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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유진은 몸에 휴대폰이고 지갑이고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택시를 잡아 친구 집에 도착한 후 택시기사의 휴대전화를 빌려 조예원에게 전화를 걸어 데리러 나와달라고 부탁했다.예원은 유진의 화려한 드레스 차림을 보더니 빠른 속도로 택시비를 내며 의문스러운 듯 물었다.“오늘은 뭐야? 도망가는 신부야, 신데렐라야?”요즘 디자인 작업으로 바빠 밖의 일에는 관심이 없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유진은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서며 담담하게 말했다.“나 한빈이랑 헤어졌어.”예원이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어?”엘리베이터에 들어서서야 정신을 차렸다.“왜? K그룹에 찍혀서 구치소에 있다며?”“나왔어.” 유진은 엘리베이터에 기댄 채 남 얘기하듯 건조하게 이야기했다.“내가 강지찬을 찾아갔고, 그 사람이랑 잤어.”예원이는 또다시 입을 떡 벌렸다.“...”‘강... 강지찬? 내가 아는 그 강지찬이 맞는 걸까?’조예원과 유진은 대학교 동창이었고 작년에 실내 인테리어 디자인 작업실을 함께 개업했다.작업실은 예원이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가끔 늦은 시각까지 야근할 때면 예원이네 집에서 잠을 잤으므로 이곳은 두 번째 집이나 다름없었다. 옷이며 생활용품이 모두 있었기에 문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챙겨 욕실로 향했다.이마의 상처에 물이 닿지 않게 조심조심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식탁에는 방금 쪄낸 만두가 놓여 있었다.이 만두는 지난번 유진의 엄마가 직접 빚어 얼려둔 것으로 야근하고 돌아올 때 간단하게 야식으로 먹으라고 챙겨준 것이었다.예원도 두뇌 회전이 빨랐던지라 앞뒤 얘기를 이어보더니 스스로 진실에 가까워졌다.“밥 안 먹었지?”마음이 아프면서도 한심해 보였다.“지금 네 모습 그대로 집에 가면 아저씨 아줌마가 마음 아파 못사실걸.”유진이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마음 한쪽이 따뜻해짐을 느꼈다.“그래서 널 찾아온 거잖아.”“얼른 먹기나 해.” 예원은 마음속에 하고 싶은 말이 가득했지만 절친에게 차마 소리를 지르지 못해 답답한 채로 꾹 참고 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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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집 앞에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정 교수네 딸 말이야,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던데 왜 이런대?”“겉보기에만 그렇겠지. 뒤에선 어떤 짓을 벌이고 다닐지 누가 알겠어.”“어머 쪽팔려라. 정 교수님이랑 이 선생 낯을 다 깎아 먹었겠네.”유진은 온몸에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녀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도 부모님의 명성에 자신이 피해를 주는 것이었다.역시 나쁜 일은 생각하는 대로 벌어진다더니.이때, 한빈 엄마의 목소리가 집 안에서 흘러나왔다.“... 당신들 대학교수가 딸 교육은 어떻게 시킨 거야? 밖에서 굴러온 남자랑 편 먹고 자기 예비 신랑을 해칠 궁리나 하고 있으니. 이런 악랄한 애는 우리 집에서 절대 못 받아들여! 선생은 무슨, 뒤통수 치는 법이나 가르치는 선생이면 모를가...”그 말에 유진은 참았던 화가 폭발했다.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참을 수 있으나 부모에게까지 행패를 부리다니, 절대 참을 수 없었다.분노에 휩싸인 채 구경꾼들을 밀치며 문을 열고 들어오자 옆집 아주머니 품에 안겨 울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테이블 위에 물컵과 약상자가 있는걸 보니 이미 약을 먹은 것 같았다.“유진이 왔니?” 옆집 아주머니가 구원투수를 발견한 듯 불렀다.알고 보니 한빈네 엄마만 온 것이 아니라 소희까지 함께 있었다.두 사람의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니 우리 집에 찾아와 화풀이하며 본때를 보여주러 온 것이 틀림없었다.한평생 글만 가르치고 얼굴을 붉혀본 적 없었던 아빠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분노와 수치심에 휩싸여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계셨다.유진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강지찬에서 이용당한 건 그러려니 했다. 둘 싸움에 고래등 터진 상황이었다고 생각하면 되니까.한빈에게 버림받아 파혼당한 것도 그러려니 했다.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고 생각하면 되니까.하지만 부모님은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평생 교편만 잡으시고 모두에게 선하신 분들이 자신 때문에 집까지 찾아온 사람들한테 치욕스럽게 모욕당하고 있다니!