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강지찬은 마침 그녀의 등 뒤에 있었고 그녀는 강지찬의 신발을 그대로 밟아버렸다.노기등등했는데, 바로 멋쩍어지는 순간이다.“타요.”강지찬이 말했다.정유진은 뻘쭘한 표정으로 발을 슬쩍 걷었고 강지찬의 반짝이던 구두에는 신발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그녀는 두 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한빈이 그 새끼....... 아니, 두 사람 이미 가고 없는데 이제 연기 그만해도 되겠죠?”마침 택시 한 대가 길가에 멈춰서더니 승객이 내렸고, 정유진은 곧장 택시로 몸을 구겨 넣었다.동작이 스무스한게 마치 물고기와도 같았다.“제가 알아서 갈게요. 길도 다른데.”정유진은 강지찬을 향해 억지로 웃어 보이더니 바로 “쿵”하고 택시 문을 닫아버렸다.강지찬이 지켜보는 가운데, 택시는 그녀를 태우고 다급히 멀어졌다.고개를 숙여 구두에 찍힌 발자국을 보고, 멀리 떠난 택시를 또 한 번 바라보던 강지찬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매번 그녀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꿋꿋하게 맞서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강지찬은 저도 몰래 그녀를 돕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지만 이 여자는 그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모처럼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개인 번호까지 주었는데......이 순간 강지찬은 확신했다. 그녀는 이미 그의 번호를 지웠을 것이라고.그렇다. 정유진은 이미 그의 번호를 블랙리스트에 넣었다.이때 조예원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큰 주문이 들어왔으니 빨리 오라는 전화였다.정유진은 며칠 동안 스튜디오에 가지 않았던지라 가는 길에 버블티 몇 잔을 사서 스튜디오로 향했다.키키는 그녀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누나, 드디어 왔네요. 더 늦었으면 나 진짜 죽을 뻔했어요.”조예원은 삐걱대는 다리를 휘둘러 키키를 저만치 날려버렸다.“넌 찌그러져 있어. 디자인 한 장 800번을 고치고도 고객님을 만족시키지 못하다니. 너 좀 반성해!”키키는 버블티를 들고 그의 디자인과 씨름하러 자리로 돌아갔다.조예원은 정유진과 함께 사무실로 돌아가 그녀를 위해 버블티에 빨대를 꽂
“반가워요. 집주인 강지현입니다.”남자가 조예원을 향해 손을 내밀자 조예원은 냉큼 남자의 손을 잡았다.“조예원입니다. 이쪽은 정유진, 스튜디오 예담에서 왔습니다.”정유진도 손을 뻗어 남자와 악수했다.“반갑습니다.”“네.”남자는 유난히 피부가 하얬는데 건강하지 않은 창백함이었다.게다가 너무 말라서 이목구비가 더 진해 보였다.특히 두 눈이 아주 예뻤는데 가늘게 찢어진 두 눈과 눈꼬리는 사람을 후려잡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정유진은 풍부한 별장 내부 디자인 경력을 가지고 있어 실력이 꽤 좋았다.디자이너로서 가장 중요한 미션은 바로 고객의 요구를 이해하는 것이다.정유진은 녹음 펜을 켜고 집주인과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시 키키는 옆에서 그들의 대화에서 중요한 내용을 캐치해 꼼꼼히 메모했다.그리고 조예원은 다른 직원들과 함께 데이터를 측정했다.집주인 강지현은 건강이 좋지 않은 탓에 한 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누고 바로 돌아갔다.다행히 정유정은 필요한 정보를 모두 획득했다.열댓 명의 직원은 상록수 별장에서 하루 종일 분주히 일했고 측량이 끝나고 스튜디오에 돌아오니 이미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스튜디오 근처에는 맛집이 많았고 조예원은 직원들에게 샤부샤부를 사주었다.식사를 끝낸 직원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 정유진과 조예원은 야근하기 위해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갔다.“한빈이 완전 골로 가게 생겼다며?”조예원은 노트를 안고 정유진과 함께 일하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완전 잘 됐다.”“그러게, 난 잘 모르겠어.”헤어진 마당에 뻔뻔스럽게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다는 걸로 보아서는 아마 정말 골로 가기 직전인 것 같았다.하지만 정유진은 이 일을 조예원에게 말하지 않았다. 괜히 이 일로 며칠 동안 혼자 스튜디오를 이끌어 온 조예원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조예원은 데이터를 정리하며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이렇게 쉽게 놔준다고? 그 회사 절반은 아니더라도 3분의 1은 다 네 공로야. 그 자식을 위해 네가 얼마나
