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이 끝난 후 반지 교환이 진행되었다.목사님과 이씨 가문 사람들 그리고 서유의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승하는 스태프가 건네준 반지를 건네받고 한쪽 무릎을 꿇더니 서유의 손에 천천히 반지를 끼웠다.왕방울만 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가 약지에 끼워진 순간 서유는 눈가가 빨갛게 변해서는 목이 메어왔다.이승하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등에 맹세의 키스를 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다시 고개를 들어 질식할 정도로 아름다운 자신만의 여인을 바라보았다.“서유야, 사랑해.”“나도 사랑해요.”서유는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마찬가지로 그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반지 교환이 끝난 후 샴페인샤워까지 마치며 결혼식도 천천히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그때 이승하가 갑자기 그녀를 두고 옆으로 걸어가더니 장식인 줄로만 알았던 오래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앞쪽 피아노에 앉은 이연석을 바라보았다.두 사람에게 흰색 조명이 쏟아졌다.“형수님, 이건 형이 오직 형수님을 생각하며 작곡한 곡입니다. 잘 들어주세요. 그리고 제 동생이 형수님에게 춤을 바칠 거예요.”그 말에 두 사람 곁으로 이지민이 말없이 다가와 서유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이연석이 스태프 쪽으로 손짓하자 은은한 조명이 서유를 비췄다.그녀는 손에 꽃을 꼭 쥐고 피아노 앞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이승하는 어느새 겉옷을 벗은 채 셔츠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그는 셔츠 단추를 하나 풀더니 익숙하게 소매를 걷어 올렸다.그러고는 준비가 다 된 듯 이연석과 사인을 주고받더니 곧바로 건반 위에 손을 올리고 연주를 시작했다.잔뜩 집중한 얼굴로 건반 위를 유영하듯 부드럽게 휘젓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고 또 멋있어 보였다.서유는 더 이상 이승하에게 놀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깊은 날 그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되었다.평소 차갑고 도도한 남자가 건반 앞에서는 그 순간보다 더 부드러워 그녀의 가슴을 간지럽혔다.이연석은 이승하가 연주를 시작하고 나서 5초 뒤에 손을 움직이기
주서희와 정가혜는 동시에 뒤를 돌아 그들에게 질문한 여자를 바라보았다.그녀는 하얀 피부에 남자들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주서희는 그녀가 누군지 몰랐지만 정가헤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눈앞에 있는 여자는 바로 이연석과 함께 사진을 찍은 그의 첫사랑이다.정가혜는 이연석이 첫사랑을 이곳까지 데리고 올 줄은 몰랐다. 중요한 사람들만 모인 자리에 굳이 데려왔다는 건 아마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녀의 시선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정가혜는 그 남자를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모든 걸 다 내려놓은 듯한 미소를 지었다.‘이제 드디어 한 사람한테 정착하려나 보네. 잘 된 일이지 뭐.’그 정착하려는 여자가 그녀는 아니지만 뭐가 됐든 잘된 일이다.주서희는 아무 말 없는 정가혜를 대신해 답을 해주었다.“저희는 신부 쪽 친구들이에요. 연석 씨와는 오다가다 알게 된 것뿐이고요.”그 말에 뒤에 앉은 여자는 대놓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그제야 활짝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연석이 여자친구, 배하린이라고 해요.”주서희는 여자친구라는 소리에 정가혜를 힐끔 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그녀와 인사했다.“네, 안녕하세요.”짧은 인사를 마친 뒤 그녀는 또다시 정가혜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다행히 큰 감정변화는 없는 듯해 주서희는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이연석과 정가혜는 이미 과거형이고 결혼식이 끝난 후 정가혜는 남자친구를 고르러 가야 한다.연주가 끝이 난 후 드디어 부케 던지기가 시작되었다.젊은 남녀들이 모두 앞으로 나왔고 서유는 뒤로 돌아 힘껏 부케를 던졌다.사실 그녀는 던지기 전에 정가혜와 주서희가 있는 곳을 확인하고 정확하게 그들을 향해 던졌다.포물선이 예쁘게 그려지고 정가혜의 손에 부케가 떨어졌다. 하지만 그때 배하린이 갑자기 손을 위로 치켜들었고 이에 부케가 다시 공중으로 향하더니 정확히 이지민 쪽으로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이지민은 그걸 보고는 손을 높게 들어 부케를
