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285화

작가: 송진
그러니 예전부터 성시원은 항상 성유리의 앞에서 명령을 내리는 쪽이었다.

그는 성유리와 굳이 협상할 필요가 없었고, 성유리의 반항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마치 길을 잃어버린 아이라도 된 듯 성유리에게 어떻게 해야 하냐며 묻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은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말을 내뱉고 나자 그녀는 뒤늦게 자신의 표현이 적절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다시 말을 이었다.

“누가 알고 있든 간에 반드시 모든 정보를 차단해야만 해요. 안 그러면 내일 주식 시장이 열리자마자 성리 그룹은 끝장이니까요!”

성시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고 대표님 가족들은요? 아직 여기 있을 텐데요. 당장 연락해서 고 대표님이 그 사람들이랑 접촉했다고 하면 바로 경찰에 알리셔야 해요! 듣고 계시죠?”

성유리의 마지막 말에 성시원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성유리는 더 이상 성시원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려 집을 나서려 했다. 등 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성유리가 뒤를 돌아보자 성시원의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성시원은 의자에 기댄 채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

성유리는 여러 주요 매체들에게 연락해 성리 그룹의 내부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인터넷이 고도로 발달한 지금, 막아야 하는 것은 뉴스 매체들뿐만이 아니라 회사 내부의 다양한 “폭로자”들도 막아야 했다.

아침 8시, 성유리는 성시원의 병상 옆에 앉아 정민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갑자기 성리 그룹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는 소식을 알렸다.

폭로자는 익명의 작은 계정이었는데 그 계정은 성리 그룹의 빌딩 내부가 이미 텅 비어버렸고 성시원은 뇌졸중으로 입원 중이라는 사실까지 자세히 폭로했다.

이 소식이 퍼지자 인터넷은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주식 시장이 열린 지 한 시간도 안 되어 성리 그룹의 주가는 하한가로 떨어져 버렸다.

잠긴 챕터
GoodNovel에서 계속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관련 챕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86화

    한참이나 연정우를 바라보던 성유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그냥 이렇게 곁에... 곁에 있어 주기만 하면 돼.”그녀의 말이 끝나자 연정우는 손을 뻗어 성유리를 품에 안았다.별로 강하지 않은 힘으로 끌어안은 연정우의 은은한 향기가 성유리의 코끝을 살살 간지럽혔다.성유리 역시 아무런 거부감 없이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감쌌다.“아버님 상태는 어때?”연정우가 물었다.“급성 뇌경색이래. 그래도 다행히 응급 처치가 빨라서, 의사 선생님 말로는 의식 회복만 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거래.”“그럼… 유리 씨도 이제 들어가서 좀 쉬지 그래? 여긴 내가 보고 있을게.”“괜찮아. 어차피 집에 가도 잠이 안 올 것 같아. 내 휴대폰 계속 울리는 거 안 들려?”연정우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그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아는 성유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결혼식까지 연기할 필요는 없어. 외할아버지께서 오랫동안 기다려 오셨잖아. 실망 시켜드리면 안 되지.”“하지만...”“걱정하지 마. 하루 정도는 시간 낼 수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 성리 그룹이 이런 상황인데 결혼식을 연기하려고 한다면, 사람들은 정우 씨가 날 두고 도망가려고 한다고 생각할 거야.”성유리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연정우를 바라보며 말했다.“설마 정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그럴 리는 없어.”연정우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그의 긴장감과 진지함이 어린 표정에 성유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다행이다. 물론 정말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해도... 이해는 돼. 하지만...”그녀의 말에 연정우는 성유리의 얼굴을 살짝 집었다.“무슨 소리야? 난 그냥 유리 씨가 너무 힘들까 봐 그랬던 거야.”성유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러고는 다시 연정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리고 이번 결혼식 말이야... 하는 게 나한테도 이득이야. 아버지께서 병으로 쓰러지시면서 이 틈에 날 공격하려는 사람들이 정말 많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87화

