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는 잠시 멍해졌다. 그러더니 그녀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하더니 박한빈에게 물었다. “그래요? 그럼 박한빈 씨가 이기셨나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물음에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느꼈는지 입을 꾹 닫았다. 그는 정리를 마친 자기 물건을 챙기고 성큼성큼 집 밖을 나가버렸고 문을 닫을 때도 별다른 감정이 없는지 소리는 크게 나지 않았다. 성유리는 떠나는 박한빈에게 시선 한번 돌리지 않았는데 사실 그녀 또한 방금 한 말들을 내뱉을 생각이 없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을뿐더러 이미 끝난 사이에 과거의 일까지 들춰내며 따지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썩은 과일을 바로 쓰레기통에 버리면 되는데 굳이 껍질을 한 겹씩 까 제일 먼저 썩기 시작한 부분을 찾을 필요도 없지 않은가? 결국 과일 껍질을 다 벗겨낸다 해도 돌아오는 정답은 딱 하나뿐이다. 애초에 처음부터 모든 것이 잘못됐다는 것. 하지만 오늘 성유리는 꾹꾹 참아왔던 감정들이 다 터졌다. 정민재가 지화 그룹의 일들을 말해준 것과 김서영이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려준 후로 성유리는 항상 머릿속에 맴돌던 의문들에 정답을 얻은 것 같았다. 최근 며칠 동안 성유리는 이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했고 박한빈을 볼 때마다 입이 근질거렸다. 결국 오늘에서야 터져버린 성유리도 두 사람 사이에 큰 소리가 오갈 줄 알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매 사람마다 견딜 수 있는 고통의 크기가 다르듯이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감정 또한 한계가 있었다. 성유리는 앞에 놓인 케이크에 시선을 돌렸다. 말을 하면서 제멋대로 쑤시고 찔러버린 케이크의 모양은 완전 망가져버렸지만 성유리는 다시 포크를 들었다. 케이크의 맛은 너무도 달콤했지만 성유리는 왜인지 모르게 그 달콤한 맛이 쓰게 느껴졌다. 결국 성유리는 그 케이크를 망설임도 없이 쓰레기통에 던졌다. ‘하긴 원래 디저트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맛있는 케이크를 사 왔겠어.’ 한편, 박한빈은 이미 호텔 방으로 돌아갔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어떠한 상황에서든 자기 곁을 지켜줄 줄 알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자신의 결점과 문제를 다 용서할 줄 알았다. 그는 성유리가 정말 자신을 떠난다 해도 이렇게까지 아플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박한빈은 마치 생존에 꼭 필요한 산소와 물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내가 틀린 거네.’ 그가 성유리에게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던 것처럼 성유리는 지금 박한빈에게 작은 틈조차 남겨주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는 이미 성유리에 의해 넘을 수 없는 선이 그어져 버렸다. ... 그 뒤로 며칠 동안 성유리는 평소대로 회사로 출근했다. 연정우와 결혼을 한다는 말도 성유리가 멋대로 지어낸 사실이 아니었고 둘은 이미 오랫동안 상의해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왜 이렇게 급히 결정을 내렸냐 묻는다면 이유는 바로 연정우의 할아버지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어르신은 연세가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최근 갑자기 치매 판정을 받았다. 게다가 상황 또한 다른 사람보다 심각했기에 자신이 그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을 때, 하나뿐인 외손자인 연정우가 결혼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비록 할아버지를 가까이서 만나 뵌 성유리는 그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불친절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성유리는 이혼을 겪어본 여자이고 하마터면 감옥에 들어갈 뻔했던 사람이지 않는가? 그래서 당연하게도 연정우의 가족들 눈에 성유리는 그에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르신이 화 한번 내시지 않고 그나마 말을 섞어주는 것만으로도 성유리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연정우에게서 어르신의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잔뜩 찌푸렸었다. 자신의 요구가 과분하다고 느꼈는지 연정우는 성유리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난 너를 탓하지 않을 거야. 결혼이라는 게 얼마나 큰일인데. 너도...” “너 혹시 따로 좋아하는 사람 있어?” 성유리가 연정우의 말을 끊어버리며 물었다. 갑작스러운 성유리의 물음에
