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의 말에 성유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더니 이내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그 표정을 마주한 박한빈의 가슴에는 묵직하고도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보아하니... 그의 추측이 정확했던 것 같다.두 사람은 계약관계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계약을 넘어 그 이상의 감정이 생긴 것 같았다.성유리가 정말로 연정우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그게 아니라면 지금 박한빈을 바라보는 성유리의 눈빛을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방금 성유리나 성리 그룹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 정도의 반응이 없었다.그 통증은 박한빈의 가슴 속에 천천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그리고 그 동시에 입안에서는 익숙한 피비린내가 느껴졌다.박한빈은 목울대를 몇 번 움직이더니 숨을 깊게 쉬고 나서야 고통스러운 그 느낌을 간신히 억누를 수 있었다.“보아하니 정말 연정우를 소중히 여기나 보네.”“박한빈 씨, 이건 우리 둘 사이의 문제예요. 제발 이런 식으로 비열하게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려 하지 마요!”“무고한 사람이라고?”박한빈이 비웃기 시작했다.“넌 네가 그 사람을 얼마나 잘 안다고 생각해? 네 그 ‘무고한’ 약혼자가 네 뒤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니는지는 알아?”성유리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옆에 있던 서류를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한번 봐.”성유리는 박한빈이 내민 서류를 바라보았지만 차마 쉽게 손을 대지 못했다.박한빈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굳이 확인 안 해도 상관은 없어. 어차피 난 다 정리 마쳤고, 이제 검찰에 넘기기만 하면 되니까. 만약 연정우가 그때 가서 너에게 충분히 막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가만히 내버려 뒀다는 걸 안다면, 화를 내진 않을까?”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성유리는 그 서류를 열어보고 말았다.서류에 적힌 자금 유통 내역, 사진과 채팅 기록을 확인한 성유리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리고 박한빈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외쳤다.“이게... 대체 뭐야!”“왜, 이해가 안 되나?”박한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내가 설명해
박한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으로 몇 발짝 다가간 성유리가 손을 높이 들었다.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녀의 손바닥은 박한빈의 그 어디도 건드리지 못했다.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있던 박한빈의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미친놈.”성유리가 말했다.박한빈은 그 말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응, 나도 알아.”성유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고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하지만 박한빈에게 절대 지고 싶지 않다는 듯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을 닦아냈다.“연정우 씨 외할아버님께서 지금 몸이 좋지 않으세요.”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치매에 걸리셨는데 병세가 점점 악화되고 있어요. 어쩌면 곧 모든 걸 다 기억하지 못할 지도 몰라요. 그래서 정우 씨가 최대한 빨리 나랑 결혼하려고 한 거예요.”성유리가 말을 마쳤지만 박한빈에게서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박한빈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었다.성유리의 시선이 여전히 자신에게 머물러 있는 것을 발견한 박한빈이 되물었다.“그래서? 그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지?”그 말에 성유리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그러니까, 결혼식은...”“안돼.”박한빈은 단호한 말투로 성유리의 말을 끊었다.그렇게 성유리의 목소리는 철저히 무시당했다.그녀의 꽉 쥔 주먹에는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정말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는 거예요? 박한빈 씨, 정말 저를 죽음으로 내몰 생각이냐고요?!”그 말에 박한빈이 웃음을 터뜨렸다.“그게 왜 나 때문이야? 연정우와 연정우 할아버지가 그런 짓을 저지르지만 않았다면 내가 이런 약점을 잡을 수도 없었겠지. 치매에 걸린 거? 그건 다 하늘에서 천벌 내린 거야. 인과응보라고. 그 사람들은 그렇게 불쌍하게 여기면서, 왜 난 동정 안 해줘? 그 사람들만 불쌍하고 혼자 버려진 나는 안 불쌍해? 네가 날 어떻게 대했는지 벌써 잊은 거야?”박한빈은 자신이 진심으로 억울한 일을