정가혜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배하린이 이연석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연석아, 됐어. 그냥 이분한테 주자.”정가혜는 그제야 어떤 상황인지 깨달았다. 배하린은 이지민 때문에 언짢아진 것을 제일 만만한 그녀에게 푸는 것이다.모두 그녀 탓으로 돌리면서 말이다.만약 이지민이 다시 부케의 방향을 돌렸을 때 옆으로 피했더라면 배하린은 이런 짓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다만 정가혜가 제일 어이가 없는 건 고작 부케를 받지 못했다고 칭얼거리는 여자친구 때문에 이연석이 이곳에 끼어들었다는 것이다.애초에 서유가 던진 꽃은 예정대로라면 정가혜에게 도착하게 되는데 그걸 중간에서 이상하게 훼방 놓은 사람은 그의 여자친구였다.정가혜는 아까 피아노 치던 그의 모습이 잠깐이라도 멋있다고 생각한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그녀는 피식 웃더니 아무 말 없이 부케를 그에게 건넸다.하지만 이연석은 그저 시선을 내려 부케를 보고 있을 뿐 받지 않았다.이대로 덥석 받으면 너무 없어 보일까 봐 일부러 시간을 끄는 것일까?“달라면서요? 왜 안 받아요?”정가혜의 질문에 이연석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고 부케를 받지도 않았다.‘뭐 하자는 거지?’정가혜는 다시 한번 그의 손에 부케를 건넸다.“이런 거 나한테는 큰 의미 없으니까 빨리 받아요.”말 그대로 꽃 따위 큰 의미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지나간 사람 또한 큰 의미가 없었다. 이혼 경력이 있는 사람은 원래 그런 것인지 크게 바라는 것이 없다.이연석은 정가혜의 덤덤한 얼굴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눈에는 얼핏 분노도 어려있었다.“역시 누나는 누나인가 봐요? 나보다 나이가 많아 그런지 쉽게 양보를 하고 말이에요.”정가혜는 머리를 한번 쓸어내려 귀 뒤로 넘기고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구경하는 배하란을 보며 말했다.“내가 이대로 양보하지 않으면 연석 씨 여자친구가 화내지 않겠어요? 나는 불필요한 것에 에너지 낭비하기는 싫어서요. 그러니 사람이 양보할 때 빨리 받죠?”그녀의 말에는 가시가 있
정가혜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그녀의 전남편도 그녀에게 목석같다느니 돌 같다느니 하는 소리를 한 적이 있다.그런데 그 소리를 이연석도 똑같이 해버렸다.3년 동안의 잠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아니면 그녀는 남자들에게 이런 얘기를 들어야만 하는 팔자인 걸까?“연석아, 그렇게 말하지 마. 언니가 나이가 조금 많아 보이기는 해도 그래도 여잔데, 그러는 거 실례야.”배하린은 이연석의 팔짱을 끼며 선심 쓰듯 얘기했다.주서희는 그런 그녀의 모습과 말투에 기가 막혀 웃음이 절로 났다.“배하린 씨라고 했죠? 얼굴을 보면 그리 어린 나이도 아닌 것 같은데 생각하는 대로 말을 막 내뱉을 시기는 지나지 않았나?”배하린은 주서희가 갑자기 끼어들어 인신공격해대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다시 무해한 얼굴로 돌아와 이연석의 품속으로 쓰러졌다. 그러고는 뭐라고 일러바치려는데 그대로 당해줄 주서희가 아니었다.그녀는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더니 웃으면서 배하린에게 건네주었다.“마침 우리 병원에 실력 좋은 성형외과 선생님들이 있거든요. 시간 나면 관리받으러 와요. 리프팅도 좀 하고 이리저리 손 좀 보면 아마 금방 젊어 보일 수 있을 거예요. 원장 권한으로 특별히 할인을 많이 해줄게요.”그 말에 배하린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딱 봐도 내가 더 어려 보이는데 리프팅? 그리고 뭐 손을 보면 젊어 보일 수 있다고? 이 여자가 진짜!’배하린은 이를 꽉 깨물고 그녀가 건네는 명함을 힐긋 바라보았다.그러다 병원 이름을 보고는 표정이 굳어버렸다.그녀가 내민 명함에는 서울에서 제일 유명한 병원 이름이 적혀 있었다.일반 사람들은 병을 보고 싶어도 쉽게 볼 수 없다는 VIP들이 많이 찾는 병원이었다.배하린은 자신에게 이딴 망발을 내뱉은 여자가 그런 병원의 원장이라고 하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하지만 애써 진정하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 명함을 받아들었다.“고마워요, 서희 언니.”배하린은 주서희의 이름을 보고 바로 언니라
