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하니 그의 말을 듣고 있는 강하리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갑자기 그를 밀쳐내더니 그의 뺨을 때리고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짙은 어둠이 드리운 밤에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그냥 그렇게 걸었다.걸으면서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구승훈은 뺨을 맞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둘러 따라갔다.걸음이 빠른 강하리를 몇 번이나 뒤로 잡아당기려 했지만 실패했다.결국 그는 강하리를 뒤에서 와락 껴안았고 그제야 강하리는 걸음을 멈추고 갑자기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 모든 아픔과 상처가 단지 착각했다는 한마디로 귀결되었다.한 번의 착각이 그녀의 소중한 모든 걸 빼앗아 갔다.강하리는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배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정신을 차린 뒤 구승훈을 밀어내며 택시를 타려 했다.구승훈은 그녀를 안아 들고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차에 태웠다.강하리는 더 몸부림치지 않고 그에게 가만히 안긴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그녀를 호텔로 데려다주었다.강하리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자 구승훈이 가서 목욕물을 받아 주었다.물 온도를 체크하고 그가 다가와 안으려는데 그녀가 가볍게 밀어냈다.어떠한 격한 감정도 내비치지 않은 채 눈동자 깊숙이 파묻힌 고통만 있었다.“가.”그녀가 나지막이 말하자 멈칫한 구승훈은 속에서부터 쓰디쓴 감정이 밀려왔다.“하리야, 내키지 않으면 그냥 날 때려.”강하리는 시선을 내려 눈앞의 남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물었다.“어떻게 착각해?”그녀의 목소리는 유난히 차분했다.구승훈의 목울대가 요동쳤다.“어렸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그의 눈에서 아픔이 번뜩였다.“송유라가 작은 어촌에서 있었던 많은 일들을 이야기했고 걔한테... 그 목걸이가 있었어.”구승훈이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을 꼽으라고 한다면 감히 거짓말을 할 사람이 없을 거라고 과신한 나머지 송유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그녀의 말만 믿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만약 확인했다면 송유라를
구승훈이 멈칫하며 손을 들어 강하리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너 혼자 씻게 두기엔 마음이 안 놓여. 미끄러져 넘어지면 어떡해?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나 옆에 있게 해줘, 응? 난 그냥 널 돌봐주고 싶을 뿐이야. 그냥 날 노예처럼 부려.”“필요 없어.”강하리는 일어나서 화장실로 향했다.들어가서 문을 닫는 순간 그녀의 눈물은 다시 주체할 수 없이 쏟아졌다.이미 배가 불편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기에 울지 말자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하지만 눈물이 흐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차라리 구승훈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그게 이 우스꽝스럽고 조롱당하는 상황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분명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고 사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행복하게, 아이도, 엄마도 함께 지낼 수 있었는데... 온전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는데...이젠 그들 사이에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망망대해가 놓여 있었다.아무리 사람을 착각했다고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있었다.구승훈은 화장실 문 앞에 서 있었다.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녀와 분리된 그는 안에서 그녀의 낮은 흐느낌이 들렸다.그 낮고 억눌린 소리는 미친 듯이 울부짖는 소리보다 더 가슴을 아프게 했다.구승훈은 가슴이 답답했고 무의식적으로 눈가가 촉촉해졌다.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 안에 있는 상대를 품에 안고 욕조로 데려갔다.“내가 씻겨줄게.”강하리는 붉게 물든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됐어, 난 괜찮으니까 나가.”구승훈은 그녀의 턱을 잡고 고개를 들게 했다.“하리야, 다시 승훈 오빠라고 불러줄래?”강하리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이윽고 그녀는 그의 손길을 떨쳐냈다.“나가, 나 지금 너무 피곤해서 샤워하고 일찍 자고 싶어. 구승훈, 나 지금 배가 불편해. 