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이 지나가자 모든 게 파괴됐다.민규현은 검을 막은 뒤 두 눈을 부릅뜨고 앞을 노려보았지만, 독고명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빌어먹을, 도망을 쳐? 젠장, 실력 있으면 다시 겨뤄보자고!”민규현은 이미 떠난 독고명 때문에 화가 나서 주먹을 움켜쥐고 욕을 했다.그러나 아쉽게도 독고명은 이미 떠난 상태였다.텅 빈 거리를 바라보던 민규현은 문득 소채은을 떠올렸다.“큰일이네. 형수님께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겠지?”다른 건 신경 쓸 새도 없이 민규현은 부리나케 달려갔다.웨딩드레스샵에 도착했을 때 민규현은 문 앞에 서 있는 소채은과 천희수를 보았다.소채은이 무사한 걸 본 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형수님, 별일 없으시죠?”민규현이 달려가서 서둘러 물었다.“괜찮은데요. 왜요?”소채은은 자신이 조금 전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몰랐다.소채은이 괜찮다고 하자 민규현이 말했다.“괜찮으시다니 다행이에요! 젠장, 애들은 어디 갔지?”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조금 전 그가 남겨두었던 네 명의 암부 구성원들은 전부 사라졌다.“형수님, 웨딩드레스는 고르셨어요? 다 고르셨으면 얼른 집으로 돌아가요!”민규현은 여기 있다가 무슨 일이라도 날까 봐 황급히 말했다.소채은은 할 일이 없었기에 흔쾌히 승낙했다.“좋아요. 지금 바로 집으로 돌아가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천희수와 함께 차를 타고 떠났다.소채은과 천희수가 무사히 돌아간 걸 본 민규현은 그제야 서둘러 무전기를 꺼내며 자신의 네 부하를 찾기 시작했다.그러다가 그는 앞쪽 골목길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그들을 발견했다.그들에게 다가간 민규현은 그들이 자기 부하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서둘러 허리를 숙이고 네 명의 상태를 살펴보니 정신을 잃은 것뿐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그래서 민규현은 빠르게 그들을 깨웠다.“지휘사님...”네 명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민규현을 보았다.“쓸모없는 놈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얘기해 봐. 너희들은 왜 다 여기 기절해 있었어?”민규현이 물었다.네 부하는
여자는 다름 아닌 문아름이었다.문아름은 이마 앞의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덤덤히 대꾸했다.“갑자기 내가 직접 손을 쓸 생각이 사라졌거든요.”“네? 왜입니까? 저하!”임진형은 의아했다.오늘 일은 그녀가 직접 소채은을 죽여 윤구주를 괴롭게 만들기 위해 계획한 일이었다.그런데 결과적으로 문아름은 소채은을 죽이지 않고 살려뒀다.“이유는 없어요. 그 여자가 갑자기 흥미롭게 느껴졌을 뿐이에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이 있죠. 내가 그 여자를 죽인다면, 내가 그 여자를 질투하고 내가 그녀보다 못하다는 것을 뜻하는 거 아니겠어요?”임진형은 당황하더니 서둘러 말했다.“옳은 말씀입니다! 그런 평범한 인간을 어떻게 존귀한 저하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문아름은 피식 웃었다.“난 그 여자를 죽이지 않을 거예요. 대신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더 괴롭게 만들어줄 생각이에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괴로운 일은 누군가를 잃는 게 아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는 거죠.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에요!”악랄하게 웃으며 말하던 문아름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독고명 씨!”목석처럼 옆에 서 있던 독고명은 문아름의 말을 듣고 대답했다.“네.”“군형 삼마에게 내가 부른다고 전해요.”문아름이 단호히 말했다.“네!”독고명이 대답했다.“난 이번에 소채은이라는 여자가 죽고 싶어질 정도로 괴롭게, 하지만 죽을 수는 없게 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윤구주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을 겪게 되겠죠. 난 그와 결혼할 여자가 어떤 꼴이 되는지 그가 지켜보게 할 거예요! 하하하하하!”...용인 빌리지.민규현은 습격 사건이 있었던 뒤 곧바로 용인 빌리지로 돌아와서 윤구주에게 알렸다.거실에 있던 윤구주는 습격 사건을 전해 듣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채은이는 무사하지?”“네, 형수님께서는 무사하십니다!”윤구주는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윤구주가 가장 걱정하는 건 다름 아닌 소채은이었다.소채은은 무도를 전혀