상록수 사업을 따내기 위해 정유진은 고객의 수요에 따가 세 가지 방안을 내놓았다.조예원은 방안을 확인한 뒤, 자신감에 차서 말했다.“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너 없었으면 이렇게 큰 계약은 건드릴 엄두도 못내고 남들한테 넘어가는 걸 보고만 있었겠지. 상상만하는데도 끔찍해!”“너랑 수다 떨 시간 없어. 나 나가봐야 해.”정유진이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어디 가?”“반지 돌려주러.”조예원은 그녀의 팔목을 잡고 말했다.“나랑 같이 가.”싸우러 가는 것도 아닌데 정유진은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이미 조예원은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가자. 그 나쁜 자식 회사에 가는 거지? 키키도 데려갈까?”정유진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나 싸우러 가는 거 아니야.”스튜디오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헤어진 자세한 내막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한빈의 회사는 번화가의 가장 비싼 건물에 위치해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내린 정유진과 조예원은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던 로비에 서류와 쓰레기가 쌓여 있고 안내데스크와 경비실 직원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조예원은 정유진에게 안으로 들어가 보자고 눈짓했다.안으로 들어가는데 한빈과 소희가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뭐야? 건물이 텅텅 비었잖아?”조예원은 목소리를 낮추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그 자식 완전히 망했나 본데?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빨리….”놀란 건 정유진도 마찬가지였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며칠이나 지났다고.강지찬이 이 정도로 빨리 움직일 줄은 그녀의 예상밖이었다.직원을 몇백 명이나 두고 있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다니.사무실은 텅 비어 있고 쓰레기만 잔뜩 쌓여 있었다.한빈은 도대체 뭘 한 거지?그가 예전에 했던 말은 신빙성이 없었다. 강지찬 같은 인물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한 회사를 멸망으로 몰아가지는 않았을 테고 그녀가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 같았다.물론 정유진은 그 이유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반지만 돌려주면 그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었다
정유진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한발 한발 그에게 다가갔다.최근 며칠간 그는 수도 없이 자기 반성을 하며 괴로워했다.자신이 조금 더 판단능력이 있었더라면 저런 나쁜 인간들에게 당할 일은 없지 않았을까?그녀는 자신이 사람을 볼 줄 몰라서 한빈 같이 이기적인 사람에게 이용당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인간이 이 정도로 악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조예원은 어디서 찾은 건지 야구방망이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한빈 이 나쁜 자식, 넌 오늘 죽었어!”“악! 왜들 이래?”소희가 비명을 지르며 한빈의 등 뒤로 숨었다.정유진은 그들에게 달려드는 친구의 손목을 잡아 멈춰세웠다.극도의 분노는 그녀를 더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만들었다.상심? 슬픔?저 인간을 상대로 그런 감정은 사치였다.“유진아, 이거 놔. 내 오늘 저 자식이랑 끝장을 볼 거야!”조예원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아 펄펄 날뛰었다.“한빈,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정유진은 싸늘한 시선을 한빈에게 고정한 채로 말했다.“손 더럽힐 필요 없어. 그럴 가치도 없는 인간이야.”밝혀진 진실 앞에 한빈은 적반하장으로 나왔다.“너한테 강지찬을 찾아가서 부탁하라고 한 건 내 잘못 맞아. 하지만 그 상황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나도 강지찬 그 놈에게 당한 피해자라고! 나라고 그러고 싶었을 것 같아?”정유진은 그런 한빈이 우습기만 했다.“뻔뻔함은 여전하네. 잘못은 다 다른 사람이 했고 자기는 피해자라는 논리. 진짜 강지찬이 아무 일도 없었는데 일부러 당신에게 칼을 빼들었다고 생각해? 대체 나한테 뭘 얼마나 많이 숨긴 거야?”한빈이 큰소리로 말했다.“나도 강지찬한테 당했어. 유진아, 나 믿어줘. 난 너를 사랑해. 너무 사랑해서 순결을 지켜주고 싶었던 나야. 그런데 내가 어떻게… 소희가 헛소리한 거야. 이 여자 말을 믿는 거 아니지?”남자의 뻔뻔함에 정유진은 웃음만 나왔다.소희는 할 말이 많았지만 한빈이 가로막고 있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정유진을 노려보기만 했다.정유진은