빨리 씻고 눕고 싶어.”순간 구승훈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어디가 불편해? 의사 불러줄까?”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아니, 그냥 좀 쉬면 돼.”구승훈은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구승재는 그가 뭘 떠올리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하리 씨는 괜찮아?”구승훈은 닫힌 화장실 문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 답했다.“아니.”구승훈의 얼굴이 살짝 하얗게 질리며 가슴의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강하리가 다 씻고 나오자 의사도 도착했고 그녀의 상태를 살펴본 후 감정이 너무 격해진 탓이라고 했다.“정말 괜찮나요?” 구승훈이 잔뜩 긴장하며 물었고 의사가 웃으며 답했다.“별일 없을 겁니다. 근데 초음파를 안 해서 걱정되시면 아내분 모시고 병원 가서 초음파 한번 찍어보세요.”아내라는 말 한마디에 두 사람의 몸이 굳어버렸다.구승훈은 강하리가 부부가 아니라는 말을 할까 봐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하지만 강하리는 지금 그런 걸 해명할 기분이 아닌 모양이었다.그녀는 의사 선생님에게 고맙다고 말했다.“구승훈 씨, 의사 선생님 배웅해 줘.”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사를 내보냈고 돌아오니 강하리는 이미 문을 잠근 뒤였다.구승훈은 눈앞에 잠긴 문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고는 더 이상 강하리를 귀찮게 하지 않고 메시지를 보냈다.[잘 쉬고, 난 문밖에 있으니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불러.]강하리는 도착한 메시지를 보며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지만 끝내 답장은 하지 않았다.그녀는 침대에 누워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밤의 장막을 바라보며 마음이 혼란스러웠다.이게 이 세상의 섭리일까.아니면 단순히 그녀만 재수가 없어 이런 일이 일어난 걸지도 모른다.어느새 잠에 든 그녀는 꿈속에서 그 작은 어촌 마을로 돌아갔다.리시안셔스가 가득한 정원에서 구승훈은 꽃밭에 등을 대고 누워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하양아, 앞으로 너한테 리시안셔스 꽃밭 크게 만들어줄게, 어때?”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큰 정원에 온갖 색의 리시안셔스가 있었으면 좋겠어!”구승훈의 눈에는 미소가 가득했다.그의 세상은 온통 어둠뿐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찬란한 정원을 선물하고 싶었다.그녀를 공주처럼 모시며 세상 좋은 것들만 해주겠다고 했다
강하리는 꽃다발 위에 놓여 있던 카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옆에 두고 귀걸이를 집어 들었다.예전에 송유라를 위해 낙찰받았던 귀걸이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화려한 귀걸이였고 쇼핑몰에서 아무렇게나 샀던 귀걸이보다 훨씬 더 예뻐 보였다.하지만 강하리는 더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옆으로 치워둔 채 씻으러 갔다.어젯밤 한바탕 감정을 쏟아낸 후 이젠 마음이 평온해진 것 같았다.하지만 여전히 생각할 때마다 괴롭긴 했다.강하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아침을 들고 돌아온 구승훈은 거울 앞에 멍하니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곤 음식을 옆에 놓고 다가가 뒤에서 안아주었다.그의 포옹에 그제야 강하리는 정신이 들었다.“왜 또 왔어?”구승훈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아침 사러 갔지. 팥죽 사 왔어.”강하리가 멈칫하다가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나 입맛이 별로 없는데.”구승훈의 큰 손이 그녀의 작은 배에 내려앉았다.“이 작은 게 괴롭혀?”강하리는 단번에 그를 밀어내며 차갑게 말했다.“나를 괴롭히는 건 얘가 아니라 개자식이지.”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심장이 쿵 내려앉았고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정서원이 죽은 후 처음으로 그를 대하는 강하리의 태도가 누그러졌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누그러진 게 아니라 여전히 차갑게 대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원수를 보듯 하지는 않았다.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잡고 속삭였다.“그럼 그 개자식 제대로 혼내줘.”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뿌리친 뒤 나와서 아침을 먹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구승훈이 한 모든 행동이 하양이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어떤 마음으로 그를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예전처럼 그에게 차갑게 대할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할 수도 없었다.그가 줬던 상처는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까.게다가 이 일은 그냥 넘어가도 구씨 가문과 문씨 가문의 존재가 있었고 지금은 구승훈보다 아이가 더 신경 쓰였다.구승훈 역시 그녀가 그렇게 빨리 용서
