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팔찌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구승훈은 강하리가 다시 만나보자고 했을 때도, 강하리가 자신의 프러포즈를 받아줬을 때도 마음 한구석에 풀리지 않는 매듭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것은 그 아이와 그들의 과거에 대한 것이었다.그녀가 예전처럼 자신을 대해주기를 감히 원하지도 못했고 그저 자신의 마음을 기꺼이 받아주기를 바랐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마침내 그녀도 자신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서려는 것을 느꼈다.그의 말을 들으며 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고개를 들어 그의 턱을 깨물었다.“잘하고 다녀요. 누가 물어보면 약혼녀가 준 거라고 말하는 거 잊지 말고!”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몸을 뒤집어 그녀를 덮쳤다.“어떡하지? 출근하기 싫어. 너랑...”강하리는 얼굴을 붉히며 그의 입을 막았다.“가서 출근해요!”말을 마친 그녀는 그를 밀어내고 웃으며 입원 병동으로 걸어갔다.구승훈은 웃음을 머금은 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구승훈이 떠난 후 주차장에 있는 다른 차 안에서 정양철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그의 눈동자에 어두운 빛이 번쩍이더니 휴대전화를 들고 구동근에게 전화를 걸었다.“구동근 씨, 같이 차 한잔할까요? 네, 제가 그리로 가죠.”강하리가 위층으로 올라가자 간병인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리 씨, 방금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와서 어머니를 뵙고 싶다고 했어요. 하리 씨한테 전화하려고 했는데 나중에 그럴 필요 없다고 해서 안 했어요.”“정 씨요? 나이는요?”“오십대로 보였어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잠시 굳어지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어요.”정양철을 못 본 지도 오래되었다. 처음에 그에게 가졌던 의구심은 순조롭게 퇴사하면서 사라졌다.그런데 오늘 그가 여기로 왔을 줄이야.“다른 말은 없었나요?”간병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전에 어머니를 뵈러 오려고 했는데 어머니께 일이 생겼다고, 오늘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다가 한 번 보러 왔다는 말만 하셨어요.”강하리는 조용히
강하리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서둘러 대답했다.“그래요, 그럼 언제 떠나요? 짐 싸줄게요.”구승훈이 웃었다.“아니야, 바로 갈 거야. 앞으로 이틀 동안 조심하고 외출할 땐 노진우와 동행하면서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강하리가 짧게 답했다.“이번엔 얼마나 걸려요?”“사흘이.”구승훈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내가 돌아오면 혼인신고 하러 가자?”강하리는 깜짝 놀랐고 구승훈은 웃으며 말했다.“하리야, 나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그렇게 말한 뒤 그는 전화를 끊었다.강하리는 전화기를 바라보다가 무의식적으로 입꼬리가 올라갔다.어느새 그녀의 곁에 도착한 손연지가 전화를 끊는 것을 보고는 어깨에 팔을 둘렀다.“또 너희 집 개자식이랑 통화해?”강하리가 웃었다.“언제 왔어?”손연지는 입을 삐죽거렸다.“노민우가 날 끌고 와서 자기네 병원 시설 보러 오래. 보기는 무슨, 시설이 아무리 좋으면 뭐 해, 소 교수님이 있는 것도 아닌데!”강하리가 혀를 찼다.“소 교수님에 대해서는 좀 알아봤어?”손연지는 어깨를 으쓱했다.“뭘 알아봐? 넌 구승훈이랑 만나기 전에 미리 알아봤어?”강하리는 다소 말문이 막혀 바로 화제를 바꿨다.“연수는 언제 가?”“이번 달 말.”“그럼 너랑 소 교수님은...”손연지가 찡긋 윙크를 보냈다.“오늘 저녁에 소 교수님 만나기로 했으니까 저녁 먹고 나서 아마...”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민우가 옆으로 걸어왔다.“소영준이랑 밥 먹는다고?”그를 보자마자 손연지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왜, 안돼?”노민우가 피식 웃었다.“소영준 평소에 나이트클럽 자주 가는 거 알고 있어?”손연지는 조롱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자기는 안 가는 것처럼 말하네.”노민우는 순식간에 할 말을 잃었다.“이젠 그렇게 안 가.”“개는 똥을 못 끊지.”손연지가 그를 흘겨보며 강하리를 자기 차에 태웠다.“가자, 내가 데려다줄게.”노민우는 몇 발짝 뒤에서 따라왔다.“소영준이랑 어디서 밥 먹는데?”“네가
