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진은 임산부와 길게 싸우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한빈에게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당신도 내가 한 일이 고객사 남자 직원들과 술을 마신 거 말고는 없다고 생각해?”한빈이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회사가 이 모양인데 그런 게 지금 중요해? 정말 이 회사를 위한다면 회사가 망해가는데 가만히 있지는 않았겠지.”“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데?”정유진이 물었다.“너 강지찬이랑 친하잖아.”한빈의 눈에 다시 이채가 돌았다.“강지찬한테 얘기 좀 잘해줘. 제발 이제 나 그만 괴롭히라고 얘기해 줘. 나한테서 너까지 빼앗아간 인간인데 대체 뭘 더 바라는 거야?”정유진은 이 인간과 더 상종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내가 도와주기를 바란다고? 그럼 무릎 꿇고 나한테 빌어봐.”전혀 예상치 못했던 요구에 한빈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유진아,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듣고 있던 조예원이 성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뻔뻔한 자식이 지금 뭐라는 거야!”조예원은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어서 정유진의 손을 잡아 끌었다.“물건 돌려주고 이제 가자!”정유진은 미동도 없이 차분하게 말했다.“잠깐만 더 기다리자.”조예원은 짜증이 치밀었다.“뭘 더 기다린다는 거야? 이번에도 마음 약해질 거면 나랑 절교할 각오를 해야 할 거야.”이때, 밖에서 절제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정유진이 웃으며 말했다.“왔네.”그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예상밖이었다.한빈은 그녀의 웃음을 보자 신경이 곤두섰다.“누가 왔다는 거야?”발걸음 소리가 문 앞에서 들려오자 정유진을 제외한 모두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강지찬과 그의 경호원이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안으로 들어섰다.한빈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강 대표님?”그는 경악한 표정으로 정유진에게 물었다.“네가 불렀어?”정유진은 강지찬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싸늘한 눈빛으로 한빈을 노려보며 말했다.“강지찬 씨한테 얘기 잘해달라며? 그래서 여기로 불렀어. 살려달라고
사무실 안의 모든 물건을 박살낸 뒤에야 정유진은 동작을 멈추었다.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야구방망이는 바닥에 버려졌다.그녀는 핸드백에서 반지를 꺼내 한빈의 책상 위에 놓았다.“앞으로는….”그녀는 흐트러진 머리결을 정돈하고 긴 한숨을 내뱉은 뒤 말을 이었다.“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한빈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강지찬이 있어서 입을 뗄 용기가 나지 않았다.조예원은 달려와서 친구의 어깨를 감싸안았다.“그래, 이제 다 끝났어. 이제부터 새출발하면 돼. 가자. 이 언니가 오늘 맛있는 술 사줄게.”정유진은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가자.”두 여자는 남은 사람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사무실을 나가버렸다.강지찬은 인상을 확 찌푸렸다.여자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진 기분이었다.그가 쫓아가려는데 울음 섞인 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 대표님, 이제 그만 저를 용서해 주세요. 돈은 다 돌려드렸잖아요. 제발 저 숨 좀 쉬게 해주세요!”강지찬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개수작 부리고 있네.”한빈은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기세였다.“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진영식이 시키는 대로만 했습니다. 다른 건 아무것도 몰라요.”“그런데 왜 그렇게 떨고 있는 거야?”강지찬의 눈빛에 짜증이 가득 묻어났다.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낭비 하고 싶지 않았다.“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어.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 지금 말하면 내일 당장 회사 정상으로 돌려놓을 수도 있어.”한빈은 순간 눈빛이 흔들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정유진 좋아하시죠? 제가 좋아하는 여자까지 양보해 드렸잖아요. 우린 전에 제대로 된 스킨십 한번 해본 적 없어요. 믿어주세요!”강지찬의 두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절망에 빠진 그녀의 눈빛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심장이 찔린 듯 아파왔다.퍽!아찔한 소리와 함께 강지찬의 주먹이 한빈의 얼굴에 꽂혔다.한빈은 그대로
