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이미 법적으로 유부녀가 됐는데 처녀파티는 무슨.’강세은은 그녀의 단호한 거절에도 개의치 않고 밀어붙였다.“그럼 가는 거로 알고 내일 다시 데리러 올게요.”서유는 한숨을 한번 길게 내쉬고 얘기했다.“저는 안 간다고 분명히 말했어요. 내일 데리러 와도 저는 안 갈 거예요.”강세은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은 뒤 몸을 일으켰다.문 쪽으로 도도하게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런웨이를 걸어가는 모델처럼 시선을 뗄 수 없었다.서유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안도했다.강세은이 이승하를 좋아하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이었다.서유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서재 쪽을 바라보았다.둘이서 얘기는 하는 건지 대화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이승하는 방음이 잘 되는 서재 안에서 소파에 다리를 꼬고 등을 기댄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로 눈앞에 있는 강도윤을 바라보았다.“그게 무슨 뜻이지?”강도윤은 자세를 꼿꼿이 하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 이승하를 보고 있었다.“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습니다. 이번 일만 무사히 완수하시면 아버지께서 S 조직 탈퇴를 허가하시겠답니다.”이승하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인 채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상처도 아직 아물지 않은 사람한테 그런 소리를 한다는 건 그냥 죽으라는 건가?”강도윤은 고개를 저었다.“조직 내에서 루드웰에 들어갔다가 살아나온 사람은 대표님밖에 없습니다. 지금 상처를 입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실력으로는 누구도 대표님을 따라갈 사람이 없죠. 아버지는 대표님이 다시 한번 조직을 도와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이승하는 강도윤의 진지한 말에도 여전히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분명히 몇 년 전에 얘기한 것 같은데? 해외 쪽 일은 관여하지 않겠다고.”“하지만 조직의 리더시잖아요.”강도윤의 반문에 이승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고는 몇 초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루드웰에서 어떻
강도윤도 강중헌에게서 그의 어린 시절 첫사랑에 관해 들은 적이 있다. 그 여성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까지는 모르지만 강중헌이 그 여성을 위해 평생 독신으로 살아왔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강도윤은 문득 대화 주제가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조직 설립의 목적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강중헌이 초기에 무엇을 위해서 조직을 설립했든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알고 있는 목적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생각 정리를 마친 강도윤은 이승하를 향해 진지한 얼굴로 약속했다.“저도 같이 갈게요. 죽을 각오 돼 있습니다.”강도윤이 이승하에게 충성을 맹세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는 이승하가 감동할 줄 알았지만 돌아오는 건 무심한 눈빛이었다.“너는 짐밖에 안 돼.”그 말에 강도윤이 발끈했다.“그동안 내가 열심히 뒤처리해준 건 기억 안 나나 보죠? 내가 없었으면 그간의 임무를 제대로 완수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이승하는 고개를 살짝 위로 치켜들었다.“여기서 포인트는 네가 뒤처리만 맡았다는 거지. 그게 너한테 딱 맞는 수준인 거야.”‘저 입을 확 찢어버릴 수도 없고!’“이만 가봐. 난 우리 와이프 보러 가야 해서 멀리는 못 나가.”이승하는 잔뜩 약을 올리고는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그래서 정말 안 가시겠다는 말입니까?”이승하는 강도윤의 말을 무시한 채 서재를 나와 계단을 올랐다.“한가지 잊으신 것 같은데, 대표님은 루드웰에 얼굴이 팔린 상태예요. 이미 발을 뺄 수 없는 상태라고요. 이대로 그들을 계속 놔뒀다가 만약 그들이 여기까지 찾아오면 그때는 어쩌시려고요?”아이를 구하기 위해 이승하가 루드웰에 가겠다고 한 순간부터 그는 이미 함정에 걸려든 것이나 다름없다.물론 강중헌이 일부러 이승하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다. 조직원들을 다수 잃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그에게 희망을 건 것이다.강중헌은 이승하가 루드웰에 들어가기 전에 혹시 모를 대책도 전부 세워두었다. 하지만 이승하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무사히 거기에서 나왔다.
