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은 이미 지쳐 있는 강하리를 안고 욕실에서 나왔다.강하리는 그의 가슴에 기댄 채 금방이라도 잠들 기세였다.하지만 여전히 구승훈의 기분을 살피고 있었다.오늘 구승훈에게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평소에도 때때로 감정이 들쑥날쑥한 남자였지만 두 사람이 화해한 뒤로 지금처럼 거친 감정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오늘 어딘가 이상하다.“오늘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구승훈은 품에 안긴 여자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많이 티 나?”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구승훈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드라이기를 가지러 돌아섰다.그는 대답 대신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말려주며 에어컨을 적당한 온도로 맞춘 뒤 그녀를 안고 눈을 감았다.“보고 싶어서 왔어. 오는 길에 다른 남자가 널 데려가는 꿈도 꿨어.”강하리는 다소 어이가 없었고 구승훈은 다시 힘껏 그녀를 품에 가두었다.“조금만 누워 있어. 먹을 것 가져오라고 할 테니까 일어나면 먹자.”강하리는 그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살짝 한숨만 쉬었다.“나 여기 있잖아요, 아무도 안 데려가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널 내 곁에 묶어둘 방법을 생각해야겠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바라봤다. 해외 파견에 관해 얘기하려고 했는데 지금 상황에서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일단 좀 자.”강하리는 정말 피곤한 상태였기에 잠이 드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구승훈은 잠든 강하리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휴대폰에는 강하리가 주해찬과 함께 서 있는 사진이 열댓 장 정도 있었다.강하리가 미소를 지으며 주해찬을 올려다보는 사진,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 귓속말을 하는 사진, 심지어 주해찬의 입술이 강하리의 이마에 닿은 것처럼 보이는 사진도 있었다.앵글이 굉장히 잘 잡혔고 두 사람 분위기도 무척 다정해 보였다.구승훈은 사람들도 많은 그런 자리에서 두 사람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
“가요, 집에 어르신 몇 분이 기다리고 있어요.”말을 마친 그가 강하리를 바라보았다.“특히 우리 집 어르신께서 지난번 만난 이후로 계속 하리 씨 얘기만 해요.”강하리는 웃으며 말했다.“진작 왔어야 했는데.”심준호는 웃으며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얼마 가지 않아 백아영이 심문석을 부축하며 안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드디어 왔네!”심문석은 강하리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하리야, 얼른 이리 와 봐. 이 할아버지가 너 살 야윈 건 아닌지 보게.”심준호는 옆에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할아버지, 하리 씨 안 본 지 며칠밖에 안 됐는데 과장이 좀 심하시네요.”심문석은 그를 노려보며 강하리를 안으로 끌어당겼다.강하리는 구승훈을 힐끗 쳐다보았고 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와 심문석이 사라지자 구승훈은 백아영에게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아주머니.”백아영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호랑 얘기 나누고 있어. 난 요리하러 부엌에 가야 해서.”백아영이 떠난 뒤에야 심준호는 입을 열었다.“어르신 팔순 생신이지? 잘 왔어. 선물 너한테 보낼 테니까 나 대신 전해드려. 난 안 갈래.”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나란히 안으로 들어갔다.심준호는 강하리가 사라진 방향을 힐끗 쳐다보았다.“너랑 강하리 씨 만나는 거 어르신은 뭐라고 하셔?”