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가 멈칫했다.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다소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하리야, 나... 내가 했던 잘못들 전부 다 보상해 줄게, 알았지? 용서를 구하는 게 아니라 바로잡을 기회를 달라는 거야.”강하리의 마음은 씁쓸했다.아무리 그래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었다.그녀는 대답 대신 이렇게 말했다.“놔, 내가 알아서 가.”하지만 구승훈은 절대 놓지 않았다.구승훈이 강하리를 끌고 가자 손연지가 바로 발끈했다.“젠장, 구승훈, 그 손 놔... 읍읍...”손연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민우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손연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자 더욱 화가 나 노민우의 손을 깨물었다.노민우의 손은 이미 그녀에게 꼬집혀 피가 어느 정도 새어 나온 상태였는데 이젠 이빨 자국까지 생겼다.그는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서둘러 손연지를 놓아주었다.“손연지, 너 개야?”손연지가 그를 노려보았다. “다시 한번 내 입 막으면 그땐 너 잡아먹을 거야!”노민우는 어이가 없었다.“두 사람 일에 왜 자꾸 끼어들어?”“무슨 개소리야! 우리 하리가 왜 저 개자식이랑 엮여!”노민우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봤다.“말 그렇게 하지 마. 승훈이는 하리 씨 얼굴 봐서 가만히 있는 거지. 정말로 걔를 건드렸다간...”“건드리면 뭐?”그녀는 노민우를 노려보았다.“역시 끼리끼리라더니. 개자식이 개자식을 돕네.”그녀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노민우가 서둘러 따라갔다.“내가 데려다줄게.”“필요 없어!”하지만 노민우는 굴하지 않고 따라갔다.“다친 사람 혼자 집에 보내는 건 우리 병원 스타일이 아니야.”“...”‘명인 병원 서비스가 참 좋네.’구승훈은 강하리를 손연지 아파트까지 데려다준 뒤에 차를 세웠지만 문을 열지 않았다.강하리가 그를 노려보았다.“문 열어.”구승훈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하리야, 사람 보내서 정양철에 대해 조사 중이야. 아주머니 일은 내가 책임지고 제대로 알아낼게.”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한참을
장서연은 다시 눈을 떴을 때 앞에 구승훈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그를 불렀다.“형부, 악!”형부라는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구승재가 그녀의 뺨을 때렸다.“함부로 부르지 마, 목숨 아껴야지.”장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형... 구, 구 대표님, 우리 사촌 언니가 당신 여자인데... 아악!”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구승재가 또다시 뺨을 때렸다.“헛소리하지 말란 말 못 알아들어?”두 번 연속 따귀를 맞은 장서연의 창백한 얼굴이 부어올랐다.구승재는 조금도 봐주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뺨을 때렸던 거다.“구, 구 대표님,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구승훈은 두 발짝 떨어져 서서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손연지 차 네가 건드렸지?”장서연은 당황하며 순간 마음에 찔렸지만 뻔뻔하게 말했다.“아니요, 제가 안 그랬어요. 구 대표님, 제가 안 그랬어요.”그러자 구승훈은 갑자기 손목에서 염주 팔찌를 빼내 주머니에 넣더니 이쪽으로 한 걸음걸음을 다가왔다.장서연의 얼굴은 굳어졌고 눈앞의 구승훈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살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그녀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아무리 그래도 송유라는 구승훈의 첫사랑인데?그래서 오늘 강하리를 봤을 때도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그런데 지금 그녀는 왠지 모르게 남자의 두 눈에서 증오 비슷한 게 보였다.장서연은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구승훈의 눈에 증오와 살기가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이 사람이 날 죽이려 한다.’그 생각만 들었다.장서연은 그제야 눈치를 채고 큰 소리로 선처를 호소했다.“구 대표님, 제가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강하리 건드리지 않을게요. 제가 잘못했어요, 전...”장서연은 연신 선처를 호소했지만 그럼에도 구승훈은 여전히 앞으로 다가가 바로 그녀의 목을 졸랐고 장서연은 순식간에 숨이 턱 막혔다.그녀는 충격에 가득 찬 얼굴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이 순간 그녀는 구승훈이 정말 자신을 죽이고