전에는 그녀에게서 확신할 수 있을 만큼의 사랑은 느끼지 못했었다. 하지만 함께 한 뒤부터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매일매일 그녀가 주는 사랑을 느끼고 있다.또한 전에는 줄곧 두 사람 사이에서 늘 자신이 더 사랑하고 있다 여겼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두 사람의 마음의 크기가 똑같다는 확신이 생겼다.이승하는 그녀를 자기 품속에 와락 끌어안았다.“누구도 널 건드리게 하지 않아.”이건 그녀를 향한 약속일 뿐만이 아니라 미지의 상대를 향한 경고이기도 했다.강도윤의 말처럼 그는 이미 발을 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이렇게 된 이상 상대가 S 조직이든 루드웰이든 그 누구도 서유를 건드리지 못하게 지켜야만 한다. 만약 누가 그녀를 건드린다면 그때는 그 상대에게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만큼의 고통을 줄 것이다.서유는 그에게 목숨이자 유일한 빛이고 하나뿐인 존재이니까.그 많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곁에 둔 사람이니 무슨 수를 써서든 지켜야만 한다.곧 있으면 결혼식이라 신혼집도 꾸며야 하기에 두 사람 모두 오늘 밤은 이곳이 아닌 이승하는 이씨 저택으로, 그리고 서유는 정가혜의 별장으로 향했다.결혼식 전날.서유가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마치니 얼마 안 가 소수빈이 찾아왔다.그는 고급 차량 여러 대를 끌고 와 웨딩드레스와 웨딩 슈즈, 그리고 각종 액세서리와 신부 들러리들이 입을 드레스를 건네주었다. 모두 말할 것 없이 비싸고 고급스러운 것들이었다.이승하는 완벽한 결혼식을 위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꼼꼼하게 준비했다.서유의 헤어 메이크업 담당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었고 한두 명이 아닌 40명 넘는 인원들로 구성되어 있다.결혼식 절차부터 디테일한 부분까지 이승하는 그녀가 신경 쓸 필요 없이 전부 다 완벽하게 준비해 두었다.다만 딱 한 가지, 그는 아직 그녀에게 결혼식을 올릴 식장이 어디인지 얘기해주지 않았다.물론 궁금하기는 했지만 어디에서 식을 올리든지 그와 함께라면 그게 어디든 상관없기에 서유는 더 묻지 않았다.소
강세은은 시가를 툭툭 털더니 서유를 보고 피식 웃었다.“서유 씨, 처녀파티에 남편을 데려가는 예비 신부가 어디 있어요?”서유는 그녀가 거절할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강세은이 자신을 파티로 데려가는 건 강도윤을 어떻게 꼬시면 좋을지 얘기를 나누기 위함일 텐데 그런 거라면 이승하를 데리고 가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 아닌가?강세은의 목적은 아마 자신과 이승하를 떨어트려 놔 그 틈을 이용해 강도윤이 이승하와 얘기하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내일 있을 결혼식은 저뿐만이 아니라 승하 씨 역시 오랫동안 고대했던 일이에요. 저는 결혼식 전에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고 그저 내일 아침 승하 씨가 준비해준 웨딩드레스를 입고 승하 씨와 행복한 결혼식을 올리기를 바라요. 그러니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어요.”서유는 이 말을 할 때 강세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즉 파티라는 건 역시 핑계에 불과했다는 소리였다.“정말 강도윤 씨를 꼬시고 싶은 거라면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줄래요?”강세은은 솔직히 조금 놀랐다.그녀는 서유가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이승하 품속의 작은 공주님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생각보다 눈치가 빨랐고 이승하를 정말 많이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았다.결혼식 전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게 몸을 사리는 걸 보면 말이다.강세은은 전까지 서유에게 큰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조금 얕잡아 보기도 했다.하지만 방금 그녀가 했던 말과 무해하고 올곧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어릴 때부터 총을 잡고 엄격한 훈련을 받아온 자신이 그녀 앞에서는 빛이 바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강세은은 시가를 잡은 손을 까딱거리며 몇 초간 침묵하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서유를 바라보았다.“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네요. 저는 단지 서유 씨와 함께 파티에 가서 놀고 싶을 뿐이에요.”“세은 씨는 정말 강도윤 씨를 좋아하시나요?”서유가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건넸다.“왜 그렇게 묻죠?”“만약 정말 강도윤 씨를 좋아하는 거
