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부장님, 괜찮으세요?”강하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더니 입을 열었다.“괜찮아요.”신도윤은 그녀를 위로 해주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결국, 입을 다문 채로 조용히 강하리를 위해 차 문을 열어주었다.강하리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눈을 감았다.‘어제저녁에는 내가 무슨 생각으로 대표님이 나한테 부드럽게 대한다고 느꼈었지?’이때 심장이 질식할 듯이 아파져 왔다.얼마 지나지 않아, 안예서한테서 전화가 왔다.“부장님, 수습은 어떻게 할까요? 송유라 씨 매니저한테 연락해 볼까요?”강하리는 침묵을 지키더니 말했다.“상관 마. 대표님이 알아서 처리할 거야.”안예서는 멈칫하더니 알겠다면서 말했다.“부장님, 괜찮으세요?”강하리는 웃으면서 말했다.“괜찮아.”...호텔.구승훈은 무표정으로 소파에 기대어 있었다.그의 옆을 지키고 있던 구승재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말했다.“형, 강 부장은 아닐 거야.”구승훈은 그를 쳐다보더니 말했다.“또 뭘 알고 있는 거야?”구승재가 피식 웃었다.“이렇게 해서 자신한테 아무런 도움이 없잖아. 그리고 강 부장은 몰래 이런 짓이나 꾸밀 사람이 아니라는 거 형도 잘 알잖아. 3년이나 함께 있었는데.”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이 점을 이용해서 한 짓이라면?”구승재는 미간을 찌푸렸다.‘설마...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이렇게 큰 리스크를 무릅쓸 이유가 있었을까? 형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낫겠지.’“제일 처음 이 기사를 퍼뜨린 기자를 불러봐.”구승재가 대답했다.“그래, 기자한테 물어보면 되잖아.”구승재가 입구까지 걸어가기도 전에 구승훈이 한마디 했다.“유라 몰래 알아봐.”구승재는 멈칫하더니 대답했다.“알았어.”이 기사를 처음으로 퍼뜨린 기자는 30몇 살짜리 파파라치였다. 구승재한테 끌려왔을 때까지만 해도 어리둥절해하더니 구승훈을 보자마자 이렇게 질문했다.“혹시 구승훈 씨 맞으세요?”구승훈이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포스를
호텔로 돌아온 강하리는 핸드폰으로 계좌이체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바로 그 1억 원이었다.강하리는 이 메시지를 보더니 곧바로 인기 검색어를 확인했다.역시나 기사 제목은 의문의 남자로부터 송유라의 첫사랑이라고 바뀌어 있었다.밑에 있는 댓글도 난리가 났다.축하해주는 사람도 있었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심지어 둘이 화해했냐고 질문하는 사람도 있었다.강하리는 잠시 후 에야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은 유라가 원하는 대로 관계를 밝힌 거야. 그리고 나는 어차피 돈을 목적으로 만났으니까 돈으로 입막음한 거지. 역시 대표님은 아주 냉정해.’강하리가 핸드폰을 거두려고 했을 때 신도윤한테서 연락이 왔다.“대표님께서 옷을 갈아입으시라고 하십니다. 잠시 후 고객님 만나러 데리러 오실 겁니다.”강하리는 침묵을 지킬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비록 서운했지만 구승훈한테 서운하다고 말할 자격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강 부장님?”강하리가 대답했다.“네.”강하리는 전화를 끊은 후 구승훈이 전날 저녁에 사줬던 치마로 갈아입었다.길이가 무릎까지 오는 블루 계열의 치마였다.그녀는 환복을 마치고 메이크업까지 마쳤다.임신한 뒤로 메이크업한 적 없었지만, 오늘은 특별히 메이크업하기로 했다.반 시간 뒤, 구승훈한테서 연락이 왔다.강하리가 1층에 내려오고, 구승훈은 차창을 내려 그녀를 보더니 눈썹을 움찔했다.블루 계열의 치마를 입으니 피부가 더욱 백옥같았다.“치마 괜찮네.”구승훈은 차창에 기대어 무심결에 한마디 내뱉었고 강하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차에 올라탔다.고객님과는 골프장에서 만나기로 했고 강하리는 구승훈의 곁을 따르면서 조용히 그가 하는 말들을 번역만 할 뿐 끝날 때까지 쓸데없는 말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다.그래도 일이 원만히 끝나 상대방이 계속 합작하려는 의향을 보여주었다.차에 올라타고, 구승훈은 고개 돌려 강하리를 쳐다보았다.“화났어?”강하리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대표님, 혹시 저희 관계 일찍
