일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배윤이 돌아온 것을 본 배항준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이런 시기에 배윤이 끼어들면 상황만 더 복잡해 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내가 돌아온 것이 정말 반갑지 않은가 봐요?”소파에 앉은 배윤이 배항준을 바라보며 말했다.배항준은 이마에 손을 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배항준을 지켜보던 량일은 무언가 말하려다 망설였다가 결국 한마디 했다.“난 올라가서 천옥이를 살펴보겠네.”배항준 앞에서는 발언권이 없는 자신이라는 것은 량일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하여 매번 배항준과 량천옥이 싸울 때면 량일은 최대한 말을 아꼈다.필경 배항준의 신분과 지위는 그녀가 훈계를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기도 했다.그녀가 많이 간섭할수록 량천옥만 힘들게 될 것이다....위층.량천옥은 담배를 피고 있었다. 원래는 담배를 피지 않았던 그녀이지만 너무 심란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량일이 방에 들어섰을 때 방안에는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만 피워.”“설마.. 나를 통제하려는 건가요?”량천옥의 분노가 다시 치솟았다.량일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본 적 없는 반항심이 어려있었다.그녀의 반항을 처음 겪는 량일이다.량일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너!”“나도 이제 나이가 45예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해, 혹은 담배를 몇 대 피는 것까지 어머니의 동의를 거쳐야 하나요?”반항의 불씨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량천옥은 곧 폭발할 듯 으르렁거렸다.지난 세월 동안 그녀의 생활은 모두 량일이 계획하고 있었다. 매 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두 량일이 결정했다.량천옥은 그렇게 그녀의 지휘대로 걸어갔는데도 량일이 원 하는 대로 살지 못했다.량일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조용히 량천옥을 바라보았다.“내가 너무 많이 간섭한다고 탓하는 거야?”“오랫동안 어머니 말을 따랐고 그 결과,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보세요. 나는 곧 모든 것을 잃게 생겼다고요.”량천옥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이것이 량
혹시 배항준이 배윤을 만나면 마음이 약해지지 않을까?어쨌든 지금은 배항준과 맞서는 것이 그녀들에게는 좋을 것이 없었다.금방 배항준과 한바탕 싸웠던 것을 떠올린 그녀는 그제야 모친의 의도를 파악했다.그렇게 그녀는 마음을 다스리며 한숨을 내쉬었다.“배윤을 본 그이가 조금이라도 마음이 약해지길 바래야겠어요.”천의에 대한 그녀의 노력은 모두 배윤을 위한 것이란 것을 배항준도 알고 있다.그러니 배윤을 봐서라도 천의를 배준우에게 넘기라고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그 순간만큼은 량천옥도, 량일도, 모두 배항준이 배윤때문에 생각을 바꾸길 바랬다....동영그룹.거의 퇴근할 무렵 배준우는 고은영더러 퇴근할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때, 뜻밖의 손님이 불쑥 찾아왔고, 그것은 바로 진승연이었다.그가 진씨 가문을 상대하고부터는 보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녀가 미친 사람처럼 쳐들어왔다.“고은영, 이 망할 년! 넌 보복당할 거야! 반드시 보복당할 거라고!”지난 며칠 동안 진승연은 하루 종일 방에만 있었다.노빈과의 결혼은 연기되었다. 그것은 결혼 당일 그녀가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혼수상태에 빠진 그녀 때문에 부득이하게 결혼식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녀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이렇게 큰 소란을 피웠는데도 그저 결혼식을 연기하는 것뿐이었다.그녀는 완전히 미칠 것 같았다...!하지만 북성에서 저지른 일들이 그녀에게 파국을 가져올 줄 몰랐다.고은영은 미쳐버린 그녀를 바라보다 배준우에게 시선을 돌렸다.표정이 어두워진 배준우는 진청아를 보며 말했다.“경비 불러!”“이미 불렀습니다.”진청아는 정중하게 대답했다.방금 회사로 들어선 진승연의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여서 진청아는 서둘러 경비실에 전화를 걸었다.이제 곧 경비원들이 올라올 것이다.“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 우리의 우정이 진짜 이것밖에 안 됐던 거예요? 어떻게 노빈, 그 멍청이랑 결혼하라고 해요? 어떻게 이러냐고요! 미월언니에게도 너무 한 거