서유가 물었다.“그럼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와도 될까요?”강세은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는 듯 피식 웃었다.“서유 씨, 방금도 말했을 텐데요? 지금은 친구분들 생각부터 하시죠?”그녀의 말은 내가 지금 당신 친구들을 인질로 잡고 있으니 옷 갈아입고 오는 척 경호원들에게 몰래 얘기하거나 큰소리로 도움을 청하는 건 현명하지 못한 짓이라는 뜻이었다.서유는 잠깐 고민하다가 손을 티 안 나게 등 뒤로 가져가서는 경호원들에게 사인을 남겼다. 그러고는 태연한 얼굴로 차에 올랐다.강세은은 그녀가 순순히 차에 오른 것을 보더니 손에 든 시가를 끄고 시동을 걸었다.차가 움직이고 사이드미러 쪽을 보니 경호원들이 곧바로 차를 끌고 따라왔다.강세은은 피식 웃더니 풀 악셀을 밟고 이리저리 화려하게 움직이며 얼마 안 가 금방 경호원을 따돌렸다.그녀 역시 S 조직 사람이라 이런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서유는 난폭한 운전에 안전벨트를 꼭 부여잡고 거세게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하며 강세은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정면을 보고 물었다.“강도윤 씨를 좋아한다는 것도 거짓말이었죠?”아마 파티에 데려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승하에게서 떨어놓기 위해 댄 핑계임이 분명했다.강세은은 서유를 힐끔 보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거짓말 아니에요. 그리고 파티에 데려가고 싶었던 것도 진심이었어요. 다만 어젯밤에 갑작스럽게 명령을 받아 의도치 않게 목적이 불순해진 것뿐이죠.”강중헌은 이승하 설득에 실패하자 곧바로 타겟을 서유에게로 돌렸다.이에 강세은은 만약 서유와 이승하를 떨어트려 놓으면 훨씬 더 이승하를 쉽게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이 행동이 얼마나 비열하게 보일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조직의 명령이기에 그녀 또한 어쩔 수 없었다.서유는 자신의 주머니를 매만졌다. 아까 별장 밖으로 나올 때 이렇게 반강제로 끌려가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터라 미처 휴대폰을 챙기지 못했다.강세은이 자신에게 해를 끼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기에 험한 꼴을 당할 걱정은 없었다
강세은에게 간파당한 서유는 인정에 호소했다.“세은 씨도 알다시피 승하 씨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아요. 그러니 아마 내 친구들을 잡아둔다고 해도 소용없을 거예요. 어차피 나도 여기서 도망가기는 그른 것 같은데 친구들은 풀어줘요. 부탁해요. 무고한 사람들을 굳이 잡아둘 이유는 없잖아요.”강세은은 서유의 맑은 눈동자를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더니 결국 손을 휘휘 저었다.“뭐, 어차피 서유 씨만 잘 감시하면 되니까요.”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서 대기하던 남자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녀의 눈빛에 남자가 어딘가에 전화를 걸더니 곧바로 다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서유 씨 친구들은 이 상황을 몰라요. 그들을 납치한 게 아니라 당분간 휴대폰조차 보지 못하게 손 좀 쓴 것뿐이거든요. 그러니 친구분들을 만나도 이 얘기는 하지 마세요.”강세은은 이승하를 고려한 건지 아니면 서유를 고려한 건지 납치하는 편이 더 편할 텐데도 그러지 않았다.물론 서유가 끝까지 버텼다면 그때는 정말 납치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뭐가 됐든 정가혜와 주서희네가 안전해졌으니 이제는 도망갈 일만 남았다.서유는 주변을 한번 쓱 훑어보았다.큰 리조트에서 열리는 파티인 만큼 사람들이 없는 곳이 없었다.서유는 강세은과 함께 리조트 내부를 구경하다가 화장실을 발견하고는 어쩌면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어차피 이곳은 대다수가 S 조직 사람들이었기에 강세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세요.”서유가 화장실로 가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다가 그만 마침 계단을 내려오려던 사람과 부딪혀버렸다.이에 서유가 휘청하자 남자가 빠른 순발력으로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앞 좀 보고 다니시죠?”남자의 목소리는 듣기 좋은 중저음에 무척이나 여유로웠다.서유가 고개를 들자 파란색 눈을 가진 남자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혼혈인 듯 보이는 남자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더니 뭐에 놀란 듯 잠깐 멈칫했다.이승하의 얼굴로 이미 눈이 한껏