정유진은 임산부와 길게 싸우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한빈에게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당신도 내가 한 일이 고객사 남자 직원들과 술을 마신 거 말고는 없다고 생각해?”한빈이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회사가 이 모양인데 그런 게 지금 중요해? 정말 이 회사를 위한다면 회사가 망해가는데 가만히 있지는 않았겠지.”“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데?”정유진이 물었다.“너 강지찬이랑 친하잖아.”한빈의 눈에 다시 이채가 돌았다.“강지찬한테 얘기 좀 잘해줘. 제발 이제 나 그만 괴롭히라고 얘기해 줘. 나한테서 너까지 빼앗아간 인간인데 대체 뭘 더 바라는 거야?”정유진은 이 인간과 더 상종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내가 도와주기를 바란다고? 그럼 무릎 꿇고 나한테 빌어봐.”전혀 예상치 못했던 요구에 한빈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유진아,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듣고 있던 조예원이 성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뻔뻔한 자식이 지금 뭐라는 거야!”조예원은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어서 정유진의 손을 잡아 끌었다.“물건 돌려주고 이제 가자!”정유진은 미동도 없이 차분하게 말했다.“잠깐만 더 기다리자.”조예원은 짜증이 치밀었다.“뭘 더 기다린다는 거야? 이번에도 마음 약해질 거면 나랑 절교할 각오를 해야 할 거야.”이때, 밖에서 절제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정유진이 웃으며 말했다.“왔네.”그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예상밖이었다.한빈은 그녀의 웃음을 보자 신경이 곤두섰다.“누가 왔다는 거야?”발걸음 소리가 문 앞에서 들려오자 정유진을 제외한 모두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강지찬과 그의 경호원이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안으로 들어섰다.한빈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강 대표님?”그는 경악한 표정으로 정유진에게 물었다.“네가 불렀어?”정유진은 강지찬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싸늘한 눈빛으로 한빈을 노려보며 말했다.“강지찬 씨한테 얘기 잘해달라며? 그래서 여기로 불렀어. 살려달라고
사무실 안의 모든 물건을 박살낸 뒤에야 정유진은 동작을 멈추었다.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야구방망이는 바닥에 버려졌다.그녀는 핸드백에서 반지를 꺼내 한빈의 책상 위에 놓았다.“앞으로는….”그녀는 흐트러진 머리결을 정돈하고 긴 한숨을 내뱉은 뒤 말을 이었다.“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한빈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강지찬이 있어서 입을 뗄 용기가 나지 않았다.조예원은 달려와서 친구의 어깨를 감싸안았다.“그래, 이제 다 끝났어. 이제부터 새출발하면 돼. 가자. 이 언니가 오늘 맛있는 술 사줄게.”정유진은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가자.”두 여자는 남은 사람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사무실을 나가버렸다.강지찬은 인상을 확 찌푸렸다.여자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진 기분이었다.그가 쫓아가려는데 울음 섞인 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 대표님, 이제 그만 저를 용서해 주세요. 돈은 다 돌려드렸잖아요. 제발 저 숨 좀 쉬게 해주세요!”강지찬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개수작 부리고 있네.”한빈은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기세였다.“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진영식이 시키는 대로만 했습니다. 다른 건 아무것도 몰라요.”“그런데 왜 그렇게 떨고 있는 거야?”강지찬의 눈빛에 짜증이 가득 묻어났다.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낭비 하고 싶지 않았다.“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어.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 지금 말하면 내일 당장 회사 정상으로 돌려놓을 수도 있어.”한빈은 순간 눈빛이 흔들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정유진 좋아하시죠? 제가 좋아하는 여자까지 양보해 드렸잖아요. 우린 전에 제대로 된 스킨십 한번 해본 적 없어요. 믿어주세요!”강지찬의 두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절망에 빠진 그녀의 눈빛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심장이 찔린 듯 아파왔다.퍽!아찔한 소리와 함께 강지찬의 주먹이 한빈의 얼굴에 꽂혔다.한빈은 그대로