표정이 좋지 않았던 배준우는 진승연의 말에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씩씩거리는 진승연을 바라보던 배준우가 입을 열었다.“그러고 보니 당신 진씨 가문에 자비를 너무 베푼 것 같아.”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곧 폭풍우가 몰아칠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한창 속 시원해하던 이미월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그녀는 배준우가 화를 내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잘 알고 있었다.그녀를 내쫓는 것은 물론 외숙모도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 돌릴 것이다.“승연아, 이제 그만하고 당장 은영 씨에게 사과해!”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다.지금 당장 어머니에게 갈 수 없었던 그녀는 외삼촌 집에 머물지 못하더라도 아직은 외삼촌의 도움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하여 고은영을 무척 짓밟고 싶었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진승연은 완전히 미친 상태였다.“무슨 사과? 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하는데요?”그녀는 격렬하게 반항했다.“승연아!”“당장 끌어내!”이 혼란스러운 광경에 배준우가 경비를 불렀다.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한 것 같다.그의 말에 경비원들은 즉시 이미월과 진승연을 잡아끌었다.그 거친 행동은 두 사람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배준우의 잔인한 태도에 이미월은 경비원의 팔을 잡고 애원했다.“아니야!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거야!”그는 어떻게 자신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가?이미월은 고은영을 쏘아보았다.그녀를 향한 증오심이 끊임없이 커졌다.그러다 뭐가 생각났는지 갑자기 외쳤다.“나, 임신했어!”그녀의 한마디에 현장의 공기는 순간 얼어붙었고, 주위가 급격하게 조용해졌다.이미월을 잡고 있던 경비원은 뜨거운 감자를 움켜쥔 듯한 느낌을 받았다.그는 그저 벙진 채로 배준우를 바라볼 뿐이었다.숨이 막힐 듯한 분위기 속에서 이미월의 눈은 배준우를 향하고 있었다.“남성의 그날 밤, 당신 곁에 있었던 사람은 나였어. 난 일찍 귀국했거든.”배준우의 눈이 차갑게 변했다.옆에 있던 고은영의 심장이 곤두박질쳤다.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그녀가 진짜 일정을 앞당겨 귀국했다고? 하지만 이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녀가 귀국하기 전에 그들은 매일 영상통화를 했었다. 배준우가 남성에서 회의를 하던 날 이미월과 영상통화를 했을 당시에도 그녀는 해외에 있었다.진승연은 이미월의 행동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그렇다고 해도 왜 배준우를 기만하려 하는가? 그 후과는 분명 더 엄중할 것이다.정신을 차린 진승연은 일의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그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이미월을 응시했다.주변의 공기는 조용하다 못해 숨이 막힐 정도였다.아무 말 없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배준우에 이미월은 고은영에게 시선을 돌렸다.“은영 씨가 말해보래도요?”또다시 자신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는 이미월의 행동에 고은영은 머리가 아찔했다.남성에서의 그날 밤에는 자신이 배준우의 곁에 있은 것은 맞지만 공개적으로 자신이었음을 밝히는 것은 배준우와 합의한 사항이었다.그러니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난감해하며 배준우를 바라보자, 그는 다소 위협적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보아하니 부인한다면 어마어마한 대가가 따를 것만 같았다.고은영은 숨을 죽이고 물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죠? 그날 밤에는 분명 제가 대표님 방에 있었어요.”처음으로 자신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이 배준우에게 고백하는 것이 아니어서 조금 찝찝하긴 했다.이미월은 고은영이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그녀가 인정했으니 후회해도 이미 늦어버린 이미월이 다급하게 말했다.“그럴 리는 없어요. 분명 나란 말이에요.”“아니 이봐요. 적당히 하시죠?”고은영은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그녀는 어떻게 이런 사람과 엮이게 된 걸까?이미월은 다급했다.“진짜 나야. 준우야 제발 날 믿어줘.”이미월의 모습에 현장의 사람들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배준우의 기분을 그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이미월: “그날 밤에 같이 있었던 사람이 당신이라는 증거 있어요?”“그렇다면 당신이야말로 증거가 있나요?”“나 임신했어요.”“그럼, 저도 임신했다면