구동근을 언급하자 구승훈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싸늘해졌다.“할아버지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심준호는 그 말에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깊은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두 사람 만나는 거 반대하시나 보네.”구승훈의 깊은 눈동자가 어두워졌다.“내 일 그 사람 동의는 필요 없어.”심준호는 웃었다.“알지, 넌 늘 그렇게 무모하게 행동하는 게 익숙하잖아. 근데 승훈아, 넌 어르신 태도 무시할 수 있어도 하리 씨는, 하리 씨도 괜찮대? 처음부터 끝까지 집안에서 인정을 못 받고 집안에서 결혼까지 주선하는 걸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구승훈은 한 손을
“여긴 준호 누나네 마당인데 몇 년 동안 아무도 살지 않았고 안에 있는 물건도 건드리지 않아서 가끔 이렇게 보면 마음이 너무 힘들어.”어르신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강하리는 예전에 백아영에게 사라진 딸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그녀가 입술을 달싹이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아빠, 손님이 오셨다고 들었어요.”두 사람이 뒤를 돌아보니 한 여성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그 여자는 다름 아닌 주해찬의 이모, 심준호의 숙모 석미란이었다.석미란은 강하리를 보자마자 얼굴에 가득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난 또 누구라고, 망할 년 너였어?”심문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어디서 그런 말을 해!”석미란은 어르신의 호통에 순간 당황했다.“아빠, 진짜예요. 이 년이 해찬이를 유혹하고 다른 남자들이랑 놀아났어요. 어떤 돈 많은 사람한테 빌붙어서 유산한 적도...”“닥쳐! 이년이라니, 어디서 감히 그런 말을 입 밖에 꺼내?”심문석은 석미란을 노려보며 다시 한번 고함을 질렀다.“당장 여기서 꺼져!”석미란은 분노했다.“아빠, 정말이에요. 못 믿겠으면 주씨 가문에 가서 물어봐요. 우리 해찬이 저년 때문에 지금 여자도 안 만나요. 아빠도 설마 저년한테 홀린 거예요? 저년이...”“여사님.”석미란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뒤돌아보니 멀지 않은 곳에 구승훈과 심준호가 서 있었고 두 사람 모두 똑같이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여사님, 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르시면 제가 직접 가르쳐 드리죠.”구승훈이 어두운 얼굴로 말하자 석미란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심준호가 이미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그녀는 심준호를 보자 살짝 겁이 났다.이 집안에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독 심준호는 두려운 존재였다.심준호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지며 주위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준호야, 난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 이년이 정말 예전에...”그녀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얼굴에 손바닥이 날아
강하리는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혼란스러웠지만 그녀도 착용할 생각은 없었다.한눈에 봐도 너무 비싼 물건인데 망가지거나 잃어버리면 너무 아깝지 않나.두 사람은 오후에 연성으로 돌아왔고 공항에서 나오던 구승훈은 강하리를 끌고 차에 태웠다.“집에 가요?”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 보러 병원에 가고 싶어요.”정서원은 상태가 조금 안정되어 중환자실에서 나왔다.한동안 이리저리 다니느라 제대로 돌보지 못했는데 이제야 시간이 났으니 엄마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하자 강하리가 그를 바라보았다.“이따 나랑 같이 들어가요.”구승훈은 살짝 당황했다. 그녀와 따라 들어갈 생각이긴 했어도 강하리의 입에서 나온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었다.