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이야?” 낮은 소리로 묻는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먹던 케이크를 계속 입에 넣으며 되물었다. “지화 그룹에 생긴 문제들 다 해결하신 거죠?” 박한빈은 이 상황에 성유리가 왜 이런 물음을 묻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머리를 굴리던 박한빈에게 성유리가 다시 물었다. “작년에 지화 그룹에 생겼던 상업 위기 말이에요. 박한빈 씨가 연막작전을 펼친 거 맞죠?” “전에 저한테 말씀하셨잖아요. 지화 그룹 설립한 지도 이젠 몇십 년이 지났으니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고. 좋은 점은 온 나라가 다 아는 대기업이라 유명해서 든든한 배경이 생겼다고요.” “나쁜 점은 몇십 년이 흘러 많은 직원들의 거의 다 열정이 사라진 채로 출근하니까 회사에 도움이 덜 된다고 하셨잖아요. 특히는 투자자 쪽에서 보낸 친척이나 친구들이요. 근데 그 사람들을 자른다 해도 뿌리까지 뽑기는 힘드니까 가만히 놔둔다면서요? 그분들은 박한빈 씨 아버지를 잘 따라는 투자자들이고 심지어는 할아버지와도 아는 사이라 손을 댄다면 명성에 큰 영향을 줄 거라고 했죠?” “그래서 사실 박한빈 씨는 항상 기회가 차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셨죠.” “다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작년에 큰 일이 터졌을 때, 마음대로 하게 놔두고 혼란스러운 틈을 타 다른 사람들이 배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주저하는 순간에 박한빈 씨가 뒤에서 뻥 차버리셨죠?” “배지수 씨에 관해서는 뭐 말할 것도 없죠. 그 사람들도 바보는 아닐 거잖아요? 그래서 전에 정신을 차리고 돌아오려고 했을 때도 박한빈 씨는 일말의 기회도 주지 않았어요. 그 사람들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박한빈 씨를 시험하려 하니까 배지수라는 방패를 앞에 세운 거고. 제 말이 맞죠?” 느린 속도로 말을 이어가는 성유리지만 매 한 마디마다 발음이 정확했고 박한빈의 귀에 또박또박 들렸다. 성유리가 말한 사실들은 거의 다 정민재가 알려준 일들이지만 박한빈이 직접 말해준 것도 몇 개 포함돼 있었다. 널린 퍼
박한빈은 진심으로 성유리를 좋아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그렇게 다급해하며 해결해 주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 감정은 또 어떤 가치가 있겠는가? 박한빈은 늘 성유리를 주저하지도 않고 자신이 이용할 패로 일삼았고 얻을 이익만 먼저 생각했다. 이제 와서 잘해주면서 자기가 저질렀던 잘못을 뉘우친다고 해도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필경 지화 그룹의 일이 다 해결이 됐으니 박한빈은 얻으려던 물건들을 다 손에 넣었고 이제야 뒤돌아 자신이 버렸던 “패”를 다시 거두려 했기 때문이다. 설령 지금 다시 거둔다 하더라도 그 “패”는 한번 버림받았었기 때문에 예전처럼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박한빈도 그저 그런 상인이자 이익을 위해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성유리도 그를 많이 탓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성유리는 박한빈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박한빈이 얼마나 힘들게 시간을 보냈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유리는 이익을 먼저 챙기려 하는 박한빈이 이상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박한빈이 지금처럼 자신에게 보이는 다정한 모습과 사랑을 위해 뭐든 해준다는 말들이 너무 싫었다. 마치 너무 사랑해 성유리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은 박한빈의 태도도 그녀는 탐탁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은 다 성유리를 꾸짖으며 박한빈이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이제 그만 그의 마음을 받아주라고 타일렀다. 그렇다면 성유리는? 성유리도 박한빈 못지않은 노력을 했었다. 주위 사람들은 다 모르겠지만 전에 성유리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노력과 용기를 내 박한빈의 옆에 다가갔다. 하지만 박한빈이 성유리를 그나마 잘 대해주니 사람들은 성유리가 타고난 복을 가진 여자라고 평가할 뿐 그녀의 노력을 봐 주지 않았다. 그래서 성유리는 늘 혼자 속으로만 끙끙 앓았었다. 성유리의 말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나도 박한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말이 다 맞나 보네.’ 그녀는 손에 들린 포크를