박한빈은 그 사진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개발팀 팀장이 직접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업무 보고를 하는 중에도 박한빈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어딘가 이상함을 느낀 서훈이 조심스레 입을 열어 박한빈을 불렀다.“대표님?”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박한빈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서훈을 바라보았다.그의 깊은 눈동자는 여전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했다.박한빈의 눈을 마주한 서훈은 조금 전 자신이 느꼈던 것이 단순한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는 말을 꺼내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건넸다.“방금 개발팀에게서 받아온 서류입니다. 결재 싸인 부탁드릴게요.”박한빈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이며 옆에 있던 펜을 집었다. 서훈과 개발팀 팀장은 그가 사인을 마치길 기다리며 서 있었다.평소 박한빈이라면 몇 초 만에 서류 검토를 끝냈겠지만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한참을 기다려 보아도 박한빈이 건네받은 서류는 두 번째 장으로 넘어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대표님?”서훈이 다시 질문을 던졌고 옆에 있던 팀장은 잔뜩 긴장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대표님, 혹시... 서류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박한빈은 그 말에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서류를 넘기더니 서명란에 펜을 갖다 댔다.하지만 펜을 갖다 대기만 할 뿐, 사인은 하지 않았다.서훈은 펜을 쥐고 있던 박한빈의 손등에 불거진 혈관들과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손가락을 발견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 혹시 몸이 안 좋으신 건가요?”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목구멍은 막힌 듯 답답했고 속에서부터 뭔가가 올라오는 것에서 비릿한 냄새까지 느꼈다.그는 최대한 자신의 목구멍까지 올라온 위액을 다시 삼켜내려 노력했다.박한빈도 본인이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눈앞의 글자들이 전혀 읽히지 않았고 어릴 때부터 수없이 써왔던 자신의 이름 석 자마저 기억해내기 버거웠다.결국, 박한빈의 손에 들려있던 펜은 서류 위에 힘없이 떨어지며 종이에 크고도 깊은 선을 남겼다.옆에 있던 사람들
박한빈은 이제 평정심을 되찾은 듯 보였다. 그는 두 손으로 책상을 짚은 채 어제나 꼿꼿이 펴고 있던 등을 천천히 굽히고 있었다. 고개까지 푹 숙이고 있던 그의 모습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함이 느껴졌다.서훈은 그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그가 망설이고 있던 그때, 갑자기 고개를 든 박한빈이 그에게 물었다.“담배 있어?”갑작스러운 질문에 서훈은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담배를 끊으려 했던 박한빈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몇 초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뒤늦게 박한빈의 말을 이해한 서훈은 망설임 없이 자신이 갖고 있던 담배를 건네며 말했다.“예전 것과 다른 담배인데, 지금이라도 가서 원래 피던 거 사 올까요?”“됐어.”박한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그 모습을 본 서훈이 재빨리 불붙은 라이터를 박한빈에게 건넸다.하지만 박한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지 못했다.그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그런 박한빈의 모습을 보던 서훈의 몸도 덩달아 함께 떨리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박한빈의 담배에는 불이 붙었다.서훈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박한빈은 다시 의자에 앉아 연기 속에 섞여 있던 연기 고리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걔 결혼한대.”그 말에 서훈의 표정 역시 잠시 굳어졌다. 그리고 곧이어 박한빈의 입에서 나온 “걔”의 정체를 빠르게 알아차렸다.잠시 망설이던 서훈이 말했다.“대표님, 미련이 남으신 거라면... 왜 유리 아가씨께 찾아가지 않으신 건가요?”박한빈은 그 말에 그저 가벼운 미소만 지어 보였다.서훈은 박한빈과 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일해왔다. 박한빈이 지화 그룹에 입사했던 그 날부터 서훈은 줄곧 그의 곁을 지켜왔고 그 덕에 박한빈의 생각 정도는 대체로 다 파악할 수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속내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웨딩드레스 정말