안 그래도 창백했던 송유라의 얼굴이 이쯤 되니 투명할 정도로 하얗게 변했다. “승훈 오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하양이잖아요, 잊었어요? 어릴 때 그 어촌에서 내가... 아악-” 송유라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단도가 그녀의 얼굴을 베었고 단숨에 그 고운 얼굴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승훈 오빠!” 송유라는 처절하게 소리 질렀다.“내가 하양이에요, 내가 진짜 하양이라고!”그렇게 말하면서도 송유라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구승훈이 어떻게 알았을까? 그 일은 빈틈이 없게 진행됐는데.송동혁은 당시 구승훈의 곁을 지키고 있던 가정부에게까지 물어봤고 그녀의 가족까지 매수했다. 그리고 그 목걸이도 강하리에게서 진품을 훔치고 가짜로 바꾼 다음 적절한 타이밍에 가짜를 망가뜨려서 철저하게 진행했다.그런데 구승훈이 어떻게 알았지? 송유라의 당황한 눈은 점점 커져만 갔고 구승훈은 손을 들어 단도를 송유라의 어깨에 찔렀다. 또 한 번 소름 끼치는 비명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네가 하양이야?” “맞아요, 승훈 오빠, 나라고요!”단도를 뽑은 구승훈이 이윽고 그녀의 팔에 칼을 찔러넣었다.“다시 물어볼게. 네가 맞아, 아니야!”송유라는 고통스러워하며 이마에 식은땀을 흘렸다.“승훈 오빠,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내가 하양이에요. 잊었어요? 우리 같이 강가에 앉아서 일출과 일몰을 보곤 했잖아요. 승훈 오빠, 왜 그래요? 왜 이러는 건데요?”붉어진 눈으로 송유라를 노려보는 구승훈의 눈동자엔 아픔만이 가득했다.이 여자, 이 망할 여자한테 그렇게 오랫동안 속아 왔다!이 여자 때문에 강하리를 그토록 힘들게 했다!“강하리가 받은 상처, 송유라 네가 두 배로 갚아.”송유라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그녀는 앞으로 다가와 구승훈을 껴안았다. “승훈 오빠, 왜 그래요?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요, 내가 진짜 하양이...” 하지만 구승훈은 단숨에 그녀를 바닥으로 걷어찼다. “다시는 하양이라는 말 입에 담지 마!”송유라는 절망에 가득 찬 얼굴로 구승훈을
손연지의 집 밑에 막 도착했을 때 손연지가 안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오호, 구승훈 씨가 여긴 또 무슨 일로?”구승훈의 눈이 빨개졌다.“하리랑 할 얘기가 있습니다.”손연지가 피식 웃었다.“지금 만나기엔 너무 늦었어요. 이미 갔거든요.”구승훈은 당황했다.“뭐라고요?”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대표님, 강하리 씨 한 시간 뒤 비행기로 B시에 간답니다.”구승훈은 차가운 얼굴로 서 있었다.“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노진우는 다소 답답한 듯 말했다.“정주현 씨를 배웅하러 가는 건지, 혼자 떠나는 건지 먼저 확인해야 했어요.” “정주현이랑 같이 떠났다고?”“네.”구승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전화를 끊고 돌아서서 가려는데 손연지가 갑자기 그를 불렀다.“구승훈 씨, 우리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구승훈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손연지를 바라보다가 한참 후 고개를 끄덕였다.“얘기하세요.”손연지는 그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짐작하셨겠지만 우리 하리한테서 멀리 떨어졌으면 좋겠어요. 그쪽이 원하지 않는 건 알지만 당신 때문에 하리가 몇 번이나 위험해졌는지 생각해 봐요.”구승훈이 다소 쓴웃음을 지었다.“손 선생님, 내가 하리한테 잘못한 게 많지만 이번에는 온 힘을 다해 지켜줄 겁니다.”손연지가 비웃었다.“어떻게요? 매번 말만 그럴듯하게 하면서 하리가 당신 좋아하는 마음 이용해서...”“이번엔 내가 죽더라도 하리가 다시는 상처받지 않게 할 겁니다.”이렇게 말한 후 그는 이렇게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손연지는 멍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조금 전 구승훈의 표정을 봐선 정말로 하리를 위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손연지는 잠시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전에는 뭐하고, 진작 이랬으면 이미 혼인신고까지 하고도 남았지.”공항에서 강하리는 비행기 탑승 전 손연지에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구승훈 그 개자식이 또
부상이 심각해 보였지만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는 아니란다.강하리가 멍한 표정으로 기사를 들여다보는데 정주현이 그녀를 툭 건드렸다.“무슨 생각 해요? 애초에 그 쪽한테 해를 끼친 사람이 사고를 당했으면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강하리는 정신을 차리고 입꼬리를 끌어올렸지만 정신은 다른 곳에 팔린 상태였다.구승훈이 장서연을 처리하겠다고 했지만 예전처럼 단순한 경고로 끝날 줄 알았고 기껏해야 장씨 집안에 화풀이만 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런 방법으로 손을 쓸 줄이야.강하리는 가쁜 숨을 내쉬며 가슴에 밀려오는 동요를 진정시켰다.“가요, 비행기 타러.”정주현은 고개를 끄덕인 뒤 노진우를 다시 한번 흘깃 쳐다보고 강하리와 함께 탑승구로 들어섰다.“아버지는 요즘 좀 어떠세요?”강하리는 별 뜻이 없이 물었다.