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 풍으로 된 성안으로 들어가 보니 마치 그 시절로 타임슬립 한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성 주위는 녹색 잔디로 뒤덮어져 있었고 규모가 커 마차라도 타고 구경해야 할 듯싶었다. 게다가 성 겉면에는 핑크 장미가 가득했다.상 안은 햇볕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내부를 비춰주었고 햇볕이 들지 않는 곳에는 인공 오로라가 일렁거렸으며 바닥에는 샴페인 색 카펫이 깔려있었다.이 모든 것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마치 식장보다는 하나의 예술작품 같기도 했다.식장 안에는 사회자가 왕실 전용 연주팀이 벌써 도착해 있었다.눈앞에서 펼쳐진 꿈같은 광경에 반짝이던 서유의 눈이 천천히 젖어 들었다.이곳으로 오기 전 전용기 안에서 이승연은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승하가 결혼식장을 꾸미는 것에 그렇게 진심일 줄은 몰랐어요. 서유 씨도 아마 가보면 무슨 뜻인지 이해할 거예요.”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식장 곳곳에 이 남자가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여실히 보였다.서유는 조금 빨개진 눈으로 옆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살아있어서 참 다행이다. 이 남자가 주는 사랑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이승하는 그녀의 눈빛을 읽은 듯 맞잡은 손을 풀고 그녀가 자신의 팔짱을 끼도록 했다.“이대로 카펫을 걸어가면 나와 평생을 약속해야 해, 준비됐어?”서유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준비됐어요.”이승하는 그녀에게 예쁘게 웃어준 후 뒤를 돌아 두 명의 화동에게 손짓했다.뒤에는 씩씩거리며 서로의 얼굴에 꽃을 뿌리는 두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심우주, 난 네가 싫어!”“지연초, 나도 네가 싫어! 앞으로 다시는 너 보고 싶지 않아!”연이는 그 말에 꽃바구니를 아래에 내려놓고 당장이라도 싸울 듯 달려들었다.하지만 다행히 주서희가 빠르게 아이를 막아서 심우주의 머리카락이 뜯기는 일은 없었다.“연이야, 이모 결혼식인데 싸우면 안 되지.”“하지만 심우주가 아까 내 리본을 망가트렸단 말이에요. 사과도 안 했어요!”어른들은 두 아이가 친해졌으면 하는 바람에 일부러 전
정가혜는 아이를 엄격하게 교육하는 이승연의 모습을 보고는 서유가 이런 집안으로 시집간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상대 쪽에서 아이를 따끔하게 혼을 냈으니 연이의 이모로서 그녀 또한 한마디 할 필요가 있었다.정가혜는 아이들 앞으로 다가가 연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연이도 아까 우주 욕했지? 이따 우주가 벌을 받고 나면 연이도 우주한테 사과해. 그래야 맞는 거야. 알겠지?”심우주가 연이의 리본을 망가트리기는 했지만 욕을 한 건 연이가 먼저였다.연이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는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이모, 사과할게요.”이렇게 두 아이의 싸움이 일단락되었다.이승연은 몸을 일으키더니 조금 의외라는 얼굴로 정가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그녀를 넘어 이연석 옆에 있는 여자에게로 시선을 주었다.그녀는 이연석의 첫사랑이라는 여자보다 정가혜가 더 마음에 들었지만 아쉽게도 현재 이연석의 옆에 있는 여자는 정가혜가 아니었다.이연석의 부모님은 현재 이연석의 교제 상대를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이연석은 결혼식장에 버젓이 첫사랑을 옆에 세워두었다.‘철이 없는 건지. 쯧쯧.’이연석의 시선은 줄곧 정가혜에게 가 있었고 정가혜는 그런 그에게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정가혜는 연이와 심우주에게 안으로 걸어가라고 손짓했다.두 아이는 그녀의 말에 따라 꽃바구니를 든 채 앞으로 걸어가 서유와 이승하의 앞에 섰다.“늦어서 죄송합니다.”서유는 예쁜 아이들을 보더니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괜찮아, 아직 시작한 것도 아닌데 뭐.”그때 식장 스태프가 큰 의자 위에 올라서더니 종을 세 번 울렸다.종소리가 울렸다는 건 지금부터 결혼식이 시작된다는 뜻이었다.“네, 그럼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오늘 결혼식에 사회를 맡게 된...”사회자는 듣기 좋은 편한 음성으로 매끄러운 개회사를 마치고는 바로 첫 번째 순서로 들어갔다.“화동 심우주 군과 지연초 양, 입장해 주세요.”두 명의 아이는 다행히 더 이
