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나랑 그 사람은 그냥 친한 사이일 뿐이야. 그 정도로 큰 힘은 없어.”성유정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사실 언니가 그 은행장을 정말 만나고 싶다면 차라리 형부한테...”곁에 가만히 앉아 있던 연정우는 자신이 언급되는 듯한 소리가 급히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애써 그를 무시하고는 다급히 성유정의 손을 잡아끌며 밖으로 나갔다.“뭐 하는 거야, 언니! 나 아파!”성유정은 여전히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인적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성유정은 조금 전의 비음 섞인 목소리가 아닌 차가운 음성을 말했다.“뭐 하는 짓이야?”“그건 내가 할 말 같은데.”성유리가 대답했다.“너도 지금 우리 가문 상황이 어떤지 잘 알 텐데. 네가 조영준 은행장이랑 직접 연락이 닿는다면 정말 좋겠지만 문제는 지금...”“지금, 뭐? 언니, 언니가 이렇게 날 찾아와서 도움을 청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성유정은 미소를 머금은 채 턱을 치켜들고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그럼 나한테 한 번 빌어 봐. 마음에 들면 도와줄지도 모르잖아.”성유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예전에 네 입으로 성씨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지 얘기했었잖아. 그런데 성리 그룹이 정말 이대로 망하면 너한테 득 될 것도 없지 않아?”“하하...”성유정이 비웃으며 말했다.“웃기다. 지금 나한테 훈계라도 하려는 거야? 성리 그룹이 무사하다고 해도 나랑은 무슨 상관인데? 나도 알아, 아빠가 회사 언니한테 넘기려고 한다는 거. 그럼 난 뭐가 되는데? 그딴 집구석에서 평생을 아빠한테 복종하고 낮추고 살았는데, 결국 이딴 식으로 밀려났잖아. 아빠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미리 말 해두는데, 난 절대 언니 도울 생각 없어. 그리고 조영준이 언니 도와준다고 해도 내가 막을 거야! 전에 박한빈 앞에서 잘난 척 엄청 하더라? 나 그날에 언니 봤어. 그때 일부러 보란 듯이 박한빈한테 업혔던 거지? 그땐 생각이나 했을까? 언니가 이렇게 날 찾아와서 개처럼 애원하는 날이 오게
왜인지 모르게 비서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병실 안에 있던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연정우는 여전히 조용히 병상 옆에 앉아 있었다.성유리는 그를 바라보며 아침에 자신을 안아주던 연정우를 떠올렸다.성유리와 연정우의 관계는 애초부터 계약 관계에 불과했고 두 사람의 결혼 역시 마찬가지였다.하지만 그 순간, 성유리의 머릿속을 채운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누군가에게 안기고 싶었다.성유리 역시 그것이 계약의 범위를 벗어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연정우가 굳이 언급하지 않았듯 그녀 역시 재차 언급하며 상기시키는 일은 없었다.성유리가 너무 오랫동안 연정우를 보고 있었던 탓인지 연정우도 어딘가 이상함을 느끼고 성유리에게로 눈길을 돌렸다.성유리는 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말했다.“급히 회사에 가 봐야 할 것 같아. 간병인을 부를 테니까 여긴...”“괜찮으니까 다녀와.”성유리의 말에 연정우가 빠르게 대답했다.“오늘 별다른 일정 없어.”“하지만...”“잊은 거야? 우리 곧 결혼하잖아. 그럼 유리 씨 아버지는 내 장인어른이기도 한데, 사위가 장인어른 간병 하는 게 잘못된 일도 아니잖아?”연정우의 말에 성유리도 할 말을 잃었다.이런 상황에 굳이 여러 차례 거절하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 성유리는 결국 마지못해 대답했다.“혹시 무슨 일 생기면 전화 해줘. 아버지 깨어나시면 바로 의사 선생님부터 호출해주고.”“알겠어.”“그럼 나 먼저 가 볼게.”“그래.”연정우가 말을 마치고는 성유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시간이 조금 늦었으니까, 가면 저녁은 그쪽에서라도 꼭 챙겨 먹어. 알겠지?”“응, 정우 씨도.”“알겠어.”연정우는 성유리를 향해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고, 성유리는 그제야 아버지의 병실을 나설 수 있었다.시간은 이미 저녁이 되어 있었다.금성의 퇴근길 교통은 혼잡하기 그지없었지만 다행히 퇴근길 차량들과는 반대였던 덕에 성유리는 그나마 빨리 병원에서부터 회사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성 대표님!”
