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287화

작가: 송진
“언니, 나랑 그 사람은 그냥 친한 사이일 뿐이야. 그 정도로 큰 힘은 없어.”

성유정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언니가 그 은행장을 정말 만나고 싶다면 차라리 형부한테...”

곁에 가만히 앉아 있던 연정우는 자신이 언급되는 듯한 소리가 급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성유리는 애써 그를 무시하고는 다급히 성유정의 손을 잡아끌며 밖으로 나갔다.

“뭐 하는 거야, 언니! 나 아파!”

성유정은 여전히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인적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성유정은 조금 전의 비음 섞인 목소리가 아닌 차가운 음성을 말했다.

“뭐 하는 짓이야?”

“그건 내가 할 말 같은데.”

성유리가 대답했다.

“너도 지금 우리 가문 상황이 어떤지 잘 알 텐데. 네가 조영준 은행장이랑 직접 연락이 닿는다면 정말 좋겠지만 문제는 지금...”

“지금, 뭐? 언니, 언니가 이렇게 날 찾아와서 도움을 청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

성유정은 미소를 머금은 채 턱을 치켜들고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그럼 나한테 한 번 빌어 봐. 마음에 들면 도와줄지도 모르잖아.”

성유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예전에 네 입으로 성씨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지 얘기했었잖아. 그런데 성리 그룹이 정말 이대로 망하면 너한테 득 될 것도 없지 않아?”

“하하...”

성유정이 비웃으며 말했다.

“웃기다. 지금 나한테 훈계라도 하려는 거야? 성리 그룹이 무사하다고 해도 나랑은 무슨 상관인데? 나도 알아, 아빠가 회사 언니한테 넘기려고 한다는 거. 그럼 난 뭐가 되는데? 그딴 집구석에서 평생을 아빠한테 복종하고 낮추고 살았는데, 결국 이딴 식으로 밀려났잖아. 아빠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미리 말 해두는데, 난 절대 언니 도울 생각 없어. 그리고 조영준이 언니 도와준다고 해도 내가 막을 거야! 전에 박한빈 앞에서 잘난 척 엄청 하더라? 나 그날에 언니 봤어. 그때 일부러 보란 듯이 박한빈한테 업혔던 거지? 그땐 생각이나 했을까? 언니가 이렇게 날 찾아와서 개처럼 애원하는 날이 오게
잠긴 챕터
GoodNovel에서 계속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관련 챕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88화

    왜인지 모르게 비서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병실 안에 있던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연정우는 여전히 조용히 병상 옆에 앉아 있었다.성유리는 그를 바라보며 아침에 자신을 안아주던 연정우를 떠올렸다.성유리와 연정우의 관계는 애초부터 계약 관계에 불과했고 두 사람의 결혼 역시 마찬가지였다.하지만 그 순간, 성유리의 머릿속을 채운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누군가에게 안기고 싶었다.성유리 역시 그것이 계약의 범위를 벗어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연정우가 굳이 언급하지 않았듯 그녀 역시 재차 언급하며 상기시키는 일은 없었다.성유리가 너무 오랫동안 연정우를 보고 있었던 탓인지 연정우도 어딘가 이상함을 느끼고 성유리에게로 눈길을 돌렸다.성유리는 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말했다.“급히 회사에 가 봐야 할 것 같아. 간병인을 부를 테니까 여긴...”“괜찮으니까 다녀와.”성유리의 말에 연정우가 빠르게 대답했다.“오늘 별다른 일정 없어.”“하지만...”“잊은 거야? 우리 곧 결혼하잖아. 그럼 유리 씨 아버지는 내 장인어른이기도 한데, 사위가 장인어른 간병 하는 게 잘못된 일도 아니잖아?”연정우의 말에 성유리도 할 말을 잃었다.이런 상황에 굳이 여러 차례 거절하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 성유리는 결국 마지못해 대답했다.“혹시 무슨 일 생기면 전화 해줘. 아버지 깨어나시면 바로 의사 선생님부터 호출해주고.”“알겠어.”“그럼 나 먼저 가 볼게.”“그래.”연정우가 말을 마치고는 성유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시간이 조금 늦었으니까, 가면 저녁은 그쪽에서라도 꼭 챙겨 먹어. 알겠지?”“응, 정우 씨도.”“알겠어.”연정우는 성유리를 향해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고, 성유리는 그제야 아버지의 병실을 나설 수 있었다.시간은 이미 저녁이 되어 있었다.금성의 퇴근길 교통은 혼잡하기 그지없었지만 다행히 퇴근길 차량들과는 반대였던 덕에 성유리는 그나마 빨리 병원에서부터 회사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성 대표님!”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89화

