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의 모든 챕터: 챕터 271 - 챕터 280

303 챕터

제271화

멈췄더라면 그 당시에 박한빈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한빈은 자기 자신을 컨트롤 할 수가 없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을 조용히 쳐다만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이미 정한 거예요. 결혼하기로.” “아까는... 박 대표님도 들어보셨을 거예요. 이별을 위한 마지막 잠자리랄까? 게다가 최근에 박 대표님 덕분에 도움받은 일도 참 많았잖아요. 그래서 저도 그 도움에 대한 보답을 해주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박 대표님께서 기분이라도 좋아지시라고.” 성유리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지만 박한빈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방금 그 행동들은 다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한 거라고?” “네. 아니면 뭐겠어요?” 성유리의 손목을 잡고 있던 박한빈은 그녀를 스르르 놓아주었다. 마치 진이 다 빠진 듯 멍한 표정으로 성유리만 쳐다보는 박한빈을 본 그녀는 그가 이제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박한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모르겠어.” “뭐를요?” “연정우 씨가 너를 도울 수는 있어. 근데 왜... 왜 네가 내가 아닌 그 사람을 선택하는지 모르겠다고.” 박한빈은 스스로 말하면서도 지금 자기가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더 이상 감정을 조절할 수가 없었고 자존심 따위 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나 자존심마저 버린 박한빈의 모습에도 성유리는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유는 딱히 없어요. 그냥 단순하게 정우를 선택하고 싶었을 뿐이죠.” 박한빈은 성유리의 눈을 묵묵히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목젖마저 떨리고 있었고 침을 끊임없이 삼키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질투심을 삼키고 있던 박한빈은 위에도 강한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고개만 끄덕이더니 방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곧 성유리는 박한빈이 들고 왔던 캐리어 바퀴 소리를 들었지만 그를 상관하지도 않고 밥만 계속 먹었다. 박한빈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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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2화

“무슨 말이야?” 낮은 소리로 묻는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먹던 케이크를 계속 입에 넣으며 되물었다. “지화 그룹에 생긴 문제들 다 해결하신 거죠?” 박한빈은 이 상황에 성유리가 왜 이런 물음을 묻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머리를 굴리던 박한빈에게 성유리가 다시 물었다. “작년에 지화 그룹에 생겼던 상업 위기 말이에요. 박한빈 씨가 연막작전을 펼친 거 맞죠?” “전에 저한테 말씀하셨잖아요. 지화 그룹 설립한 지도 이젠 몇십 년이 지났으니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고. 좋은 점은 온 나라가 다 아는 대기업이라 유명해서 든든한 배경이 생겼다고요.” “나쁜 점은 몇십 년이 흘러 많은 직원들의 거의 다 열정이 사라진 채로 출근하니까 회사에 도움이 덜 된다고 하셨잖아요. 특히는 투자자 쪽에서 보낸 친척이나 친구들이요. 근데 그 사람들을 자른다 해도 뿌리까지 뽑기는 힘드니까 가만히 놔둔다면서요? 그분들은 박한빈 씨 아버지를 잘 따라는 투자자들이고 심지어는 할아버지와도 아는 사이라 손을 댄다면 명성에 큰 영향을 줄 거라고 했죠?” “그래서 사실 박한빈 씨는 항상 기회가 차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셨죠.” “다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작년에 큰 일이 터졌을 때, 마음대로 하게 놔두고 혼란스러운 틈을 타 다른 사람들이 배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주저하는 순간에 박한빈 씨가 뒤에서 뻥 차버리셨죠?” “배지수 씨에 관해서는 뭐 말할 것도 없죠. 그 사람들도 바보는 아닐 거잖아요? 그래서 전에 정신을 차리고 돌아오려고 했을 때도 박한빈 씨는 일말의 기회도 주지 않았어요. 그 사람들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박한빈 씨를 시험하려 하니까 배지수라는 방패를 앞에 세운 거고. 제 말이 맞죠?” 느린 속도로 말을 이어가는 성유리지만 매 한 마디마다 발음이 정확했고 박한빈의 귀에 또박또박 들렸다. 성유리가 말한 사실들은 거의 다 정민재가 알려준 일들이지만 박한빈이 직접 말해준 것도 몇 개 포함돼 있었다. 널린 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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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3화

