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에 서유가 발걸음을 멈추고 뭐라고 대꾸하기 위해 몸을 돌리려다가 이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빠르게 여자 화장실로 걸어갔다.그 모습에 남자는 다시 계단으로 내려가 리조트 밖으로 향했다.화장실 안에는 여성들이 화장을 고치기 위해 설치된 곳이 따로 구분되어 있었다.서유가 그 안으로 들어가 보니 마침 사람 한 명 빠져나갈 수 있는 창문이 있었다.이에 그쪽으로 다가가 창문을 열어보니 바로 앞에 모래사장이 있었고 그 너머로 도로가 보였다.일단은 도로로 가면 어떻게든 될 거라는 생각에 서유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창틀 위로 올라갔다.그 시각 방금 서유와 마주쳤다가 파티 홀을 빠져나온 남자는 사람 없는 도로변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그러다 창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마침 창틀 위에 위험하게 서 있는 서유를 발견했다.밖으로 나올 거면 입구를 이용하면 될 일이지 왜 저렇게 위험한 짓을 하는 거지?“이봐요!”남자의 외침에 이제 막 뛰어내릴 준비를 하던 서유가 깜짝 놀라 손을 놓쳐버렸고 다음 순간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다행히 푹신한 모랫바닥이라 골절은 피할 수 있었지만 통증은 남아있었다.서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남자를 노려보았다.“위험하게 이게 무슨 짓이에요?”남자는 담배를 한 모금 빨아 자욱한 연기를 뿜어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위험한 행동을 한 건 그쪽이죠. 대체 저기서 왜 뛰어내립니까?”서유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허리를 부여잡고 도로 쪽으로 향했다.하지만 그때 강세은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서유 씨, 내가 분명히 허튼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서유의 발걸음은 그대로 멈춰 버리고 말았다.남자는 강세은의 말을 듣고는 담배를 손으로 툭툭 털더니 피식 웃었다.“이름이 서유예요?”강세은은 서유를 향한 남자의 묘한 시선을 보더니 서둘러 그쪽으로 다가갔다.“이 여성분은 이승하 대표님의 아내 분이세요.”그녀는 남자가 신경을 끌 수 있게 일부러 이승하의 아내라고 소개했다.방
이승하가 이곳으로 향하는 시간 동안 서유는 벌써 3번이나 탈출에 실패했다. 그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계속 뒤 따라오는 강세은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강세은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고 큰일이라도 났는지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다 가끔 이승하라는 이름도 들려왔다.지금쯤이면 이승하는 분명히 자신이 납치된 것을 알고 있을 텐데 혹시 강도윤의 제안을 받아들인 걸까?뭐가 됐든 이대로 계속 잡혀 있을 수는 없다.서유는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다 쪽을 몇 초간 바라보더니 이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바로 바다로 뛰어들었다.그녀는 이승하와 약속했었다. 인질이 되어버려도 절대 짐이 되지 않겠다고 말이다.이승하의 일로 강중헌과 통화하던 강세은은 그 장면을 보더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서유 씨!”그녀는 휴대폰을 던져버리고 서유를 구하러 바다로 뛰어갔다. 하지만 그때 그녀 옆으로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더니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었다.김선우는 파도에 밀려 점점 더 바다 깊은 곳으로 떠내려가는 서유를 향해 있는 힘껏 헤엄쳤다.강세은은 아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파도가 너무 세고 거기에 바람도 부는 바람에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모습을 놓쳐버렸다.한 번도 이렇다 할 공포를 느껴본 적 없던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고 머릿속으로는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때, 밤하늘에서 웅장한 소리가 들리더니 헬기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며 곧바로 모래사장에 밝은 빛이 쏟아졌다. 헬기는 고도를 천천히 낮추더니 이윽고 해변에 착륙했다.이승하는 장갑을 낀 손에 총을 쥐고 무서운 얼굴로 헬기에서 내렸다.조직원들은 강도윤과 한창 얘기를 나누고 있어야 할 사람이 갑자기 헬기 여러 대를 끌고 이곳에 나타나 버리는 바람에 모두 제자리에 멈춰서 그대로 얼어버렸다.게다가 이승하는 지금 서유가 납치당한 사실에 이성을 잃어 온몸으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이런 그가 만약 서유가 바다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조직원들은 저도 모르게 한