박한빈은 성유리의 턱을 움켜잡더니 분노로 가득 찬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너, 설마 정말 연정우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야?”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눈빛은 유난히 밝고 매혹적인 빛을 띠었다.박한빈은 그 눈물 너머 자신을 바라보는 성유리의 모습을 또렷이 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증오였다.그녀는 그를 증오하고 있었다.박한빈 역시 이미 알고 있었다.그가 이런 선택을 할 때부터 성유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딴 게 뭐가 중요할까?성유리와 평생을 남남으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평생 미움받는 편이 나았다.그녀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박한빈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성유리가 성리 그룹의 일 때문에 자신을 증오하든, 아니면 단순히 자신을 증오하든 모두 괜찮았다. 하지만 연정우 때문에 자신을 증오하는 것은 정말 받아들일 수 없었다.성유리의 눈물을 마주한 박한빈의 손발이 점점 차가워졌다.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하지만 질문을 내뱉은 순간, 엄청난 후회가 밀려왔다. 그는 성유리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지? 너희는 단순히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일 뿐인데, 어떻게...”“왜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면 안 되는데요?”박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단호한 말투로 그의 말을 끊었다.성유리의 그 한 마디는 육중한 바위가 되어 박한빈의 입을 막아버렸다.그의 주먹이 힘껏 쥐어졌다.하지만 이내 손에 힘을 뺀 박한빈은 뻣뻣하게 굳어버린 입꼬리를 애써 끌어올리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거지, 유리야? 방금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연정우는 이때까지 계속...”“정우 씨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했든, 적어도 내 앞에서만큼은 진심으로 날 아껴줬어요. 그 사람은 다정하고 항상 내 기분부터 살펴주거든요. 내가 필요할 때마다 항상 옆에 같이 있어 주고요. 그런 사람을 좋아하
밖에서 들려오는 문고리 소리에 짜증이 밀려온 박한빈이 고개를 들어 큰소리로 외쳤다.“꺼져!”간결한 한 마디에 사무실 밖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그의 품 안에 안겨 있던 성유리 역시 마찬가지였다.성유리는 더 반항해봤자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그를 밀어내던 두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녀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까지 그 행동과 함께 메말라갔다.그녀는 조용히 자리에 눕더니 고개를 들어 공허한 눈빛으로 천장에 걸려 있는 백열등을 바라보았다.그런 성유리를 잠시 바라보던 박한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힘들어? 아니면 억울해? 연정우를 떠나는 게 그렇게 힘드냔 말이야.”그는 애써 조롱하려는 듯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박한빈의 손 역시 제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가슴 속에서부터 피어오른 고통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손끝까지 다다른 것이다.성유리는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태도로 미루어 보았을 때 박한빈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듯했다.박한빈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래, 그런 것 같네. 좋아, 기회를 한 번 더 주지. 어때?”성유리가 천천히 눈을 돌려 박한빈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마주한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혀를 한 번 찼다.하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은 그가 입을 열었다.“연정우를 만나서 방금 그 서류를 보여줄 예정이야. 만약 그걸 보고도 너랑 계속 결혼하려 한다면 더는 나도 강요하지 않고 둘 사이를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어때? 성유리, 나랑 내기 하나 할래?”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다.그녀의 침묵에 박한빈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왜, 겁나? 방금까지만 해도 그렇게 칭찬하더니. 그러니까 너도...”“좋아요.”박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박한빈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내기할게요.”“좋아.”박한빈이 고개를 끄덕이