서유는 배하린이 아닌 이연석을 바라보며 말했다.“아까 부케 던질 때 가혜가 먼저 받았고 연석 씨 여자친구가 지민 씨한테 잘 보이기 위해 그 부케를 지민 씨한테 던졌어요. 믿기 어려우면 지민 씨한테 물어봐도 좋아요.”아까 부케 일로 이연석이 나서려 할 때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이씨 가문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쳐버렸다.“그리고 지민 씨가 부케를 다시 가혜한테 던졌어요. 가혜는 부케를 받고 나서 바로 연석 씨 여자친구분한테 주려고 했는데 받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왜 그때는 안 받고 굳이 연석 씨한테 가서 부케를 가져다 달라고 졸랐는지 모르겠네요.”그 말에 이연석의 잘생긴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배하린을 바라보았다.배하린은 그에게 염치없는 걸 무릅쓰고 정가혜에게 부케 좀 양보해달라고 했더니 정가혜가 이런 예쁜 꽃은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조롱했다고 했었다.그의 시선을 느낀 배하린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내가 오해했나 보네. 나는 가혜 언니가 나한테 부케를 주기 싫어하는 줄 알았어.”그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촉촉한 눈으로 이연석을 지그시 바라보았다.“한 달 전에 너 구한다고 한쪽 귀가 잘 안 들린다고 했잖아. 아마 그래서 오해가 생긴 것 같아.”그 말에 이연석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건 망설이라고 있다는 것이다.배하린은 이연석이 어떤 사람인지 이미 다 파악하고 있기에 더 이상의 해명은 하지 않았다.해명하면 할수록 말은 더 꼬이게 되는 법이니 말이다.배하린은 서유와 사람들을 향해 고개 숙여 사과했다.“죄송해요, 귀가 제대로 안 들려서 오해를 사고 말았네요. 하지만 정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방금까지의 대화로 봐서는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배하린 씨가 그렇게 말하니 확실히 문제가 있는 거겠죠? 우리 병원 이비인후과 선생님 중에 유명한 분들이 많아요. 얼굴 관리받으러 올 때 꼭 귀도 한번 보고 가요. ”주서희는 그녀
정가혜가 떠난 뒤 이승하는 식장 스태프를 향해 말했다.“아직 내보내지 않고 뭐 하고 있지?”스태프들은 그녀 앞으로 다가와 다시 한번 얘기했다.“이만 나가주시죠.”배하린은 끝까지 자신을 쫓아내 보내려는 이승하를 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마음 같아서는 그에게 따지고 들고 싶었지만 이연석 앞이라 꾹 참았다.지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연석의 마음속 첫사랑 이미지를 지켜야 한다. 그래야만 그와 결혼할 수 있을 테니까.배하린은 고개를 푹 숙이고 불쌍한 얼굴로 얘기했다.“연석아,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정가혜가 가버린 지금 모든 게 상관없어진 이연석은 미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먼저 가.”배하린은 자신이 이렇게 얘기하면 그가 함께 떠날 줄 알았는데 이연석은 너무나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정가혜가 사라진 곳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는 그를 보더니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배하린은 주먹을 꽉 쥐더니 이내 뒤를 돌아 이곳을 떠나버렸다.그녀가 떠나자 드디어 식장에 평화가 찾아왔다.이씨 가문 사람들과 이승하의 친구들은 서로 와인잔을 부딪히며 담소를 나눴다.이승하와 서유는 결혼식의 주인공이라 하객들이 남아 있는 한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이승하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끝내고 싶었지만 애써 참고 있다.서유는 이승하에게 술을 권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을 보고는 짧게 인사만 나눈 뒤 주서희와 함께 정가혜를 찾으러 나섰다.정가혜는 식장 밖에 있는 잔디밭에 앉아 아무런 표정도 없이 디저트를 먹고 있었다.서유는 그 모습을 보더니 주서희와 함께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잔디 위에 앉았다.“연석 씨가 하는 말은 신경 쓰지 마. 너도 알잖아, 원래 좀 철이 없는 거.”주서희도 한마디 건들며 정가혜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서유 씨 말이 맞아요. 괜히 그런 남자 때문에 기분 상할 거 없어요.”정가혜는 그녀들의 위로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아까 일은 벌써 기억에서 지웠어요. 그저 나는 왜 만나는 남자마다 다 이 모양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 말에 숨을 몰아쉬던 심이준이 발끈하며 얘기했다.“배로 가자고 한 건 내가 맞지만 조지도 분명 동의했잖아요. 그리고 따지고 보면 조지가 여자한테 홀리는 바람에 이 사달 난 거잖아요!”이에 조지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허리춤에 손을 올려놓고 따졌다.“심이준 씨도 옆에 여성분을 끼고 잘만 놀았잖아요!”“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가 꼬신게 아니라 그쪽에서 멋대로 다가왔다고요.”