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가 얼굴을 찡그리며 슬쩍 보자 구승훈은 덤덤한 표정으로 옆에 기댔다.“노민우가 잘못한 건 맞지, 맞아도 싸.”손연지가 그를 힐끗 쳐다봤다. “웬일로 개 입에서 사람 말이 나오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손연지가 사무실로 달려갔다.강하리는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겁이 나서 서둘러 그녀를 뒤로 끌어당겼다.“손연지,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말로 해, 알았어?”강하리가 말하며 손연지의 손에서 날카로운 메스를 빼내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노민준 있잖아, 괜찮아.”강하리는 그를 뿌리치고 손연지를 따라갔다.노민우는 노민준의 사무실에 여유롭게 앉아 있었고 노민준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요즘 병원에 잘 안 오던데 무슨 일이야? 그 예쁜 의사 선생님들한테 더 이상 관심이 없나? 아니면 정말 그쪽 구실을 제대로 못 하는 거야?”노민우는 콧방귀를 뀌었다. “요즘 미친 여자랑 싸우는 중이야. 복수 끝나면 다시 올게.”노민준이 웃으며 무슨 말을 하려는 찰나 갑자기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손연지가 곧장 들어와 노민우에게 달려들었다.노민우는 너무 놀라서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손연지, 여긴 어떻게 왔어?”“너 죽이러 왔다!”노민우는 당황하며 말했다.“손연지, 실컷 즐겨놓고 나 몰라라 하는 거야?”“즐기긴 개뿔. 노민우, 네가 나 해고하라고 우리 원장님한테 얘기했어?”노민우가 멈칫했다.“김 원장님이 말했어?”“쓸데없는 소리, 안 그랬으면 내가 너한테 왔겠어?”노민우는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김 원장님 일 처리 잘하시네.”손연지는 화가 치밀어 눈가마저 붉게 물들었다.“진짜 너였네. 내가 고작 말 한마디 했다고 날 해고해? 노민우, 다들 너처럼 맘 편히 먹고 노는 재벌 집 아드님인 줄 알아?”노민우는 그녀의 빨개진 눈을 보자 순간 가슴이 답답해 났다.이 마녀의 두 눈이 이처럼 붉어진 건 처음 본다.그는 황급히 다가가 손연지를 노민준 앞으로 끌어당겼다.“형, 우리 병원 산부인과에 의사 부족하지 않아? 월급이 중
두 사람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병원에 머물다가 밖으로 나왔을 때 우연히 길가에 서 있는 노민우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뭐야? 또 손 선생한테 맞았어?”구승훈이 조롱 섞인 목소리로 묻자 노민우는 다소 침울한 어투로 말했다.“강하리 씨 친구는 어렸을 때부터 남자라곤 못 만나 봤어요?”이에 강하리는 순간적으로 기분이 잡쳤다.“노민우 씨, 왜 말을 그렇게 하죠?”노민우는 코를 문지르며 말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전 그냥... 그 여자는 왜 소영준만 보면 움직이지를 못해요?”이날 오후 손연지와 함께 떠난 그는 원래는 손연지가 이직 절차를 밟을 때도 동행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중앙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소영준과 마주칠 줄이야.소영준은 예의 바른 태도로 몇 마디 말을 건네고 그녀를 잡기까지 했다.“방금 연수 신청한 거 허락 떨어진 것 같던데 안 할 거예요?”손연지는 그 자리에서 노민우를 노려보았다.“어떤 미친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겠네요!”