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석의 마음 속 불안감이 극에 달할 즈음, 정가혜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는 급히 메시지를 열어보고 내용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정신을 차린 그는 급히 정가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정가혜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곧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시 시도했을 때는 이미 블랙리스트에 올려진 상태였다. 통화를 종료한 이연석은 대화창으로 돌아가 급하게 타이핑을 시작했다.[가혜 씨, 무슨 일이에요? 왜 청혼을 거절하는 거예요?] 그러나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대화창에 빨간색 느낌표가 떠오른 것을 보니 그녀가 다시 그를 차단한 것이 분명해졌다. 이연석은 얼굴을 찡그리며 정가혜가 보낸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연석 씨, 더 이상 청혼 같은 건 하지 마요. 난 당신과 결혼할 생각 없어요. 그날 밤은 그냥 하룻밤일 뿐이니 신경 쓰지 말고요.]그러니까...정가혜가 그때 자신에게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던 건, 자신과 결혼할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던 건가? 그래서 이제야 마음을 정하고 정확한 답을 준 건가?그는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청혼 얘기를 한 건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가혜는 여전히 냉정하고 단호했다. 심지어 육체적인 관계를 가진 후에도 그녀는 그것을 그저 하룻밤의 일로 치부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수 있었다. 이연석은 화가 나서 핸드폰을 세게 던졌다. 정가혜가 천 걸음을 물러서면 자신은 만 걸음을 따라가며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돌보다도 더 단단했고 자신은 결코 그 마음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는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 채 소파에 털썩 앉았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다시 핸드폰을 잡고 곧장 정가혜의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정가혜는 집에 없었다. 노현정은 정가혜가 어젯밤에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연석은 그녀가 다시 나이트클럽에서 일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급히 차를 몰고 그곳으로 향했다. 나이트클럽에 도착했을 때 매니저는 사장이 오지 않았다고 했고, 이연석에게
서유는 상황을 파악한 뒤 곧바로 정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가혜는 서유의 전화를 받았다. “서유야, 무슨 일이야?” 정가혜의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그제야 안심하며 물었다. “가혜야, 너 어디에 있어?” 공항을 나서며 선글라스를 낀 정가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 M국에 있어.” “뭐? 갑자기 M국에 왜 간 거야?” 서유가 의아한 듯 묻자 정가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털어놓았다. “사월이 수술이 끝났어. 그러니 돌봐줄 사람이 필요해.” 송사월의 이름이 나오자 서유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지만, 곧 자연스럽게 물었다. “수술은 잘 끝났어?” 정가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수술은 성공적이었어. 다만 회복 과정을 지켜봐야 해. 그래도 일어설 가능성이 커.” 송사월이 일어설 가능성이 크다는 말에, 서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일어설 수 있다니 정말 다행이야. 언제쯤 귀국할 예정이야?” 정가혜는 차분하게 말했다. “이제 막 수술을 끝냈으니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해. 아마 한 달쯤 걸릴 거야. 회복이 어느 정도 되면 한국으로 돌아가서 재활 치료를 받을 거야.” 서유는 상황을 파악한 뒤, 이번엔 이연석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가혜야, 네가 도련님의 청혼을 거절한 건 혹시 그의 부모님이 너를 따로 만났기 때문이니?” 서유가 전화를 건 이유를 이미 알고 있던 정가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연석 씨 어머니 말이 맞아. 나와 그 사람이랑 어울리지 않아.” 서유가 정가혜를 설득하려고 하자 그녀는 이를 막았다. “서유야, 나와 연석 씨는 이제 끝났어. 그 일로 더 이상 걱정하지 마.” 그렇게 말한 뒤 정가혜는 멀리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김태진을 보았고, 급히 손을 들어 인사하며 덧붙였다. “김 비서가 나를 데리러 왔어. 이만 끊을게.” “잠깐...” 서유가 더 할 말이 있었지만 정가혜는 이미 전화를 끊어버렸다. 서유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연석에게