“그래, 이래야 성유리 답지.”박한빈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난번에 이미 관계가 틀어질 대로 틀어졌는데 이제 와서 굳이 예의 차릴 필요는 없잖아.”말을 마친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지금 속으론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 중이지?”박한빈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까지 걸려 있었다.하지만 그가 내뱉는 말 만큼은 듣는 사람의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잠시 멈칫한 성유리는 이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대표님도 아신다니 다행이네요.”“하지만 유감스럽네. 내가 여기 이렇게 멀쩡히 앉아 있어서 말이야.”박한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지금 상황에서 먼저 포기할 사람이 나일 리가 없잖아.”그 말에 성유리는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박한빈이 성유리에게 이런 식으로 대한 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연성에서 있었던 술자리에서 당했던 수모를 성유리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 역시 박한빈의 눈빛에는 차가운 기운만이 가득 차 있었다.성유리의 목소리가 점점 갈라지기 시작했다.“그럼, 박 대표님께서 여긴 대체 왜 오신 건가요? 누가 승자이니 증명해주고 싶으셨던 거예요?”“아직 돌이킬 기회가 남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은 거야.”박한빈이 대답했다.성유리는 단번에 박한빈이 여기까지 찾아온 진짜 목적을 이해했다.“뭐라고요?”“우선, 너랑 연정우 결혼식부터 취소해.”“아, 그리고요?”이 요구에 대해 성유리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덕에 아주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리고 나한테 돌아와.”박한빈은 성유리를 바라보며 거의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성리 그룹의 문제는 내가 해결해줄 수 있어. 너도 알다시피, 넌 이 전쟁 같은 비즈니스 업계랑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다시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되는 거야. 다른 건 다 나한테 맡기고.”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곧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더니 이내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그 표정을 마주한 박한빈의 가슴에는 묵직하고도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보아하니... 그의 추측이 정확했던 것 같다.두 사람은 계약관계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계약을 넘어 그 이상의 감정이 생긴 것 같았다.성유리가 정말로 연정우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그게 아니라면 지금 박한빈을 바라보는 성유리의 눈빛을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방금 성유리나 성리 그룹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 정도의 반응이 없었다.그 통증은 박한빈의 가슴 속에 천천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그리고 그 동시에 입안에서는 익숙한 피비린내가 느껴졌다.박한빈은 목울대를 몇 번 움직이더니 숨을 깊게 쉬고 나서야 고통스러운 그 느낌을 간신히 억누를 수 있었다.“보아하니 정말 연정우를 소중히 여기나 보네.”“박한빈 씨, 이건 우리 둘 사이의 문제예요. 제발 이런 식으로 비열하게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려 하지 마요!”“무고한 사람이라고?”박한빈이 비웃기 시작했다.“넌 네가 그 사람을 얼마나 잘 안다고 생각해? 네 그 ‘무고한’ 약혼자가 네 뒤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니는지는 알아?”성유리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옆에 있던 서류를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한번 봐.”성유리는 박한빈이 내민 서류를 바라보았지만 차마 쉽게 손을 대지 못했다.박한빈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굳이 확인 안 해도 상관은 없어. 어차피 난 다 정리 마쳤고, 이제 검찰에 넘기기만 하면 되니까. 만약 연정우가 그때 가서 너에게 충분히 막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가만히 내버려 뒀다는 걸 안다면, 화를 내진 않을까?”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성유리는 그 서류를 열어보고 말았다.서류에 적힌 자금 유통 내역, 사진과 채팅 기록을 확인한 성유리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리고 박한빈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외쳤다.“이게... 대체 뭐야!”“왜, 이해가 안 되나?”박한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내가 설명해
박한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으로 몇 발짝 다가간 성유리가 손을 높이 들었다.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녀의 손바닥은 박한빈의 그 어디도 건드리지 못했다.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있던 박한빈의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미친놈.”성유리가 말했다.박한빈은 그 말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응, 나도 알아.”성유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고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하지만 박한빈에게 절대 지고 싶지 않다는 듯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을 닦아냈다.“연정우 씨 외할아버님께서 지금 몸이 좋지 않으세요.”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치매에 걸리셨는데 병세가 점점 악화되고 있어요. 어쩌면 곧 모든 걸 다 기억하지 못할 지도 몰라요. 그래서 정우 씨가 최대한 빨리 나랑 결혼하려고 한 거예요.”성유리가 말을 마쳤지만 박한빈에게서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박한빈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었다.