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는 잠시 멍해졌다. 그러더니 그녀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하더니 박한빈에게 물었다. “그래요? 그럼 박한빈 씨가 이기셨나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물음에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느꼈는지 입을 꾹 닫았다. 그는 정리를 마친 자기 물건을 챙기고 성큼성큼 집 밖을 나가버렸고 문을 닫을 때도 별다른 감정이 없는지 소리는 크게 나지 않았다. 성유리는 떠나는 박한빈에게 시선 한번 돌리지 않았는데 사실 그녀 또한 방금 한 말들을 내뱉을 생각이 없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을뿐더러 이미 끝난 사이에 과거의 일까지 들춰내며 따지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썩은 과일을 바로 쓰레기통에 버리면 되는데 굳이 껍질을 한 겹씩 까 제일 먼저 썩기 시작한 부분을 찾을 필요도 없지 않은가? 결국 과일 껍질을 다 벗겨낸다 해도 돌아오는 정답은 딱 하나뿐이다. 애초에 처음부터 모든 것이 잘못됐다는 것. 하지만 오늘 성유리는 꾹꾹 참아왔던 감정들이 다 터졌다. 정민재가 지화 그룹의 일들을 말해준 것과 김서영이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려준 후로 성유리는 항상 머릿속에 맴돌던 의문들에 정답을 얻은 것 같았다. 최근 며칠 동안 성유리는 이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했고 박한빈을 볼 때마다 입이 근질거렸다. 결국 오늘에서야 터져버린 성유리도 두 사람 사이에 큰 소리가 오갈 줄 알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매 사람마다 견딜 수 있는 고통의 크기가 다르듯이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감정 또한 한계가 있었다. 성유리는 앞에 놓인 케이크에 시선을 돌렸다. 말을 하면서 제멋대로 쑤시고 찔러버린 케이크의 모양은 완전 망가져버렸지만 성유리는 다시 포크를 들었다. 케이크의 맛은 너무도 달콤했지만 성유리는 왜인지 모르게 그 달콤한 맛이 쓰게 느껴졌다. 결국 성유리는 그 케이크를 망설임도 없이 쓰레기통에 던졌다. ‘하긴 원래 디저트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맛있는 케이크를 사 왔겠어.’ 한편, 박한빈은 이미 호텔 방으로 돌아갔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어떠한 상황에서든 자기 곁을 지켜줄 줄 알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자신의 결점과 문제를 다 용서할 줄 알았다. 그는 성유리가 정말 자신을 떠난다 해도 이렇게까지 아플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박한빈은 마치 생존에 꼭 필요한 산소와 물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내가 틀린 거네.’ 그가 성유리에게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던 것처럼 성유리는 지금 박한빈에게 작은 틈조차 남겨주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는 이미 성유리에 의해 넘을 수 없는 선이 그어져 버렸다. ... 그 뒤로 며칠 동안 성유리는 평소대로 회사로 출근했다. 연정우와 결혼을 한다는 말도 성유리가 멋대로 지어낸 사실이 아니었고 둘은 이미 오랫동안 상의해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왜 이렇게 급히 결정을 내렸냐 묻는다면 이유는 바로 연정우의 할아버지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어르신은 연세가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최근 갑자기 치매 판정을 받았다. 게다가 상황 또한 다른 사람보다 심각했기에 자신이 그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을 때, 하나뿐인 외손자인 연정우가 결혼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비록 할아버지를 가까이서 만나 뵌 성유리는 그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불친절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성유리는 이혼을 겪어본 여자이고 하마터면 감옥에 들어갈 뻔했던 사람이지 않는가? 그래서 당연하게도 연정우의 가족들 눈에 성유리는 그에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르신이 화 한번 내시지 않고 그나마 말을 섞어주는 것만으로도 성유리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연정우에게서 어르신의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잔뜩 찌푸렸었다. 자신의 요구가 과분하다고 느꼈는지 연정우는 성유리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난 너를 탓하지 않을 거야. 결혼이라는 게 얼마나 큰일인데. 너도...” “너 혹시 따로 좋아하는 사람 있어?” 성유리가 연정우의 말을 끊어버리며 물었다. 갑작스러운 성유리의 물음에
박한빈은 그 사진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개발팀 팀장이 직접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업무 보고를 하는 중에도 박한빈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어딘가 이상함을 느낀 서훈이 조심스레 입을 열어 박한빈을 불렀다.“대표님?”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박한빈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서훈을 바라보았다.그의 깊은 눈동자는 여전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했다.박한빈의 눈을 마주한 서훈은 조금 전 자신이 느꼈던 것이 단순한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는 말을 꺼내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건넸다.