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동근이 나오자마자 그의 시선이 강하리에게 향했고 강하리는 한눈에 그의 눈빛에서 싫은 기색을 읽었다.강하리가 구동근과 제대로 된 만남을 가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구동근의 시선은 잠시 그녀에게 머물렀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강하리는 눈을 내리며 피식 웃었다.“할아버지께서 나를 정말 싫어하시는 것 같네요.”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만 좋아하면 돼.”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연회장의 분위기는 더욱 미묘해졌다.문연진은 낮고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승훈 오빠.”구승훈이 그녀를 못 본 척 강하리를 옆으로 끌어당기자 구동근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구승훈, 너 이리 와!”구승훈은 웃으며 말했다.“왜요, 할아버지 곁에 사람 한 명 있는 걸로는 모자라세요?”구동근의 표정이 잔뜩 어두워졌지만 오늘은 어찌 됐든 자신의 생일이었고 수많은 손님들이 온 자리에서 구승훈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하지만 강하리에게만큼은 오늘 밤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다.구승훈이 싸고돈다고 정말 막무가내로 굴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그는 한껏 가라앉은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봤다.“강하리 씨, 승훈이와 연진이 약혼 파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강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데 구승훈이 웃었다.“약혼하러 온 건 맞지만 그 상대가 문연진 씨는 아니죠.”연회장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랐고 강하리도 구승훈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구동근의 얼굴은 순식간에 추해졌다.“구승훈, 네가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아?”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슨 말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아요.”구동근은 살기가 번뜩이는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 씨, 내가 인정하는 손자며느리는 문연진 하나입니다.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강하리 씨?”모를 리가 있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은 구씨 가문에 들어올 자격이 없고, 들어올 가능성도 없다는 걸 알리는 것이다.강하리의 입꼬리가 팽팽하게 굳어지며 구승훈의 팔짱을 끼고 있
문연진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밤, 강하리보다 더 굴욕을 당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그녀는 화가 나서 이를 꽉 깨물었지만 너그러운 척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구승재는 옆에서 눈살을 찌푸렸다.‘할아버지 미친 거 아니야?’멀지 않은 곳에서 여초연은 이 장면을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그녀는 잠시 그곳에 머물다가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고 구승유가 여초연 옆에 바짝 따라붙었다.“큰엄마, 큰오빠 점점 더 버릇없어지는 거 봤어요? 할아버지한테 아무 때나 저렇게 말대꾸하잖아요!”여초연의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좋아하는 여자가 억울하게 당하지 않게 하는 게 정말 내 아들다운 행동이지.”구승유는 입을 삐죽거렸다.“하지만 난 저 강하리가 전혀 맘에 안 들어요. 얼굴만 예쁘지 연진 언니와 비교가 안 되잖아요. 집안도 없고, 배경도 없는데 어떻게 오빠를 만나요!”여초연의 발걸음이 멈칫하며 눈동자에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집안도 배경도 없는 게... 오히려 좋지.”...구승훈은 강하리를 연회장 밖으로 끌고 간 뒤 곧바로 그녀를 차에 태웠다.차에 탄 뒤에야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기분 안 좋아?”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구승훈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걸 봤다.난처한 상황이긴 해도 마음은 그렇게 불편하지 않았다.“예상했던 일 아니었나요?”구승훈이 웃었다.“그래, 강 대표님 참 너그럽네. 남자 친구가 다른 사람과 약혼할 뻔했는데도 조금도 속상해하지 않으시고.”강하리가 그를 바라보았다.“구승훈 씨, 다른 사람하고 약혼할 거예요?”구승훈은 웃으며 대답 대신 차에 시동을 걸었고 아파트 건물 아래에 주차하고 나서야 강하리를 끌고 차에서 내린 뒤 집 현관문 앞까지 그녀를 끌고 갔다.그가 속삭였다.“문 열어.”강하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슬쩍 바라보다가 결국 문을 열었다.문을 여는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침실부터 문까지 리시안셔스가 가득 깔려 있었다.강하리가 입술을 벙긋하며 뒤돌아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구승훈