박한빈은 진심으로 성유리를 좋아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그렇게 다급해하며 해결해 주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 감정은 또 어떤 가치가 있겠는가? 박한빈은 늘 성유리를 주저하지도 않고 자신이 이용할 패로 일삼았고 얻을 이익만 먼저 생각했다. 이제 와서 잘해주면서 자기가 저질렀던 잘못을 뉘우친다고 해도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필경 지화 그룹의 일이 다 해결이 됐으니 박한빈은 얻으려던 물건들을 다 손에 넣었고 이제야 뒤돌아 자신이 버렸던 “패”를 다시 거두려 했기 때문이다. 설령 지금 다시 거둔다 하더라도 그 “패”는 한번 버림받았었기 때문에 예전처럼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박한빈도 그저 그런 상인이자 이익을 위해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성유리도 그를 많이 탓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성유리는 박한빈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박한빈이 얼마나 힘들게 시간을 보냈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유리는 이익을 먼저 챙기려 하는 박한빈이 이상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박한빈이 지금처럼 자신에게 보이는 다정한 모습과 사랑을 위해 뭐든 해준다는 말들이 너무 싫었다. 마치 너무 사랑해 성유리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은 박한빈의 태도도 그녀는 탐탁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은 다 성유리를 꾸짖으며 박한빈이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이제 그만 그의 마음을 받아주라고 타일렀다. 그렇다면 성유리는? 성유리도 박한빈 못지않은 노력을 했었다. 주위 사람들은 다 모르겠지만 전에 성유리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노력과 용기를 내 박한빈의 옆에 다가갔다. 하지만 박한빈이 성유리를 그나마 잘 대해주니 사람들은 성유리가 타고난 복을 가진 여자라고 평가할 뿐 그녀의 노력을 봐 주지 않았다. 그래서 성유리는 늘 혼자 속으로만 끙끙 앓았었다. 성유리의 말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나도 박한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말이 다 맞나 보네.’ 그녀는 손에 들린 포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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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4화

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는 잠시 멍해졌다. 그러더니 그녀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하더니 박한빈에게 물었다. “그래요? 그럼 박한빈 씨가 이기셨나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물음에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느꼈는지 입을 꾹 닫았다. 그는 정리를 마친 자기 물건을 챙기고 성큼성큼 집 밖을 나가버렸고 문을 닫을 때도 별다른 감정이 없는지 소리는 크게 나지 않았다. 성유리는 떠나는 박한빈에게 시선 한번 돌리지 않았는데 사실 그녀 또한 방금 한 말들을 내뱉을 생각이 없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을뿐더러 이미 끝난 사이에 과거의 일까지 들춰내며 따지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썩은 과일을 바로 쓰레기통에 버리면 되는데 굳이 껍질을 한 겹씩 까 제일 먼저 썩기 시작한 부분을 찾을 필요도 없지 않은가? 결국 과일 껍질을 다 벗겨낸다 해도 돌아오는 정답은 딱 하나뿐이다. 애초에 처음부터 모든 것이 잘못됐다는 것. 하지만 오늘 성유리는 꾹꾹 참아왔던 감정들이 다 터졌다. 정민재가 지화 그룹의 일들을 말해준 것과 김서영이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려준 후로 성유리는 항상 머릿속에 맴돌던 의문들에 정답을 얻은 것 같았다. 최근 며칠 동안 성유리는 이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했고 박한빈을 볼 때마다 입이 근질거렸다. 결국 오늘에서야 터져버린 성유리도 두 사람 사이에 큰 소리가 오갈 줄 알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매 사람마다 견딜 수 있는 고통의 크기가 다르듯이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감정 또한 한계가 있었다. 성유리는 앞에 놓인 케이크에 시선을 돌렸다. 말을 하면서 제멋대로 쑤시고 찔러버린 케이크의 모양은 완전 망가져버렸지만 성유리는 다시 포크를 들었다. 케이크의 맛은 너무도 달콤했지만 성유리는 왜인지 모르게 그 달콤한 맛이 쓰게 느껴졌다. 결국 성유리는 그 케이크를 망설임도 없이 쓰레기통에 던졌다. ‘하긴 원래 디저트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맛있는 케이크를 사 왔겠어.’ 한편, 박한빈은 이미 호텔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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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5화