“내 친구를 어디로 끌고 가는 거예요! 그거 놔요!”정유진은 조예원을 잡으려고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설 수 없었다.“걱정 마세요. 집으로 안전하게 돌려보내라고 했어요.”강지찬이 말했다.만약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했더라면 안심했겠지만 상대가 강지찬이라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그럴 필요 없어요.”정유진은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이 술집 사장님이 예원이 사촌오빠거든요.”강지찬은 그녀가 자신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경호원에게 말했다.“사장님한테까지 모셔다드려.”경호원은 조예원을 부축해서 카운터로 사라졌다.주변이 조용해지자 강지찬이 싸늘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이러면 시름이 놓이나요?”정유진은 그를 상대해 줄 기분이 아니었기에 술병으로 손을 가져갔다.강지찬이 그녀의 손에서 다시 술병을 빼앗았다.“주세요.”“또 취해서 나한테 업혀 가고 싶어요?”정유진은 남자의 뻔뻔함에 할 말을 잃었다.강지찬은 술집 직원을 불러 계산하게 했다.정유진은 상대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더 짜증이 치밀었다.지금은 아무와도 말하고 싶지 않고 그 상대가 이 남자라면 더욱 싫었다.과거의 모든 걸 지워버리고 싶은데 강지찬을 보고 있으면 자꾸 비참했던 과거가 떠올랐다.“이용만 하고 버리다니.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 줄 알아요?”강지찬이 말했다.정유진은 피식 코웃음 치며 고개를 돌렸다.술을 좀 더 마시고 싶은데 강지찬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이제 나가요.”같이 가자는 얘기인가?정유진은 그를 미친 사람 보는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강지찬 씨, 내가 평생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 한빈이고 그 다음이 당신이란 건 알아요?”강지찬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걸어서 갈래요? 아니면 나한테 끌려 갈래요?”정유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미친 사람인가?잠깐 정신이 팔린 사이 남자가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를 안아서 어깨에 들쳐멨다.정유진은 그의 어깨에 매달린 채 등을
“유진 씨,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밥 드세요. 해장국 끓이고 있어요.”정유진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았기에 방 집사도 말을 아꼈다.“폐를 끼쳤네요.”정유진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방 집사는 강지찬과 둘이 싸운 줄 알고 조심스럽게 말했다.“폐라니요. 저희 대표님은 바쁜 분이라 거의 집에 안 계시고 회사 근처에서 숙식을 해결하세요.”정유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그 사람 그렇게 바빠요?”오늘도 전화 한 통에 바로 달려온 걸 봐서 한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과 달라서 조금 놀라웠다.방 집사는 옷장에서 잠옷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며 한숨을 내쉬었다.“그 큰 회사를 혼자서 관리해야 하는데 한가할 리가 없죠. 최근에는 큰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들었는데 평소에 식사할 시간도 없대요. 그래서 요즘은 도시락이라도 만들어서 가져다드리고 있어요.”두 사람 사이가 아직 확실하지 않았기에 방 집사는 상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정유진은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했다.아까 많이 마시기는 했지만 만취하기 전에 강지찬이 나타났기에 그리 괴롭지는 않았다.지금 생각해 보면 음주도 괜한 짓이었던 것 같았다.그런 인간 때문에 술로 속상함을 달래려 하다니, 그럴 가치도 없는 인간이었다.그리고 그녀 본인도 숙취 느낌을 굉장히 싫어했다.그녀가 씻고 나오자 방 집사는 해장국과 반찬을 위층 침실까지 올려주었다.정유진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내려가서 먹어도 되는데 제가 다 죄송하네요.”“죄송하기는요.”방 집사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지시예요. 밥 다 드시고 푹 주무시라고 하셨어요.”정유진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진 것을 보고 방 집사는 한마디 덧붙였다.“사람은요, 어떤 상황이 와도 자신을 아껴야 해요. 아무리 큰일이 벌어져도 잘 먹고 잘 자야 일을 해결할 힘도 생기는 법이죠.”“집사님 말씀이 맞아요.”정유진이 웃으며 말했다.방 집사도 그녀의 미소를 보고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참 순수하고 예쁜 아가씨네. 그러니까 대표님이 자
친아들과 시누이에게 연달아 비난을 받는 게 자존심이 강한 최신애한테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뺨 맞는 거나 다름없이 창피했다.비록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번 일은 확실히 온씨 가문에서 초래한 일이다.그리고 임씨 가문이 이런 행동을 하게 된 원인도 다 최신애 때문이라고 볼 수 있었다.하여 위태로운 공장과 아직 조사를 받는 온혁진을 생각하니 최신애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임씨 가문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임유희와 장희수가 마침 집에 있었다.보아하니 지난번에 장희수가 손을 댄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최신애를 보자마자 여유로운 얼굴로 물었다.“사돈 오셨어요?”