하지만 그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주해찬은 강하리가 제대로 쉬지 못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그는 강하리에게 낮은 목소리로 몇 가지 질문을 던지다가 이쪽을 응시하는 구승훈의 눈빛을 발견했다.그 눈빛은 소유욕을 가득 품고 있었다.강하리도 뒤를 돌아보며 무표정하게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먼저 들어가, 박 교수님이 기다리고 계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실로 들어가고 주해찬은 구승훈의 옆으로 걸어갔다.“주해찬 씨, 안녕하세요.”주해찬은 복잡한 눈빛으로 구승훈 앞에 섰다.“구승훈 씨, 전에 나한테 했던 말 기억나요? 지금 당신이 이러면 하리만 힘들어요. 강하게 밀어붙여 가족들을 다 이기고 찾아오든지 아니면 멀리 떨어져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 예전에 그가 주해찬에게 했던 말인데 고스란히 그에게 돌아왔다.마음속으로 말로 표현 못 할 감정이 밀려왔지만 뭐라 해도 그는 자신과 강하리 일에 다른 사람이 간섭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주해찬 씨 걱정하지 마세요. 구씨 가문의 사람이나 일은 내가 제대로 해결할 테니까.”구승훈은 자신 있게 말했지만 주해찬은 구씨 가문이 그렇게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알았다.구씨 가문의 상황은 주씨 가문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하지만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전에도 말했다시피 또다시 하리한테 상처 주면 내가 데려가겠다고 했어요. 이번 해외 파견은 무산됐지만 하리만 원한다면 주저 없이 데리고 갈 겁니다.”구승훈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차가운 웃음을 내뱉었다.“데려갈 수 있겠어요? 주해찬 씨, 할 수 있었다면 말만 하지 말고 그렇게 했겠죠.”그는 강하리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연약해 보여도 굉장히 강단 있는 성격이었다.그녀가 가고 싶지 않다면 아무도 데려갈 수 없었다.지금의 강하리에겐 아이가 제일 우선이고 두 번째는 아마 그녀의 일일 것이다.그녀는 외교부 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쪽의 모든 결정에 기꺼이 순응했다.그는 강
강하리가 행사장에서 바쁜 하루를 마치고 나오니 밖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어젯밤에 제대로 쉬지 못하고 오늘 하루 종일 일하다 보니 몸이 조금 피곤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이제 일이 끝났으니 서둘러 얼른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짐을 싸서 나갈 준비를 하는데 문연진이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강하리 씨.”문연진은 웃는 얼굴로 강하리 옆으로 걸어갔다.“이렇게 빨리 돌아와서 일을 할 줄은 몰랐는데, 어머니의 죽음도 큰 영향은 없나 보네요.”강하리의 움직임이 멈칫하며 그녀의 눈에서 분노가 번뜩였다.“문연진 씨, 마지막으로 나에 대해 그렇게 말했던 사람이 결국 어떻게 됐는지 알아요?”문연진은 당황하다가 이어 조롱 섞인 눈빛을 번쩍였다.“지금 날 협박해요?”강하리가 웃었다.“네, 협박하는 거예요. 문연진 씨, 다시는 나 건드리지 마요. 안 그럼 그쪽 승훈 오빠가 알면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될 테니까.”말을 마친 그녀가 피식 웃었다. “아, 깜빡하고 말 못 했네요. 지난번에 나한테 그렇게 말했던 사람 이름이 장서연이에요. 모르겠으면 인터넷에서 검색해 봐요.”문연진은 장서연의 일에 대해 어느 정도 들은 바가 있었다.할아버지가 한 말 때문에 그동안 송씨 일가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그녀는 이 사건이 그저 단순한 사고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구승훈이 손을 쓴 거였나?문연진은 너무 화가 나서 순식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하지만 곧 그녀는 다시 차갑게 비웃었다.“강하리 씨, 아직 모르죠? 할아버지 생신날, 그쪽 가고 할아버지가 내가 승훈 오빠 약혼녀라고 발표했어요. 알겠어요? 내가 승훈 오빠 진짜 약혼녀라고요. 당신은 이제 내연녀예요.”강하리의 등이 뻣뻣하게 굳었다.사실 그날 밤 구동근이 문연진을 구승훈의 약혼녀라고 발표한 것은 강하리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그때 그녀는 구승훈의 마음속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만 신경 썼고 그날 밤 구승훈이 건넨 아도레가 무엇보다 위안이 되었다.하지만