“아니요.”강하리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내가 언제 막 나갔다고 그래?’“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저는 그저...”결국, 서운하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한테 서운하다고 말할 수도 없었고, 그렇게 말할 자격도 없었다.그녀는 한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복잡한 심경을 가다듬고 고개 돌려 구승훈을 쳐다보았다.“저는 그저... 유라 씨 돌아온 지도 오래됐는데 왜 아직 화해하지 않으시는지 이해가 안 되어서요.”구승훈은 표정이 어두워졌다.“강 부장은 알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저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있어 정말 괴로워요.”“강 부장.”구승훈은 분노한 표정을 하고서 말했다.“자신의 위치, 신분을 잘 파악해. 내가 유라랑 무슨 상황인지 너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강하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렇다. 강하리는 처음부터 그저 애인일 뿐이었고 그들한테는 신경 쓰이지도 않는 존재였다.‘내가 오지랖이 넓었네. 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있다고 생각했다니.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도 없는 거였어!’구승훈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가는 길 내내 두 사람은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차가 멈춰서야 강하리가 먼저 운을 뗐다.“대표님, 1억 원은 너무 적어요.”이렇게 된 김에 돈을 더 달라고 하려고 했다.‘1억 원으로 되겠어?’구승훈은 차를 길옆에 세우더니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럼 강 부장은 얼마를 원하는데?”“2억 원이요.”구승훈은 눈썹을 움찔하더니 고개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완벽한 옆모습, 날렵한 턱선이라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조차 멋있어 보였다.“강 부장, 내 돈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알아? 돈을 갖고 싶으면 잘해보든가.”구승훈은 말을 끝내더니 의미심장하게 강하리를 쳐다보았다.강하리는 그의 숨은 말뜻을 알아차렸지만,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대표님, 이것은 대표님께서 응당 저한테 줘야 할 보상이에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강 부장 기분 나빴던 거 1억 원으로 충분하잖아.
강하리는 이 치욕스러운 단어 때문에 심장이 아파 났다.마음 같아선 이 돈에 몇만 원을 더해 면상에 뿌려주면서 수고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결국, 메시지를 한참보다 그제야 답장했다.「감사합니다, 대표님.」그래봤자 소용이 없었다.특히나 구승훈처럼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한테는 더욱 소용이 없었다.메시지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에 의해 문이 열리고 말았다.구승훈은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입구에 서서 피식 웃더니 말했다.“뭐가 고마워?”강하리는 그와 시선을 마주치면서 말했다.“대표님 돈도 주시고 힘도 써주셔서요.”문에 기대고 있던 구승훈은 비웃음이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강 부장 상황 파악이 빠르네.”그는 밖으로 나가면서 한마디 했다.“일어나 뭐 좀 먹어.”강하리는 움직이기 싫었다.그럴 기분도, 체력도 없었다.“먹기 싫어요.”“같은 말 두 번 반복하게 하지 마.”단호한 그의 말투에 강하리는 어쩔 수가 없었다.옷을 입고 안방에서 나왔을 때 테이블 위에는 죽 한 그릇이 놓여있었다.그녀가 위가 아프다고 한 뒤로 구승훈이 유난히 죽을 많이 사다 줬던 것 같았지만 괜한 오해를 할까 봐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구승훈의 일은 꽤 순조롭게 끝났고, 두 사람은 계약을 체결하자마자 B 시를 떠났다.비행장 귀빈실.두 사람이 귀빈실로 들어갔을 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승훈 오빠.”강하리는 발걸음을 멈칫하더니 송유라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오빠, 왜 두 날 동안이나 연락 없었어요?”구승훈은 눈썹을 움찔했다.“나한테 연락했었어?”“내가 연락 안 하면 오빠가 먼저 연락하면 안 돼요?”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말다툼하고 있는 커플과도 같았다.강하리는 그대로 뻘쭘하게 서 있더니 한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강 부장님도 계셨네요?”송유라는 그제야 강하리를 발견한 것처럼 말했다.강하리는 그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유라 씨.”송유라가
그 뒤로 송유라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아 이 일을 마음에 두지 않은 줄 알았지만, 오늘 또 언급할 줄은 몰랐다.강하리는 일부러 태연한 척하면서 말했다.“대표님이랑 출장 온 거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송유라가 웃으면서 말했다.“계속 건강이 안 좋았다면서요? 아픈 몸으로 출장을 다 오시고. 회사에 그렇게도 사람이 없었나?”강하리는 시선을 피했다.“요즘 많이 나아졌어요. 유라 씨한테까지 걱정을 끼쳤네요.”말을 끝낸 강하리는 바로 화장실 밖으로 나갔고 그제야 숨을 쉴 것만 같았다.화장실에서 나온 송유라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똑같이 애교를 부리면서 구승훈의 옆으로 다가갔다.“승훈 오빠, 나 이따 오빠랑 같이 앉을래요.”