사인이 끝난 후 반지 교환이 진행되었다.목사님과 이씨 가문 사람들 그리고 서유의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승하는 스태프가 건네준 반지를 건네받고 한쪽 무릎을 꿇더니 서유의 손에 천천히 반지를 끼웠다.왕방울만 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가 약지에 끼워진 순간 서유는 눈가가 빨갛게 변해서는 목이 메어왔다.이승하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등에 맹세의 키스를 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다시 고개를 들어 질식할 정도로 아름다운 자신만의 여인을 바라보았다.“서유야, 사랑해.”“나도 사랑해요.”서유는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마찬가지로 그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반지 교환이 끝난 후 샴페인샤워까지 마치며 결혼식도 천천히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그때 이승하가 갑자기 그녀를 두고 옆으로 걸어가더니 장식인 줄로만 알았던 오래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앞쪽 피아노에 앉은 이연석을 바라보았다.두 사람에게 흰색 조명이 쏟아졌다.“형수님, 이건 형이 오직 형수님을 생각하며 작곡한 곡입니다. 잘 들어주세요. 그리고 제 동생이 형수님에게 춤을 바칠 거예요.”그 말에 두 사람 곁으로 이지민이 말없이 다가와 서유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이연석이 스태프 쪽으로 손짓하자 은은한 조명이 서유를 비췄다.그녀는 손에 꽃을 꼭 쥐고 피아노 앞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이승하는 어느새 겉옷을 벗은 채 셔츠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그는 셔츠 단추를 하나 풀더니 익숙하게 소매를 걷어 올렸다.그러고는 준비가 다 된 듯 이연석과 사인을 주고받더니 곧바로 건반 위에 손을 올리고 연주를 시작했다.잔뜩 집중한 얼굴로 건반 위를 유영하듯 부드럽게 휘젓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고 또 멋있어 보였다.서유는 더 이상 이승하에게 놀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깊은 날 그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되었다.평소 차갑고 도도한 남자가 건반 앞에서는 그 순간보다 더 부드러워 그녀의 가슴을 간지럽혔다.이연석은 이승하가 연주를 시작하고 나서 5초 뒤에 손을 움직이기
주서희와 정가혜는 동시에 뒤를 돌아 그들에게 질문한 여자를 바라보았다.그녀는 하얀 피부에 남자들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주서희는 그녀가 누군지 몰랐지만 정가헤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눈앞에 있는 여자는 바로 이연석과 함께 사진을 찍은 그의 첫사랑이다.정가혜는 이연석이 첫사랑을 이곳까지 데리고 올 줄은 몰랐다. 중요한 사람들만 모인 자리에 굳이 데려왔다는 건 아마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녀의 시선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정가혜는 그 남자를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모든 걸 다 내려놓은 듯한 미소를 지었다.‘이제 드디어 한 사람한테 정착하려나 보네. 잘 된 일이지 뭐.’그 정착하려는 여자가 그녀는 아니지만 뭐가 됐든 잘된 일이다.주서희는 아무 말 없는 정가혜를 대신해 답을 해주었다.“저희는 신부 쪽 친구들이에요. 연석 씨와는 오다가다 알게 된 것뿐이고요.”그 말에 뒤에 앉은 여자는 대놓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그제야 활짝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연석이 여자친구, 배하린이라고 해요.”주서희는 여자친구라는 소리에 정가혜를 힐끔 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그녀와 인사했다.“네, 안녕하세요.”짧은 인사를 마친 뒤 그녀는 또다시 정가혜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다행히 큰 감정변화는 없는 듯해 주서희는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이연석과 정가혜는 이미 과거형이고 결혼식이 끝난 후 정가혜는 남자친구를 고르러 가야 한다.연주가 끝이 난 후 드디어 부케 던지기가 시작되었다.젊은 남녀들이 모두 앞으로 나왔고 서유는 뒤로 돌아 힘껏 부케를 던졌다.사실 그녀는 던지기 전에 정가혜와 주서희가 있는 곳을 확인하고 정확하게 그들을 향해 던졌다.포물선이 예쁘게 그려지고 정가혜의 손에 부케가 떨어졌다. 하지만 그때 배하린이 갑자기 손을 위로 치켜들었고 이에 부케가 다시 공중으로 향하더니 정확히 이지민 쪽으로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이지민은 그걸 보고는 손을 높게 들어 부케를