소영준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노민우 씨가 데려가려고 힘 좀 썻나봐요?”노민우가 피식 웃는데 소영준이 손연지에게 이렇게 말했다.“그만두기 싫으면 내가 원장님한테 가서 대신 얘기해줄게요.”손연지는 곧장 표정이 확 달라졌고 노민우가 옆에서 말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손연지는 노민우를 비웃으며 바로 돌아서서 그렇게 자리를 떠났고 노민우는 소영준을 바라보며 물었다.“소 교수님 설마 손 선생님 좋아하세요?”소영준은 웃었다.“손 선생님이 귀여운 건 맞지만 아쉬워서 그래요. 연수하고 돌아오면 앞으로 더 성장할 수 있는데 이대로 기회를 헛되이 잃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노민우는 정의의 사도 같은 소영준의 표정을 바라보며 그동안 품고 있던 마음속의 불만을 토해낼 곳이 없었다.손연지 때문에 소영준과 얼굴을 붉힐 수도 없었다.강하리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하지만 결국 손연지의 선택에 달렸으니 그게 무엇이든 응원하기로 했다.가는 길에 강하리는 손
남자의 넓은 가슴과 탄탄한 배가 여지없이 섹시함을 뽐냈다.수많은 밤을 함께 뒹굴었어도 강하리는 여전히 이 남자 때문에 마음이 요동쳤다.그녀는 남자의 눈을 마주하고 키스하기 위해 그를 끌어당겼다.구승훈은 순식간에 이성을 잃었고 방의 뜨거운 열기는 자정까지 계속되었다....구동근의 생일날 강하리는 결국 가기로 했다.다름이 아니라 구동근이 아침 일찍 사람을 보내 그녀를 초대한 것이다.구승훈의 표정은 어두웠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구동근이 수면 위로 끄집어내려 한다면 그도 서슴지 않고 공개적으로 맞설 것이다.드레스 역시 구승훈이 직접 선택했다.오픈 숄더 디자인에 허리 옆부분에 컷아웃이 있어 심플하고 분위기 있으면서도 섹시한 드레스였다.구승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어떡하지? 데리고 나가기 싫은데.”강하리는 미소를 지었다.“그만해요.”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걱정하지 마, 너 속상할 일 만들지 않아.”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다가 결국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구씨 가문의 저택은 웅장하게 지어졌다.차가 저택 입구에 멈춰 섰고 구승훈이 강하리와 함께 차에서 내리자마자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순식간에 강하리는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에 휩싸인 듯했다.사람들에게 구승훈은 늘 싱글인 이미지였기 때문에 그가 오늘 밤 여자를 데리고 올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 같다.구승훈은 강하리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곧장 연회장으로 들어갔다.“형, 형수님!”두 사람이 들어서자마자 구승재가 외쳤고 ‘형수님’이라는 호칭에 모든 사람들이 조금 당황했지만 구승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단순한 행동만으로 구승재가 잘못 부른 게 아니란 것을 모두에게 보여준 셈이었다.사람들은 모두 충격에 휩싸인 채 멍한 표정으로 서로 눈치만 보기 바빴다.오늘 밤 파티는 구동근의 생일 파티였지만 다들 마음속으로는 구동근이 구승훈을 위해 준비한 약혼 파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리고 약혼 상대는 B시 문씨 가문의 딸이었다.