구승훈은 눈썹을 움찔했다.“네 자리는 못 앉아?”송유라는 잠깐 심기가 언짢았다.“그냥 오빠랑 같이 앉고 싶어서 그래요. 왜요, 싫어요?”구승훈이 웃으면서 말했다.“강 부장한테 물어봐. 네가 앉고 싶은 자리가 강 부장 거라서.”구승훈은 또 강하리를 언급했다.강하리는 송유라와 눈이 마주치더니 입술을 깨물었다.“그래요, 유라 씨가 원한다면 바꿔드릴게요.”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송유라가 웃으면서 말했다.“고마워요, 강 부장님.”*비행기 안, 송유라는 구승훈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고 강하리는 혼자 앉게 되었다.강하리는 돌아가는 길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송유라가 화장실에서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정말 의심하고 있는 거 아니겠지? 이제부터 더 조심해야 하겠네.’구승훈은 전화 받으러 밖으로 걸어가더니 차 옆으로 다가가서야 강하리한테 물었다.“왜 자리 양보했어?”강하리는 입을 움찔할 뿐 침묵을 지키더니 말했다.“대표님께서 그랬잖아요. 유라 씨랑 싸우지 말라고.”구승훈이 피식 웃더니 말했다.“언제부터 그렇게 말을 잘 들었어?”강하리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구승훈은 그녀를 위해 차 문을 열어주었다.“그렇게 말 잘 들으면 저녁에 파티에도 같이 참석하든가.”“안 가도 돼요?
강하리는 건성으로 대꾸했다.다행히 구승훈은 그런 쪽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그녀가 정리를 다 마치자 구승훈은 그녀를 데리고 바로 문을 나섰다.뜻밖에 이번 연회는 평소에 봤던 그런 연회가 아니라 규모가 성대한 자선 만찬 행사였다.연회장 앞에 있는 거리는 전부 통제되었고, 고급 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거리 끝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강하리는 구승훈 곁을 따라다니며 약간 놀란 얼굴을 했다.구승훈은 그녀의 놀라워하는 눈빛을 보고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왜? 강 부장은 이런 장면 처음인가?”강하리는 침묵했다.그녀는 확실히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없었다.그녀의 가정 형편으로 이런 장면을 어디 가서 보겠는가?비록 지금은 구승훈과 자주 연회장에 드나들며 유명 인사들도 만나보고 견식을 넓혔지만, 오늘 밤 만찬 행사와는 그 스케일을 겨룰 수 없었다.만약 구승훈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아마 평생 이런 자리에 올 기회가 없었을 거다.구승훈의 신분은 늘 그렇게 고귀했지만, 그녀는 3년 동안 두 사람이 사실은 이토록 크게 차별된다는 걸 처음 깨우쳤다.이 순간에 그녀는 똑똑히 알게 됐다. 그녀와 구승훈은 한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그녀가 그의 세상에 들어와 3년이나 그의 곁에 머물렀다는 건 아마 뜻밖의 사고였다고나 할법했다.“대표님께 누추한 모습 모여드렸네요.”강하리는 눈초리를 깔고 한마디 말했다.구승훈은 강하리의 가녀린 쇄골뼈에 시선을 떨궈 잠시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앞으로 이런 데 가능한 널 많이 데리고 올 거야.”강하리는 그가 이런 말 하리라고는 생각 못 하고 멍하니 있었다.그런데 구승훈은 그녀의 시선을 마주 보며 말했다.“강 부장,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 상사를 모시고 이런 자리에 나오는 건, 원래 강 부장이 해야 할 일 아닌가? 매달 그러라고 돈을 그리 많이 주는데.”강하리의 눈빛에서 뭔가 한순간 휙 꺼져버렸다.그녀는 자조적으로 웃었다.대체 방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지?구승훈이 무슨 특별한 뜻으로 자신을 여기 데리고
강하리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 그쪽으로 바라보니, 송유라가 어느새 와서 구승훈의 팔짱을 끼고 그와 같이 서 있었다.둘은, 하나는 상큼하고 세련되었고 하나는 차분하고 잘 생겨서, 사람들 사이에서도 한눈에 띌 만큼 출중하여 천생연분이 따로 없었다.송유라가 무슨 말을 하자 구승훈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이는 두 사람이 관계를 공개하고,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나란히 나타나는 거라, 연회장의 포커스가 그 둘한테 맞춰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짧은 찰나에 귓가에는 온통 송유라와 구승훈의 얘기만 들렸다.“구승훈 대표님과 송유라 씨의 소문이 진짜였네요.”“구 대표님 눈빛을 좀 보세요.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눈빛 아니에요?”“둘이 너무 잘 어울리는데 결혼은 언제 할까요?”“아마 곧 하겠죠. 이제 관계도 다 공표했는데 결혼이 멀겠어요?”......사람들의 그 한마디 한마디 얘기를 듣다 나니 강하리는 가슴이 너무 답답해졌다. 그 순간 널찍한 연회장에 서 있는 것마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어때요? 네가 저 둘 사이에 낀 세컨드라는 게 이제 실감 나요?”강하리는 안색이 어두워졌다.