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민이 떠난 후, 이승하는 펜을 내려놓고 우아하게 일어나 외투를 집어 들고는 사무실을 나섰고 곧장 이진철의 집으로 향했다. 우뚝 솟은 그가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접시 하나가 날아왔고 그는 빠르게 몸을 피하였다. 접시는 그의 곁을 지나쳐 뒤에 있는 벽에 부딪혔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바닥에 깨진 접시와 어지러운 거실을 쳐다보며 그가 짙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는 이진철의 집에 거의 오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의 기억 속에 이진철의 집은 항상 깨끗하고 단정했다.지금 눈에 들어온 이곳은 깨끗하고 깔끔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고 연이가 뒤뜰에 지은 강아지 집과 똑같은 느낌이었다. 한창 이연석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유나희와 이진철은 이승하를 발견하고는 이내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를 향해 걸어갔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그는 분노에 찬 얼굴을 하고 있는 이연석을 흘끗 쳐다보았다.“일 때문에 연석이한테 볼 일이 있어서요.”그가 이연석을 도와주러 온 것이라고 착각했던 유나희는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이승하가 자신의 집안일에 간섭하는 걸 원치 않았다. “서재에 가서 얘기 나눠. 차 가져다줄게.”그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더니 이연석을 향해 턱을 쳐들고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눈빛을 보냈다. 그제야 이연석은 손에 들고 있던 골동품 꽃병을 내려놓고 이승하를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나희가 커피를 들고 와서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네 취향을 잘 몰라서 연석이 좋아하는 걸로 준비했어. 일단 마셔봐. 입맛에 안 맞으면 다른 걸로 바꿔 줄게.”카리스마가 넘치는 이승하를 보며 그녀는 말투가 상냥하고 한결 부드러워졌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승하가 그녀의 아들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이승하는 밖에서 음식을 쉽게 먹지 않았다. 그러나 유나희의 열정적인 대접에 그는 커피잔을 들어 한모금 마셨다. 맛이 별로였지만 예의 바르게 유나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맛있네요. 고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난감해도 그녀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아무리 너의 처형이라고 해도 우리 집안에 시집오려면 내 동의가 있어야 하는 거야. 시어머니로서 얘기조차 할 자격도 없는 거니?”그녀를 한동안 쳐다보던 그가 차갑게 되물었다.“정가혜 씨가 이 집안으로 시집오겠다고 했었나요?”“그 생각이 없었다면 우리 연석이한테 5년 동안 매달리지도 않았겠지.”나른하게 소파에 기대어있던 그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드님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네요.”내가 내 아들을 모르면 누가 알아?“연석이는 내가 배 아파서 나은 자식이고 내가 애지중지 키운 내 아들이야. 이 세상에서 나만큼 연석이를 잘 아는 사람도 없어.”고집을 부리는 유나희에 그는 반박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헤어진 후, 연석이가 2년 동안 쫓아다니면서 가혜 씨한테 매달린 건 모르고 계시죠?”흠칫하던 그녀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걔 성격으로 여자한테 2년씩이나 매달렸다고? 그럴 일은 절대 없어.”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그랬을 거라고 전혀 믿지 않았다. 밥 먹듯이 여자가 바꾸는 아들이 어떻게 누군가에게 진심일 수가 있겠는가?두 사람이 5년 동안 관계를 이어온 건 정가혜가 재벌 집에 시집오기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이연석에게 매달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정가혜의 편을 들고 있는 이승하의 앞에서 유나희는 대놓고 말할 수가 없었다.“연석이가 그럴 리 없어. 정가혜 씨가 매달린 거겠지.”유나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승하는 중요하지 않았다.“가혜 씨가 매달린 거라면 숙모님과 만난 이후 바로 연석이의 프러포즈를 거절하지 않았을 겁니다.”“거절한 건 밀당 같은 거 아니야? 연석이와 내 사이가 틀어지는 걸 원하고 있을 테니까. 그래야 결국 중간에서 어부지를 얻게 되는 거잖아. 아니라면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사람 사이를 허락해달라고 했겠지.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연석이가 집에서 이 난리를 치는 걸 보고만 있어.”서유의 언니를 이렇게 악랄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오직 유나희뿐일 것이다.