구동근이 나오자마자 그의 시선이 강하리에게 향했고 강하리는 한눈에 그의 눈빛에서 싫은 기색을 읽었다.강하리가 구동근과 제대로 된 만남을 가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구동근의 시선은 잠시 그녀에게 머물렀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강하리는 눈을 내리며 피식 웃었다.“할아버지께서 나를 정말 싫어하시는 것 같네요.”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만 좋아하면 돼.”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연회장의 분위기는 더욱 미묘해졌다.문연진은 낮고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승훈 오빠.”구승훈이 그녀를 못 본 척 강하리를 옆으로 끌어당기자 구동근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구승훈, 너 이리 와!”구승훈은 웃으며 말했다.“왜요, 할아버지 곁에 사람 한 명 있는 걸로는 모자라세요?”구동근의 표정이 잔뜩 어두워졌지만 오늘은 어찌 됐든 자신의 생일이었고 수많은 손님들이 온 자리에서 구승훈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하지만 강하리에게만큼은 오늘 밤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다.구승훈이 싸고돈다고 정말 막무가내로 굴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그는 한껏 가라앉은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봤다.“강하리 씨, 승훈이와 연진이 약혼 파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강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데 구승훈이 웃었다.“약혼하러 온 건 맞지만 그 상대가 문연진 씨는 아니죠.”연회장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랐고 강하리도 구승훈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구동근의 얼굴은 순식간에 추해졌다.“구승훈, 네가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아?”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슨 말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아요.”구동근은 살기가 번뜩이는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 씨, 내가 인정하는 손자며느리는 문연진 하나입니다.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강하리 씨?”모를 리가 있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은 구씨 가문에 들어올 자격이 없고, 들어올 가능성도 없다는 걸 알리는 것이다.강하리의 입꼬리가 팽팽하게 굳어지며 구승훈의 팔짱을 끼고 있
문연진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밤, 강하리보다 더 굴욕을 당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그녀는 화가 나서 이를 꽉 깨물었지만 너그러운 척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구승재는 옆에서 눈살을 찌푸렸다.‘할아버지 미친 거 아니야?’멀지 않은 곳에서 여초연은 이 장면을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그녀는 잠시 그곳에 머물다가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고 구승유가 여초연 옆에 바짝 따라붙었다.“큰엄마, 큰오빠 점점 더 버릇없어지는 거 봤어요? 할아버지한테 아무 때나 저렇게 말대꾸하잖아요!”여초연의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좋아하는 여자가 억울하게 당하지 않게 하는 게 정말 내 아들다운 행동이지.”구승유는 입을 삐죽거렸다.“하지만 난 저 강하리가 전혀 맘에 안 들어요. 얼굴만 예쁘지 연진 언니와 비교가 안 되잖아요. 집안도 없고, 배경도 없는데 어떻게 오빠를 만나요!”여초연의 발걸음이 멈칫하며 눈동자에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집안도 배경도 없는 게... 오히려 좋지.”...구승훈은 강하리를 연회장 밖으로 끌고 간 뒤 곧바로 그녀를 차에 태웠다.차에 탄 뒤에야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기분 안 좋아?”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구승훈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걸 봤다.난처한 상황이긴 해도 마음은 그렇게 불편하지 않았다.“예상했던 일 아니었나요?”구승훈이 웃었다.“그래, 강 대표님 참 너그럽네. 남자 친구가 다른 사람과 약혼할 뻔했는데도 조금도 속상해하지 않으시고.”강하리가 그를 바라보았다.“구승훈 씨, 다른 사람하고 약혼할 거예요?”구승훈은 웃으며 대답 대신 차에 시동을 걸었고 아파트 건물 아래에 주차하고 나서야 강하리를 끌고 차에서 내린 뒤 집 현관문 앞까지 그녀를 끌고 갔다.그가 속삭였다.“문 열어.”강하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슬쩍 바라보다가 결국 문을 열었다.문을 여는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침실부터 문까지 리시안셔스가 가득 깔려 있었다.강하리가 입술을 벙긋하며 뒤돌아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구승훈