“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미안한데,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말을 마치자마자 당장 일어나 떠나려고 하는데, 또 한 번 고이선이 그녀의 팔을 당겼다.“강하리 씨. 잘 생각하고 판단해요. 그런다고 당신한테 나쁠 거 없으니까. 내가 오늘 분명 경고했어요.”강하리는 그녀를 뿌리치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연회장 바깥에 있는 정원에 도착해서야 강하리는 조금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하지만 마음속이 저리는 건 여전히 그대로였다.저렇게 정정당당하게 구승훈 곁에 설 수 있는 여자는, 영원히 송유라인 거겠지.그녀는 그저...영원히 구석에서 빛을 못 보는 그러한 사람으로 남을 거야.“강 부장님, 왜 나와 있어요?”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누군지 봤다. 구승재가 술 한 잔을 들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승재 씨였어요.”구승재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물었다.
강하리는 그 순간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어떤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그녀는 어린 시절의 그 나날들이 구승훈한테는 좀 특별하지 않았을까 여겨왔다.근데 그게 아니었다.그의 인생 중에 유일한 빛은 오직 송유라였고 그게 그의 솔직한 마음이었다.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한없이 우습게 생각되었다.지난날 추억들을 소중한 보물처럼 품에 간직해 왔는데, 알고 보니 그건 오직 그녀만의 보물이었다.“경매가 곧 시작되니까 이젠 돌아갈까요?”구승재가 옆에서 말했다.강하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네.”그녀는 구승재를 따라 회의장 안으로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한 웨이터가 그녀를 불렀다.“강하리 씨, 구 대표님이 오시라고 하셨어요.”강하리는 구승재를 보며 말했다.“전 그럼 먼저 가볼게요.”“네, 그러세요.”웨이터는 강하리를 구승훈이 있는 데로 데려갔다.구승훈은 첫 번째 줄에 앉아 있었고, 그 바로 옆에 송유라가 앉아 있었다.송유라는 강하리가 입꼬리를 약간 끌어당기는 걸 봤다.“강 부장님도 계셨네요?”강하리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와 별다른 인사말을 나누지 않았다.구승훈은 강하리를 한 번 힐끗 쳐다보더니 물었다.“몸은 괜찮아?”강하리는 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괜찮아요.”“방금 어디 갔어?”강하리는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바깥에 좀 서 있었어요. 구승재 씨와 거기서 마주쳤고요.”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일 뿐 더 묻지 않고 책자 한 권을 건넸다.“한번 봐봐, 뭐 관심 가는 거 없나.”강하리는 갑자기 좀 어리둥절하여 입을 열었다.“아까...”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송유라가 먼저 말했다.“오빠, 저 귀걸이 되게 이쁜 거 같아요. 좀 이따 저걸 꼭 낙찰해줘요.”구승훈은 웃으며 말했다.“그 말 대체 몇 번째야?”“암튼, 저거 내 것이에요.”“그래, 알았어.”구승훈이 대답했다.강하리는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구승훈의 대답을 듣고 송유라는 불시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강하리를 힐끔
아무리 멍청해도 지금 강하리가 그녀에게 한 방 먹였다는 걸 깨달은 여명희는 가슴 속 분노가 순식간에 치밀어 올랐고 이를 갈며 강하리를 노려보았다.하지만 강하리는 고개를 진태형 쪽으로 돌릴 뿐이었다.“별일 없으면 전 가볼게요. 외할머니댁에 다녀와야 해서.”진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조심히 가.”강하리가 대답을 마치고 뒤돌아 떠나려는데 여명희가 소리를 질렀다.“강하리 씨, 거기 서요.”말을 마친 그가 진태형을 돌아보았다.“진 장관님은 계속 사적인 일에 권력을 행사하실 건가요? 그쪽 따님은 잘못해도 벌을 받지 않나요?”여명희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진태형에게 집중됐다.그동안 외교부 내부에서는 진태형이 권력을 남용해 JM과 계약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강하리의 비즈니스 능력과 JM의 업무 태도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게다가 외교부에는 모든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통역사가 부족했기에 소문이 돌아도 진정 캐묻는 사람은 없었다.이제 여명희가 이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이상 사람들은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 없었다.강하리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여명희를 돌아보았다.“여명희 씨는 사람을 모함하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네요. 제가 무슨 실수를 했죠?”“통역할 때 실수하지 않았나요?”여명희의 말이 끝나자 진태형 옆에 서 있던 통역실 주임이 얼굴을 찡그렸다.“강하리 씨의 번역은 한 치의 실수도 없었는데 그러는 여명희 씨는 오늘 어떻게 된 거예요?”여명희는 깜짝 놀랐다.“뭐라고요? 강하리가 실수한 게 하나도 없다고요? 하지만 아까는... 나한테 거짓말했어? 또 날 속였네! 망할 년, 강하리 이 망할 년, 네가 진 장관님 딸이라고...”“입 다물어!”여명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누군가 호통을 쳤고 진태형이 어두운 눈빛으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외교부가 당신들이 장난하는 곳인 줄 알아? 오늘 통역에 큰 문제가 없어서 다행이지, 만약 문제가 생겼다면 당신들 중 누가 그 책임을 질 건데!”진태형이 단호하게 말하자 아무도 감히 소리를