박한빈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우연히 길고양이 한 마리를 만난 적이 있었다.갓 태어난 듯 보였던 새끼 고양이였지만 주위에 어미 고양이로 보이는 고양이는 없었고 새끼 고양이 혼자 풀숲에 웅크린 채 가녀린 목소리로 울고 있었다.박한빈은 그런 새끼 고양이를 한 번 쳐다보았다.그때의 박한빈은 전혀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단순히 고양이에게 눈길 한 번 주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새끼 고양이가 몸을 일으켜 박한빈의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새끼 고양이는 똑바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지만 꽤 빠른 박한빈의 보폭을 열심히 뒤따라왔다.학교 정문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박한빈은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걸음을 옮겨 근처 매점으로 들어가 소시지 하나를 구매했다.그리고 새끼 고양이는 그 소시지를 아주 맛있게 받아먹었다.그날 이후로 박한빈은 하교할 때마다 그 새끼 고양이를 만났다.고양이는 그에게 다가와 손바닥에 몸을 비비며 박한빈이 간식을 주길 기다리곤 했다. 그렇게 어느 날부터 박한빈의 책가방 안에는 항상 고양이의 간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주말에는 고양이의 사료를 사기 위해 직접 슈퍼마켓에 가기도 했다.그는 월요일에 고양이에게 밥을 먹이고 나서 병원으로 데려가 검사를 마친 뒤, 집에 데려올 생각도 하고 있었다.할머니와 어머니를 설득하기란 어려울 수도 있지만 고양이가 자신을 따라온 것은 고양이가 자신을 선택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을 따라와 준 고양이에게 책임감이 생겼다.하지만 월요일에 학교로 온 박한빈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서 생선 캔을 받아먹은 고양이를 발견했다.박한빈은 혹시라도 그 캔이 고양이가 먹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가가 캔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고양이는 박한빈이 자신의 먹이를 뺏으려는 줄로만 알고 그의 손목을 덥석 물어버렸다.겨우 돋아난 유치였던 덕에 상처가 깊지는 않았다.하지만 그 순간, 박한빈의 마음은 이미 차게 식어버렸다.짐승은 결국 짐승이었다.그는 배신도,
분명 그 손바닥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순간적으로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마치 새끼 고양이의 털이 스친 듯하기도 했고 성유리의 머리카락 같기도 했다.박한빈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동안, 그의 맞은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오래 기다리게 했네요.”그 소리에 박한빈은 고개를 들어 입꼬리를 약하게 올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오랜만입니다, 고 대표님.”...성유리는 인주 프로젝트가 중단됐다는 사실을 거의 마지막쯤에야 알게 되었다.연정우와 함께 안 작가를 만나고 있던 성유리는 전화를 받자마자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뭐라고요?”“지화 그룹 쪽에서 먼저 프로젝트 중단을 요청했습니다. 시공팀에 문제가 생겨서 조사해야 할 것 같다고요.”“무슨 문제가 생긴 거죠?”“저도 잘 모릅니다. 그저 지화 그룹에서 그렇게 일방적으로 통보했을 뿐입니다.”“시공팀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다른 절차를 진행할 수 있잖아요. 아직 초기 단계니까 시공팀에 문제가 있으면 교체를 해도 되고요!”성유리의 말에 수화기 너머가 잠잠해졌다. 마치 무언가를 알고는 있지만 차마 말할 수는 없는 듯한 그 침묵은 성유리가 스스로 깨달아주길 바라는 듯했다.성유리도 그제야 깨달은 듯 물었다.“설마, 박 대표님이 시키신 건가요?”“그런 것 같습니다...”“대체 왜죠? 인주 프로젝트는 지화에게도 꽤 중요한 프로젝트일 텐데요? 지화 내부에 문제가 생긴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런 시점에 그 거대한 프로젝트를 중단하면 어떡해요?”상대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곧이어 성시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성유리는 곧장 전화를 끊고 성시원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인주 프로젝트 일은 이미 알고 있다. 지금 금성에 있는 거 맞지? 당장 회사로 돌아와, 회의 진행해야 하니까!”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거실 쪽 사람들을 바라보았다.마침 그녀에게로 다가온 연정우도 눈빛으로 무슨 일인지 물었다.“조금 이따가 다시 전화 드릴게요.”성유