성유리의 시선이 여전히 자신에게 머물러 있는 것을 발견한 박한빈이 되물었다.“그래서? 그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지?”그 말에 성유리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그러니까, 결혼식은...”“안돼.”박한빈은 단호한 말투로 성유리의 말을 끊었다.그렇게 성유리의 목소리는 철저히 무시당했다.그녀의 꽉 쥔 주먹에는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정말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는 거예요? 박한빈 씨, 정말 저를 죽음으로 내몰 생각이냐고요?!”그 말에 박한빈이 웃음을 터뜨렸다.“그게 왜 나 때문이야? 연정우와 연정우 할아버지가 그런 짓을 저지르지만 않았다면 내가 이런 약점을 잡을 수도 없었겠지. 치매에 걸린 거? 그건 다 하늘에서 천벌 내린 거야. 인과응보라고. 그 사람들은 그렇게 불쌍하게 여기면서, 왜 난 동정 안 해줘? 그 사람들만 불쌍하고 혼자 버려진 나는 안 불쌍해? 네가 날 어떻게 대했는지 벌써 잊은 거야?”박한빈은 자신이 진심으로 억울한 일을
박한빈은 성유리의 턱을 움켜잡더니 분노로 가득 찬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너, 설마 정말 연정우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야?”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눈빛은 유난히 밝고 매혹적인 빛을 띠었다.박한빈은 그 눈물 너머 자신을 바라보는 성유리의 모습을 또렷이 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증오였다.그녀는 그를 증오하고 있었다.박한빈 역시 이미 알고 있었다.그가 이런 선택을 할 때부터 성유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딴 게 뭐가 중요할까?성유리와 평생을 남남으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평생 미움받는 편이 나았다.그녀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박한빈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성유리가 성리 그룹의 일 때문에 자신을 증오하든, 아니면 단순히 자신을 증오하든 모두 괜찮았다. 하지만 연정우 때문에 자신을 증오하는 것은 정말 받아들일 수 없었다.성유리의 눈물을 마주한 박한빈의 손발이 점점 차가워졌다.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하지만 질문을 내뱉은 순간, 엄청난 후회가 밀려왔다. 그는 성유리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지? 너희는 단순히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일 뿐인데, 어떻게...”“왜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면 안 되는데요?”박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단호한 말투로 그의 말을 끊었다.성유리의 그 한 마디는 육중한 바위가 되어 박한빈의 입을 막아버렸다.그의 주먹이 힘껏 쥐어졌다.하지만 이내 손에 힘을 뺀 박한빈은 뻣뻣하게 굳어버린 입꼬리를 애써 끌어올리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거지, 유리야? 방금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연정우는 이때까지 계속...”“정우 씨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했든, 적어도 내 앞에서만큼은 진심으로 날 아껴줬어요. 그 사람은 다정하고 항상 내 기분부터 살펴주거든요. 내가 필요할 때마다 항상 옆에 같이 있어 주고요. 그런 사람을 좋아하
밖에서 들려오는 문고리 소리에 짜증이 밀려온 박한빈이 고개를 들어 큰소리로 외쳤다.“꺼져!”간결한 한 마디에 사무실 밖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그의 품 안에 안겨 있던 성유리 역시 마찬가지였다.성유리는 더 반항해봤자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그를 밀어내던 두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녀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까지 그 행동과 함께 메말라갔다.그녀는 조용히 자리에 눕더니 고개를 들어 공허한 눈빛으로 천장에 걸려 있는 백열등을 바라보았다.그런 성유리를 잠시 바라보던 박한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힘들어? 아니면 억울해? 연정우를 떠나는 게 그렇게 힘드냔 말이야.”그는 애써 조롱하려는 듯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박한빈의 손 역시 제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가슴 속에서부터 피어오른 고통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손끝까지 다다른 것이다.성유리는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태도로 미루어 보았을 때 박한빈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듯했다.박한빈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래, 그런 것 같네. 좋아, 기회를 한 번 더 주지. 어때?”성유리가 천천히 눈을 돌려 박한빈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마주한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혀를 한 번 찼다.하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은 그가 입을 열었다.“연정우를 만나서 방금 그 서류를 보여줄 예정이야. 만약 그걸 보고도 너랑 계속 결혼하려 한다면 더는 나도 강요하지 않고 둘 사이를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어때? 성유리, 나랑 내기 하나 할래?”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다.그녀의 침묵에 박한빈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왜, 겁나? 방금까지만 해도 그렇게 칭찬하더니. 그러니까 너도...”“좋아요.”박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박한빈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내기할게요.”“좋아.”박한빈이 고개를 끄덕이