강하리는 무아지경에 빠진 모양 약지에 낀 반지를 계속 바라보았다.이렇게 받아주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아직 두 사람 사이엔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았고 특히 오늘 밤 구씨 가문의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분명했다.그리고 송유라...하지만 구승훈이 몇 번이고 그녀의 의사를 물었을 때 그녀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수건을 두른 구승훈이 욕실에서 나오며 멍하니 반지를 바라보는 강하리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강하리에게 다가가 품에 끌어안으며 말했다.“마음에 들어?”강하리는 손가락에 살짝 부딪혀오는 구승훈의 잇새를 느끼며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근데 왜 표정이 어두워 보이지, 후회하는 거야?”강하리는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승훈 씨, 나 이번엔 정말 온 마음 다해 날 당신에게 준 거니까 또다시 나를 버리지 마요.”구승훈은 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고 입을 열었다.“하리야, 앞으로는 어떤 상황이 닥쳐도 널 두고 떠나지 않을 거야.”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구승훈이 고개를 숙여 입맞춤하는데 강하리가 그를 밀어냈다.“오늘 밤엔 하고 싶지 않아요.”“왜?” 구승훈이 그녀의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 “청혼 받아주고 바로 거부하는 거야?”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오늘 생리 때처럼 계속 속이 좀 더부룩한 느낌이 드는데 뚜렷하진 않아서요.”구승훈이 눈썹을 살짝 올리더니 큰 손을 그녀의 작은 배에 갖다 댔다.“아파?”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구승훈은 그녀를 바로 품에 안았다.“며칠 후에 한의사한테 가서 처방받는 게 좋겠어.” 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미소를 지었다.“그래요.”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졸음이 찾아왔고 구승훈은 여전히 그녀의 목뒤 쪽에 키스를 퍼부었다.그가 원한다는 걸 알았지만 오늘은 정말 그를 상대할 기운이 없었다.“그만해요, 나 졸려요.”구승훈이 대답했다.“그래, 넌 자. 내가 알아서 할게.”강하리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며칠 후에, 며칠 후에 내가 괜찮아
문원진은 할 말을 잃었고 구동근은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물론 이건 다 나중에 얘기하자고. 자네, 시간도 늦었는데 오늘은 이만 가서 쉬게나.”문원진은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문원진이 떠난 뒤 구동근은 별안간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을 집어 들어 깨뜨렸다.큰 소리가 나자 주위에 있던 가정부들은 감히 숨소리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겁에 질렸다.그는 지팡이를 꽉 움켜쥔 채 눈빛에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가서 그 자식을 다시 불러와!”구승재는 한동안 그 옆에서 침묵을 지켰다.“할아버지, 대체 강하리 씨 어디가 마음에 안 드세요?”“닥쳐! 구씨 가문 후계자가 아무 여자나 데려오면 되겠어? 넌 우리 구씨 가문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거야?”구승재는 입을 삐죽거리며 돌아서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이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강하리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그는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기를 슬쩍 보더니 들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형, 할아버지가 화를 내면서 빨리 오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마음껏 성질부리시라고 해. 내가 지금 돌아가서 뭘 해, 욕이나 들으라고? 아니면 매라도 맞을까? 나이도 있는데 조심하시라고 전해. 안 그러면 내일 아침밥도 못 드신다고.”“...”잠시 침묵하던 그가 물었다.“형, 강하리 씨한테 프러포즈했어?”구승훈이 짧게 답했다.“강하리 씨가 받아줬어?”구승훈은 리시안셔스가 가득 찬 방을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봤다.“그래, 받아줬어.”구승재는 순식간에 흥분하며 자신이 사랑에 빠져 결혼하는 것보다 더 기뻐했다.“그럼 일찍 쉬어, 방해하지 않을게.”구승재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고개를 돌리자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구동근이 어두운 얼굴로 구승재를 바라보고 있었다.“네 형이 정말 그년한테 청혼했어?”구승재는 입술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개자식!”구동근은 화를 내며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갔고 이때 여초연도 안에서 걸어 나왔다.“아버님,