“방금 개발팀에게서 받아온 서류입니다. 결재 싸인 부탁드릴게요.”박한빈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이며 옆에 있던 펜을 집었다. 서훈과 개발팀 팀장은 그가 사인을 마치길 기다리며 서 있었다.평소 박한빈이라면 몇 초 만에 서류 검토를 끝냈겠지만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한참을 기다려 보아도 박한빈이 건네받은 서류는 두 번째 장으로 넘어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대표님?”서훈이 다시 질문을 던졌고 옆에 있던 팀장은 잔뜩 긴장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대표님, 혹시... 서류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박한빈은 그 말에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서류를 넘기더니 서명란에 펜을 갖다 댔다.하지만 펜을 갖다 대기만 할 뿐, 사인은 하지 않았다.서훈은 펜을 쥐고 있던 박한빈의 손등에 불거진 혈관들과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손가락을 발견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 혹시 몸이 안 좋으신 건가요?”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목구멍은 막힌 듯 답답했고 속에서부터 뭔가가 올라오는 것에서 비릿한 냄새까지 느꼈다.그는 최대한 자신의 목구멍까지 올라온 위액을 다시 삼켜내려 노력했다.박한빈도 본인이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눈앞의 글자들이 전혀 읽히지 않았고 어릴 때부터 수없이 써왔던 자신의 이름 석 자마저 기억해내기 버거웠다.결국, 박한빈의 손에 들려있던 펜은 서류 위에 힘없이 떨어지며 종이에 크고도 깊은 선을 남겼다.옆에 있던 사람들
박한빈은 이제 평정심을 되찾은 듯 보였다. 그는 두 손으로 책상을 짚은 채 어제나 꼿꼿이 펴고 있던 등을 천천히 굽히고 있었다. 고개까지 푹 숙이고 있던 그의 모습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함이 느껴졌다.서훈은 그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그가 망설이고 있던 그때, 갑자기 고개를 든 박한빈이 그에게 물었다.“담배 있어?”갑작스러운 질문에 서훈은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담배를 끊으려 했던 박한빈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몇 초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뒤늦게 박한빈의 말을 이해한 서훈은 망설임 없이 자신이 갖고 있던 담배를 건네며 말했다.“예전 것과 다른 담배인데, 지금이라도 가서 원래 피던 거 사 올까요?”“됐어.”박한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그 모습을 본 서훈이 재빨리 불붙은 라이터를 박한빈에게 건넸다.하지만 박한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지 못했다.그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그런 박한빈의 모습을 보던 서훈의 몸도 덩달아 함께 떨리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박한빈의 담배에는 불이 붙었다.서훈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박한빈은 다시 의자에 앉아 연기 속에 섞여 있던 연기 고리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걔 결혼한대.”그 말에 서훈의 표정 역시 잠시 굳어졌다. 그리고 곧이어 박한빈의 입에서 나온 “걔”의 정체를 빠르게 알아차렸다.잠시 망설이던 서훈이 말했다.“대표님, 미련이 남으신 거라면... 왜 유리 아가씨께 찾아가지 않으신 건가요?”박한빈은 그 말에 그저 가벼운 미소만 지어 보였다.서훈은 박한빈과 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일해왔다. 박한빈이 지화 그룹에 입사했던 그 날부터 서훈은 줄곧 그의 곁을 지켜왔고 그 덕에 박한빈의 생각 정도는 대체로 다 파악할 수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속내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웨딩드레스 정말
박한빈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우연히 길고양이 한 마리를 만난 적이 있었다.갓 태어난 듯 보였던 새끼 고양이였지만 주위에 어미 고양이로 보이는 고양이는 없었고 새끼 고양이 혼자 풀숲에 웅크린 채 가녀린 목소리로 울고 있었다.박한빈은 그런 새끼 고양이를 한 번 쳐다보았다.그때의 박한빈은 전혀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단순히 고양이에게 눈길 한 번 주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새끼 고양이가 몸을 일으켜 박한빈의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새끼 고양이는 똑바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지만 꽤 빠른 박한빈의 보폭을 열심히 뒤따라왔다.학교 정문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박한빈은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걸음을 옮겨 근처 매점으로 들어가 소시지 하나를 구매했다.그리고 새끼 고양이는 그 소시지를 아주 맛있게 받아먹었다.그날 이후로 박한빈은 하교할 때마다 그 새끼 고양이를 만났다.