강하리는 무심하게 시선을 거두었다.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지금 원고를 찾으러 가기에는 너무 늦었고 옆에 있는 독일어 번역본을 살펴본 뒤 다시 돌려주었다.러시아어 번역을 맡은 강하리는 회의 과정을 간단히 종이에 적고 헤드셋을 착용했다.여명희는 강하리의 무심한 표정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원고가 없어졌는데 잘난 척은.’비록 강하리의 통역 실력은 외교부 내에서 전설과 같은 존재였지만 오늘 회의의 번역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은 참석한 모든 번역가가 알고 있었다.10년 차 베테랑 통역사도 조심스러울 정도로 난해한 전문 용어가 많은데 강하리가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동시통역을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지 않았다.강하리가 조금의 실수라도 하면 그녀를 외교부에서 쫓아낼 수 있는 방법이 생긴다!여명희는 비웃으며 시선을 돌려 헤드셋을 들어 올렸고 장장 세 시간이 넘는 긴 회의가 이어졌다.강하리는 마침내 헤드셋을 벗고 나지막이 한숨을 쉰 뒤 고개를 돌려 여명희를 바라봤다. 여명희의 얼굴은 극도로 일그러져 있었다.회의가 시작된 후 강하리 일만 생각하느라 정신이 산만해져 초반에 작은 실수를 저질렀는데 이후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이미 당황한 상태였다.이후에는 더 이상 실수를 하지 않았지만 전체 번역 과정에서 그녀의 실력은 그리 좋지 않았다.뛰어나지도 않았고 심지어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대학생들보다 뒤처지는 수준이었다.여명희는 헤드셋을 탁자 위로 던져버리고는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는데 강하리는 이미 시선을 돌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문 앞에 다다랐을 때야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참, 오늘 통역본 누가 담당했어요?”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부드러웠지만 순식간에 장내에 고요함이 찾아왔다.회의 시작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주임님께 물어볼게요.”말을 마친 강하리가 나가려는데 여명희가 그녀
강하리의 표정은 태연했지만 커피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최근 증상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 어떤 치료를 받고 있나요?”임희주는 그런 질문을 할 줄 몰랐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난감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사실 지금은 증상이 뚜렷하지 않은데 유난히 조급하세요. 빨리 낫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사모님은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아세요? 혹시 무슨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건가요? 그게 아니면 일상에서 누가 부담을 주고 있나요?”강하리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질리더니 커피잔을 잡고 있던 손가락 마디마디도 서서히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그녀는 한참 동안 임희주를 바라보다가 말했다.“지금 증상이 어떤지,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세요.”임희주는 잠시 침묵했다.“죄송하지만 대표님께서 말하지 않으셨다면 저도 말씀드릴 수 없어요.”“제가 아내인 데도요?”“죄송해요.”강하리가 웃었다.“임 선생님, 만약 구승훈 씨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수술 동의서에 사인해야 할 사람이 나란 건 알고 있죠?”임희주의 입꼬리가 움찔했지만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죄송해요.”강하리는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부담감을 느끼는 부분에 대해선 제가 나중에 물어볼게요.”임희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강하리가 떠난 뒤에야 임희주는 시선을 돌려 한숨을 내쉬며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사모님 상대하기 너무 힘드네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제 아내를 만났습니까?”