정서원에게 남자 친구로 그를 데려가겠단 뜻이다.구승훈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가와 강하리의 허리를 붙잡고 무릎에 앉혔다.“강 대표님 지금 나 데리고 부모님 뵈러 가는 건가?”강하리가 웃었다.오늘 심씨 가문에서 그녀는 왠지 모르게 정서원 생각이 났다.진작 구승훈을 데리고 정서원을 만나러 갈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앞으로 자신과 구승훈이 잘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의 곁에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걸 정서원에게 알리고 싶었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갈 거예요?”구승훈의 목울대가 움찔하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답했다.“갈 거야, 무릎 꿇고 기어 오라고 해도 가.”강하리가 웃었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붉어진 눈가에 입맞춤했다.“걱정하지 마, 앞으로 내가 곁에 있을 테니까.”강하리는 참아왔던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구승훈은 그녀의 눈물에 입을 맞추며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였다.한참이 지나서야 강하리가 겨우 진정하고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입원 병실로 향했다.그런데 복도에 다다르자 손연지가 씩씩거리며 밖에서 들어왔고 당황한 강하리는 서둘러 손연지를 붙잡았다.“연지야, 무슨 일이야?”손연지는 화가
강하리가 얼굴을 찡그리며 슬쩍 보자 구승훈은 덤덤한 표정으로 옆에 기댔다.“노민우가 잘못한 건 맞지, 맞아도 싸.”손연지가 그를 힐끗 쳐다봤다. “웬일로 개 입에서 사람 말이 나오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손연지가 사무실로 달려갔다.강하리는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겁이 나서 서둘러 그녀를 뒤로 끌어당겼다.“손연지,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말로 해, 알았어?”강하리가 말하며 손연지의 손에서 날카로운 메스를 빼내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노민준 있잖아, 괜찮아.”강하리는 그를 뿌리치고 손연지를 따라갔다.노민우는 노민준의 사무실에 여유롭게 앉아 있었고 노민준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요즘 병원에 잘 안 오던데 무슨 일이야? 그 예쁜 의사 선생님들한테 더 이상 관심이 없나? 아니면 정말 그쪽 구실을 제대로 못 하는 거야?”노민우는 콧방귀를 뀌었다. “요즘 미친 여자랑 싸우는 중이야. 복수 끝나면 다시 올게.”노민준이 웃으며 무슨 말을 하려는 찰나 갑자기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손연지가 곧장 들어와 노민우에게 달려들었다.노민우는 너무 놀라서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손연지, 여긴 어떻게 왔어?”“너 죽이러 왔다!”노민우는 당황하며 말했다.“손연지, 실컷 즐겨놓고 나 몰라라 하는 거야?”“즐기긴 개뿔. 노민우, 네가 나 해고하라고 우리 원장님한테 얘기했어?”노민우가 멈칫했다.“김 원장님이 말했어?”“쓸데없는 소리, 안 그랬으면 내가 너한테 왔겠어?”노민우는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김 원장님 일 처리 잘하시네.”손연지는 화가 치밀어 눈가마저 붉게 물들었다.“진짜 너였네. 내가 고작 말 한마디 했다고 날 해고해? 노민우, 다들 너처럼 맘 편히 먹고 노는 재벌 집 아드님인 줄 알아?”노민우는 그녀의 빨개진 눈을 보자 순간 가슴이 답답해 났다.이 마녀의 두 눈이 이처럼 붉어진 건 처음 본다.그는 황급히 다가가 손연지를 노민준 앞으로 끌어당겼다.“형, 우리 병원 산부인과에 의사 부족하지 않아? 월급이 중