소희는 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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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강지찬을 보자 한빈의 엄마와 소희 모두 입을 뗄 수가 없었다.한빈 엄마는 전형적인 강약약강으로 눈앞의 강지찬을 보자 너무 놀라 종아리에 쥐가 나버렸다.소희가 그녀를 부축하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강 대표님, 유진이 찾으러 오신 거죠? 대화 나누세요. 저희는 먼저 가볼게요.”둘은 조금 전의 기세의 반도 못 편 채 강지찬의 눈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복도가 좁아 강지찬의 긴 다리로 반을 차지하자 한빈의 엄마와 소희는 벽에 바싹 붙은 채로 슬금슬금 밖으로 나가려 했다.그러자 유진이 남은 반쪽 꽃병을 들고 따라왔다.“거기서, 가지 마. 사과부터 해!”그녀는 차가운 눈으로 한빈의 엄마를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반드시 우리 엄마 아빠한테 사과해야 해, 그전엔 아무도 나갈 생각 하지 마!”한빈의 회사가 규모를 넓히기 시작한 뒤로 그 집 어미는 유진이네 집안을 업신여겼다. 유진의 부모님에게 말할 때도 항상 고고한 태도로 뭐라도 되는 양 굴었었다.전에는 유진이네 가족도 일일이 대꾸하기 싫어했다. 두 집안이 알게 된 지도 몇 년인데 서로 어떤 사람들인지는 뻔히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한빈의 엄마가 그녀를 모욕하는 것도 모자라 집까지 찾아와 자신의 부모까지 모욕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이 일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너 이...” 당장이라도 욕을 뱉으려던 한빈의 엄마는 곁눈질로 강지찬을 힐끗 보고는 ‘천박한 년’이라는 뒷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반나절 만에 한빈의 파트너들 모두 연락이 닿지 않았고 투자비 회수는 물론 연락을 끊어버린 사람들도 있었다.한빈이 힘들게 모아온 인맥과 자원들이 강지찬에게 척을 졌다는 이유만으로 물거품이 된 것이다.그들 가족도 강지찬을 찾아가 난동을 부리지는 못하겠으니 어쩔 수 없이 모든 화를 유진이 가족에게 풀고 있는 것이었다.하지만 강지찬의 등장은 예상도 못 했었다. 안 봐도 유진이 도와달라고 불렀을 게 뻔했다.이 천박한 년, 역시 강지찬과 붙어먹은 게 확실했다.강지찬은 재밌는 구경을 끝냈다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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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유진은 아버지의 말에 입을 꾹 닫은 채 베란다에서 빗자루를 들고 와 깨진 도자기를 깨끗이 청소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엄마 아빠, 먼저 데려다주고 와서 다시 설명해드릴게요.”정명학은 강지찬을 힐끗 쳐다봤고 지찬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찾아뵙죠.”문이 닫히고 나서야 유진은 길게 숨을 토해냈다.강지찬은 그런 유진을 빤히 지켜보면서 알면 알수록 더 흥미로운 여자라고 생각했다.잠깐 전의 독기 가득한 모습은 만약 한빈엄마가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다면 진짜로 꽃병으로 찔러버릴 기세였다.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한없이 약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선을 넘는다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었다.“뭘 봐요?”유진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오늘 화장을 하지 않아 희고 깨끗한 얼굴에 약간의 위태로움마저 비쳤지만, 표정만은 여전히 단호했다.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강지찬이 먼저 들어갔고 도발하듯 유진을 쳐다보며 물었다.“들어오기 겁나요?”유진은 이렇게 된 마당에 뭐가 겁나냐고 생각했다. 전에 일들은 둘째치고 오늘 그의 등장은 참으로 시기적절했다. 그가 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한빈엄마에게 시달려야 했을지 몰랐다.그녀가 엘리베이터로 들어가자마자 강지찬이 확 그녀를 덮쳐 엘리베이터 벽으로 밀었다.유진의 턱을 살짝 잡은 채 흥미롭게 물어오는 지찬이였다.“아깐 좋았죠?”유진은 하마터면 자리에서 폭발할 뻔했다.“이거 놔요, 뭐 하는 거예요?”손가락으로 전해지는 부드럽고도 매끈한 촉감에 지찬은 그날 밤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목소리도 알게 모르게 살짝 갈라져 있었다.“아까 좋았냐고요, 대답해요.”“미쳤어요?” 한빈엄마가 사과한 일을 말하는 것인데 말투는 왜 둘 사이의 말 못 할 일을 얘기하는 듯 야릇하게 깔고 있는지 몰랐다.강지찬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나만 따라오면, 계속 좋게 해줄게요.”“...” 유진은 뭐라 답하면 좋을지 몰랐다. 미친 것이 분명했다. 여색을 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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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유진이 집으로 돌아오자 옆집 아주머니는 이미 돌아가고 없었다.