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Chapter 281 - Chapter 290

303 Chapters

제281화

성유리는 태연한 표정의 성시원을 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아, 설마 이거, 아버지랑 박 대표가 짜고 벌인 일이에요?”“당연히 아니지.”성시원이 미간을 심각하게 찌푸리더니 계속해서 말했다.“유리야, 너도 입사한 지 꽤 됐잖아. 회사의 이익은 네 개인적인 이익보다 우선순위에 둬야 한다는 거, 잘 알지 않니?”성유리는 아무 대답 없이 그저 이를 꽉 물었다.성시원은 곧이어 다른 사람을 안으로 불러들였다.그 사람은 성유리도 아는 사람이었다.바로 연성 지사의 대표로 근무 중인 고명도였다.이미 연성 지사에서 인맥과 기반을 다진 고명도가 본사로 발령받았다는 것은 사실상 고명도에게 불리한 일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회사에 잘 적응해나갔다. 이번 프로젝트 역시 지화 그룹에서 직접 그를 지명해 담당하도록 한 것이었다.“오랜만이네, 성 대표.”고명도는 웃는 얼굴로 성유리의 앞까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의 악수를 무시한 채 차가운 표정으로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이번 주에 시간 되면 회사로 나와. 인수인계해야 하니까.”성시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성유리의 발걸음이 잠시 멈칫했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떴다.회사 밖으로 나온 후에야 성유리의 곧게 펴져 있던 등이 조금씩 구부러지기 시작했다.그녀는 주차된 차를 바라보았다.익숙한 차종에 익숙한 번호판이었다.성유리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차가 주차된 쪽으로 걸어갔다.차창은 꽉 닫혀 있었고 짙게 선팅 된 창문 덕에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차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곧장 차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차 뒷좌석에는 박한빈이 앉아 있었다.그는 예전과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여전히 단정한 셔츠를 입고 있었고 걷어 올려진 소매 밑으로는 검은색과 금색의 조화가 잘 어울리는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태블릿에 집중하고 있던 그는 갑자기 차에 올라탄 성유리에도 전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성유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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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2화

박한빈의 목소리는 진지했지만 성유리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그 안에는 오직... 차갑고 음산한 기운만이 넘쳤다.마치 맹수가 사냥감을 노리듯 높은 위치에 있는 자가 자신의 아랫것을 멸시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그 차가운 눈빛에 성유리의 몸이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렸다.대체 성유리의 앞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가면을 쓰고 있던 걸까!성유리는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그는 순한 개가 아니라 피에 굶주린 늑대였다.하지만 성유리는 곧장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박한빈 씨, 지화 그룹의 대표라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감정에 휘둘려서 결정을 번복하다니.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고려 안 해보셨나 봐요?”“괜찮아. 어차피 지금 우리 회사에서 날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박한빈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그리고 인주 프로젝트 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너한테 맡기는 건 너무 위험해. 회사 임원들을 설득할 이유도 충분하고.”성유리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져 있던 두 손에 천천히 힘이 들어가 주먹이 쥐어졌다.“그리고요?”마침내 그녀는 자신의 평온한 목소리를 되찾고 물었다.“이 명령 하나로 제가 연정우랑 결혼하는 걸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미리 말해두지만, 절대 불가능해요. 지금 당장 정우 씨랑 결혼할 테니까!”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도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더니 갑자기 몸을 성유리 쪽으로 기울였다.급격히 가까워지는 거리에 좁은 차 안에 있던 성유리는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박한빈을 밀어내려 했다.하지만 그녀의 손목은 이내 박한빈에게 잡혔다.“괜찮아, 결혼할 거면 해. 하지만, 내가 했던 말은 잊지 마. 이제 시작이니까. 다 감당할 수 있다면 그 결혼, 어디 한번 해 봐.”그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도 차갑기 그지없었다.하지만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던 박한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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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3화