예전 같으면 저 ‘사돈’ 소리가 아주 반갑게 들렸겠지만 지금은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예민하게 느껴졌다.“온씨 가문에서 어떻게 감히 임씨 가문과 사돈을 맺겠습니까.”최신애는 어두운 얼굴로 다시 물었다.“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저희가 어떻게 하면 살려주실 건가요?”장희수는 그녀의 말뜻을 못 알아들은 척 되물었다.“사돈, 그게 무슨 뜻이에요? 저희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네요.”“시치미 떼지 마세요. 이 모든 일이 다 당신들이 뒤에서 손을 쓰고 있는 거잖아요. 저희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셨나요?”그리고 최신애는 임유희에게 고개를 돌려 한껏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유희야, 내가 너를 얼마나 챙겨줬는지 네가 제일 잘 알 거야. 난 그저 네가 아주 착한 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고작 우리 온씨 가문을 짓밟겠다고 공장 쪽 사람들을 매수해서 우리를 모함할 줄은 몰랐어. 양심적으로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임유희는 그녀의 말에 멍해져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장희수를 바라보았다.보아하니 이 일은 그녀가 전혀 모르고 있던 눈치였다.이때, 장희수가 차갑게 웃으며 답했다.“사돈께서는 말 가려서 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저는 그래도 두 집안의 옛적 친분을 생각해서 오늘 집에 들인 건데 자꾸 헛소리하시면 저도 참지 않겠습니다.”최신애는 시간을 질질 끄는 게 너무 싫었다.“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해
최신애는 온미정에게 차마 집에 일이 생긴 게 임씨 가문의 소행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그저 온혁진을 꺼내줄 방법에 대해 생각하라고만 했다.“꺼내달라고요?”온미정은 역시나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그 뜻인즉, 공장에 일이 생겼다는 게 사실이고 제품에 품질 문제가 있어서 세무조사가 들어갔다는 게 다 진짜란 소리예요?”최신애는 온미정의 눈도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답했다.“공장 쪽의 상황은 아가씨도 아시다시피 저번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다 처리했었는데 또 이런 문제가 터질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어디까지나 아가씨 오빠가 사람을 너무 잘 믿어서 문제에요.”최신애는 말하다가 그녀의 눈치를 살폈는데 역시나 자기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지금까지 공장은 아무런 문제도 없었는데 왜 올해에 들어서 갑자기 이런 문제가 자꾸 발생하는 거예요?”“진짜 공장에 문제 있는 건가요, 아니면 누군가가 이 기회를 틈타 나쁜 짓을 하는 건가요?”순간 최신애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이제 와서 그런 말이 다 무슨 소용이 있어요? 지금 급한 건 아가씨 오빠를 구해내는 거라니까요.”온미정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유한이는요?”최신애는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가 문득 온유한이 했던 말이 머리에 떠오르면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그 빌어먹을 놈이 아버지가 눈앞에서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더라고요. 사람을 찾아서라도 아버지를 다시 데려올 생각은 안 하고 현채영을 데리고 술 마시러 나갔어요.”온미정은 너무 어이없는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제가 방법을 한번 생각해 볼게요.”그녀는 말을 마친 뒤 그대로 자리를 떴다.최신애도 가만히 있지 않고 다음 날 바로 임씨 집안에 쳐들어갔다.과정은 알 수 없지만 결과는 매우 참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임씨 가문에서 쫓겨났다.아마도 장희수와 몸싸움도 있었는지 머리는 산발이 된 채로 차에 올라탔다.온혁진은 끌려간 뒤 계속 돌아오지 못했고 회사도 혼란에 빠졌다.게다가
최신애는 저녁 8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온 온유한을 기다리고 있었다.온혁진이 잡혀간 뒤부터 최신애는 계속 온유한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통화가 안 되는 걸 보고 혹시 그가 지금 자기 아버지랑 공장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찾아다니느라 바빴나 싶어 온유한이 돌아오자마자 재빨리 달려가 물었다.“어때, 아들? 네 아버지는 괜찮아? 그리고 공장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물건들이 왜 품질 문제가 생긴 건데? 분명 우리는 매년 제때 세금을 신고했는데 왜 문제가 있다는 거야?”그러나 온유한은 덤덤하게 한마디만 했다.“저도 몰라요.”순간 최신애가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모, 모른다고? 네가 왜 몰라? 그럼 몇 시간 동안 뭐 하다 왔는데?”“퇴근하고 채영 씨랑 밥 먹고 쇼핑도 좀 했어요. 지금 옷만 갈아입고 다시 나갈 거고 오늘 저녁에는 밖에서 잘게요.”