박한빈은 성유리가 어떠한 상황에서든 자기 곁을 지켜줄 줄 알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자신의 결점과 문제를 다 용서할 줄 알았다. 그는 성유리가 정말 자신을 떠난다 해도 이렇게까지 아플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박한빈은 마치 생존에 꼭 필요한 산소와 물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내가 틀린 거네.’ 그가 성유리에게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던 것처럼 성유리는 지금 박한빈에게 작은 틈조차 남겨주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는 이미 성유리에 의해 넘을 수 없는 선이 그어져 버렸다. ... 그 뒤로 며칠 동안 성유리는 평소대로 회사로 출근했다. 연정우와 결혼을 한다는 말도 성유리가 멋대로 지어낸 사실이 아니었고 둘은 이미 오랫동안 상의해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왜 이렇게 급히 결정을 내렸냐 묻는다면 이유는 바로 연정우의 할아버지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어르신은 연세가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최근 갑자기 치매 판정을 받았다. 게다가 상황 또한 다른 사람보다 심각했기에 자신이 그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을 때, 하나뿐인 외손자인 연정우가 결혼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비록 할아버지를 가까이서 만나 뵌 성유리는 그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불친절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성유리는 이혼을 겪어본 여자이고 하마터면 감옥에 들어갈 뻔했던 사람이지 않는가? 그래서 당연하게도 연정우의 가족들 눈에 성유리는 그에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르신이 화 한번 내시지 않고 그나마 말을 섞어주는 것만으로도 성유리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연정우에게서 어르신의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잔뜩 찌푸렸었다. 자신의 요구가 과분하다고 느꼈는지 연정우는 성유리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난 너를 탓하지 않을 거야. 결혼이라는 게 얼마나 큰일인데. 너도...” “너 혹시 따로 좋아하는 사람 있어?” 성유리가 연정우의 말을 끊어버리며 물었다. 갑작스러운 성유리의 물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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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6화

박한빈은 그 사진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개발팀 팀장이 직접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업무 보고를 하는 중에도 박한빈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어딘가 이상함을 느낀 서훈이 조심스레 입을 열어 박한빈을 불렀다.“대표님?”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박한빈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서훈을 바라보았다.그의 깊은 눈동자는 여전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했다.박한빈의 눈을 마주한 서훈은 조금 전 자신이 느꼈던 것이 단순한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는 말을 꺼내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건넸다.“방금 개발팀에게서 받아온 서류입니다. 결재 싸인 부탁드릴게요.”박한빈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이며 옆에 있던 펜을 집었다. 서훈과 개발팀 팀장은 그가 사인을 마치길 기다리며 서 있었다.평소 박한빈이라면 몇 초 만에 서류 검토를 끝냈겠지만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한참을 기다려 보아도 박한빈이 건네받은 서류는 두 번째 장으로 넘어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대표님?”서훈이 다시 질문을 던졌고 옆에 있던 팀장은 잔뜩 긴장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대표님, 혹시... 서류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박한빈은 그 말에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서류를 넘기더니 서명란에 펜을 갖다 댔다.하지만 펜을 갖다 대기만 할 뿐, 사인은 하지 않았다.서훈은 펜을 쥐고 있던 박한빈의 손등에 불거진 혈관들과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손가락을 발견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 혹시 몸이 안 좋으신 건가요?”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목구멍은 막힌 듯 답답했고 속에서부터 뭔가가 올라오는 것에서 비릿한 냄새까지 느꼈다.그는 최대한 자신의 목구멍까지 올라온 위액을 다시 삼켜내려 노력했다.박한빈도 본인이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눈앞의 글자들이 전혀 읽히지 않았고 어릴 때부터 수없이 써왔던 자신의 이름 석 자마저 기억해내기 버거웠다.결국, 박한빈의 손에 들려있던 펜은 서류 위에 힘없이 떨어지며 종이에 크고도 깊은 선을 남겼다.옆에 있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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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7화