구승훈의 몸이 살짝 굳어졌고 음식을 담던 강하리도 멈칫했다.가정부는 다정한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그녀의 시선이 강하리의 손가락으로 향하며 찡긋 윙크를 보냈다.강하리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구승훈에게서 벗어나 가정부의 손에서 그릇을 가져왔다.“아주머니, 갑자기 새콤달콤한 감자가 먹고 싶은데 가서 하나 만들어 주세요.”아주머니는 웃으며 대답했다.구승재와 통화하던 구승훈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송유라가 형이 연락이 안 된다며 지금 소란을 피우고 있어. 송동혁을 풀어주는 것 말고 다른 건 바라지 않는대.”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며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소란을 피우게 놔둬, 신경 쓰지 마.”그렇게 말한 뒤 그는 전화를 끊고 강하리에게 다가가 다시 한번 그녀를 품에 안았다.“아직도 배 아파?”“괜찮아요.” 강하리가 수저를 놓으며 대답했다.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방금 새콤달콤한 감자 먹고 싶다고? 예전에는 시고 매운 음식을 싫어하지 않았나?”강하리가 그를 바라보았다.“속에 열불이 나서 시고 매운 걸로 이겨내고 싶나 보죠.”구승훈은 그녀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깜짝 놀랐다.남자는 웃음을 터뜨렸고 낮은 웃음소리가 강하리의 마음을 간지럽혔다.강하리가 그를 밀쳐냈지만 그는 그녀를 더 꽉 안았다.“방금 내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들었잖아, 질투하지 마.”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구승훈 씨, 이제부터 송유라를 완전히 내버려둘 수는 없어요?”그녀는 유난히 진지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처음 하는 말도 아니고 지금은 옛날과 다르잖아요. 나한테 청혼했으면 우리 둘은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건데 결혼하고도 우리 사이에 송유라의 흔적이 가끔이라도 나타나는 건 조금도 원하지 않아요.”구승훈은 한참 동안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말했다.“알았어, 신경 안 쓸게.”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약속했어요. 만약에, 만약에...”“만약은 없어.
“내가 이 팔찌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구승훈은 강하리가 다시 만나보자고 했을 때도, 강하리가 자신의 프러포즈를 받아줬을 때도 마음 한구석에 풀리지 않는 매듭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것은 그 아이와 그들의 과거에 대한 것이었다.그녀가 예전처럼 자신을 대해주기를 감히 원하지도 못했고 그저 자신의 마음을 기꺼이 받아주기를 바랐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마침내 그녀도 자신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서려는 것을 느꼈다.그의 말을 들으며 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고개를 들어 그의 턱을 깨물었다.“잘하고 다녀요. 누가 물어보면 약혼녀가 준 거라고 말하는 거 잊지 말고!”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몸을 뒤집어 그녀를 덮쳤다.“어떡하지? 출근하기 싫어. 너랑...”강하리는 얼굴을 붉히며 그의 입을 막았다.“가서 출근해요!”말을 마친 그녀는 그를 밀어내고 웃으며 입원 병동으로 걸어갔다.구승훈은 웃음을 머금은 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구승훈이 떠난 후 주차장에 있는 다른 차 안에서 정양철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그의 눈동자에 어두운 빛이 번쩍이더니 휴대전화를 들고 구동근에게 전화를 걸었다.“구동근 씨, 같이 차 한잔할까요? 네, 제가 그리로 가죠.”강하리가 위층으로 올라가자 간병인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리 씨, 방금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와서 어머니를 뵙고 싶다고 했어요. 하리 씨한테 전화하려고 했는데 나중에 그럴 필요 없다고 해서 안 했어요.”“정 씨요? 나이는요?”“오십대로 보였어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잠시 굳어지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어요.”정양철을 못 본 지도 오래되었다. 처음에 그에게 가졌던 의구심은 순조롭게 퇴사하면서 사라졌다.그런데 오늘 그가 여기로 왔을 줄이야.“다른 말은 없었나요?”간병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전에 어머니를 뵈러 오려고 했는데 어머니께 일이 생겼다고, 오늘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다가 한 번 보러 왔다는 말만 하셨어요.”강하리는 조용히