“그놈은 검을 아주 잘 다뤘습니다. 모든 공격이 무자비하고 검을 뽑을 때마다 검과 한 몸이 된 것처럼 움직였습니다. 그놈은 제가 지난 몇 년간 상대했던 놈 중 최강이었습니다!”민규현은 독고명의 검법을 되짚으면서 참지 못하고 말했다.윤구주는 그 말을 듣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잠시 뒤 그는 문득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설마 독고 일가 사람인가?”“네? 저하, 혹시 당시 패도류라고 불렸던 독고 가문 말씀인가요?”윤구주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화진에서 검법으로 대가 9품 이상인 것은 독고 일가뿐이야. 독고 가문의 패도멸정참은 무자비하고 위력이 엄청나다고 해!”민규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럴 리가요. 당시 독고 일가는 부성국과 내통하여 저하에게 전부 참살당했을 텐데요. 그리고 가주였던 독고영준은 저하 앞에서 사죄의 의미로 자결하지 않았습니까? 독고 일가 사람들이 살아있을 리가요!”독고 가문 역시 화진의 오래된 가문 중 하나였다.그러나 그들은 더 뛰어난 검법을 위하여 부성국 사람과 내통하여 화진의 기밀을 누설했고, 윤구주가 결국 그 일을 알게 되었다.윤구주는 홀로 독고 일가에 난입했고 그곳에서 혼자 독고 일가의 열 명을 해치웠다.그리고 마지막에 가주 독고영준은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고 잘못을 인정하며 자결했다.그때 윤구주는 겨우 스물이었다.그때로부터 몇 년이 흐른 지금에도 윤구주는 그 일을 생생히 기억했다.“당시 독고 일가 사람들이 다 죽은 건 아니야.”윤구주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네?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고요? 하지만 저하께서는... 당시 독고 일가 사람들을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까?”민규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독고 일가가 화진의 기밀을 너무 많이 누설한 탓에 화진의 천자는 독고 일가를 말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었다.윤구주는 천자의 명령을 받고 독고 일가를 멸살하러 간 것이었다.그런데 그런 윤구주가 독고 일가 사람 중 생존자가 있다고 하다니.“난 독고 일가를 멸살하라는 천자의 명령을 받았었지.
민규현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그 말에 윤구주의 걱정이 점점 더 커졌다.윤구주는 적이 두렵지 않았다.당시 10국을 상대하면서도 그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그러나 지금은 어떤가?그가 두려워하는 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 입는 것이었다.예를 들면 소채은 말이다.소채은은 무도를 익히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그녀에게 해를 가하는 건 아주 쉬웠다.그러나 문제는, 상대방이 손을 쓰려고 해놓고는 결국 소채은을 해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민규현, 지금 당장 서울 암부에 연락해서 그 여자가 아직도 서울에 있는지 알아봐 !”윤구주가 갑자기 날 선 말투로 말했다.“혹시 문아름 그 악랄한 여자 말입니까?”민규현이 고개를 들었다.“맞아!”민규현은 그 말을 듣더니 움찔했다.“저하 말씀은 형수님을 해치려고 한 사람이 그 여자란 말입니까?”“확실하지는 않아. 하지만 그 여자 성격에 내가 살아있거나, 내가 결혼하려 한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직접 소채은을 해치려고 할 거야.”윤구주의 서늘한 눈빛에서 엄청난 살기가 느껴졌다.그 말을 들은 민규현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정말 악독한 여자네요! 당시 저하를 독으로 해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형수님까지 해치려고 하다뇨. 정말 괘씸하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하. 지금 당장 둘째와 셋째에게 연락해 당장 사람을 파견해 상황을 알아보라고 하겠습니다!”민규현은 말을 마친 뒤 곧바로 떠났다.민규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윤구주의 시선이 점점 더 싸늘해졌다.폭풍전야였다.윤구주는 이미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예감은 아마 곧 화진 전체를 뒤흔들 것이다.게다가 그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누군가 알게 됐을 것이다....습격이 발생한 뒤로 윤구주는 곧바로 소채은을 보러 갔다.이때까지만 해도 소채은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방 안에서 소채은은 자기가 고른 웨딩드레스들을 입어서 윤구주에게 하나하나 보여주고 있었다.“구주야, 이게 예뻐, 아니면 저게 예뻐? 우리 결혼