서유는 잠깐 뭔가 생각하더니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김선우라고 했죠? 그럼 혹시...”‘김초희를 아세요?’라는 말을 하려던 찰나 김선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만 갈까요?”서유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이제 겨우 거기서 빠져나왔는데 또다시 거기로 가자고요?”이에 김선우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쪽 집까지 데려다준다고요.”“아...”서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이대로 빨리 돌아가서 이승하에게 무사하다는 소식을 알려야 한다. 강도윤과 타협할 필요 없다고, 나로 인해 협박당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김선우와 함께 모래사장을 벗어난 서유는 구급차 한 대가 빠르게 리조트 쪽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했다.이에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자신이 뛰어들었던 곳을 바라보았다.멀리 떨어져 있어 사람 얼굴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작은 배들이 하나둘 바다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강세은 그 여자가 나를 구하겠다고 저렇게 많은 배를 보내지는 않았을 텐데... 설마 승하 씨가 온 건가?!’만약 정말 이승하가 여기로 온 거라면 강세은에게서 그녀가 바다에 뛰어들었다는 소식도 분명히 전해 들을 테고... 만약 그렇게 되면 이승하는 놀랄 게 분명했다.서유는 생각을 바꿨다.“우리 일단 다시 리조트 쪽으로 돌아가 볼까요?”이승하가 온 게 맞는지만 확인하고 다시 돌아가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김선우가 코웃음을 쳤다.“내가 왜 그쪽 말을 들어야 하는데요?”그러자 서유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더니 싱긋 웃었다.“아까 나보고 누나라면서요. 동생이 돼서 누나 말 좀 들어주면 안 돼요?”그 모습에 김선우는 벙쪄 버렸다.그는 그녀의 웃는 얼굴을 어린 시절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어디서 봤지?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그는 머리를 세게 흔들어 생각을 멈추고 서유와 함께 다시 리조트 쪽으로 향했다.그 시각, 이승하는 서유를 찾기 위해 무려
이승하는 그녀의 온기를 느끼고서야 초조했던 마음이 천천히 진정되기 시작했다.그는 서유를 천천히 품에서 놓아주었다. 바닷물에 쫄딱 젖은 채 몸을 덜덜 떠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미안해야 할 사람은 나야. 나만 아니었으면 네가 이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됐을 거야.”“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예요. 우린 부부잖아요. 부부는 다 같이 짊어지는 거예요.”서유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보다가 손바닥 가득 묻은 피를 보고는 얼굴이 굳어버렸다.“승하 씨 상처 벌어진 거죠?! 빨리 구급차로 가요.”처음에는 그저 바닷물인 줄 알았는데 피였다. 상처가 벌어진 게 분명했다!서유는 그의 손을 끌고 서둘러 구급차 쪽으로 가려다가 이승하가 팔을 당기는 바람에 제자리에 멈춰버렸다.“서유야, 이 정도 상처는 괜찮아.”이승하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강세은을 바라보며 소수빈에게 말했다.“강세은 가둬놔. 그리고 어르신한테 내가 죽여버리기 전에 직접 와서 데려가라고 전해.”“네, 알겠습니다.”강세은은 이승하가 이곳에 나타난 이상 이렇게 될 줄 알았는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방금 서유가 나타난 순간 살아있어서 다행이라며 마음속 깊이 안도했다.소수빈은 강세은을 헬기 안으로 데려갔다.문이 닫히는 순간 강세은이 물었다.“우리 오빠는 같이 안 왔어요?”소수빈은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납치범이 협박해야 하는 사람과 인질을 함께 두지는 않죠.”강세은은 자신이 서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고는 별다른 말 없이 헬기 시트에 등을 기댔다.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잡고 헬기로 향했다.그러자 그때 등 뒤에서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와이프 구해줘서 고맙다는 한마디도 안 하고 가는 건 도리가 아닐 텐데?”그 말에 이승하가 몸을 돌려보니 거기에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담배를 태우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그는 김선우를 본 순간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김선우.”김선우는 고개를 치켜든 채 입꼬리를