강하리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서둘러 대답했다.“그래요, 그럼 언제 떠나요? 짐 싸줄게요.”구승훈이 웃었다.“아니야, 바로 갈 거야. 앞으로 이틀 동안 조심하고 외출할 땐 노진우와 동행하면서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강하리가 짧게 답했다.“이번엔 얼마나 걸려요?”“사흘이.”구승훈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내가 돌아오면 혼인신고 하러 가자?”강하리는 깜짝 놀랐고 구승훈은 웃으며 말했다.“하리야, 나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그렇게 말한 뒤 그는 전화를 끊었다.강하리는 전화기를 바라보다가 무의식적으로 입꼬리가 올라갔다.어느새 그녀의 곁에 도착한 손연지가 전화를 끊는 것을 보고는 어깨에 팔을 둘렀다.“또 너희 집 개자식이랑 통화해?”강하리가 웃었다.“언제 왔어?”손연지는 입을 삐죽거렸다.“노민우가 날 끌고 와서 자기네 병원 시설 보러 오래. 보기는 무슨, 시설이 아무리 좋으면 뭐 해, 소 교수님이 있는 것도 아닌데!”강하리가 혀를 찼다.“소 교수님에 대해서는 좀 알아봤어?”손연지는 어깨를 으쓱했다.“뭘 알아봐? 넌 구승훈이랑 만나기 전에 미리 알아봤어?”강하리는 다소 말문이 막혀 바로 화제를 바꿨다.“연수는 언제 가?”“이번 달 말.”“그럼 너랑 소 교수님은...”손연지가 찡긋 윙크를 보냈다.“오늘 저녁에 소 교수님 만나기로 했으니까 저녁 먹고 나서 아마...”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민우가 옆으로 걸어왔다.“소영준이랑 밥 먹는다고?”그를 보자마자 손연지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왜, 안돼?”노민우가 피식 웃었다.“소영준 평소에 나이트클럽 자주 가는 거 알고 있어?”손연지는 조롱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자기는 안 가는 것처럼 말하네.”노민우는 순식간에 할 말을 잃었다.“이젠 그렇게 안 가.”“개는 똥을 못 끊지.”손연지가 그를 흘겨보며 강하리를 자기 차에 태웠다.“가자, 내가 데려다줄게.”노민우는 몇 발짝 뒤에서 따라왔다.“소영준이랑 어디서 밥 먹는데?”“네가
강하리는 짧게 대답하며 나지막이 몇 마디를 덧붙인 뒤 전화를 끊었다.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문을 두드리며 들어온 구승재의 표정이 다소 어둡자 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비행기표 예약했어?”구승재가 짧게 대답한 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다시 말을 꺼냈다.“형, 이거 송유라가 보낸 거야.”구승훈의 눈썹이 사납게 찡그려졌다.“뭔데?”구승재가 물건을 건넸고 그걸 받은 구승재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분홍색 크리스털 목걸이였다.뒷면에 자신의 이니셜이 새겨진 분홍색 리시안셔스.구승재가 나지막이 말했다.“그렇게 매정하게 굴 거면 다시는 자기 죽든 말든 신경 쓰지 말래. 방금 그쪽 간병인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손목을 또 그었다고 하더라.”그 말을 듣는 구승훈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고 구승재도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형, 어차피 강하리 씨랑 결혼할 거면 송유라 쪽은 빨리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안 그러면 일 터지는 건 시간 문제야. 송유라가 툭하면 난동을 부리는데 강하리 씨가 아무리 신경 안 쓴다고 해도 기분 안 좋을 거야.”구승훈은 미간을 꾹 누르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했다.“이제 처리할 때도 됐지. 일단 Y국으로 가자.”번뜩 꿈에서 깨어난 강하리가 눈을 떴을 땐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가정부는 서둘러 그녀를 품에 안고 살며시 토닥였다.“하리 씨, 악몽 꿨어요? 꿈꾸면서 계속 울고 있었어요.”강하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뒤 멍한 표정으로 가정부를 바라보다가 방금 꾼 꿈에서 조금 벗어났다.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꾼 건 꽤 오랜만인데 오늘 그 꿈이 다시 찾아왔다.절망과 질식이 그녀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물 마시고 숨 좀 돌려요.” 가정부가 물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지금 몇 시죠?”“벌써 9시 넘었어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내가 만들어 줄게요.”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구승훈이 이미 비행기에서 내렸을 거라고 생각하며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