    “언니, 나랑 그 사람은 그냥 친한 사이일 뿐이야. 그 정도로 큰 힘은 없어.”성유정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사실 언니가 그 은행장을 정말 만나고 싶다면 차라리 형부한테...”곁에 가만히 앉아 있던 연정우는 자신이 언급되는 듯한 소리가 급히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애써 그를 무시하고는 다급히 성유정의 손을 잡아끌며 밖으로 나갔다.“뭐 하는 거야, 언니! 나 아파!”성유정은 여전히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인적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성유정은 조금 전의 비음 섞인 목소리가 아닌 차가운 음성을 말했다.“뭐 하는 짓이야?”“그건 내가 할 말 같은데.”성유리가 대답했다.“너도 지금 우리 가문 상황이 어떤지 잘 알 텐데. 네가 조영준 은행장이랑 직접 연락이 닿는다면 정말 좋겠지만 문제는 지금...”“지금, 뭐? 언니, 언니가 이렇게 날 찾아와서 도움을 청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성유정은 미소를 머금은 채 턱을 치켜들고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그럼 나한테 한 번 빌어 봐. 마음에 들면 도와줄지도 모르잖아.”성유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예전에 네 입으로 성씨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지 얘기했었잖아. 그런데 성리 그룹이 정말 이대로 망하면 너한테 득 될 것도 없지 않아?”“하하...”성유정이 비웃으며 말했다.“웃기다. 지금 나한테 훈계라도 하려는 거야? 성리 그룹이 무사하다고 해도 나랑은 무슨 상관인데? 나도 알아, 아빠가 회사 언니한테 넘기려고 한다는 거. 그럼 난 뭐가 되는데? 그딴 집구석에서 평생을 아빠한테 복종하고 낮추고 살았는데, 결국 이딴 식으로 밀려났잖아. 아빠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미리 말 해두는데, 난 절대 언니 도울 생각 없어. 그리고 조영준이 언니 도와준다고 해도 내가 막을 거야! 전에 박한빈 앞에서 잘난 척 엄청 하더라? 나 그날에 언니 봤어. 그때 일부러 보란 듯이 박한빈한테 업혔던 거지? 그땐 생각이나 했을까? 언니가 이렇게 날 찾아와서 개처럼 애원하는 날이 오게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88화

    왜인지 모르게 비서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병실 안에 있던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연정우는 여전히 조용히 병상 옆에 앉아 있었다.성유리는 그를 바라보며 아침에 자신을 안아주던 연정우를 떠올렸다.성유리와 연정우의 관계는 애초부터 계약 관계에 불과했고 두 사람의 결혼 역시 마찬가지였다.하지만 그 순간, 성유리의 머릿속을 채운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누군가에게 안기고 싶었다.성유리 역시 그것이 계약의 범위를 벗어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연정우가 굳이 언급하지 않았듯 그녀 역시 재차 언급하며 상기시키는 일은 없었다.성유리가 너무 오랫동안 연정우를 보고 있었던 탓인지 연정우도 어딘가 이상함을 느끼고 성유리에게로 눈길을 돌렸다.성유리는 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말했다.“급히 회사에 가 봐야 할 것 같아. 간병인을 부를 테니까 여긴...”“괜찮으니까 다녀와.”성유리의 말에 연정우가 빠르게 대답했다.“오늘 별다른 일정 없어.”“하지만...”“잊은 거야? 우리 곧 결혼하잖아. 그럼 유리 씨 아버지는 내 장인어른이기도 한데, 사위가 장인어른 간병 하는 게 잘못된 일도 아니잖아?”연정우의 말에 성유리도 할 말을 잃었다.이런 상황에 굳이 여러 차례 거절하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 성유리는 결국 마지못해 대답했다.“혹시 무슨 일 생기면 전화 해줘. 아버지 깨어나시면 바로 의사 선생님부터 호출해주고.”“알겠어.”“그럼 나 먼저 가 볼게.”“그래.”연정우가 말을 마치고는 성유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시간이 조금 늦었으니까, 가면 저녁은 그쪽에서라도 꼭 챙겨 먹어. 알겠지?”“응, 정우 씨도.”“알겠어.”연정우는 성유리를 향해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고, 성유리는 그제야 아버지의 병실을 나설 수 있었다.시간은 이미 저녁이 되어 있었다.금성의 퇴근길 교통은 혼잡하기 그지없었지만 다행히 퇴근길 차량들과는 반대였던 덕에 성유리는 그나마 빨리 병원에서부터 회사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성 대표님!”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89화