강하리는 짧게 대답하며 나지막이 몇 마디를 덧붙인 뒤 전화를 끊었다.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문을 두드리며 들어온 구승재의 표정이 다소 어둡자 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비행기표 예약했어?”구승재가 짧게 대답한 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다시 말을 꺼냈다.“형, 이거 송유라가 보낸 거야.”구승훈의 눈썹이 사납게 찡그려졌다.“뭔데?”구승재가 물건을 건넸고 그걸 받은 구승재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분홍색 크리스털 목걸이였다.뒷면에 자신의 이니셜이 새겨진 분홍색 리시안셔스.구승재가 나지막이 말했다.“그렇게 매정하게 굴 거면 다시는 자기 죽든 말든 신경 쓰지 말래. 방금 그쪽 간병인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손목을 또 그었다고 하더라.”그 말을 듣는 구승훈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고 구승재도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형, 어차피 강하리 씨랑 결혼할 거면 송유라 쪽은 빨리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안 그러면 일 터지는 건 시간 문제야. 송유라가 툭하면 난동을 부리는데 강하리 씨가 아무리 신경 안 쓴다고 해도 기분 안 좋을 거야.”구승훈은 미간을 꾹 누르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했다.“이제 처리할 때도 됐지. 일단 Y국으로 가자.”번뜩 꿈에서 깨어난 강하리가 눈을 떴을 땐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가정부는 서둘러 그녀를 품에 안고 살며시 토닥였다.“하리 씨, 악몽 꿨어요? 꿈꾸면서 계속 울고 있었어요.”강하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뒤 멍한 표정으로 가정부를 바라보다가 방금 꾼 꿈에서 조금 벗어났다.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꾼 건 꽤 오랜만인데 오늘 그 꿈이 다시 찾아왔다.절망과 질식이 그녀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물 마시고 숨 좀 돌려요.” 가정부가 물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지금 몇 시죠?”“벌써 9시 넘었어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내가 만들어 줄게요.”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구승훈이 이미 비행기에서 내렸을 거라고 생각하며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
노진우가 사람들을 데리고 서둘러 달려갔지만 병실 상황을 본 그의 심장이 철렁했다.그는 부하들에게 사람들을 모두 제압하라고 명령하고 자신은 강하리를 부축하러 갔다.“강하리 씨.”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얼굴과 입술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얼른 의사 불러요, 의사!”노진우는 서둘러 의사를 불렀고 수술실의 불은 한 시간 넘게 켜져 있었다.노진우는 내내 강하리의 곁을 지켰고 노민우도 이곳의 상황을 들었는지 서둘러 달려왔다.“강하리 씨, 걱정하지 마요. 병원에 있는 의사들 다 불러놨으니까.” 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말했다.“고마워요.”노민우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승훈이한테 전화했어요?”강하리는 시선을 내렸다. 방금 전화를 걸었는데 여전히 꺼진 상태였다.혹시 비행기가 연착된 건 아닐까.“대표님 아직 비행기 안에 계세요.”노진우가 강하리를 대신해 대답했고 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돌아보았다.“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노진우는 잠시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저 사람들, 예전에 어르신 쪽 사람들과 접촉한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강하리는 멈칫했다.“뭐라고요?”노진우는 서둘러 설명했다.“대표님이 저쪽 어르신의 움직임을 주시하라고 하셨는데 앞장섰던 사람이 어제 어르신 측 경호원들과 접촉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쪽으로 올 줄은 몰랐어요.”입술을 앙다문 강하리의 가슴에 찌릿한 통증이 밀려왔다.구씨 가문 사람들 짓이었어?순식간에 강하리의 마음은 죄책감으로 가득 차 쌓여가는 것 같았다.‘나 때문에? 나 때문에 엄마가 이렇게 된 거야? 내가 이기적이고 무모하게 구승훈 곁에 있어서 그런 거야?’강하리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노진우는 위로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강하리 씨, 괜한 생각 마세요. 단순히 제 의심일 수도 있어요, 조금 더 알아보고...”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의 휴대폰으로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고 고개를 숙인