주해찬은 문연진을 노려보았다. “문연진 씨, 그날 Y국 바에 있던 사람이라면 구승훈이 하리에게 매달린다는 건 다 아는데 자꾸 억지 부리는 것도 능력이네요.”그는 말을 마치고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약혼녀 타이틀은 자칭한 건가요? 구승훈도 인정했어요?” 주해찬은 그녀와 더 말을 섞기 싫어서 이 말만을 남긴 채 뒤돌아 자리를 떠났고 문연진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그 자리에 남았다.헤프닝은 끝났지만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주해찬은 전력 질주해서 몇 걸음만에 강하리를 따라잡았다.“너무 마음에 두지 마. 네가 당당한데 겁낼 게 뭐가 있어.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도 아니고.”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알아요, 오늘 나서줘서 고마워요 선배.”주해찬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나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왜 해, 내가 널 도와주는 건 당연한 건데.” 강하리는 가슴에 답답함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주해찬을 바라보았다.“선배, 맞선은 잘 돼가요?” 주해찬이 웃었다.“한번 빠지면 다른데 쉽게 눈 돌리기 힘든 거 너도 이해할 거야.”강하리는 시선을 내린 채 씁쓸하게 웃었다.“하지만 그건 좋지 않아요.”할 수만 있다면 자신과 구승훈이 그렇게 깊은 인연을 맺지 않길 바랐다. 어린 시절의 인연도, 그토록 기나긴 짝사랑도 없었으면 좋겠다.그러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홀가분하게 돌아설 수 있는데...주해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좋지만 가끔은 원할 때가 있지.”강하리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낮게 말했다.“그럴 가치가 없어요.”구승훈은 그녀에게 그만한 가치가 없었고 그녀 역시 주해찬이 이럴만한 가치가 없었다. 하지만 주해찬은 강하리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일찍 가서 쉬어, 내가 데려다줄까?”강하리는 깊게 숨을 내쉬며 감정을 추스른 뒤 고개를 저었다.“아뇨, 그냥 택시 타고 갈게요.”주해찬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뜻에 따랐다.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구승훈이 보였
문연진은 화가 나서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특히 뒤에서 모든 사람들이 행사장을 빠져나가고 있는 지금 조금 전 상황만 봐서는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 구승훈이 이렇게 말하면 문연진의 얼굴만 여지없이 내리치는 꼴이었다.“승훈 오빠...”하지만 이미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던 구승훈은 진작 강하리를 끌고 자리를 떠났다.강하리가 벗어나려고 했지만 구승훈은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하리야, 그만해 안 그러면 네 뒤에 있는 동료들 다 보는 앞에서 너 안고 차에 태울 거야.”강하리의 가슴이 분노로 꽉 조여왔다.“구승훈, 이거 놔! 내가 당신한테 등을 돌리게 만들지 마!”구승훈은 다시 한번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고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차 안으로 끌어당겼다.차에 탄 뒤에야 그가 물었다.“질투나?”강하리는 그를 노려봤다. “내가 질투할 게 뭐가 있어?”말은 그렇게 해도 말투에 질투가 고스란히 섞여 있었다.그녀는 마음이 불편했다.어쨌든 문연진은 그의 약혼녀라는 타이틀을 차지하고 있는데 자기한테 와서 매달리면서 왜 그녀는 그냥 내버려두는 걸까.그는 강하리의 손을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그럼 우리 사이 공개하는 거 어때?”강하리는 곧바로 손을 뒤로 뺐다.“당신이 나한테 매달리지 않는 게 제일 좋아.”구승훈은 심장이 저릿하며 쓴웃음을 지었다.“넌 내 아이 엄마고 어렸을 때부터 내가 그리워한 사람이야. 더구나 내가 기억이 없어도 여전히 좋아한 사람인데 너 아니면 내가 누구한테 매달려?”구승훈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부드럽게 주물렀다. “무슨 수를 쓰든 어렸을 때의 기억을 되찾아서 네가 아는 승훈 오빠로 돌아올게.”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자 강하리의 마음이 답답해졌다.구승훈은 손을 들어 하얗고 보드라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하리야, 우리 사이에 남긴 후회들 하나하나 내가 다 보상해 줄게.후회?강하리는 눈가가 시큰 해났다.두 사람 사이에는 이제 정말 후회만 남은 것 같았다.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잡고 고개를 숙여 붉게 물든 그녀의 눈가에 입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