강성에서의 배준우가 어떤 이미지인지는 이미월도 잘 알고 있었다.배준우가 무자비한 사람이어도 그녀에게만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었다.그가 요즘 그저 조금 성질을 부린다고만 생각했었다.하지만 지금, 그가 차갑게 뱉은 그 한마디에 그녀는 마침내 깨달았다.그녀도 그가 차갑게 대했던 다른 여자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그에게 특별한 존재는 누구일까?고은영일까?이미월은 인정할 수가 없었다.“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어?”눈물이 앞을 가려버리고 말았다.임신하지 않은 그녀여도 그에게서 이런 냉정한 말을 들으니 너무 비통했다.배준우는 멸시 어린 눈으로 그녀를 힐끔 볼 뿐이었다. 그의 눈빛은 너무나도 차가웠다.“병원에 데려다주라고 해.”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조금 전보다 더욱 냉담했다.이미월은 철저하게 마음을 접었고, 그녀는 배준우가 꼬장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순간 깨달았다.그의 마음은 완전히 그녀를 떠났다!자신을 놓아주는 이미월에 배준우도 더 이상 머물지 않고 고은영의 손을 잡았다.이미월에게 그와 고은영의 뒷모습은 너무 아렸다.“언니!”진승연은 가슴 아파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자신이 제일 최악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이미월의 모습을 보니 자신의 처지가 그 정도로 비참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진청아가 이미월에게 다가가 말했다.“제가 미월 씨라면 조용히 떠날 거예요.”이미월은 그녀를 쏘아보며 대꾸했다.“그저 준우곁의 한 마리 개에 불과한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나와 말을 섞으려는 거죠?”미친 듯이 발악하며 자신을 모욕하는 이미월에 진청아의 표정이 굳어졌다.그녀는 담담하게 받아쳤다.“제가 보기엔 당신은 개보다도 못한 것 같네요.”“당신...!”이미월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배준우의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호락호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막대할 수 없게 만들 수 있는 비장의 카드가 없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았다.그러니 보잘 것 없는 비서에게마저도 조롱당하고 있었던 것이다.비서실의 다른 비서들도 눈
‘이제 와서 쓸모없는 아들 대신 아내를 다시 데려가려고 그러나?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장선명은 화가 나 머리가 지끈거렸다.상대방은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할아버지, 지영이가 나태범한테 끌려갔어요. 저 좀 도와주세요.”“못난 놈.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전화기 너머 장성현의 말투가 변하며 바로 장선명을 질책했다.“나씨 가문이 먼저 부끄러운 짓을 한 거예요. 저는 바로 나씨 가문으로 갈 테니 할아버지로 빨리 오세요.”장선명을 더 이상 장성현과 쓸데없는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았다.“내가 안 가면?”장성현은 어린아이들 일로 인해 자신까지 나서는 건 체면이 상한다고 여겼다.‘나태범이 정말 손자며느리를 데려갔단 말인가? 정말 부끄러운 것도 정도껏 해야지.’“그럼 어른한테 손댈 수밖에 없겠죠.”“너... 너 잠깐 기다려라.”장성현은 그 말을 듣고 급히 답했다.장씨 가문이 비록 어두운 쪽 일을 한다고 해도 최소한의 선은 있었다.특히 가풍이 엄격한 편이었는데 장성현은 아이들에게 더욱 엄격한 기준으로 최소한의 선은 지킬 수 있게 했다.그런데 장선명이 어른을 때리겠다고 하니 장성현도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목적을 달성한 장선명은 얼른 전화를 끊었다.“더 빨리 가.”“네.”구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 속도를 더욱 높였다.구이준은 도심에서 차선을 변경해 가며 시속 100킬로까지 높였다.속도를 줄이지 않고 지나가면서 그는 많은 운전자들에게 욕설을 듣기도 했다.그 사이 안지영은 이미 나태범의 사람들과 나씨 가문 본가에 도착해 있었다.대나무 숲과 조용히 흐르는 작은 물줄기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 법도 했지만 지금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안지영은 나태범을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나태범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냉담하게 말했다.“너랑 장선명은 어울리지 않으니 결혼식은 취소해.”안지영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비웃는 듯한 눈길로 나태범을 바라보았다.직접 듣지 않았다면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을 것이다.