박한빈은 아무 대답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연정우에게 던지듯 건넸다.연정우는 고개를 숙여 그 봉투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이내 눈빛을 반짝이다가 손을 뻗어 서류를 받아들었다.앞의 몇 장만 대충 본 그의 표정이 점점 창백해졌다.서류를 쥔 손에는 점차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이윽고 그는 박한빈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게 무슨 뜻입니까?”박한빈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뭘 것 같으세요?”“이 서류들, 다 어디서 구한 겁니까?”연정우는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더니 차분하게 물었다.“그건 교수님께서 아실 필요 없습니다.”“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박한빈은 소파에 앉아 천천히 손을 뻗어 자신의 잔으로 술을 따르고는 한 모금 들이켰다.그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우아하고 품위 있었다.하지만 그런 박한빈을 보는 연정우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박한빈이 입을 열었다.“제가 원하는 게 뭐일지는... 이미 충분히 아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박 대표님, 같은 남자로서 이런 방법을 쓰는 건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연정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성리 그룹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박 대표님은 그저 지화 그룹의 대표라는 자리를 이용해서 제멋대로 구는 것뿐이잖습니까!”“그래요, 제가 가진 게 그런 거니까요. 문제 있습니까?”박한빈이 진지한 눈빛으로 되물었다.“그리고, 연 교수님께서 정말 그렇게 깨끗한 사람이었다면, 제가 이런 자료를 손에 쥐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두려워하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연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한빈 역시 더는 시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제가 원하는 건 간단해요. 교수님과 유리의 파혼.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이 서류는 교수님과 제 사이의 비밀로 남겠죠. 하지만 계속 밀어붙이시겠다면... 제 탓은 하지 마시길.”더 깊은 침묵을 유지하던 연정우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더니 손등에는 혈관까지 불거져 나왔다.박한빈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교수님한테도 꽤 이득이 되는 거래
“성...”먼저 입을 연 쪽은 연정우였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두세 걸음 만에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갑시다.”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쉬어 있었다.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성유리는 더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어 박한빈의 손을 잡아끌었다.박한빈은 저항하지 않은 채 성유리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리를 뜨려 하던 순간, 연정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성유리의 다른 한 손을 덥석 잡았다.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지만 성유리가 그보다 한발 빨리 연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너무 고민할 필요 없어. 나도... 널 선택하지 않았으니까.”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지금 성리 그룹이 어떤 상황인지 정우 씨도 잘 알잖아. 이런 상황에 난 회사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 걱정할 필요 없겠네. 우리... 서로 미안해할 일은 없겠다. 결혼식은... 취소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연정우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박한빈의 손을 다시 쥐더니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술집은 여전히 떠들썩했다.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화려한 여자들과 환히 웃는 남자들 덕에 공기 중에는 유흥의 분위기가 가득 찼다.이곳에 바로 금성이었다.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차갑기 그지없는 도시였다.이곳에서 매일 누군가는 뭔가를 잃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지만 그 아무도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시내 중심가, 그것도 가장 번화하기로 소문난 곳에서도 투자 버블로 인해 투신한 사람이 있었다.그 흩뿌려진 피와 사라진 생명은 사회 뉴스에 짧은 보도 한 줄로 남아 있었다.성유리 역시 그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작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그런 존재.그러니 성유리는 자신이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바쳐 스스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의 손짓 한 번에 짓밟