이연석은 집으로 돌아간 후, 정말로 본가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안에 있던 물건들은 전부 부숴버렸고 수백 년 된 골동품들도 그의 발길질에 산산조각 났다. 마치 폭도처럼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고, 미친 듯이 온 집안을 휘저으며 파괴했다. 아들의 과격한 행동을 바라보며, 유나희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연석아! 너 여자 하나 때문에 어떻게 부모에게 이럴 수 있니? 양심이란 게 남아 있기는 하니?” 이연석은 야구방망이를 들고 물건을 부수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가혜 씨랑 결혼하고 싶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끼어들어야만 했어요? 두 분의 양심은 어디에 있어요?” 고가의 골동품들이 이연석의 손에 의해 하나둘씩 부서지는 것을 보자 마침내 참지 못한 이진철이 앞으로 나섰다. “이연석!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이연석은 아버지가 말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쥐고 있던 백옥 연적을 들어 바닥에 내리쳤다. “어머니가 가혜 씨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아버지가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물건을 다 부숴버릴 거예요. 단 하나도 남기지 않을 테니까 그런 줄 아세요!” 평소에도 집에서 권위가 없던 이진철은 아들의 협박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너희 엄마가 다 널 위해서 그런 건데, 네가 그걸 받아들이지 않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네 엄마를 끌어내려 그 여자에게 사과하게 하려고 하니?” 이연석은 또다시 야구방망이를 휘둘러 골동품 진열대의 꽃병들을 모두 박살냈다. “정말 절 위했다면 제 결혼을 도와줘야죠. 제 뒤에서 제가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게 험담이나 하고 다녀서는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사랑하던 꽃병들이 부서진 것을 보자 이진철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이 꽃병들은 수백 년 된 것들이야. 하나에 수백억 원짜리인데, 네가 그걸 다 부숴버리다니... 너 정말...” 이진철은 분노에 휩싸여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했다. 다행히 하인이 그를 붙잡아 겨우 버텼다. 남편이 이토록 분노에 차 있는 것을 본 유나희는
이렇게 막무가내로 구는 아들을 보며 이진철은 유나희에게 쓴소리를 했다.“그냥 결혼 허락해 주면 될 것을. 뭐 하러 애들 뜯어말려? 지금 이게 무슨 꼴이냐고? 이 나이를 먹고 아들내미 시중까지 들게 생겼으니...”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던 유나희가 그를 흘겨보았다.“당신은 늘 이런 식이야. 항상 대충 얼버무리기나 하고.”“얼버무리는 게 아니라 애들 일은 애들 스스로 알아서 하게 내버려둬. 다 자기들 복이 있는 거야. 뭐 하러 그렇게 간섭해? 그러다가 죽을 때까지 결혼 안 하겠다고 하면 어떡할 거야?”“우리 연석이가 얼마나 좋은 남자인데?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목을 매는데. 혼자 늙어 죽기야 하겠어?”“좋은 남자?”이진철은 고개를 돌려 거실 소파에 축 늘어져 있는 이연석을 힐끔 쳐다보았다.아무리 봐도 저놈이 어디가 좋은 남자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여보.”시선을 거두고 손을 내밀어 유나희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저기... 정가혜 씨한테 가서 사과하는 게 어때?”제발 저놈 좀 이 집안에서 안 보게 해줘.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이때, 유나희가 물을 받아 냄비에 붓자 불길이 확 달아올랐다. 그 광경에 그가 바로 달려가 냄비 뚜껑을 가져와 위로 덮었다. “봐봐. 요리는커녕 이런 상식도 모르는 사람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할 거야? 얼른 가서 사과해.”남편이 자꾸만 사과하라고 부추기자 유나희는 화가 벌컥 치밀어올랐다.“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하는데?”뚜껑을 열고 냄비 안의 음식을 확인해 보니 이미 까맣게 타서 먹을 수 없는 상태였다. 그녀는 화를 참으며 냄비 안의 음식을 버리고 다시 요리를 했다. 요리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연석이 배달 음식을 주문하지 말고 기어코 직접 만들라고 하는 바람에 지금 이러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요리를 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답답하고 화가 났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악물며 이진철에게 조금만 참으라고 타일렀다.“이젠 아시아 지역의 대표이기도 하니까 회사 일로 많이 바쁠 거야. 이렇게