안지영이 캘리포니아반도를 막 벗어나자마자 그녀의 차는 갑작스럽게 멈춰야 했다.앞좌석 운전기사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얼굴이 굳어졌다.“아가씨.”“무슨 일이에요?”안지영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물었다.갑작스러운 급브레이크로 인해 그녀는 앞좌석 등받이에 부딪힐 뻔했다.당연히 그녀의 목소리와 표정 모두 좋을 리 없었다.운전기사가 답하기도 전에 앞차에서 사람들이 내렸다.얼굴을 확인한 운전기사는 아연실색하며 입을 열었다.“나씨 가문 사람들입니다.”“뭐라고요?”‘나씨 가문 사람들? 나태웅은 장선명과 같이 있는 거 아니었나?’안지영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나씨 가문 사람들이 안지영의 차에 다가왔다.그 사람들이 안지영이 있는 쪽 문을 열기 전에 운전기사는 재빨리 문을 잠갔다.그는 후진하여 벗어나려 했지만 그제야 차가 완전히 포위된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아가씨, 얼른 선명 도련님한테 연락하세요. 이 사람들 전부 나태범 산하 사람들이에요.”나태범의 사람이라는 말에 안지영은 아연실색했다.나태범이 직접 보낸 사람이라면 이는 일부러 안지영을 겨냥한 행동임이 분명했다.‘결국 나태웅과의 일이 어른들에게까지 번지고 말았구나.’“아가씨, 저희 회장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직접 따라나서시겠습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방법을 써야 할 까요?”밖에 있던 사람은 차 문이 열리지 않아도 당황하지 않고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그 평온함 속에서도 확고하고 단호한 태도가 묻어났다.안지영의 안색이 창백해졌다.‘젠장! 왜 다들 나를 협박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 절대 만만한 사람이 되지 않을 거야!’운전기사는 그녀가 움직이지 않자 허겁지겁 핸드폰을 꺼내 장선명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그러나 전화가 연결되기도 전에 안지영은 화가 난 얼굴로 차 문을 열고 당당히 차에서 내렸다.“아... 아가씨!”운전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큰일 났네. 성격이 또 올라왔네.’운전기사는 장선명의 사람이었다.안지영이 장선명과 함께한 이후로 그녀의
‘여자를 갖고 논다고? 도련님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닌데. 밤에 발생했던 일들도 도련님 모르게 벌어졌던 일인데... 일을 조사해 범인을 밝혀냈을 때 그 범인은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지.’“구이준.”“네.”구이준이 앞으로 나섰다.“웨딩드레스는 킹덤 타운으로 보냈어?”“네. 다 수선해서 보냈습니다.”그 말을 듣고 장선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태웅을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지영이가 직접 입어보고 고른 웨딩드레스야.”이 말은 나태웅의 위협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나태웅은 온몸이 얼어붙은 듯 차갑게 굳었고 장선명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더욱 음울해졌다.“그럼 거절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지?”“너도 예상하던 답 아니야?”장선명이 싸늘하게 웃으며 답했다.언제 장성명이 위협을 받아들였던가.나태웅은 이런 방식으로 두 사람을 헤어지게 만들 수는 없었다.이전에 안지영을 찾아가도 효과를 보지 못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장선명이 안지영을 위해 그녀와 헤어질 것으로 믿는다면 나태웅은 장씨 가문을 너무 만만히 본 것이다.장씨 가문 사람들은 이런 위협을 받아들일 사람들이 아니었다.“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어. 네가 지영이를 빼앗아 간다면 나도 인정하지.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우릴 헤어지게 하려는 거라면 나뿐만 아니라 강성 전체가 너희 나씨 가문을 경멸할 거야.”말을 마친 장선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더 이상 나태웅과 할 이야기가 없었다.태연하고 무서울 것 없는 장선명의 모습은 나태웅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장선명은 두 발짝 걸어 나가다 무언가 떠오른 듯 멈춰 섰다.“참, 하늘그룹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하늘그룹이 없어져도 나는 안지영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도록 할 방법은 많아. 하지만 너는? 지영이는 널 지금보다 더 원망할 거야.”‘안지영이 자신을 미워하더라고 나도 같이 미워하게 만들겠다고? 도대체 무슨 논리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자기 판단이 흐린 것처럼 지영이도 반쯤 정신을 놓았다고 생각하는 건가?’장선명은 자