부모님이 소파에 앉아계셨고 테이블에는 물 세 잔이 놓여있었다.이 상황을 유진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제대로 이야기해 보자는 뜻이었다.감출 생각도 없었던지라 평온한 말투로 한빈과 강지찬의 일을 곧이곧대로 이야기했다.엄마는 또다시 울기 시작했고 아빠는 엄마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난 괜찮아요. 이것 좀 봐요, 괜찮잖아요?”유진은 엄마 아빠가 자신을 걱정해서 그러는 것임을 알았기에 걱정을 덜어드리고자 웃으며 말했다.“지금이라도 한빈이 이런 사람인지 아는 게 결혼 후에 아는 것보다 훨씬 낫죠. 슬퍼하지 마세요, 전 잘 지낼 수 있을 거예요.”정명학이 엄숙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강지찬은?”부모님이 한평생 쌓아온 명성이 자신 때문에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에 유진은 자책했다.“죄송해요. 엄마 아빠, 제가 불효자식이에요. 그 탓에 부모님까지 이런 꼴을 당하게 하고...”유진은 굳게 약속했다. “저랑 강지찬은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앞으로 다신 만날 일 없을 거예요.”정명학과 이명자는 이미 말을 끝낸 듯 유진의 이런 태도에 크게 안도했다.“그래, 그 남자 무슨 꿍꿍이인지 예상할 수가 없더구나. 엮이지 않는게 좋겠어. 더군다나 그 집 배경이면 우리랑 천지 차이인데 엄마 아빠는 딴 건 다 필요 없어, 너만 행복하면 돼.”정명학은 격조가 있는 아버지였다.“이웃집에서 뭐라고 떠들든 듣지 않으면 그만이지. 우린 우리의 삶을 살면 돼.”유진은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엄마 아빠는 항상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왔고 전부터 한빈의 엄마한테 불만이 있었어도 유진의 체면을 생각해 왈가왈부하지 않았었다.부모님에게 어떻게 파혼 소식을 알려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한빈엄마의 난리 통에 모든 것이 스르르 매듭이 풀려버렸다.한빈과 헤어졌단 말에 부모님도 한 시름 놓았을 것이다, 드디어 앞으로 그 집 어미한테 괴롭힘을 당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유진은 엄마를 방으로 모셔다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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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회의가 끝난 후, 최의현은 강지찬과 함께 사무실로 돌아갔다.“한빈이라는 자식 말이야, 이틀째 회사에도 안 나오고 집에 처박혀서 아예 외출 자체를 안 한다네?”최의현은 손으로 표창을 돌리며 말했다.“그 회사 요즘 매일 빚쟁이들이 찾아와서 소희라는 여자가 혼자 대처하고 있대.”여기까지 말한 최의현은 혀를 내둘렀다.“사내자식이 여자를 앞세우다니, 쯧.”강지찬은 그날 밤 정유진의 풋풋함과 피로 물든 침대 시트를 떠올리며 눈썹을 치켜올렸다.“확실히 남자 아니야.”그는 자세를 바꾸고 어색하게 마른기침을 해댔다.“끝났어?”최의현은 손에 들고 있던 표창을 내던졌고, 표창은 마침 과녁에 꽂혔다.“아, 맞다. 둘째 돌아온다며?”강지찬은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응.”최의현은 의자를 사무용 책상 앞으로 끌어당긴 후 엉덩이를 붙이더니 탁자를 두드렸다.“제발 맞서 싸우지 좀 마. 너 밖에서 소문 어떻게 난 줄 알아?”강지찬은 전혀 궁금하지 않았고, 묻기도 귀찮았다.최의현은 하는 수 없이 계속 말했다.“다들 네가 강지현을 거지 같은 곳으로 쫓아버렸다고 생각한다고. 환경도 열악하고 의료 수준도 한계가 있어서 더 늦으면 정말 그곳에서 죽을지도 몰라.”“풉.”강지찬은 차갑게 웃었다.영감이 며칠째 밥 먹으러 오라고 한 이유도 바로 강지현 때문이다.요즘 정유진은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주로 이명자의 옆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명자는 현기증과 고혈압이 심각해 그녀는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명자와 함께 장 보러 갔다가 이웃을 마주쳤는데 멀리에서도 “교수”와 “외간 남자”라는 말이 똑똑히 들려왔다.정유진은 이명자에게서 팔을 풀고 돌아서서 활짝 웃으며 두 여자를 바라봤다.“아주머니, 따님이 외도로 사생아를 낳은 사건은 끝났어요?”“그리고 아주머니네 손자는 연애하다가 학생을 임신시켰...... 교육 좀 잘하셔야겠어요. 그렇게 책임감이 없어서야.”정유진은 일부러 큰 소리로 쩌렁쩌렁 말했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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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소희가 임신을? 게다가 애 아빠가 한빈?언제부터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지?이 순간, 충격은 둘째 치고 정유진은 정말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모자란 멍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한빈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에는 경악과 분노가 가득했다.