말을 마친 뒤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다.그제야 최신애는 정신이 번쩍 들더니 재빨리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못가!”온유한은 눈앞의 최신애를 살짝 짜증 난 얼굴로 바라보았다.“할 말이 더 남으셨어요?”최신애는 손가락으로 그의 얼굴을 가리키며 분노의 말을 쏟아냈다.“할 말이 더 남았냐고? 그게 지금 어머니한테 할 소리야? 온유한, 네 아버지는 붙잡혀가서 지금 조사받고 있고 우리 회사에 일이 터졌는데 네가 유일한 후계자로서 어떻게 이리도 태연할 수 있어?”그녀의 물음에 온유한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예전에 제가 말씀드렸었는데 혹시 잊어버리셨나요?”순간 최신애는 가슴이 뜨끔해지면서 어렴풋이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는 분명 자신을 포함한 온씨 가문을 망가뜨리겠다고 했었다.“너...”최신애는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마음에도 없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게 진심이었다니.그녀는 순간 눈앞의 자기 아들이 이상하게 소름 끼치는 것 같았고 혹시나 해서 그에게 물었다.“혹, 혹시 지금 뭘 알고 이러는 거야?”그녀의 말에 온유한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의현이가 전부터 나한테 임
“온씨 가문과 임씨 가문이 완전히 사이가 틀어졌대. 그리고 임씨 어르신네 생일잔치에서 온유한 씨가 임유희 씨 오빠분한테 맞았대.”“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말하길 그날 임씨 가문에서 이제부터 집안의 모든 재산을 탕진하더라도 온씨 가문과 맞서 싸우겠다고 엄포까지 내렸대.”“그날 온혁진 씨가 직접 사과했다고 들었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겠지. 그러고 보면 온유한도 참 간이 커. 어떻게 현채영을 데리고 그 장소에 갈 수가 있어? 일부러 약 올리려는 거잖아. 임씨 집안의 체면이 뭐가 됐겠어?”임씨 가문은 세가의 반열에 오르기도 전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의도치 않게 유명해졌다.강지찬과 최의현은 밖에서 들어오는 내내 사람들이 두 집안의 가십거리에 대해 수군거리는 걸 듣게 되었다.방안에 들어와 문을 닫은 뒤 최의현이 물었다.“그 자식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강지찬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소파에 가서 앉았다.이때 한규진이 말했다.“오후에 임씨 집안 사람이 나한테 전화 와서 법률적인 문제로 의뢰하고 싶다고 하더라. 내 생각에는 아마도 온씨 집안과 관련 있는 일인 것 같아.”그의 말에 최의현이 급히 말을 끊었다.“내가 예전에 들은 바로는 임 씨네 그 두 부자는 아주 독한 사람이라던데 유한이랑 아버지는 분명 그들의 상대가 안 돼. 규진아, 우리가 비록 지금은 유한이랑 놀지 않지만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아.”한규진은 그저 입을 삐쭉거릴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최의현은 다시 강지찬에게 물었다.“형, 그냥 이대로 유한이가 망가지는 걸 보고만 있을 거야?”“아니면?”“...”지난 몇 년 동안 강지아의 모습만 생각하면 그는 온유한을 볼 낯이 없었다.그러다가 술 한잔을 한 번에 입으로 털어 넣으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그놈은 좀 당해봐야 해!” “아니다. 그 온씨 가문 사람들 전체가 당해봐야 해. 이번 일로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어.”그 후로 며칠 뒤, 임씨 가문에서는 계속 자금을 미루고 있던 온씨 가문을 고소했다.그 소
드디어 임종태의 생일 잔칫날이 돌아왔고 온혁진과 최신애는 기쁜 마음으로 연회장에 나타났다.그러나 온유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임유희를 제외한 온씨 가문의 모든 사람이 다 어두운 얼굴인 걸 보고 현장에 온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우리 미래 태안 그룹의 후계자분이 왜 안 보이실까? 오늘은 임 어르신의 팔순 잔칫날인데 예비 사위가 참석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들은 바에 의하면 어제 온유한이 현채영을 데리고 카지노에 가서 크게 놀았다던데 지금쯤 침대에서 일어났는지 모르겠네요.”임씨 가문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온혁진도 초조한 마음에 최신애에게 다시 전화해 보라고 재촉했다.이미 전화에 불이 날 정도로 연락해 봤으나 온유한 쪽에서 한사코 받지 않으니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그렇게 생일잔치는 시작되었고 백발의 임종태가 휠체어에 앉은 채 밀려 나왔다.임근우는 자기 아버지가 젊었을 때 남매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떤 어려움을 겪으면서 키워줬고 또 자신은 어떻게 가업을 일으켜 세워 임종태의 노후를 편하게 보낼 수 있게 했는지에 대해 생생하게 이야기했다.바로 이때, 온유한이 도착했다.그러나 그의 옆에 현채영의 모습도 보였는데 화장도 깔끔하게 하고 온유한과 커플 드레스까지 맞춰 입었다.그리고 온유한의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당당하게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순간 현장은 떠들썩해졌다.