    “그래, 이래야 성유리 답지.”박한빈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난번에 이미 관계가 틀어질 대로 틀어졌는데 이제 와서 굳이 예의 차릴 필요는 없잖아.”말을 마친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지금 속으론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 중이지?”박한빈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까지 걸려 있었다.하지만 그가 내뱉는 말 만큼은 듣는 사람의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잠시 멈칫한 성유리는 이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대표님도 아신다니 다행이네요.”“하지만 유감스럽네. 내가 여기 이렇게 멀쩡히 앉아 있어서 말이야.”박한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지금 상황에서 먼저 포기할 사람이 나일 리가 없잖아.”그 말에 성유리는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박한빈이 성유리에게 이런 식으로 대한 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연성에서 있었던 술자리에서 당했던 수모를 성유리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 역시 박한빈의 눈빛에는 차가운 기운만이 가득 차 있었다.성유리의 목소리가 점점 갈라지기 시작했다.“그럼, 박 대표님께서 여긴 대체 왜 오신 건가요? 누가 승자이니 증명해주고 싶으셨던 거예요?”“아직 돌이킬 기회가 남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은 거야.”박한빈이 대답했다.성유리는 단번에 박한빈이 여기까지 찾아온 진짜 목적을 이해했다.“뭐라고요?”“우선, 너랑 연정우 결혼식부터 취소해.”“아, 그리고요?”이 요구에 대해 성유리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덕에 아주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리고 나한테 돌아와.”박한빈은 성유리를 바라보며 거의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성리 그룹의 문제는 내가 해결해줄 수 있어. 너도 알다시피, 넌 이 전쟁 같은 비즈니스 업계랑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다시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되는 거야. 다른 건 다 나한테 맡기고.”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곧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90화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더니 이내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그 표정을 마주한 박한빈의 가슴에는 묵직하고도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보아하니... 그의 추측이 정확했던 것 같다.두 사람은 계약관계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계약을 넘어 그 이상의 감정이 생긴 것 같았다.성유리가 정말로 연정우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그게 아니라면 지금 박한빈을 바라보는 성유리의 눈빛을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방금 성유리나 성리 그룹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 정도의 반응이 없었다.그 통증은 박한빈의 가슴 속에 천천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그리고 그 동시에 입안에서는 익숙한 피비린내가 느껴졌다.박한빈은 목울대를 몇 번 움직이더니 숨을 깊게 쉬고 나서야 고통스러운 그 느낌을 간신히 억누를 수 있었다.“보아하니 정말 연정우를 소중히 여기나 보네.”“박한빈 씨, 이건 우리 둘 사이의 문제예요. 제발 이런 식으로 비열하게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려 하지 마요!”“무고한 사람이라고?”박한빈이 비웃기 시작했다.“넌 네가 그 사람을 얼마나 잘 안다고 생각해? 네 그 ‘무고한’ 약혼자가 네 뒤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니는지는 알아?”성유리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옆에 있던 서류를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한번 봐.”성유리는 박한빈이 내민 서류를 바라보았지만 차마 쉽게 손을 대지 못했다.박한빈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굳이 확인 안 해도 상관은 없어. 어차피 난 다 정리 마쳤고, 이제 검찰에 넘기기만 하면 되니까. 만약 연정우가 그때 가서 너에게 충분히 막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가만히 내버려 뒀다는 걸 안다면, 화를 내진 않을까?”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성유리는 그 서류를 열어보고 말았다.서류에 적힌 자금 유통 내역, 사진과 채팅 기록을 확인한 성유리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리고 박한빈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외쳤다.“이게... 대체 뭐야!”“왜, 이해가 안 되나?”박한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내가 설명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91화