“허, 그 영감탱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내가 회사를 살리기 위해 이렇게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벌써 포기할 준비가 된 사람처럼 굴어요. 매일 어떻게 하면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데 어떻게 해도 이사회에서 혼나는 건 피할 수 없을 것 같아요.”정주현은 다소 침울해 보였다.대양그룹이 연성에 발을 뻗으면서 그는 큰 성과를 내고 싶었으나 이런 결과는 예상하지 못했다.강하리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럼 아버님은 왜 애초에 연성에 오신 거예요?”정주현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여전히 젊고 활기찬 얼굴에 생기가 넘쳤다.“연성을 선택한 건 이해하기 쉽죠. 이쪽은 이제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국제 무역 대도시가 되었고 나라에서도 이쪽으로 많은 정책을 기울이니까 그 기회를 잡아 연성에 오는 건 당연하지 않겠어요?”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정주현의 말이 일리가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정양철이 뭔가 수상쩍다고 느꼈다.연성에 오는 건 별문제가 없지만 그녀를 붙잡고 늘어지는 건 이상했다.하지만 그녀는 캐묻지 않았다.정주현은 얼핏 봐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정양철이 정주현을 이 정도로 감싸고 지켜주는 것에 감탄할 때도 있었다
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연미숙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자리를 떴다.정주현과 작별 인사를 나눈 강하리는 주해찬을 따라 행사장으로 향했다.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피곤하지?” 주해찬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고생하면 몸이 버틸 수 있겠어?”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바쁜 게 좋죠.”적어도 바쁘면 쓸데없는 생각을 안 해도 되니까.주해찬이 잠시 망설이다가 함께 야식을 먹으러 가자고 말하려던 순간 밤중에 밖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남자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긴 실루엣을 자랑하며 가로등 아래 그림자를 드리운 채 서 있었다.그의 시선이 강하리에게 향했고 눈에는 복잡함과 죄책감이 극도로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강하리도 자연스럽게 구승훈도 보았다.다만 그녀는 그쪽을 힐끗 쳐다보다가 시선을 피했다.주해찬은 웃으며 강하리를 내려다보았다.“데려다줄까?”강하리는 한숨을 뱉었다.“아뇨, 이만 가도 돼요 선배.”구승훈이 왔으니 쉽게 떠나지 않을 것 같았고 중간에 주해찬까지 끼어 있으면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주해찬은 강하리를 바라보았다.“필요한 거 있으면 전화해, 내가 바로 올게.”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주해찬은 저쪽에 있는 구승훈을 힐끗 보고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주해찬이 떠날 때까지 이쪽으로 오지 않았다.“피곤해?”강하리가 그를 바라봤다.“구승훈 씨, 출근 안 해? 에비뉴 망한 거야? 며칠만 머리 좀 식힐 수 있게 해줘.”구승훈이 웃었다.“에비뉴는 안 망해. 내가 영원히 안 망하게 할 거야. 에비뉴니까.”강하리의 가슴이 먹먹해지더니 씁쓸함이 밀려왔다.그래, 에비뉴는 송유라를 위해 만든 것이니 당연히 폐업하게 내버려두지 않겠지.“그래, 그럼 송유라나 만나러 가.” 그녀가 구승훈을 보며 이렇게 말하고 가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왜 송유라라고 생각해, 다른 사람일 수도 있잖
멍하니 그의 말을 듣고 있는 강하리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갑자기 그를 밀쳐내더니 그의 뺨을 때리고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짙은 어둠이 드리운 밤에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그냥 그렇게 걸었다.걸으면서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구승훈은 뺨을 맞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둘러 따라갔다.걸음이 빠른 강하리를 몇 번이나 뒤로 잡아당기려 했지만 실패했다.결국 그는 강하리를 뒤에서 와락 껴안았고 그제야 강하리는 걸음을 멈추고 갑자기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 모든 아픔과 상처가 단지 착각했다는 한마디로 귀결되었다.한 번의 착각이 그녀의 소중한 모든 걸 빼앗아 갔다.강하리는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배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정신을 차린 뒤 구승훈을 밀어내며 택시를 타려 했다.구승훈은 그녀를 안아 들고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차에 태웠다.