고양이는 그에게 다가와 손바닥에 몸을 비비며 박한빈이 간식을 주길 기다리곤 했다. 그렇게 어느 날부터 박한빈의 책가방 안에는 항상 고양이의 간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주말에는 고양이의 사료를 사기 위해 직접 슈퍼마켓에 가기도 했다.그는 월요일에 고양이에게 밥을 먹이고 나서 병원으로 데려가 검사를 마친 뒤, 집에 데려올 생각도 하고 있었다.할머니와 어머니를 설득하기란 어려울 수도 있지만 고양이가 자신을 따라온 것은 고양이가 자신을 선택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을 따라와 준 고양이에게 책임감이 생겼다.하지만 월요일에 학교로 온 박한빈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서 생선 캔을 받아먹은 고양이를 발견했다.박한빈은 혹시라도 그 캔이 고양이가 먹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가가 캔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고양이는 박한빈이 자신의 먹이를 뺏으려는 줄로만 알고 그의 손목을 덥석 물어버렸다.겨우 돋아난 유치였던 덕에 상처가 깊지는 않았다.하지만 그 순간, 박한빈의 마음은 이미 차게 식어버렸다.짐승은 결국 짐승이었다.그는 배신도,
분명 그 손바닥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순간적으로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마치 새끼 고양이의 털이 스친 듯하기도 했고 성유리의 머리카락 같기도 했다.박한빈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동안, 그의 맞은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오래 기다리게 했네요.”그 소리에 박한빈은 고개를 들어 입꼬리를 약하게 올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오랜만입니다, 고 대표님.”...성유리는 인주 프로젝트가 중단됐다는 사실을 거의 마지막쯤에야 알게 되었다.연정우와 함께 안 작가를 만나고 있던 성유리는 전화를 받자마자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뭐라고요?”“지화 그룹 쪽에서 먼저 프로젝트 중단을 요청했습니다. 시공팀에 문제가 생겨서 조사해야 할 것 같다고요.”“무슨 문제가 생긴 거죠?”“저도 잘 모릅니다. 그저 지화 그룹에서 그렇게 일방적으로 통보했을 뿐입니다.”“시공팀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다른 절차를 진행할 수 있잖아요. 아직 초기 단계니까 시공팀에 문제가 있으면 교체를 해도 되고요!”성유리의 말에 수화기 너머가 잠잠해졌다. 마치 무언가를 알고는 있지만 차마 말할 수는 없는 듯한 그 침묵은 성유리가 스스로 깨달아주길 바라는 듯했다.성유리도 그제야 깨달은 듯 물었다.“설마, 박 대표님이 시키신 건가요?”“그런 것 같습니다...”“대체 왜죠? 인주 프로젝트는 지화에게도 꽤 중요한 프로젝트일 텐데요? 지화 내부에 문제가 생긴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런 시점에 그 거대한 프로젝트를 중단하면 어떡해요?”상대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곧이어 성시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성유리는 곧장 전화를 끊고 성시원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인주 프로젝트 일은 이미 알고 있다. 지금 금성에 있는 거 맞지? 당장 회사로 돌아와, 회의 진행해야 하니까!”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거실 쪽 사람들을 바라보았다.마침 그녀에게로 다가온 연정우도 눈빛으로 무슨 일인지 물었다.“조금 이따가 다시 전화 드릴게요.”성유
“저 아직 밥도 못 먹었는데 같이 가서 식사 하시겠습니까?”박한빈이 묻자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그러나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박한빈이 그녀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윤도준은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박한빈이 멀리서 가볍게 손짓을 한 뒤 그대로 성유리를 차에 태웠다.이 차는 어제 미리 준비해 둔 것이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반짝이던 차체는 마을의 비포장도로를 달리면서 온통 흙탕물로 뒤덮여 있었다.하지만 박한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차가 한참을 달린 뒤에야 성유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엄마가 알게 되면 어떡해요!”“걱정 마십시오. 혹시 유리 씨한테 화를 내면 제가 가서 설명할 테니까.”“아마 엄마는 분명 당신을 때릴 거예요.”박한빈은 여전히 운전대를 잡은 채 성유리를 슬쩍 바라보았다.“왜요? 걱정되십니까?”“당연히 그건 아니에요.”성유리는 즉각 반박하더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성유리의 손을 잡았다.“당신...”놀란 성유리는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가만히 있으세요. 지금 저 운전 중이니까.”“게다가 손에 아직 상처가 있습니다.”그 말에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췄다.고개를 숙여 보니 그의 흰 셔츠 아래로 여러 겹의 붕대가 감겨 있었다.그리고 그 아래로 스며 나온 붉은 피가 희미하게 비쳐 보였다.“아직 안 나았어요?”성유리는 무심결에 눈썹을 찌푸렸다.“걱정 마십시오. 안 아픕니다.”박한빈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런 그를 한참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결국 손을 거두었다.그러나 박한빈의 손이 닿아 있는 곳에서부터 이상한 감각이 퍼졌다.마치 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성유리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하더니 결국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박한빈이 성유리를 읍내로 데려간 것은 단순히 밥을 먹고 장을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그녀를 병원에 데려가야 했기 때문이었다.그는 성유리가 자