강하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후에야 구승훈은 다시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하지만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익살스러운 미소가 남아 있지 않았다.“여진 쪽은 어떻게 됐어?”그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준봉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출시일이 확정됐습니다. 에비뉴보다 하루 빠릅니다.”구승훈은 손에 불경스러운 듯 염주를 굴리며 냉소를 지었다.“승재와 천아름 쪽에 협조 잘하라고 전해.”“네.”준봉이 재빨리 대답했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대표님, 사실 이 일은 사모님께도 일부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구승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조용히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준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은 항상 그랬다. 강하리를 도와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다.‘정말 답답해.’여진 주얼리는 지난 몇 년간 에비뉴와 계속해서 대립해 왔다.겉보기에는 구씨 가문이나 강하리와 아무 관련 없는 작은 회사처럼 보이지만 이런 작은 회사들이 대형 브랜드의 모조품을 내놓는 건 흔한 일이었다.하지만 여진 주얼리는 단순한 모조품에 만족하지 않았다.작년에 해외에서 에비뉴 주얼리의 표절 사건이 터졌을 때 그 배후에는 여진 주얼리가 있었다.그 사건으로 여진 주얼리는 큰 이득을 봤고 에비뉴는 큰 타격을 입었다.그 후 여진 주얼리는 더욱 탐욕스러워졌다.사람이란 달콤한 맛을 보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마련이다.여진 주얼리는 에비뉴에게 항상 위험 요소였다.구승훈은 에비뉴를 강하리에게 넘긴 이상 그녀에게 어떤 위험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대표님, 상대방의 배후 세력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대놓고 에비뉴를 도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구승훈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뭐? 지금 내가 잃을 게 뭐가 있다고?”준봉은 놀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강하리가 때린 따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고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강렬했다.그러자 구승훈의 뺨에는 순식간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천아름은 그대로 얼어붙었지만 이내 강하리를 향해 천천히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잘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맞아야 해. 제대로 한 대쯤은 맞아 봐야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알지. 이제라도 자기 잘못을 좀 깨달아야 해.’천아름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통쾌해했다.한편 구승훈은 손등으로 뺨을 한 번 스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강하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눈엔 고통이 어리어 있었다.“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면...” 그는 목울대를 두 번 삼킨 뒤에야 겨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나를 봐서... 토한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지만 더는 이 남자 앞에서 눈물 흘리고 싶지 않아 애써 참고 있었다.“다신 제 앞에 나타나지 마요.” 강하리의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구승훈의 눈에는 오히려 그 말이 묘하게 따뜻하게 비쳤다.지금 이 순간 그는 마음속에... 이상하게도 만족감이 들었다.‘적어도 하리 마음속에 아직 내가 있긴 한 거잖아. 미움이든 혐오든... 감정이 있는 한 아직 끝은 아니겠지.’그는 수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강하리의 입가를 닦아주었고 긴 손가락이 그녀의 입가를 스치고는 가볍게 떠났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인 채 쓸쓸하게 웃었다.“불쾌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하리야, 미안하지만 다신 안 나타날 수는 없을 거 같아. 난 그건 못 해.”그 말과 함께 그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천천히 화장실을 나갔다.순간, 화장실 안은 적막 속에 잠겼다.강하리는 다시금 구역질했고 천아름은 재빨리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밖에서 구승훈은 그녀의 헛구역질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얼마 후, 급히 달려온 준봉의 목소리에 그가 정신을 차렸다.“대표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