강하리는 더 몸부림치지 않고 그에게 가만히 안긴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그녀를 호텔로 데려다주었다.강하리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자 구승훈이 가서 목욕물을 받아 주었다.물 온도를 체크하고 그가 다가와 안으려는데 그녀가 가볍게 밀어냈다.어떠한 격한 감정도 내비치지 않은 채 눈동자 깊숙이 파묻힌 고통만 있었다.“가.”그녀가 나지막이 말하자 멈칫한 구승훈은 속에서부터 쓰디쓴 감정이 밀려왔다.“하리야, 내키지 않으면 그냥 날 때려.”강하리는 시선을 내려 눈앞의 남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물었다.“어떻게 착각해?”그녀의 목소리는 유난히 차분했다.구승훈의 목울대가 요동쳤다.“어렸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그의 눈에서 아픔이 번뜩였다.“송유라가 작은 어촌에서 있었던 많은 일들을 이야기했고 걔한테... 그 목걸이가 있었어.”구승훈이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을 꼽으라고 한다면 감히 거짓말을 할 사람이 없을 거라고 과신한 나머지 송유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그녀의 말만 믿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만약 확인했다면 송유라를
구승훈이 멈칫하며 손을 들어 강하리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너 혼자 씻게 두기엔 마음이 안 놓여. 미끄러져 넘어지면 어떡해?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나 옆에 있게 해줘, 응? 난 그냥 널 돌봐주고 싶을 뿐이야. 그냥 날 노예처럼 부려.”“필요 없어.”강하리는 일어나서 화장실로 향했다.들어가서 문을 닫는 순간 그녀의 눈물은 다시 주체할 수 없이 쏟아졌다.이미 배가 불편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기에 울지 말자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하지만 눈물이 흐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차라리 구승훈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그게 이 우스꽝스럽고 조롱당하는 상황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분명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고 사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행복하게, 아이도, 엄마도 함께 지낼 수 있었는데... 온전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는데...이젠 그들 사이에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망망대해가 놓여 있었다.아무리 사람을 착각했다고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있었다.구승훈은 화장실 문 앞에 서 있었다.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녀와 분리된 그는 안에서 그녀의 낮은 흐느낌이 들렸다.그 낮고 억눌린 소리는 미친 듯이 울부짖는 소리보다 더 가슴을 아프게 했다.구승훈은 가슴이 답답했고 무의식적으로 눈가가 촉촉해졌다.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 안에 있는 상대를 품에 안고 욕조로 데려갔다.“내가 씻겨줄게.”강하리는 붉게 물든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됐어, 난 괜찮으니까 나가.”구승훈은 그녀의 턱을 잡고 고개를 들게 했다.“하리야, 다시 승훈 오빠라고 불러줄래?”강하리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이윽고 그녀는 그의 손길을 떨쳐냈다.“나가, 나 지금 너무 피곤해서 샤워하고 일찍 자고 싶어. 구승훈, 나 지금 배가 불편해. 빨리 씻고 눕고 싶어.”순간 구승훈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어디가 불편해? 의사 불러줄까?”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아니, 그냥 좀 쉬면 돼.”구승훈은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구승훈의 눈에서 어두운 기운이 번뜩였다.연미숙, 연미숙...구승훈은 문득 지난번 입찰회에서 들이부었던 뜨거운 물이 떠올랐다.진작 연미숙의 수상함을 눈치챘어야 했는데.구승훈의 얼굴이 한층 싸늘하게 굳어졌다.그가 차갑게 웃었다.“구승재한테 가서 문연진이 어떻게 지내는지 가서 보라고 해.”준봉은 바로 알아들었다.준봉이 나간 뒤 병동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정양철과 정주현이 문 앞에 서 있었다.“강하리 씨 보러 왔어요.”정주현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고 정양철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구승훈이 웃으며 말했다.“정 회장님께서 신경을 많이 써주시네요.”정양철이 웃었다.“그래도 제가 아끼는 후배라서요.”구승훈은 더 말이 없었고 방 안의 분위기는 묘하게 긴장감이 감돌았다.정주현은 얼굴을 찡그렸다.“왜 그래요?”정양철이 웃었다.“아무것도 아니야. 하리 양이 자고 있다니 우리도 여기 있을 필요가 없지.”