    “그래, 이래야 성유리 답지.”박한빈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난번에 이미 관계가 틀어질 대로 틀어졌는데 이제 와서 굳이 예의 차릴 필요는 없잖아.”말을 마친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지금 속으론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 중이지?”박한빈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까지 걸려 있었다.하지만 그가 내뱉는 말 만큼은 듣는 사람의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잠시 멈칫한 성유리는 이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대표님도 아신다니 다행이네요.”“하지만 유감스럽네. 내가 여기 이렇게 멀쩡히 앉아 있어서 말이야.”박한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지금 상황에서 먼저 포기할 사람이 나일 리가 없잖아.”그 말에 성유리는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박한빈이 성유리에게 이런 식으로 대한 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연성에서 있었던 술자리에서 당했던 수모를 성유리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 역시 박한빈의 눈빛에는 차가운 기운만이 가득 차 있었다.성유리의 목소리가 점점 갈라지기 시작했다.“그럼, 박 대표님께서 여긴 대체 왜 오신 건가요? 누가 승자이니 증명해주고 싶으셨던 거예요?”“아직 돌이킬 기회가 남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은 거야.”박한빈이 대답했다.성유리는 단번에 박한빈이 여기까지 찾아온 진짜 목적을 이해했다.“뭐라고요?”“우선, 너랑 연정우 결혼식부터 취소해.”“아, 그리고요?”이 요구에 대해 성유리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덕에 아주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리고 나한테 돌아와.”박한빈은 성유리를 바라보며 거의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성리 그룹의 문제는 내가 해결해줄 수 있어. 너도 알다시피, 넌 이 전쟁 같은 비즈니스 업계랑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다시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되는 거야. 다른 건 다 나한테 맡기고.”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곧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90화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더니 이내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그 표정을 마주한 박한빈의 가슴에는 묵직하고도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보아하니... 그의 추측이 정확했던 것 같다.두 사람은 계약관계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계약을 넘어 그 이상의 감정이 생긴 것 같았다.성유리가 정말로 연정우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그게 아니라면 지금 박한빈을 바라보는 성유리의 눈빛을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방금 성유리나 성리 그룹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 정도의 반응이 없었다.그 통증은 박한빈의 가슴 속에 천천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그리고 그 동시에 입안에서는 익숙한 피비린내가 느껴졌다.박한빈은 목울대를 몇 번 움직이더니 숨을 깊게 쉬고 나서야 고통스러운 그 느낌을 간신히 억누를 수 있었다.“보아하니 정말 연정우를 소중히 여기나 보네.”“박한빈 씨, 이건 우리 둘 사이의 문제예요. 제발 이런 식으로 비열하게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려 하지 마요!”“무고한 사람이라고?”박한빈이 비웃기 시작했다.“넌 네가 그 사람을 얼마나 잘 안다고 생각해? 네 그 ‘무고한’ 약혼자가 네 뒤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니는지는 알아?”성유리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옆에 있던 서류를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한번 봐.”성유리는 박한빈이 내민 서류를 바라보았지만 차마 쉽게 손을 대지 못했다.박한빈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굳이 확인 안 해도 상관은 없어. 어차피 난 다 정리 마쳤고, 이제 검찰에 넘기기만 하면 되니까. 만약 연정우가 그때 가서 너에게 충분히 막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가만히 내버려 뒀다는 걸 안다면, 화를 내진 않을까?”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성유리는 그 서류를 열어보고 말았다.서류에 적힌 자금 유통 내역, 사진과 채팅 기록을 확인한 성유리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리고 박한빈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외쳤다.“이게... 대체 뭐야!”“왜, 이해가 안 되나?”박한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내가 설명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91화