“강하리 어딨어? 왜 내 전화를 안 받아?”노진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대표님, 강하리 씨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어요.”“뭐?” 구승훈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언제 돌아가셨는데?”“조금 전에요. 아마 어르신 쪽에서 한 짓인 것 같아요.”휴대폰을 움켜쥔 구승훈의 손 마디가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알았어.”정서원은 수술실에서 영안실로 옮겨졌다.강하리는 정서원의 몸을 닦아준 후 새 옷으로 갈아입혔다.전에 정서원이 깨어났을 때 강하리는 그녀를 위해 새 옷을 여러 벌 사다 주었고 정서원이 그 옷을 입고 함께 연성의 거리를 누빌 수 있을 줄 알았다.그런데 이런 식으로 옷을 입게 될 줄이야.손연지는 옆에서 눈시울을 붉히며 울었고 강하리는 오히려 덤덤했다.하고 싶은 말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표정이면서도 정서원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영안실에서 나온 강하리는 급히 달려온 구승훈을 발견했다.구승훈은 다가와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고 강하리는 가만히 안겨 있기만 했다.“무서워하지 마, 내가 있잖아.”강하리가 그를 밀어내자 구승훈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강하리는 이미 뒤돌아 장례식장에 도착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러 간 뒤였다.뒤돌아 따라간 구승훈은 강하리가 해야 할 일을 자신이 도맡았고 강하리는 구승훈이 대신 대답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잠자코 있었다.구승훈은 모든 것을 제대로 준비했다.장례식부터 묘지까지.마치 그럴듯한 사위처럼....한편 B시, 심씨 가문에서 백아영은 심준호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가슴 어딘가에서 급격한 통증이 밀려오며 곧바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심준호는 깜짝 놀라 앞으로 달려가 눈물을 닦아주었다.“왜 그러세요?”백아영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말을 꺼냈다.“중요한 것을 잃은 것 같아, 마음이 너무 아파.” 심준호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럼 지금 병원으로 갈까요
구승훈은 그녀가 반지를 빼내는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강하리의 말이 떨어지자 남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다시 말해 봐!”강하리는 가만히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너무 사랑하는 사람인데, 돌아오면 혼인신고 하러 가기로 약속까지 했는데...모든 걸 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었다.과거를 내려놓고, 송유라의 존재를 무시하고, 아이까지 잊기로 했다.하지만 결국 이렇게 됐다.그의 가족들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의 어머니를 죽였다.그는 다시는 송유라를 만나지 않겠다고 분명히 약속하고도 결국엔 그녀를 만나러 갔다.이 거대한 도박판에서 그녀는 철저히 패배자가 된 것이다.완전한 패배자로 전락했다.“헤어지자고요. 구승훈 씨, 당신 가족들은 나 싫어해요. 우리 더는 억지로 엮이지 말아요. 나 정말... 더는 견딜 수가 없어요. 앞으로는 송유라를 내버려두라고 묻지도 않을 거고, 당신이 정말 송유라를 놓아줄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을 테니까 우리 여기서 끝내요.”강하리의 눈물이 예고 없이 쏟아졌다.구승훈이 돌아온 후 처음 보는 그녀의 눈물이었다.정서원의 장례식 때도 울지 않던 그녀가 지금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강하리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발 밑으로 떨어진 다이아몬드 반지가 맑은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그녀는 생각했다.이미 깨진 거울은 결코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없다.깨진 건 깨진 거다.다시 이어 붙여도 그어진 틈새는 여전하다.구승훈은 패닉에 빠졌다.자신이 송유라를 만나러 간 사실을 강하리가 모를 거라 생각했다.“하리야, 내가 송유라를 만나러 간 건...”그는 강하리를 끌어당기며 설명하려 했다.강하리가 그를 떨쳐내려고 애썼지만 구승훈이 죽기 살기로 붙잡았다.“하리야, 내가 송유라를 만나러 간 건 송유라랑 제대로 얘기하려고 그랬어. 내가...”강하리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섰다.“제대로 얘기할 수 있기는 해요? 구승훈 씨, 송유라가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당신이 과거
흠뻑 젖은 채 들어오는 그녀를 본 손연지의 얼굴이 확 변했다.“왜 이렇게 흠뻑 젖었어?”강하리는 대답하지 않고 지친 듯 다가와 손연지의 어깨에 기댔다.손연지는 가슴이 너무 아파서 강하리를 욕실로 끌고 들어갔다.“일단 따뜻한 물로 목욕해. 내가 핫초코 한 잔 만들어 줄게.”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고마워.”손연지가 잠시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강하리는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욕조에 기대어 이미 잠든 듯 보였지만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날카로운 통증이 손연지의 심장을 관통하며 눈가가 붉게 물들어갔다.이미 눈을 뜬 강하리가 그녀의 손에서 핫초코를 건네받으며 말했다.“잘 먹을게.”손연지는 당황했다. 그녀의 손에 끼고 있던 반지가 사라졌다.