“알겠습니다.”답변을 들은 박한빈은 전화를 끊고 창밖을 바라보았다.차창에는 이미 한쪽 뺨이 빨갛게 달아오른 자신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그는 손을 들어 뺨을 한 번 쓸었다.조금 아프긴 했지만 이미 더 아픈 일도 겪었던 터라 이 정도 작은 상처쯤은 박한빈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자신의 뺨에 찍힌 성유리의 손자국을 보며 오히려 씨익 미소를 지었다....지화 그룹과 성리 그룹은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두 그룹은 고명도에게 인주 프로젝트를 맡기기로 결정했고 이 사실은 곧이어 회사 직원들에게 알려졌다.이 소식이 회사에 퍼지자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비록 성유리가 아직 연성 지사의 대표이긴 했지만 고명도가 연성으로 돌아온다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옛 부하직원들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유리는 사실상 완전히 혼자가 되어버린다.성유리 역시 자신이 따낸 성과를 이런 식으로 쉽게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성유리를 곤란하게 만들겠다는 결심을 굳힌 박한빈은 성시원의 말대로 그는 갑의 입장에서 인주 프로젝트 같은 큰 프로젝트의 담당자만 교체하자는 제안을 했을 뿐이었다. 을의 입장이었던 성리 그룹은 지화 그룹의 의견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결국, 성유리가 특정 데이터까지 정확히 말할 수 있을 만큼 수십 번씩이나 검토했던 파일들은 고스란히 고명도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고명도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니까 성 대표, 사업을 하려면 땅을 딛고 착실히 나아가야 하는 법이야. 지름길이 좋기는 해도 잘못 딛는 순간 되돌릴 수 없게 되거든. 결국, 이렇게 남 좋은 이란 시키잖아. 웃기지 않니?”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서 모든 상황을 다 지켜보던 정민재가 분노에 가득 찬 채 이를 꽉 깨물었다. 그는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손을 꼭 붙잡은 성유리 탓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대표님, 죄송하지만 그 말은 틀린 것 같습니다. 어찌 됐든 지금 인주 프로젝트는 여전히 성리 그룹의 몫이니까요. 그러니까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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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4화

성유리의 불길한 예감은 곧 현실이 되었다.프로젝트가 고명도에게 넘어간 지 이틀째 되던 날, 지화 측에서는 다시 작업을 재개하겠다는 통보가 왔다.성유리의 업무는 이미 고명도에게 넘겨졌지만 어찌 됐든 그녀는 지사의 대표로서 일부 절차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거쳐야만 했다.또 이틀이 지나자 고명도는 아직 인수인계가 명확하지 않다며 성유리는 요즘 결혼 준비로 바쁠 테니 그녀의 곁에서 함께 일을 하던 정민재를 자신의 팀으로 데려가겠다는 제안도 했다.그리고 성유리는 이에 대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어차피 이 프로젝트는 개인 프로젝트가 아닌 회사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였고 만일 문제가 생긴다면 그녀 역시 책임을 떠안아야 했기 때문이다.정민재는 빠르게 고명도의 팀으로 배정되었다.일주일이 지나 어느덧 성유리와 연정우의 결혼식이 이틀 정도 남았을 때였다. 성유리는 한밤중에 누군가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큰일 났어요, 대표님! 고 대표님께서 연락이 안 됩니다!”비몽사몽 하던 성유리는 다급한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지만 머릿속은 아직도 혼란스러웠다.“무슨 일이에요?”“고 대표님께서 사라지셨어요. 집에도 찾아가 봤는데, 가족분들 역시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합니다. 게다가 회사 계좌의 100억도 함께 사라졌고요!”완전히 잠에서 깬 성유리가 물었다.“무슨 소리예요? 고 대표님이 공금을 들고 도망쳤다는 말인가요?”“현재로서는... 그렇게 봐야 할 것 같습니다.”“신고는 했어요?”“아직 안 했는데요. 확신이 없어서...”“확신이 있든 없든, 지금 담당자도 사라지고 돈도 사라진 상태니 바로 신고부터 하세요! 그리고 당장 회사 재무팀한테 연락 넣어서 자산이랑 부채 정산 신청하시고요!”성유리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말했다.전화를 끊은 그녀는 곧장 침대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그녀는 최근 계속 금성에 머물며 본가로는 돌아가지 않고 호텔에만 머물러왔다. 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본가로 들어가야만 했다.본가로 와보니 성시원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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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5화