“내 친구를 어디로 끌고 가는 거예요! 그거 놔요!”정유진은 조예원을 잡으려고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설 수 없었다.“걱정 마세요. 집으로 안전하게 돌려보내라고 했어요.”강지찬이 말했다.만약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했더라면 안심했겠지만 상대가 강지찬이라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그럴 필요 없어요.”정유진은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이 술집 사장님이 예원이 사촌오빠거든요.”강지찬은 그녀가 자신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경호원에게 말했다.“사장님한테까지 모셔다드려.”경호원은 조예원을 부축해서 카운터로 사라졌다.주변이 조용해지자 강지찬이 싸늘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이러면 시름이 놓이나요?”정유진은 그를 상대해 줄 기분이 아니었기에 술병으로 손을 가져갔다.강지찬이 그녀의 손에서 다시 술병을 빼앗았다.“주세요.”“또 취해서 나한테 업혀 가고 싶어요?”정유진은 남자의 뻔뻔함에 할 말을 잃었다.강지찬은 술집 직원을 불러 계산하게 했다.정유진은 상대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더 짜증이 치밀었다.지금은 아무와도 말하고 싶지 않고 그 상대가 이 남자라면 더욱 싫었다.과거의 모든 걸 지워버리고 싶은데 강지찬을 보고 있으면 자꾸 비참했던 과거가 떠올랐다.“이용만 하고 버리다니.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 줄 알아요?”강지찬이 말했다.정유진은 피식 코웃음 치며 고개를 돌렸다.술을 좀 더 마시고 싶은데 강지찬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이제 나가요.”같이 가자는 얘기인가?정유진은 그를 미친 사람 보는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강지찬 씨, 내가 평생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 한빈이고 그 다음이 당신이란 건 알아요?”강지찬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걸어서 갈래요? 아니면 나한테 끌려 갈래요?”정유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미친 사람인가?잠깐 정신이 팔린 사이 남자가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를 안아서 어깨에 들쳐멨다.정유진은 그의 어깨에 매달린 채 등을
“유진 씨,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밥 드세요. 해장국 끓이고 있어요.”정유진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았기에 방 집사도 말을 아꼈다.“폐를 끼쳤네요.”정유진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방 집사는 강지찬과 둘이 싸운 줄 알고 조심스럽게 말했다.“폐라니요. 저희 대표님은 바쁜 분이라 거의 집에 안 계시고 회사 근처에서 숙식을 해결하세요.”정유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그 사람 그렇게 바빠요?”오늘도 전화 한 통에 바로 달려온 걸 봐서 한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과 달라서 조금 놀라웠다.방 집사는 옷장에서 잠옷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며 한숨을 내쉬었다.“그 큰 회사를 혼자서 관리해야 하는데 한가할 리가 없죠. 최근에는 큰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들었는데 평소에 식사할 시간도 없대요. 그래서 요즘은 도시락이라도 만들어서 가져다드리고 있어요.”두 사람 사이가 아직 확실하지 않았기에 방 집사는 상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정유진은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했다.아까 많이 마시기는 했지만 만취하기 전에 강지찬이 나타났기에 그리 괴롭지는 않았다.지금 생각해 보면 음주도 괜한 짓이었던 것 같았다.그런 인간 때문에 술로 속상함을 달래려 하다니, 그럴 가치도 없는 인간이었다.그리고 그녀 본인도 숙취 느낌을 굉장히 싫어했다.그녀가 씻고 나오자 방 집사는 해장국과 반찬을 위층 침실까지 올려주었다.정유진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내려가서 먹어도 되는데 제가 다 죄송하네요.”“죄송하기는요.”방 집사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지시예요. 밥 다 드시고 푹 주무시라고 하셨어요.”정유진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진 것을 보고 방 집사는 한마디 덧붙였다.“사람은요, 어떤 상황이 와도 자신을 아껴야 해요. 아무리 큰일이 벌어져도 잘 먹고 잘 자야 일을 해결할 힘도 생기는 법이죠.”“집사님 말씀이 맞아요.”정유진이 웃으며 말했다.방 집사도 그녀의 미소를 보고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참 순수하고 예쁜 아가씨네. 그러니까 대표님이 자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정유진은 핸드백과 입고 왔던 옷을 챙기고 밖으로 나왔다.“아침도 안 드셨는데….”방 집사가 이미 준비된 아침상을 보며 서운한 듯이 중얼거렸다.아침부터 강지찬에게 한방 먹은 정유진은 씩씩거리며 정원을 걷고 있었다.더 짜증이 나는 건 이 구역은 지나가는 택시도 없는 곳이라는 점이었다.뒤에서 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강지찬이라는 것이 느껴졌다.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걸었다.