3분 후, 나태웅과 장선명이 마주 앉았다. 겉보기엔 평온해 보였지만 현장의 공기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두 사람은 각자 담배 두 개비씩 피울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진이훈과 구이준은 몸이 굳으며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다.장선명이 세 번째 담배를 꺼내려는 순간 나태웅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래서 조건이 뭔데?”나태웅과 시간을 소모하려던 장선명은 그 말을 듣고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조건?”또렷한 말투로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나태웅은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지금까지 병원에서 아픈 척한 것도 모두 안지영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바보같이 순진한 안지영만이 진지하게 나태웅이 정말 미친 건지 아닌 건지 고민하고 있었다.“그 여자가 널 미워하게 만들지 마.”나태웅은 이를 악물고 하나하나 힘줘 말했다.장선명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왜 나를 미워해야 하지?”장선명이 흥미롭게 물었다.안진섭과 얼마간 관계가 있을 뿐, 장선명은 다른 방면에서 안지영에게 잘못한 건 없었다.“하늘그룹이 너 때문에 없어진다면 널 미워할 거야. 날 미워하듯 널 미워하게 되는게 네가 진정 원하는 거야?”나태웅이 날카롭게 물었다.하지만 애매한 부분이 있어 장선명은 나태웅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하늘 그룹이 나 때문에 없어진다고? 나태웅 말고 그런 짓을 할 사람이 누가 있다고.’장선명은 담배를 담뱃갑에 도로 넣었다.“그렇다면 지영이는 널 미워하겠지?”“난 상관없어. 어차피 이미 미워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영이와 계속 함께하려 한다면...”나태웅은 잠시 말을 멈췄다.고개를 들어 장선명을 바라본 순간 그의 시선에는 어느 때보다도 더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나태웅은 싸늘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지영이와 계속 함께하려 한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 하늘그룹을 부숴버릴 거야. 그렇게 돼도 지영이가 너랑 무사히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진이훈과 구이준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나태웅이 말을 마친 순간 현장
“내가 대신 가서 혼내줄게. 너는 여자니까 이미지 신경 써야지. 착하지?”“싫어요! 이미지 따위는 필요 없어요.”장선명이 바로 핸드폰의 카메라를 켜서 그녀 앞에 내밀었다.안지영은 핸드폰 속 자신의 헝클어진 머리와 마치 미친 여자처럼 보이는 모습을 보고는 순간 얼어붙었다.그녀가 조용해지자 현장의 분위기도 순식간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그 남자 때문에 이런 모습 하려고?”안지영은 말문이 막혔다.‘젠장, 언제 이런 모습이 된 거지?’특히나 더 참을 수 없는 건, 나태웅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사실이었다.‘그놈이 뭐라고 내가 이렇게까지 화내는 거지?’“집에 가자. 착하지?”장선명은 부드럽게 안지영을 달랬다.옆에 있던 구이준은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장선명이 어떤 사람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유명했다.그가 소유한 유흥 장소는 셀 수 없이 많았고 그 안에는 온갖 종류의 미녀들이 넘쳐났다.여린 타입, 매혹적인 타입, 요염한 타입. 남자들이 환장하는 스타일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또한 유흥가에 들어오는 여자 중 장선명을 유혹하여 인생을 바꾸고 싶어 하는 여자들도 많았다.당시 구이준과 안열은 장선명 주위를 얼씬거리는 여자들을 수없이 많이 처리했지만 장선명이 여자들에게 시선을 두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그래서 구이준과 안열은 당시 장선명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건지 의심하기도 했었다.예쁜 여자들이 들끓는 곳에서 어떠한 유혹에도 움직이지 않으니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장선명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타입을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구이준은 안지영을 유심히 보며 생각했다.‘다른 여자들이랑 비교해도 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데... 도련님께서 왜 이 여자를 좋아하시는 거지? 화끈한 성격? 아니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호쾌한 모습?’머리를 정리하던 안지영은 헝클어진 머리로 인해 손가락이 끼여버렸고 그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웠다.그로 인해 나태웅에 대한 그녀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