“두 사람 언제부터야?”한빈과 헤어진 지 고작 일주일인데 소희가 임신했다는 것은...... 두 사람은 전부터 그녀를 속이고 만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한빈, 네가 감히?한빈은 잠시 움찔했지만 자기를 바라보는 정유진의 눈빛에 왠지 으쓱해지며 역시 그녀는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요 며칠 그는 갖은 수를 써서 강지찬을 만나려고 했지만 적잖은 곤란에 부딪혔다. 평소에 함께 술도 자주 마시던 사람들은 갑자기 그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정유진과 강지찬의 관계를 생각하니 비록 인정하긴 싫었지만 지금 그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정유진이었다.여기까지 생각한 한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유진아, 화내지 말고 우리 나가서 대화 좀 하자. 나 너한테 부탁할 거 있어.”그 미소는 너무나도 익숙한 미소였다. 한빈은 수없이 똑같이 웃으며 똑같은 말을 했었다.“유진아, 장 대표 접대 좀 부탁해. 몇 잔 같이 마시기만 하면 돼.”“유진아, 이번 달 보고서 좀 부탁해.”“유진아, 사모님 쇼핑하고 싶으시대. 부탁할게.”사랑했던 만큼, 이 순간 그녀는 한빈의 이 얼굴이 원망스러웠다.다 헤어진 마당에도 그녀를 이용하려고 하다니. 게다가 그는 지금 그녀의 질문에 아주 당당하게 귀를 닫고 입을 막아버렸다.한빈은 대체 정유진을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미련하고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건가?아직도 정유진의 손목을 잡고 있는 한빈의 모습에 소희는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정유진에게 달려들었고 그녀의 여린 뺨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뻔뻔한 년......”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닿기도 전에 한빈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소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빈을 바라봤다.“한빈아, 너 지금 뭐 하는 거야?”“그만해!”병원 로비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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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구경꾼이 점점 더 많아졌고 정유진은 더는 그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역겨웠다.한빈이 그녀에 대한 감정은 진심이라고 생각했었다.우스웠다.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가식이고 거짓이었다.그녀가 대학교 1학년 때, 한빈은 4학년이었다. 그녀가 대학교 3학년이던 그해 한빈은 그녀에게 소희를 소개해 주며 자기 어머니에게 딸 같은 아이라고 했었다.처음에 그녀도 소희 언니라고 불렀는데 알고 보니 소희는 한빈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언짢게 생각했다.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한빈의 어머니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때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모호했던 건 아니었을까?정유진은 스스로에게 묻고 싶었다.내가 그렇게 바보였어?구경꾼들은 대부분 연세가 꽤 있는 아줌마 아저씨들이었고 그들은 비난의 눈빛으로 한빈과 소희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요즘 젊은것들은 자기애가 너무 없어.”“남자 쪽이 정말 쓰레기네. 욕심이 너무 많아.”“울지 마, 저런 인간 말종은 멀리하는 게 좋아. 더 좋은 남자 만날 수 있어.”누군가 그녀에게 휴지를 건넸고, 그제야 그녀는 자기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작 한빈 때문에 눈물을 흘리다니.“고마워요.”정유진은 눈물을 닦았다.참다못한 소희가 입을 열었다.“다들 뭘 안다고 왈가왈부에요? 저 여자가 먼저......”정유진은 싸늘하게 소희를 노려보았다.“야, 소희. 너 지금 여기서 나와 시비 따지고 싶어? 난 괜찮은데, 넌 괜찮겠어?”지켜보던 한 아줌마는 너무 화가 나서 심장병이 올 것 같았다.“내가 젊었을 때 말인데, 제일 친한 친구 년이 내 남자 친구의 애를 임신하고 나한테 자랑하러 왔더라고. 그런데 애가 다섯 살도 되기 전에 그 망할 자식이 또 바람을 피웠지, 뭐야. 남의 남자 빼앗으면 언젠가는 똑같이 빼앗기게 돼 있어. 아가씨, 남자 친구 단속 좀 잘해. 그러다 아가씨도 같은 꼴 나.”“아주머니,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소희는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한빈은 그녀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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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하지만 강지찬은 마침 그녀의 등 뒤에 있었고 그녀는 강지찬의 신발을 그대로 밟아버렸다.