    박한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으로 몇 발짝 다가간 성유리가 손을 높이 들었다.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녀의 손바닥은 박한빈의 그 어디도 건드리지 못했다.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있던 박한빈의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미친놈.”성유리가 말했다.박한빈은 그 말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응, 나도 알아.”성유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고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하지만 박한빈에게 절대 지고 싶지 않다는 듯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을 닦아냈다.“연정우 씨 외할아버님께서 지금 몸이 좋지 않으세요.”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치매에 걸리셨는데 병세가 점점 악화되고 있어요. 어쩌면 곧 모든 걸 다 기억하지 못할 지도 몰라요. 그래서 정우 씨가 최대한 빨리 나랑 결혼하려고 한 거예요.”성유리가 말을 마쳤지만 박한빈에게서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박한빈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었다.성유리의 시선이 여전히 자신에게 머물러 있는 것을 발견한 박한빈이 되물었다.“그래서? 그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지?”그 말에 성유리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그러니까, 결혼식은...”“안돼.”박한빈은 단호한 말투로 성유리의 말을 끊었다.그렇게 성유리의 목소리는 철저히 무시당했다.그녀의 꽉 쥔 주먹에는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정말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는 거예요? 박한빈 씨, 정말 저를 죽음으로 내몰 생각이냐고요?!”그 말에 박한빈이 웃음을 터뜨렸다.“그게 왜 나 때문이야? 연정우와 연정우 할아버지가 그런 짓을 저지르지만 않았다면 내가 이런 약점을 잡을 수도 없었겠지. 치매에 걸린 거? 그건 다 하늘에서 천벌 내린 거야. 인과응보라고. 그 사람들은 그렇게 불쌍하게 여기면서, 왜 난 동정 안 해줘? 그 사람들만 불쌍하고 혼자 버려진 나는 안 불쌍해? 네가 날 어떻게 대했는지 벌써 잊은 거야?”박한빈은 자신이 진심으로 억울한 일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92화

    박한빈은 성유리의 턱을 움켜잡더니 분노로 가득 찬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너, 설마 정말 연정우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야?”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눈빛은 유난히 밝고 매혹적인 빛을 띠었다.박한빈은 그 눈물 너머 자신을 바라보는 성유리의 모습을 또렷이 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증오였다.그녀는 그를 증오하고 있었다.박한빈 역시 이미 알고 있었다.그가 이런 선택을 할 때부터 성유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딴 게 뭐가 중요할까?성유리와 평생을 남남으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평생 미움받는 편이 나았다.그녀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박한빈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성유리가 성리 그룹의 일 때문에 자신을 증오하든, 아니면 단순히 자신을 증오하든 모두 괜찮았다. 하지만 연정우 때문에 자신을 증오하는 것은 정말 받아들일 수 없었다.성유리의 눈물을 마주한 박한빈의 손발이 점점 차가워졌다.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하지만 질문을 내뱉은 순간, 엄청난 후회가 밀려왔다. 그는 성유리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지? 너희는 단순히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일 뿐인데, 어떻게...”“왜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면 안 되는데요?”박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단호한 말투로 그의 말을 끊었다.성유리의 그 한 마디는 육중한 바위가 되어 박한빈의 입을 막아버렸다.그의 주먹이 힘껏 쥐어졌다.하지만 이내 손에 힘을 뺀 박한빈은 뻣뻣하게 굳어버린 입꼬리를 애써 끌어올리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거지, 유리야? 방금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연정우는 이때까지 계속...”“정우 씨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했든, 적어도 내 앞에서만큼은 진심으로 날 아껴줬어요. 그 사람은 다정하고 항상 내 기분부터 살펴주거든요. 내가 필요할 때마다 항상 옆에 같이 있어 주고요. 그런 사람을 좋아하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93화

    밖에서 들려오는 문고리 소리에 짜증이 밀려온 박한빈이 고개를 들어 큰소리로 외쳤다.“꺼져!”간결한 한 마디에 사무실 밖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그의 품 안에 안겨 있던 성유리 역시 마찬가지였다.성유리는 더 반항해봤자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그를 밀어내던 두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녀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까지 그 행동과 함께 메말라갔다.그녀는 조용히 자리에 눕더니 고개를 들어 공허한 눈빛으로 천장에 걸려 있는 백열등을 바라보았다.그런 성유리를 잠시 바라보던 박한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힘들어? 아니면 억울해? 연정우를 떠나는 게 그렇게 힘드냔 말이야.”그는 애써 조롱하려는 듯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박한빈의 손 역시 제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가슴 속에서부터 피어오른 고통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손끝까지 다다른 것이다.성유리는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태도로 미루어 보았을 때 박한빈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듯했다.박한빈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래, 그런 것 같네. 좋아, 기회를 한 번 더 주지. 어때?”성유리가 천천히 눈을 돌려 박한빈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마주한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혀를 한 번 찼다.하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은 그가 입을 열었다.“연정우를 만나서 방금 그 서류를 보여줄 예정이야. 만약 그걸 보고도 너랑 계속 결혼하려 한다면 더는 나도 강요하지 않고 둘 사이를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어때? 성유리, 나랑 내기 하나 할래?”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다.그녀의 침묵에 박한빈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왜, 겁나? 방금까지만 해도 그렇게 칭찬하더니. 그러니까 너도...”“좋아요.”박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박한빈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내기할게요.”“좋아.”박한빈이 고개를 끄덕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94화