고은영은 분노에 휩싸인 채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가게를 나왔다.배준우가 간 줄 알았던 그녀는 가게에서 나와 배준우의 차가 원래 자리에 있음을 확인하고는 화가 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통화를 하고 있던 배준우는 그녀를 보자마자 통화를 마무리했다.“그래. 그렇게 처리하고 끊어.”그는 곧바로 고은영의 부풀어 오른 볼을 살짝 꼬집으며 물었다.“화났어?”고은영이 말하지 않아도 배준우는 알 수 있었다.진성택이 분명히 또 진유경과 관련된 이야기로 그녀를 화나게 한 것이다.“계속 곧 죽을 거라는 얘기만 반복하고 있어요.”“도덕적 협박이구나?”배준우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그의 안색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진성택이 진유경을 편애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양녀를 선택하고 친딸을 외면한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다.평소 세심하지 않은 배준우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고은영에 대한 연민이 짙어졌다.고은영은 더 이상 진성택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매번 만나면 진유경 이야기뿐이었기 때문이다.배준우가 한숨을 내쉬며 위로했다.“화내지 마. 어차피 너한테 중요한 사람도 아니잖아.”“그래도 엄마가 너무 불쌍해요.”그녀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가슴 한구석이 쓰려왔다.‘네 명이 자식이나 낳았으면서 엄마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엄마가 나한테 남긴 마지막 사랑마저도 첫사랑의 딸에게 나누려고 하다니...’“저녁에 네 큰오빠네에 가서 밥 먹을까?”“오빠한테 전화 왔었어요?”말 돌리는 데 성공한 배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응. 아까 너 봤다면서 저녁에 밥 먹자고 하더라고.”“좋아요!”고은영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정훈과 진윤과 가까워진 후, 고은영은 두 오빠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진성택은 정말 무정했다.아니, 애정은 있었지만 그 대상이 아내와 자식이 아닌 다른 사람일 뿐이었다.“언제 태현 오빠한테 물어볼 거예요?”“조금 있다 시간 내서 만나러 가려고.”“좋아요!”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고은지
“어머니가 나한테 남긴 건 그대로 넘겨주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고은영은 진성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말을 끊었다.싸늘한 고은영의 시선에 진성택의 안색은 순간 창백해졌다.진성택이 무언가를 덧붙이기 전에 고은영이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그렇지 않으면 뭐요?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 배준우의 아내예요. 진유경에게 손대는 건 쉬운 일이죠.”“유경이한테 손대지 마. 은영이, 너...”“됐어요! 더 이상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요!”진유경을 그렇게까지 감싸는 진성택을 바라보며 고은영은 실망감을 넘어 차마 형용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이래?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이길래 이런 일까지 한단 말이야! 아내랑 아이를 도대체 뭐로 보는 거지? 어떻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나한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어... 엄마가 남긴 소중한 유품을 진유경 같은 년에게 넘기겠다고? 하...’진유경이 단순히 진씨 가문의 양녀였다면 고은영은 아마 이렇게까지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진실을 아는 고은영은 지금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설령 눈앞의 남자가 그녀의 혈육이고 아버지라 할지라도 고은영은 그를 혐오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진성택은 그녀의 분노에 애처롭게 그녀를 불렀다.“은영아...”고은영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진성택이 말을 이었다.“나한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게 아니었다면 나도 너한테 와서 이런 부탁 하지 않았을 거야.”“같잖은 호소는 그만 하세요. 저희 사이에 애정이라 칭할 만한 감정도 별로 없잖아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내였던 사람에게 너무하네요. 엄마가 불쌍해요.”그녀는 더욱 화가 났다.비록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머니와 특별한 애정이라 할 감정은 없었지만 진성택이 그녀를 대하는 모습을 보며 고은영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밀려왔다.고은영은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어머니의 깊은 사랑은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진성택은 어떠한가.고은영은 더 이상 그를 보고 싶지 않