이승하의 말에 차츰 흥분을 가라앉힌 그녀가 의심의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러니까 승하 네 말은 연석이가 정가혜 씨를 사랑했기 때문에 변한 거고 성장했다는 거야?”“가혜 씨한테 몇 번이나 거절을 당하고 나서야 자신이 가혜 씨를 사랑하게 된 것을 깨달았던 거고 가혜 씨를 위해 변한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여전히 그 모양 그 꼴이겠죠.”사실 유나희도 이연석이 변한 모습을 발견하였다. 요즘은 아무리 집에서 난리를 쳐도 회사 일은 꼬박꼬박 다했다. 예전의 이연석이었다면 그게 가능했겠는가?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동안 그렇게 아들한테 열심히 일하라고 타일렀건만 들은 척도 안 하던 녀석이 정가혜가 나서자마자 바로 변한 것을 보니 마음이 불편했다.그러나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다. 그녀가 뭐라고 하든 이승하는 결국 정가혜의 편을 들 테니까. 마음이 내키지 않아 하는 유나희의 모습에 이승하는 눈빛이 더 차갑게 변하였다.“숙모님, 예전에 단이수를 바람둥이라고 오해하고 지민이와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으셨잖아요. 그러고는 나중에 단이수가 성공한 모습을 보고는 또 두 사람을 이어놓으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됐나요? 지민이는 단이수에 대한 마음을 접게 되었고 다른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상연훈 같은 남자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결혼도 못 하고 있지 않나요?”“숙모님께서 간섭하시는 바람에 딸의 행복을 망쳤습니다. 이제는 아들의 행복까지 망칠 작정이신가요?”이지민과 단이수 두 사람의 일만 생각하면 유나희는 죄책감이 들었고 이승하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그의 말을 이어갔다. “두 사람을 갈라놓은 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러나 정가혜는 단이수와 달라. 단이수가 지민이를 사랑하는 만큼 정가혜는 우리 연석이를 사랑하고 있지 않아. 연석이를 위해 단이수가 그랬던 것처럼 나한테 무릎 꿇고 애원하지도 않을 테고. 그저 연석이를 앞세워 이 소란을 피우고 있을 뿐. 내 아들한테 온전히 마음도 주
눈을 천천히 내리까는 데 그녀의 마음과 표정이 흔들리고 있었다.내가 도대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 걸까? 예전에 단이수 같은 사람은 지민이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는 두 사람을 갈라놓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단이수한테도 사정이 있었던 것이었다.지금은 정가혜라는 이 여자가 아들의 짝으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고 한다. 다만...어느 날 갑자기 단이수처럼 정가혜도 자신이 생각하던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때도 지금과 같이 오늘 한 일을 후회하지 않을까?그 생각에 유나희는 식은땀이 났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이런 걱정이 앞서다니. 지난 일에 대한 후회 때문에 생긴 후유증 같은 것일까?단이수를 잃은 이지민이 고통스러워하던 모습과 그 진실을 알고 그녀와의 인연을 끊고 집을 뛰쳐나간 모습을 생각하며 온몸이 차가워졌다. 딸을 잃은 것도 모자라 아들까지 잃고 싶은 걸까?유나희가 반성하고 있는 것 같아 이승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연석이와 가혜 씨 두 사람 허락해 주시는 게 어떠합니까? 숙모님 말씀대로 연석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언젠가는 두 사람이 이혼하게 되겠죠. 그때 가서 마음에 드시는 며느릿감 찾으시면 되잖아요. 그때는 연석이라도 더는 뭐라 하지 않을 겁니다.”“그저 자신을 걱정하는 숙모님한테 고마운 마음뿐이겠죠. 지금 이렇게 들끓고 있는 애한테 찬물을 끼얹으면 연석이의 행복도 망치는 것이고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도 끊어지고 말 겁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겠습니까?”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연석과 이지민은 다르다. 이연석은 남자이고 이씨 가문의 도련님이자 JS 그룹 아시아 지역의 대표이기도 하다. 재혼을 하더라도 여자는 차고 넘칠 것인데 무슨 걱정이 필요하겠는가?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녀가 허락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이연석의 말대로 정가혜한테 가서 사과를 해야 했다. 정가혜가 훗날 자신의 며느리가 될지도 모르는 상항에서 고개 숙여 사과를 하는 일은 정말 내키지