성유리는 자신이 다시 도연제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곳을 떠나던 그 날, 다시 여기로 돌아올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저택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박한빈이 모두 내보낸 듯했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집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데리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안방의 문이 그에 의해 열렸다.안의 가구 배치가 예전보다 조금 달라진 듯했지만 성유리가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를 침대에 밀어 눕혔다.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표정을 굳힌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의 행동에서는 다정함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런 상황을 이미 예측한 성유리도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아무런 저항의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성유리의 무반응이 박한빈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기라도 한 듯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목을 세게 물었다.단순한 애무가 아니라 정말 힘껏 문 것이었다.박한빈의 이빨이 피부를 뚫어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성유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며 손을 들어 박한빈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그녀의 손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며칠 동안 쌓여왔던 모든 분노와 억울함이 이 한 대에 실려 박한빈의 뺨에 닿았다.그렇게 새하얀 그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그 순간, 마음이 약해진 성유리는 자신이 너무 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이런 얼굴로 출근한다면 분명 모두의 이목을 끌 게 뻔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성유리가 박한빈의 뺨을 내리칠 때, 그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그 반응에 당황한 성유리는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병신.”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손길로 그녀를 매만졌다.하지만 그런 다정함이 성유리는
지금 그 꽃은 이미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았다. 다 죽은 꽃에 뒤늦게 찾아온 햇빛과 보살핌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성유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하지만 그 순간, 눈을 감으려던 성유리는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을 발견했다.성유리의 기억이 맞다면 그것은 그녀가 애용하던 브랜드의 스킨케어 제품이었다.뒤이어 창가에 묶여 있는 커튼 끈과 맞은 편 드레스룸의 유리문 너머 걸려 있는 익숙한 옷가지도 눈에 들어왔다.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이곳에 남겨두고 갔던 물건들을 박한빈이 다 옮겨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사실 그 물건들은 성유리의 것이 아니었다.옷들은 성유리가 박 대표의 아내라는 칭호에 걸맞을 수 있게 김서영이 사준 옷들이었다. 자신의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떠날 때도 굳이 챙겨가지 않았던 것이다.그리고 스킨케어 제품들도... 아마 이젠 유통기한이 다 지나지 않았을까?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멈췄다.그녀는 생각하는 것을 멈춘 채 눈을 질끈 감았다.어둠 속에서 박한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옆에 자리 잡고 누웠다.샤워를 금방 마치고 나온 그는 상쾌한 향기를 풍기며 성유리의 허리를 감싼 팔에 점점 힘을 주었다.둘의 피부가 조금의 틈도 없이 단단히 맞닿았다.하지만 박한빈은 더 가까이 붙으려는 듯 힘을 더 주더니 팔을 더 세게 조여왔다. 마치 성유리를 자신의 육체에 완전히 새기기라도 할 것 같았다.그 엄청난 힘에 성유리는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버거웠다.참다못한 성유리가 박한빈의 손등을 몇 번 꼬집으며 말했다.“놔! 아파!”그녀는 여전히 이를 악문 채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팔의 힘을 어느 정도 느슨하게 풀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성유리에게 밀착해 있었고 입술은 수시로 그녀의 피부에 댄 채 가볍게 키스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개새끼냐고 묻고 싶었다.하지만 조금 전 그의 뺨을 후려갈겼을 때, 오히려 즐겁