    박한빈은 아무 대답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연정우에게 던지듯 건넸다.연정우는 고개를 숙여 그 봉투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이내 눈빛을 반짝이다가 손을 뻗어 서류를 받아들었다.앞의 몇 장만 대충 본 그의 표정이 점점 창백해졌다.서류를 쥔 손에는 점차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이윽고 그는 박한빈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게 무슨 뜻입니까?”박한빈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뭘 것 같으세요?”“이 서류들, 다 어디서 구한 겁니까?”연정우는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더니 차분하게 물었다.“그건 교수님께서 아실 필요 없습니다.”“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박한빈은 소파에 앉아 천천히 손을 뻗어 자신의 잔으로 술을 따르고는 한 모금 들이켰다.그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우아하고 품위 있었다.하지만 그런 박한빈을 보는 연정우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박한빈이 입을 열었다.“제가 원하는 게 뭐일지는... 이미 충분히 아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박 대표님, 같은 남자로서 이런 방법을 쓰는 건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연정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성리 그룹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박 대표님은 그저 지화 그룹의 대표라는 자리를 이용해서 제멋대로 구는 것뿐이잖습니까!”“그래요, 제가 가진 게 그런 거니까요. 문제 있습니까?”박한빈이 진지한 눈빛으로 되물었다.“그리고, 연 교수님께서 정말 그렇게 깨끗한 사람이었다면, 제가 이런 자료를 손에 쥐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두려워하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연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한빈 역시 더는 시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제가 원하는 건 간단해요. 교수님과 유리의 파혼.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이 서류는 교수님과 제 사이의 비밀로 남겠죠. 하지만 계속 밀어붙이시겠다면... 제 탓은 하지 마시길.”더 깊은 침묵을 유지하던 연정우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더니 손등에는 혈관까지 불거져 나왔다.박한빈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교수님한테도 꽤 이득이 되는 거래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95화

    “성...”먼저 입을 연 쪽은 연정우였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두세 걸음 만에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갑시다.”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쉬어 있었다.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성유리는 더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어 박한빈의 손을 잡아끌었다.박한빈은 저항하지 않은 채 성유리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리를 뜨려 하던 순간, 연정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성유리의 다른 한 손을 덥석 잡았다.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지만 성유리가 그보다 한발 빨리 연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너무 고민할 필요 없어. 나도... 널 선택하지 않았으니까.”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지금 성리 그룹이 어떤 상황인지 정우 씨도 잘 알잖아. 이런 상황에 난 회사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 걱정할 필요 없겠네. 우리... 서로 미안해할 일은 없겠다. 결혼식은... 취소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연정우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박한빈의 손을 다시 쥐더니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술집은 여전히 떠들썩했다.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화려한 여자들과 환히 웃는 남자들 덕에 공기 중에는 유흥의 분위기가 가득 찼다.이곳에 바로 금성이었다.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차갑기 그지없는 도시였다.이곳에서 매일 누군가는 뭔가를 잃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지만 그 아무도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시내 중심가, 그것도 가장 번화하기로 소문난 곳에서도 투자 버블로 인해 투신한 사람이 있었다.그 흩뿌려진 피와 사라진 생명은 사회 뉴스에 짧은 보도 한 줄로 남아 있었다.성유리 역시 그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작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그런 존재.그러니 성유리는 자신이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바쳐 스스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의 손짓 한 번에 짓밟