차는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차 창을 내린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아파트 단지가 커서 대문까지 가려면 30분 정도 걸릴 텐데요. 콜택시 불러도 들어올 수 있는 곳도 아니고.”정유진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새침하게 말했다.“그럼 입구까지 걸어가서 콜택시 부르면 되죠.”강지찬의 시선이 풍만한 곡선에 닿았다.그가 좋아하는 사이즈였다.그는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잠시 노려보다가 장형준에게 말했다.“가자.”장형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속도를 올렸다.‘유진 씨 때문에 아침 회의까지 거르신 분이.’강지찬이 사라지자 정유진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저런 위험한 인간은 멀리하는 게 상책이었다.그녀는 조예원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는 꺼진 상태였다.아마 지금쯤 쿨쿨 자고 있을 것이다.워낙 단지가 컸기에 그녀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지도를 켰다.그렇게 40분이나 헤맨 끝에 드디어 부경원을 나올 수 있었다.마침 콜택시도 먼저 도착해서 대기하고 있었다.스튜디오에 도착하자 키키가 작은 케익 하나를 들고 다가왔다.“엄마가 직접 구운 건데 한번 드셔보실래요? 담백하니 맛있어요.”마침 아침에 아무것도 안 먹고 나온 정유진은 흔쾌히 집어 한입 맛보았다. 말했던 것처럼 달지 않고 맛있었다. 키키는 통째로 그녀의 책상에 놓고 자리로 돌아갔다.이 어린 후배 녀석은 다른 직원들과도 잘 어울리고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요양원 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여기저기 비교해도 우리한테 맡기는 게 가장 낫다고 판단했나 봐요.”정유진은 커
미모의 여자는 강지찬의 집에서 봤던 그 여자였다.저 사람이 여기 왜 있지?게다가 잠옷 차림으로?정유진과 키키는 복도를 걷고 있었기에 여자도 그들을 발견했다.충격이 가신 뒤, 정유진은 조용히 길을 비켜주었다.그런데 여자가 그녀에게 다가오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정유진은 여자의 정확한 신분을 몰라 더 당황했다.만약 강지찬 여자친구라면 좀 어색할 것 같았다.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달까.“언니?”여자가 예쁜 눈을 곱게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언니, 언니!”정유진은 당황하고 키키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누나, 누구예요?”정유진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나도 모르는 사람이야.”키키가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여기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네요.”그건 정유진도 인지하고 있었다. 여자는 성인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지능은 일곱 살 어린애와 비슷해 보였다.여자가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언니, 나 기억 안 나?”정유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나를 알아?”“당연하지. 내 언니야.”여자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팔을 껴안았다.정유진은 그녀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 생각하고 팔을 빼려는 순간, 뒤에서 거친 욕설이 들려왔다.“좀 씻자니까 어딜 도망가!”고개를 돌리자 웨이브진 머리에 정교한 화장을 한 여자가 씩씩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그 여자는 어린 여자의 팔목을 낚아채며 차갑게 말했다.“당장 돌아가서 씻어!”어린 여자는 정유진의 팔을 꽉 껴안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목욕 싫어. 당신도 싫어. 우리 언니랑 같이 있을래.”미녀가 정유진에게 시선을 돌렸다.같은 여자도 질투할 정도로 예쁜 얼굴에 모 유명 브랜드의 신상을 입고 있는 모습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옷차림에 비해 들고 있는 가방은 평범했다.그리고 장신구도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여자는 정유진을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스스로 판단을 내렸다.‘옷은 누구한테 선물 받았네. 얼굴 예쁘니까 남자들이 선물했겠지.’“당신 누구야?”여