그렇게 말한 뒤 정양철은 정주현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엘리베이터에 들어가기 직전, 그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추더니 뒤를 돌아 병동 입구에 서 있는 구승훈을 다시 바라보았다.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서 있는 그의 표정은 웃는 듯 마는 듯했다.오늘 억울한 누명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차갑고 무관심했다.정양철은 미간을 살짝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아버지? 요즘 왜 그러세요?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요?” 정주현이 불쑥 묻자 정신을 차린 정양철이 답했다.“대체 어딜 봐서 내가 걱정이 있어 보여?”정주현이 혀를 찼다.“걱정이 없어요? 요즘 자주 잠도 못 주무시고 발코니에서 담배 피우시는 거 봤어요.”정양철이 멈칫하다가 물었다.“주현아, 내가 회사를 네 손에 맡기면 잘 해낼 수 있겠어?”정주현은 얼굴을 찡그렸다. “아버지, 건강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죠?” 정양철은 그를 노려보며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러길 바라는 거냐?”정주현은 웃으며 피했지만 왠지 아버지가 어딘가 모르게 이상하게 느껴졌다.구승훈은
강하리는 잠시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했다가 고개를 돌렸다.그녀는 시선을 내리며 그 안에 담긴 상처와 아픔을 숨겼다.더는 이 남자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정말 정양철 짓이라면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한참을 침묵하던 그녀가 말했다. “구승훈, 도와줘.”강하리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구승훈은 애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그녀가 자신에게 의지하길 바랐는데 주해찬을 위해 부탁하는 그녀를 보니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그는 손을 뻗어 강하리를 끌어안았다.“하리야, 너를 위해서야, 주해찬을 위해서야?”“구승훈!”강하리는 붉어진 눈으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당신이 하기 싫다면 심 변호사님한테 부탁할 거야.”허리를 감싼 구승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내 앞에서 부탁해 놓고 또 다른 사람을 찾아간다고?”그렇게 말한 뒤 그는 다소 무기력한 한숨을 내쉬었다.“강하리, 넌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 내가 정말 너 혼자서 정양철과 맞서게 놔둘 것 같아?”강하리는 시선을 돌렸다.구승훈이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지만 자신이 원해서 그러길 바랐다.강하리도 다쳐서 이미 체력적으로 지쳐 있었고 상처를 입어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다.구승훈은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좀 쉬어.”“잠이 안 와.”강하리는 침대에 기대어 잠을 청했고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휴대전화에는 사고 당시의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주해찬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차에서 구조될 때 심장이 심하게 뛰었고 안 그래도 창백했던 얼굴은 한층 더 하얗게 변했다.구승훈은 다가가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낸 뒤 손가락으로 턱을 살살 문질렀다.“내가 다 알아낼 테니까 날 믿어.”강하리가 고개를 들어 쓴웃음을 터뜨렸다.“구승훈, 나 때문에 계속 이런 일이 생기는 것 같아.”구승훈의 심장이 저렸다.“강하리!”강하리가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나 좀 잘게.”말을 마친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구승훈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기만 했다.“내가 진짜 주해찬을 건드렸다면 어떻게 할래?”강하리가 그를 마주 보았다.“살인은 대가를 치러야 해. 구승훈 당신은 나한테 특별할 게 없어.”구승훈의 마음속이 온통 씁쓸함으로 물들었다.그는 쓴웃음을 내뱉었지만 그래도 말을 이어갔다.“아직 몰라. 의사가 그럴 수도 있다고 했어.”하지만 강하리의 마음은 다소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때 정서원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도 의사가 그렇게 말했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선배 좀 보고 올게.”구승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결국 막지 않았다.그녀를 보내주지 않으면 그녀가 계속 불안해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따라 나갔다.중환자실 밖에서 여전히 울고 있는 석미란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강하리의 몸이 굳어졌다.그녀는 손가락에 힘을 주고 저쪽으로 걸어갔다.