    박한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으로 몇 발짝 다가간 성유리가 손을 높이 들었다.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녀의 손바닥은 박한빈의 그 어디도 건드리지 못했다.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있던 박한빈의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미친놈.”성유리가 말했다.박한빈은 그 말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응, 나도 알아.”성유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고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하지만 박한빈에게 절대 지고 싶지 않다는 듯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을 닦아냈다.“연정우 씨 외할아버님께서 지금 몸이 좋지 않으세요.”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치매에 걸리셨는데 병세가 점점 악화되고 있어요. 어쩌면 곧 모든 걸 다 기억하지 못할 지도 몰라요. 그래서 정우 씨가 최대한 빨리 나랑 결혼하려고 한 거예요.”성유리가 말을 마쳤지만 박한빈에게서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박한빈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었다.성유리의 시선이 여전히 자신에게 머물러 있는 것을 발견한 박한빈이 되물었다.“그래서? 그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지?”그 말에 성유리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그러니까, 결혼식은...”“안돼.”박한빈은 단호한 말투로 성유리의 말을 끊었다.그렇게 성유리의 목소리는 철저히 무시당했다.그녀의 꽉 쥔 주먹에는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정말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는 거예요? 박한빈 씨, 정말 저를 죽음으로 내몰 생각이냐고요?!”그 말에 박한빈이 웃음을 터뜨렸다.“그게 왜 나 때문이야? 연정우와 연정우 할아버지가 그런 짓을 저지르지만 않았다면 내가 이런 약점을 잡을 수도 없었겠지. 치매에 걸린 거? 그건 다 하늘에서 천벌 내린 거야. 인과응보라고. 그 사람들은 그렇게 불쌍하게 여기면서, 왜 난 동정 안 해줘? 그 사람들만 불쌍하고 혼자 버려진 나는 안 불쌍해? 네가 날 어떻게 대했는지 벌써 잊은 거야?”박한빈은 자신이 진심으로 억울한 일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92화

    박한빈은 성유리의 턱을 움켜잡더니 분노로 가득 찬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너, 설마 정말 연정우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야?”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눈빛은 유난히 밝고 매혹적인 빛을 띠었다.박한빈은 그 눈물 너머 자신을 바라보는 성유리의 모습을 또렷이 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증오였다.그녀는 그를 증오하고 있었다.박한빈 역시 이미 알고 있었다.그가 이런 선택을 할 때부터 성유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딴 게 뭐가 중요할까?성유리와 평생을 남남으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평생 미움받는 편이 나았다.그녀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박한빈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성유리가 성리 그룹의 일 때문에 자신을 증오하든, 아니면 단순히 자신을 증오하든 모두 괜찮았다. 하지만 연정우 때문에 자신을 증오하는 것은 정말 받아들일 수 없었다.성유리의 눈물을 마주한 박한빈의 손발이 점점 차가워졌다.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하지만 질문을 내뱉은 순간, 엄청난 후회가 밀려왔다. 그는 성유리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지? 너희는 단순히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일 뿐인데, 어떻게...”“왜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면 안 되는데요?”박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단호한 말투로 그의 말을 끊었다.성유리의 그 한 마디는 육중한 바위가 되어 박한빈의 입을 막아버렸다.그의 주먹이 힘껏 쥐어졌다.하지만 이내 손에 힘을 뺀 박한빈은 뻣뻣하게 굳어버린 입꼬리를 애써 끌어올리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거지, 유리야? 방금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연정우는 이때까지 계속...”“정우 씨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했든, 적어도 내 앞에서만큼은 진심으로 날 아껴줬어요. 그 사람은 다정하고 항상 내 기분부터 살펴주거든요. 내가 필요할 때마다 항상 옆에 같이 있어 주고요. 그런 사람을 좋아하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93화

    밖에서 들려오는 문고리 소리에 짜증이 밀려온 박한빈이 고개를 들어 큰소리로 외쳤다.“꺼져!”간결한 한 마디에 사무실 밖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그의 품 안에 안겨 있던 성유리 역시 마찬가지였다.성유리는 더 반항해봤자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그를 밀어내던 두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녀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까지 그 행동과 함께 메말라갔다.그녀는 조용히 자리에 눕더니 고개를 들어 공허한 눈빛으로 천장에 걸려 있는 백열등을 바라보았다.그런 성유리를 잠시 바라보던 박한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힘들어? 아니면 억울해? 연정우를 떠나는 게 그렇게 힘드냔 말이야.”그는 애써 조롱하려는 듯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박한빈의 손 역시 제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가슴 속에서부터 피어오른 고통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손끝까지 다다른 것이다.성유리는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태도로 미루어 보았을 때 박한빈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듯했다.박한빈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래, 그런 것 같네. 좋아, 기회를 한 번 더 주지. 어때?”성유리가 천천히 눈을 돌려 박한빈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마주한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혀를 한 번 찼다.하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은 그가 입을 열었다.“연정우를 만나서 방금 그 서류를 보여줄 예정이야. 만약 그걸 보고도 너랑 계속 결혼하려 한다면 더는 나도 강요하지 않고 둘 사이를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어때? 성유리, 나랑 내기 하나 할래?”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다.그녀의 침묵에 박한빈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왜, 겁나? 방금까지만 해도 그렇게 칭찬하더니. 그러니까 너도...”“좋아요.”박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박한빈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내기할게요.”“좋아.”박한빈이 고개를 끄덕이