“당신 미쳤어?”분노한 여자가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정유진의 힘이 더 셌다.그녀는 경멸에 찬 눈으로 정유진을 노려보며 물었다.“너 뭐 하는 사람이야?”정유진은 그 눈빛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그녀는 화를 내는 대신 여자의 팔목을 단단히 잡고 어린 여자에게 물었다.“너 이 사람 알아?”어린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응. 우리 새언니라고 했어.”정유진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설마 했는데 가족이었을 줄이야.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환자를 꼬집는 건 선을 넘지 않았나?여자는 새언니라는 호칭이 마음에 드는 듯,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경고하는데 이거 놔. 너랑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돈 필요해? 얼마면 돼?”정유진은 더 이상 이 여자와는 대화가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키키가 경비원과 수간호사를 데리고 돌아왔다.“고세연 씨?”경비실 팀장이 그녀를 알아보고 공손히 인사했다.“언제 오셨어요?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수간호사도 웃으며 말했다.“또 지아 보러 오셨군요. 정말 착한 분이시라니까.”키키는 지아라는 여자의 팔뚝을 가리키며 큰소리로 말했다.“잘 보세요. 이 상처 저 여자가 꼬집어서 생긴 거예요.”조금 전까지도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던 고세연이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우아한 요조숙녀로 변신했다.“마침 잘 오셨어요. 이 사람들 뭐 하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는데 지아를 끌고 가려고 했지 뭐예요.”정유진은 지아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했다.수간호사와 경비 팀장이 도착한 순간부터 지아는 표정이 변하더니 그녀의 팔을 놓고 고세연의 뒤로 숨었다.지아의 반응으로 보아 수간호사와 경비 팀장을 매우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소녀는 고세연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빨리 가자.”고세연은 미안한 표정으로 수간호사와 경비 팀장을 보며 말했다.“지아 돌아가서 씻어야 해요. 이 두 사람은 두 분이 알아서 처리 좀 해주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지아를 데리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조금 전까지 정유진을 언니라고 부르며 달
회사로 향하는 길에 정유진은 전화로 통보를 받았다.신안 요양원 인테리어에서 손 떼라는 통보였다.키키가 옆에서 이를 갈았다.“이 계약 하나 따낸다고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대로 통보만 하면 끝이에요?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정유진도 억울한 마음이 있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회사로 돌아가자 조예원이 있었다.그녀는 정유진을 끌고 사무실로 들어갔다.“어떻게 된 거야? 어제 강기찬 씨 따라갔어?”“따라간 게 아니라 끌려간 거야.”정유진이 컵에 물을 따르며 덤덤히 말했다.“대체 그 사람은 왜 그런대? 너 좋아하나?”조월영은 아무리 생각해도 강기찬의 태도가 이상했다.“네 전화 한 통에 바로 달려온 것도 그렇고. 그때 강기찬이 사무실에 짠 하고 나타났는데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놀랄 게 뭐가 있어. 날 위해서 온 것도 아니고.”정유진은 무덤덤하게 말했다.“남자 얘기는 그만하고 일 얘기부터 하자. 신안 요양원 계약은 물 건너갔어. 오후에 있을 미팅에서 더 힘을 내야 할 것 같아.”조예원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괜찮아. 물론 네가 야근까지 해가며 초안을 완성한 건 아깝지만.”고객과 약속한 시간은 세 시였는데 상대는 10분 일찍 찾아왔다.점심 때인데도 남자는 긴 코트를 입고 있었다.사무실 온도가 너무 추워서인지 그는 들어서자마자 기침을 했다.정유진은 말없이 에어컨을 꺼버렸다.인테리어 방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두 번째 방안으로 하죠. 아늑한 스타일을 좋아하거든요. 정유진 디자이너님 방안이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정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이렇게 쉽게 결정한다고?조예원은 재빨리 계약서를 남자에게 건넸다.그렇게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계약서에 적힌 사인과 도장을 보고 정유진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강지현?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었다.설마… 강지찬이랑 관련 있는 인물인가?계약을 체결한 뒤, 그녀는 강지현이라는 남자와 두 시간 정도 더 대화를 나누며
식탁 위의 분위기는 상당히 어색했다.최신애는 강지아에게 많이 먹으라고 말하며 계속 반찬을 얹어 주었다.앞에 있는 접시는 가득 찼지만 강지아는 최신애가 짚어 준 반찬을 한 입도 먹지 않은 채 먹고 싶은 것은 스스로 집어 먹었다.최신애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졌다.온혁진이 기침을 하며 강지찬과 강씨 가문으로 말머리를 돌렸다.“오빠 회사 일은 잘 몰라요. 제가 관여할 일도 없고요.”강지아는 온혁진의 물음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거절했다.“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오빠한테 물어보세요.”식사를 마친 뒤 강지아는 전화를 받고 나갔다.그녀는 온유한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고 직접 운전해서 갔다.밖에서 차 떠나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아들아, 지아는 대체 무슨 뜻이야?”