최신 챕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59화

    성유리는 그런 연정우의 기분을 알아차렸고 조금 주저하다 먼저 말을 걸었다.“최근 몇 년 동안은... 금성에서 사업을 키워나갈 거지?”그녀의 물음에 연정우는 더 당황해했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근데 난 이제 더 이상 금성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그러자 성유리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난 경운시가 꽤 마음에 들어.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는 거리도 하나의 문제가 되는 거지.”“그건 상관없어. 어차피 여기 교통이 편리해서 나 한 달에 한 번씩 너희 보러 올 수 있어. 게다가... 장성 그룹도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 몇 년 뒤에 자리를 잘 잡으면 나도 다른 곳에 지사를 세울 계획이거든. 그때가 되면 지사 위치로 제일 먼저 경운시를 선택할게.”연정우는 횡설수설 하며 대답했는데 마치 물에 빠져있던 사람이 자신을 구해줄 구세주를 발견한 것처럼 다급했고 절실해 보였다.그는 지금 최선을 다해, 그리고 모든 진심을 꺼내 성유리를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 행여나 그녀가 다시 자신을 떠나갈까 봐.성유리는 연정우의 대답에 별다른 의견을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푹 숙이고는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하늘이를 낳을 때 나는 정말 젖 먹던 힘까지 써버렸어. 다 낳고 나서도 너무 힘든 나날들을 보냈고. 그러니까... 의외의 상황이 오지 않는 이상 난 아이를 낳지 않을 거야.”“잘 알지. 걱정하지 마. 난 하늘이를 꼭 내 친자식처럼 키울 테니까. 그리고 나도 하늘이 정말 좋아해.”“난 지금 정우 너를 많이 좋아하고 있지는 않아. 심지어 네 조건만 보고 그냥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할 수도 있지. 네가 원하는 모든 거... 사랑이나 보답 같은 건 앞으로 못 해줄 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겠어?”성유리는 단도직입적으로 연정우에게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말해줬다.그녀는 이런 말들이 한 남자에게는 정말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지금 연정우의 조건이나 신분으로 놓고 말하면 그는 성유리보다 더 훌륭하고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58화

    그날 밤.하늘이는 오늘 하루 종일 차에 앉아 있어 피곤했는지 샤워를 마치고는 졸려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성유리는 하늘이의 머리를 말려주다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려는 하늘이의 행동에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졸리면 머리 다 말리고 바로 자자. 오늘은 이야기책 읽지 말고. 괜찮지?”“안 괜찮아.”성유리의 물음에 하늘이는 두 눈을 번쩍 뜨더니 대답했다.“난 엄마가 읽어주는 이야기책 듣고 싶어.”“그러자 그럼. 오늘은 뭐 듣고 싶은데?”하늘이는 몸을 벌떡 일으켜 자신의 책장으로 뛰어가더니 그 앞에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국 고민 끝에 하늘이가 고른 것은 바로 [나의 어린 괴물]이라는 책이었다.성유리는 하늘이가 건네는 책을 건네받았다. 사실 이 책은 성유리가 이미 하늘이에게 몇 번이나 읽어줬었지만 아이는 매번 처음 듣는 듯 이야기에 잔뜩 집중했다.그녀가 이야기가 어느덧 끝이 나는 마지막 장을 읽던 그때, 하늘이가 갑자기 물었다.“엄마, 그 괴물은 영원히 나나랑 같이 있어 주는 거야?”“그렇지.”“그럼 엄마는 영원히 하늘이랑 있어 줄 거야?”성유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당연하지.”그제야 하늘이는 만족한 듯 다시 배시시 웃었고 조금 망설이던 성유리가 하늘이에게 물었다.“하늘이도 엄마랑 영원히 같이 있고 싶어?”“응. 당연하지!”“그럼... 하늘이는 엄마랑 하늘이 사이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어?”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하늘이는 대답하기를 꺼렸다. 아니, 사실 아이는 망설이고 있었다.얼마 후, 아이는 사뭇 진지한 얼굴을 하고 성유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연정우 아저씨야?”“연정우 아저씨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라 해도 하늘이는 괜찮겠어?”“난 엄마가 행복하면 그거로 만족해.”하늘이가 예상치 못한 대답을 계속 이어 나갔다.“엄마가 행복하기만 하다면 난 다 괜찮아.”성유리는 아이를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알겠어.”하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57화

    “그게 어떻게 쓸데없는 물건이에요? 그거 엄청 비싼 브랜드예요. 정말 비싸다고요. 제가 특별히...”“그러니까! 그렇게 의도가 뻔히 보이는 물건을 선물로 보내주면 어떡해? 나 진짜 민망해 죽는 줄 알았다고.”성유리는 이를 악물고 사하나의 말에 반박했다.“그땐 저도 시간이 없...”사하나는 말하다 문득 멈칫하더니 어딘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성유리에게 물었다.“아니, 언니가 어떻게 그 브랜드 물건이 뭔지 아세요? 쯧, 언니도 역시 순수한 사람은 아니었네요.”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말문이 막혀 빨리 대꾸하지 못했다. 그러다 그녀를 살짝 째려보고는 한 마디 내뱉었다.“너랑 아무 말도 안 할 거야.”“안 돼요. 언니 아직 저한테 해줄 말이 많이 남으셨잖아요. 그러니까 연 대표님이랑...”“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어. 아무것도.”사하나는 성유리의 간단한 대답에 처음엔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유리의 눈빛을 확인하는 순간,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정말 재미없어! 전 살면서 진짜 처음으로 남녀 둘이 같이 휴가까지 떠나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사례를 봤다고요.”사하나는 얼굴까지 새빨개진 채로 성유리에게 말했다.“우리 둘만 떠난 것도 아니잖아. 하늘이도 있었는데?”하지만 성유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하게 물을 뿐이었다.“어린애가 뭘 안다고 그래요?”사하나는 말하다 문득 다른 일이 떠올랐는지 성유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따지듯 물었다.“설마 아직 박한빈 씨를 못 잊어서 그러세요?”“아니야.”“그럼 왜...”바삐 움직이던 성유리는 하던 행동을 뚝 멈추고는 사하나에게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난 아직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어.”“그리고 넌 정말 나랑 정우가 어울린다고 생각해?”“당연하죠! 왜 안 어울리겠어요? 두 사람이 같이 서 있기만 해도 선남선녀가 따로 없는데! 게다가 언니도 전에 연 대표님이랑 결혼까지 할 뻔하셨다면서요. 좋아해서!”사하나의 말은 사실이었지만 성유리는 왜 그때 당시 자신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56화