성유리의 모습이 지나치게 멍해 있어서였을까. 연정우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미처 참지 못했다.그는 고개를 숙여 성유리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마치 잠자리의 입맞춤이라도 되는 듯 그는 가볍게 입술을 대자마자 곧장 떨어졌다.뒤이어 연정우는 성유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됐어, 이제 가 봐.”성유리는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하지만 그녀도 더 말을 하지 않은 채 그저 연정우를 한 번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차에서 내렸다.성시원은 이미 사무실에서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성유리가 들어서자 그는 자연스럽게 인주 프로젝트 얘기를 제일 먼저 꺼냈다.“구체적으로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는 저도 잘 몰라요. 일방적으로 통보받은 것뿐이라.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최대한 철저히 조사해서 만족하실만한 답변을 드릴 테니까요.”성유리의 대답은 아주 형식적이었다.잠시 그녀를 주시하던 성시원이 입을 열었다.“아직도 지화 쪽이랑 얘기를 안 나눠봤다는 거야?”“아직이요. 하지만 곧...”“이게 내가 방금 받은 메일이야. 한 번 봐.”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을 끊더니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문서를 그녀에게 던져주었다.성유리는 어딘가 의아했지만 성시원에게서 서류를 건네받았다.서류 위에 적혀 있는 내용을 확인한 성유리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그 서류에는 성유리의 이력서가 있었다.지화 쪽에서 보내온 그 서류에서는 성유리의 이력을 하나하나 나열하며 그녀에게 이렇게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길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고위층 관리자로 교체해달라는 직설적인 요구도 함께 적혀 있었다.“이 프로젝트는 예전부터 계속 제가 담당해왔던 거예요.”성유리가 이를 악문 채 말했다.“모든 절차를 제가 다 직접 확인하고 조정해 왔는데 이제 와서 경험 부족을 이유로 교체하겠다니요. 너무 말도 안 되는 거 아닌가요?”이 프로젝트는 박한빈이 직접 그녀에게 맡긴 것이었다.모든 내부 설계도와 데이터 조사를 포함한 제안서를 그녀
성유리는 태연한 표정의 성시원을 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아, 설마 이거, 아버지랑 박 대표가 짜고 벌인 일이에요?”“당연히 아니지.”성시원이 미간을 심각하게 찌푸리더니 계속해서 말했다.“유리야, 너도 입사한 지 꽤 됐잖아. 회사의 이익은 네 개인적인 이익보다 우선순위에 둬야 한다는 거, 잘 알지 않니?”성유리는 아무 대답 없이 그저 이를 꽉 물었다.성시원은 곧이어 다른 사람을 안으로 불러들였다.그 사람은 성유리도 아는 사람이었다.바로 연성 지사의 대표로 근무 중인 고명도였다.이미 연성 지사에서 인맥과 기반을 다진 고명도가 본사로 발령받았다는 것은 사실상 고명도에게 불리한 일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회사에 잘 적응해나갔다. 이번 프로젝트 역시 지화 그룹에서 직접 그를 지명해 담당하도록 한 것이었다.“오랜만이네, 성 대표.”고명도는 웃는 얼굴로 성유리의 앞까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의 악수를 무시한 채 차가운 표정으로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이번 주에 시간 되면 회사로 나와. 인수인계해야 하니까.”성시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성유리의 발걸음이 잠시 멈칫했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떴다.회사 밖으로 나온 후에야 성유리의 곧게 펴져 있던 등이 조금씩 구부러지기 시작했다.그녀는 주차된 차를 바라보았다.익숙한 차종에 익숙한 번호판이었다.성유리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차가 주차된 쪽으로 걸어갔다.차창은 꽉 닫혀 있었고 짙게 선팅 된 창문 덕에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차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곧장 차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차 뒷좌석에는 박한빈이 앉아 있었다.그는 예전과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여전히 단정한 셔츠를 입고 있었고 걷어 올려진 소매 밑으로는 검은색과 금색의 조화가 잘 어울리는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태블릿에 집중하고 있던 그는 갑자기 차에 올라탄 성유리에도 전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성유리가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홍지은은 늘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성유리는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여러 번 말해봤지만 걔는 원래 이런 곳에 나오길 싫어해서요.”