“하리야, 너랑 구승훈...”“헤어졌어.” 그녀는 가슴이 아프지도 않다는 듯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게 말했다.하지만 살짝 떨리는 입꼬리는 여전히 그녀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눈 주위가 다시 빨갛게 물들었고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구승훈은 동의했어?”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이틀 진정하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더라.”“그럼 이틀 동안 쉬어. 마음 정리하고 다시 얘기해.”강하리는 손연지를 바라보았다.손연지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뜻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녀는 둘 사이에 구씨 가문 말고도 걸림돌이 있다는 걸 몰랐다.그럼에도 강하리는 이틀 동안 집에서 기다렸다.무슨 일이 있어도 그 사람들이 구씨 가문에서 보낸 사람들인지 아닌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이틀 동안 구승훈은 오지 않았고 단 한 통의 문자도 받지 못했다.강하리는 끔찍하게 조용한 휴대폰을 바라보며 한숨을 살짝 내쉬고는 구승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구승훈 씨, 내일이 어머니 오일장이니까 나랑 같이 묘지로 가요. 물어볼 게 있어요.]메시지를 보냈지만 바다에 던진 돌멩이처럼 감감무소식이었다.정서원의 오일장 날 그녀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특별히 꽃집에 가서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사서 묘지로 갔다.그렇게
강하리가 멈칫하며 곧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도 함께 사라졌다.그녀는 베개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만졌지만 여전히 아무 소식이 없었다.구승훈은 나타나지도 않았고 그녀가 보낸 메시지에 답장하지도 않았다.어쩌면 송유라 측에 또 무슨 일이 생긴 거겠지.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그럴 필요 없어.”손연지는 얼굴을 찡그렸다.“하리야, 혼자서 애 키우는 건 너무 힘들어.”애한테도 안 좋고.이 아이는 그때의 그 아이와는 다르다.그 아이는 구승훈이 하리에 대한 애정이 조금도 없던 시절에 나타났지만 이 아이는... 적어도 하리에 대한 구승훈의 마음이 있을 때 찾아왔으니까.분명히 두 사람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강하리의 코끝이 시큰해졌다.“연지야, 나 이제 용기가 안 나.”강하리의 말에 손연지는 멈칫했다.“무서워, 이 아이도 그때 아이처럼 될까 봐. 구씨 집안에서 날 싫어하고 문연진이 날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그 사람들이 나와 아이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 아이가 지난번 그 아이처럼 될까 봐, 우리 엄마처럼 될까 봐 무서워...”손연지는 문득 가슴이 아팠다.“그래, 그럼 말하지 말자. 우리 여길 떠나자. 마침 내가 연수 가니까 너도 같이 갔다가 아이가 태어나고 어른이 됐을 때 다시 오자.”강하리는 눈물을 참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나 해외 파견 가려고. 구승훈 때문에 거절하려고 했는데...”손연지는 입을 벙긋하다가 그녀의 손을 잡고 안아주었다.“그 개자식은 무시하고 아이 낳으면 우리 둘이 같이 키워.”강하리가 웃었다.“그래.”...송유라는 결국 목숨을 건졌지만 송씨 가문 사람들은 그 일로 난리가 났다.간병인은 송유라가 짜증 나서 밀었을 뿐 의도한 건 아니라고 했으나 송씨 가문에서는 송유라가 누군가에게 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며 강하리를 지목했다.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린 채 의식불명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는 송유라를 복잡한 눈빛으로 봤다.어쨌든 자신이 그녀에게 빚을 진 건 맞으니까.“구 대표.” 장진영의
구승훈의 눈에서 어두운 기운이 번뜩였다.연미숙, 연미숙...구승훈은 문득 지난번 입찰회에서 들이부었던 뜨거운 물이 떠올랐다.진작 연미숙의 수상함을 눈치챘어야 했는데.구승훈의 얼굴이 한층 싸늘하게 굳어졌다.그가 차갑게 웃었다.“구승재한테 가서 문연진이 어떻게 지내는지 가서 보라고 해.”준봉은 바로 알아들었다.준봉이 나간 뒤 병동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정양철과 정주현이 문 앞에 서 있었다.“강하리 씨 보러 왔어요.”정주현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고 정양철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구승훈이 웃으며 말했다.“정 회장님께서 신경을 많이 써주시네요.”정양철이 웃었다.“그래도 제가 아끼는 후배라서요.”구승훈은 더 말이 없었고 방 안의 분위기는 묘하게 긴장감이 감돌았다.정주현은 얼굴을 찡그렸다.“왜 그래요?”정양철이 웃었다.“아무것도 아니야. 하리 양이 자고 있다니 우리도 여기 있을 필요가 없지.”그렇게 말한 뒤 정양철은 정주현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엘리베이터에 들어가기 직전, 그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추더니 뒤를 돌아 병동 입구에 서 있는 구승훈을 다시 바라보았다.