다만 아직 중환자실 앞으로 가기도 전에 걸음이 뚝 멈췄다.정양철과 정주현이 거기 있을 줄이야.그녀가 정양철을 힐끗 쳐다보자 정양철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는 문득 정서원이 납치되었을 때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게 떠오르며 손가락을 말아쥐었다.정서원에게 일이 생겼을 때 정양철이 병원에 나타났다.그녀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는지 확인하러 온 듯이.구승훈은 강하리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정양철을 힐끗 쳐다보더니 큰 손으로 강하리의 뒤 허리를 살며시 그러잡았다.강하리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거두었다.정주현은 강하리를 보자마자 서둘러 이쪽으로 다가왔다.“강하리 씨, 좀 어때요?”강하리가 고개를 저었다.“난 괜찮아요.”말을 마친 그녀가 중환자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두꺼운 유리 벽 너머로 드디어 주해찬이 보였다.항상 온화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는 현재 침대에 누워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몸에 여러 개의 튜브를 삽입하고 누워 있었다.강하리의 마음이 아팠다.밀려오는 죄책감이 그녀를 익사시킬 것만 같았
강하리의 머릿속이 하얘졌다.“뭐라고요?”석미란은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해찬이가 식물인간이 됐다고, 이제 만족해?”강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손끝까지 떨리고 있었다.“가볼래요.”그녀는 이불을 걷어 올리고 밖으로 나가려고 일어났지만 구승훈이 그녀를 붙잡았다.“지금 가도 소용없어. 중환자실에 있어서 못 만나.”그때 석미란이 갑자기 강하리를 붙잡았다.“망할 년,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해찬이를 보러 가! 해찬이가 정말로 못 깨어나면 내가 네 목숨을 가져갈 거야!”석미란이 말하며 강하리의 목을 조르려고 달려들자 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잡고 내동댕이쳤다.“여사님, 말 가려서 하세요. 대체 누가 누구 때문에 힘들다는 겁니까? 지금 전부 하리 탓으로 돌리는데 만약 주해찬 때문에 하리가 피해를 본 거면 저도 하리 복수를 위해 중환자실로 가서 주해찬을 죽여도 됩니까?”석미란은 눈이 빨개진 채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주해찬이 깨어나지 못할 위험에 처해있는데 죽여버리겠다고?“구승훈, 이 살인자 새끼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 것 같아? 너랑 강하리, 너네 둘 다 살인자야! 내가 죗값 치르게 해줄 테니까 기다려. 망할 네년은 해찬이 목숨값 내놔!”석미란의 울부짖는 소리가 병동 전체에 울려 퍼졌고 준봉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여사님, 방금 경찰에서 그 차가 구 대표님 번호판을 덧씌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대표님은 누명을 쓴 겁니다.”석미란은 여전히 증오에 가득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구승훈이 진짜 아들을 죽인 범인이라는 듯이.“경찰을 매수하면 그만인 줄 알아? 구승훈, 내가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강하리는 준봉의 말을 듣고 순간 몸이 굳어졌다.구승훈은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준봉을 바라보았다.“여사님 나가시라고 해.”준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석미란을 막기 위해 앞으로 달려갔다.“여사님, 이만 나가 주세요.”석미란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주해찬의 아버지에게 제지당했다.주해찬을 닮은 외모에 겉과 속이 모두 반듯한
주해찬의 표정이 확 바뀌며 핸들을 꺾었지만 그래도 피할 수 없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보호했고 강하리의 시선은 다가오는 차에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구승훈의 차다.차 번호판도 똑같았다.구승훈이 B시에 올 때마다 몰던 차였다.순식간에 강하리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곧 눈앞이 핑글 돌았다....강하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좀 어때?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옆에 앉은 남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구승훈, 당신이야?”구승훈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고 의심을 받은 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하리야, 너 정말 나라고 의심하는 거야?”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바라보는 강하리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차는 분명 구승훈의 것이었다.