    연정우는 아주 평온하게 묻고 있었지만 성유리는 약간의 압박감을 느꼈다.그녀는 약간 뜸을 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나도 알아.”연정우는 얼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너랑 박한빈 씨 사이를 남들이 모를 수는 있어도 내가 모를 리가 있겠어?”“무조건 너를 속여서 그 방까지 데려간 거지? 그리고 너도 하늘이를 그렇게 쉽게 내버려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난 너 믿어.”연정우는 담담한 말투로 성유리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 말해 그녀의 어깨를 무거운 “돌”로 짓누르고 있었다.“너도 밤 샜지? 얼른 들어가서 쉬어.”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계속 말했다.“나도 이만 가볼게.”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연정우는 그녀의 곁을 지나가는 순간, 발걸음을 뚝 멈추더니 갑자기 성유리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너무도 가까워진 둘 사이의 거리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뒤로 몇 걸음 물러섰고 연정우는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터뜨리더니 물었다.“놀랐어?”그는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물었는데 그 조롱이 스스로를 향한 건지 아니면 성유리를 향한 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성유리는 연정우의 물음에 침묵하다 입을 벌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연정우가 먼저 입을 뗐다.“걱정하지 마. 너한테 뭐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얼른 가서 푹 쉬어.”말을 마친 연정우는 뒤돌아 방을 떠나갔고 성유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녀는 침실로 돌아갔고 안에서는 하늘이가 이미 깊은 잠에 들어있었다.아이는 엄마가 옆에 없어 많이 불안한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인형을 꽉 끌어안고 있는 상태였다.성유리는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고 한참 뒤, 천천히 침대에 누워 하늘이를 끌어안았다.그로부터 며칠이 지나도록 성유리는 박한빈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에릭도 종적을 감춰버렸다.하지만 성유리는 오히려 더 자유롭고 신나게 아이와 시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55화

    유리 조각이 땅에 떨어져 내는 큰 소리는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성유리를 강제로 가둬두었던 그 방문도 드디어 스르르 열렸고 그제야 그녀는 박한빈이 이미 전부터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음을 눈치 차렸다.하지만 박한빈은 지금껏 모르는 척 성유리를 가둬두었고 그 사실에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를 휙 쳐다보았다.한편, 박한빈은 이미 자신의 외투를 다 챙겨 입은 상태였고 성유리에게 시선 한번 돌리지 않은 채로 빠르게 방을 떠나갔다.에릭 또한 방에서 나는 큰 소리를 듣고 내려와 입구에서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방안을 쳐다보고 있었다.심지어 성유리와 눈이 마주치자 에릭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까지 건넸다.성유리는 그런 에릭을 상관하지도 않고 몸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떠나버렸다. 그리고 에릭은 재빨리 박한빈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어? 어떻게? 왜? 내가 얼마나 좋은 기회랑 조건을 줬는데!”에릭은 미간을 찌푸린 채 정말 의아하다는 눈으로 박한빈을 쳐다봤다.“그래. 고맙다.”박한빈은 입으로 고맙다고 하고 있었지만 사실 말해 에릭을 귀찮아하는 듯 대충 아무 말이나 하는 것 같았다.“근데 앞으로 이런 건 하지 마.”에릭은 그제야 박한빈이 지금 자신을 거들떠보기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박한빈의 말에 반박했다.“나는 뭐 이러고 싶어서 이런 줄 알아? 난 여기 휴가를 즐기러 왔다고. 근데 이게 뭐야? 괜히 이런 일에 엮이기나 하고.”에릭의 말에는 불만이 가득 묻어나 있었지만 박한빈은 들은 체도 안 하고 계속 앞으로 걸어가기만 했다.그러자 에릭은 더 이상 궁금해 참지 못하겠는지 빠른 걸음으로 박한빈에게 다가가며 물었다.“그래서 결과는? 두 사람...”“나랑 유리는 앞으로 아무 일도 없을 거야.”박한빈이 대답했다.“그러니까 너도 앞으로 쓸데없는 일 하지 마.”‘쓸데없는 일?’박한빈의 말에 에릭이 화가 나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어제 네가 그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54화