“네, 우연히 만났어요.”임희주가 커피를 살며시 저었다.“미안해요. 아직 대표님 상황에 대해 모르는 줄 모르고 서두르지 않게 설득해 달라던 참이었는데.”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속도 늦출 필요 없다고 했는데 제 말 못 알아들으세요?”“다른 뜻이 아니라 그냥...”“할 말 있으면 나한테 직접 얘기하고 다시는 내 아내한테 찾아가지 마세요.”구승훈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임희주는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구승훈
노민우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떠났고 손연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문 앞에 서 있었다.“아쉬워?”강하리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뒤에서 묻자 돌아보는 손연지의 눈에 머금은 눈물이 보였다.강하리는 깜짝 놀라 황급히 손연지를 토닥였다.“그렇게 아쉬우면 돌아오라고 해. 울긴 왜 울어?”하지만 손연지는 웃으며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돌아오라고 하겠어. 하리야, 지금은 약혼녀가 있는 사람이야.”“그럼 넌?”강하리는 손연지의 다소 부은 눈을 바라보니 어젯밤에 운 게 분명했다.“난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야지. 돈, 돈, 돈을 벌 거야. 난 돈 많은 사람이 될 거야!”손연지는 말을 마친 후 웃음을 터뜨리더니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참, 나 몸조리 끝나면 이사 갈 거야. 계속 너희 집에서 애정행각이나 보면서 신세 질 수는 없어.”그녀가 구승훈을 흘끗 쳐다보며 말하자 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손 선생님은 신세 지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시네요?”손연지는 그를 흘겨보며 강하리를 안았다.“아니면 하리야, 나랑 같이 나가서 살래?”순간 구승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손 선생님은 B시에서도 쫓겨나고 싶은 건 아니죠?”손연지는 강하리에게 기대었다.“자기야, 나 B시에서 쫓아낼 거야?”강하리는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얼른 출근이나 해.”구승훈은 다가와 손연지의 품에서 그녀를 떼어냈다.“일단 약부터 바르자.”강하리의 어깨는 사실 더 이상 아프지 않았지만 물집이 더 커진 상태였다.구승훈은 이틀 정도 쉬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오늘 외교부 회의가 있어 출근해야 했다.약을 바르고 나니 손연지도 준비를 마친 뒤라 강하리는 그녀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자리를 잡게 도와준 뒤 이렇게 덧붙였다.“연지야, 난 그래도 네가 나와 함께 좀 더 지냈으면 좋겠어.”노민우는 약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갔지만 이미 약혼한 이상 그렇게 쉽게 파혼할 리 만무했다.그 과정에서 분명 손연지도 끌어들일 텐
손연지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옆에 있던 샴푸를 집어 들어 그에게 던졌다.“나가!”노민우는 샴푸를 피하며 순식간에 옷을 벗었다.“씻으면서 얘기하자.”“얘기하긴 뭘... 읍...”손연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노민우가 그녀의 입을 막았고 몇 번이나 그를 밀어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욕실의 온도가 빠르게 올라가고 닿은 두 몸이 곧바로 욕망에 달아올랐다.노민우는 손연지의 입술을 깨물었다.“이젠 해도 돼?”손연지가 다리를 들어 가격하자 노민우는 중요 부위를 가린 채 뒤로 물러섰다.익숙한 행동에 괜히 안쓰러웠지만 그는 얼굴이 파랗게 질릴 정도로 화가 난 손연지를 능글맞게 바라봤다.“농담이야. 아직 몸이 성치 않은데 못한다는 거 알아.”손연지가 타월을 꺼내 몸을 감싸고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가자 노민우도 서둘러 수건을 집어 들고 뒤를 따랐다.“안 해도 되니까 오늘 밤에 같이 자면 안 돼? 손연지, 앞으로 1년 동안 못 볼 수도 있잖아.”머리를 말리던 손연지의 손이 멈칫하며 이렇게 말했다.“바닥에서 자.”“네.”노민우가 말을 마치자마자 아래층에서 강하리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고 손연지가 놀라며 옷을 입고 내려가려고 하자 노민우가 말렸다.“가지 마. 승훈이가 있잖아.”손연지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내려가지 않았다.다행히도 구승훈이 강하리를 품에 안고 올라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두 사람은 문 앞에서 엿들은 뒤 노민우는 절뚝거리며 바닥으로 돌아갔다.손연지가 침대 옆에 기댄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있자 노민우가 그녀에게 다가갔다.“바보가 됐네?”정신을 차린 손연지가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들자 노민우는 손연지의 발목을 잡았다.“마지막 밤인데 나 좀 그만 찰 수는 없어?”손연지는 그의 손에서 발을 빼고 싶었지만 노민우는 놓지 않았다.“내가 모를 줄 알아? 이거 놓으면 또 발길질할 거잖아.”손연지는 이를 갈며 베개를 집어 들어 노민우의 얼굴에 내리쳤다.“나가서 자!”노민우는 베개를 껴안은 채 바닥에