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서 있는 그의 표정은 웃는 듯 마는 듯했다.오늘 억울한 누명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차갑고 무관심했다.정양철은 미간을 살짝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아버지? 요즘 왜 그러세요?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요?” 정주현이 불쑥 묻자 정신을 차린 정양철이 답했다.“대체 어딜 봐서 내가 걱정이 있어 보여?”정주현이 혀를 찼다.“걱정이 없어요? 요즘 자주 잠도 못 주무시고 발코니에서 담배 피우시는 거 봤어요.”정양철이 멈칫하다가 물었다.“주현아, 내가 회사를 네 손에 맡기면 잘 해낼 수 있겠어?”정주현은 얼굴을 찡그렸다. “아버지, 건강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죠?” 정양철은 그를 노려보며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러길 바라는 거냐?”정주현은 웃으며 피했지만 왠지 아버지가 어딘가 모르게 이상하게 느껴졌다.구승훈은
강하리는 잠시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했다가 고개를 돌렸다.그녀는 시선을 내리며 그 안에 담긴 상처와 아픔을 숨겼다.더는 이 남자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정말 정양철 짓이라면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한참을 침묵하던 그녀가 말했다. “구승훈, 도와줘.”강하리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구승훈은 애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그녀가 자신에게 의지하길 바랐는데 주해찬을 위해 부탁하는 그녀를 보니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그는 손을 뻗어 강하리를 끌어안았다.“하리야, 너를 위해서야, 주해찬을 위해서야?”“구승훈!”강하리는 붉어진 눈으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당신이 하기 싫다면 심 변호사님한테 부탁할 거야.”허리를 감싼 구승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내 앞에서 부탁해 놓고 또 다른 사람을 찾아간다고?”그렇게 말한 뒤 그는 다소 무기력한 한숨을 내쉬었다.“강하리, 넌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 내가 정말 너 혼자서 정양철과 맞서게 놔둘 것 같아?”강하리는 시선을 돌렸다.구승훈이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지만 자신이 원해서 그러길 바랐다.강하리도 다쳐서 이미 체력적으로 지쳐 있었고 상처를 입어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다.구승훈은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좀 쉬어.”“잠이 안 와.”강하리는 침대에 기대어 잠을 청했고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휴대전화에는 사고 당시의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주해찬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차에서 구조될 때 심장이 심하게 뛰었고 안 그래도 창백했던 얼굴은 한층 더 하얗게 변했다.구승훈은 다가가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낸 뒤 손가락으로 턱을 살살 문질렀다.“내가 다 알아낼 테니까 날 믿어.”강하리가 고개를 들어 쓴웃음을 터뜨렸다.“구승훈, 나 때문에 계속 이런 일이 생기는 것 같아.”구승훈의 심장이 저렸다.“강하리!”강하리가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나 좀 잘게.”말을 마친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구승훈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기만 했다.“내가 진짜 주해찬을 건드렸다면 어떻게 할래?”강하리가 그를 마주 보았다.“살인은 대가를 치러야 해. 구승훈 당신은 나한테 특별할 게 없어.”구승훈의 마음속이 온통 씁쓸함으로 물들었다.그는 쓴웃음을 내뱉었지만 그래도 말을 이어갔다.“아직 몰라. 의사가 그럴 수도 있다고 했어.”하지만 강하리의 마음은 다소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때 정서원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도 의사가 그렇게 말했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선배 좀 보고 올게.”구승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결국 막지 않았다.그녀를 보내주지 않으면 그녀가 계속 불안해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따라 나갔다.중환자실 밖에서 여전히 울고 있는 석미란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강하리의 몸이 굳어졌다.그녀는 손가락에 힘을 주고 저쪽으로 걸어갔다.다만 아직 중환자실 앞으로 가기도 전에 걸음이 뚝 멈췄다.