그러니 예전부터 성시원은 항상 성유리의 앞에서 명령을 내리는 쪽이었다.그는 성유리와 굳이 협상할 필요가 없었고, 성유리의 반항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그러나 지금, 그는 마치 길을 잃어버린 아이라도 된 듯 성유리에게 어떻게 해야 하냐며 묻고 있었다.눈을 질끈 감은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지금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말을 내뱉고 나자 그녀는 뒤늦게 자신의 표현이 적절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다시 말을 이었다.“누가 알고 있든 간에 반드시 모든 정보를 차단해야만 해요. 안 그러면 내일 주식 시장이 열리자마자 성리 그룹은 끝장이니까요!”성시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고 대표님 가족들은요? 아직 여기 있을 텐데요. 당장 연락해서 고 대표님이 그 사람들이랑 접촉했다고 하면 바로 경찰에 알리셔야 해요! 듣고 계시죠?”성유리의 마지막 말에 성시원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성유리는 더 이상 성시원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려 집을 나서려 했다. 등 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이상하게 생각한 성유리가 뒤를 돌아보자 성시원의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성시원은 의자에 기댄 채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성유리는 여러 주요 매체들에게 연락해 성리 그룹의 내부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았다.하지만 인터넷이 고도로 발달한 지금, 막아야 하는 것은 뉴스 매체들뿐만이 아니라 회사 내부의 다양한 “폭로자”들도 막아야 했다.아침 8시, 성유리는 성시원의 병상 옆에 앉아 정민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갑자기 성리 그룹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는 소식을 알렸다.폭로자는 익명의 작은 계정이었는데 그 계정은 성리 그룹의 빌딩 내부가 이미 텅 비어버렸고 성시원은 뇌졸중으로 입원 중이라는 사실까지 자세히 폭로했다.이 소식이 퍼지자 인터넷은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주식 시장이 열린 지 한 시간도 안 되어 성리 그룹의 주가는 하한가로 떨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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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6화

한참이나 연정우를 바라보던 성유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그냥 이렇게 곁에... 곁에 있어 주기만 하면 돼.”그녀의 말이 끝나자 연정우는 손을 뻗어 성유리를 품에 안았다.별로 강하지 않은 힘으로 끌어안은 연정우의 은은한 향기가 성유리의 코끝을 살살 간지럽혔다.성유리 역시 아무런 거부감 없이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감쌌다.“아버님 상태는 어때?”연정우가 물었다.“급성 뇌경색이래. 그래도 다행히 응급 처치가 빨라서, 의사 선생님 말로는 의식 회복만 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거래.”“그럼… 유리 씨도 이제 들어가서 좀 쉬지 그래? 여긴 내가 보고 있을게.”“괜찮아. 어차피 집에 가도 잠이 안 올 것 같아. 내 휴대폰 계속 울리는 거 안 들려?”연정우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그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아는 성유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결혼식까지 연기할 필요는 없어. 외할아버지께서 오랫동안 기다려 오셨잖아. 실망 시켜드리면 안 되지.”“하지만...”“걱정하지 마. 하루 정도는 시간 낼 수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 성리 그룹이 이런 상황인데 결혼식을 연기하려고 한다면, 사람들은 정우 씨가 날 두고 도망가려고 한다고 생각할 거야.”성유리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연정우를 바라보며 말했다.“설마 정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그럴 리는 없어.”연정우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그의 긴장감과 진지함이 어린 표정에 성유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다행이다. 물론 정말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해도... 이해는 돼. 하지만...”그녀의 말에 연정우는 성유리의 얼굴을 살짝 집었다.“무슨 소리야? 난 그냥 유리 씨가 너무 힘들까 봐 그랬던 거야.”성유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러고는 다시 연정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리고 이번 결혼식 말이야... 하는 게 나한테도 이득이야. 아버지께서 병으로 쓰러지시면서 이 틈에 날 공격하려는 사람들이 정말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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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7화