    방안에는 소름 끼칠 만큼 고요한 정적만이 흘렀다.성유리는 이미 박한빈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은지 소파에 앉아 입구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마치 문이 열리기만 하면 당장 뛰쳐나갈 사람처럼.박한빈은 사실 깨어났을 때부터 얼른 샤워부터 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욕실로 들어가는 순간 성유리가 사라져 버릴까 봐 걱정되었다.비록 성유리가 떠날 수만 있다면 진즉에 떠났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지금 방문이 잠긴 상태라는 것도 알지만 박한빈은 움직이기 싫었다.펄펄 끓던 열이 내려가자 박한빈은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왔지만 잠에 들기는 싫어 침대에 기대앉은 채로 조용히 성유리를 바라봤다.“연정우 씨랑 결혼하려고?”박한빈이 침묵을 깨뜨리며 성유리에게 물었다.둘만 있는 호텔 방에서 박한빈의 말이 성유리에게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지만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대답하기를 거절하는 건가?’박한빈은 흠칫하기만 할 뿐 대답 없는 성유리를 보다 다시 말을 꺼냈다.“사실 유리야, 난 네가 아예 모르는 남자랑 결혼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사람이 말이야, 인품이 보증만 되고 너한테 잘해주기만 하면 되지. 안 그래? 근데 연정우 씨는... 그 사람은 아니지 않나? 너도 알잖아. 그 사람이 전에 어떤 짓을 했는지.”“그건 이미 다 지나간 일이잖아요.”성유리가 대답했지만 박한빈은 그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듯 물었다.“어떤 일은 지나간 거라고 해서 정말 지나간 게 아니잖아. 아니야? 그럼...”말을 하던 박한빈이 순간 뚝 멈췄다. 왜냐하면 지금 상황에 자신이 이런 말들을 더 늘어놓는다면 미련해 보이고 멍청해 보인다는 사실을 알기에.이미 했었던 말과 들었던 답을 반복해 듣는 것 또한 불필요한 일이 아닌가!성유리는 박한빈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듯 고개를 돌려 그를 슬쩍 쳐다보고는 대답했다.“전 그냥 지나간 거면 지나가게 놔둘래요. 그리고 하늘이가 정우를 많이 좋아해요.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이죠. 정우라면 우리 하늘이가 더 좋은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53화

    ...박한빈은 자기가 몇 시간을 잤는지도 감이 안 잡혔다.머리는 계속 휭 한 상태였고 올려다본 천장은 빙글빙글 돌았다. 어떨 때는 얼음 빙판을 걷는 듯 주위의 공기마저 차게 느껴졌지만 또 어떨 땐 사막을 걷는 듯 너무 더웠다.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이 박한빈은 어렴풋이 성유리를 본 것 같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짜증 난다는 듯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성유리를 잡고 싶었지만 그녀는 빠르게 그 손을 피해버렸고 성유리가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도, 애정도 느껴지지 않았다.그래서 박한빈은 뻗었던 손을 다시 내려놓아야 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눈을 떴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박한빈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었고 이마에 붙이고 있는 해열패치는 이미 그의 체온과 비슷한 온도로 변해갔다.온몸은 금방 씻은 듯 푹 젖었는데 정말 사막이라도 걷다 온 사람 같아 보였다.천천히 고개를 돌려 방을 둘러보던 박한빈은 방 안에 있는 작은 소파에 누군가 샤워가운을 덮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창을 통해 달빛이 환하게 방을 비추자 박한빈은 누워있는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기다린 속눈썹과 하얀 피부, 그리고 늘 그렇듯 도톰하고 예쁜 입술.박한빈은 그녀의 얼굴을 말없이 한참 동안을 가만히 바라만 보다 순간 무언가가 떠올랐다.‘오늘이... 보름 아닌가?’망설이던 박한빈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성유리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하지만 그때, 성유리가 눈을 번쩍 떴다.그렇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박한빈은 그대로 제자리에 얼어붙었다.금방 깨어난 성유리도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먼저 입을 열었다.“깨셨어요?”박한빈이 착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성유리가 지금 살짝 기뻐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그 착각이 오래가기도 전에 성유리가 다시 말했다.“빨리 에릭 씨한테 연락하셔서 저 좀 풀어달라고 하세요.”성유리의 말을 들은 박한빈은 멍해졌다. 마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52화