핸드폰을 들고 흉부외과 팀의 온라인 수술 토론을 보고 있던 온유한은 최신애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지아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말고 묻지도 마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마시고요.”강지아는 화령과 술을 마시러 나갔다.화령의 기분이 좋지 않아 두 사람은 오늘 에이프릴 홀에서 방 하나를 빌려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미안해, 온씨 저택으로 들어간 첫날 밤인데 내가 불러냈네. 온 대표님이 화내겠다?”“그 사람 기분 따위 상관 안 해.”강지아가 소파에 편안히 누우며 말했다.“무슨 일인데? 최금성이 왜 또?”“별거 아니야.”화령이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최금성의 소울메이트가 돌아왔어. 지금 밖에서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을 거야.”“소울메이트?”강지아는 깜짝 놀랐다.“유주?”화령이 물었다.“너도 알아?”강지아가 일어나 앉으며 혀를 찼다.“골치 아프게 됐네.”그 말에 화령의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왜 골치 아픈데, 정확히 얘기해봐.”술을 마실 마음이 싹 사라진 강지아는 화령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왜 돌아왔대? 오랫동안 밖에 있다가 갑자기 돌아온 이유가 뭐야?”화령은 더욱 초조해졌다.“대체 왜 그러는 건데? 유주라는 여자, 대체
온혁진과 최신애는 마당에 서서 강지아를 기다리고 있었다.강지아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주는 것이었다.최신애의 미소는 눈으로 보기에도 어색했다.가장인 온혁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부터 우리는 한 가족이야. 지아야, 필요한 게 있으면 네 아주... 네 어머니에게 말해.”최신애도 말했다.“그래, 그래. 얼른 방에 가서 마음에 드는지 봐봐.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바꿔줄게.”고개를 끄덕인 강지아는 열려 있는 문을 바라보며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최신애가 유난히 열정적으로 말했다.“지아야, 먼저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어. 조금 이따가 저녁 식사 준비할게. 오늘 저녁은 네가 좋아하는 음식만 준비하라고 했어.”강지아는 깜짝 놀랐다.“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하세요?”“당연히 기억하지.”최신애가 약간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키웠는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모를 리가 있겠니? 너는 매운 걸 싫어했어, 어릴 때 실수로 고추를 먹으면 한참을 울었어. 네 엄마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었지, 그 매운맛이 가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그걸 기억하시네요.”강지아가 말했다.간단한 몇 마디였고 특별히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최신애는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문을 들어서자 강지아는 긴장을 풀었다.이곳에 결국 들어오게 되다니... 평생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하지만 옛말대로 매듭은 매듭을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나는 게스트 룸에 있을게요.”강지아의 말에 최신애와 온혁진은 깜짝 놀랐다.“아, 아니. 네가 게스트 룸에 있으면 안 되지...”온유한이 말했다.“2층 방 좀 정리해 주세요.”게스트 룸이 2층에 있었기에 온유한은 당연히 그녀와 한 층에 있고 싶었다.강지아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최신애는 즉시 사람들을 시켜 2층에 있던 온유한 방 옆의 방을 강지아의 취향에 맞게 정리했다. 창고에 물건이 많았지만 하인들이 함께 움직여 30분 만에 강지아에게 아름답고 아늑한 방을 만들어줬다.강지아가 세수를 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
연우의 생일 파티에는 강씨 가문의 친지들이 많이 참석했기에 강지아는 낯이 익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한동안 응대를 해야 했다.화장실에 가서 화장을 고친 뒤 손을 씻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꽉 잡았다.“누구야, 놔!”깜짝 놀란 강지아가 발로 그 사람을 밟으려 했다.이것은 장형준에게 배운 호신술이었다. 하이힐로 상대방의 발을 밟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호신술이었다.하지만 하이힐로 밟기 전에 강지아를 안고 있는 사람이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나야.”온유한이였다.강지아는 움직이지 않았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온유한의 품과 몸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나 익숙했다.그에게 꽉 안겨 귀에서 들리는 그의 숨소리는 한 번 또 한 번 그녀의 심장을 강타했다.이제는 그가 두렵지 않다.하지만 완전히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렸으며 몸은 본능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예전처럼 그를 보자마자 떨리는 것은 아니었다.