최신 챕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79화

    성유리의 대답은 홍지은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자신이 기대했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기에 그녀는 한순간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하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을 마친 뒤, 곧바로 돌아서서 걸어갔고 박한빈이 곧장 성유리의 뒤를 따라갔다.떠나기 전, 그는 단 한 번도 홍지은을 쳐다보지 않았다.하지만 홍지은은 알았다.그동안 애써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이제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그러나 생각보다 더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시궁창뿐인 인생이 여기서 훨씬 나빠진다고 한들 얼마나 더 나빠질까?그렇다고 혼자만 괴로울 수는 없었다.그러니 죽더라도 반드시 한 사람은 끌어내릴 것이다.성유리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건지 홍지은은 아직 모른다.세상 그 누가 행복하게 지낸다 해도 괜찮다.‘성유리는 절대 안 돼.’...성유리는 다시 경매장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곧장 복도 끝까지 걸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그리고 뒤따라오던 박한빈도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지만 옆에 조용히 서서 성유리만 쳐다봤다.엘리베이터의 거울 속에 두 사람의 모습은 또렷이 비치고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아무 말도, 반응도 없었다.박한빈은 그런 그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그는 발신자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울리는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그러나 상대는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왔다.연달아 몇 번을 끊었음에도 전화는 계속해서 울렸다.그렇게 주차장까지 도착했을 때, 성유리가 먼저 떠날까 봐 조바심이 난 박한빈은 그녀의 팔을 붙잡고서야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입니까?”날카로운 그의 목소리에 상대방이 순간 움찔하는 기색이었지만 잠시 후 조심스럽게 묻기 시작했다.“박 대표님, 저예요. 왜 말도 없이 먼저 가셨습니까? 저...”박한빈은 상대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행여 핸드폰이 또다시 울릴까 봐 박한빈은 이번에 아예 전원을 꺼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78화

    홍지은의 말에도 박한빈은 여전히 침묵했고 아까보다 더 얼굴을 찌푸렸다.눈빛에 그득히 담겨있는 혐오와 무시의 감정은 선명히 드러났지만 박한빈은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바로 맞은편에 서 있던 홍지은도 당연히 그의 감정을 알아차렸지만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계속 말했다.“진짜예요. 박 대표님, 제가 증명할 수 있어요. 제 남편은...”“꺼져.”단 두 글자뿐인 박한빈의 대답에 홍지은은 할 말을 잃었다.하지만 사실... 신경 쓰이는 건 박한빈의 대답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내는 시선이었다.홍지은은 알고 있었다. 만약 지금 자기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처지가 더 난감해진다는 사실을.그러나 박한빈은 홍지은에게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바로 몸을 일으키더니 자리를 떠버렸다.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홍지은은 박한빈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박한빈 씨, 계속 이러신다면... 제가 유리한테 그 일들을 다 알려줘도 제 탓은 하지 마세요.”그녀의 말에 박한빈의 발걸음이 뚝 멈췄고 이내 고개를 돌려 홍지은을 쳐다봤다.그러자 홍지은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제가 아예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나 본데... 그때 유정 씨가 임신했던 아이 말이에요. 박 대표님 아이 맞죠?”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다시 고개를 휙 돌렸다. 홍지은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고 냉랭했다.그의 눈빛에 홍지은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이내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말했다.“지금 유정 씨가 잡혀있긴 하지만 그 일들이 다 끝이 난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때 유리가 잃었던 아이도... 사실 박한빈 씨는 다 알고 있었잖아요. 유정 씨가 그랬다는 걸.”홍지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한빈의 뒤에서 물건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쿵!그 소리에 박한빈이 뒤돌아보자 성유리가 머지않은 곳에 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은 채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웠다.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그녀의 표정은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77화