서유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지금은 일단 빨리 헬기에 올라요. 아니면 구급차로 같이 가던가.”빨리 지혈하지 않으면 아무리 이승하라고 해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이승하는 걱정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얌전히 헬기에 올랐다.그날 밤, 서유는 이승하의 곁에 딱 붙어 의사가 지혈을 마치고 벌어진 상처를 다시 꿰맨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치료를 마치고 나니 어느새 동이 트기 시작했다.서유는 이대로라면 결혼식은 올리지 못할 것 같아 그에게 제안했다.“우리 결혼식 하루만 미루는 거 어때요?”타올로 그녀의 머리에 남은 물기를 닦아주던 남자가 단호하게 답했다.“안 돼. 결혼식은 예정대로 올릴 거야.”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나온 서유는 손에 우유를 든 채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하지만 승하 씨 상처가...”이승하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말했다.“결혼식이 더 중요해.”이에 서유가 다시 그를 설득하려는데 이승하가 옆에 놓인 드라이기를 들어 그녀의 머리를 말려주었다.다 말리고 난 뒤에는 그녀가 또다시 허튼소리를 하지 못하게 직접 운전해 정가혜의 별장으로 그녀를 데려다주었다.“11시에 다시 올게.”원래는 10시였지만 휴식이 필요한 그녀를 위해 11시로 변경했다.이승하는 서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더니 고개를 돌려 뒤따라온 소수빈에게 얘기했다.“지금 당장 경호원을 100명으로 늘리고 아무도 이곳으로는 접근하지 못하게 해.”“네, 알겠습니다.”소수빈은 재빠르게 휴대폰을 꺼내 들어 누군가에게 연락을 넣었다.이승하는 서유를 정가혜에게 넘겨준 다음 신신당부하고 나서야 안심한 듯 발걸음을 돌렸다.정가혜와 주서희는 멀쩡히 돌아온 서유를 보고 밤새 불안했던 가슴을 쓸어내렸다.“나랑 서희 씨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나도요!”그때 집 안에서 연이가 달려 나오더니 서유 앞에 멈춰서서는 자신을 안으라는 듯 두 팔을 활짝 벌렸다.서유는 연이를 안아 들고 미안함 가득한 얼굴로 정가혜와 주서희를 바라보았다.“미안해, 나도 이렇
스타일리스트는 그녀가 고른 드레스를 옷장에서 꺼낸 뒤 드레스 소재와 그 위에 박혀있는 다이아몬드를 만져보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해당 드레스는 심플하면서도 고급스러움을 잃지 않았고 겹겹이 쌓인 레이스 위에 반짝반짝 빛을 내는 다이아몬드로 포인트를 주어 시선을 뗄 수 없었다.스타일리스트는 이 드레스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가 만든 세상에 단 하나뿐인 드레스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해외 전시관에 관상용으로 보관된 것을 누군가가 거액에 사들였다고 들었지만 그 드레스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아무리 JS 그룹의 대표라고 해도 자기 아내를 정말 사랑하는 게 아니면 이 드레스를 구매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게다가 옷장에 있던 나머지 하나의 드레스 또한 한정판으로 나온 드레스였고 가격 역시 어마어마할 것으로 예상되었다.“대표님께서 사모님을 엄청 많이 사랑하시나 봅니다.”서유는 그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이건 그녀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다.이승하는 그녀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다. 언제나 제일 좋은 것을 그녀에게 주려고 하고 그녀를 위해 같이 죽어줄 수 있을 만큼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서유 역시 이승하와 같은 마음이다. 그가 주는 만큼, 아니, 그것보다 더 흘러넘칠 만큼의 사랑을 그에게 주고 싶고 앞으로 그렇게 할 생각이다.“사모님께서 이리도 예쁘시니 당연한 일이죠.”“사모님은 예쁜 것뿐만 아니라 그저 이렇게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매력이 흘러넘치세요.”“그러니까요. 제가 대표님이었어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요.”메이크업 담당과 헤어 담당 그리고 스타일스트까지 모두 입에 꿀이라도 바른 듯했다.그리고 그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메이크업을 해주던 사람 중 한 명은 그녀의 피부는 꼭 진주처럼 매끄럽고 고와 컨실러 같은 거로 가릴 필요 없이 파운데이션만으로도 충분하다며 감탄했고 또 다른 한 명은 그녀가 동양인 중에서는 나올 수 없는 얼굴이라며 음영을 아주 조금만 주어도 금방 입체감이 생긴다며 칭찬했다.헤어