“싫어요.”성유리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단칼에 거절했다.그러자 박한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왜?”“그때 찍은 사진 안 예뻐요.”“그럼 다시 찍자.”“우리 결혼한 지가 얼마나 됐는데 이제 와서 다시 찍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나는 의미 있다고 보는데.”“당신 원래 사진 찍는 거 싫어하잖아요?”성유리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박한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그의 속내를 간파한 듯 미소를 지었다.“박한빈 씨, 뭐든지 남이 가지고 있는 건 다 가져야겠어요? 애처럼 굴지 마세요.”박한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 손에 들고 있던 청첩장을 옆으로 휙 던졌다.그리고는 외투를 거칠게 벗어던졌다.성유리는 그 행동의 의미를 순간적으로 깨달았고 이내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찍어요. 다시 찍자고요. 저희 내일 당장 가서 찍어요.”...아라는 요즘 결혼 준비 때문에 사실상 반강제로 집에 갇혀 지내고 있었다.에릭이 보낸 200억이나 되는 예물이 이미 입금되었다.그 돈으로 아라의 가족은 즉시 새집을 샀고 아버지는 새 차까지 뽑았다.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친척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찾아왔다.거실에서는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내가 뭐랬어? 아라는 딱 봐도 크게 될 애라고! 해외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좋은 신랑감을 데려와?”“그러게 말이야. 형, 이런 사위가 있으면 노후 걱정 끝난 거 아니야?”“하하, 난 그냥 우리 딸 미래를 위해서 한 거지!”아라의 아버지는 흡족한 듯 계속 말했다.“솔직히, 난 우리 딸이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싫어했어. 그래서 가까운 데서 결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애가 직접 데려온 사람이 외국인인 데다 너무 잘해주니까 어쩌겠어? 거절할 수가 없지!”“거절? 그런 걸 거절하는 게 바보지!”“맞아! 이렇게 좋은 결혼... 남들은 꿈도 못 꾸는걸!”“근데 말이야, 아직 형 사위를 직접 본 적이 없네? 이왕 다 모인 김에 같이 식사라도 한 끼 할까?”“식사는 무슨,
성유리가 마련한 집은 작지만 아늑했다.하지만 층이 낮아 창가에 서도 제대로 된 풍경이나 달빛조차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박한빈의 팔을 힘주어 움켜쥐었는데 목소리는 이미 살짝 쉰 상태였다.사실 성유리는 박한빈의 화가 전혀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조금 전 보였던 불쌍한 척과 반성하는 태도는 결국 밀고 당기기의 한 수였을 뿐이었다.성유리는 다 봤다.손등의 작은 상처 외엔 몸 어디에도 멍 하나 없었다.심지어 그 상처도 벽에 일부러 긁어서 만든 걸지도 몰랐다.지금의 박한빈 성격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그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성유리가 안심하고 자신을 집에 들여보내는 것.일단 문을 열어준 순간, 주도권은 박한빈 것이었다.그리고 그는 충분히, 아주 충분히 성유리에게서 ‘보상’을 받아 갔다.바로 지금처럼.성유리는 이미 여러 번 머리까지 저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하지만 박한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점점 더 거칠게, 센 힘으로 성유리를 탐했고 그녀의 생사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하는 수 없이 성유리는 그날 밤 박한빈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수없이 내뱉었다.다음 날 아침, 스스로 했던 말을 떠올려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반면, 박한빈은 대단히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집 괜찮네. 앞으로 종종 와야겠다.”그 말에 성유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박한빈이 떠난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꾸는 것이었다.그날 밤, 정말 박한빈과 에릭이 싸웠는지는 성유리도 알 수 없었다.다만, 확실한 건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거의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는 것이었다.그리고 에릭과 아라의 결혼 준비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성유리는 이미 청첩장을 받아 두었는데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아라였다.청첩장 안에는 그들과 함께 찍은 웨딩사진도 들어 있었다.사진 속 아라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고 에릭은 그녀의 뒤에 서서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린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흔한 웨딩 촬영 포즈였지만 성유리는 어딘가 모
갑작스럽게 터진 박한빈의 웃음에 성유리는 멍해졌다.그러다 이내 마치 정신병자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가만히 쳐다봤다.“너 이제 안 화났어?”박한빈이 묻자 성유리는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화가 난 상태여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심지어 집에 가는 것도 싫다고 선언한 상태였다.방금 박한빈이 괜히 상기시켜 주는 바람에 다시 감정을 끌어올리려던 순간, 박한빈은 갑자기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오늘은 내가 잘못했어.”뜻밖에도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그의 태도에 성유리는 당황했다.“내가 널 너무 가뒀어.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네가 하면 안 된다고 말한 것도 잘못이야.”“난 그냥 네가 너무 걱정됐어. 누군가 너를 속이거나, 혹시 또 위험한 일이 생길까 봐.”