정가혜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배하린이 이연석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연석아, 됐어. 그냥 이분한테 주자.”정가혜는 그제야 어떤 상황인지 깨달았다. 배하린은 이지민 때문에 언짢아진 것을 제일 만만한 그녀에게 푸는 것이다.모두 그녀 탓으로 돌리면서 말이다.만약 이지민이 다시 부케의 방향을 돌렸을 때 옆으로 피했더라면 배하린은 이런 짓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다만 정가혜가 제일 어이가 없는 건 고작 부케를 받지 못했다고 칭얼거리는 여자친구 때문에 이연석이 이곳에 끼어들었다는 것이다.애초에 서유가 던진 꽃은 예정대로라면 정가혜에게 도착하게 되는데 그걸 중간에서 이상하게 훼방 놓은 사람은 그의 여자친구였다.정가혜는 아까 피아노 치던 그의 모습이 잠깐이라도 멋있다고 생각한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그녀는 피식 웃더니 아무 말 없이 부케를 그에게 건넸다.하지만 이연석은 그저 시선을 내려 부케를 보고 있을 뿐 받지 않았다.이대로 덥석 받으면 너무 없어 보일까 봐 일부러 시간을 끄는 것일까?“달라면서요? 왜 안 받아요?”정가혜의 질문에 이연석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고 부케를 받지도 않았다.‘뭐 하자는 거지?’정가혜는 다시 한번 그의 손에 부케를 건넸다.“이런 거 나한테는 큰 의미 없으니까 빨리 받아요.”말 그대로 꽃 따위 큰 의미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지나간 사람 또한 큰 의미가 없었다. 이혼 경력이 있는 사람은 원래 그런 것인지 크게 바라는 것이 없다.이연석은 정가혜의 덤덤한 얼굴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눈에는 얼핏 분노도 어려있었다.“역시 누나는 누나인가 봐요? 나보다 나이가 많아 그런지 쉽게 양보를 하고 말이에요.”정가혜는 머리를 한번 쓸어내려 귀 뒤로 넘기고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구경하는 배하란을 보며 말했다.“내가 이대로 양보하지 않으면 연석 씨 여자친구가 화내지 않겠어요? 나는 불필요한 것에 에너지 낭비하기는 싫어서요. 그러니 사람이 양보할 때 빨리 받죠?”그녀의 말에는 가시가 있
정가혜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그녀의 전남편도 그녀에게 목석같다느니 돌 같다느니 하는 소리를 한 적이 있다.그런데 그 소리를 이연석도 똑같이 해버렸다.3년 동안의 잠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아니면 그녀는 남자들에게 이런 얘기를 들어야만 하는 팔자인 걸까?“연석아, 그렇게 말하지 마. 언니가 나이가 조금 많아 보이기는 해도 그래도 여잔데, 그러는 거 실례야.”배하린은 이연석의 팔짱을 끼며 선심 쓰듯 얘기했다.주서희는 그런 그녀의 모습과 말투에 기가 막혀 웃음이 절로 났다.“배하린 씨라고 했죠? 얼굴을 보면 그리 어린 나이도 아닌 것 같은데 생각하는 대로 말을 막 내뱉을 시기는 지나지 않았나?”배하린은 주서희가 갑자기 끼어들어 인신공격해대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다시 무해한 얼굴로 돌아와 이연석의 품속으로 쓰러졌다. 그러고는 뭐라고 일러바치려는데 그대로 당해줄 주서희가 아니었다.그녀는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더니 웃으면서 배하린에게 건네주었다.“마침 우리 병원에 실력 좋은 성형외과 선생님들이 있거든요. 시간 나면 관리받으러 와요. 리프팅도 좀 하고 이리저리 손 좀 보면 아마 금방 젊어 보일 수 있을 거예요. 원장 권한으로 특별히 할인을 많이 해줄게요.”그 말에 배하린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딱 봐도 내가 더 어려 보이는데 리프팅? 그리고 뭐 손을 보면 젊어 보일 수 있다고? 이 여자가 진짜!’배하린은 이를 꽉 깨물고 그녀가 건네는 명함을 힐긋 바라보았다.그러다 병원 이름을 보고는 표정이 굳어버렸다.그녀가 내민 명함에는 서울에서 제일 유명한 병원 이름이 적혀 있었다.일반 사람들은 병을 보고 싶어도 쉽게 볼 수 없다는 VIP들이 많이 찾는 병원이었다.배하린은 자신에게 이딴 망발을 내뱉은 여자가 그런 병원의 원장이라고 하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하지만 애써 진정하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 명함을 받아들었다.“고마워요, 서희 언니.”배하린은 주서희의 이름을 보고 바로 언니라