두 사람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병원에 머물다가 밖으로 나왔을 때 우연히 길가에 서 있는 노민우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뭐야? 또 손 선생한테 맞았어?”구승훈이 조롱 섞인 목소리로 묻자 노민우는 다소 침울한 어투로 말했다.“강하리 씨 친구는 어렸을 때부터 남자라곤 못 만나 봤어요?”이에 강하리는 순간적으로 기분이 잡쳤다.“노민우 씨, 왜 말을 그렇게 하죠?”노민우는 코를 문지르며 말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전 그냥... 그 여자는 왜 소영준만 보면 움직이지를 못해요?”이날 오후 손연지와 함께 떠난 그는 원래는 손연지가 이직 절차를 밟을 때도 동행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중앙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소영준과 마주칠 줄이야.소영준은 예의 바른 태도로 몇 마디 말을 건네고 그녀를 잡기까지 했다.“방금 연수 신청한 거 허락 떨어진 것 같던데 안 할 거예요?”손연지는 그 자리에서 노민우를 노려보았다.“어떤 미친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겠네요!”소영준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노민우 씨가 데려가려고 힘 좀 썻나봐요?”노민우가 피식 웃는데 소영준이 손연지에게 이렇게 말했다.“그만두기 싫으면 내가 원장님한테 가서 대신 얘기해줄게요.”손연지는 곧장 표정이 확 달라졌고 노민우가 옆에서 말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손연지는 노민우를 비웃으며 바로 돌아서서 그렇게 자리를 떠났고 노민우는 소영준을 바라보며 물었다.“소 교수님 설마 손 선생님 좋아하세요?”소영준은 웃었다.“손 선생님이 귀여운 건 맞지만 아쉬워서 그래요. 연수하고 돌아오면 앞으로 더 성장할 수 있는데 이대로 기회를 헛되이 잃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노민우는 정의의 사도 같은 소영준의 표정을 바라보며 그동안 품고 있던 마음속의 불만을 토해낼 곳이 없었다.손연지 때문에 소영준과 얼굴을 붉힐 수도 없었다.강하리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하지만 결국 손연지의 선택에 달렸으니 그게 무엇이든 응원하기로 했다.가는 길에 강하리는 손
남자의 넓은 가슴과 탄탄한 배가 여지없이 섹시함을 뽐냈다.수많은 밤을 함께 뒹굴었어도 강하리는 여전히 이 남자 때문에 마음이 요동쳤다.그녀는 남자의 눈을 마주하고 키스하기 위해 그를 끌어당겼다.구승훈은 순식간에 이성을 잃었고 방의 뜨거운 열기는 자정까지 계속되었다....구동근의 생일날 강하리는 결국 가기로 했다.다름이 아니라 구동근이 아침 일찍 사람을 보내 그녀를 초대한 것이다.구승훈의 표정은 어두웠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구동근이 수면 위로 끄집어내려 한다면 그도 서슴지 않고 공개적으로 맞설 것이다.드레스 역시 구승훈이 직접 선택했다.오픈 숄더 디자인에 허리 옆부분에 컷아웃이 있어 심플하고 분위기 있으면서도 섹시한 드레스였다.구승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어떡하지? 데리고 나가기 싫은데.”강하리는 미소를 지었다.“그만해요.”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걱정하지 마, 너 속상할 일 만들지 않아.”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다가 결국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구씨 가문의 저택은 웅장하게 지어졌다.차가 저택 입구에 멈춰 섰고 구승훈이 강하리와 함께 차에서 내리자마자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순식간에 강하리는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에 휩싸인 듯했다.사람들에게 구승훈은 늘 싱글인 이미지였기 때문에 그가 오늘 밤 여자를 데리고 올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 같다.구승훈은 강하리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곧장 연회장으로 들어갔다.“형, 형수님!”두 사람이 들어서자마자 구승재가 외쳤고 ‘형수님’이라는 호칭에 모든 사람들이 조금 당황했지만 구승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단순한 행동만으로 구승재가 잘못 부른 게 아니란 것을 모두에게 보여준 셈이었다.사람들은 모두 충격에 휩싸인 채 멍한 표정으로 서로 눈치만 보기 바빴다.오늘 밤 파티는 구동근의 생일 파티였지만 다들 마음속으로는 구동근이 구승훈을 위해 준비한 약혼 파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리고 약혼 상대는 B시 문씨 가문의 딸이었다.