원체 귀여운 얼굴이라 그런지 연이는 뭘 해도 사랑스러웠고 오늘따라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아기 천사처럼 보였다.정가혜는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길 창문을 통해 별장밖에 세워진 익숙한 차량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차량 앞에 휠체어에 탄 한 남자가 보였다.그녀는 다급하게 밖으로 뛰쳐나가 그를 불렀다.“사월아!”정가혜의 외침에 송사월은 그녀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오늘 서유 결혼한다는 소식 들어서 찾아와 봤어요. 나 들어가도 돼요?”조심스럽게 동의를 구하는 모습에 정가혜는 금세 눈시울이 붉어졌다.‘당연히 되지.’라고 호기롭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문득 그의 등장이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서유는 병원에서 그와 헤어진 뒤로 한 번도 그를 만난 적이 없고 그 뒤로 얘기를 꺼낸 적도 없다.송사월을 향한 마음은 확실하게 놓은 것 같지만 그를 향한 죄책감은 아직 마음속 깊이 박혀 있을 것이 분명했다.만약 이대로 송사월을 만나게 되면 서유의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을까?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송사월을 보내기에는 너무나도 미안한 일이었다.정가혜는 설마 언젠가 두 사람 사이에서 이런 선택을 해야 하는 날이 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송사월은 대답을 망설이는 그녀를 보더니 예쁜 미소를 지었다.“누나, 걱정할 필요 없어요. 결혼식은 무사히 진행될 거예요.”서유의 마음속에서 그는 이미 진작 사라지고 없으니까.그의 이름을 부르며 언제나 옆에 있던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를 놓아버렸으니까.정가혜는 그 말에 움찔하더니 이내 결정한 듯 입을 열었다.“그래, 서유 만나러 가자.”그녀는 김태진이 잡고 있던 휠체어를 이어받고 천천히 별장 안으로 향했다.서유는 어느새 모든 세팅을 끝냈다.그녀는 거울 앞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체크하다가 거울 너머로 보이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몸이 굳어버렸다.서유는 그 남자를 거울로 한참을 보고 나서야 서서히 몸을 돌렸다.“사월아...”송사월은 그녀의 입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매우 기뻤다. 눈가
어린 시절 서유가 괴롭힘을 당해 몸을 잔뜩 웅크리고 눈물을 흘릴 때면 항상 송사월이 나타나 그녀의 앞에 쪼그려 앉고는 이렇게 다정한 말투로 그녀를 위로하고 달래주었다.그런 기억이 너무나도 생생해 송사월이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지 알기에 서유는 더더욱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왜 이렇게 울어. 혹시 아직도 나 좋아해?”송사월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야윈 손을 그녀에게 건넸다.“아직 나 좋아하는 거면 이대로 나랑 도망칠래?”그의 말투는 분명히 가벼운 농담을 건네는 듯했지만 그의 눈빛에서는 진심이 묻어있었다.그 역시 서유를 내려놓고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빌고 싶었다.하지만 그녀와 헤어진 뒤 아무리 노력해봐도 수면제의 도움까지 받았는데도 그녀를 내려놓지 못했다.그녀를 사랑했던 시간이 너무나도 길어, 이미 뼛속 깊이 그녀가 박혀있어 훌훌 털어내 버릴 수가 없었다.이승하가 없으면 서유는 안된다고 했지만 그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없으면 그도 안된다.‘서유야, 이대로 나랑 함께 가면 안 될까?’서유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한마디를 내뱉었다.“미안해...”그녀는 또다시 ‘미안해’라는 말을 꺼냈다. 미안하다는 말 말고는 해줄 말이 없어 그것 또한 미안했다.그녀가 거절할 줄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다시 한번 거절당하니 역시 마음이 쓰렸다.그녀에게 내민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한가지 다행인 건 그 말을 진지하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서유야, 이승하 씨와 꼭 오래오래 행복하길 바랄게.”송사월은 미련 가득한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지금이 아마 마지막일 것이다. 이제는 그녀를 만나러 올 핑계조차 없을 테니까.그때 밖에서 굉음이 들려오고 창밖으로 보이는 뒷마당에 헬기가 하나둘 잔디 위에 착륙하는 것이 보였다.송사월은 그 모습을 보고는 서서히 시선을 내렸다.“너 데리러 왔나 보다.”그는 휠체어를 뒤로 밀어 몇 걸음 물러났다.“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그 말을 끝으로 서유에게서 등을 돌린 순간 꾹 참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