“어쨌든 받아준 거잖아요! 애초에 배가 아닌 비행기를 탔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습니까!”두 사람은 제 나름의 도리를 내세우며 언성을 높였다.서유는 두 사람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조지부터 달랬다.“심이준 씨랑 동행하느라 고생했어요.”조지는 심이준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의 등장에 설움을 그대로 토해냈다.“납치 당한 건 그렇다 쳐요. 그런데 어떻게 다른 나라로 가는데 고작 2백만 원만 들고 갈 수 있습니까. 그리고 납치범들이 199만 원만 가져가겠다니까 만원은 왜 빼냐는 쓸데없는 질문을 해서 나까지 한 대 맞아버렸어요.”서유는 조지의 등을 토닥여주며 그의 얘기를 전부 다 들어주었다.옆에 있던 주서희는 심이준의 얼굴을 한참이나 지켜보더니 정가혜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왜 가혜 씨가 저분을 심대칭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아요.”정가혜는 언쟁을 벌일 때도 대칭된 표정을 유지하는 심이준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딱 알겠죠? 내가 괜히 그런 별명을 지어줬을까 봐요.”주서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심이준은 서유를 보며 물었다.“그래서 결혼식은 언제 해요?”서유는 노을 진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하늘 안 보여요? 벌써 끝났죠.”“아... 이미 끝났다니 아쉽네요.”하지만 아쉬운 것도 잠시 그는 곧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결혼식을 못 봤으니까 축의금은 안 줘도 되는 거죠?”“봤든 못 봤든 축이금은 줘야죠. 혹시 돈 아까워서 그러는 거예요?”서유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정가혜가 물었다.이에 심이준은 그녀를 힐끔 째려보더니 다시 서유를 향해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팔레 별장. 이승연은 이태석의 손을 잡고 말했다.“할아버지, 손자며느리 보러 가지 않으시겠어요?”용머리 지팡이를 든 이태석은 시선을 거두며 차갑게 말했다.“걔가 뭐라고 내가 만나러 가겠어?”고집스러운 그의 모습을 보고 이승연은 기어코 물러서지 않았다. “정말 보고 싶지 않았으면 결혼식에 오지도 않았겠죠.”비록 결혼식 과정을 전부 뒤에서 몰래 지켜보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서유의 그 문자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다.이태석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아이를 임신하지 않으면 우리 집안에 발도 못 들여.”이승연은 씩 웃더니 말했다.“할아버지 잊으셨나 본데 지금 우리 가문의 주인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승하예요.”이태석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았다.“너 지금 일부러 나 화나게 하려는 거지?”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제가 어떻게 감히 할아버지를 화나게 하겠어요? 존경해도 모자란데.”이태석은 소매를 털며 코웃음을 쳤다.“내가 왔다는 건 알리지 마.”체면이 하늘을 찌르는 어르신은 이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고집쟁이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연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이러다 둘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손자라도 생기면 어떡하시려고 저러나?’해 질 녘, 결혼식이 끝나고 하객들이 흩어지고 서유와 이승하가 배에 올랐다.그는 이번 신혼여행을 위해 한 달 동안의 스케줄을 미뤘고 특별히 큰 배도 한 척 샀다.서유를 데리고 세계 일주를 하고 싶었지만 그룹 총수라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한 달만 일정을 잡았다.배가 출발하기 전, 정가혜와 주서희 그리고 연이는 준비한 신혼 선물을 그들에게 주었다.정가혜와 연이의 선물은 작은 여행 가방 두 개이고, 주서희의 선물은 큼지막한 빨간색 트렁크였다.주서희는 서유에게 밤에 샤워하기 전에만 열고 다른 때는 절대 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서유는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주서희가 그렇게 수상한 것을 보고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주서희에게 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정가혜가 또 그녀에게 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