“내 생각 안 했어? 지아야?”온유한의 물음에 강지아는 매우 평온하게 말했다.“생각했어.”그 대답에 온유한이 오히려 놀랐다.강지아가 놓아달라는 듯 온유한을 밀어내자 온유한도 그녀의 뜻대로 그녀를 놓아주었다.강지아가 말했다.“오늘 저녁에는 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 내일 오후에 데리러 와. 같이 온씨 저택으로 가자.”온유한은 또 한 번 놀랐다.“지아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니?”“알아, 우리 결혼했잖아. 같이 온씨 저택에 돌아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쉽게 한 말 같지만 당연하지 않다...온유한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너는 온씨 저택에 갈 필요 없어. 우리 그냥 서울 캐슬에 살자. 그 집은 너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야. 거기서 살면 편할 거야.”“아니, 온씨 저택으로 들어갈 거야.”강지아가 단호하게 말했다.강지아가 집에 들어와 살 거라는 소식을 들은 최신애는 마음속으로 거부감을 느꼈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
“온씨 가문이 정말 예전 같지 않아, 작년에 많은 일이 일어나면서 태안 그룹의 평판도 영향을 받았지.”“그건 다 최신애가 자초한 일이야, 이제는 강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아부하려고 하지만 강지아가 어디 쳐다보기라도 해?”“강 대표가 냉정하다고들 하지만 온씨 가문에게는 정말 잘해주네. 최신애가 예전에 강지아에게 어떻게 했는지 다들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끔 귀에 들려오자 얼굴이 빨개진 최신애는 화가 나면서도 당황스러웠다.강지아도 몇 마디 들었지만 그냥 무시해 버렸다.“조카딸 생일 때문에 잠깐 돌아온 거야? 아니면 더는 안 나가는 거야?”화령의 물음에 강지아가 미소를 지었다.“내가 마치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하네.”“그래, 넌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지 않아. 그냥 피하러 다니는 거지.”서원준이 다가오자 화령이 웃으며 말했다.“한 번 나가면 두 명 다 피할 수 있구나.”서원준은 여전히 건들거리는 모습이었다.“돌아왔어?”“응, 돌아왔어.”강지아가 동하민을 향해 손을 내젓자 동하민이 그녀의 가방을 가져왔다.화령이 농담으로 한마디 던졌다.“우리 강씨 가문의 아가씨가 선물 주는 버릇은 고치지 못했나 봐.”서원준도 웃었다.“나한테도 줄 선물이 있나 보네.”말투에는 비꼬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마음을 놓은 건지 아니면 일부러 가볍게 보이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강지아는 이번에 브로치 선물을 준비했다. 남자 것과 여자 것은 당연히 달랐지만 모두 예뻤고 값비싼 것들이었다.“또 도매한 거야? 정성이 없네.”화령은 겉으로는 비난했지만 이미 브로치를 들고 가슴에 대어 보고 있었다. 입과 몸이 따로 노는 게 특징인가 보다.강지아가 말했다.“나에게 뭐라고 하지 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바빴는지 너도 알잖아.”화령이 콧방귀를 뀌었다.“바쁘겠지, 펀과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느라 얼마나 바빴겠어. 그래도 브로치가 내 미모와 잘 어울리니까 마음에 드네, 고마워.”말을 마친 화령은 선물과 잔을 들고 알아서 자리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가족 모임에 강홍식과 고세연은 초대받지 못했기에 참석하지 않았다.본가로 돌아오자 강홍식이 마당에 서서 강지찬과 강지아를 불효자식이라고 욕했지만 둘 다 아버지를 무시했다.강지아는 바로 자기 집 마당으로 돌아갔다.정유진은 강지아가 결혼식 날 왜 모른 척했는지 물어볼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내내 강지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지아가 걱정돼.”강지찬은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걱정할 필요 없어. 본인도 속으로 알고 있을 거야. 서원준과 결혼하는 것보다 온유한과 결혼하는 게 낫다는 걸.”사실 강지아는 지금 서원준과 결혼하지 않은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그날 밤, 강지아는 화령과 동하민을 데리고 해외로 패션쇼를 보러 떠났다.에이프릴 홀.술을 좀 많이 마신 최의현은 옆에 있는 온유한의 어깨를 탁탁 치며 말했다.“친구야, 우리랑 술 마신 지 얼마나 됐지? 너 벌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온유한이 미소를 지으며 앞에 있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한 잔을 따라 강지찬을 향해 들었다.“지찬아, 내 잔도 받아줘.”강지찬은 온유한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잔을 들고 멀리서 살짝 부딪혔다.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이렇게 화해했다.온씨 집안.최신애가 매우 불쾌해하며 거실에 앉아 한숨을 쉬자 신문을 보던 온혁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졸리면 자러 들어가, 아들이 오늘 늦게 들어올 거야. 기다릴 필요 없어.”최신애는 또 한숨을 쉰 후 말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남들은 며느리를 들이면 기뻐서 날뛰는데 우리 집은 왜 이럴까요? 며느리에게 차 한 잔도 못 얻어 마시고 조상님보다 더 조상님 대접을 해줘야 하잖아요.”온혁진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누구를 탓하겠어? 당신이 불평할 자격이 있어? 경고하는데 이런 말 아들 앞에서 하지 마. 지아가 온씨 가문의 문턱도 안 들어오겠다고 해도, 평생 우리를 부모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은 아무 말도 할 자격이