할머니는 마을에서 작은 땅을 갖고 있었다.예전에는 옥수수를 심었지만 몇 년 전 이웃 마을에서 계약 농사를 제안하면서 딸기로 바꿨다.그러니 지금은 딸기 씨앗을 심을 시기였다.아침부터 소란을 피운 할머니를 성유리는 억지로 집에서 쉬게 하고 자신이 대신 밭일을 맡았다.일 자체는 힘들지 않았지만 계속 허리를 숙이고 있다 보니 금세 피로가 몰려왔다.쪼그려 앉아 씨앗을 심던 성유리가 잠시 눈을 감고 쉬려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 손을 뻗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지금 뭐 하십니까?”고개를 들어보니 박한빈이 찌푸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순간 얼어붙었고 이내 허둥지둥 그의 손을 밀어냈다.그리고는 황급히 몇 걸음 물러나 박한빈과의 거리를 벌린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저... 근데 왜 여기 계세요?”박한빈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절 무서워하시는 겁니까?”“아... 아니에요!”성유리는 서둘러 부정했다.마치 그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말이다.“다만... 엄마가 당신이랑 같이 있는 걸 싫어해요.”한참을 망설이다가 성유리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엄마가 화낼 거예요.”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성유리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왜죠? 그쪽 어머니는 제가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나 봅니다?”“네.”“하지만 유리 씨는 제가 나쁜 놈이 아니란 걸 알고 있잖아요?”그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을 따르는 겁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의 질문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건지, 아니면 그냥 혼란스러운 건지 알 수 없지만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았다.“게다가 유리 씨가 말하지 않으면 어머니는 모를 텐데 말이죠.”“그럼... 그건 속이는 거잖아요.”“속이는 게 아닙니다. 그냥 말하지 않는 것뿐이지.”성유리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박한빈 또한 더 이상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여기
박한빈은 많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었지만 이런 환경은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다.더구나, 이번에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자마자 창문 밖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할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누군가를 쫓아내고 있었다.이미 백발이 성성했지만 기운만큼은 넘쳤다.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몰아내는 동안, 마을 안팎 사람들이 소란에 놀라 몰려들었고 할머니는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까지 싸잡아 한바탕 호통을 쳤다.그 뒤에는 성유리가 조용히 서 있었다.마치 어미 닭에게 보호받는 병아리처럼.주변을 궁금한 듯 둘러보면서도 절대 할머니의 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박한빈이 그 장면을 바라보던 순간, 성유리도 마침 그의 시선을 느낀 듯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움찔하더니 황급히 고개를 돌려 할머니의 손을 붙잡았다.소동이 한참 이어진 끝에, 할머니는 성유리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쾅!그 문이 닫히는 소리는 깜짝 놀랄 정도로 컸다.그러고 나서야, 할머니는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겁먹지 마라. 저런 놈이 뭐라고!”“우리 딸처럼 좋은 아가씨가 결혼할 상대를 못 찾을 것 같아? 걱정 마. 엄마가 더 좋은 사람 골라줄 테니!”“엄마... 사실 저는 결혼 서두를 생각 없어요.”성유리가 조심스레 말했다.“그건 안 돼!”할머니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칼에 잘랐다.“여자는 크면 시집가야 하는 법이야.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으면 어쩌자는 거냐?”“게다가 내가 지금은 네 곁을 지켜주지만 언젠가는 나도 떠나야 한다. 그때 네가 혼자 남으면 누가 널 지켜주겠어?”엄마의 말에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밖에서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야?”아직 화가 덜 풀린 할머니는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하지만 문밖의 사람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대답했다.“안녕하세요. 문 좀 열어주실 수 있을까요?”“이번엔 또 누구야?”할머니는 투덜거리며 문을 열었다.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단정한 흰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