그 말에 윤구주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윤구주는 그녀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채은아, 그 여자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하지는 않았어? 혹은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어? 얼른 얘기해줘!”윤구주가 다급히 물었다.“나한테 무슨 짓을 하지는 않았어. 그냥 나한테 이상한 말을 하던데.”소채은이 기억을 떠올렸다.“무슨 말?”소채은은 잠깐 생각한 뒤 말했다.“처음에는 나한테 왜 그 아이를 구했냐고 물어보더니 내가 이번에 살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아서라고 하더라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앞으로 항상 오늘처럼 운이 좋지는 않을 거라고 했어.”그 말을 들은 윤구주는 안색이 어두워졌다.보이지 않는 살기가 그의 몸에서 서서히 퍼져나갔다.“구주야, 왜 그래? 안색이 왜 이렇게 나빠?”소채은은 윤구주의 안색이 달라진 걸 보고 서둘러 물었다.“아무것도 아냐. 채은아, 요즘엔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자.”윤구주가 소채은의 손을 잡고 말했다.“네 집에서 같이 지내자고? 그건 좀 그렇지 않을까? 우리 아직 결혼하지 않았잖아!”소채은은 윤구주가 흑심이라도 품었다고 생각해 서둘러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채은아, 오해야. 같이 지내자는 건 네 안전을 위해서야.”윤구주가 말했다.“안전? 내가 안전하지 못할 게 뭐가 있어? 바보야, 너 설마 혼전 공포증 같은 거 있어? 왜 자꾸 내 안전을 걱정하는 거야? 우리 강성은 전국에서 치안이 가장 좋아. 그러니까 마음 놓아.”말을 마친 뒤 소채은은 윤구주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윤구주는 그녀에게 진실을 얘기할 수 없음이 허탈했다.소채은이 본인을 전혀 걱정하지 않는 것 같자 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꼭 네 집에 있을 거면 민규현이 24시간 널 지키게 할게.”그렇게 날이 어두워져서야 윤구주는 돌아갔다.그는 떠나기 전 특별히 민규현에게 반드시 24시간 소채은을 지켜야 한다고 당부했다.습격 사건을 겪어본 민규현은 소채은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고 있었기에 방심할 수가 없었다.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저하, 걱정하지
천하회 노정연은 윤구주를 알게 된 뒤로 정말로 용인 빌리지의 문지기가 되었다.박창용이 빌리지에 모습을 드러내자 천하회의 서양이 처음으로 반응했다.“누구시죠?”박창용은 그들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걸어갔다.“음? 군인인데요?”서양은 당황하며 말했다.백경재는 갑자기 두 다리에 힘이 풀려서 말했다.“세상에... 저 사람은 창용부대 총사령관인데!”창용부대라는 말에 서양은 깜짝 놀라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천하회가 대단하긴 했지만 창용부대가 그들보다 더 대단했다.그들은 무려 백만 군대를 통솔하기 때문이다.박창용은 백경재를 무시하고 성큼성큼 걸어가서 우렁차게 물었다.“저하는요?”백경재는 헐레벌떡 뛰어갔다.“총사령관님, 저하께서는 지금 내전에 계십니다.”“음, 알겠어요.”박창용은 말을 마친 뒤 곧장 내전 안으로 들어갔다.박창용이 들어가는 걸 보며 서양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했다.“백 대사님... 윤구주 씨 대체 정체가 뭔가요? 창용부대 총사령관이 직접 윤구주 씨를 만나러 오다뇨!”백경재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곧 알게 될 겁니다!”서양은 침을 꿀꺽 삼켰다.예전에 그의 앞에서 시건방을 떨면서 무례하게 굴었던 걸 떠올린 서양은 콱 머리 박고 죽고 싶었다.내전.윤구주가 소채은과의 통화를 끝내자마자 박창용이 들어왔다.“저하!”군복을 입은 박창용은 윤구주를 보자마자 예를 갖췄다.“자네가 여긴 어쩐 일이지?”윤구주는 친한 사이인 박창용이 다가오자 살짝 의아해했다.“저하의 결혼식인데 제가 어떻게 참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박창용이 우렁차게 말했다.“내가 결혼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윤구주가 물었다.“주세호 그 자식이 알려준 겁니다. 그런데 저하, 결혼하신다는 걸 왜 제게 알리지 않은 겁니까?”윤구주는 웃으며 말했다.“훈련하는데 방해될까 봐 그랬지.”“훈련이 뭐 대수라고 그러십니까? 저하의 일이라면 그 어떤 중요한 일도 저하 뒷전인데 말입니다.”박창용의 말에 윤구주는 호탕하게 웃었다.“저하, 대체 어떤 복 많은