진심을 다해 말하는 박한빈을 본 성유리는 할 말을 잃었다.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그녀 또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도 잘못했어요.”“네가 뭘 잘못했는데?”박한빈은 성유리를 쓱 밀어내곤 그녀와 눈을 맞췄다.그 태도가 너무 명확했기에 성유리가 그의 의도를 모를 수 없었다.‘유도신문 같은 거였구나. 결국 나한테서 이런 대답을 들으려던 거였어.’하지만 이미 말을 꺼낸 이상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사실 저도 그런 곳을 좋아하진 않아요. 그냥... 아라 씨가 너무 불쌍해서 같이 간 거고요.”성유리는 자신이 말한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불쌍하다는 말, 그 말을 내뱉는 순간부터 성유리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히고 있었다.집안이 비슷해야 잘 어울린다는 어른들의 말과 사랑하기만 한다면 아무 문제 없다는 말은 어느 정도 정확했다.하지만 그런 문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이 발생하기 마련이다.마치 아라와 에릭처럼.그들의 차이는 너무도 컸다.그리고 아라의 부모는 에릭을 마치 ‘입장권’처럼 여겼다.결혼을 위한 거액의 지참금조차도 그들에게는 그저 돈벌이 수단이었다.그 결과, 아라는 점점 외딴섬처럼 고립되었다.혼자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단순한 싱글 파티라는 명
성유리가 산 집은 사실 그리 크지 않았다.비록 그녀가 받은 저작권 수익이 적지는 않았지만 땅값이 비싼 금성에서 겨우 방 두 개짜리 작은 아파트 계약금 정도를 마련할 수 있을 뿐이었다.이 집에 박한빈은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그리고 성유리는 알았다.그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다는걸.하지만 박한빈이 모르는 사이 성유리는 이곳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잘 꾸며 놓았다.필요한 생활용품들은 모두 근처 마트에서 산 터라 세면을 마친 성유리는 바로 침대에 누웠다.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공간이 생겼다.그러니까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눈을 감고 한참 누워 있던 성유리는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어쩐지 어색했다.매일 밤 박한빈과 함께 있다가 오늘 처음으로 혼자 있는 침대가 이렇게 넓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게다가 새로 들여놓은 가구에서는 아직도 약간의 냄새가 났다.결국, 한참을 누워 있던 성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던 것은 아니었다.방금 술집 앞에서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이제 와서 돌아가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그저 잠이 안 와서 아래층 편의점에 가서 뭐라도 사 오려고 했을 뿐이다.하지만 문을 연 순간, 그 앞에 서 있는 박한빈과 마주쳤다.박한빈은 담배를 손에 들고 있었다.아직 피우던 상태였는데 성유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놀란 듯 급히 담배를 비벼 끄며 변명했다.“나... 지금 막 다시 피우기 시작했어.”그리고는 얼른 담배를 손바닥 안에 꽉 쥐었다.“왜 나왔어?”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그렇지만 곧바로 성유리는 또 다른 걸 깨닫고 다시 물었다.“아니,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죠?”“관리실에 알아봤어.”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사실 박한빈에게 이걸 물어본 게 실수였다.여기는 금성이다.박한빈이 모르는 일이 있을 리가 없는 금성.아마 성유리가 이 집을 사자마자 관리사무소에서 바
박한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유리는 이미 혼자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어디 가려고?”그는 급히 따라붙으며 물었다.“이제 집에 가야죠.”“나...”“당신이랑 같이 안 가요.”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다.“전 제집으로 갈 거예요.”그녀가 말하는 집은 저작권 수익으로 스스로 마련한 집이었다.박한빈은 한때 성유리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굳이 네 명의로 집을 살 필요 있어? 내가 가진 부동산이 얼마든지 있는데? 네가 원하면 하나 넘겨줄 수도 있어.”하지만 성유리는 끝까지 자신의 명의로 집을 장만했다.박한빈은 그때는 그녀의 고집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야 알 것 같았다.성유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얽매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예전에는 둘이 싸우면 김서영에게 갔었다.하지만 김서영이 아무리 그녀를 아낀다 해도 결국 박한빈의 어머니였다.이제는?성유리는 더 이상 그런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술이 취한 상태라 운전을 할 수 없었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떠났다.박한빈은 차를 몰고 따라가려 했다.그런데 바로 그 순간 술집 입구에서 보안 요원들이 일제히 2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다급하게.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뻔했다.‘쟤가 또 난동을 부렸겠지.’