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훈은 예은을 빠르게 소파 위로 내려놓았다.예은의 발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핏자국을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렸다.“집에 구급상자 같은 거 있어요?”“네.”예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텔레비전 캐비닛 아래에 있어요.”제훈이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바로 캐비넛 앞으로 걸어가 약상자를 찾아냈다.면봉과 요오드, 반창고, 거즈를 들고 돌아온 제훈은 물건을 탁자 위로 올려두었다.이어 허리를 굽히고 슬리퍼를 벗기려 했다.예은이 깜짝 놀라 발을 안으로 움츠리며 말했다.“그... 그러실 필요 없어요!”“움직이지 마요!”제훈은 예은의 말을 무시하고 바로 발목을 잡아당겼다.슬리퍼를 벗기자 하얀 발이 드러났다. 예은의 발은 하얗고 부드러웠는데 발가락을 안으로 움츠리자, 솜덩이 같은 발이 퍽이나 귀여웠다.제훈은 말없이 상처를 주시했다.살짝 긁힌 곳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흰 피부와 상반된 빨간색이 눈에 띄었다.제훈은 어릴 때부터 독립적인 편이라 상처 치료에는 아주 능숙했다. 발목을 가볍게 쥐고 자신의 무릎 위로 올려 둔 후 면봉에 요오드를 묻혀 조심스럽게 닦아냈다.예은은 정신이 어질해졌다.태어나서 누군가 자신에게 이렇게 대해주는 건 처음이었다.어렸을 때부터 편견, 혐오, 욕설 속에서 자랐던 예은은 커서도 분노, 원망, 이득에 찌들었다.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 자신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치료해 주고 있었다.더구나 그 상대는 신분이 남다른 강제훈이었다.거실은 너무 조용해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만 울렸다. 이어 두 사람의 숨소리를 제외하고 거즈를 감싸는 소리만 들렸다.“아직도 아파요?”상처를 치료하고 제훈이 나지막하게 물었다.예은이 고개를 저었다.아까 느꼈던 고통은 벅찬 마음에 가려져 느껴지지도 않았다.이깟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앞으로 조심해요. 당분간 물 닿지 않게 하고요.”제훈은 다시 예은의 슬리퍼를 신겨주고 조심스레 발을 바닥에 내려두었다.“네...”예은이 고개를 끄덕였고 한참이나 있다가 말을 이었다.“고마워요.”제훈은 조
송예은은 고의로 제훈의 연락처를 차단한 게 아니었다.지금은 왠지 차단하지 말걸, 이라는 생각도 들었다.이런 예은의 기분이 느껴지자, 제훈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제훈은 빠르게 약상자를 정리하고 손을 씻더니 방 구조를 살피기 시작했다.오피스텔은 큰 편이 아니었으나 전체적으로 깔끔했다. 구석구석 맞춤한 가구로 꾸민 오피스텔은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제훈의 시선이 벽에 걸린 액자로 향했다. 누군가 그린 그림을 액자로 걸어둔 것 같았다.그림 작가는 인물 스케치에 재능이 있으나 자세히 보면 전공으로 배운 느낌은 아니었다. 다만 이목구비를 아주 생동감 있게 표현한 것을 높이 살 수 있었다.“그건... 제가 마음대로 그린 거예요.”옷을 갈아입은 예은이 그림을 보고 있는 제훈을 보며 조금 부끄러워했다.“그림에 재능이 있네요.”제훈이 고개를 돌렸다. 예은과 눈이 마주친 순간 제훈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연한 노란색의 편한 원피스로 갈아입은 예은에게서는 나른하지만 부드러운 느낌이 풍겼다.머리는 반쯤 마르고 반쯤 헝클어진 채로 어깨 위로 흐트러졌다. 피부는 조금 핑크빛이 돌았고 잡티 하나 없는 그 얼굴에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제훈은 가슴이 너무 뛰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아니에요. 그냥 취미일 뿐이에요.”예은이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그림을 보고 있는 예은의 시선이 조금 흔들렸다.이제 그림을 배우고 싶었던 나이는 훌쩍 넘겨버렸다.그래서 예은이 말을 돌렸다.“제훈 오빠는 무슨 일로 이 밤에 찾아온 거예요?”“얼굴이 보고 싶기도 하고 내일 저녁 약속을 잡으려고 온 겁니다.” 오피스텔로 오는 길에 강연이 제훈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 가족 모임에 송청아, 나이란, 안택은 물론 전서안까지 참가한다고 했다.이런 자리에 예은이 빠지면 섭섭했다.너무 대수롭지 않게 건넨 말에 예은은 별생각 없이 물었다.“어디인데요?”“주소는 따로 보내줄게요.”“아, 네.”