두 사람의 이름이 거론되자 윤구주는 저도 모르게 그리운 마음이 들었다.그들은 예전에 그와 호형호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민규현이 얘기했을 거야.”윤구주가 중얼댔다.“하하하하! 다행이에요.”박창용은 기쁘게 웃었다.“정태웅과 천현수가 저하께서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감격해서 울지도 모릅니다!”윤구주는 웃었다.그의 말대로였다.다른 두 사람은 그가 살아있다는 걸 알면 엄청 감격할 것이다....화진, 서울.웅장하고 장엄한 저택 문 앞에 몇 미터 높이의 거대한 비석이 세워졌다.비석은 무겁고 오래되었다.그 위에는 힘 있는 글씨체로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암부!그곳은 화진 암부의 최고사령부이자 화진 암부의 권력중심이었다.이때 암부 밀실 안에는 마른 몸에 흰 얼굴의 흰옷을 입은 남자가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그는 외모만 보면 모범생처럼 보였지만 그의 눈동자에서 피를 갈망하는 늑대의 습성이 은근히 보였다.그가 바로 암부 3대 지휘사 중 늑대 천현수였다.그는 모범생처럼 점잖게 생겼지만 암부에서 무자비하고 무정하기로 소문났다. 심지어 적을 절대 가만두지 않았다.당시 부성국이 남해에서 소동을 일으켰을 때, 천현수는 홀로 부성국의 무사 수백 명과 싸웠다. 마지막에는 홀로 부성국까지 쫓아가서 그곳에 불을 질러 오래된 궁전들 십여 개를 홀라당 태웠다.그 뒤로 부성국은 그를 철천지원수로 여겼고, 천현수가 절대 부성국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암부에서 3대 지휘사 중 천현수가 가장 계략에 밝았다. 그는 암부의 크고 작은 일들, 거의 모든 일들을 처리했다.하지만 이때 암부에서 가장 냉정하고 기지가 넘친다고 평가받는 그는 큰일이라도 난 사람처럼 바짝 긴장한 얼굴이었다. 심지어 그는 앉아있지도 못하고 계속 서성거렸다.한참이 지나서 공처럼 뚱뚱한 사람이 대전에 모습을 드러냈다.“천현수, 왜 이렇게 급히 날 부른 거야? 내가 얘기했잖아. 1년 동안은 저하를 위해 애도해야 하니 절대 날 방해하지 말라고.”그 말과 함께 뚱뚱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정태웅이 이를 건네받아 민규현이 보내온 전보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윤구주가 살아있고 지금 강성시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눈앞이 깜깜해져 육중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미친, 정태웅, 뭐 하는 거야?”정태웅이 시체처럼 그 자리에 드러누워 있자 천현수는 어이가 없었다.바닥에 누운 정태웅은 꼼짝달싹하지 않고 눈물만 펑펑 흘리며 말했다.“건드리지 마. 일단 나한테 진정할 시간을 좀 줘.”“...”천현수는 할말을 잃었다.그렇게 정태웅은 바닥에 누워 1분을 진정했다.그러다 마치 회오리처럼 육중한 몸을 홱 일으켰다.“저하가 살아있다니, 늑대야, 빨리 내 싸대기 좀 후려쳐봐. 이거 꿈 아니지?”정태웅은 천현수의 두 손을 잡더니 싸대기를 쳐달라고 했다.“미친놈.”천현수는 정태웅을 상대하기 싫어 욕설을 퍼부었다.하지만 정태웅은 화난 기색 하나 없이 온 힘을 다해 자기 뺨을 서너 번 후려쳤다.볼이 얼얼해져서야 정태웅은 “어머나” 하고 소리를 지르며 흥분하기 시작했다.“와, 미친, 꿈이 아니야!”“이게 다 진짜라고?”“저하가 정말 아직 살아있다고?”천현수는 그런 정태웅을 째려보며 말했다.“모자란 놈아. 입 좀 다물면 안 돼? 형님이 언제 우리를 속인 적 있어? 저하가 살아 있다는 소식은 아마 확실할 거야.”이를 들은 정태웅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폴짝폴짝 뛰기까지 했다.그러다 천현수를 끌어안고 소리쳤다.“아하하하하!”“저하가 아직 살아있다니!”“형님이 아직 살아있다니!”천현수는 정태웅을 바로 밀어냈다.“모자란 놈아, 소리 낮춰!”정태웅이 말했다.“낮추긴 개뿔. 저하가 아직 살아있다는데 어떻게 진정해? 온 천하에 알려도 모자랄 판에.”“그러니까, 이 모자란 놈아, 입 좀 다물라고. 형님에 전보에서 단단히 당부했어. 저하가 살아있다는 소식은 너랑 나 두 사람 외에는 절대 발설하면 안 된다고.”“발설하는 순간 죽는대.”잉?정태웅이 넋을 잃었다.“왜?”“저하가 살아있다는데 잔치판을 벌려도 모자랄 판에.”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전법이 발동되면 서울 수천만 사람들이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야. 비록 이길 자신은 없지만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화진의 백성을 위해 싸우겠다. 구주군과 금위군의 여러 장수들은 듣거라. 짐이 전사하면 너희들이 나라를 지킬 책임을 지고 계속해서 적들을 섬멸하라.”임정설은 장군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나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홀로 서울 사령부로 날아갔다.