고은영이 이렇게나 직설적으로 얘기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저는 이제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해요.” 진성택에게 돌려 말하지 말고 직설적으로 얘기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감정적으로 접근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생각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고 지금 와서 그것을 지울 수는 없었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말에 상처를 받은 듯 보였다. 그녀의 불만 섞인 태도에 그의 마음이 조금은 아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는 걸 알았다. “너희 둘째 오빠가 병원에 왔었어.” 고은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쏘아보았고 그는 그녀의 생각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네가 받을 모든 주식들 있잖아. 할머니와 진호영, 그리고 유경이의 지분까지 너에게 줬다던데, 맞지?” 고은영은 차갑게 한 마디로 대답했다. “맞아요.” 드디어 그의 목적을 직접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더욱 차가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차가운 시선에 조금 떨린 듯 말을 이어갔다. “그 주식들은 사실 네 어머니가 너에게 남긴 거니까 너에게 돌아가야 맞아.” “그래서 저에게 돌려주기 위해서 이곳에 부른 거죠?” 고은영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그가 주고자 한다면 왜 이제서야 이리 말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다. 진성택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고 그의 눈빛에는 죄책감이 떠올랐다. “미안하지만 그 주식은 네게 돌려줄 수 없을 것 같아.” “돌려줄 수 없다고요? 왜요?” 그의 말은 너무도 간단했다. ‘할 수 없다'라는 말이 또다시 진유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거 같았다. 진유경, 정말 독특한 존재다. 역시나 양딸이 모든 것보다 우선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짜로 진씨 가문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두 사람의 양부모는 하나같이 그녀를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너희 둘째 오빠가 그 주식들을 되찾고 나서 진씨 가문의 모든 재정적 지원을 끊어버렸어. 지금 그들은 전부 저축해두었던 돈을 쓰고 있어.” 모든 지원을
하지만 진성택은 다르다. 결국 그녀와 혈연관계가 있기 때문에 배준우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 시간 후, 배준우는 고은영을 밀크티 가게에 데려다주었다. “내가 같이 들어갈까?” 배준우가 물었다. “준우 씨는 그냥 기다려요. 당신을 보면 아마 바로 저세상으로 갈지도 몰라요.” ‘이 녀석 입이 참!’ 하지만 고은영이 말이 맞았다. 예전에 진성택과 량천옥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면 진성택은 항상 배준우에게 진유경을 미래의 아내로 삼으라고 했었고 그때 배준우는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굳이 고은영과 결혼했다. 지금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진성택이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운명의 미묘함을 탄식할 것인가? 아니면 진유경 때문에 속상해할 것인가? 고은영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눈에 보였다. 작은 원탁 옆에 앉아 있는 진성택이. 그는 손에 밀크티를 들고 있었다. 고은영이 두 걸음 내딛자마자 진성택도 그녀를 보았다. “왔니?”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랜만에 본 그의 얼굴은 확실히 더 노화되어 보였고 얼굴색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특히나 얼굴이 누렇게 변했고 예전만큼 눈빛도 밝지 않았다. 고은영은 이제 막 기운이 다 빠진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진성택은 확실히 지금 당장이라도 세상을 떠날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아마 이번이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고은영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이거 마실 수 있어요?” 진성택은 손에 들고 있던 밀크티를 문득 깨닫고 곧바로 그녀에게 건넸다. “너를 위해 샀어. 여자애들은 다 밀크티 좋아하잖아. 너도 좋아하지?”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밀크티는 그녀의 가장 좋아하는 음료였다. 그런데 배준우와 결혼한 이후로 배준우는 그녀가 밀크티가 몸에 안 좋다며 못 마시게 했다. 진성택은 그녀가 음료를 마시지 않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생각해 보면 나는 사실 유경이에게 이런 걸 사준 적이 없었어. 진씨 가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