    그리고 이내 홍지은은 자신의 자리에서 성유리와 박한빈이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금성에서 제일가는 큰 인물은 박한빈은 당연하게도 가장 앞에 있는 좌석에 앉아 있었지만 무대 위에 전시되는 물건엔 흥미가 없어 보였다.홍지은이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을 때, 박한빈도 마침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잠시 멈칫하던 그는 다정하게 성유리 귓가에 얽혀있는 머리카락을 정리해 줬다.그저 연인 사이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행동이지만 박한빈은 헝클어진 머리카락들을 일일이 다 풀어줬다.만약 홍지은이 직접 본 게 아니라면 그녀는 꿈에서도 박한빈이 이런 일을 한다고는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너무 놀란 홍지은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박한빈 좀 보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성유리는 퉁명스럽게 그의 손을 밀쳐냈다.그리고는 박한빈을 슬쩍 째려봤지만 그는 화를 내기도 커녕 오히려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귓속말을 했다.꽤 거리가 있던 홍지은과 두 사람이기에 그녀는 박한빈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옆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저기 좀 봐요. 두 사람 사이 너무 좋아 보이지 않아요? 유리가 평소에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게 혹시 박 대표님께서 쟤를 숨겨두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니까요.”홍지은의 옆에 있는 사람은 그녀와 비슷한 나이대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금성에서 거주하는 현지 사람이 아니었고 결혼한 남자도 업계에서 중하층에 속하는 위치였다.전에 그녀는 홍지은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지만 지금 막상 말을 거니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그렇게 홍지은의 미소와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정 사모님?”상대는 여전히 침묵했지만 이내 정연화는 다른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홍지은은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듣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향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선명히 들려오는 웃음소리들은 ‘화살’이 되어 홍지은의 가슴 깊숙한 곳을 찌르고 있었고 흐르는 ‘피’조차 그녀에게는 차갑게 느껴졌다.입술을 뻥긋거리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76화

    홍지은은 마치 성유리와 떨어질 래야 떨어질 수 없는 절친이라는 듯 능글맞게 대꾸했다.그리고 앞에 서 있던 사람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는 발 빠르게 성유리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한빈은 경매에 참석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성유리는 미소를 지은 채 그의 곁을 지켰다.사실 그녀는 웃고는 있었지만 이미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는 상태였고 상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그래서 홍지은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처음엔 미처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난 네가 안 올 줄 알았어. 예전에는 이런 장소에 오는 거 별로라고 했잖아.”홍지은은 아주 자연스럽게 성유리의 손을 잡으며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잡힌 손을 빼냈다.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홍지은은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보며 계속 말했다.“어머? 박 대표님도 오셨어요? 오랜만이네요.”만약 이런 장소에서 다른 사람이 먼저 말을 걸었다면 아무리 싫어도 박한빈은 몇 마디 대답은 해줬었다.그렇지만 유독 오늘따라 그는 대답하기가 내키지 않았다. 다르게 말하자면 말을 건 상대가 홍지은이라서 싫었다.필경 홍지은을 볼 때면 성유리가 지나간 과거의 일을 다시 떠올리니까 말이다.그게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일까, 박한빈은 성유리가 홍지은을 마주치는 것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그저 오다가다 마주친다고 하더라도.그래서 박한빈은 성유리를 자기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고 홍지은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그녀와 함께 떠나버렸다.박한빈은 홍지은이 자신의 대답을 들을 자격도, 자기가 대답해 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대답을 하지 않은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제자리에 서 있던 홍지은의 반응과 표정이 어떻게 변해가던 박한빈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박 대표님!”이내 다른 사람이 박한빈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자 그는 미소 지으며 상대에게 성유리를 소개해 줬다.“여기는 제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성유리라고 하고요.”“안녕하세요. 사모님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75화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홍지은은 늘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성유리는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여러 번 말해봤지만 걔는 원래 이런 곳에 나오길 싫어해서요.”오늘도 그녀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괜찮아요. 그래도 한번 얼굴을 비추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마침 경매회도 곧 시작하는데 저도 박 대표 부인의 취향이 궁금하네요.”“그러게 말이에요. 어차피 나는 경쟁 상대가 될 수도 없으니까 미리 유리 씨가 뭘 원하는지 알아두고 포기하는 게 낫겠어요.”홍지은도 사람들을 따라 웃으며 말했다.“유리는 오지 않을 거예요. 전에도 물어봤는데 딱히 관심 가는 물건이 없다고 했거든요.”그녀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곧 현실은 완전히 뒤집혔다.왜냐하면 그날 경매장에 성유리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올해 금성에서 열리는 첫 대형 경매 행사였다.특히 경매 목록에 포함된 한 세트의 보석이 큰 주목을 받으면서 도시 내에서 일정한 신분을 가진 인사들은 전부 참석했다.사실 성유리는 처음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런데 전날 밤, 박한빈과 게임 내기를 했다가 패배하는 바람에 박한빈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기로 했다.그 조건이 바로 경매장에 함께 가달라는 것이었다.다만, 박한빈도 굳이 오래 있을 생각은 없다고 했다.“그냥 얼굴만 비추고 가면 돼. 너 피곤해지면 바로 나가자.”그 말을 듣고 나서야 성유리는 마지못해 동행을 허락했다.성유리가 입장하는 순간, 그녀의 시선은 홍지은에게로 향했다.그녀는 칵테일 잔을 들고 주변 사람들과 해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비록 남편은 별다른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자리에서만큼은 홍지은에게 자유를 허용했다.어차피 그의 사업 자원 중 상당수가 홍지은의 인맥과 네트워크 덕분에 얻어진 것이었으니까.오늘 그녀는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생기가 넘쳤다.완벽한 메이크업 덕분인지 얼굴에도 빛이 나는 것 같았고 평소보다 더 예뻐 보였다.그런데 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74화