노기등등했는데, 바로 멋쩍어지는 순간이다.“타요.”강지찬이 말했다.정유진은 뻘쭘한 표정으로 발을 슬쩍 걷었고 강지찬의 반짝이던 구두에는 신발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그녀는 두 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한빈이 그 새끼....... 아니, 두 사람 이미 가고 없는데 이제 연기 그만해도 되겠죠?”마침 택시 한 대가 길가에 멈춰서더니 승객이 내렸고, 정유진은 곧장 택시로 몸을 구겨 넣었다.동작이 스무스한게 마치 물고기와도 같았다.“제가 알아서 갈게요. 길도 다른데.”정유진은 강지찬을 향해 억지로 웃어 보이더니 바로 “쿵”하고 택시 문을 닫아버렸다.강지찬이 지켜보는 가운데, 택시는 그녀를 태우고 다급히 멀어졌다.고개를 숙여 구두에 찍힌 발자국을 보고, 멀리 떠난 택시를 또 한 번 바라보던 강지찬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매번 그녀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꿋꿋하게 맞서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강지찬은 저도 몰래 그녀를 돕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지만 이 여자는 그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모처럼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개인 번호까지 주었는데......이 순간 강지찬은 확신했다. 그녀는 이미 그의 번호를 지웠을 것이라고.그렇다. 정유진은 이미 그의 번호를 블랙리스트에 넣었다.이때 조예원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큰 주문이 들어왔으니 빨리 오라는 전화였다.정유진은 며칠 동안 스튜디오에 가지 않았던지라 가는 길에 버블티 몇 잔을 사서 스튜디오로 향했다.키키는 그녀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누나, 드디어 왔네요. 더 늦었으면 나 진짜 죽을 뻔했어요.”조예원은 삐걱대는 다리를 휘둘러 키키를 저만치 날려버렸다.“넌 찌그러져 있어. 디자인 한 장 800번을 고치고도 고객님을 만족시키지 못하다니. 너 좀 반성해!”키키는 버블티를 들고 그의 디자인과 씨름하러 자리로 돌아갔다.조예원은 정유진과 함께 사무실로 돌아가 그녀를 위해 버블티에 빨대를 꽂
last updateLast Updated : 202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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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반가워요. 집주인 강지현입니다.”남자가 조예원을 향해 손을 내밀자 조예원은 냉큼 남자의 손을 잡았다.“조예원입니다. 이쪽은 정유진, 스튜디오 예담에서 왔습니다.”정유진도 손을 뻗어 남자와 악수했다.“반갑습니다.”“네.”남자는 유난히 피부가 하얬는데 건강하지 않은 창백함이었다.게다가 너무 말라서 이목구비가 더 진해 보였다.특히 두 눈이 아주 예뻤는데 가늘게 찢어진 두 눈과 눈꼬리는 사람을 후려잡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정유진은 풍부한 별장 내부 디자인 경력을 가지고 있어 실력이 꽤 좋았다.디자이너로서 가장 중요한 미션은 바로 고객의 요구를 이해하는 것이다.정유진은 녹음 펜을 켜고 집주인과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시 키키는 옆에서 그들의 대화에서 중요한 내용을 캐치해 꼼꼼히 메모했다.그리고 조예원은 다른 직원들과 함께 데이터를 측정했다.집주인 강지현은 건강이 좋지 않은 탓에 한 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누고 바로 돌아갔다.다행히 정유정은 필요한 정보를 모두 획득했다.열댓 명의 직원은 상록수 별장에서 하루 종일 분주히 일했고 측량이 끝나고 스튜디오에 돌아오니 이미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스튜디오 근처에는 맛집이 많았고 조예원은 직원들에게 샤부샤부를 사주었다.식사를 끝낸 직원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 정유진과 조예원은 야근하기 위해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갔다.“한빈이 완전 골로 가게 생겼다며?”조예원은 노트를 안고 정유진과 함께 일하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완전 잘 됐다.”“그러게, 난 잘 모르겠어.”헤어진 마당에 뻔뻔스럽게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다는 걸로 보아서는 아마 정말 골로 가기 직전인 것 같았다.하지만 정유진은 이 일을 조예원에게 말하지 않았다. 괜히 이 일로 며칠 동안 혼자 스튜디오를 이끌어 온 조예원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조예원은 데이터를 정리하며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이렇게 쉽게 놔준다고? 그 회사 절반은 아니더라도 3분의 1은 다 네 공로야. 그 자식을 위해 네가 얼마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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