강지아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온유한을 잔뜩 경계하는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온유한은 쟁반을 둥근 테이블 위에 놓으며 미소를 지었다.“지금 먹기 딱 좋으니까 얼른 와서 먹어.”온유한의 모습은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떨어져 있던 3년의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강지아는 배가 고팠지만 가까이 가지 않았다.“알았어.”온유한은 항복하는 듯 말했다.“와서 밥 먹어, 나는 잘게.”말을 마친 온유한은 옆방 침실로 들어갔다.강지아는 여전히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 집이 완전히 그녀의 취향에 맞게 꾸며져 있다면 충전기도 그녀가 평소에 두던 곳에 있을 것이다.테이블 아래 서랍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충전기가 그 안에 있었다.밥을 먹은 뒤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한 강지아는 옷장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옷장 안의 옷마저 그녀의 옷장에 있는 것들과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운 강지아는 잠들지 못할 줄 알았으나 새벽까지 깊이 잠들었다.천장을 바라본 강지아는 무력감이 들면서도 이런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아래층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는 온유한은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조금이나마 덜 위험한 모습을 보이면 강지아의 경계심도 조금은 풀어지게 될 것이다.발걸음 소리를 들은 온유한은 신문을 가지런히 접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침 식사 준비됐어, 어서 와서 먹자.”말을 마친 뒤 주방으로 가서 밥과 반찬을 차렸다.집안일을 하는 온유한은 왠지 모르게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아마도 잘생긴 남자는 무슨 일을 해도 멋져 보이는 법인가 보다.“얼른 와, 맛이 괜찮을 거야.”온유한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강지아는 순간 깨달았다. 이 집에 하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면 어제 저녁 식사와 오늘 아침 식사도 온유한이 준비한 것일까?마음이 너무 닫힌 탓인지 이에 대해서도 전혀 감동을 하지 못했다.감동은커녕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안 먹을 거야, 좀 이따
결혼식 연회는 계속되었지만 결혼식이 아니라 친지 친구들 간의 대형 모임으로 변했다.강지찬은 받은 축의금은 모두 돌려줄 것이며 오늘 이 자리에 온 하객들은 맘 편히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강지찬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장형준이 와서 보고했다.“대표님, 서원준 씨가 돌아왔습니다.”밖에 있는 서원준은 손에 있던 외투도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고 넥타이도 매지 않았다. 입고 있던 셔츠도 헐렁해졌다.입구의 테이블에서 술병을 하나 집어 들고는 바닥에 쏟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온 그는 강지찬 앞에 다가와 술병을 위로 집어 들었다.장형준은 서원준이 혹시라도 폭력을 쓸까 봐 재빨리 강지찬 앞을 가로막았다.강지찬은 장형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비키라고 했다.“왜?”강지찬이 술병을 바라보며 묻자 서원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진작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날만 기다린 거예요?”강지찬은 솔직하게 말했다.“응, 예상했어.”“그래요, 그렇군요.”서원준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하지만 강지찬에게 폭력을 쓰지 않았다.술병의 술을 다 마신 후, 그는 서연희를 데리고 호텔을 떠났다.성대한 결혼식이었지만 남자 측의 친지와 회사 동료들을 합쳐도 두 테이블밖에 되지 않았다.돌아가는 길, 두 모자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원준은 서연희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마당은 강지아가 전에 개조해 조금 변화가 있었다. 풀들이 제각각 자라던 마당이 강지아 덕분에 많이 질서정연해졌다.가을이 되었음에도 꽃들이 여전히 만발해 있었다.“지아가... 이제는 오지 않겠지?”서원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기 어머니에게 물 한 잔을 가져다 주었다.서연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들아, 지아의 오빠를 원망하지 마라. 오늘 이런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지아의 마음속에 네가 없다는 것을.”한참 후, 서원준이 말했다.“알아.”주위 인테리어가 너무 익숙했던