결국 이승하의 압박에 못 이겨 유나희는 전용기에 올라탔고 이연석도 그녀와 함께 전용기에 올랐다.도착하기 전에 이연석은 그녀에게 정가혜를 만난 후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당부했다. 그렇지 않으면 집안에서 난리를 피우는 것도 모자라 유씨 가문에서까지 난리를 피우겠다고 협박했다. 사람을 위협하는 수단은 이승하와 많이 닮은 듯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 빠진 호랑이처럼 이승하만큼 큰 위협은 없었다.문득 이승하가 자신의 아들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협박하는 수단이 얼마나 타고난 건지 그녀가 이리 어쩔 수 없이 전용기에 올라타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정작 아들놈은 남을 위협하는 재주가 옹졸한 것 같았다. 집안에서 소란을 피울 줄밖에 모르니...옆에서 자꾸만 재잘재잘 거리는 이연석을 향해 그녀가 불쾌하게 한마디 내뱉었다.“시끄러워.”그제야 입을 다문 그가 승무원에게서 커피를 건네받아 한 모금 마셨다.“엄마, 제발 이번 한 번만 도와줘요. 가혜 씨 마음을 돌려주면 앞으로 제가 효도할게요”이 말은 떠나기 전 이승하가 특별히 그에게 당부한 것이었다. 사실 둘째 형이 왜 이렇게 말하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정가혜 때문에 이런 말까지 하는 아들을 보며 유나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정가혜 씨가 그렇게 좋아?”커피잔을 들고 있던 그가 대답했다.“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랑이요. 그 여자 정말 많이 사랑해요.”허구한 날 날라리 같던 아들이 이렇게 진지한 걸 그녀는 처음 본다. 갑자기 이승하의 말이 떠오른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정가혜 씨가 없으면 너 어떡할 거야?”이지민처럼 우울증에 걸려 몇 번이나 자살 시도를 하고 결국은 더 이상 단이수를 사랑하지 않는다며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할 것인지?그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유나희를 쳐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그 여자 없으면 나 죽을지도 몰라요. 교통사고 났을 때 그 생각 했거든요. 가혜 씨가 날 버리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유나희는 못마땅한 얼굴
밖에 사람이 있는 걸 눈치채지 못한 정가혜는 고개를 숙인 채 누워있는 남자를 향해 물었다.“사월아,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내가 만들어줄게.”큰 수술을 받은 송사월은 얼굴이 창백하고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말할 힘도 없지만 그는 그녀를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태진이한테 시켜요. 힘들게 만들지 말고.”그동안 그녀는 병원과 숙소를 오가며 고생을 많이 했다. 그녀가 수건을 짜면서 입을 열었다.“여기 음식 네 입맛에 안 맞잖아. 내가 가서 만들어올게.”말리려고 하는데 그녀가 송사월의 말을 끊어버렸다.“밥 한 끼 만드는 게 뭐가 힘들다고 그래? 그리고 어차피 넌 죽 먹어야 하니까 어려운 일 아니야.”밥하는 게 힘들지 않다고?요리를 하는 게 어렵기만 했던 유나희는 정가혜의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어렸을 때부터 쭉 요리를 해서 어렵지 않은 건가?그 생각에 유나희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내가 왜 또 정가혜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는 거야? 쓸데없이 정말...한편, 이연석은 바쁜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녀가 물을 붓고 병실을 나오자 그제야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가혜 씨.” 이연석의 모습에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그의 곁을 지나갔다.여전히 자신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에 그가 급히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가혜 씨, 엄마가 당신을 찾아갔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요.”그 사실을 서유한테 말한 적이 있으니 이연석이 알고 있는 건 놀랄 일이 아니었다. 다만... 정가혜는 멀리 서 있는 유나희를 힐끔 쳐다보았다. 저 사람이 여긴 어떻게...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가 몸을 돌려 유나희를 가리켰다.“엄마를 데리고 당신한테 사과하러 왔어요.”“사과요?”도도한 부잣집 사모님이 그녀한테 사과를 한다고?정가혜는 믿을 수가 없었다.“우리 엄마가 먼저 당신을 비난한 거니까 당연히 사과해야죠.”그가 말을 마치고는 유나희를 향해 끊임없이 눈