오늘도 그녀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괜찮아요. 그래도 한번 얼굴을 비추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마침 경매회도 곧 시작하는데 저도 박 대표 부인의 취향이 궁금하네요.”“그러게 말이에요. 어차피 나는 경쟁 상대가 될 수도 없으니까 미리 유리 씨가 뭘 원하는지 알아두고 포기하는 게 낫겠어요.”홍지은도 사람들을 따라 웃으며 말했다.“유리는 오지 않을 거예요. 전에도 물어봤는데 딱히 관심 가는 물건이 없다고 했거든요.”그녀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곧 현실은 완전히 뒤집혔다.왜냐하면 그날 경매장에 성유리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올해 금성에서 열리는 첫 대형 경매 행사였다.특히 경매 목록에 포함된 한 세트의 보석이 큰 주목을 받으면서 도시 내에서 일정한 신분을 가진 인사들은 전부 참석했다.사실 성유리는 처음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런데 전날 밤, 박한빈과 게임 내기를 했다가 패배하는 바람에 박한빈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기로 했다.그 조건이 바로 경매장에 함께 가달라는 것이었다.다만, 박한빈도 굳이 오래 있을 생각은 없다고 했다.“그냥 얼굴만 비추고 가면 돼. 너 피곤해지면 바로 나가자.”그 말을 듣고 나서야 성유리는 마지못해 동행을 허락했다.성유리가 입장하는 순간, 그녀의 시선은 홍지은에게로 향했다.그녀는 칵테일 잔을 들고 주변 사람들과 해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비록 남편은 별다른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자리에서만큼은 홍지은에게 자유를 허용했다.어차피 그의 사업 자원 중 상당수가 홍지은의 인맥과 네트워크 덕분에 얻어진 것이었으니까.오늘 그녀는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생기가 넘쳤다.완벽한 메이크업 덕분인지 얼굴에도 빛이 나는 것 같았고 평소보다 더 예뻐 보였다.그런데 이
사실 박한빈은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떠올릴 수 있는 것이라곤 끝없는 공부와 훈련뿐이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해야 할 것이 많았다.학교 성적은 언제나 최고여야 했고 악기나 골프, 승마를 포함한 다양한 외국어까지 익혀야 했다.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박한빈의 신분을 부러워했다.박 씨라는 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영광을 의미했다.하지만 그 영광과 함께 짊어져야 할 무게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만약 지금 그때로 돌아가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삶이 더 나은 것인지조차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박한빈이 평범한 아이로서의 행복을 잃었다는 사실이다.잃을 게 많은 만큼 박한빈은 손에 넣은 것도 많았다.그리고 그는 자신이 짊어졌던 짐을 하늘이에게 만큼은 넘기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그래서 얼마 전, 김서영이 하늘이에게 특별 교육을 시키자고 했을 때 박한빈은 단칼에 거절했다.“박한빈, 네 딸은 분명 앞으로 금성에서 주목받는 존재가 될 거야.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익히지 못하면 그 신분이 아깝지 않겠니?”김서영은 박한빈을 설득하려 했지만 박한빈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뭐가 어떻게 됐든 하늘이는 박한빈의 핏줄이자 친딸이다. 설령 앞으로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더라도 말이다.감히 누가 박한빈의 딸을 무시하고 얕잡아볼 수 있겠는가?그래서 김서영이 뭐라고 하든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그 이야기를 마친 후, 박한빈의 품 안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성유리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박한빈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니 그녀는 살짝 찌푸린 미간과 다물린 입술로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었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순간 자신이 뭔가 실수한 것인가 싶어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에요.”성유리는 빠르게 화제를 돌리며 박한빈에게 물었다.“그런데 이거 왜 아직도 안 멈추죠?”“곧 멈출 거야.”박한빈은 짧게 대답하다 문득 깨달았다.“설마... 지금 나를 가슴 아파하는 거야?“아니거든요?”성유리는 전혀 망설