강하리는 무아지경에 빠진 모양 약지에 낀 반지를 계속 바라보았다.이렇게 받아주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아직 두 사람 사이엔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았고 특히 오늘 밤 구씨 가문의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분명했다.그리고 송유라...하지만 구승훈이 몇 번이고 그녀의 의사를 물었을 때 그녀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수건을 두른 구승훈이 욕실에서 나오며 멍하니 반지를 바라보는 강하리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강하리에게 다가가 품에 끌어안으며 말했다.“마음에 들어?”강하리는 손가락에 살짝 부딪혀오는 구승훈의 잇새를 느끼며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근데 왜 표정이 어두워 보이지, 후회하는 거야?”강하리는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승훈 씨, 나 이번엔 정말 온 마음 다해 날 당신에게 준 거니까 또다시 나를 버리지 마요.”구승훈은 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고 입을 열었다.“하리야, 앞으로는 어떤 상황이 닥쳐도 널 두고 떠나지 않을 거야.”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구승훈이 고개를 숙여 입맞춤하는데 강하리가 그를 밀어냈다.“오늘 밤엔 하고 싶지 않아요.”“왜?” 구승훈이 그녀의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 “청혼 받아주고 바로 거부하는 거야?”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오늘 생리 때처럼 계속 속이 좀 더부룩한 느낌이 드는데 뚜렷하진 않아서요.”구승훈이 눈썹을 살짝 올리더니 큰 손을 그녀의 작은 배에 갖다 댔다.“아파?”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구승훈은 그녀를 바로 품에 안았다.“며칠 후에 한의사한테 가서 처방받는 게 좋겠어.” 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미소를 지었다.“그래요.”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졸음이 찾아왔고 구승훈은 여전히 그녀의 목뒤 쪽에 키스를 퍼부었다.그가 원한다는 걸 알았지만 오늘은 정말 그를 상대할 기운이 없었다.“그만해요, 나 졸려요.”구승훈이 대답했다.“그래, 넌 자. 내가 알아서 할게.”강하리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며칠 후에, 며칠 후에 내가 괜찮아
문원진은 할 말을 잃었고 구동근은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물론 이건 다 나중에 얘기하자고. 자네, 시간도 늦었는데 오늘은 이만 가서 쉬게나.”문원진은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문원진이 떠난 뒤 구동근은 별안간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을 집어 들어 깨뜨렸다.큰 소리가 나자 주위에 있던 가정부들은 감히 숨소리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겁에 질렸다.그는 지팡이를 꽉 움켜쥔 채 눈빛에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가서 그 자식을 다시 불러와!”구승재는 한동안 그 옆에서 침묵을 지켰다.“할아버지, 대체 강하리 씨 어디가 마음에 안 드세요?”“닥쳐! 구씨 가문 후계자가 아무 여자나 데려오면 되겠어? 넌 우리 구씨 가문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거야?”구승재는 입을 삐죽거리며 돌아서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이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강하리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그는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기를 슬쩍 보더니 들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형, 할아버지가 화를 내면서 빨리 오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마음껏 성질부리시라고 해. 내가 지금 돌아가서 뭘 해, 욕이나 들으라고? 아니면 매라도 맞을까? 나이도 있는데 조심하시라고 전해. 안 그러면 내일 아침밥도 못 드신다고.”“...”잠시 침묵하던 그가 물었다.“형, 강하리 씨한테 프러포즈했어?”구승훈이 짧게 답했다.“강하리 씨가 받아줬어?”구승훈은 리시안셔스가 가득 찬 방을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봤다.“그래, 받아줬어.”구승재는 순식간에 흥분하며 자신이 사랑에 빠져 결혼하는 것보다 더 기뻐했다.“그럼 일찍 쉬어, 방해하지 않을게.”구승재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고개를 돌리자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구동근이 어두운 얼굴로 구승재를 바라보고 있었다.“네 형이 정말 그년한테 청혼했어?”구승재는 입술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개자식!”구동근은 화를 내며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갔고 이때 여초연도 안에서 걸어 나왔다.“아버님,
구승훈의 몸이 살짝 굳어졌고 음식을 담던 강하리도 멈칫했다.가정부는 다정한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그녀의 시선이 강하리의 손가락으로 향하며 찡긋 윙크를 보냈다.강하리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구승훈에게서 벗어나 가정부의 손에서 그릇을 가져왔다.“아주머니, 갑자기 새콤달콤한 감자가 먹고 싶은데 가서 하나 만들어 주세요.”아주머니는 웃으며 대답했다.구승재와 통화하던 구승훈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송유라가 형이 연락이 안 된다며 지금 소란을 피우고 있어. 송동혁을 풀어주는 것 말고 다른 건 바라지 않는대.”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며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소란을 피우게 놔둬, 신경 쓰지 마.”그렇게 말한 뒤 그는 전화를 끊고 강하리에게 다가가 다시 한번 그녀를 품에 안았다.