그 목소리에 성유리는 황급히 돌아섰는데 마치 얼굴에 ‘당황’이라는 글자를 적어 놓은 듯했다.할머니는 가느다란 눈을 좁히며 물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다녀온 거야?”“저... 밖에서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려서 나가서 좀 보고 오느라...”“고양이?”할머니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이 마을에 고양이 몇 마리 있는 게 뭐가 그렇게 신기해?”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행히 할머니도 깊이 따지지는 않았다.“얼른 자라.”그저 짧은 말만 남긴 채, 제 방으로 돌아갔다.성유리도 조용히 뒤따라 방으로 향했다.그녀의 방 창문은 길 건너편 박한빈이 머무는 집과 마주 보고 있었다.그곳의 창문에는 어제 새롭게 창호지를 발라놓아 이제 더 이상 구멍이 나 있지 않았다.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노란빛 조명은 성유리의 방 조명과 똑같은 따뜻한 색이었다.성유리는 그 창문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누워 잠을 청했다.그렇게 밤이 지나갔다.할머니는 원래 잠이 적었기에 해가 뜨기도 전에 괭이를 들고 밭으로 나갔다.성유리는 침구를 정리한 후 부엌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계란을 깨려고 고개를 숙인 순간, 갑자기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는 분명 할머니의 것이 아니었다.성유리는 순간 긴장했다.그래서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고 문밖으로 나섰다.그러나 마주한 사람을 보고는 눈빛이 살짝 흐려졌다.그러나 이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아주머니, 어쩐 일이세요?”“너희 어머니 계시니? 볼 일이 있어서 왔어.”여자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본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아마 밭에 계실 거예요. 불러올까요?”“그래, 다녀와.”여자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그러더니 성유리를 한 번 훑어보곤,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하지만 성유리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별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마침 그 순간, 할머니가 밭에서 돌아오고 있었다.두 사람은 길 한가운데서 마주쳤다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러다 에릭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흠, 듣고 보니 꽤 재미있을 것 같군.”“그럼 이 일은 네게 맡길게.”“뭐라고?”“너도 알다시피 난 이미 죽은 사람이야. 그리고 사씨 가문 쪽도...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내가 직접 손을 대긴 어려워.”“예전부터 네가 한국 시장에 들어가고 싶어 했잖아? 지금이 바로 기회 아닌가?”에릭이 막 대답하려던 찰나, 박한빈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이 마을 사람들은 일찍 잠드는 편이었다.지금은 사방이 조용했기에 그 작은 소리조차 유난히 또렷하게 들려왔다.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내려놓고 물었다.“누구십니까?”아직도 업무 모드였던 탓에 목소리에는 저절로 냉기가 서려 있었다.그랬더니 문밖에서 들리던 노크 소리가 멈췄다.하지만 대답은 없었다.불안해진 박한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혹시 연정우 씨가 또 사람을 보낸 걸까?’그는 반사적으로 방 안을 둘러보며 무기로 쓸 만한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그러나 바로 그때, 문밖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저예요.”박한빈은 순간 멍해졌다.그리고는 에릭이 뭐라고 하는지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대로 전화를 끊고 문 쪽으로 향했다.느슨하게 걸린 낡은 나무문을 밀어 열자 문 앞에는 성유리가 서 있었다.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면 한 그릇이 들려 있었고 발치에는 따뜻한 물이 담긴 주전자도 놓여 있었다.“아직 안 주무셨어요?”성유리가 조심스레 물었다.어딘가 머뭇거리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문 그녀는 이내 시선을 떨구며 덧붙였다.