제훈이 예은의 머리카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고개를 들어 제훈을 바라보는 예은의 시선에 의문이 가득했다.‘데이트가 아니라면 우린 무슨 사이지?’‘재벌이 후원하는 연예인?’‘데이트가 아니라면 그저 불장난?’‘날 지금 뭐로 보는 거야!’예은은 마음이 점점 복잡해지고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차오르고 역겨운 기분마저 들었다.예은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제훈의 중저음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데이트는 잠시 미뤄두고 부모님 먼저 뵈러 가자.”“...”기분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았다. 몇 초 사이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분에 예은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부모님을... 만난다고?’‘우리가 벌써 그런 사이인 거야?’‘부모님이라면 설마 그 소문으로만 듣던 강씨 가문 가주와 사모님인 건가?’‘날 마음에 들어 하실까?’예은은 자신이 순식간에 불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그게... 너무 빠르지 않나요?”예은이 더듬거리며 말했다.“우린... 우린...”“왜?”제훈이 깍지를 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눈썹을 치켜세웠다.“날 책임지지 않을 거야?”“그게 아니라...”예은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어떻게 이렇게 된 거죠?”당황해 보이는 예은의 얼굴을 보며 제훈은 흥미진진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첫 만남의 예은은 차갑고 곁을 주지 않는 냉미녀같았다. 하지만 모든 위장을 벗어던진 예은은 그저 귀엽기만 했다.“언젠간 만나야 하지 않겠어? 조금 앞당길 뿐이야.”제훈의 다정한 말투에 예은은 화가 나지만 화를 낼 수 없었다.‘젠장, 너무 잘생겨서 욕도 나오지 않아.’“그만 걱정해.”제훈이 예은을 다독였다.“내일 우리 부모님을 만나는 건 너뿐만이 아니니까 부담가지지 마.”“네?”예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한꺼번에 여러 여자를 데리고 가는 거예요?”“...”그렇게 카리스마가 넘치던 제훈도 이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입꼬리를 실룩이던 제훈은 예은을 품 안에 넣고 꼭 껴안았다.“대체 하루 종일 무슨 생각만 하는 거야?”
제훈은 두 손을 위로 들고 뒤로 물러섰으나 입가에는 웃음이 가득했다.예은과 제훈, 두 사람의 오해가 드디어 모두 풀렸다. 제훈은 그 누구보다도 용감했다. 세훈처럼 짊어진 게 많지 않아 고민할 게 적었고, 상대를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들여 고민할 수 있었다.제훈이 가장 잘하는 건 결단력 있게 움직이는 것이었다.상대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채면 제훈은 빠르게 한 걸음 더 다가갔고 상대만 좋다면 바로 집까지 안고 튈지도 모른다.그리고 현재, 제훈은 성공적으로 예은과의 세 번째 만남에 가족 모임 약속까지 잡았다.예은이 머리를 말리고 나니 어느새 깊은 밤이 되었다.제훈은 교양을 갖춘 가문 도련님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그럼 이만 쉬어, 난 먼저 가볼게.”예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제훈이 눈썹을 치켜세우는데 예은이 갑자기 다급하게 제훈을 불러세웠다.“잠시만요!”제훈의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예은이 주방으로 달려가고 또 방까지 다녀오더니 큰 쓰레기봉투를 건넸다.“아래 분리수거를 하는 곳에 버려주세요! 감사합니다!”“...”검은색 봉투를 건네받은 제훈의 표정이 조금 구겨졌다.강씨 가문 셋째 도련님이자 국제 최고의 해커가 해보지 못한 일은 없었다.하지만 분리수거만큼은 스스로 해본 적이 없었다.“아래층으로 내려가 오른쪽 코너에 있어요. 분리수거 부탁드려요!”“...”‘그래.’‘내가 좋아하는 여자인데 뭘 해주지 못하겠어.’“그럼 일찍 쉬어.”제훈은 짧은 인사를 건네고 몸을 돌려세웠다.제훈이 떠나고 문이 닫히자 빠르게 방으로 돌아간 예은이 침대 위로 풀썩 누워 빠르게 타자를 시작했다.삼인조 톡 방.[송예은: 강연아! 나이란!][송예은: 살려줘! 나 진짜 홀린 것 같아!][송예은: 제훈 오빠가 내일 가족 모임 같이 가재!]한번에 연속 세 통의 톡을 남기자 빠르게 누군가 답장을 했다.[나이란: 망했어 망했어. 세윤 오빠도 나보고 같이 가자고 했단 말이야. 살려줘. 지금 후회하면 늦어버린 걸까?]