강하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후에야 구승훈은 다시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하지만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익살스러운 미소가 남아 있지 않았다.“여진 쪽은 어떻게 됐어?”그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준봉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출시일이 확정됐습니다. 에비뉴보다 하루 빠릅니다.”구승훈은 손에 불경스러운 듯 염주를 굴리며 냉소를 지었다.“승재와 천아름 쪽에 협조 잘하라고 전해.”“네.”준봉이 재빨리 대답했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대표님, 사실 이 일은 사모님께도 일부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구승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조용히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준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은 항상 그랬다. 강하리를 도와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다.‘정말 답답해.’여진 주얼리는 지난 몇 년간 에비뉴와 계속해서 대립해 왔다.겉보기에는 구씨 가문이나 강하리와 아무 관련 없는 작은 회사처럼 보이지만 이런 작은 회사들이 대형 브랜드의 모조품을 내놓는 건 흔한 일이었다.하지만 여진 주얼리는 단순한 모조품에 만족하지 않았다.작년에 해외에서 에비뉴 주얼리의 표절 사건이 터졌을 때 그 배후에는 여진 주얼리가 있었다.그 사건으로 여진 주얼리는 큰 이득을 봤고 에비뉴는 큰 타격을 입었다.그 후 여진 주얼리는 더욱 탐욕스러워졌다.사람이란 달콤한 맛을 보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마련이다.여진 주얼리는 에비뉴에게 항상 위험 요소였다.구승훈은 에비뉴를 강하리에게 넘긴 이상 그녀에게 어떤 위험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대표님, 상대방의 배후 세력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대놓고 에비뉴를 도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구승훈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뭐? 지금 내가 잃을 게 뭐가 있다고?”준봉은 놀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강하리가 때린 따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고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강렬했다.그러자 구승훈의 뺨에는 순식간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천아름은 그대로 얼어붙었지만 이내 강하리를 향해 천천히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잘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맞아야 해. 제대로 한 대쯤은 맞아 봐야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알지. 이제라도 자기 잘못을 좀 깨달아야 해.’천아름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통쾌해했다.한편 구승훈은 손등으로 뺨을 한 번 스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강하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눈엔 고통이 어리어 있었다.“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면...” 그는 목울대를 두 번 삼킨 뒤에야 겨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나를 봐서... 토한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지만 더는 이 남자 앞에서 눈물 흘리고 싶지 않아 애써 참고 있었다.“다신 제 앞에 나타나지 마요.” 강하리의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구승훈의 눈에는 오히려 그 말이 묘하게 따뜻하게 비쳤다.지금 이 순간 그는 마음속에... 이상하게도 만족감이 들었다.‘적어도 하리 마음속에 아직 내가 있긴 한 거잖아. 미움이든 혐오든... 감정이 있는 한 아직 끝은 아니겠지.’그는 수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강하리의 입가를 닦아주었고 긴 손가락이 그녀의 입가를 스치고는 가볍게 떠났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인 채 쓸쓸하게 웃었다.“불쾌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하리야, 미안하지만 다신 안 나타날 수는 없을 거 같아. 난 그건 못 해.”그 말과 함께 그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천천히 화장실을 나갔다.순간, 화장실 안은 적막 속에 잠겼다.강하리는 다시금 구역질했고 천아름은 재빨리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밖에서 구승훈은 그녀의 헛구역질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얼마 후, 급히 달려온 준봉의 목소리에 그가 정신을 차렸다.“대표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