노민우는 식사를 마치고 손연지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고 손연지가 그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노민우의 휴대폰이 울렸다.그의 모친이었다.노민우는 무의식적으로 손연지를 바라봤지만 손연지는 이미 시선을 거둔 뒤였다.그녀는 옷을 챙겨서 욕실로 들어가기 전 한 마디만 남겼다.“난 쉴 거니까 넌 가.”노민우는 혀를 차고는 어머니의 전화를 끊은 뒤 손연지를 끌어당겼다.“손연지, 우리 제대로 얘기 좀 하면 안 돼?”손연지가 눈을 흘겼다.“돼.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얘기하다 내 기분 망치면 넌 끝장이야!”노민우가 손연지에게 다가왔다.“화내지 마.”손연지는 노민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누구는 화내고 싶어서 내는 줄 알아?’“할 말 있으면 빨리 해.”노민우는 잠시 머뭇거렸다.“손연지, 나 기다려줄 수 있어? 1년만 기다리면 내가 가서 집에서 정해준 약혼 해결할 테니까 우선 파혼하고 우리 둘이 어떤 관계로 지낼지는 나중에 얘기하자, 응?”옷을 든 손연지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고개를 돌려 노민우를 바라봤다.“어떻게 할 건데?”노민우는 사실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어머니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약혼했고 만약 그가 고집을 부리면 어머니에게 죽을 때까지 매를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결혼은 언젠가 취소해야 하는 것이었다.“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게. 여차하면 승훈이처럼 인연 끊으면 되지.”손연지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진심이야?”“당연히 진심이지.”“그래.”노민우는 손연지가 이렇게 빨리 동의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손연지에게 1년 더 기다리라고 하면 그를 한대 쥐어패기라도 할 줄 알았다.“정말 동의하는 거야?”손연지는 한심하단 표정을 지었다.“그럼 다시 생각해 볼게.”노민우는 갑자기 얼굴에 미소를 띠며 그녀를 껴안았다.“아니야, 생각하지 마. 내가 헛소리 한 거라고 생각해.”노민우는 말을 마치고 손연지를 안은 채 욕실로 들어가려 했다.이 틈에 손연지와 가까워지려
입안의 술맛이 남자의 입속으로 전부 빨려 들어갔을 때쯤 구승훈이 그녀를 놓아주었다.“화 풀어, 응? 아니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까?”강하리는 웃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해봐.”구승훈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낮게 웃었다.“무릎을 꿇다 다리가 아프면 밤에 너 챙겨주지 못하잖아.”강하리는 웃으며 나지막이 욕설을 뱉고는 그를 밀어낸 뒤 식탁에 앉아 다시 한 잔을 따랐다.식당에는 조명 하나만 켜져 있었고 강하리의 실크 가운은 구승훈의 손길에 미끄러져 내려가 불빛에 붉어진 그녀의 어깨가 선명하게 보였다.구승훈은 순간 멈칫하며 두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어쩌다 이런 거야?”강하리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말을 꺼냈다.“맞춰봐.”구승훈이 가운을 잡아당겨 어깨 전체가 드러나도록 했다.붉게 물든 어깨에는 물집까지 생겼다.“대체 무슨 일이야? 아파? 왜 나한테 말...”말하던 구승훈은 이내 알아차리고 다소 무기력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봤다.“그렇게 화났어? 다친 걸 얘기하지도 않을 만큼? 난 그냥 네가 걱정하는 게 싫었어.”강하리는 어지러워 손가락으로 구승훈의 얼굴을 훑다가 한참 후 욕설을 뱉었다.“개자식, 그러면 내가 걱정하지 않을 줄 알았어? 그동안 내가 계속 걱정하고 있었던 거 알아? 구승훈, 대체 언제쯤 홀로 모든 걸 감당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을 건데? 이 나쁜 놈! 망할 놈!”강하리의 욕설이 커졌고 구승훈은 그녀를 껴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큰 별장에는 그렇게 적막이 감돌고 구승훈의 얼굴에는 죄책감이 가득했다.하지만 강하리에게 진실을 말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여전히 분명했다.그런 추하고 더러운 가족을 강하리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애써 감정을 조절하며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미안해, 자기야. 한 번만 더 용서해 줘, 응?”구승훈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강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노려보았다. 남자가 안쓰러워 사실 더 화를