강연은 외출하기 전에 동전 몇 개를 챙겼다.그리고 같은 동네에 사는 재벌 집 언니의 차를 타고 동네를 떠나 인파를 뚫고 지하철 즐거운 여행을 시작했다.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강연이 지하철로 움직일 거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한 강연이 서안에 전화를 걸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핸드폰을 낚아챘다.“어?”강연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고 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쉿.”서안이 검지로 입술을 가려 말하려던 강연을 멈추게 했다. 이어 강연의 핸드폰을 들고 몇 번 버튼을 누르더니 핸드폰의 위치추적과 신호를 끊어버렸다.그리고 강연의 손을 잡은 서안은 조심스럽게 인파 속으로 파고들며 더 안으로 몸을 숨겼다.강연은 이런 짜릿한 기분에 흥분이 되었다.서안은 강연을 어느 골목길로 데려갔고 그제야 반짝이는 강연의 두 눈을 확인했다.“자기야, 우리 지금 첩보 영화 찍는 것 같지 않아?”서안이 주변을 둘러보고 안전하다는 걸 확인한 뒤에 강연을 다시 바라보았다.그리고 손을 들어 강연의 이마에 땅콩을 먹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왜 이렇게 위험한 행동을 한 거야? 그러다가 정말 문제라도 생기면 어떡하려고?”강연은 이마를 손을 매만지며 앓는 소리를 냈고 억울하다는 듯 입을 삐죽였다.“나는 서프라이즈하고 싶어서 그랬지.”“이게 서프라이즈 맞아? 정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서안이 계속해서 말을 쏟아냈다.“이렇게 돌아다니다가 이상한 사람이라도 마주치면 어떡하려고 했어? 부모님이랑 언니, 오빠들까지 집에 있는 상황에서 도망치면 가족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는 고민해 봤어?”내일이면 인사를 드리려 가는 날이었다. 내일을 어떻게 이겨낼지 아직 답을 찾지 못했는데 또 새로운 산이 생겨버렸다.“난 하나도 두렵지 않은걸!”강연이 헤헤 웃음을 터뜨렸다.“자기가 꼭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이런 건 오빠한테 쉬운 일이잖아!”“...”환하게 웃는 그 얼굴을 보며 더 이상 싫은 소리가 나오지 못했다.“그래. 하지만 앞으로는 절대 이
“강연아, 저번에 마음잡고 열심히 해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서 김성재 씨랑 얘기를 나누며 꽤 괜찮은 작품을 골라봤어. 지금 같이 볼래?”매니저 조혜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 말에 강연은 바로 얼굴을 굳혔다.“네, 수고하셨어요.”조혜영과 김성재가 시선을 마주하고 무언가 신호를 주고받더니 바로 작품 얘기를 시작했다.“지금 골라둔 작품은 총 다섯 작품이야. 드라마 두 편, 영화 세 편. 이 다섯 작품은 제작진이든 캐릭터든, 각본이든 모두 수준급이더라고. 업계 평이 S+, 심지어 S++이라고 극찬하고 있어.”“첫 번째 영화는 유명 감독의 복귀 작품이라 상을 바로 노릴 수 있고 다른 한편은 정극이라 배역이 좋은 편이야. 마지막 영화는 첩보물이라 물오른 연기를 보여줄 수 있어.”“드라마 같은 경우에는 하나는 유명 웹 소설을 모티브로 한 작품인데 여자 주인공 비중이 많은 편이고 원작의 팬층도 두꺼운 편이야. 남은 한 편은 주말 드라마인데 대중성을 사로잡을 수 있어.”“여러 가지 고민을 해보고 어느 작품이 더 끌리는지 말해봐.”조혜영이 간단한 소개를 마치고 결정권을 강연에게 넘겼다.강연은 대본을 쥐고 간단하게 몇 줄 읽어보더니 영화 대본을 가리키며 말했다.“저는 이거 해보고 싶어요.”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대본을 확인하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장 가능성이 작다고 판단한 대본인 첩보물이었다.이 영화는 배우의 연기가 아주 중요했고 악조건인 촬영 비중이 컸다. 평생 예쁨만 받고 자란 공주님이 정말 해낼 수 있을지 장담이 없었다.“김성재 씨, 조혜영 언니 지금 걱정이 되는 걸 이해해요. 하지만 저도 최선을 다해 임할 거고, 절대 제작진 발목 잡지 않을 거예요.”강연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강연 씨, 저희도 강연 씨의 재능과 의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성급하지는 않을까요?”김성재가 조금 직설적으로 말했다.“만약 이 작품에서 조금의 틈을 보인다면 네티즌들이 절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 앞으로 영화 작품이 끊길 수도 있는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강연은 미소를 머금고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옆의 조혜영은 원망 가득한 표정으로 서안을 바라보았다.서안은 강연을 해칠 뿐만 아니라 조혜영의 앞길도 캄캄하게 만들었다. 