“아직도 배 아파?”“괜찮아요.” 강하리가 수저를 놓으며 대답했다.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방금 새콤달콤한 감자 먹고 싶다고? 예전에는 시고 매운 음식을 싫어하지 않았나?”강하리가 그를 바라보았다.“속에 열불이 나서 시고 매운 걸로 이겨내고 싶나 보죠.”구승훈은 그녀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깜짝 놀랐다.남자는 웃음을 터뜨렸고 낮은 웃음소리가 강하리의 마음을 간지럽혔다.강하리가 그를 밀쳐냈지만 그는 그녀를 더 꽉 안았다.“방금 내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들었잖아, 질투하지 마.”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구승훈 씨, 이제부터 송유라를 완전히 내버려둘 수는 없어요?”그녀는 유난히 진지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처음 하는 말도 아니고 지금은 옛날과 다르잖아요. 나한테 청혼했으면 우리 둘은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건데 결혼하고도 우리 사이에 송유라의 흔적이 가끔이라도 나타나는 건 조금도 원하지 않아요.”구승훈은 한참 동안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말했다.“알았어, 신경 안 쓸게.”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약속했어요. 만약에, 만약에...”“만약은 없어.
구승훈의 눈에서 어두운 기운이 번뜩였다.연미숙, 연미숙...구승훈은 문득 지난번 입찰회에서 들이부었던 뜨거운 물이 떠올랐다.진작 연미숙의 수상함을 눈치챘어야 했는데.구승훈의 얼굴이 한층 싸늘하게 굳어졌다.그가 차갑게 웃었다.“구승재한테 가서 문연진이 어떻게 지내는지 가서 보라고 해.”준봉은 바로 알아들었다.준봉이 나간 뒤 병동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정양철과 정주현이 문 앞에 서 있었다.“강하리 씨 보러 왔어요.”정주현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고 정양철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구승훈이 웃으며 말했다.“정 회장님께서 신경을 많이 써주시네요.”정양철이 웃었다.“그래도 제가 아끼는 후배라서요.”구승훈은 더 말이 없었고 방 안의 분위기는 묘하게 긴장감이 감돌았다.정주현은 얼굴을 찡그렸다.“왜 그래요?”정양철이 웃었다.“아무것도 아니야. 하리 양이 자고 있다니 우리도 여기 있을 필요가 없지.”그렇게 말한 뒤 정양철은 정주현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엘리베이터에 들어가기 직전, 그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추더니 뒤를 돌아 병동 입구에 서 있는 구승훈을 다시 바라보았다.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서 있는 그의 표정은 웃는 듯 마는 듯했다.오늘 억울한 누명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차갑고 무관심했다.정양철은 미간을 살짝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아버지? 요즘 왜 그러세요?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요?” 정주현이 불쑥 묻자 정신을 차린 정양철이 답했다.“대체 어딜 봐서 내가 걱정이 있어 보여?”정주현이 혀를 찼다.“걱정이 없어요? 요즘 자주 잠도 못 주무시고 발코니에서 담배 피우시는 거 봤어요.”정양철이 멈칫하다가 물었다.“주현아, 내가 회사를 네 손에 맡기면 잘 해낼 수 있겠어?”정주현은 얼굴을 찡그렸다. “아버지, 건강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죠?” 정양철은 그를 노려보며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러길 바라는 거냐?”정주현은 웃으며 피했지만 왠지 아버지가 어딘가 모르게 이상하게 느껴졌다.구승훈은
강하리는 잠시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했다가 고개를 돌렸다.그녀는 시선을 내리며 그 안에 담긴 상처와 아픔을 숨겼다.더는 이 남자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정말 정양철 짓이라면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한참을 침묵하던 그녀가 말했다. “구승훈, 도와줘.”강하리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구승훈은 애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그녀가 자신에게 의지하길 바랐는데 주해찬을 위해 부탁하는 그녀를 보니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그는 손을 뻗어 강하리를 끌어안았다.“하리야, 너를 위해서야, 주해찬을 위해서야?”“구승훈!”강하리는 붉어진 눈으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당신이 하기 싫다면 심 변호사님한테 부탁할 거야.”허리를 감싼 구승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내 앞에서 부탁해 놓고 또 다른 사람을 찾아간다고?”그렇게 말한 뒤 그는 다소 무기력한 한숨을 내쉬었다.“강하리, 넌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 내가 정말 너 혼자서 정양철과 맞서게 놔둘 것 같아?”강하리는 시선을 돌렸다.구승훈이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지만 자신이 원해서 그러길 바랐다.강하리도 다쳐서 이미 체력적으로 지쳐 있었고 상처를 입어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다.구승훈은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좀 쉬어.”“잠이 안 와.”