    성유리는 박한빈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아 약과 물을 계속 건네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빨리 약 드시라고요.”그녀의 안색은 아까보다 더 굳어있었고 말투 또한 딱딱하기 그지없었다.박한빈은 멍하니 그런 성유리를 바라보다 주인 말을 잘 듣는 순한 강아지처럼 약을 건네받고는 입안에 넣었다.금방 물을 컵에 따른 성유리조차 그 물이 너무 차갑다고 느꼈지만 박한빈은 내색하지 않고 꿀꺽꿀꺽 다 마셔버렸다.“누워요. 다시 주무세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이 조심스레 물었다.“넌 갈 거야?”그녀는 지금 박한빈이 정신을 차린 상태인지 아니면 해롱해롱한 상태인지 구분이 안 갔지만 그의 물음을 듣는 순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막 터져 나왔다.“당신의 좋은 친구분이 저를 방안에 가둬버렸어요. 게다가 제 핸드폰이랑 박한빈 씨 핸드폰까지 다 가져갔고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떠나죠? 창문을 통해 뛰어내리기라도 해야 되나?”박한빈은 한꺼번에 울분을 토해내듯 말하고 있는 성유리를 그저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마치 그녀의 말을 애써 이해하려는 어린아이처럼.한참 뒤, 박한빈은 성유리가 떠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스스로 내렸다.그러자 안심이 된 듯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누워 잠에 빠져 들었다.해열제의 효과는 생각보다 더 좋았다. 불과 두 시간 만에 박한빈의 열이 다 내려갔지만 성유리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왜냐하면 아직 워터파크에 하늘이와 연정우가 있으니 말이다.‘나를 못 찾으면 불안해할 텐데. 많이 걱정하고 있으려나?’그리고 에릭이 한 말들과 행동을 돌이켜보면 성유리가 박한빈을 챙겨주기만 하면 풀려나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성유리도 없이 에릭이 연정우와 마주친다면 그가 과연 무슨 말을 하겠는가?하지만 사실 성유리는 지금 에릭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에릭은 연정우라는 사람을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그때, 연정우가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어왔다.“성유리 씨 찾으십니까? 죄송한데 지금 유리 씨는 전화 받을 시간이 없어서요.”“누구시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51화

    “그럼 지금...”성유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릭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뒤돌아 방을 나가며 빠르게 방문을 잠가버렸다.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성유리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에릭이 이미 도망가지 못하게 문을 밖에서 잠가버린 상태였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당장 이 문 여세요.”성유리는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문고리를 힘껏 당기며 에릭을 향해 소리쳤다.“해열제는 이미 안에 넣어뒀습니다.”에릭은 문밖에서 태연하게 대답했다.“방금 의사가 해열제만 먹으면 괜찮을 거라고 하더군요. 다른 일은... 성유리 씨가 알아서 하십시오.”그의 말에 성유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당장 문 열어줘요! 이런 미친 사람을 봤나? 박한빈 씨가 아픈 게 저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러세요?”힘껏 문을 두드리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성유리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더 이상 힘으로 문을 여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 성유리는 방 안에 있는 호텔 전화기로 카운터에 전화를 걸려고 했다.그러나 이내 성유리는 에릭이 이미 전화기 선을 끊어버린 것을 발견했다. 당연하게도 전화기는 먹통이었고 게다가 성유리 개인 핸드폰도 사라졌다.‘도대체 내 핸드폰은 언제 가져간 거야?’성유리는 방안을 돌아다니며 박한빈의 핸드폰을 찾아보려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성유리의 핸드폰까지 몰래 빼간 에릭이 박한빈의 핸드폰을 남겨뒀을 리가 없었다.너무도 화가 나 주저앉은 성유리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두 주먹을 꽉 쥔 채 이를 악물었다.한참 뒤, 성유리는 결심한 듯 침대맡으로 다가가 박한빈의 이름을 불러보았다.“박한빈 씨.”그는 끓는 열 때문에 추워졌는지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깊은 잠에 들어있었다. 성유리는 그날 처음으로 박한빈의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본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전혀 마음이 약해지거나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잠에 빠져있는 박한빈을 있는 힘껏 밀며 소리 질렀다.“당장 일어나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