정양철과 정주현이 거기 있을 줄이야.그녀가 정양철을 힐끗 쳐다보자 정양철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는 문득 정서원이 납치되었을 때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게 떠오르며 손가락을 말아쥐었다.정서원에게 일이 생겼을 때 정양철이 병원에 나타났다.그녀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는지 확인하러 온 듯이.구승훈은 강하리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정양철을 힐끗 쳐다보더니 큰 손으로 강하리의 뒤 허리를 살며시 그러잡았다.강하리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거두었다.정주현은 강하리를 보자마자 서둘러 이쪽으로 다가왔다.“강하리 씨, 좀 어때요?”강하리가 고개를 저었다.“난 괜찮아요.”말을 마친 그녀가 중환자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두꺼운 유리 벽 너머로 드디어 주해찬이 보였다.항상 온화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는 현재 침대에 누워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몸에 여러 개의 튜브를 삽입하고 누워 있었다.강하리의 마음이 아팠다.밀려오는 죄책감이 그녀를 익사시킬 것만 같았
강하리의 머릿속이 하얘졌다.“뭐라고요?”석미란은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해찬이가 식물인간이 됐다고, 이제 만족해?”강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손끝까지 떨리고 있었다.“가볼래요.”그녀는 이불을 걷어 올리고 밖으로 나가려고 일어났지만 구승훈이 그녀를 붙잡았다.“지금 가도 소용없어. 중환자실에 있어서 못 만나.”그때 석미란이 갑자기 강하리를 붙잡았다.“망할 년,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해찬이를 보러 가! 해찬이가 정말로 못 깨어나면 내가 네 목숨을 가져갈 거야!”석미란이 말하며 강하리의 목을 조르려고 달려들자 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잡고 내동댕이쳤다.“여사님, 말 가려서 하세요. 대체 누가 누구 때문에 힘들다는 겁니까? 지금 전부 하리 탓으로 돌리는데 만약 주해찬 때문에 하리가 피해를 본 거면 저도 하리 복수를 위해 중환자실로 가서 주해찬을 죽여도 됩니까?”석미란은 눈이 빨개진 채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주해찬이 깨어나지 못할 위험에 처해있는데 죽여버리겠다고?“구승훈, 이 살인자 새끼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 것 같아? 너랑 강하리, 너네 둘 다 살인자야! 내가 죗값 치르게 해줄 테니까 기다려. 망할 네년은 해찬이 목숨값 내놔!”석미란의 울부짖는 소리가 병동 전체에 울려 퍼졌고 준봉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여사님, 방금 경찰에서 그 차가 구 대표님 번호판을 덧씌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대표님은 누명을 쓴 겁니다.”석미란은 여전히 증오에 가득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구승훈이 진짜 아들을 죽인 범인이라는 듯이.“경찰을 매수하면 그만인 줄 알아? 구승훈, 내가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강하리는 준봉의 말을 듣고 순간 몸이 굳어졌다.구승훈은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준봉을 바라보았다.“여사님 나가시라고 해.”준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석미란을 막기 위해 앞으로 달려갔다.“여사님, 이만 나가 주세요.”석미란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주해찬의 아버지에게 제지당했다.주해찬을 닮은 외모에 겉과 속이 모두 반듯한
주해찬의 표정이 확 바뀌며 핸들을 꺾었지만 그래도 피할 수 없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보호했고 강하리의 시선은 다가오는 차에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구승훈의 차다.차 번호판도 똑같았다.구승훈이 B시에 올 때마다 몰던 차였다.순식간에 강하리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곧 눈앞이 핑글 돌았다....강하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좀 어때?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옆에 앉은 남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구승훈, 당신이야?”구승훈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고 의심을 받은 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하리야, 너 정말 나라고 의심하는 거야?”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바라보는 강하리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차는 분명 구승훈의 것이었다.