“언니, 나랑 그 사람은 그냥 친한 사이일 뿐이야. 그 정도로 큰 힘은 없어.”성유정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사실 언니가 그 은행장을 정말 만나고 싶다면 차라리 형부한테...”곁에 가만히 앉아 있던 연정우는 자신이 언급되는 듯한 소리가 급히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애써 그를 무시하고는 다급히 성유정의 손을 잡아끌며 밖으로 나갔다.“뭐 하는 거야, 언니! 나 아파!”성유정은 여전히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인적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성유정은 조금 전의 비음 섞인 목소리가 아닌 차가운 음성을 말했다.“뭐 하는 짓이야?”“그건 내가 할 말 같은데.”성유리가 대답했다.“너도 지금 우리 가문 상황이 어떤지 잘 알 텐데. 네가 조영준 은행장이랑 직접 연락이 닿는다면 정말 좋겠지만 문제는 지금...”“지금, 뭐? 언니, 언니가 이렇게 날 찾아와서 도움을 청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성유정은 미소를 머금은 채 턱을 치켜들고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그럼 나한테 한 번 빌어 봐. 마음에 들면 도와줄지도 모르잖아.”성유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예전에 네 입으로 성씨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지 얘기했었잖아. 그런데 성리 그룹이 정말 이대로 망하면 너한테 득 될 것도 없지 않아?”“하하...”성유정이 비웃으며 말했다.“웃기다. 지금 나한테 훈계라도 하려는 거야? 성리 그룹이 무사하다고 해도 나랑은 무슨 상관인데? 나도 알아, 아빠가 회사 언니한테 넘기려고 한다는 거. 그럼 난 뭐가 되는데? 그딴 집구석에서 평생을 아빠한테 복종하고 낮추고 살았는데, 결국 이딴 식으로 밀려났잖아. 아빠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미리 말 해두는데, 난 절대 언니 도울 생각 없어. 그리고 조영준이 언니 도와준다고 해도 내가 막을 거야! 전에 박한빈 앞에서 잘난 척 엄청 하더라? 나 그날에 언니 봤어. 그때 일부러 보란 듯이 박한빈한테 업혔던 거지? 그땐 생각이나 했을까? 언니가 이렇게 날 찾아와서 개처럼 애원하는 날이 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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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8화

왜인지 모르게 비서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병실 안에 있던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연정우는 여전히 조용히 병상 옆에 앉아 있었다.성유리는 그를 바라보며 아침에 자신을 안아주던 연정우를 떠올렸다.성유리와 연정우의 관계는 애초부터 계약 관계에 불과했고 두 사람의 결혼 역시 마찬가지였다.하지만 그 순간, 성유리의 머릿속을 채운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누군가에게 안기고 싶었다.성유리 역시 그것이 계약의 범위를 벗어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연정우가 굳이 언급하지 않았듯 그녀 역시 재차 언급하며 상기시키는 일은 없었다.성유리가 너무 오랫동안 연정우를 보고 있었던 탓인지 연정우도 어딘가 이상함을 느끼고 성유리에게로 눈길을 돌렸다.성유리는 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말했다.“급히 회사에 가 봐야 할 것 같아. 간병인을 부를 테니까 여긴...”“괜찮으니까 다녀와.”성유리의 말에 연정우가 빠르게 대답했다.“오늘 별다른 일정 없어.”“하지만...”“잊은 거야? 우리 곧 결혼하잖아. 그럼 유리 씨 아버지는 내 장인어른이기도 한데, 사위가 장인어른 간병 하는 게 잘못된 일도 아니잖아?”연정우의 말에 성유리도 할 말을 잃었다.이런 상황에 굳이 여러 차례 거절하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 성유리는 결국 마지못해 대답했다.“혹시 무슨 일 생기면 전화 해줘. 아버지 깨어나시면 바로 의사 선생님부터 호출해주고.”“알겠어.”“그럼 나 먼저 가 볼게.”“그래.”연정우가 말을 마치고는 성유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시간이 조금 늦었으니까, 가면 저녁은 그쪽에서라도 꼭 챙겨 먹어. 알겠지?”“응, 정우 씨도.”“알겠어.”연정우는 성유리를 향해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고, 성유리는 그제야 아버지의 병실을 나설 수 있었다.시간은 이미 저녁이 되어 있었다.금성의 퇴근길 교통은 혼잡하기 그지없었지만 다행히 퇴근길 차량들과는 반대였던 덕에 성유리는 그나마 빨리 병원에서부터 회사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성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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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9화