박한빈은 이제 평정심을 되찾은 듯 보였다. 그는 두 손으로 책상을 짚은 채 어제나 꼿꼿이 펴고 있던 등을 천천히 굽히고 있었다. 고개까지 푹 숙이고 있던 그의 모습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함이 느껴졌다.서훈은 그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그가 망설이고 있던 그때, 갑자기 고개를 든 박한빈이 그에게 물었다.“담배 있어?”갑작스러운 질문에 서훈은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담배를 끊으려 했던 박한빈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몇 초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뒤늦게 박한빈의 말을 이해한 서훈은 망설임 없이 자신이 갖고 있던 담배를 건네며 말했다.“예전 것과 다른 담배인데, 지금이라도 가서 원래 피던 거 사 올까요?”“됐어.”박한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그 모습을 본 서훈이 재빨리 불붙은 라이터를 박한빈에게 건넸다.하지만 박한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지 못했다.그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그런 박한빈의 모습을 보던 서훈의 몸도 덩달아 함께 떨리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박한빈의 담배에는 불이 붙었다.서훈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박한빈은 다시 의자에 앉아 연기 속에 섞여 있던 연기 고리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걔 결혼한대.”그 말에 서훈의 표정 역시 잠시 굳어졌다. 그리고 곧이어 박한빈의 입에서 나온 “걔”의 정체를 빠르게 알아차렸다.잠시 망설이던 서훈이 말했다.“대표님, 미련이 남으신 거라면... 왜 유리 아가씨께 찾아가지 않으신 건가요?”박한빈은 그 말에 그저 가벼운 미소만 지어 보였다.서훈은 박한빈과 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일해왔다. 박한빈이 지화 그룹에 입사했던 그 날부터 서훈은 줄곧 그의 곁을 지켜왔고 그 덕에 박한빈의 생각 정도는 대체로 다 파악할 수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속내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웨딩드레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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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8화

박한빈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우연히 길고양이 한 마리를 만난 적이 있었다.갓 태어난 듯 보였던 새끼 고양이였지만 주위에 어미 고양이로 보이는 고양이는 없었고 새끼 고양이 혼자 풀숲에 웅크린 채 가녀린 목소리로 울고 있었다.박한빈은 그런 새끼 고양이를 한 번 쳐다보았다.그때의 박한빈은 전혀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단순히 고양이에게 눈길 한 번 주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새끼 고양이가 몸을 일으켜 박한빈의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새끼 고양이는 똑바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지만 꽤 빠른 박한빈의 보폭을 열심히 뒤따라왔다.학교 정문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박한빈은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걸음을 옮겨 근처 매점으로 들어가 소시지 하나를 구매했다.그리고 새끼 고양이는 그 소시지를 아주 맛있게 받아먹었다.그날 이후로 박한빈은 하교할 때마다 그 새끼 고양이를 만났다.고양이는 그에게 다가와 손바닥에 몸을 비비며 박한빈이 간식을 주길 기다리곤 했다. 그렇게 어느 날부터 박한빈의 책가방 안에는 항상 고양이의 간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주말에는 고양이의 사료를 사기 위해 직접 슈퍼마켓에 가기도 했다.그는 월요일에 고양이에게 밥을 먹이고 나서 병원으로 데려가 검사를 마친 뒤, 집에 데려올 생각도 하고 있었다.할머니와 어머니를 설득하기란 어려울 수도 있지만 고양이가 자신을 따라온 것은 고양이가 자신을 선택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을 따라와 준 고양이에게 책임감이 생겼다.하지만 월요일에 학교로 온 박한빈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서 생선 캔을 받아먹은 고양이를 발견했다.박한빈은 혹시라도 그 캔이 고양이가 먹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가가 캔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고양이는 박한빈이 자신의 먹이를 뺏으려는 줄로만 알고 그의 손목을 덥석 물어버렸다.겨우 돋아난 유치였던 덕에 상처가 깊지는 않았다.하지만 그 순간, 박한빈의 마음은 이미 차게 식어버렸다.짐승은 결국 짐승이었다.그는 배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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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9화