두 채의 30층이 넘는 오피스 빌딩 사이에는 다섯 층마다 하나씩 연결하는 공중 회랑이 있었다.회랑 위에는 각종 카페와 음식점이 입점해 있었고 그 주변에는 다양한 꽃들이 화사하게 장식되어 있었다.강하리는 사실 정안 타워에 자주 오지는 않았다.심지어 구승훈과 결혼을 앞두고 있던 그 시절에도 여기에는 발걸음을 거의 하지 않았다.솔직히 말해서 그녀보다 임희주가 더 자주 왔을지도 몰랐다.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그녀는 입꼬리를 삐죽이며 말했다.“구승훈이야 뭐 인간쓰레기지만 그래도 통 큰 건 인정해야겠네. 이렇게 큰 회사를 그냥 덜컥 넘겨주다니. 에비뉴 주얼리잖아? 보석 업계에선 꽤 이름 있는 브랜드인데. 이렇게 보면... 그 인간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네. 그렇지?”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과 한 달 남짓한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구승훈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서 너무도 멀어진 것만 같았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오늘은 꼭 광고 모델 확정해야 해. 원래 계약하려던 사람이 며칠 전에 갑자기 마음을 바꿨어. 이유 알아봤어?”그러자 천아름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이유야 뻔하지. 뺏긴 거지 뭐. 거의 계약 직전까지 갔는데... 갑자기 말을 바꾸더라.”“누가 뺏어갔는데?”강하리가 조용히 물었다.천아름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며칠 만에 마주친 구승훈이었다. 깔끔한 수트를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해지는 그 특유의 냉기가 몸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강하리는 구승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구승훈 역시 이 순간에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던지 평소 차가운 눈빛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그의 시선은 곧장 강하리에게 꽂혀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녀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얼굴빛은 생각보다 좋았다.홍조가 돌아 있었고 얼굴도 약간 도톰해진 듯했다.그는 기뻐해
항구에서 보경시로 돌아오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누군가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어떻게 됐어?”그 말에 노진우는 고개도 들지 않고 리모컨부터 눌렀다. 그러자 벽에 걸려있던 TV가 켜지더니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화면 속에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여초천이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의 가구를 부수며 바닥에서 뒹굴기 시작하더니 그럼에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는 벽에 머리를 쾅쾅 들이박았다.여초연의 이마는 이미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그 모습을 본 구승훈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됐어. 그만해.”노진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이렇게 끝내시겠다고요? 대표님께서 발작 났을 땐 이것보다 훨씬 심했어요. 제가 만든 약은 효과가 얼마 못 가거든요. 급하게 만든 거니까요. 하지만 대표님은 온 하루 동안 고통스러워하셨잖아요.”“게다가 대표님은 이 약 때문에 하리 씨 곁을 떠나야 했잖아요. 하리 씨가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다 이 약 때문인데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졌다고요?”구승훈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담배를 꺼내 거기에 불을 붙였다.“마음이 약해진 게 아니야. 저런 꼴을 보고 있으니까 그냥... 그때 내 모습이 떠올라서...”“생각할 때마다 너무 후회돼. 하리를 혼자 예식장에 두고 떠났던 거 말이야. 내가 어떻게 잡았는데 또다시 놓쳐버리다니...”“그런데 또 여초연이 저러고 있는 걸 보니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 내가 하리를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하리가 내 저런 모습을 봐야 했을 수도 있잖아.”노진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실 제 책임도 좀 있어요. 제 대학 동기인 데다가 능력도 괜찮아 보여서 추천했었는데 배경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으니까요.”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다.“임희주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되었을 거야. 여초연이 날 가만 내버려뒀을 리 없으니까.”노진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하리 씨 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