그 말에 이연석은 물론 유나희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직접 사과까지 하러 왔는데 더 이상 밀당이 필요한가?그러나 정가혜한테는 이게 밀당이 아니라 정말 이연석을 포기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유나희의 손을 잡고 그 블랙 카드를 손에 집어넣은 뒤, 빠르게 자리를 떴다. 그 모습에 이연석은 미친 듯이 달려와 그녀를 덥석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엄마의 사과가 성의가 부족하다면 말해요. 다시 사과하라고 할게요. 제발 결혼 안 할 거라는 말 하지 말아요.”넝쿨처럼 꼭 달라붙은 그를 밀어내려고 해도 밀어낼 수가 없었고 숨이 막혔다. 배하린도 그의 품에 안겼었고 안희연도 그의 품에 안겼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자들이 그의 품에 안겼었다. 예전에는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역겨웠다. 그녀는 그와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녀를 놓으면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우리 엄마가 잘못했어요. 엄마가 사과를 한 건 앞으로 우리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그만 화 풀어요. 날 버리겠다는 말 제발 하지 말아요.”그한테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녀는 그의 향기를 맡고 그날 밤의 지독한 술 냄새가 떠올라 구역질이 나서 미친 듯이 그를 밀쳐냈다.“이거 놔요.” 그가 놓아줄 리가 있겠는가?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힘껏 그녀를 안았다.“어렵게 당신을 만났는데 어떻게 놓아줄 수 있겠어요?”그의 포옹은 마치 족쇄처럼 그녀의 몸에 묶여 옴짝달싹을 못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이거 놔요. 나 건드리지 말아요. 건드리지 말라고.”고막을 찢는 듯한 소리에 그도 그녀도 모두 깜짝 놀랐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연석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그녀의 모습이 훤히 비쳐 있었다. 예전의 온유하고 온화한 모습이 아니라 얼굴이 일그러지고 분노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이런 사나운 모습으로 변하는 게 두려웠다. 근데 결국 사랑 때문에 이
그녀는 고개를 젖히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결혼하고 싶을 만큼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많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유나희의 반대보다 더 가슴을 아프게 한 말이었다. “알아요. 당신이 날 얼마나 사랑하든 상관없어요. 그저 당신 마음속에 내 자리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걸로 난 충분해요.”한편, 아들이 이렇게까지 애원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한 유나희는 가슴이 아팠다. 지금껏 정가혜가 아들에게 매달리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정말 이승하의 말대로 아들이 매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가혜는 그의 애원에도 감동은커녕 무표정한 얼굴로 금방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만 같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 당신 자리는 조금도 없어요.”그 말을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럼 그날 밤은 왜...”“술에 취했으니까요.”그녀가 차갑게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날 밤 당신이 아니라 다른 남자였어도 난 똑같이 그랬을 거예요.”차갑고 무정한 말은 가슴을 찔렀고 칼에 얻어맞은 것처럼 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런 말 하면 내 기분이 어떨지 생각해 봤어요?”“당신을 사랑하지도 않는데 그게 뭐가 중요해요?”담담하게 받아치는 그녀의 말에 그는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지만 그녀가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거듭되는 반항에 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는 그녀를 벽에 몰아붙이며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고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두 다리로 그녀의 다리를 가두었다. 그녀를 꼼짝도 못 하게 한 후 그가 그녀의 턱을 들고는 시선을 피하는 그녀를 노려보았다.“내 눈 똑바로 보고 다시 한번 말해봐요. 정말 나 사랑하지 않아요?”천천히 다가가려고 했지만 이렇게 성질을 부리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와 눈을 마주친 정가혜는 분노에 가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