구동근이 나오자마자 그의 시선이 강하리에게 향했고 강하리는 한눈에 그의 눈빛에서 싫은 기색을 읽었다.강하리가 구동근과 제대로 된 만남을 가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구동근의 시선은 잠시 그녀에게 머물렀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강하리는 눈을 내리며 피식 웃었다.“할아버지께서 나를 정말 싫어하시는 것 같네요.”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만 좋아하면 돼.”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연회장의 분위기는 더욱 미묘해졌다.문연진은 낮고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승훈 오빠.”구승훈이 그녀를 못 본 척 강하리를 옆으로 끌어당기자 구동근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구승훈, 너 이리 와!”구승훈은 웃으며 말했다.“왜요, 할아버지 곁에 사람 한 명 있는 걸로는 모자라세요?”구동근의 표정이 잔뜩 어두워졌지만 오늘은 어찌 됐든 자신의 생일이었고 수많은 손님들이 온 자리에서 구승훈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하지만 강하리에게만큼은 오늘 밤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다.구승훈이 싸고돈다고 정말 막무가내로 굴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그는 한껏 가라앉은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봤다.“강하리 씨, 승훈이와 연진이 약혼 파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강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데 구승훈이 웃었다.“약혼하러 온 건 맞지만 그 상대가 문연진 씨는 아니죠.”연회장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랐고 강하리도 구승훈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구동근의 얼굴은 순식간에 추해졌다.“구승훈, 네가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아?”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슨 말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아요.”구동근은 살기가 번뜩이는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 씨, 내가 인정하는 손자며느리는 문연진 하나입니다.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강하리 씨?”모를 리가 있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은 구씨 가문에 들어올 자격이 없고, 들어올 가능성도 없다는 걸 알리는 것이다.강하리의 입꼬리가 팽팽하게 굳어지며 구승훈의 팔짱을 끼고 있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
강하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후에야 구승훈은 다시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하지만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익살스러운 미소가 남아 있지 않았다.“여진 쪽은 어떻게 됐어?”그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준봉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출시일이 확정됐습니다. 에비뉴보다 하루 빠릅니다.”구승훈은 손에 불경스러운 듯 염주를 굴리며 냉소를 지었다.“승재와 천아름 쪽에 협조 잘하라고 전해.”“네.”준봉이 재빨리 대답했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대표님, 사실 이 일은 사모님께도 일부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구승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조용히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준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은 항상 그랬다. 강하리를 도와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다.‘정말 답답해.’여진 주얼리는 지난 몇 년간 에비뉴와 계속해서 대립해 왔다.겉보기에는 구씨 가문이나 강하리와 아무 관련 없는 작은 회사처럼 보이지만 이런 작은 회사들이 대형 브랜드의 모조품을 내놓는 건 흔한 일이었다.하지만 여진 주얼리는 단순한 모조품에 만족하지 않았다.작년에 해외에서 에비뉴 주얼리의 표절 사건이 터졌을 때 그 배후에는 여진 주얼리가 있었다.그 사건으로 여진 주얼리는 큰 이득을 봤고 에비뉴는 큰 타격을 입었다.그 후 여진 주얼리는 더욱 탐욕스러워졌다.사람이란 달콤한 맛을 보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마련이다.여진 주얼리는 에비뉴에게 항상 위험 요소였다.구승훈은 에비뉴를 강하리에게 넘긴 이상 그녀에게 어떤 위험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대표님, 상대방의 배후 세력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대놓고 에비뉴를 도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구승훈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뭐? 지금 내가 잃을 게 뭐가 있다고?”준봉은 놀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강하리가 때린 따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고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강렬했다.그러자 구승훈의 뺨에는 순식간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천아름은 그대로 얼어붙었지만 이내 강하리를 향해 천천히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잘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맞아야 해. 제대로 한 대쯤은 맞아 봐야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알지. 이제라도 자기 잘못을 좀 깨달아야 해.’천아름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통쾌해했다.한편 구승훈은 손등으로 뺨을 한 번 스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강하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눈엔 고통이 어리어 있었다.“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면...” 그는 목울대를 두 번 삼킨 뒤에야 겨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나를 봐서... 