박한빈은 아무 대답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연정우에게 던지듯 건넸다.연정우는 고개를 숙여 그 봉투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이내 눈빛을 반짝이다가 손을 뻗어 서류를 받아들었다.앞의 몇 장만 대충 본 그의 표정이 점점 창백해졌다.서류를 쥔 손에는 점차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이윽고 그는 박한빈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게 무슨 뜻입니까?”박한빈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뭘 것 같으세요?”“이 서류들, 다 어디서 구한 겁니까?”연정우는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더니 차분하게 물었다.“그건 교수님께서 아실 필요 없습니다.”“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박한빈은 소파에 앉아 천천히 손을 뻗어 자신의 잔으로 술을 따르고는 한 모금 들이켰다.그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우아하고 품위 있었다.하지만 그런 박한빈을 보는 연정우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박한빈이 입을 열었다.“제가 원하는 게 뭐일지는... 이미 충분히 아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박 대표님, 같은 남자로서 이런 방법을 쓰는 건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연정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성리 그룹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박 대표님은 그저 지화 그룹의 대표라는 자리를 이용해서 제멋대로 구는 것뿐이잖습니까!”“그래요, 제가 가진 게 그런 거니까요. 문제 있습니까?”박한빈이 진지한 눈빛으로 되물었다.“그리고, 연 교수님께서 정말 그렇게 깨끗한 사람이었다면, 제가 이런 자료를 손에 쥐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두려워하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연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한빈 역시 더는 시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제가 원하는 건 간단해요. 교수님과 유리의 파혼.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이 서류는 교수님과 제 사이의 비밀로 남겠죠. 하지만 계속 밀어붙이시겠다면... 제 탓은 하지 마시길.”더 깊은 침묵을 유지하던 연정우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더니 손등에는 혈관까지 불거져 나왔다.박한빈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교수님한테도 꽤 이득이 되는 거래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인지 불안한 성유리는 박한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박한빈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던 성유리가 입을 떼기 전, 박한빈은 시원하게 비밀번호와 인증코드를 알려주었다. 그는 성유리기에 컴퓨터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도 묻지도 않았다. 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박한빈의 태도에 알겠다는 짧은 대답을 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빠르게 박한빈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컴퓨터 화면이 열리자 배경 화면이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당황한 성유리는 멍해졌다가 이내 박한빈과 고명도 사이의 일을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이제 와서 이러는 박한빈이 한심하고 웃겼다. 그래서 성유리는 증거들을 찾기 전에 먼저 박한빈의 컴퓨터 배경 화면을 바꿔버렸다. 제일 간단하고 기본 설정인 배경 화면으로 바꾸자 성유리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그 문제는 바로 박한빈이 하나하나 잠가버린 모든 자료와 파일들이었다. 컴퓨터를 쓰겠다고 말했지만 파일들 비밀번호까지 알려달라면 들켜버릴 것이 뻔했다. 성유리는 혼자서 이것저것 입력해 봤지만 다 틀리자 아예 포기해 버렸다. 사무실 책상에서 발견하지 못했으니 뒤에 있는 책장에는 있을 리가 없었다. 성유리는 서재를 다 찾았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어 결국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 시각,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박한빈은 여전히 도연제에 돌아오지 않았고 성유리는 입맛이 없어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서재에서 나온 성유리는 자연스럽게 복도 끝자락에 있는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굳게 잠겨있긴 하지만 성유리는 방안 구조와 인테리어를 다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결국 그 방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고 문 앞에서 서성이다 아래로 내려갔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은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서서히 감았던 눈을 뜨자 성유리는 제일 먼저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고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정신을 차려
성유리는 자기가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이미 금성은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무더운 한 여름이었지만 성유리는 전혀 덥지도 않았고 따뜻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밖에 한참을 서 있던 성유리는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 이빨을 꽉 깨물고 버텼다. 택시는 빠른 속도도 달려 도연제에 도착했다. 눈앞에 있는 익숙하고도 낯선 곳에 성유리는 방금 전 성시원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유일한 기회이자 방법이야.] 성시원은 박한빈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방법과 증거를 찾고 싶었고 그 증거로 박한빈을 끌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성유리의 생각은 성시원과 달랐다.