박한빈은 천천히 웃음을 거두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직접 물을 따라왔다.성유리는 그가 자신이 마실 물을 준비하는 줄 알았다.그런데 박한빈이 몸을 휙 돌리곤 성유리에게 컵을 내밀었다.“방금 건 그냥 장난이었어. 재미없었지?”그의 말에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물컵을 받아 들었다.그것만으로도 이미 박한빈에게는 충분한 대답이었다.“푹 쉬어.”박한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성유리에게 말했다.성유리는 물 한 모금을 마신 뒤, 컵을 옆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잠깐 나갔다 올게요.”그녀가 문 쪽으로 향하려 하자 박한빈이 손목을 붙잡았다.“어디 가려고?”“정원이요. 햇볕 좀 쬐려고.”“나도 같이 가.”“아까 그렇게 아프다면서 괜찮으세요?”성유리는 박한빈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그 눈빛에는 박한빈을 향한 의심이 가득했다.그러나 박한빈은 개의치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나도 햇볕 좀 쬐고 싶어. 그리고 의사가 말했잖아? 내 면역력 좋다고.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래.”‘심각하지 않다?’‘그러면 아까까지는 왜 그렇게 책임지라고 난리였는데?’그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려 했지만 결국 성유리는 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그녀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박한빈은 마치 그것을 허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성유리의 손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방에서 본 그대로 오늘 날씨는 유난히 화창했다.햇살 아래, 정원의 회전목마가 선명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박한빈이 특별히 주문 제작해 놓은 것이라 그런지 원색의 유채가 한층 더 생생해 보였다.그 장면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그런데, 박한빈은 줄곧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가 보내는 그윽한 시선을 느꼈지만 성유리는 한참을 모른 척했다.박한빈이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지는.“한번 타볼래?”“뭐를요?”“회전목마.”성유리는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제가 어린애도 아니고.”“그럼 어릴 때는 타봤어?”그 질문에 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잠시 침
“그럼 자. 난 네가 잠들면 나갈게.”박한빈의 말을 성유리가 철석같이 믿을 리가 없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와 다투는 것도 귀찮았다.그래서 그냥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푹 덮고 등을 돌리고는 박한빈에게서 멀어졌다.사실 처음에는 전혀 졸리지 않았지만 조금 전 박한빈과 한바탕 실랑이를 벌인 탓인지 피곤함이 몰려왔다.머릿속에 들던 생각도 점점 흐려지고 그렇게 결국 잠에 빠져들었다.아니나 다를까, 박한빈의 말을 거짓말이었다.다음 날 아침, 성유리가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바로 옆에 누워 있는 박한빈이었다.그는 한쪽 팔로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잠에 들어있었는데 성유리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당장 박한빈을 밀어내려 했지만 갑자기 그가 몸을 돌려 두어 번 기침을 했다.그리곤 반쯤 감긴 눈으로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나... 너한테서 감기가 옮은 것 같아.”성유리는 그 말에 그대로 멈춰버렸다.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잡아 자기 이마에 갖다 댔다.“한번 만져봐. 나 열 나는 거 같지 않아?”성유리는 일단 체온계를 가져와 박한빈의 체온을 재봤다.그러나 체온계에 표시된 건 아주 멀쩡한 수치였다.그 말인즉 박한빈은 열이 안 나고 있다는 것이었고 감기에 걸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그런데도 박한빈은 여전히 몸이 아프다며 자신이 감기에 걸렸으니 여기서 병을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전의 고고하고 차가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마치 억지를 부리는 아이 같았다.결국 성유리는 의사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뿐만 아니라 아예 다른 방으로 옮겨서 지내기로 결심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속내를 간파한 듯, 서둘러 앞을 막아섰다.“뭐 하려는 거야?”“방을 옮길 거예요.”성유리는 담담하게 대답을 이어갔다.“의사 선생님께서 교차 감염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어요.”“그럼 난 어떡하라고?”“저택에 도우미분들도 많고 의사 선생님도 있잖아요. 박한빈 씨를 돌볼 사람 충분하죠.”“난 다른 사람이 내 몸에 손대는 거 싫어.”