“저... 저녁을 드셨는지 몰라서요. 그리고 여기 불 때는 곳도 없길래... 그냥 면을 좀 끓였어요. 따뜻한 물도요.”박한빈은 그녀가 들고 있는 그릇을 바라보았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이 둔탁하게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박한빈이 문득 물었다.“제가 누구인지 아십니까?”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마을에서는 신호가 잘 잡히지 않았다.윤도준이 일부러 사람들을 데려와 집을 정리해 준 덕분에 겨우 머물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신호 문제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다행히 박한빈은 집 안 구석구석을 돌며 신호가 잡히는 곳을 찾아냈고 마침내 에릭과의 통화를 연결할 수 있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에릭은 비꼬듯이 물었다.“난 또 네가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네?”“실망시켜서 미안한데 난 아주 잘 살아 있었어.”박한빈이 대답했다.“난 안 좋아.”에릭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다.“지금 회사 쪽에서 어떤 난리가 났는지 알아? 전부 나한테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고! 이제야 확실히 알겠어. 네가 전에 말했던 불편해서 직접 나서지 못한다는 말, 결국 다 핑계였잖아. 나보고 대신 뒤집어쓰라는 거였지?”“일이 끝나면 내 몫의 이익 절반을 넘기지.”박한빈이 제시한 그 금액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하지만 돈은 이미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숫자나 다름없었다.그들이 하는 일에서 중요한 건 오직 짜릿함이었다.애초에 한 번에 일을 끝낼 수도 있었다.에릭은 심지어 축하 파티에서 마실 술까지 이미 골라 두었었다.그런데 갑자기 박한빈이이 모든 걸 멈추라고 했다.그 순간, 에릭은 마치 새벽녘 힘차게 울 준비를 하던 수탉이 갑자기 누군가에게 목을 눌린 듯한 기분이었다.숨이 막히고 무엇보다 기분이 몹시 나빴다.그때 박한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만약 네가 파티장에서 사고 치지만 않았어도 내가 너를 급하게 건지러 가지 않았어도, 성유리는 애초에 위험에 빠지지 않았을 거야.”“뭐야? 지금 나한테 책임이라도 묻겠다는 거냐?”“책임을 묻겠다는 건 아냐. 다만 우리나라엔 이런 말이 있지. 한 방울의 은혜에도 샘물처럼 보답하라는 말.”“너...”“됐고, 본론부터 들어가자.”박한빈이 그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성유리를 찾았어.”“오, 그건 축하할 일이네.”그러나 에릭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기쁨도 담겨 있지 않았다.오히려 실망한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그도 누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저희 또 만났네요.”맞은편에 서 있는 남자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여기 사는 겁니까?”성유리는 묻는 남자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여기 삽니다.”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요.”“네. 오늘 막 이사 왔거든요.”“아...”성유리는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지만 어딘가 찜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런데 이 집, 꽤 오래됐어요. 비라도 오면 새는 곳이 있을지도 몰라요.”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이상했다. 정작 상대방의 이름조차 모르는 데다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도 박한빈이 이곳에 산다는 말에 뭔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이 집과 그 남자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그럼 그는 어디에 살아야 할까?성유리는 스스로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그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할머니는 박한한이 성유리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 순간, 할머니의 표정이 확 변했다.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빗자루를 휘두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이 망할 놈아! 감히 내 딸한테 손을 대?”“어서 손 안 놔! 당장 안 놓으라고!”박한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유리가 먼저 할머니를 꼭 끌어안았다.“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엄마, 진정하세요. 그냥 얘기 좀 나누고 있었던 것뿐이니까.”할머니는 조금 전까지 윤도준을 쫓아 몇 바퀴나 뛰었는지 이미 숨이 가빠져 있었다.그런데도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고 박한빈을 보는 시선엔 노골적인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마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엄마, 우리 들어가서 밥 먹어요.”성유리가 부드럽게 말했다.할머니가 아직 노려보는 와중에도 성유리는 서둘러 상황을 정리했다.“그쪽도 오늘 새로 이사 온 이웃이에요.”그 말에 할머니의 주의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성유리의 엄마라고 주장하는 할머니는 박한빈을 다시 한번 훑어보더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