서울 사령부는 진동왕과 수비영이 도착하기 훨씬 전에 함락된 상태였다. 주둔지는 죽음의 적막에 휩싸여 있었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말라붙은 백골들이 널브러진 참혹한 장면뿐이었다.당시 강적의 침입을 받은 주둔지의 병사들은 한 명도 물러서지 않고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적들과 맞서 싸웠을 것이다.이 생각에 임정설의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이곳에 있는 자들은 모두 우리 화진의 자랑이다. 저 요망한 것들이 화진을 어지럽힌 지 얼마나 되었느냐? 이 빚을 짐이 갚아 내지 못하더라도 화진 자손들이 반드시 값나낼 것이다.”그는 절대 화진의 혼란에 맞선 마지막 황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선인이 걸어온 길을 밟으며 그의 발걸음은 더욱 확고해졌다.이 순간 황운이 임정설의 몸에 서리더니 새로운 국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순간부터 그는 특정된 누군가의 왕이 아닌 천하 만민이 우러러보는 황제가 되어 있었다.황도가 더해지자 임정설의 기세는 한층 더 강해졌다. 그는 사령부 빌딩 최상층에서 서울을 어지럽힌 장본인을 마주했다.검은 도포를 걸친 그 자는 사악한 부적으로 몸을 감싼 채 요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바로 그가 전법으로 서울을 뒤덮고 있었다.“참으로 예상치 못했어. 화진에 또 한 명의 황자가 나타나다니. 윤구주는 정말 신기하다니까. 자신의 기운으로 국운을 바꾸고 자네의 운명까지 바꿔놓았군. 하지만 내가 충고 하나 해주지. 임정설 자네가 황자가 된 이상 사흘을 넘기지 못할 것이야. 넌 사흘 안에 목숨을 거둘 것이란 말이지.”검은 도포를 입은 사람은 임정설이 죽음을 각오하고 온 것을 알아
국주 임정설은 해청현의 음기를 제거한 후, 그를 보호하던 기운까지 걷어내 양기로 해청현을 완전히 눌러 버렸다.이게 바로 미친 스님이 말했던 진정한 자제력이었다.“해청현은 수법만 닦고 수도는 하지 않았으며 몸만 수련할 뿐, 마음은 단련하지 않았지. 그러다 보니 결국 다 헛것이 되어버린 거야.”미친 스님은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그는 해청현에게 타고난 수도의 체질을 주었지만 그에 걸맞은 의지를 주지 않았다. 그렇게 해청현은 더는 감당하지 못하고 되려 휘말려버린 것이었다.임정설의 머리 위엔 성스러운 빛이 맴돌았고 온몸엔 천지를 뒤덮을 만큼의 정기가 흘러넘쳤다. 해청현은 결국 싸움에서 져버렸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도 임정설처럼 황자급 경지였다면 이겼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작 두 사람의 경지가 같았다 해도 여전히 자신이 완전히 압도당했을 거라는 걸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임정설은 손바닥을 휙 내리치더니 끝까지 미련을 품던 해청현을 그 자리에서 즉사시켰다. 그는 영혼조차 남지 않은 채 완전히 소멸당했다. 이것이 바로 겉보기엔 수련했을지 몰라도 한 번도 진정한 수도의 길에 들어서지 않았다는 증거였다.“국주님이 이렇게까지 강했다고?”공수이는 멍하니 중얼거렸다.“그러게 말이야. 어떻게 이렇게까지 강해졌지?”진동왕은 부러움과 질투, 그리고 복잡한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예전에는 그가 임정설보다 더 강했었고 임정설은 국운 덕에 간신히 그를 이길 정도였으니 말이다.하지만 이젠 내공 차이가 너무 벌어져서 더 이상 비교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그제야 깨어난 백호는 조금 전 자신이 국주를 진왕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백호, 널 속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넌 내가 올 때까지 버티지 못했을 테니까...”임정설은 양기를 끌어내어 백호의 몸속에 주입했고 그의 정기를 빠르게 회복시켰다. 이렇게 되면 백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회복할 것이었다.그 모습을 본 공수이와 진동왕은 또다시 멍해
“뭐? 저게 누구지? 지금 화진에 저런 강자가 또 있었다고? 설마... 저자가 바로 구주왕이란 말인가?”청현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당황스레 외쳤다.누가 알았겠는가, 이 결정적인 순간에 고수가 나타나다니!“젠장... 네가 누구든 상관없다!”“나는 반드시 백호를 죽인다!”청현은 더는 여유가 없었다.상대의 기세는 너무나도 강력했고, 이미 백호와 싸우면서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그와 맞붙는 건 목숨만 붙어 있을 뿐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청현은 그저 백호부터 처리하려 했다.“이런 건방진 것! 우리 화진의 전쟁 신이 너 같은 흉수에게 쓰러질 수는 없다!”