    사실 박한빈은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떠올릴 수 있는 것이라곤 끝없는 공부와 훈련뿐이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해야 할 것이 많았다.학교 성적은 언제나 최고여야 했고 악기나 골프, 승마를 포함한 다양한 외국어까지 익혀야 했다.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박한빈의 신분을 부러워했다.박 씨라는 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영광을 의미했다.하지만 그 영광과 함께 짊어져야 할 무게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만약 지금 그때로 돌아가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삶이 더 나은 것인지조차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박한빈이 평범한 아이로서의 행복을 잃었다는 사실이다.잃을 게 많은 만큼 박한빈은 손에 넣은 것도 많았다.그리고 그는 자신이 짊어졌던 짐을 하늘이에게 만큼은 넘기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그래서 얼마 전, 김서영이 하늘이에게 특별 교육을 시키자고 했을 때 박한빈은 단칼에 거절했다.“박한빈, 네 딸은 분명 앞으로 금성에서 주목받는 존재가 될 거야.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익히지 못하면 그 신분이 아깝지 않겠니?”김서영은 박한빈을 설득하려 했지만 박한빈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뭐가 어떻게 됐든 하늘이는 박한빈의 핏줄이자 친딸이다. 설령 앞으로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더라도 말이다.감히 누가 박한빈의 딸을 무시하고 얕잡아볼 수 있겠는가?그래서 김서영이 뭐라고 하든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그 이야기를 마친 후, 박한빈의 품 안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성유리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박한빈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니 그녀는 살짝 찌푸린 미간과 다물린 입술로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었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순간 자신이 뭔가 실수한 것인가 싶어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에요.”성유리는 빠르게 화제를 돌리며 박한빈에게 물었다.“그런데 이거 왜 아직도 안 멈추죠?”“곧 멈출 거야.”박한빈은 짧게 대답하다 문득 깨달았다.“설마... 지금 나를 가슴 아파하는 거야?“아니거든요?”성유리는 전혀 망설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73화

    박한빈은 천천히 웃음을 거두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직접 물을 따라왔다.성유리는 그가 자신이 마실 물을 준비하는 줄 알았다.그런데 박한빈이 몸을 휙 돌리곤 성유리에게 컵을 내밀었다.“방금 건 그냥 장난이었어. 재미없었지?”그의 말에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물컵을 받아 들었다.그것만으로도 이미 박한빈에게는 충분한 대답이었다.“푹 쉬어.”박한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성유리에게 말했다.성유리는 물 한 모금을 마신 뒤, 컵을 옆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잠깐 나갔다 올게요.”그녀가 문 쪽으로 향하려 하자 박한빈이 손목을 붙잡았다.“어디 가려고?”“정원이요. 햇볕 좀 쬐려고.”“나도 같이 가.”“아까 그렇게 아프다면서 괜찮으세요?”성유리는 박한빈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그 눈빛에는 박한빈을 향한 의심이 가득했다.그러나 박한빈은 개의치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나도 햇볕 좀 쬐고 싶어. 그리고 의사가 말했잖아? 내 면역력 좋다고.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래.”‘심각하지 않다?’‘그러면 아까까지는 왜 그렇게 책임지라고 난리였는데?’그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려 했지만 결국 성유리는 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그녀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박한빈은 마치 그것을 허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성유리의 손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방에서 본 그대로 오늘 날씨는 유난히 화창했다.햇살 아래, 정원의 회전목마가 선명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박한빈이 특별히 주문 제작해 놓은 것이라 그런지 원색의 유채가 한층 더 생생해 보였다.그 장면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그런데, 박한빈은 줄곧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가 보내는 그윽한 시선을 느꼈지만 성유리는 한참을 모른 척했다.박한빈이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지는.“한번 타볼래?”“뭐를요?”“회전목마.”성유리는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제가 어린애도 아니고.”“그럼 어릴 때는 타봤어?”그 질문에 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잠시 침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72화