임근우는 너무 놀란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마이크까지 떨어뜨렸는데 무엇보다도 이 모습으로 나타난 온유한이 너무 괘씸했다.그리고 옆에 있던 임유희도 비록 온유한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고 했지만 막상 이런 상황에 부딪히니 모든 사람이 그녀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보는 것 같아 마치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했고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지금까지 자라오면서 이런 수치심은 또 처음이었다.그러나 이렇게 만든 주범은 벌써 임 씨 가족들 앞에까지 다가와 뻔뻔하게 인사를 건네고
한편, 임씨 가문.임유희의 병은 좀처럼 낫지 않었고 살만 점점 빠지고 있었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장희수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온유한 그 사람은 진짜 전화 한 통도 없었어?”임유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엄마, 나 이제 진짜 그 사람이 싫어졌으니까 더 이상 강요하지 말아줘. 응?”“그 말은 이미 너무 늦었어. 네 아버지랑 오빠는 이미 오랜 세월 간 쌓아온 인맥을 거의 전부 온씨 가문의 배 사업에 쏟아부어서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야.”임유희는 지금 온유한을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데 그런 애틋한 감정이 들 리가 없었다.“이 울타리 안에 발을 들이고 싶은 건 그 두 사람인데 나랑은 무슨 상관이야?”임유희는 머리를 부여잡고 울기 시작했다.“나도 엄마 딸인데 왜 내 생각은 안 해줘? 유한 오빠는 날 좋아하지도 않는데 내가 왜 억지로 만나야 해?”“처음에 네가 좋다고 쫓아다녔잖아.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해?”장희수도 인내심이 점점 바닥이 났다.“네 아버지 뜻은 만약 온유한이 연락이라도 오면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고...”“절대 전화 올 일이 없을 테니까 그만 포기해.”임유희는 단번에 그녀의 말을 잘랐다.“그리고 여기서 분명히 말하겠는데 그 사람은 절대 나랑 결혼하지 않을 거야. 지금 잔머리를 굴린다고 해도 유한 오빠는 그리 쉽게 넘어올 사람이 아니라고.”“무슨 뜻이야?”임유희는 얼굴을 가리고 더욱 세게 울음을 터뜨렸다.“유한 오빠는 지금 우리, 그리고 온씨 가문 사람에게 복수하는 거라고. 왜냐하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좋아하는 여자가 오직 지아 씨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이제 알겠어?”장희수는 그녀의 말에 너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게 가능해? 이미 헤어진 지도 몇 년이나 지났는데?”“틀림없어!”임유희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난 강지아 씨랑 싸우고 싶지 않아. 이길 자신도 없고. 엄마, 엄마가 아빠랑 오빠한테 좀 잘 말해서 그냥 온씨 가문과 협력만 하고 결혼 이야기는 꺼
이튿날, 온유한은 점심이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마침 온혁진이 화가 잔뜩 난 채 최신애한테 분풀이하고 있었다.“내가 임유희랑 잘 이야기해 보라고 했는데 갔어, 안 갔어? 지금 임씨 가문의 사람들이 내 전화는 아예 받지도 않는데 이거 어떡할래?”최신애는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대체 뭐 하자는 거지? 설마 지금 강지찬 따라 하는 건가?’그리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부여잡고 말했다.“만나러 갔는데 임유희 얼굴은 보지도 못하고 그 애 어머니한테 쫓겨났어요. 그래서 밖에 나와서 차 한잔 마시자고 문자를 몇 통이나 보냈는데도 답장이 없었고요.”말을 마친 뒤 문자 메시지를 그에게 보여줬는데 확실히 아무런 답장도 받지 못했다.이때, 온혁진이 위층에서 내려오는 온유한에게 말했다.“유한아, 네가 임씨 가문에 좀 가봐.”“싫어요.”온유한은 고민도 안 하고 단칼에 거절했다.그러자 최신애가 재빨리 다가와 그에게 설명했다.“우리랑 협력하는 사람들은 전부 임씨 가문의 그 부자 말만 듣는대. 만약 그들이 짜고 돈을 보내지 않으면 공장과 실험실은 올스톱이야. 아들아, 유희는 분명 너라면 만나줄 것 같은데 둘이서 잘 이야기해 봐.”온유한은 듣다 보니 최신애의 행동이 너무 우스웠다.“왜 제가 임씨 가문에 찾아가서 그 사람들을 만나줄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거죠?”“이 태안 그룹이 나중에는 다 네 것이 되는데 상관 안 할 거야?”“네. 전 싫어요.”온유한은 차가운 눈빛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어머니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게 다 하찮게만 여겨지거든요.”“뭐라고?”최신애는 그의 대답이 너무 충격적이라 뒤로 주춤했다.온유한은 어젯밤 술의 기운이 아직도 도는지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 일부러 독한 말을 마구 내뱉었다.“온씨 가문이 그리 대단해 보여요? 그러면 무조건 제 발로 짓밟아야겠네요.”“당신 아들인 제가 그리도 대단해 보여요? 그러면 무조건 막 살아야겠네요.”“온씨 가문도, 저도 모두 죽어버리면 더 이상 어떻게 어머니의 그 고귀