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활기찬 천 음 소리!금빛 실루엣이 구름을 뚫고 내려오더니 손바닥으로 청현을 튕겨냈다!눈앞의 인물을 본 청현은 잠시 얼어붙었다. 모르는 인물이다.하지만 이 압도적인 기운은 분명 고위자일 것이다.화진에서 구주왕 말고는 누가 이런 존재감을 뿜어낼 수 있겠는가?기절해 있던 진북왕은 익숙한 기운에 눈을 번쩍 떴다.그리고 그 실루엣을 본 순간 기절할 뻔했다.“이런! 임정설! 너 황자가 된 거야!”“흠? 왕숙께서 실망하셨나 보네요??”금빛 그림자가 사라지며 실체가 드러났고, 그 모습은 바로 용맥에 들어가 수련하던 화진의 현직 왕 임정설이었다.“폐하 만세!”구주군 장병들은 격동된 마음으로 일제히 무릎 꿇고 경례하며 외쳤다.자신들의 왕이 서울로 화진의 백성을 구하러 온 것이다!“임정설?! 그게 어떻게 가능해! 아무리 강해도 극한신경 정도일 텐데!”청현의 얼굴이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졌다.극한신경과 황자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황자 한 명이면 수십 명의 극한신경을 상대할 수 있다!서울에 황자가 주둔해 있다면, 곤륜영역조차 쉽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이런 상황에서 설령 청현이 아무리 천재고 강하더라도 황자와의 싸움은 불가능했다.자칭 수요산 제일검이라던 청현은 위축됐다.그 모습을 본 임정설은 냉소하며 말했다.“이게 바로 검객이란 말인가? 검객의 마음은
진황은 외공만으로 도에 이른 황자였다.어떠한 술법도 수련하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백호가 중얼거리며 ‘진황신공!’을 외치고 있으니 이건 누가 봐도 미친 소리였다.“미쳐야 도를 이루는 법이다. 백호는 앞날이 창창하구먼.” 미친 스님이 아미타불을 외치며 말했다.“미쳤어, 미쳤어! 전부 다 미쳐버렸다고!” 진북왕이 고함을 지르다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기절해버렸다.그 사이 백호의 기세는 끝없이 치솟고 있었다!정신은 나갔지만, 힘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청현은 문득 깨달았다. 백호가 저토록 광폭한 이유—바로 그놈의 몸속에 흐르는 성수의 피였다.“이 썩을 놈... 성수 피가 아니었으면 네가 뭔데 날 상대로 이러는 거냐!”청현은 음기를 뿜으며 맹렬하게 연속으로 공격을 퍼부었다.그 음산한 기세에도 불구하고 백호는 오히려 직선 돌진했다.공격은 완전 예측 불가였다.수요산 검종은 온갖 검술과 전법에 능했지만, 다음 공격이 뭔지도 모르는 미친놈을 상대로는 청현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결국, 또 한바탕 두들겨 맞고 땅바닥을 굴러다니던 중 놀랍게도 백호가 자신의 음신사체를 흡수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내 음기를 집어삼키다니?! 이 괴물 같은 놈!”“음기여 무한하라! 흑검이여, 사악을 베어라!!!”시커먼 흑검이 다시 응집되자, 수백 개의 검날이 연속으로 쏟아졌다.백호의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검은 피를 흘렸지만——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대로 돌진했다!“개자식... 음기야! 나에게 힘을 줘!!”청현은 검을 땅속 깊숙이 꽂았다.지맥에서 미친 듯이 영기를 빨아들이자, 머리 위에 떠 오른 음기 마기의 형상은 산만큼 거대해졌다!그 압도적인 힘으로 청현은 백호를 단숨에 쓰러뜨렸다.이건 이미 백호가 감당할 수 없는 한계치를 훨씬 초과한 위력이었다.쿵!!백호는 그대로 땅에 쓰러졌지만, 그런데도 그는 의식을 잃지 않았다.다만 입에서 나오는 건 누가 들어도 미친 소리였다.“황이 온다... 황... 황이 온다....
“우리 스승 말이야, 진짜 고집쟁이에다 구닥다리야. 정의와 사악은 절대 함께할 수 없다고 믿고 목숨 걸고 몇백 년 동안 싸우고 피 흘렸지만 무슨 소용이 있어? 인마 좀 없앤 거 빼고는...?”“스승께서 날 산에서 내려가 속세의 삶을 보라고 하신 건, 결국 수련을 위한 경험이었겠지. 하지만 세상을 직접 겪고 나서야 똑똑히 알게 됐어. 이 세상은 결국, 강한 자가 무적이고 이긴 자가 왕이 되는 법이야...”“세상에는 애초에 정의와 악, 흑과 백 따윈 존재하지 않아. 선악의 기준이란 결국 입만 살은 자들이 지껄이는 헛소리일 뿐이지. 역사가 진실이라고 믿어? 예로부터 어느 왕조의 흥망이 피바다와 시체더미 없이 이루어진 적이 있었나?”“무릇 장수가 공을 세운다는 건, 수만의 백골 위에 선다는 뜻이지. 그 윤구주가 '구주왕'이라 불리는 것도, 결국은 피로 쟁취한 자리 아니겠어?”“주먹이 곧 진리다. 내가 황위에 오르는 날, 선악이든 흑백이든 모두 내 기준으로 정의된다!”“백호, 이제 죽어라.”청현이 공격하려던 찰나 하늘 위의 백호가 먼저 움직였다. 다시 성수인을 발동하더니, 성수의 허상이 실체로 변해 거대한 기운을 모은 주먹을 뻗었다.그 주먹은 하늘을 가르고 청현을 향해 날아갔다.그러나 청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차가운 음기와 사기 담은 손으로 그 주먹을 받아내고 동시에 백 자 길이의 흑검을 형성해 단칼에 성수의 허상을 두 토막 내버렸다.그 검이 날아간 자리에는 구름이 쪼개졌고, 서울 상공을 덮고 있던 먹구름은 그 검기의 파도에 휩쓸려 모두 흩어졌다.먹구름이 사라졌지만, 서울 상공에는 여전히 짙은 요기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마치 태양조차 삼키려는 어둠의 장막처럼.“진법까지 있었어?! 대체 어느 놈이, 언제 이따위 대형 진법을 몰래 깔아놓은 거야?!”진북왕은 혈압이 오르다 못해 피까지 토할 지경이었다.이건 곧 청현이 최종 보스가 아니라는 뜻이다!백호가 청현을 이긴다 해도 그보다 더 강한 놈이 있다는 얘기다.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백호가 청현의