온유한이 강지아를 거실 한가운데에 앉히자 강지아는 순간 멍해졌다.이 집은 온유한이 현채영에게 사 준 집이 아니었던가? 왜...“강지아 씨가 이 환경에서 안정감을 느낄 거라고 유한 씨가 그랬어요. 여기 있는 모든 물건들도 유한 씨가 직접 하나하나 주문 제작한 거고요. 어떤 물건들은 해외에서 들여온 거예요. 강지아 씨가 산 것과 같은 제품이에요. 온유한 씨가 겨우 찾아낸 거예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지아 씨가 이 집의 주인이에요. 나는 그냥 온유한 씨가 고용한 연기자일 뿐이에요. 오늘이 내 마지막 출연이 될 거예요.”강지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두 사람, 그런 사이 아니었어요...?”“아니에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온유한 씨의 마음속에 여자는 항상 강지아 씨뿐이에요. 이건 의심할 필요 없어요.”현채영은 프로페셔널하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조용히 물러났다.집이 아주 넓었지만 강지아는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지아야, 마음에 들어?”온유한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강지아는 그 손을 뿌리쳤다.“내가 감동할 거라고 생각해? 감동하고 그다음에 같이 잘 살 거라고 생각해? 온유한, 인생이 장난이야?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모든 일이 쉽게 넘어갈 것 같아?”강지아는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자리에 서 있는 온유한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리모컨을 눌렀다. 이내 열려 있던 대문이 서서히 닫혔다.“뭐 하는 거야? 나를 가두려고? 이것도 우리 오빠에게서 배운 거야?”강지아가 비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은 다시 문을 열더니 그녀가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를 가리켰다.“정말 그런 차림으로 강씨 본가에 돌아갈 거야? 그리고 지찬이와 형수님은 아직 호텔에 있어. 지아야, 일단 위층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한 다음 우리 다시 이야기하자.”강지아는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오빠와 형수를 만나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기에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 위층이라고 해도 저택의 집과 똑같았기에 강지
“알았어! 그래! 내가 꺼질게! 강지아, 분명 나를 찾아와서 울 날이 있을 거야.”분노에 가득 찬 서원준은 외투를 벗고 흐트러진 머리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초라한 얼굴로 옷을 들고 사라졌다.강지아가 이제 막 숨을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를 방어하는 건 내가 혹시라도 서원준에게 해를 끼칠까 봐서야?”온유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강지아는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지아야, 네 마음속에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네.”강지아는 냉정한 얼굴로 온유한을 바라보았다.“그렇지 않아?”그러고는 온유한의 손을 뿌리치고 웨딩드레스를 들고 걸어 나갔다.하지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온유한, 뭐 하는 거야?”온유한은 그녀를 차 안에 앉혔다.차는 다시 출발했고 이번만큼은 온유한도 신호위반을 하지 않고 조용히 운전했다.하지만 차는 명도 빌딩이나 강씨 혹은 온씨 저택으로 향하지 않았다.“어디로 가는 거야?”“우리의 새집으로.”새집.만약 두 사람이 정말로 사랑하는 신혼부부였다면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분명히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하지만 강지아는 그저 눈을 감았다.“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온유한이 아무 말 없이 계속 운전하자 강지아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소용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차는 마침내 고급 빌라 단지로 들어섰다.강지아는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온유한이 여기에 수십억 원짜리 집을 현채영에게 사줬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화령은 너무 부러워했다.“여기로 와서 뭐 하려고?”“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차는 한 대형 빌라로 들어섰다.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마당에 현채영이 서 있는 것을 본 강지아는 말문이 막혔다.온유한은 대체 뭘 하려는 걸까?옛 애인과 새 애인을 양손에 끼고 노는 걸 보여주려는 건가?“지아야, 내려.”온유한이 차 문을 열더니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강지아는 그저 황당하다는 생각뿐이었다.“내려가서 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