강하리는 침대에 기대어 잠을 청했고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휴대전화에는 사고 당시의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주해찬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차에서 구조될 때 심장이 심하게 뛰었고 안 그래도 창백했던 얼굴은 한층 더 하얗게 변했다.구승훈은 다가가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낸 뒤 손가락으로 턱을 살살 문질렀다.“내가 다 알아낼 테니까 날 믿어.”강하리가 고개를 들어 쓴웃음을 터뜨렸다.“구승훈, 나 때문에 계속 이런 일이 생기는 것 같아.”구승훈의 심장이 저렸다.“강하리!”강하리가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나 좀 잘게.”말을 마친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구승훈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기만 했다.“내가 진짜 주해찬을 건드렸다면 어떻게 할래?”강하리가 그를 마주 보았다.“살인은 대가를 치러야 해. 구승훈 당신은 나한테 특별할 게 없어.”구승훈의 마음속이 온통 씁쓸함으로 물들었다.그는 쓴웃음을 내뱉었지만 그래도 말을 이어갔다.“아직 몰라. 의사가 그럴 수도 있다고 했어.”하지만 강하리의 마음은 다소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때 정서원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도 의사가 그렇게 말했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선배 좀 보고 올게.”구승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결국 막지 않았다.그녀를 보내주지 않으면 그녀가 계속 불안해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따라 나갔다.중환자실 밖에서 여전히 울고 있는 석미란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강하리의 몸이 굳어졌다.그녀는 손가락에 힘을 주고 저쪽으로 걸어갔다.다만 아직 중환자실 앞으로 가기도 전에 걸음이 뚝 멈췄다.정양철과 정주현이 거기 있을 줄이야.그녀가 정양철을 힐끗 쳐다보자 정양철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는 문득 정서원이 납치되었을 때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게 떠오르며 손가락을 말아쥐었다.정서원에게 일이 생겼을 때 정양철이 병원에 나타났다.그녀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는지 확인하러 온 듯이.구승훈은 강하리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정양철을 힐끗 쳐다보더니 큰 손으로 강하리의 뒤 허리를 살며시 그러잡았다.강하리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거두었다.정주현은 강하리를 보자마자 서둘러 이쪽으로 다가왔다.“강하리 씨, 좀 어때요?”강하리가 고개를 저었다.“난 괜찮아요.”말을 마친 그녀가 중환자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두꺼운 유리 벽 너머로 드디어 주해찬이 보였다.항상 온화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는 현재 침대에 누워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몸에 여러 개의 튜브를 삽입하고 누워 있었다.강하리의 마음이 아팠다.밀려오는 죄책감이 그녀를 익사시킬 것만 같았
강하리의 머릿속이 하얘졌다.“뭐라고요?”석미란은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해찬이가 식물인간이 됐다고, 이제 만족해?”강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손끝까지 떨리고 있었다.“가볼래요.”그녀는 이불을 걷어 올리고 밖으로 나가려고 일어났지만 구승훈이 그녀를 붙잡았다.“지금 가도 소용없어. 중환자실에 있어서 못 만나.”그때 석미란이 갑자기 강하리를 붙잡았다.“망할 년,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해찬이를 보러 가! 해찬이가 정말로 못 깨어나면 내가 네 목숨을 가져갈 거야!”석미란이 말하며 강하리의 목을 조르려고 달려들자 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잡고 내동댕이쳤다.“여사님, 말 가려서 하세요. 대체 누가 누구 때문에 힘들다는 겁니까? 지금 전부 하리 탓으로 돌리는데 만약 주해찬 때문에 하리가 피해를 본 거면 저도 하리 복수를 위해 중환자실로 가서 주해찬을 죽여도 됩니까?”석미란은 눈이 빨개진 채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주해찬이 깨어나지 못할 위험에 처해있는데 죽여버리겠다고?“구승훈, 이 살인자 새끼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 것 같아? 너랑 강하리, 너네 둘 다 살인자야! 내가 죗값 치르게 해줄 테니까 기다려. 망할 네년은 해찬이 목숨값 내놔!”석미란의 울부짖는 소리가 병동 전체에 울려 퍼졌고 준봉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여사님, 방금 경찰에서 그 차가 구 대표님 번호판을 덧씌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대표님은 누명을 쓴 겁니다.”석미란은 여전히 증오에 가득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구승훈이 진짜 아들을 죽인 범인이라는 듯이.“경찰을 매수하면 그만인 줄 알아? 구승훈, 내가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강하리는 준봉의 말을 듣고 순간 몸이 굳어졌다.구승훈은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준봉을 바라보았다.“여사님 나가시라고 해.”준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석미란을 막기 위해 앞으로 달려갔다.“여사님, 이만 나가 주세요.”석미란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주해찬의 아버지에게 제지당했다.주해찬을 닮은 외모에 겉과 속이 모두 반듯한