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잘 아는 성유리는 그가 행여 다른 사람들에 의해 끌려 내려오더라도 언젠간 꼭 다시 올라와 두 배로 갚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과 비슷한 사람을 대할 때면 꼭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고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초원에서 만난 두 마리의 맹렬한 맹수는 싸울 때 서로 할퀴고 뜯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서로한테 제일 치명적인 상을 입혀야 승리를 거머쥐는 잔인한 현실에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차에서 내린 성유리는 이곳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기에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성유리는 이내 박한빈의 서재를 찾았고 아침에 그가 했던 말들 떠올렸다. [오늘 바빠서 못 돌아갈 거야.] 비록 자신이 찾는 서류가 서재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유리에게 있어서 지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성유리는 굳게 잠긴 문에 몇 번이나 비밀번호를 입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박한빈의 생일이나 그의 핸드폰 비밀번호, 게다가 성유리 본인의 생일까지 입력해 봤지만 여전히 틀린 비밀번호였다. 성유리는 머릿속 깊은 곳에 있던 기억까지 끄집어내 절대 불가능할 것 같던 숫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띠릭! 그 순간,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성유리가 마지막에 입력한 숫자들은 바로 박한빈과 성유리 두
그 말인즉슨 그들이 담판을 짓기 전부터 사실 박한빈은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번 기회를 빌어 성리그룹의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리고만 싶었다. 모든 일은 성유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결정에 아주 침착하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필경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박한빈은 항상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가끔 박한빈이 자신의 앞에서 온순한 양이 되어 항상 져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성유리는 전에 자기 마음대로 박한빈을 대하고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성유리는 이제 서야 박한빈의 모든 “가면”을 벗겨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괴이했고 이상했지만 웃기게도 성유리는 아직 박한빈의 이런 태도를 볼 때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했다. 허나 고통을 호소할 정도로의 아픔은 아니었고 그저 피부가 살짝 날카로운 칼에 긁힌 것 같은 정도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갓 치유가 된 상처 부위를 또다시 긁혔기에 이런 고통은 새로 생긴 상처보다 더 아프고 쓰렸다. 상처가 깊지 않은 탓에 피는 곧 멈췄기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정말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아요.” 성유리가 입을 뗐다. “지금 성리 그룹의 상황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어요. 남들처럼 파산신청이나 할 수 있어도 정말 불행 중 다행이고요.” 평온한 말투로 말을 하는 성유리는 본인조차도 자기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평소처럼 화를 내지도 못했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몸 잘 챙기세요.” 성유리는 조용히 그를 쳐다보다 짧은 인사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성시원이 갑자기 성유리에게 말했다. “사실 방법이 하나 더 남아있어.” 앞으로 뚜벅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 없던 간병인은 어쩔 줄 몰라 했다.무엇보다 성시원은 금방 의식을 회복한 사람으로서 누구든 지금 흥분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간병인은 성시원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그 반면에 성유리는 아주 덤덤했다.그는 데인 종아리에서 퍼져오는 고통을 견디며 천천히 성시원에게 다가갔다.성시원은 생각보다 당돌한 성유리의 모습에 놀랐는지 손에 든 컵을 다시 던지려고 움직였지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성유리가 그의 손을 단단히 내리누르며 막았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간병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나가주세요.”이 자리가 불편하다고 생각 중이던 간병인은 성유리의 말이 구세주라도 되는 양 곧장 자리를 떴다.성유리가 성시원을 보며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 다 알고는 계세요?”“알다마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박한빈 그 자식이 어떤 놈인데! 너한테 인주 프로젝트 맡길 때부터 이미 함정이었던 거야! 이거 다 둘이서 짠 거 아니냐? 오늘 이러려고...”“성리 그룹이 이렇게 된 건 인주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에요.”성유리가 성시원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가장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고명도와 아버지입니다.”성유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성시원은 그 말에 넋을 놓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뭐라고?”성시원의 목소리가 낮아지긴 했지만 어떻게든 반박해보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성유진이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만약 고명도가 그 큰 거액을 빼돌려 자금 흐름만 안 끊었어도 성리 그룹이 이런 상태가 됐을까요? 그리고 그런 고명도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아버지께도 잘못이 있어요. 지금 회사가 주주들 권리랑 악성 채무 관계로 엉망이 되어버린 것도 그동안 아버지께서 너무 무책임했던 결과 아닙니까? 남에게 잘 보이겠다고 딸을 이리저리 내다 팔아가며 이익을 얻으려고 하셨잖아요. 생각 못 해보셨어요? 성리 그룹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성리가 단번에 수많은 말을 쏟아냈다.그 말에