분명 그 손바닥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순간적으로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마치 새끼 고양이의 털이 스친 듯하기도 했고 성유리의 머리카락 같기도 했다.박한빈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동안, 그의 맞은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오래 기다리게 했네요.”그 소리에 박한빈은 고개를 들어 입꼬리를 약하게 올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오랜만입니다, 고 대표님.”...성유리는 인주 프로젝트가 중단됐다는 사실을 거의 마지막쯤에야 알게 되었다.연정우와 함께 안 작가를 만나고 있던 성유리는 전화를 받자마자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뭐라고요?”“지화 그룹 쪽에서 먼저 프로젝트 중단을 요청했습니다. 시공팀에 문제가 생겨서 조사해야 할 것 같다고요.”“무슨 문제가 생긴 거죠?”“저도 잘 모릅니다. 그저 지화 그룹에서 그렇게 일방적으로 통보했을 뿐입니다.”“시공팀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다른 절차를 진행할 수 있잖아요. 아직 초기 단계니까 시공팀에 문제가 있으면 교체를 해도 되고요!”성유리의 말에 수화기 너머가 잠잠해졌다. 마치 무언가를 알고는 있지만 차마 말할 수는 없는 듯한 그 침묵은 성유리가 스스로 깨달아주길 바라는 듯했다.성유리도 그제야 깨달은 듯 물었다.“설마, 박 대표님이 시키신 건가요?”“그런 것 같습니다...”“대체 왜죠? 인주 프로젝트는 지화에게도 꽤 중요한 프로젝트일 텐데요? 지화 내부에 문제가 생긴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런 시점에 그 거대한 프로젝트를 중단하면 어떡해요?”상대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곧이어 성시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성유리는 곧장 전화를 끊고 성시원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인주 프로젝트 일은 이미 알고 있다. 지금 금성에 있는 거 맞지? 당장 회사로 돌아와, 회의 진행해야 하니까!”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거실 쪽 사람들을 바라보았다.마침 그녀에게로 다가온 연정우도 눈빛으로 무슨 일인지 물었다.“조금 이따가 다시 전화 드릴게요.”성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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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0화

성유리의 모습이 지나치게 멍해 있어서였을까. 연정우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미처 참지 못했다.그는 고개를 숙여 성유리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마치 잠자리의 입맞춤이라도 되는 듯 그는 가볍게 입술을 대자마자 곧장 떨어졌다.뒤이어 연정우는 성유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됐어, 이제 가 봐.”성유리는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하지만 그녀도 더 말을 하지 않은 채 그저 연정우를 한 번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차에서 내렸다.성시원은 이미 사무실에서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성유리가 들어서자 그는 자연스럽게 인주 프로젝트 얘기를 제일 먼저 꺼냈다.“구체적으로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는 저도 잘 몰라요. 일방적으로 통보받은 것뿐이라.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최대한 철저히 조사해서 만족하실만한 답변을 드릴 테니까요.”성유리의 대답은 아주 형식적이었다.잠시 그녀를 주시하던 성시원이 입을 열었다.“아직도 지화 쪽이랑 얘기를 안 나눠봤다는 거야?”“아직이요. 하지만 곧...”“이게 내가 방금 받은 메일이야. 한 번 봐.”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을 끊더니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문서를 그녀에게 던져주었다.성유리는 어딘가 의아했지만 성시원에게서 서류를 건네받았다.서류 위에 적혀 있는 내용을 확인한 성유리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그 서류에는 성유리의 이력서가 있었다.지화 쪽에서 보내온 그 서류에서는 성유리의 이력을 하나하나 나열하며 그녀에게 이렇게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길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고위층 관리자로 교체해달라는 직설적인 요구도 함께 적혀 있었다.“이 프로젝트는 예전부터 계속 제가 담당해왔던 거예요.”성유리가 이를 악문 채 말했다.“모든 절차를 제가 다 직접 확인하고 조정해 왔는데 이제 와서 경험 부족을 이유로 교체하겠다니요. 너무 말도 안 되는 거 아닌가요?”이 프로젝트는 박한빈이 직접 그녀에게 맡긴 것이었다.모든 내부 설계도와 데이터 조사를 포함한 제안서를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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