주해찬의 표정이 확 바뀌며 핸들을 꺾었지만 그래도 피할 수 없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보호했고 강하리의 시선은 다가오는 차에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구승훈의 차다.차 번호판도 똑같았다.구승훈이 B시에 올 때마다 몰던 차였다.순식간에 강하리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곧 눈앞이 핑글 돌았다....강하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좀 어때?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옆에 앉은 남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구승훈, 당신이야?”구승훈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고 의심을 받은 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하리야, 너 정말 나라고 의심하는 거야?”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바라보는 강하리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차는 분명 구승훈의 것이었다.하지만 구승훈이 아니라고 말할 때 오히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서늘한 구승훈의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이 물었다.“선배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네가 신경 쓰는 건 주해찬밖에 없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날 구해준 사람이야.”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구승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내가 널 구해준 적은 없어? 하리야, 너 정말 사람 마음 아프게 한다.”강하리는 그의 손에서 손을 빼냈다.지금은 그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주해찬이 그녀의 몸을 감쌌기에 그는 꽤 심하게 다쳤을 거다.처음부터 주해찬에겐 미안한 것투성이였다.오랜 시간 동안 그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면서도 그에게 해줄 대답이 없었다.게다가 구승훈의 차로 교통사고까지 났으니 마음속에는 죄책감이 커져만 갔다.“선배는 어떻게 됐어?”여전히 똑같은 말에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주해찬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목숨은 건졌지만 그가 깨어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지금 강하리의 태도로 볼 때, 주해찬이 자신을 구하려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정말 알 수 없
주해찬의 표정이 잠시 번뜩이다가 미소를 지으며 정양철에게로 향했다.“아저씨, 오랜만이네요.”정양철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가 이내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해찬아, 여긴 무슨 일이야?”주해찬이 미소를 지었다.“친구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여기서 아저씨랑 만났네요.”정양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그럼 가서 일 봐.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알았어요.”주해찬은 그 말을 하고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정양철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전화기를 꽉 쥐었다.한편 주해찬은 안에서 나오기 바쁘게 훅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멍한 표정으로 길가에 서 있었다.방금 정양철이 한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강하리나 구승훈과 무슨 일이 있는 걸까?손을 댔다고 했는데, 무슨 짓을 한 걸까.정주현에게 선을 긋던 강아리의 모습과 연관 짓자 주해찬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그는 다소 창백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가 샤워하러 가려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선배?”하지만 강하리가 전화를 받을 때 주해찬은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적어도 제대로 알아보고 강하리에게 알려줘야지 무턱대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었다.“아니야, 그냥 내일 나랑 같이 팔찌 가지러 가자고.”“선배, 나 혼자 갈 수 있어요.” 강하리가 여전히 거절하려는데 주해찬이 말을 막았다.“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오늘 밤엔 일찍 쉬어.”주해찬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다음 날 이른 아침, 준봉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강하리에게 아침을 가져다주었다.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 순간, 강하리 방 앞에 두 사람이 수상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그를 보자마자 뒤돌아 복도 쪽으로 달려갔고 준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그들을 쫓아갔다.일직 강하리가 묵고 있는 호텔 아래층에 도착한 주해찬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어젯밤 정양철의 그 말 때문에 거의 밤을 새