    “그럼 자. 난 네가 잠들면 나갈게.”박한빈의 말을 성유리가 철석같이 믿을 리가 없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와 다투는 것도 귀찮았다.그래서 그냥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푹 덮고 등을 돌리고는 박한빈에게서 멀어졌다.사실 처음에는 전혀 졸리지 않았지만 조금 전 박한빈과 한바탕 실랑이를 벌인 탓인지 피곤함이 몰려왔다.머릿속에 들던 생각도 점점 흐려지고 그렇게 결국 잠에 빠져들었다.아니나 다를까, 박한빈의 말을 거짓말이었다.다음 날 아침, 성유리가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바로 옆에 누워 있는 박한빈이었다.그는 한쪽 팔로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잠에 들어있었는데 성유리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당장 박한빈을 밀어내려 했지만 갑자기 그가 몸을 돌려 두어 번 기침을 했다.그리곤 반쯤 감긴 눈으로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나... 너한테서 감기가 옮은 것 같아.”성유리는 그 말에 그대로 멈춰버렸다.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잡아 자기 이마에 갖다 댔다.“한번 만져봐. 나 열 나는 거 같지 않아?”성유리는 일단 체온계를 가져와 박한빈의 체온을 재봤다.그러나 체온계에 표시된 건 아주 멀쩡한 수치였다.그 말인즉 박한빈은 열이 안 나고 있다는 것이었고 감기에 걸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그런데도 박한빈은 여전히 몸이 아프다며 자신이 감기에 걸렸으니 여기서 병을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전의 고고하고 차가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마치 억지를 부리는 아이 같았다.결국 성유리는 의사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뿐만 아니라 아예 다른 방으로 옮겨서 지내기로 결심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속내를 간파한 듯, 서둘러 앞을 막아섰다.“뭐 하려는 거야?”“방을 옮길 거예요.”성유리는 담담하게 대답을 이어갔다.“의사 선생님께서 교차 감염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어요.”“그럼 난 어떡하라고?”“저택에 도우미분들도 많고 의사 선생님도 있잖아요. 박한빈 씨를 돌볼 사람 충분하죠.”“난 다른 사람이 내 몸에 손대는 거 싫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71화

    “걱정 마, 엄마 괜찮으니까.”하늘이는 문가에 서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한참을 그러던 아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다시 감기 옮으면 어떡해?”그 말에 성유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괜찮아, 엄마 마스크 쓰고 있잖아.”그래도 하늘이는 여전히 망설이는 눈치였다.망설이던 아이는 결국 괜찮다는 성유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성유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이제 가서 자. 혼자 잘 수 있겠어?”“응!”하늘이는 성유리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나 이제 다 컸어.”“그래, 그럼 가서 쉬어.”하늘이는 여전히 아쉬운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를 점차 거뒀다.하늘이가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은 걸 확인한 뒤에야 성유리도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낮 동안 너무 오래 잠들었던 탓인지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침대에 누운 채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다가 결국 다시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하려 했다.그런데 그때, 밖에서 들려오는 아주 익숙한 발소리.그걸 듣는 순간 성유리는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러나 성유리는 눈을 뜨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곧 남자가 천천히 다가와 침대 곁에 서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그제야 성유리는 몸을 뒤로 빼며 경계하듯 눈을 떴다.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 박한빈은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열은 안 나는지 보려고 했어.”“전 괜찮아요.”성유리는 박한빈이 행여 다른 말을 할까 두려워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박한빈 씨는 서재에서 주무셔아 하는 거 아니었어요?”“잠이 안 와.”“그러면 그냥 조용히 나가주세요. 제 잠까지 방해하지 말고.”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박한빈은 미동도 없었다.한동안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그의 모습에 성유리는 점점 짜증이 밀려왔고 손을 뻗어 그를 밀어내려 했다.“빨리 나가시라고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