두 채의 30층이 넘는 오피스 빌딩 사이에는 다섯 층마다 하나씩 연결하는 공중 회랑이 있었다.회랑 위에는 각종 카페와 음식점이 입점해 있었고 그 주변에는 다양한 꽃들이 화사하게 장식되어 있었다.강하리는 사실 정안 타워에 자주 오지는 않았다.심지어 구승훈과 결혼을 앞두고 있던 그 시절에도 여기에는 발걸음을 거의 하지 않았다.솔직히 말해서 그녀보다 임희주가 더 자주 왔을지도 몰랐다.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그녀는 입꼬리를 삐죽이며 말했다.“구승훈이야 뭐 인간쓰레기지만 그래도 통 큰 건 인정해야겠네. 이렇게 큰 회사를 그냥 덜컥 넘겨주다니. 에비뉴 주얼리잖아? 보석 업계에선 꽤 이름 있는 브랜드인데. 이렇게 보면... 그 인간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네. 그렇지?”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과 한 달 남짓한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구승훈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서 너무도 멀어진 것만 같았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오늘은 꼭 광고 모델 확정해야 해. 원래 계약하려던 사람이 며칠 전에 갑자기 마음을 바꿨어. 이유 알아봤어?”그러자 천아름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이유야 뻔하지. 뺏긴 거지 뭐. 거의 계약 직전까지 갔는데... 갑자기 말을 바꾸더라.”“누가 뺏어갔는데?”강하리가 조용히 물었다.천아름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며칠 만에 마주친 구승훈이었다. 깔끔한 수트를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해지는 그 특유의 냉기가 몸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강하리는 구승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구승훈 역시 이 순간에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던지 평소 차가운 눈빛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그의 시선은 곧장 강하리에게 꽂혀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녀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얼굴빛은 생각보다 좋았다.홍조가 돌아 있었고 얼굴도 약간 도톰해진 듯했다.그는 기뻐해
항구에서 보경시로 돌아오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누군가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어떻게 됐어?”그 말에 노진우는 고개도 들지 않고 리모컨부터 눌렀다. 그러자 벽에 걸려있던 TV가 켜지더니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화면 속에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여초천이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의 가구를 부수며 바닥에서 뒹굴기 시작하더니 그럼에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는 벽에 머리를 쾅쾅 들이박았다.여초연의 이마는 이미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그 모습을 본 구승훈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됐어. 그만해.”노진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이렇게 끝내시겠다고요? 대표님께서 발작 났을 땐 이것보다 훨씬 심했어요. 제가 만든 약은 효과가 얼마 못 가거든요. 급하게 만든 거니까요. 하지만 대표님은 온 하루 동안 고통스러워하셨잖아요.”“게다가 대표님은 이 약 때문에 하리 씨 곁을 떠나야 했잖아요. 하리 씨가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다 이 약 때문인데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졌다고요?”구승훈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담배를 꺼내 거기에 불을 붙였다.“마음이 약해진 게 아니야. 저런 꼴을 보고 있으니까 그냥... 그때 내 모습이 떠올라서...”“생각할 때마다 너무 후회돼. 하리를 혼자 예식장에 두고 떠났던 거 말이야. 내가 어떻게 잡았는데 또다시 놓쳐버리다니...”“그런데 또 여초연이 저러고 있는 걸 보니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 내가 하리를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하리가 내 저런 모습을 봐야 했을 수도 있잖아.”노진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실 제 책임도 좀 있어요. 제 대학 동기인 데다가 능력도 괜찮아 보여서 추천했었는데 배경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으니까요.”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다.“임희주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되었을 거야. 여초연이 날 가만 내버려뒀을 리 없으니까.”노진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하리 씨 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