성수인 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야 진정한 전쟁이 시작된다!백호의 두 눈은 완전히 야수의 눈으로 변했고, 싸늘한 눈빛으로 청현을 노려봤다.“몸 풀었으니 이제는 진짜 싸움이다. 서요산 검사야, 어디 한번 버텨봐라?”성수와 하나가 된 백호는 이제 기술 따윈 필요 없었다. 무적의 성수, 오직 전투만이 답이다!백호가 다시 돌진했다. 성수인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기가 청현의 양기를 단번에 압도했다.순식간에 전세 역전이다. 이번엔 청현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처지다.그 대단한 서요산 검기는 성수의 수호막을 하나도 뚫지 못했다.둘은 하늘에서 땅으로, 지하에서 다시 아홉 겹 구름 위로 날아오르며 싸웠다.쾅! 쾅쾅쾅!구름 위로부터 울려 퍼지는 격전의 소리는 천둥을 방불케 했고, 땅이 울리는 순간 진북왕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서요산 검종의 검객이 이렇게 강했단 말인가...백호 저 자식은 또 뭐야? 그냥 제자가 아니라 괴물이잖아?’진북왕은 인생 전체가 부정당한 기분이었다.‘난 지금까지 도대체 뭘 수련한 거지...?’쾅!!다시금 천지를 울리는 소리와 함께 청현은 하늘에서 땅으로 수직 낙하하였다.지면을 강타하며 피를 뿜었고 온몸은 찢기고 뼈는 대부분 부서졌다.그 순간 하늘에서는 거대한 성수의 허상이 떠올랐다.서울 상공을 덮은 그림자는 더욱 짙어진 검은 구름을 만들었고 음기가 태양을 가리는 순간 청현도 정신적 혼란 상태에 빠졌다.“말도 안 돼... 난 양기를 끌어왔어! 저런 사악한 자들을 억제하려고!”“악은 정의를 이길 수 없다며! 젠장...!” 청현이 이를 악물고 낮게 으르렁댔다. 포기할 수 없었다. 아니 절대로 무릎 꿇을 수는 없었다!그는 도를 위해 태어난 자. 반드시 입도할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음풍이여 올라와라!”그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슛— 하고 일어나서 온몸에서는 살기가 폭발했고, 그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단 악마 그 자체였다.대지가 진동하고 지하 깊은 곳의 음기가 그의 주변으로 솟아올랐다.“화극대법! 음기입체!”
부우우웅!청현은 땅과 하늘의 기운을 끌어모아 음과 양이 모두 담긴 영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백호 악마야! 마법의 검을 받아라!”순간 천지가 진동했고 양의 힘이 검을 타고 맴돌면서 날카로운 검빛이 한층 한층 휩싸였다. 산이 흔들리고, 서울 전체에 끔찍한 검 소리가 울려 퍼졌다!청현의 인간성은 별로이지만 실력 하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백호는 죽음이 코앞에 온 듯한 위협을 느꼈다.위험하다!하지만 백호는 놀라기는커녕 미소를 지었다. 광기 넘친 눈빛으로 완전히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청현의 양기 가득한 검은 하늘과 땅을 찢을 듯 백호를 향했다. 백호의 가슴엔 피가 터지고 갈비뼈는 산산조각이 나버렸다.“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이다! 백호는 음신사체를 수련했으니 저 양기 가득한 검 앞에서는 완전히 억눌리는군!”진북왕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이대로라면 청현은 완전히 백호와 청해 모두 쓸어버릴 수 있었다.상성만 아니었으면 청해는 그렇게 허무하게 지지 않았을 것이다.마치 보조자항처럼 위대한 인물이라도 부처님 흉내까지 내면서도 미친 스님 앞에선 꼼짝도 못 하였다.“양이 음을 억제하긴 하지.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내가 보도자항를 이긴 건 진정한 불도를 닦고 열심히 마음속으로부터 수행했기 때문이었지, 그자는 껍데기만 따라 했지 마음으로 도를 닦지 못했으니 진 거야.”“백호가 음혼인 건 맞지만 그게 곧 악마라는 뜻은 아니다.”“청현도 마찬가지야. 그가 진짜 양인지 음인지 아직 판단할 때가 아니야.”미친 스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스승님 제발 그만 하세요.이 상황에서 폼 잡으려고 온 거면 진짜... 제자가 지금 반쯤 죽었는데요?”공수이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후후, 우리 어리숙한 제자야. 바보인 채로 사는 게 차라리 낫지.”미친 스님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음양이니 정의니 하는 건 진북왕엔 관심 밖이다.지금 중요한 건 오직 하나—백호가 청현의 상대가 될 수 있느냐는 것!아니면 최소한 임정설이 폐관