“왜 이렇게 빨리 왔어?”강지찬과 정유진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뒤 정유진은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이 그에게 고개를 저었다.그제야 강지아는 소파 위의 강지찬과 새언니를 보고 자신이 집을 잘못 들어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이왕 온 김에 그녀는 쿠션을 안고 아예 소파에 앉아버렸고 잠깐 생각을 정리한 뒤에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이때, 강지찬이 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서원준 씨 어머니 만나러 갔어?”“응.”“어땠어?”“좋았어.”강지찬은 순간 어두운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원준 씨는 분명 자기 어머니가 너를 매우 좋아할 거라고 장담했었는데 설마 또 그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린 건 아니지?”저 ‘또’라는 말이 그녀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그러다가 정유진이 강지아의 손목에 찬 팔찌를 발견하고 웃으며 말했다.“가보도 준 걸 보면 마음에 든 것 같은데?”강지아는 팔찌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 시각, 온씨 가문의 최신애도 지금 할 말을 잃었다.술에 잔뜩 취한 온유한을 현채영과 운전기사가 부축해서 데려왔기 때문이다.그러면서 입으로는 계속 큰 소리로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다.“제...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 테니까 저랑 결혼... 해줘요.”그리고 현채영은 옆에서 그의 말에 대답을 해줬다.“네. 알겠으니까 우리 꼭 결혼해요.”최신애는 듣다가 화가 치밀어 올라 죽을 것 같았다.“우리 아들을 꼬드겨서 또 어디에 갔던 거야?”“그저 같이 술을 마셨을 뿐이에요.”“멀쩡했던 우리 아들이 너 때문에 하루가 멀다고 술에 절어있어. 유한이는 의사야. 수술하는 의사라고!”최신애는 현채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진짜 유한이를 망치려고 작정했어?”그녀의 말에 현채영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유한 씨는 지금 저랑 같이 있는 게 너무 행복하대요. 저랑 하루 종일 술도 마시고 하루하루가 즐겁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또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어머니께서 바라왔던 지난날들
서원준의 진지한 태도에 강지아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왜 차는 멈췄어. 시간도 늦었는데 빨리 가...”“마음이 아팠지?”서원준은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게 그녀의 어깨를 잡고 눈을 맞췄다.“온유한 씨랑 현채영 씨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팠지?”“아니.”강지아는 단칼에 부인했지만 서원준은 믿지 않았다.“아닌데 왜 이렇게 몸을 떨어?”그는 강지아의 한쪽 손을 잡아주며 다시 말을 이었다.“지금 지아 씨 자신을 좀 봐봐. 얼마나 떨고 있나.”강지아는 얼굴을 찡그리며 답했다.“그런 게 아니니까 빨리 출발해.”서원준은 여전히 거짓말하는 강지아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뭐가 그런 게 아닌데? 안 떨었다는 거야, 아니면 이제 온유한은 잊었다는 거야?”강지아는 그의 말에 발끈 화를 냈다.“아니라면 아닌 줄 알아!”그리고는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이거 놔. 그냥 나 혼자 갈게.”서원준은 그녀의 어깨를 너무 세게 잡은 나머지 뼈가 다 으스러질 것 같았다.“제발 정신 좀 차려. 세상에는 온유한 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니까.”“그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야. 지아 씨한테 안정감도 주지 못하고 사랑도 주지 못하는데 대체 뭐가 아쉬워서 아직도 그런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어?”그의 입에서 자꾸 들리는 온유한이라는 단어에 강지아는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그만 말하라고!”그러나 서원준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말도 못 해? 대체 온유한 씨는 당신한테 어떤 존재인 거야?”비록 오늘 저녁 식사 자리는 매우 순조로웠지만 서원준은 만족하지 못했다.서영희가 그토록 강지아를 마음에 들어 하는데도 여전히 경계심이 있어 보이는 건 분명 예전에 온유한과 함께 했을 때의 그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있다는 뜻이다.“지아 씨, 나한테도 기회를 줘. 우리 같이 노력해서 내가 온유한을 잊을 수 있도록 도와줄게.”서원준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시선을 맞췄다.“날 봐!”“나도 더 이상 기다리기 싫어졌어. 나는 원래 비열하고 욕심도 많아서 지아 씨랑 같이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