뒤를 미처 보지 못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날아온 베개에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성유리는 문득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박한빈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그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박한빈에게 던져진 베개처럼 겉으로는 화가 잔뜩 나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발버둥 칠수록 그저 자신만 우스워질 뿐이었다....결국 성유리는 병원으로 향했다.그녀는 연정우가 밝힌 입장문을 확인했다.연정우는 결혼을 취소했다고 하는 대신 며칠 연기할 예정이라고만 밝히고 자세한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언제까지 연기할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체면을 지키기 위한 말일 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무산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성유리는 그 성명을 몇 분 동안 보다가 스크롤을 조금만 더 내려 댓글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휴대폰을 껐다.그리고 마침 병원에 도착했다.어제의 소식이 퍼지자 병원 근처에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지만 나름 철저한 병원의 보안 덕분에 그들은 입구 밖에만 몰려 있었다.차에서 내리는 성유리의 모습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업계에서 누가 일부러 성리 그룹을 음해하려고 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성리 그룹의 향후 계획은 뭔가요?”“파산 신청하실 예정인가요?”“아버님께서 깨어나셨나요? 충격이 꽤 크신 것 같은데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수많은 마이크와 카메라가 성유리를 둘러싸자 병원의 보안 요원들이 다가와 간신히 기자들을 저지했다.그리고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침묵으로 인한 추측성 기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그렇게 나온 기사들은 대부분 그녀의 침묵에 대해 추측하는 내용이었다. 기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성유리의 모습에 성리 그룹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가 됐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그리고 성시원의 상태로 그다지 좋지
무작정 뺨을 때린 것은 성유리의 자동반사적인 반응이었다.박한빈이 너무 가까이 있었던 탓이다.그리고 박한빈이 정말 막을 생각이 있었다면 그녀의 손을 잡거나 어떻게든 막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어젯밤 뺨에 남긴 자국이 사라지기도 전에 하나가 더 생겨버렸다.정말 웃긴 이야기 속의 주인공처럼 대칭 맞춰 두 뺨에 손자국이 생긴 격이었다.“악몽 꿨어?”박한빈은 아프다는 기색 하나 없이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냥 꿈일 뿐이야.”박한빈은 옷을 갈아입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오늘은 내가 좀 바빠서 같이 밥 못 먹을 것 같네. 넌 아버지 뵈러 병원 가 봐. 그리고 연정우랑 결혼 취소했다고도 전하고.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박한빈의 목소리는 짧고도 단호했다.“어떻게 할 생각이야?”성유리가 물었다.박한빈은 단추를 잠그던 동작을 멈추더니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쨌든 성리 그룹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이번 일로 주주들 반응도 봤을 거고, 성리 그룹의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거야. 본질이 아예 썩어 있다고. 오늘 평가 진행하고 청산해야 할 거 청산할 거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네 건 뺏을 생각 없으니까.”박한빈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손에 잡히는 베개를 그의 얼굴에 내던졌다.“그럼 성리 그룹은 인수합병하는 거랑 다를 게 뭐야? 어젠 분명 그런 말 없었잖아!”“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야.”박한빈은 자신에게 던져진 베개를 잡은 채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성리 그룹은 심각한 적자를 겪고 있고, 회사를 넘기고 싶어도 쉽지 않을 거야. 이 문제를 해결해준 건 나니까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그리고, 난 단지 너희가 지화 그룹에 끼친 손해를 묻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지, 성리 그룹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어.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널 위해서야. 너도 알잖아. 네가 성리 그룹에 있는 한, 회장님은 어떻게든 우리 관계를
지금 그 꽃은 이미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았다. 다 죽은 꽃에 뒤늦게 찾아온 햇빛과 보살핌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성유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하지만 그 순간, 눈을 감으려던 성유리는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을 발견했다.성유리의 기억이 맞다면 그것은 그녀가 애용하던 브랜드의 스킨케어 제품이었다.뒤이어 창가에 묶여 있는 커튼 끈과 맞은 편 드레스룸의 유리문 너머 걸려 있는 익숙한 옷가지도 눈에 들어왔다.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이곳에 남겨두고 갔던 물건들을 박한빈이 다 옮겨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사실 그 물건들은 성유리의 것이 아니었다.옷들은 성유리가 박 대표의 아내라는 칭호에 걸맞을 수 있게 김서영이 사준 옷들이었다. 자신의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떠날 때도 굳이 챙겨가지 않았던 것이다.그리고 스킨케어 제품들도... 아마 이젠 유통기한이 다 지나지 않았을까?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멈췄다.그녀는 생각하는 것을 멈춘 채 눈을 질끈 감았다.어둠 속에서 박한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옆에 자리 잡고 누웠다.샤워를 금방 마치고 나온 그는 상쾌한 향기를 풍기며 성유리의 허리를 감싼 팔에 점점 힘을 주었다.둘의 피부가 조금의 틈도 없이 단단히 맞닿았다.하지만 박한빈은 더 가까이 붙으려는 듯 힘을 더 주더니 팔을 더 세게 조여왔다. 마치 성유리를 자신의 육체에 완전히 새기기라도 할 것 같았다.그 엄청난 힘에 성유리는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버거웠다.참다못한 성유리가 박한빈의 손등을 몇 번 꼬집으며 말했다.“놔! 아파!”그녀는 여전히 이를 악문 채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팔의 힘을 어느 정도 느슨하게 풀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성유리에게 밀착해 있었고 입술은 수시로 그녀의 피부에 댄 채 가볍게 키스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개새끼냐고 묻고 싶었다.하지만 조금 전 그의 뺨을 후려갈겼을 때, 오히려 즐겁