이지민이 떠난 후, 이승하는 펜을 내려놓고 우아하게 일어나 외투를 집어 들고는 사무실을 나섰고 곧장 이진철의 집으로 향했다. 우뚝 솟은 그가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접시 하나가 날아왔고 그는 빠르게 몸을 피하였다. 접시는 그의 곁을 지나쳐 뒤에 있는 벽에 부딪혔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바닥에 깨진 접시와 어지러운 거실을 쳐다보며 그가 짙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는 이진철의 집에 거의 오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의 기억 속에 이진철의 집은 항상 깨끗하고 단정했다.지금 눈에 들어온 이곳은 깨끗하고 깔끔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고 연이가 뒤뜰에 지은 강아지 집과 똑같은 느낌이었다. 한창 이연석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유나희와 이진철은 이승하를 발견하고는 이내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를 향해 걸어갔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그는 분노에 찬 얼굴을 하고 있는 이연석을 흘끗 쳐다보았다.“일 때문에 연석이한테 볼 일이 있어서요.”그가 이연석을 도와주러 온 것이라고 착각했던 유나희는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이승하가 자신의 집안일에 간섭하는 걸 원치 않았다. “서재에 가서 얘기 나눠. 차 가져다줄게.”그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더니 이연석을 향해 턱을 쳐들고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눈빛을 보냈다. 그제야 이연석은 손에 들고 있던 골동품 꽃병을 내려놓고 이승하를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나희가 커피를 들고 와서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네 취향을 잘 몰라서 연석이 좋아하는 걸로 준비했어. 일단 마셔봐. 입맛에 안 맞으면 다른 걸로 바꿔 줄게.”카리스마가 넘치는 이승하를 보며 그녀는 말투가 상냥하고 한결 부드러워졌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승하가 그녀의 아들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이승하는 밖에서 음식을 쉽게 먹지 않았다. 그러나 유나희의 열정적인 대접에 그는 커피잔을 들어 한모금 마셨다. 맛이 별로였지만 예의 바르게 유나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맛있네요. 고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난감해도 그녀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아무리 너의 처형이라고 해도 우리 집안에 시집오려면 내 동의가 있어야 하는 거야. 시어머니로서 얘기조차 할 자격도 없는 거니?”그녀를 한동안 쳐다보던 그가 차갑게 되물었다.“정가혜 씨가 이 집안으로 시집오겠다고 했었나요?”“그 생각이 없었다면 우리 연석이한테 5년 동안 매달리지도 않았겠지.”나른하게 소파에 기대어있던 그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드님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네요.”내가 내 아들을 모르면 누가 알아?“연석이는 내가 배 아파서 나은 자식이고 내가 애지중지 키운 내 아들이야. 이 세상에서 나만큼 연석이를 잘 아는 사람도 없어.”고집을 부리는 유나희에 그는 반박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헤어진 후, 연석이가 2년 동안 쫓아다니면서 가혜 씨한테 매달린 건 모르고 계시죠?”흠칫하던 그녀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걔 성격으로 여자한테 2년씩이나 매달렸다고? 그럴 일은 절대 없어.”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그랬을 거라고 전혀 믿지 않았다. 밥 먹듯이 여자가 바꾸는 아들이 어떻게 누군가에게 진심일 수가 있겠는가?두 사람이 5년 동안 관계를 이어온 건 정가혜가 재벌 집에 시집오기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이연석에게 매달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정가혜의 편을 들고 있는 이승하의 앞에서 유나희는 대놓고 말할 수가 없었다.“연석이가 그럴 리 없어. 정가혜 씨가 매달린 거겠지.”유나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승하는 중요하지 않았다.“가혜 씨가 매달린 거라면 숙모님과 만난 이후 바로 연석이의 프러포즈를 거절하지 않았을 겁니다.”“거절한 건 밀당 같은 거 아니야? 연석이와 내 사이가 틀어지는 걸 원하고 있을 테니까. 그래야 결국 중간에서 어부지를 얻게 되는 거잖아. 아니라면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사람 사이를 허락해달라고 했겠지.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연석이가 집에서 이 난리를 치는 걸 보고만 있어.”서유의 언니를 이렇게 악랄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오직 유나희뿐일 것이다.