“설아?”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성유리는 정신을 차렸다.“네. 엄마, 왜 그러세요?”“그건 내가 물어볼 말이지.”할머니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성유리의 밥그릇을 탁탁 두들겼다.“밥 먹는데 무슨 넋을 놓고 앉아 있어?”성유리가 그 말에 재빨리 고개를 숙여 밥을 먹기 시작했다.그럼에도 할머니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오늘 일에 대해 생각하는 거지? 그 경찰들 다 헛소리 지껄이는 거야.”“어쨌든 결혼 날짜는 이미 정해졌으니 결혼식은 먼저 치러. 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 만큼 결혼하자마자 빨리 애 낳아. 내가 돌봐줄 수 있게.”“제가 누구랑 결혼해요?”성유리가 물었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연히 복섭이지! 예물도 이미 받았는데 뭘 더 바라?”할머니의 언성이 높아지며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그 모습을 본 성유리가 재빨리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아니, 그냥... 물어본 거예요.”“네가 지금 행복에 겨워서 정신이 없는 모양이구나. 예전에 다 정해진 일 아니었니? 게다가 너랑 복섭이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 결혼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어?”“제가 우섭이랑 오래 사귀었어요?”“그럼! 너희 어릴 때부터 함께 목욕도 했잖아. 몇 년이 아니라 20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라는 거야!”할머니의 말이 끝나가도 성유리는 아무런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녀가 애써 기억을 더듬으려는 순간, 머리가 격렬하게 아파지기 시작했다.고통을 무릅쓰고 말을 이어가려는 찰나, 밖에서 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마을 길이 고르지 못해 차체가 격하게 흔들리며 지나가더니 성유리와 할머니가 앉아 있는 식탁 앞으로 먼지가 고스란히 날려왔다.그러자 할머니의 얼굴이 확 붉어졌고 젓가락까지 내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지금 이게 뭐 하는 거야? 눈이 안 달렸냐! 밥 먹는데 먼지를 날리다니! 망할 놈의 새끼들아!”시간이 지나도 그칠 줄 모르는 할머니의 욕설은 매 한 마디가 다 아주 더러운 말들이었다.마을 누구나 아는 할머니의 억척스러움은
“할머니, 보세요. 이게 바로 박한빈 씨의 아내 사진인데 여성분이랑...”“무슨 사진? 저 남자 아내가 생긴 거랑 우리 설이랑은 무슨 상관인데? 이 애는 내 딸이야!”“알겠습니다만 의혹이 제기된 이상 검사 한번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DNA 검사라도...”“DNA는 무슨 DNA! 너희들 다 미친 거 아냐? 내 딸이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왜 남의 아내가 되냐고? 설아, 따라와!”할머니는 성유리의 손을 단호히 잡아끌며 몸을 돌렸다. 윤도준이 막 말을 걸려는 순간 박한빈이 오히려 그를 제지했다.“박한빈 씨, 이건...”“저 사람들 사는 마을이 어딥니까?”박한빈이 한없이 차가운 태도로 물었다.“네?”“저 사람들이 사는 마을 위치가 어디냐고 물었습니다.”...세상에 닮은 사람이 둘 있는 건 흔한 일이란 말을 누구나 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확신했다. 자신이 틀릴 리 없다는 것을.그녀의 눈동자 깊이 스민 습관, 손가락을 깨무는 버릇까지 모든 게 36일 전 사라진 아내와 일치했다.사실 그는 강제로 성유리를 데려갈 수도 있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게만 한다면 설령 그녀가 저항해도 가장 가까운 신분으로 법적 조치가 가능했다.그러나 박한빈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이 선택을 하기까지 결정했던 순간은 성유리가 노파의 품으로 달려가 엄마라고 부르는 모습이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성유리가 어린 시절 엄마에게서 느끼지 못한 가족의 온기를 이 할머니에게서 찾고 있음을.병상에 누워 생명이 사라져가는 엄마와 달리 옆에서 챙겨주는 노파의 따스함이 지금 성유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이다.만약 강제로 성유리를 데려간다면 그녀가 무조건 자신을 혐오하고 증오할 것이라고 믿었다.게다가 성유리를 데려간 사람들 또한 잘해주는 것 같았고 그녀 스스로도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가짜라고 한들 동년의 아쉬움과 공허한 마음 한구석을 채워주고 있으니 박한빈은 어쩌면 성유리에겐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당연하게도 염우섭이라는 남자의 존재는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그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