조혜영은 돌아가서 바로 아티스트 보호 대책을 세울 준비를 하겠다고 다짐했다.그리고 감독이 이 조건을 받아들일지도 의문이었다.“감독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작품에 출연하겠다고 약속하면 받아들일 거예요.”그 말을 들은 조혜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그래 전서안이 누구야? 최상급 배우+ 영화 탑급 배우잖아. 전서안이 출연만 하면 뜨지 못하는 작품이 어디 있어? 전서안이 출연만 했다 하면 매번 신기록이잖아.’첩보물 영화감독이 강연을 탐탁지 않게 본다고 해도 서안이 이런 조건을 건다면 어떻게든 허락할 것이다.뭐가 어찌 되었든 상대는 서안이었다.옆의 김성재는 침착하게 안경을 고쳐 쓰고 덤덤하게 감독님에게 연락했다.자신이 모시는 도련님이 어떤 사람인지는 김성재가 제일 잘 알고 있었고 늘 준비하고 있었다.대본을 읽어 내려가는 강연의 얼굴은 흥분에 붉게 물들었다.이 영화 제목은 “스파이”였다.스토리는, 전쟁 속 상대 진영으로 두 명이 스파이로 들어가 임무 수행을 하다가 꼬리가 밟히고 의심스러운 열 명을 한곳에 모아 자백을 받아내는 것으로 시작된다.스파이는 적군의 감시와 고문 속에서 동료들의 배신을 받고 그 상황에서도 정보를 넘겨줄 방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영화는 바로 이 10일 동안, 적과 아군의 생과 사의 대결, 인성의 예측불허와 복잡함을 담았다.강연이 맡고 싶어 하는 주인공 배역은 바로 적군의 진영에 5년간 몸을 숨긴 스파이였다.다양한 신분을 가지고 있는 배역이라 단계마다 변화를 주어야 했다.적군에서 몸을 숨기고 있을 때는 남편 때문에 기생집에 팔려 가는 비운의 여자이자, 적군의 여상사에 의해 구출되어 유명한 칼잡이가 되는 캐릭터였다.예쁘고, 방탕하고, 살인에 한 치의 망설임이 없다. 이게 바로 타인이 바라보는 시선이었고, 사실은 희생정신이
도전이라는 건 성장하고 돌파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강연은 대본을 끌어안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혜영 언니, 감독님이랑 오디션 잡아줘요. 내 신분이 아닌 실력으로 배역을 따내고 싶어요.”강연은 연기를 전공하고 많은 연기 경험을 가진 사람들에 비하면 경쟁력이 많이 달렸다.강연이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캐릭터에 푹 빠져 몰입감 있게 풀어내는 것이었다.“그 시절, 우리는” 작품에서 백연주를 연기할 때 정말 그 시대에 빠져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마음가짐으로 임했다.강연의 말에 조혜영은 기쁘기도 하고 의외라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뭐야? 마음 접은 거야?”조혜영의 반응에 강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조혜영은 강연이 실력으로 절대 배역을 따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아니, 시도라도 해보고 말해야죠.”그래서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뭐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말을 아끼는 게 좋았다.서안이 강연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쓰다듬었다.“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서안은 언제나 강연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응응.”강연이 활짝 웃으며 서안의 품에 안겼다.그때, 밖에서 “펑”하고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문이 열리고 세훈과 세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강연이 서안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세윤이 바로 발을 동동 굴렀다.“이것들이!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공공장소에 무슨 짓거리야?”“무슨 짓이라니?”서안이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강연은 바로 눈을 치켜떴다.‘세윤 오빠는 대체 뭐라는 거야!’“아무것도 아니니까 상관하지 마요.”“뭐 상관하지 마? 어머니랑 아버지가 집에 계신 데 굳이 강연을 불러내야겠어? 정말 간땡이가 부은 모양이구나?”세윤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강연을 서안 옆에서 끌어내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저 녀석이 널 괴롭히지는 않았고? 갑자기 널 불러내서 뭘 한 거야?”“세윤 오빠...”강연은 화가 나기도 했으나 이 상황이 웃기기도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