이승하의 말에 차츰 흥분을 가라앉힌 그녀가 의심의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러니까 승하 네 말은 연석이가 정가혜 씨를 사랑했기 때문에 변한 거고 성장했다는 거야?”“가혜 씨한테 몇 번이나 거절을 당하고 나서야 자신이 가혜 씨를 사랑하게 된 것을 깨달았던 거고 가혜 씨를 위해 변한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여전히 그 모양 그 꼴이겠죠.”사실 유나희도 이연석이 변한 모습을 발견하였다. 요즘은 아무리 집에서 난리를 쳐도 회사 일은 꼬박꼬박 다했다. 예전의 이연석이었다면 그게 가능했겠는가?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동안 그렇게 아들한테 열심히 일하라고 타일렀건만 들은 척도 안 하던 녀석이 정가혜가 나서자마자 바로 변한 것을 보니 마음이 불편했다.그러나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다. 그녀가 뭐라고 하든 이승하는 결국 정가혜의 편을 들 테니까. 마음이 내키지 않아 하는 유나희의 모습에 이승하는 눈빛이 더 차갑게 변하였다.“숙모님, 예전에 단이수를 바람둥이라고 오해하고 지민이와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으셨잖아요. 그러고는 나중에 단이수가 성공한 모습을 보고는 또 두 사람을 이어놓으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됐나요? 지민이는 단이수에 대한 마음을 접게 되었고 다른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상연훈 같은 남자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결혼도 못 하고 있지 않나요?”“숙모님께서 간섭하시는 바람에 딸의 행복을 망쳤습니다. 이제는 아들의 행복까지 망칠 작정이신가요?”이지민과 단이수 두 사람의 일만 생각하면 유나희는 죄책감이 들었고 이승하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그의 말을 이어갔다. “두 사람을 갈라놓은 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러나 정가혜는 단이수와 달라. 단이수가 지민이를 사랑하는 만큼 정가혜는 우리 연석이를 사랑하고 있지 않아. 연석이를 위해 단이수가 그랬던 것처럼 나한테 무릎 꿇고 애원하지도 않을 테고. 그저 연석이를 앞세워 이 소란을 피우고 있을 뿐. 내 아들한테 온전히 마음도 주
눈을 천천히 내리까는 데 그녀의 마음과 표정이 흔들리고 있었다.내가 도대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 걸까? 예전에 단이수 같은 사람은 지민이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는 두 사람을 갈라놓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단이수한테도 사정이 있었던 것이었다.지금은 정가혜라는 이 여자가 아들의 짝으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고 한다. 다만...어느 날 갑자기 단이수처럼 정가혜도 자신이 생각하던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때도 지금과 같이 오늘 한 일을 후회하지 않을까?그 생각에 유나희는 식은땀이 났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이런 걱정이 앞서다니. 지난 일에 대한 후회 때문에 생긴 후유증 같은 것일까?단이수를 잃은 이지민이 고통스러워하던 모습과 그 진실을 알고 그녀와의 인연을 끊고 집을 뛰쳐나간 모습을 생각하며 온몸이 차가워졌다. 딸을 잃은 것도 모자라 아들까지 잃고 싶은 걸까?유나희가 반성하고 있는 것 같아 이승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연석이와 가혜 씨 두 사람 허락해 주시는 게 어떠합니까? 숙모님 말씀대로 연석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언젠가는 두 사람이 이혼하게 되겠죠. 그때 가서 마음에 드시는 며느릿감 찾으시면 되잖아요. 그때는 연석이라도 더는 뭐라 하지 않을 겁니다.”“그저 자신을 걱정하는 숙모님한테 고마운 마음뿐이겠죠. 지금 이렇게 들끓고 있는 애한테 찬물을 끼얹으면 연석이의 행복도 망치는 것이고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도 끊어지고 말 겁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겠습니까?”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연석과 이지민은 다르다. 이연석은 남자이고 이씨 가문의 도련님이자 JS 그룹 아시아 지역의 대표이기도 하다. 재혼을 하더라도 여자는 차고 넘칠 것인데 무슨 걱정이 필요하겠는가?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녀가 허락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이연석의 말대로 정가혜한테 가서 사과를 해야 했다. 정가혜가 훗날 자신의 며느리가 될지도 모르는 상항에서 고개 숙여 사과를 하는 일은 정말 내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