성유리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던 박한빈은 짧은 고민 끝에 술집 안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역시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방 안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에릭은 테이블이며 술병이며 모조리 집어던졌고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은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그리고 소파 한쪽에 앉아 있는 아라는 머리카락과 옷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누가 봐도 에릭이 술을 끼얹은 것이었다.모든 분노를 쏟아낸 에릭은 이제 아라를 데리고 나가려 하고 있었다.하지만 술집 관계자들이 그렇게 쉽게 보내줄 리 없었다.에릭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고 당장이라도 난폭하게 부딪칠 듯한 기세였다.그 순간, 박한빈이 앞으로 나섰다.그는 술집 매니저에게 조용히
“와, 오셨어요?”성유리는 박한빈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태연한 반응을 보였다.그녀는 심지어 반갑다는 듯 그의 손을 잡으려 했다.“있잖아요. 이 사람도 이우빈 씨를 안대요. 그리고...”성유리는 옆에 있는 남자를 돌아보며 되묻더니 깔깔 웃었다.분명 술을 꽤 마신 상태였다.그리고 그녀가 모르는 사이, 옆의 남자는 이미 창백한 얼굴로 얼어붙어 있었다.그들의 일이 떳떳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단순히 술자리에서 대화만 나눈다 해도 어느 남자가 자신의 여자가 이런 곳에서 논다는 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더군다나 박한빈 같은 사람이라면?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이 남자는 자신이 건드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하지만 성유리는 그런 분위기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여전히 남자에게 방금 하던 이야기를 이어가라며 재촉하고 있었다.박한빈은 더 이상 들어줄 수가 없었다.그래서 그는 더 볼 것도 없이 자신의 재킷을 벗어 성유리의 어깨에 덮어씌웠다.그리고 허리를 숙여 성유리를 그대로 안아 올렸다.“야, 박한빈. 잠깐만! 아직 얘기 끝나지도 않았다고요.”성유리는 불만스럽게 소리치더니 심지어 몸을 버둥거리며 내려놓으라고 했다.술에 취해 반말까지 하는 성유리였지만 박한빈은 단호했다.이내 팔을 단단히 조여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좀 살살 해요. 그리고 저 혼자 걸을 수 있다고요.”성유리가 짜증을 내며 소리쳤지만 박한빈은 전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그냥 묵묵히 그녀를 안고 걸어 나갔다.한참을 가던 중, 성유리는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아라 씨는요? 아직 안 나왔잖아요. 저보다 더 마셨는데 제가 가서 데리고 나와야...”“아라 씨 약혼자가 데리러 올 거야.”박한빈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그래도 혼자 두면 위험하잖아요. 만약...”“너도 거기가 위험하다는 거 알고 있었어?”참고 참던 박한빈의 분노가 살짝 터져 나왔다.그 한마디에 성유리는 움찔하더니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너 거기가 어떤 곳인지 알기나 해?
“음... 그럼 제가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줄게요.”아라는 그렇게 말하더니 성유리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녀가 말한 좋은 곳은 다름 아닌 바로 위층이었다.술집 안에 마련된 작은 룸들, 성유리는 처음엔 노래방 같은 곳인 줄 알았다.하지만 아라가 문을 열었을 때, 그 안에는 하얀 셔츠를 입고 단정한 미소를 띠고 있는 남자들이 한 줄로 서 있었다.성유리는 순간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그러나 아라가 그녀의 손목을 다시 붙잡았다.“어디 가시려고요?”“이건... 좀 아닌 것 같아서요.”성유리는 고민하다 결국 이런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무서워하실 필요 없어요.”걱정 가득한 성유리와는 달리 아라는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유리 씨는 정말 그 사람들이 밖에서 밥만 먹고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저랑 에릭 씨가 어떻게 만났는지는 알고 계시죠?”“그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일을 왜 저희는 하면 안 되는 건데요?”...“네 마누라는?”에릭의 전화가 왔을 때, 박한빈은 서재에서 일하는 중이었다.성유리가 없으니 물 한 잔 떠다 줄 사람도 없었다.이래저래 짜증이 나던 참에 에릭이 다짜고짜 그렇게 물어왔다.그래서 박한빈은 짜증 섞인 말투로 에릭에게 되물었다.“이 밤중에 남의 마누라 행방을 묻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냐?”“안 될 건 또 뭔데?”에릭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네 마누라는 지금 아라랑 같이 있을 걸?”“그래서?”“그 둘이 어디 있는지 알아?”“궁금하면 네 약혼녀한테 직접 물어보지 그래?”“내가 그걸 물어볼 수 있으면 너한테 전화했겠냐?”에릭의 말투가 점점 변해갔지만 박한빈은 별 대꾸 없이 전화를 끊으려 했다.그때 에릭이 이런 말을 덧붙였다.“그리고 내가 방금 어떤 메시지를 받았는지 궁금하지 않아?”“전혀.”“흠, 둘이 술집에서 일하는 남자들을 불러서 노는 중이라는데... 이 정도면 관심이 생기려나?”그 한마디에 박한빈의 관자놀이가 움찔거렸다.