토한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지만 더는 이 남자 앞에서 눈물 흘리고 싶지 않아 애써 참고 있었다.“다신 제 앞에 나타나지 마요.” 강하리의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구승훈의 눈에는 오히려 그 말이 묘하게 따뜻하게 비쳤다.지금 이 순간 그는 마음속에... 이상하게도 만족감이 들었다.‘적어도 하리 마음속에 아직 내가 있긴 한 거잖아. 미움이든 혐오든... 감정이 있는 한 아직 끝은 아니겠지.’그는 수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강하리의 입가를 닦아주었고 긴 손가락이 그녀의 입가를 스치고는 가볍게 떠났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인 채 쓸쓸하게 웃었다.“불쾌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하리야, 미안하지만 다신 안 나타날 수는 없을 거 같아. 난 그건 못 해.”그 말과 함께 그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천천히 화장실을 나갔다.순간, 화장실 안은 적막 속에 잠겼다.강하리는 다시금 구역질했고 천아름은 재빨리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밖에서 구승훈은 그녀의 헛구역질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얼마 후, 급히 달려온 준봉의 목소리에 그가 정신을 차렸다.“대표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
두 채의 30층이 넘는 오피스 빌딩 사이에는 다섯 층마다 하나씩 연결하는 공중 회랑이 있었다.회랑 위에는 각종 카페와 음식점이 입점해 있었고 그 주변에는 다양한 꽃들이 화사하게 장식되어 있었다.강하리는 사실 정안 타워에 자주 오지는 않았다.심지어 구승훈과 결혼을 앞두고 있던 그 시절에도 여기에는 발걸음을 거의 하지 않았다.솔직히 말해서 그녀보다 임희주가 더 자주 왔을지도 몰랐다.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그녀는 입꼬리를 삐죽이며 말했다.“구승훈이야 뭐 인간쓰레기지만 그래도 통 큰 건 인정해야겠네. 이렇게 큰 회사를 그냥 덜컥 넘겨주다니. 에비뉴 주얼리잖아? 보석 업계에선 꽤 이름 있는 브랜드인데. 이렇게 보면... 그 인간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네. 그렇지?”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과 한 달 남짓한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구승훈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서 너무도 멀어진 것만 같았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오늘은 꼭 광고 모델 확정해야 해. 원래 계약하려던 사람이 며칠 전에 갑자기 마음을 바꿨어. 이유 알아봤어?”그러자 천아름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이유야 뻔하지. 뺏긴 거지 뭐. 거의 계약 직전까지 갔는데... 갑자기 말을 바꾸더라.”“누가 뺏어갔는데?”강하리가 조용히 물었다.천아름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며칠 만에 마주친 구승훈이었다. 깔끔한 수트를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해지는 그 특유의 냉기가 몸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강하리는 구승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구승훈 역시 이 순간에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던지 평소 차가운 눈빛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그의 시선은 곧장 강하리에게 꽂혀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녀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얼굴빛은 생각보다 좋았다.홍조가 돌아 있었고 얼굴도 약간 도톰해진 듯했다.그는 기뻐해
항구에서 보경시로 돌아오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누군가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어떻게 됐어?”그 말에 노진우는 고개도 들지 않고 리모컨부터 눌렀다. 그러자 벽에 걸려있던 TV가 켜지더니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화면 속에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여초천이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의 가구를 부수며 바닥에서 뒹굴기 시작하더니 그럼에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는 벽에 머리를 쾅쾅 들이박았다.여초연의 이마는 이미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그 모습을 본 구승훈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됐어. 그만해.”노진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이렇게 끝내시겠다고요? 대표님께서 발작 났을 땐 이것보다 훨씬 심했어요. 제가 만든 약은 효과가 얼마 못 가거든요. 급하게 만든 거니까요. 하지만 대표님은 온 하루 동안 고통스러워하셨잖아요.”“게다가 대표님은 이 약 때문에 하리 씨 곁을 떠나야 했잖아요. 하리 씨가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다 이 약 때문인데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졌다고요?”구승훈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담배를 꺼내 거기에 불을 붙였다.“마음이 약해진 게 아니야. 저런 꼴을 보고 있으니까 그냥... 그때 내 모습이 떠올라서...”“생각할 때마다 너무 후회돼. 하리를 혼자 예식장에 두고 떠났던 거 말이야. 내가 어떻게 잡았는데 또다시 놓쳐버리다니...”“그런데 또 여초연이 저러고 있는 걸 보니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 내가 하리를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하리가 내 저런 모습을 봐야 했을 수도 있잖아.”노진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실 제 책임도 좀 있어요. 제 대학 동기인 데다가 능력도 괜찮아 보여서 추천했었는데 배경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으니까요.”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다.“임희주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되었을 거야. 여초연이 날 가만 내버려뒀을 리 없으니까.”노진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하리 씨 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