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서유가 괴롭힘을 당해 몸을 잔뜩 웅크리고 눈물을 흘릴 때면 항상 송사월이 나타나 그녀의 앞에 쪼그려 앉고는 이렇게 다정한 말투로 그녀를 위로하고 달래주었다.그런 기억이 너무나도 생생해 송사월이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지 알기에 서유는 더더욱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왜 이렇게 울어. 혹시 아직도 나 좋아해?”송사월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야윈 손을 그녀에게 건넸다.“아직 나 좋아하는 거면 이대로 나랑 도망칠래?”그의 말투는 분명히 가벼운 농담을 건네는 듯했지만 그의 눈빛에서는 진심이 묻어있었다.그 역시 서유를 내려놓고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빌고 싶었다.하지만 그녀와 헤어진 뒤 아무리 노력해봐도 수면제의 도움까지 받았는데도 그녀를 내려놓지 못했다.그녀를 사랑했던 시간이 너무나도 길어, 이미 뼛속 깊이 그녀가 박혀있어 훌훌 털어내 버릴 수가 없었다.이승하가 없으면 서유는 안된다고 했지만 그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없으면 그도 안된다.‘서유야, 이대로 나랑 함께 가면 안 될까?’서유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한마디를 내뱉었다.“미안해...”그녀는 또다시 ‘미안해’라는 말을 꺼냈다. 미안하다는 말 말고는 해줄 말이 없어 그것 또한 미안했다.그녀가 거절할 줄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다시 한번 거절당하니 역시 마음이 쓰렸다.그녀에게 내민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한가지 다행인 건 그 말을 진지하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서유야, 이승하 씨와 꼭 오래오래 행복하길 바랄게.”송사월은 미련 가득한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지금이 아마 마지막일 것이다. 이제는 그녀를 만나러 올 핑계조차 없을 테니까.그때 밖에서 굉음이 들려오고 창밖으로 보이는 뒷마당에 헬기가 하나둘 잔디 위에 착륙하는 것이 보였다.송사월은 그 모습을 보고는 서서히 시선을 내렸다.“너 데리러 왔나 보다.”그는 휠체어를 뒤로 밀어 몇 걸음 물러났다.“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그 말을 끝으로 서유에게서 등을 돌린 순간 꾹 참
서유는 아무도 없는 빈 곳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고마워 사월아...”두 사람은 한때 서로 뜨겁게 사랑했고 서로가 전부였으며 둘이서 아름다운 미래까지 기약했다.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인연이 아니었고 이것이 그들의 결말이다.송사월은 그녀에게 과거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서유는 미소를 지으며 눈물 자국을 닦아냈다. 그러고는 파운데이션으로 그를 위해 흘린 죄책감의 흔적을 천천히 덮어버렸다.마치 두 사람의 과거를 덮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그리고 조금의 흔적도 남기지 않도록 완벽하게 덮어버렸다.어느새 드레스로 갈아입은 정가혜는 손에 서류를 든 채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이 서류는 송사월이 병원에서 나올 때 그녀에게 부탁한 물건이다. 서유의 결혼식 당일에 전해주라는 말과 함께.정가혜는 서류를 매만지며 잠깐 머뭇거리다 결국 서유에게로 다가갔다.“서유야, 이거 사월이가 너한테 주는 결혼 선물이야.”서유는 그녀가 건넨 서류를 보고는 물었다.“뭔데?”“직접 봐.”이에 서유는 별말 없이 서류를 건네받았다.“그때 너 병원에 있을 때, 사월이가 네 병실에서 나와 나한테 전해준 거야.”정가혜는 그 말을 건네주고 그녀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려는 듯 다시 방에서 나왔다.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니 거기에는 김시후의 개인 자산 양도 계약서와 김시후 소유 부동산 양도 계약서 그리고 화진 그룹 70% 지분 양도 계약서가 들어있었다.그리고 그것들은 전부 서유에게 양도 되는 것으로 적혀 있었다.김시후는, 아니, 송사월은 자신이 가진 제일 좋은 것들을 전부 그녀에게 남겨주었다.서유는 반대편 창문 쪽으로 달려가 그의 모습을 찾았다.그러자 앞마당 쪽에서 휠체어에 앉은 채 그녀의 침실을 바라보는 송사월이 보였다.그는 미련이 가득한, 포기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만 하는 그런 쓸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서유는 서류를 꽉 쥐고 몇 초간 고민하더니 이내 드레스 자락을 들고 이승하가 선물해준 웨딩 슈즈를