성유리는 자신이 다시 도연제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곳을 떠나던 그 날, 다시 여기로 돌아올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저택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박한빈이 모두 내보낸 듯했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집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데리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안방의 문이 그에 의해 열렸다.안의 가구 배치가 예전보다 조금 달라진 듯했지만 성유리가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를 침대에 밀어 눕혔다.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표정을 굳힌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의 행동에서는 다정함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런 상황을 이미 예측한 성유리도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아무런 저항의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성유리의 무반응이 박한빈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기라도 한 듯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목을 세게 물었다.단순한 애무가 아니라 정말 힘껏 문 것이었다.박한빈의 이빨이 피부를 뚫어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성유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며 손을 들어 박한빈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그녀의 손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며칠 동안 쌓여왔던 모든 분노와 억울함이 이 한 대에 실려 박한빈의 뺨에 닿았다.그렇게 새하얀 그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그 순간, 마음이 약해진 성유리는 자신이 너무 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이런 얼굴로 출근한다면 분명 모두의 이목을 끌 게 뻔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성유리가 박한빈의 뺨을 내리칠 때, 그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그 반응에 당황한 성유리는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병신.”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손길로 그녀를 매만졌다.하지만 그런 다정함이 성유리는
“성...”먼저 입을 연 쪽은 연정우였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두세 걸음 만에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갑시다.”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쉬어 있었다.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성유리는 더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어 박한빈의 손을 잡아끌었다.박한빈은 저항하지 않은 채 성유리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리를 뜨려 하던 순간, 연정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성유리의 다른 한 손을 덥석 잡았다.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지만 성유리가 그보다 한발 빨리 연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너무 고민할 필요 없어. 나도... 널 선택하지 않았으니까.”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지금 성리 그룹이 어떤 상황인지 정우 씨도 잘 알잖아. 이런 상황에 난 회사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 걱정할 필요 없겠네. 우리... 서로 미안해할 일은 없겠다. 결혼식은... 취소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연정우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박한빈의 손을 다시 쥐더니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술집은 여전히 떠들썩했다.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화려한 여자들과 환히 웃는 남자들 덕에 공기 중에는 유흥의 분위기가 가득 찼다.이곳에 바로 금성이었다.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차갑기 그지없는 도시였다.이곳에서 매일 누군가는 뭔가를 잃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지만 그 아무도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시내 중심가, 그것도 가장 번화하기로 소문난 곳에서도 투자 버블로 인해 투신한 사람이 있었다.그 흩뿌려진 피와 사라진 생명은 사회 뉴스에 짧은 보도 한 줄로 남아 있었다.성유리 역시 그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작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그런 존재.그러니 성유리는 자신이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바쳐 스스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의 손짓 한 번에 짓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