“걱정 마, 엄마 괜찮으니까.”하늘이는 문가에 서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한참을 그러던 아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다시 감기 옮으면 어떡해?”그 말에 성유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괜찮아, 엄마 마스크 쓰고 있잖아.”그래도 하늘이는 여전히 망설이는 눈치였다.망설이던 아이는 결국 괜찮다는 성유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성유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이제 가서 자. 혼자 잘 수 있겠어?”“응!”하늘이는 성유리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나 이제 다 컸어.”“그래, 그럼 가서 쉬어.”하늘이는 여전히 아쉬운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를 점차 거뒀다.하늘이가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은 걸 확인한 뒤에야 성유리도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낮 동안 너무 오래 잠들었던 탓인지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침대에 누운 채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다가 결국 다시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하려 했다.그런데 그때, 밖에서 들려오는 아주 익숙한 발소리.그걸 듣는 순간 성유리는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러나 성유리는 눈을 뜨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곧 남자가 천천히 다가와 침대 곁에 서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그제야 성유리는 몸을 뒤로 빼며 경계하듯 눈을 떴다.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 박한빈은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열은 안 나는지 보려고 했어.”“전 괜찮아요.”성유리는 박한빈이 행여 다른 말을 할까 두려워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박한빈 씨는 서재에서 주무셔아 하는 거 아니었어요?”“잠이 안 와.”“그러면 그냥 조용히 나가주세요. 제 잠까지 방해하지 말고.”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박한빈은 미동도 없었다.한동안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그의 모습에 성유리는 점점 짜증이 밀려왔고 손을 뻗어 그를 밀어내려 했다.“빨리 나가시라고요.”
약을 다 먹은 후 잠에 든 성유리는 그날 오후까지 자버렸다.그 덕에 휴대폰에 쌓인 메시지들을 저녁이 되어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메시지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담겨 있었다.어떤 사람들은 홍지은이 올린 사진 속 사람이 성유리가 맞냐고 물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금성에 돌아온 것을 확인하며 언제 한번 만나 밥을 먹자고 했다.하지만 사실, 성유리가 금성에 돌아온 걸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터였다.지난번 사하나의 장례식 때도 이미 업계 사람들 대부분이 참석했었으니까.다만, 그때 성유리는 사씨 가문 사람들에게 쫓겨난 신세였다.심지어 그 자리에서 불길한 존재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그랬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이렇게 태도를 180도 바꾸는 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기회주의적으로 상황에 따라 태도를 바꾸고 손익을 따져 움직이는 건 인간의 본능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게다가 메시지를 보낸 이들의 이름조차 성유리는 대부분 기억나지 않았다.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이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예전의 성유리였다면 아무리 그들이 싫어도 박한빈의 아내라는 신분 때문에 억지로라도 상대해 줬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들이 어떻게 나오든 이젠 상관없었다.그래서 성유리는 메시지를 한 번 훑어본 뒤,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고 휴대폰을 옆에 툭 던져버렸다.그때, 하늘이가 성유리를 찾으러 방에 들어왔다.아직 감기가 완전히 낫지 않은 터라 혹시라도 다시 옮길까 봐 그녀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문가에 서 있었다.“엄마, 괜찮아?”하늘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성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많이 아파?”성유리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괜찮아. 너는 어때?”“나도 괜찮아! 의사 아저씨가 말했어. 내일이면 완전히 나을 거래! 봐, 나 오늘도 이렇게 멀쩡해!”말을 마친 하늘이는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두 번이나 뛰어 보였다.그 모습을 보던 성유리는 더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이리 와.”“그건
“하늘이가 아팠을 때도...”말을 꺼내던 박한빈 스스로 말을 뚝 멈췄다.박한빈은 알고 있었다. 이미 그 일로 인해 성유리에게 영원히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었다.가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날 때면 그는 성유리를 꼭 끌어안아야만 했다.그래야만 그녀가 정말로 곁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지나간 과거에 대해서는 서로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그런데 오늘, 박한빈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때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박한빈이 말을 꺼내자마자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그에게 잡힌 손을 빼려고 애를 쓰는 게 보였다.그러나 박한빈은 마치 성유리가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었다는 듯 그녀의 손을 더욱 꼭 쥐었다.“그때 내가 잘못한 거 알아.”박한빈은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그땐 그냥... 