하지만 구승훈이 아니라고 말할 때 오히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서늘한 구승훈의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이 물었다.“선배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네가 신경 쓰는 건 주해찬밖에 없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날 구해준 사람이야.”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구승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내가 널 구해준 적은 없어? 하리야, 너 정말 사람 마음 아프게 한다.”강하리는 그의 손에서 손을 빼냈다.지금은 그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주해찬이 그녀의 몸을 감쌌기에 그는 꽤 심하게 다쳤을 거다.처음부터 주해찬에겐 미안한 것투성이였다.오랜 시간 동안 그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면서도 그에게 해줄 대답이 없었다.게다가 구승훈의 차로 교통사고까지 났으니 마음속에는 죄책감이 커져만 갔다.“선배는 어떻게 됐어?”여전히 똑같은 말에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주해찬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목숨은 건졌지만 그가 깨어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지금 강하리의 태도로 볼 때, 주해찬이 자신을 구하려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정말 알 수 없
주해찬의 표정이 잠시 번뜩이다가 미소를 지으며 정양철에게로 향했다.“아저씨, 오랜만이네요.”정양철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가 이내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해찬아, 여긴 무슨 일이야?”주해찬이 미소를 지었다.“친구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여기서 아저씨랑 만났네요.”정양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그럼 가서 일 봐.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알았어요.”주해찬은 그 말을 하고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정양철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전화기를 꽉 쥐었다.한편 주해찬은 안에서 나오기 바쁘게 훅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멍한 표정으로 길가에 서 있었다.방금 정양철이 한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강하리나 구승훈과 무슨 일이 있는 걸까?손을 댔다고 했는데, 무슨 짓을 한 걸까.정주현에게 선을 긋던 강아리의 모습과 연관 짓자 주해찬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그는 다소 창백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가 샤워하러 가려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선배?”하지만 강하리가 전화를 받을 때 주해찬은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적어도 제대로 알아보고 강하리에게 알려줘야지 무턱대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었다.“아니야, 그냥 내일 나랑 같이 팔찌 가지러 가자고.”“선배, 나 혼자 갈 수 있어요.” 강하리가 여전히 거절하려는데 주해찬이 말을 막았다.“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오늘 밤엔 일찍 쉬어.”주해찬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다음 날 이른 아침, 준봉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강하리에게 아침을 가져다주었다.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 순간, 강하리 방 앞에 두 사람이 수상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그를 보자마자 뒤돌아 복도 쪽으로 달려갔고 준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그들을 쫓아갔다.일직 강하리가 묵고 있는 호텔 아래층에 도착한 주해찬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어젯밤 정양철의 그 말 때문에 거의 밤을 새