하지만 구승훈이 아니라고 말할 때 오히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서늘한 구승훈의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이 물었다.“선배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네가 신경 쓰는 건 주해찬밖에 없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날 구해준 사람이야.”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구승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내가 널 구해준 적은 없어? 하리야, 너 정말 사람 마음 아프게 한다.”강하리는 그의 손에서 손을 빼냈다.지금은 그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주해찬이 그녀의 몸을 감쌌기에 그는 꽤 심하게 다쳤을 거다.처음부터 주해찬에겐 미안한 것투성이였다.오랜 시간 동안 그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면서도 그에게 해줄 대답이 없었다.게다가 구승훈의 차로 교통사고까지 났으니 마음속에는 죄책감이 커져만 갔다.“선배는 어떻게 됐어?”여전히 똑같은 말에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주해찬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목숨은 건졌지만 그가 깨어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지금 강하리의 태도로 볼 때, 주해찬이 자신을 구하려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정말 알 수 없
주해찬의 표정이 잠시 번뜩이다가 미소를 지으며 정양철에게로 향했다.“아저씨, 오랜만이네요.”정양철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가 이내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해찬아, 여긴 무슨 일이야?”주해찬이 미소를 지었다.“친구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여기서 아저씨랑 만났네요.”정양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그럼 가서 일 봐.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알았어요.”주해찬은 그 말을 하고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정양철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전화기를 꽉 쥐었다.한편 주해찬은 안에서 나오기 바쁘게 훅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멍한 표정으로 길가에 서 있었다.방금 정양철이 한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강하리나 구승훈과 무슨 일이 있는 걸까?손을 댔다고 했는데, 무슨 짓을 한 걸까.정주현에게 선을 긋던 강아리의 모습과 연관 짓자 주해찬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그는 다소 창백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가 샤워하러 가려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선배?”하지만 강하리가 전화를 받을 때 주해찬은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적어도 제대로 알아보고 강하리에게 알려줘야지 무턱대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었다.“아니야, 그냥 내일 나랑 같이 팔찌 가지러 가자고.”“선배, 나 혼자 갈 수 있어요.” 강하리가 여전히 거절하려는데 주해찬이 말을 막았다.“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오늘 밤엔 일찍 쉬어.”주해찬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다음 날 이른 아침, 준봉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강하리에게 아침을 가져다주었다.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 순간, 강하리 방 앞에 두 사람이 수상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그를 보자마자 뒤돌아 복도 쪽으로 달려갔고 준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그들을 쫓아갔다.일직 강하리가 묵고 있는 호텔 아래층에 도착한 주해찬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어젯밤 정양철의 그 말 때문에 거의 밤을 새