너무 화가 났고 받아들이기 싫었어.”“네가 내게 한 번만 져주길 바랐어. 처음 호텔에서도... 난 네가 내게 순순히 져주길 바랐다고.”“그때 네가 내 앞에서 돌연히 동의서에 서명하라고 했을 때 난 마치... 팔려 가는 기분이었어.”“그래서 일부러 버텼던 거야. 그냥 네가 나한테 한 발자국만 양보해 주길 바랐을 뿐이었어.”박한빈은 고개를 푹 숙이며 계속 말했다.“그때 난 정말 형편없었어. 아무리 그래도 하늘이의 목숨을 가지고 그런 식으로 도박을 하듯 행동해서는 안 됐어.”잠시 숨을 고르던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성유리를 바라봤다.“하지만 유리야, 이거 하나만 믿어 줘. 나도 우리 아이를 사랑해.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어떻게 네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그의 진심 어린 말에도 성유리는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사실 성유리도 알고 있었다.지금 자신이 내린 선택과 현재의 태도가 과거의 신념과는 어긋난다는 것을.늘 스스로를 다독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이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홍지은이 올린 사진에는 성유리의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다.하지만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뒤로 경매장에서 산 조명이 너무 잘 보였다. 업계 사람들은 익명의 구매자가 알려지진 않았지만 사실 다들 눈치 차리고 쉬쉬하고 있을 뿐이었다.거기에 더해 성유리는 전에 이런 활동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많은 사람들은 성유리의 옛날 사진과 홍지은이 올린 사진을 몇 번이나 확인하곤 그 사람이 정말 성유리가 맞다는 것을 확신했다.그렇게 성유리와 박한빈의 사이는 순식간에 퍼졌지만 몸이 불편했던 그녀는 바깥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고 있었다.원래 약간의 감기 기운이라고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점심부터 갑자기 고열에 시달렸다.도우미가 다시 박한빈에게 연락했을 때, 그는 의사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의사는 빠르게 성유리의 체온을 재보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병원으로 향해 피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말했다.“피검사요?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가요?”박한빈은 의사의 말에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아닙니다. 사모님의 지금 상황으론 감기 때문에 생기는 증상이 맞는 것 같은데 피검사를 하면 다른 상황을 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저는...”“다른 상황이요?”박한빈은 의사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때, 가만히 누워있던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의사 선생님, 걱정마세요. 저 임신 안 했어요.”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한껏 당황하며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리는 아주 차분한 말투로 의사에게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병원 안 가도 돼요. 바로 약 처방 해주세요.”“아... 네.”의사는 잠시 주춤거리다 결정을 내린 듯 성유리에게 하려던 말을 하기 시작했다.“사모님, 어떤 상황엔 생리주기가 일정하다고 해서 임신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임신초기일 수도 있으니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된 피임을 하지 않으셨다면...”“저 했어요.”성유리의 대답에 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계속 피
그의 말에 항상 생글생글 웃던 홍지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이 문제는... 사실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필경 전에 성유리가 박한빈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세상에 있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으니 말이다.그래서 홍지은은 성유리의 존재를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에게 뭐라 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성유리는 지금 엄연히 박한빈의 안사람이자 사모님이다.처음에 이 소식을 접해 들은 홍지은은 거짓말이라고 확신했다. 두 사람이 정말 다시 만난다면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고 확신했다.게다가 성유리는 전에 항상 박한빈의 아내 혹은 여자 친구의 신분으로 각종 모임이나 연회에 참석했었다.그러나 최근 몇 년간 홍지은은 성유리의 모습을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어젯밤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홍지은은 여전히 믿지 못했을 것이다. 이게 다 박한빈이 한 일이라는 사실을.지금 그의 신분과 지위로 만약 성유리와 다시 만난다는 일이 세상에 공개된다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다.그리고 박한빈은 성유리가 방해받지 않기를 원했다. 다르게 말하면 그는 지금 최선을 다해 성유리를 지켜주고 있었다.이건 어떠한 감정일까?박한빈을 졸졸 따라다니던 여자들이 적지만은 않았을 텐데 그는 시종일관 성유리만 선택했다.그제야 홍지은은 성유리에 대한 박한빈의 감정을 알아차렸다.그게 아니면 왜 어젯밤부터 끈질기게 성유리와 만나겠다고 고집을 부렸겠는가.전에 홍지은이 알던 평범하기 짝이 없던 성유리라면 그녀는 자신이 사과할 가치도, 필요도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박한빈이 이렇게 단번에 자신의 생각을 맞출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었다.그래서 그의 말에 도무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해 있다 한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 전에 유리가 어디 있는지 못 찾았어요. 그래서 사과를 못했죠.”“그러십니까?”박한빈은 살짝 미소 지으며 홍지은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그 미소가 무엇보다 더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