준봉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대표님께서 마실 것 가져다드리래요.”말을 마친 준봉은 강하리에게 밀크티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보고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문을 닫았다.주해찬은 방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안 가면 조금 있다가 또 올걸.”주해찬은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오늘 밤 모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해요, 선배.”구승훈이 이러면 주해찬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난처했다.주해찬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문득 어젯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던 모습이 떠올라 결국 포기했다.준봉은 강하리의 방에서 나오는 주해찬을 바라보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다음에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주해찬이 나오며 준봉을 보고 웃었다.“구 대표님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요. 하리가 원하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고 하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절대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요.”준봉은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안녕히 가세요, 주해찬 씨.”주해찬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속삭인 뒤 곧장 돌아섰다.주해찬이 떠난 뒤에야 준봉은 다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차는 경찰서를 향해 빠르게 달렸고 통화를 마친 그는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구승재를 바라보았다.“목란정원 쪽 상황은 어때요?”“우리 쪽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안에 연정이가 없었대.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갈 때 꼭 큰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조롭게 들어갔대.”시선을 내려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역시.”구승재가 얼굴을 찡그렸다.“역시 뭐?”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어젯밤에 그녀는 일부러 그를 그곳으로 유인한 거다.연정이 사건은 여초연이 한 짓이다.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뒤틀렸다.하지만 잠시 후 그는
정주현은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강하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강하리 씨 데려다줬어. 웬일로 아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연미숙이 잠시 멈칫했다.“이 자식, 누가 보면 내가 평소에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알겠다.”정주현은 연미숙 앞에서 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그래, 관심 많은 거 알겠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연미숙은 잠시 침묵했다.“강하리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해.”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았을걸. 그 말을 꺼내니 정주현은 더 우울해졌다.“엄마, 강하리 씨 바빠.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친구들이나 만나지 강하리는 왜?”연미숙이 웃었다.“우리 아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여자를 내가 좀 만나면 안 돼?”정주현이 입을 삐죽거렸다.“영감탱이가 엄마처럼 정신 차렸으면 강하리가 며느리 됐을 텐데.”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와.”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후, 그녀의 눈에는 악의에 찬 눈빛만이 번쩍였다.강하리는 정주현을 배웅하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주해찬은 그녀의 뒤에 서서 물었다. “일부러 주현 씨랑 거리를 두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선배,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봐요.”주해찬은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며 다소 무력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만약 이 순간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이 구승훈이었다면 그녀는 바로 말하지 않았을까?아니면 구승훈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질투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분명 그가 구승훈보다 먼저 강하리를 좋아했는데.“하리야, 가능하면 나도 네가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어.”강하리의 표정은 굳어졌고 말투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선배, 정말 고맙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