백호는 어깨에 꽂혀 있던 검을 뽑아내더니 청현의 눈앞에서 그대로 부러뜨렸다. 그 광경을 본 청현은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이 미친놈아! 내 검을 부러뜨려? 죽여버릴 거야 이 자식아!”청현은 눈이 빨갛게 변하며 광기 어린 포효를 내질렀다. 그의 분노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온몸을 감쌌다.백호는 그런 그를 비웃으며 콧방귀를 뀌었다.“우리 왕께서 말씀하셨지. 진정한 검객은 검 없이도 싸운다고. 그깟 검 하나쯤이야. 네놈은 검의 형상만 쫓을 뿐 검객의 마음은 가지지 못했어. 그따위로 무슨 검객이냐?”쿵!청현은 완전히 제 정신을 잃었다.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짐승처럼 날뛰며 백호에게 돌진했다. 맹렬한 화염처럼 끓어오르는 기세로 백호와 뒤엉켰다.한편 진동왕 일행은 중상을 입고 거의 죽어가던 청해를 간신히 구조해 냈다.그때 미친 스님이 모습을 드러냈다.그는 직접 손으로 불법을 펼쳐 청해를 보호하기 시작했다.“이 노승은 그저 그의 숨만 붙들어놨을 뿐입니다. 그리고 당신도 상처 그대로 두면 앞으로 몸은 끝장일 겁니다.”미친 스님이 진동왕을 바라보며 말했다.하지만 진동왕은 그것도 잊은 채 다그치듯 물었다.“스님 그 검객은 대체 뭐 하는 놈입니까? 어째서 검객 주제에 그런 무서운 음기를 품고 있는 겁니까?”“청현은 서요산 검종 종주의 직계 제자요. 검종에서도 지극히 큰 기대를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원래라면 차기 거목이 되었을 사람입니다. 하지만 후계자 문제는 검종 종주도 신중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고 그는 청현의 인성을 살펴보려고 일부러 결정 시점을 미뤘습니다. 예상대로 청현은 그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고 원한을 품고 동문 수련생 열댓 명을 중상을 입혔습니다. 그 잔혹함은 종주도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에 비해 후에 등장한 후배 함지우는 호연정기로 심법을 닦고 도에 따르는 삶을 살아가며 신뢰를 얻었습니다.”미친 스님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구주를 움직이게 할 자격이 있는 자는 결국 당대의 진짜 영웅입니다. 그리고 윤구주는 그 모든 자 위에 있는 사람
“너도 억울해할 필요 없어. 네가 화진을 위해 공을 세운 건 사실이지만 그건 전적으로 구주왕에 대한 충성심 위에 쌓인 것일 뿐이야. 앞으로 네가 성장하면 윤구주도 널 통제하지 못할 테니 그 전에 널 제거하려 할 거다.”말이 끝나자 청현은 순식간에 수천 미터를 날아 수비영으로 다시 뛰어들었다.삼척청봉이 차가운 기운을 내뿜으며 그 검 끝은 백호를 정확히 겨눴다.날카로운 검의 울림은 수 킬로미터 안의 모든 이들의 고막을 찢을 듯 진동하며 어지러움을 유발했다. “지껄이지 마. 죽이려면 날 죽여. 내 형제들을 어떻게 죽였지? 그리고 여긴 어딘 줄 아나? 이곳은 화진 서울이야. 너 같은 쓰레기가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백호의 눈빛은 살기로 가득했고 상공엔 살기가 짙게 뭉쳐 수신의 형상이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그 위압감은 실로 섬뜩할 정도였다.솔직히 이런 백호의 모습은 정말 마인으로 오해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그는 윤구주에 대한 충성은 변함없었지만 그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윤구주만이 아니었다.구주의 전우와 화진의 백성들 그 모든 이들이 그가 지켜야 할 대상이었다. 그의 행보는 그를 점점 인간 요귀로 만들어가고 있었다.“그래? 지금은 네가 그들을 인정하고 있어도 언젠가 네가 마인으로 타락하게 된다면 그때는 네 의지대로 되지 않을 거야. 난 간다. 미리 경고했으니 후회하지 마. 내게 자비란 없다.”슈욱!청현은 한 자루 검과 함께 어둠을 가르며 잔상처럼 백호를 향해 돌진했다.한 줄기 칼날의 섬광이 나타나며 수천 개의 검기가 일제히 백호에게 쏟아졌다.쾅! 쾅! 쾅!각 칼날 하나하나가 구오지존 초입의 수련자를 가볍게 썰어버릴 위력이었지만 백호의 몸엔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대부분의 검기는 튕겨 나갔고 일부는 살을 파고들었지만 뼈에 닿으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휙!강풍이 맹렬히 불어치는 가운데 청현은 백호의 천령개를 향해 칼을 날카롭게 휘둘렀다.슉!백호는 머리를 살짝 비켜 피했지만 칼은 그의 어깨를 정확히 내리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