노민우는 멈칫하며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손연지에게 약속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을 거다.손연지가 발을 들어 그의 낭심을 걷어찼다.“꺼져, 고자가 되고 싶지 않으면 내 앞에 나타나지 마.”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화를 내며 계단을 쿵쾅쿵쾅 올라갔다.강하리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욕실로 들어가 보니 어깨의 피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뒤돌아 실크 가운을 집어 들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밖으로 나가는데 손연지는 그녀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무슨 일이야? 구승훈이랑 싸웠어?”“아니.” 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동료랑 갈등이 있었어.”손연지가 얼굴을 찡그리며 무언가 물어보려던 찰나 강하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내일이면 몸조리도 끝나지? 내가 일자리 마련해 놨으니까 바로 출근하면 돼.”손연지는 깜짝 놀랐다.“그렇게 빨리?” 강하리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왜, 노민우랑 집에서 며칠 더 놀고 싶어?”손연지의 표정이 어색하게 바뀌었다.“내가 그 자식이랑 놀기는. 그러는 넌 얼른 쫓아내기나 해. 짜증 나 죽겠어.”강하리가 혀를 찼다.“내가 볼 땐 네 기분이 좋아진 것 같은데?”“어딜 봐서 내 기분이 좋다는 거야? 난 그냥, 그냥...”“알아, 다 알아.”강하리가 웃으며 대꾸한 뒤 손연지를 바라보다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노민우는 널 좋아하는 것 같은데 가족들을 이기기 힘들 거야. 손연지, 저 사람이 파혼만 하면 너도 시도해 볼 수 있어. 물론 이건 그냥 내 단순한 조언이고 난 네가 나와 같은 길을 걷는 걸 원하지 않아. 하지만 네 선택을 응원해.”손연지는 입술을 달싹이며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알아.”하지만 문제는 노민우가 그녀를 좋아할까?조금 전 아래층에서 노민우가 보이던 반응을 생각하니 마음속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강하리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손연지는 오래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떠났고 방문이 닫히자 강하리의 얼굴에서 미소가 말끔히 사라졌다.
하지만 강하리는 한 번도 상대하지 않았다.애초에 민감한 신분이고 만약 반격하면 진태형에게 성가신 일이 생길 테니까.그래서 오늘도 강하리가 예전처럼 행동할 거라 생각했는데 감히 그녀에게 물을 붓다니.여명희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강하리 씨, 감히 나한테 물을 뿌려요?”강하리가 비웃었다.“못 할 것 있나요? 아니면 나는 그쪽이 물을 뿌려도 반격도 못 한 채 당하고만 있어야 하나요?”여명희는 너무 화가 나서 원래 하얗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아, 그러면 저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원래도 구승훈의 일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데 어깨가 너무 아프고 자료도 다 젖어 여기서 시간 낭비할 기분이 아니었다.그런데 두 발짝도 떼기 전에 여명희가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붙잡았다.“강하리 씨, 이런 식으로 사람을 괴롭혀요? 진 장관님 딸이라고 멋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강하리가 여명희의 손을 뿌리쳤다.“내가 괴롭히는 건지 아닌지 그쪽이 더 잘 알지 않나요? 여명희 씨, 아무리 진시연을 도와준다고 하지만 날 만만하게 보지는 마요.”그렇게 말한 후 강하리는 여명희의 손을 뿌리친 뒤 뒤돌아 가버렸고 여명희가 계속해서 그녀를 붙잡으려는데 누군가 말렸다.“명희 씨, 그만해요. 괜히 건드리지 마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밖으로 걸어 나갔다.통역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가쁜 숨을 내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가끔은 진태형과 부녀 사이인 것을 인정한 게 잘못된 것인지 의심이 들 때가 있었다.그게 아니면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받아들이지 못하겠나.강하리는 홀로 병원으로 가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이제 막 차가 멈춰 서는데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진태형이었다.강하리는 심호흡하고 전화를 받았다.“아빠.”“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아빠한테 얘기 안 해?”강하리는 문득 참아왔던 서글픔이 속절없이 치밀어 올랐다.분명 그녀의 친아빠인데 왜 사람들은 진시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