서유는 배하린이 아닌 이연석을 바라보며 말했다.“아까 부케 던질 때 가혜가 먼저 받았고 연석 씨 여자친구가 지민 씨한테 잘 보이기 위해 그 부케를 지민 씨한테 던졌어요. 믿기 어려우면 지민 씨한테 물어봐도 좋아요.”아까 부케 일로 이연석이 나서려 할 때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이씨 가문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쳐버렸다.“그리고 지민 씨가 부케를 다시 가혜한테 던졌어요. 가혜는 부케를 받고 나서 바로 연석 씨 여자친구분한테 주려고 했는데 받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왜 그때는 안 받고 굳이 연석 씨한테 가서 부케를 가져다 달라고 졸랐는지 모르겠네요.”그 말에 이연석의 잘생긴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배하린을 바라보았다.배하린은 그에게 염치없는 걸 무릅쓰고 정가혜에게 부케 좀 양보해달라고 했더니 정가혜가 이런 예쁜 꽃은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조롱했다고 했었다.그의 시선을 느낀 배하린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내가 오해했나 보네. 나는 가혜 언니가 나한테 부케를 주기 싫어하는 줄 알았어.”그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촉촉한 눈으로 이연석을 지그시 바라보았다.“한 달 전에 너 구한다고 한쪽 귀가 잘 안 들린다고 했잖아. 아마 그래서 오해가 생긴 것 같아.”그 말에 이연석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건 망설이라고 있다는 것이다.배하린은 이연석이 어떤 사람인지 이미 다 파악하고 있기에 더 이상의 해명은 하지 않았다.해명하면 할수록 말은 더 꼬이게 되는 법이니 말이다.배하린은 서유와 사람들을 향해 고개 숙여 사과했다.“죄송해요, 귀가 제대로 안 들려서 오해를 사고 말았네요. 하지만 정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방금까지의 대화로 봐서는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배하린 씨가 그렇게 말하니 확실히 문제가 있는 거겠죠? 우리 병원 이비인후과 선생님 중에 유명한 분들이 많아요. 얼굴 관리받으러 올 때 꼭 귀도 한번 보고 가요. ”주서희는 그녀
정가혜가 떠난 뒤 이승하는 식장 스태프를 향해 말했다.“아직 내보내지 않고 뭐 하고 있지?”스태프들은 그녀 앞으로 다가와 다시 한번 얘기했다.“이만 나가주시죠.”배하린은 끝까지 자신을 쫓아내 보내려는 이승하를 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마음 같아서는 그에게 따지고 들고 싶었지만 이연석 앞이라 꾹 참았다.지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연석의 마음속 첫사랑 이미지를 지켜야 한다. 그래야만 그와 결혼할 수 있을 테니까.배하린은 고개를 푹 숙이고 불쌍한 얼굴로 얘기했다.“연석아,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정가혜가 가버린 지금 모든 게 상관없어진 이연석은 미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먼저 가.”배하린은 자신이 이렇게 얘기하면 그가 함께 떠날 줄 알았는데 이연석은 너무나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정가혜가 사라진 곳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는 그를 보더니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배하린은 주먹을 꽉 쥐더니 이내 뒤를 돌아 이곳을 떠나버렸다.그녀가 떠나자 드디어 식장에 평화가 찾아왔다.이씨 가문 사람들과 이승하의 친구들은 서로 와인잔을 부딪히며 담소를 나눴다.이승하와 서유는 결혼식의 주인공이라 하객들이 남아 있는 한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이승하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끝내고 싶었지만 애써 참고 있다.서유는 이승하에게 술을 권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을 보고는 짧게 인사만 나눈 뒤 주서희와 함께 정가혜를 찾으러 나섰다.정가혜는 식장 밖에 있는 잔디밭에 앉아 아무런 표정도 없이 디저트를 먹고 있었다.서유는 그 모습을 보더니 주서희와 함께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잔디 위에 앉았다.“연석 씨가 하는 말은 신경 쓰지 마. 너도 알잖아, 원래 좀 철이 없는 거.”주서희도 한마디 건들며 정가혜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서유 씨 말이 맞아요. 괜히 그런 남자 때문에 기분 상할 거 없어요.”정가혜는 그녀들의 위로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아까 일은 벌써 기억에서 지웠어요. 그저 나는 왜 만나는 남자마다 다 이 모양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