그 말에 서유가 발걸음을 멈추고 뭐라고 대꾸하기 위해 몸을 돌리려다가 이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빠르게 여자 화장실로 걸어갔다.그 모습에 남자는 다시 계단으로 내려가 리조트 밖으로 향했다.화장실 안에는 여성들이 화장을 고치기 위해 설치된 곳이 따로 구분되어 있었다.서유가 그 안으로 들어가 보니 마침 사람 한 명 빠져나갈 수 있는 창문이 있었다.이에 그쪽으로 다가가 창문을 열어보니 바로 앞에 모래사장이 있었고 그 너머로 도로가 보였다.일단은 도로로 가면 어떻게든 될 거라는 생각에 서유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창틀 위로 올라갔다.그 시각 방금 서유와 마주쳤다가 파티 홀을 빠져나온 남자는 사람 없는 도로변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그러다 창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마침 창틀 위에 위험하게 서 있는 서유를 발견했다.밖으로 나올 거면 입구를 이용하면 될 일이지 왜 저렇게 위험한 짓을 하는 거지?“이봐요!”남자의 외침에 이제 막 뛰어내릴 준비를 하던 서유가 깜짝 놀라 손을 놓쳐버렸고 다음 순간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다행히 푹신한 모랫바닥이라 골절은 피할 수 있었지만 통증은 남아있었다.서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남자를 노려보았다.“위험하게 이게 무슨 짓이에요?”남자는 담배를 한 모금 빨아 자욱한 연기를 뿜어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위험한 행동을 한 건 그쪽이죠. 대체 저기서 왜 뛰어내립니까?”서유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허리를 부여잡고 도로 쪽으로 향했다.하지만 그때 강세은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서유 씨, 내가 분명히 허튼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서유의 발걸음은 그대로 멈춰 버리고 말았다.남자는 강세은의 말을 듣고는 담배를 손으로 툭툭 털더니 피식 웃었다.“이름이 서유예요?”강세은은 서유를 향한 남자의 묘한 시선을 보더니 서둘러 그쪽으로 다가갔다.“이 여성분은 이승하 대표님의 아내 분이세요.”그녀는 남자가 신경을 끌 수 있게 일부러 이승하의 아내라고 소개했다.방
이승하가 이곳으로 향하는 시간 동안 서유는 벌써 3번이나 탈출에 실패했다. 그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계속 뒤 따라오는 강세은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강세은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고 큰일이라도 났는지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다 가끔 이승하라는 이름도 들려왔다.지금쯤이면 이승하는 분명히 자신이 납치된 것을 알고 있을 텐데 혹시 강도윤의 제안을 받아들인 걸까?뭐가 됐든 이대로 계속 잡혀 있을 수는 없다.서유는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다 쪽을 몇 초간 바라보더니 이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바로 바다로 뛰어들었다.그녀는 이승하와 약속했었다. 인질이 되어버려도 절대 짐이 되지 않겠다고 말이다.이승하의 일로 강중헌과 통화하던 강세은은 그 장면을 보더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서유 씨!”그녀는 휴대폰을 던져버리고 서유를 구하러 바다로 뛰어갔다. 하지만 그때 그녀 옆으로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더니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었다.김선우는 파도에 밀려 점점 더 바다 깊은 곳으로 떠내려가는 서유를 향해 있는 힘껏 헤엄쳤다.강세은은 아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파도가 너무 세고 거기에 바람도 부는 바람에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모습을 놓쳐버렸다.한 번도 이렇다 할 공포를 느껴본 적 없던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고 머릿속으로는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때, 밤하늘에서 웅장한 소리가 들리더니 헬기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며 곧바로 모래사장에 밝은 빛이 쏟아졌다. 헬기는 고도를 천천히 낮추더니 이윽고 해변에 착륙했다.이승하는 장갑을 낀 손에 총을 쥐고 무서운 얼굴로 헬기에서 내렸다.조직원들은 강도윤과 한창 얘기를 나누고 있어야 할 사람이 갑자기 헬기 여러 대를 끌고 이곳에 나타나 버리는 바람에 모두 제자리에 멈춰서 그대로 얼어버렸다.게다가 이승하는 지금 서유가 납치당한 사실에 이성을 잃어 온몸으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이런 그가 만약 서유가 바다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조직원들은 저도 모르게 한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