“그래, 이래야 성유리 답지.”박한빈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난번에 이미 관계가 틀어질 대로 틀어졌는데 이제 와서 굳이 예의 차릴 필요는 없잖아.”말을 마친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지금 속으론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 중이지?”박한빈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까지 걸려 있었다.하지만 그가 내뱉는 말 만큼은 듣는 사람의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잠시 멈칫한 성유리는 이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대표님도 아신다니 다행이네요.”“하지만 유감스럽네. 내가 여기 이렇게 멀쩡히 앉아 있어서 말이야.”박한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지금 상황에서 먼저 포기할 사람이 나일 리가 없잖아.”그 말에 성유리는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박한빈이 성유리에게 이런 식으로 대한 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연성에서 있었던 술자리에서 당했던 수모를 성유리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 역시 박한빈의 눈빛에는 차가운 기운만이 가득 차 있었다.성유리의 목소리가 점점 갈라지기 시작했다.“그럼, 박 대표님께서 여긴 대체 왜 오신 건가요? 누가 승자이니 증명해주고 싶으셨던 거예요?”“아직 돌이킬 기회가 남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은 거야.”박한빈이 대답했다.성유리는 단번에 박한빈이 여기까지 찾아온 진짜 목적을 이해했다.“뭐라고요?”“우선, 너랑 연정우 결혼식부터 취소해.”“아, 그리고요?”이 요구에 대해 성유리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덕에 아주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리고 나한테 돌아와.”박한빈은 성유리를 바라보며 거의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성리 그룹의 문제는 내가 해결해줄 수 있어. 너도 알다시피, 넌 이 전쟁 같은 비즈니스 업계랑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다시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되는 거야. 다른 건 다 나한테 맡기고.”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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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0화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더니 이내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그 표정을 마주한 박한빈의 가슴에는 묵직하고도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보아하니... 그의 추측이 정확했던 것 같다.두 사람은 계약관계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계약을 넘어 그 이상의 감정이 생긴 것 같았다.성유리가 정말로 연정우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그게 아니라면 지금 박한빈을 바라보는 성유리의 눈빛을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방금 성유리나 성리 그룹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 정도의 반응이 없었다.그 통증은 박한빈의 가슴 속에 천천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그리고 그 동시에 입안에서는 익숙한 피비린내가 느껴졌다.박한빈은 목울대를 몇 번 움직이더니 숨을 깊게 쉬고 나서야 고통스러운 그 느낌을 간신히 억누를 수 있었다.“보아하니 정말 연정우를 소중히 여기나 보네.”“박한빈 씨, 이건 우리 둘 사이의 문제예요. 제발 이런 식으로 비열하게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려 하지 마요!”“무고한 사람이라고?”박한빈이 비웃기 시작했다.“넌 네가 그 사람을 얼마나 잘 안다고 생각해? 네 그 ‘무고한’ 약혼자가 네 뒤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니는지는 알아?”성유리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옆에 있던 서류를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한번 봐.”성유리는 박한빈이 내민 서류를 바라보았지만 차마 쉽게 손을 대지 못했다.박한빈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굳이 확인 안 해도 상관은 없어. 어차피 난 다 정리 마쳤고, 이제 검찰에 넘기기만 하면 되니까. 만약 연정우가 그때 가서 너에게 충분히 막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가만히 내버려 뒀다는 걸 안다면, 화를 내진 않을까?”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성유리는 그 서류를 열어보고 말았다.서류에 적힌 자금 유통 내역, 사진과 채팅 기록을 확인한 성유리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리고 박한빈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외쳤다.“이게... 대체 뭐야!”“왜, 이해가 안 되나?”박한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내가 설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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