이씨 가문 사람들은 이승하가 텅 빈 껍데기처럼 실시간으로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고는 송사월에게로 달려간 그녀가 원망스럽게 느껴졌다.대체 왜 이승하가 아닌 김시후 쪽으로 가는 거지?첫사랑을 아직 내려놓지 못한 거라면 프러포즈를 거절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어떻게 결혼식 당일 이런 수모를 줄 수 있지?한편 뒤편의 상황은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서유는 송사월에게 서류를 다시 건네주었다.“사월아, 네가 나한테 제일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은 알아. 하지만 너는 이미 나한테 충분히 많은 걸 줬어. 이건 못 받아. 아니, 안 받을 거야. 너한테 빚진 것도 아직 못 갚았는데 이런 것까지 받으면 나는 솔직히 부담스러워.”서유는 뒤를 돌아 자신을 보지 않는 남자를 보며 처음으로 송사월 앞에서 용기를 내어 사랑을 인정했다.“지금 내가 하는 말이 잔인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승하 씨를 사랑해. 승하 씨 대신 죽을 수도 있을 만큼, 그렇게 많이 사랑하고 있어.”죽을 수도 있을 만큼...송사월은 이 말을 반복적으로 되뇌었다.그녀는 지금 뱉은 말처럼 이승하를 사랑해서, 그 대신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사랑해서 온몸을 던져 황산을 받아냈다.송사월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전에는 혹시라도 아직 서유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승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었지만 이제는 그녀의 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송사월은 서류를 건네받고는 서유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아까 이승하 씨를 지나쳐 나한테 달려올 때 네 마음이 바뀐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었어.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제는 내가 아니라고 정신 차리라는 말이 들리더라...”송사월의 얼굴은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내가 주는 선물 부담스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건 너뿐만이 아니라 이승하 씨한테 빚진 걸 갚는 거기도 하니까.”화진 그룹을 되찾을 수 있게 된 건 모두 이승하 덕분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
정가혜는 선물 때문에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그들을 보더니 한숨을 한번 내쉬고 김태진의 손에 있던 서류를 덥석 집어 들었다.“이건 일단 내가 맡아둘게요. 받을지 안 받을지는 결혼식 끝나고 다시 얘기해요.”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이씨 가문 사람들은 송사월이 아닌 이승하를 택하는 서유의 모습에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이승하는 시선을 돌려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송사월은 그의 시선을 느끼고도 여전히 서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그 모습이 언짢기도 하면서 또 그가 안쓰럽기도 한 아주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꽉 잡더니 아무 말 없이 뒷마당 쪽으로 걸어갔다.서로서로 눈에 보이지 않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서유는 그에게 손이 잡힌 채로 따라가면서 나지막이 물었다.“혹시 질투했어요?”그러자 이승하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내가 왜 질투를 해?”아까 서유가 그를 지나쳐 송사월에게로 달려갔을 때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건 절대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서유는 자신의 손을 꽉 잡은 그의 손을 보더니 입꼬리를 올리고 미소를 지었다.그녀가 혹시 도망이라도 갈까 봐 이렇게 손을 꽉 잡고 있으면서 아니라고 잡아떼는 것이 꼭 어린애 같았다.서유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이봐요, 어린이, 우리 이제 어디로 가요?”그 말에 이승하가 그녀를 향해 미간을 찌푸렸다.“어린이라니?”서유는 드레스 자락을 쥐던 손을 놓고 그의 팔을 감싸며 웃었다.“승하 씨한테 딱 맞는 별명인데 마음에 안 들어요?”이승하는 손을 들어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이따 저녁에 가만 안 둘 테니까 각오해.”서유는 상관없다는 듯 이승하에게 잡힌 얼굴을 그를 향해 더 가까이 가져갔다.“어린이가 마음에 안 들면 질투 대마왕은 어때요?”“...”서유는 그의 팔을 이리저리 흔들며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그래서 우리 결혼식 장소는 대체 어디에요? 이제 얘기해 줘요.”이승하는 애교부리는 그녀의 모습에 화가 조금