준봉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대표님께서 마실 것 가져다드리래요.”말을 마친 준봉은 강하리에게 밀크티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보고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문을 닫았다.주해찬은 방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안 가면 조금 있다가 또 올걸.”주해찬은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오늘 밤 모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해요, 선배.”구승훈이 이러면 주해찬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난처했다.주해찬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문득 어젯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던 모습이 떠올라 결국 포기했다.준봉은 강하리의 방에서 나오는 주해찬을 바라보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다음에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주해찬이 나오며 준봉을 보고 웃었다.“구 대표님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요. 하리가 원하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고 하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절대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요.”준봉은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안녕히 가세요, 주해찬 씨.”주해찬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속삭인 뒤 곧장 돌아섰다.주해찬이 떠난 뒤에야 준봉은 다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차는 경찰서를 향해 빠르게 달렸고 통화를 마친 그는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구승재를 바라보았다.“목란정원 쪽 상황은 어때요?”“우리 쪽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안에 연정이가 없었대.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갈 때 꼭 큰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조롭게 들어갔대.”시선을 내려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역시.”구승재가 얼굴을 찡그렸다.“역시 뭐?”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어젯밤에 그녀는 일부러 그를 그곳으로 유인한 거다.연정이 사건은 여초연이 한 짓이다.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뒤틀렸다.하지만 잠시 후 그는
정주현은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강하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강하리 씨 데려다줬어. 웬일로 아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연미숙이 잠시 멈칫했다.“이 자식, 누가 보면 내가 평소에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알겠다.”정주현은 연미숙 앞에서 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그래, 관심 많은 거 알겠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연미숙은 잠시 침묵했다.“강하리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해.”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았을걸. 그 말을 꺼내니 정주현은 더 우울해졌다.“엄마, 강하리 씨 바빠.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친구들이나 만나지 강하리는 왜?”연미숙이 웃었다.“우리 아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여자를 내가 좀 만나면 안 돼?”정주현이 입을 삐죽거렸다.“영감탱이가 엄마처럼 정신 차렸으면 강하리가 며느리 됐을 텐데.”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와.”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후, 그녀의 눈에는 악의에 찬 눈빛만이 번쩍였다.강하리는 정주현을 배웅하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주해찬은 그녀의 뒤에 서서 물었다. “일부러 주현 씨랑 거리를 두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선배,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봐요.”주해찬은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며 다소 무력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만약 이 순간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이 구승훈이었다면 그녀는 바로 말하지 않았을까?아니면 구승훈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질투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분명 그가 구승훈보다 먼저 강하리를 좋아했는데.“하리야, 가능하면 나도 네가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어.”강하리의 표정은 굳어졌고 말투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선배, 정말 고맙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