준봉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대표님께서 마실 것 가져다드리래요.”말을 마친 준봉은 강하리에게 밀크티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보고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문을 닫았다.주해찬은 방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안 가면 조금 있다가 또 올걸.”주해찬은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오늘 밤 모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해요, 선배.”구승훈이 이러면 주해찬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난처했다.주해찬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문득 어젯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던 모습이 떠올라 결국 포기했다.준봉은 강하리의 방에서 나오는 주해찬을 바라보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다음에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주해찬이 나오며 준봉을 보고 웃었다.“구 대표님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요. 하리가 원하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고 하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절대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요.”준봉은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안녕히 가세요, 주해찬 씨.”주해찬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속삭인 뒤 곧장 돌아섰다.주해찬이 떠난 뒤에야 준봉은 다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차는 경찰서를 향해 빠르게 달렸고 통화를 마친 그는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구승재를 바라보았다.“목란정원 쪽 상황은 어때요?”“우리 쪽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안에 연정이가 없었대.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갈 때 꼭 큰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조롭게 들어갔대.”시선을 내려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역시.”구승재가 얼굴을 찡그렸다.“역시 뭐?”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어젯밤에 그녀는 일부러 그를 그곳으로 유인한 거다.연정이 사건은 여초연이 한 짓이다.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뒤틀렸다.하지만 잠시 후 그는
정주현은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강하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강하리 씨 데려다줬어. 웬일로 아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연미숙이 잠시 멈칫했다.“이 자식, 누가 보면 내가 평소에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알겠다.”정주현은 연미숙 앞에서 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그래, 관심 많은 거 알겠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연미숙은 잠시 침묵했다.“강하리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해.”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았을걸. 그 말을 꺼내니 정주현은 더 우울해졌다.“엄마, 강하리 씨 바빠.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친구들이나 만나지 강하리는 왜?”연미숙이 웃었다.“우리 아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여자를 내가 좀 만나면 안 돼?”정주현이 입을 삐죽거렸다.“영감탱이가 엄마처럼 정신 차렸으면 강하리가 며느리 됐을 텐데.”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와.”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후, 그녀의 눈에는 악의에 찬 눈빛만이 번쩍였다.강하리는 정주현을 배웅하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주해찬은 그녀의 뒤에 서서 물었다. “일부러 주현 씨랑 거리를 두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선배,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봐요.”주해찬은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며 다소 무력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만약 이 순간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이 구승훈이었다면 그녀는 바로 말하지 않았을까?아니면 구승훈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질투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분명 그가 구승훈보다 먼저 강하리를 좋아했는데.“하리야, 가능하면 나도 네가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어.”강하리의 표정은 굳어졌고 말투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선배, 정말 고맙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