늦게 도착한 이지민은 별장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일전 그녀와 결혼을 할 뻔했던 김시후를 발견했다.그녀는 그에게로 다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김 대표님.”송사월의 시선이 하늘에서 천천히 그녀 쪽으로 내려왔다.눈앞에 있는 여자는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베이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우아하기도 하고 또 무척이나 아름다웠다.송사월은 예의 있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다시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는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다.이지민은 똑같이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별다른 말 없이 바로 뒷마당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거기에는 그녀를 기다린 듯한 헬기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2월 14일 밸런타인데이, 몇백대의 헬기가 서울시 상공을 가르고 천천히 공항에 착륙했다. 그리고 반 시간 뒤 I 국으로 향하는 50여 대의 흰색 전용기가 천천히 공항에서 이륙했다.[뉴스 속보]“JS 그룹 이승하 대표의 전용기가 서울에서 이륙해 곧 I 국에 도착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승하 대표는 결혼식에 2천억이 넘는 비용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고 일각에서는 세기의 결혼식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기자들은 두 주인공이 도착하면 결혼식장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기에 어쩔 수 없이 정해진 시간 동안 식장 내부 사진만 열심히 찍어댔다.매스컴은 아직 이승하 대표가 10년이나 구애한 끝에 드디어 쟁취한 여인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기자들은 두 사람의 모습을, 정확히는 신부의 얼굴을 보기 위해 그럴듯하게 위장하고 나무 뒤에 숨었다.얼마 안 가 수백 대의 고급 차량이 하나둘 결혼식장 입구 바로 앞에 도착했다.제일 선두에 선 핑크 장미로 도배된 차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내렸다.흰색 양복에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는 차에서 내린 뒤 곧바로 차 안에 있는 또 다른 이에게 손을 내밀었다.기자들은 서둘러 카메라를 들고 최대한 줌을 당긴 뒤 이승하의 모습을 잡았다.그의 큰 손 위에 가녀리고 하얀 손이 살포시 올려졌다.남자는 그 여린 여자의 손을
중세시대 풍으로 된 성안으로 들어가 보니 마치 그 시절로 타임슬립 한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성 주위는 녹색 잔디로 뒤덮어져 있었고 규모가 커 마차라도 타고 구경해야 할 듯싶었다. 게다가 성 겉면에는 핑크 장미가 가득했다.상 안은 햇볕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내부를 비춰주었고 햇볕이 들지 않는 곳에는 인공 오로라가 일렁거렸으며 바닥에는 샴페인 색 카펫이 깔려있었다.이 모든 것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마치 식장보다는 하나의 예술작품 같기도 했다.식장 안에는 사회자가 왕실 전용 연주팀이 벌써 도착해 있었다.눈앞에서 펼쳐진 꿈같은 광경에 반짝이던 서유의 눈이 천천히 젖어 들었다.이곳으로 오기 전 전용기 안에서 이승연은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승하가 결혼식장을 꾸미는 것에 그렇게 진심일 줄은 몰랐어요. 서유 씨도 아마 가보면 무슨 뜻인지 이해할 거예요.”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식장 곳곳에 이 남자가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여실히 보였다.서유는 조금 빨개진 눈으로 옆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살아있어서 참 다행이다. 이 남자가 주는 사랑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이승하는 그녀의 눈빛을 읽은 듯 맞잡은 손을 풀고 그녀가 자신의 팔짱을 끼도록 했다.“이대로 카펫을 걸어가면 나와 평생을 약속해야 해, 준비됐어?”서유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준비됐어요.”이승하는 그녀에게 예쁘게 웃어준 후 뒤를 돌아 두 명의 화동에게 손짓했다.뒤에는 씩씩거리며 서로의 얼굴에 꽃을 뿌리는 두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심우주, 난 네가 싫어!”“지연초, 나도 네가 싫어! 앞으로 다시는 너 보고 싶지 않아!”연이는 그 말에 꽃바구니를 아래에 내려놓고 당장이라도 싸울 듯 달려들었다.하지만 다행히 주서희가 빠르게 아이를 막아서 심우주의 머리카락이 뜯기는 일은 없었다.“연이야, 이모 결혼식인데 싸우면 안 되지.”“하지만 심우주가 아까 내 리본을 망가트렸단 말이에요. 사과도 안 했어요!”어른들은 두 아이가 친해졌으면 하는 바람에 일부러 전