성유리는 싱글 파티라고 해서 최소한 열 명 이상은 모일 줄 알았다.하지만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고 보니 그곳엔 아라를 제외하면 손님은 혼자였다.게다가 장소도 술집이었다.아라는 바텐더와 가볍게 대화를 나누며 한껏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성유리는 자연스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아라는 금방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왔어요? 이쪽이에요!”성유리는 아라 쪽으로 다가가며 그녀 손에 들린 술잔을 흘깃 쳐다보았다.“이래도... 괜찮아요?”“아, 유리 씨는 아직 모르죠?”아라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이제 뱃속에 애는 없어요. 그러니까 마셔도 상관없고요.”아라의 목소리는 무척 담담했지만 성유리는 그 대답에 순간 온몸이 굳어졌고 눈도 점점 휘둥그레졌다.그러나 아라는 아무렇지 않은지 시선을 돌리더니 다시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사실 별일도 아니에요. 애초에... 낳을 생각도 없었고요.”“이제 없어진 게 오히려 잘된 거죠. 혼전임신... 저희 집안에서도 썩 달가워하지 않았거든요.”아라는 그렇게 말하며 성유리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동안 부모님도 비슷한 말로 위로해 주었다.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처음에는 오히려 걱정을 많이 했다. 혹여 아이가 사라지면 에릭이 결혼을 취소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그러다 에릭이 변함없이 결혼을 진행하겠다고 하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는 태도가 바뀌었다.“아이가 없는 게 뭐가 문제야? 너희 아직 젊잖아. 앞으로 기회는 많아.”아라는 그런 위로에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부모님은 모른다.그 아이가 그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다는걸.그저 아라가 주성운을 한 번 만났다는 이유만으로.아라는 그날의 기억을 잊을 수 없었다.에릭이 주성운에게 달려들려 하자 그녀는 막아보려 했다.하지만 에릭은 아라를 밀어냈고 그녀는 그대로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한 층 높이의 계단을 통째로 구른 바람에 머리가 열 번도 넘게 부딪혔고 그 고통
“아,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 유치원이 하나 있네요.”아라가 고개를 끄덕였다.성유리는 처음엔 아라가 자신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온 줄 알았지만 한참을 가만히 서 있어도 아라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결국 기다리던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아... 아니요.”아라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그냥 혼자 시간도 남고 해서 거리 좀 돌아다니다가 마침 유리 씨를 봐서 인사하려고 온 거예요.”“아, 그래요? 그럼 저 먼저 가볼게요.”성유리는 다소 의아했지만 지금 바쁜 상황이라 더 시간을 낼 수 없었다.그녀가 자리를 뜨려 하자 아라가 급히 말을 붙였다.“저기 혹시 시간 되시면 같이 밥이나 먹을래요? 저 곧 결혼하잖아요. 그래서 싱글 파티를 하려고 하는데... 유리 씨는 올 수 있어요?”“언제 하는데요?”“유리 씨 시간 될 때.”성유리는 의아했다.“아라 씨 싱글 파티잖아요? 당연히 아라 씨 일정에 맞춰야죠. 시간은... 제가 한번 봐볼게요.”“그럼 내일 저녁 어때요?”“시간 되세요?”내일은 마침 주말이었다.지금 하늘이는 주말을 거의 김서영과 함께 보내고 있었다.성유리도 하늘이를 자신과 함께 지내게 할까 고민했었지만 며칠 전 김서영의 건강검진 결과를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하늘이에 대한 김서영의 애정을 아는 이상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보내게 해주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결국, 특별한 일정도 없었기에 성유리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그래요. 갈게요.”아라는 성유리의 대답에 안도한 듯 숨을 내쉬더니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그럼 저희 연락처라도 교환할까요? 내일 저녁에 장소 보내드릴게요.”성유리는 흔쾌히 응했다.에릭과 박한빈은 친구였고 아라는 에릭의 아내였기에 그녀와의 교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오히려 그녀와 잘 지내게 된다면 박한빈에게도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하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이 이 싱글 파티를 탐탁지 않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안 가면 안 돼?”박한빈이 미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