정가혜는 아이를 엄격하게 교육하는 이승연의 모습을 보고는 서유가 이런 집안으로 시집간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상대 쪽에서 아이를 따끔하게 혼을 냈으니 연이의 이모로서 그녀 또한 한마디 할 필요가 있었다.정가혜는 아이들 앞으로 다가가 연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연이도 아까 우주 욕했지? 이따 우주가 벌을 받고 나면 연이도 우주한테 사과해. 그래야 맞는 거야. 알겠지?”심우주가 연이의 리본을 망가트리기는 했지만 욕을 한 건 연이가 먼저였다.연이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는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이모, 사과할게요.”이렇게 두 아이의 싸움이 일단락되었다.이승연은 몸을 일으키더니 조금 의외라는 얼굴로 정가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그녀를 넘어 이연석 옆에 있는 여자에게로 시선을 주었다.그녀는 이연석의 첫사랑이라는 여자보다 정가혜가 더 마음에 들었지만 아쉽게도 현재 이연석의 옆에 있는 여자는 정가혜가 아니었다.이연석의 부모님은 현재 이연석의 교제 상대를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이연석은 결혼식장에 버젓이 첫사랑을 옆에 세워두었다.‘철이 없는 건지. 쯧쯧.’이연석의 시선은 줄곧 정가혜에게 가 있었고 정가혜는 그런 그에게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정가혜는 연이와 심우주에게 안으로 걸어가라고 손짓했다.두 아이는 그녀의 말에 따라 꽃바구니를 든 채 앞으로 걸어가 서유와 이승하의 앞에 섰다.“늦어서 죄송합니다.”서유는 예쁜 아이들을 보더니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괜찮아, 아직 시작한 것도 아닌데 뭐.”그때 식장 스태프가 큰 의자 위에 올라서더니 종을 세 번 울렸다.종소리가 울렸다는 건 지금부터 결혼식이 시작된다는 뜻이었다.“네, 그럼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오늘 결혼식에 사회를 맡게 된...”사회자는 듣기 좋은 편한 음성으로 매끄러운 개회사를 마치고는 바로 첫 번째 순서로 들어갔다.“화동 심우주 군과 지연초 양, 입장해 주세요.”두 명의 아이는 다행히 더 이
사인이 끝난 후 반지 교환이 진행되었다.목사님과 이씨 가문 사람들 그리고 서유의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승하는 스태프가 건네준 반지를 건네받고 한쪽 무릎을 꿇더니 서유의 손에 천천히 반지를 끼웠다.왕방울만 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가 약지에 끼워진 순간 서유는 눈가가 빨갛게 변해서는 목이 메어왔다.이승하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등에 맹세의 키스를 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다시 고개를 들어 질식할 정도로 아름다운 자신만의 여인을 바라보았다.“서유야, 사랑해.”“나도 사랑해요.”서유는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마찬가지로 그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반지 교환이 끝난 후 샴페인샤워까지 마치며 결혼식도 천천히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그때 이승하가 갑자기 그녀를 두고 옆으로 걸어가더니 장식인 줄로만 알았던 오래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앞쪽 피아노에 앉은 이연석을 바라보았다.두 사람에게 흰색 조명이 쏟아졌다.“형수님, 이건 형이 오직 형수님을 생각하며 작곡한 곡입니다. 잘 들어주세요. 그리고 제 동생이 형수님에게 춤을 바칠 거예요.”그 말에 두 사람 곁으로 이지민이 말없이 다가와 서유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이연석이 스태프 쪽으로 손짓하자 은은한 조명이 서유를 비췄다.그녀는 손에 꽃을 꼭 쥐고 피아노 앞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이승하는 어느새 겉옷을 벗은 채 셔츠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그는 셔츠 단추를 하나 풀더니 익숙하게 소매를 걷어 올렸다.그러고는 준비가 다 된 듯 이연석과 사인을 주고받더니 곧바로 건반 위에 손을 올리고 연주를 시작했다.잔뜩 집중한 얼굴로 건반 위를 유영하듯 부드럽게 휘젓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고 또 멋있어 보였다.서유는 더 이상 이승하에게 놀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깊은 날 그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되었다.평소 차갑고 도도한 남자가 건반 앞에서는 그 순간보다 더 부드러워 그녀의 가슴을 간지럽혔다.이연석은 이승하가 연주를 시작하고 나서 5초 뒤에 손을 움직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