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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화

상대의 말에 응대해 주면 얘기가 더 길어질 것 같았기에 유월영은 가볍게 화제를 돌렸다.“서 대표님께서 알아서 해주신다고 하셨으니까 저는 이만 가볼게요.”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는 듯한 말투에 연재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그러다가 그녀가 정말 뒤돌아서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일주일이나 성깔 부렸으면 이제 화 풀릴 때도 되지 않았어?”유월영은 멈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니까 그는 아직도 그녀가 병원에서 오해 받은 일 때문에 화가 나서 성질을 부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그때는 정말 이성을 잃었던 것 같았다. 미친 여자처럼 사람들 보는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까지 질렀으니 그의 눈에는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유월영은 더 설명해 줄 말이 없었다. 이미 퇴사하기로 결정했고 그들 사이에 남은 것도 이제 없으니 예전처럼 그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가던 길을 갔다.연재준은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서지욱은 소은석과 김일주를 데리고 경찰서에서 나왔다.“나이도 어리지 않은 놈들이 폭행으로 경찰서에 잡혀와? 너희가 애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걸 보면 좀 맞아야겠네.”김일주가 감격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지욱 형,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이 일은 절대 아빠한테 비밀인 거 아시죠? 아빠가 알면 또 카드 정지시켜 버릴 거예요.”“입 다물어 줄 수는 있지. 앞으로 뭐든 할 때 생각이란 걸 좀 하고 행동해.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어릴 때 다 같이 자란 애들끼리 이게 무슨 망신이야.”서지욱은 이들 중에서도 성격이 가장 차분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매번 동생들이 사고를 칠 때면 그는 웃어른처럼 동생들을 훈계했다.“알았어요, 형.”김일주는 주변을 둘러보고 유월영이 보이지 않자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가버렸다.반면 계단을 내려온 소은석은 다짜고짜 연재준을 잡고 물었다.“재준 형, 유 비서는 어디 갔어? 벌써 돌아간 거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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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화들짝 놀라며 뒤돌아선 유월영의 눈에 강아지처럼 눈을 반짝이고 있는 소은석이 들어왔다.“어쩐지 주변에서 들리는 음악이 귀에 익다 했어. 밖에 있으면서 왜 거짓말했어?”유월영은 혓바닥을 깨물고 싶었다.근처에서 고객사 미팅을 하던 조서희한테 술에 좀 취한 것 같으니 데리러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평소에 그녀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친구가 아니었기에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달려 나온 것이었다.하지만 조서희가 룸 번호를 말해주지 않아서 복도에서 연락을 기다리고 있던 중에 소은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그때는 긴말하기 귀찮아서 대충 친척 핑계를 댔는데 그가 복도까지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유월영은 마지못해 사실을 얘기했다.“친구 연락 받고 왔어요.”하지만 이미 한번 거짓말했다가 들켜버렸기에 소은석은 그녀가 또 거절하는 줄 알고 그녀의 팔을 잡고 안으로 끌었다.“어차피 다 아는 얼굴들인데 뭘 그렇게 쑥스러워해? 우리가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재준 형도 안에 있단 말이야!”유월영은 이 남자가 참 눈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다른 사람이었으면 아무리 연인 사이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제 각자 갈 길을 가기로 한 지금 이런 식으로 그녀를 끌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게다가 오늘 밤, 연재준은 백유진을 대동하고 나왔다.지금 백유진은 연재준의 옆에 얌전히 앉아 생소한 환경에 적응이 안 되는 듯 불안한 표정으로 그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유월영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더 연재준의 옆으로 몸을 밀착시켰다.유월영은 이미 내려놨다고 생각했지만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안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그녀에게 아직은 시간이 필요했다.저들을 보고 있자니 처음 연재준에게 이끌려 그의 친구들을 만난 그날이 떠올랐다.그때는 그와 만난지 3개월째 되는 날이었는데 그에 대한 마음이 가장 강렬했던 시기였다. 그때 문을 열어준 사람도 소은석이었다.소은석은 그녀를 보자 당황하더니 고개를 돌려 안쪽에 대고 소리쳤다.“재준 형이 여자친구 데려왔어!”그녀는 당황해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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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유월영은 술잔을 집어 들고 세 잔 모두 원샷을 때렸다. 그리고 술잔을 거꾸로 들어 다 마셨다는 것을 인증하고는 웃으며 말했다.“마셨으니까 이제 됐죠? 은석 씨는 앞으로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랄게요. 오늘은 정말 급한 일이 있어 이만 가보겠습니다. 재밌게들 노세요.”연재준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말을 마친 유월영은 바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무도 그녀를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녀가 나가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누군가가 재미없다며 중얼거렸다.유월영이 원하던 바였다.여기서 시간 낭비할 바에야 깔끔히 마셔주고 자리를 뜨는 게 빨랐다.물론 당차게 거절하는 것도 좋지만 장소 가리지 않고 자존심만 세우면 오히려 저들의 재밋거리만 제공해 줄 뿐이었다.유월영은 연재준의 의견이 궁금하지 않았다. 반면 연재준은 그녀가 떠난 뒤, 담배를 비벼 끄고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술을 권했던 일당을 노려보았다.친구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그래?”아까부터 침묵만 지키고 있던 서지욱이 한마디 했다.“술까지 마시고 나갔으니 사고 당하기 쉬워. 재준이 너 안 따라가 봐도 돼? 여기 환경 복잡한 거 너도 알잖아.”백유진은 팔짱을 낀 손에 힘을 주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월영 언니는 워낙 술을 잘 마시니까 괜찮을 거예요. 친구를 찾는다고 했는데 대표님이 좀 나가서 같이 찾아주면 어떨까요?”하지만 연재준은 엉뚱한 얘기를 했다.“안 졸려? 졸리면 집에 데려다줄까?”백유진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그의 어깨에 기대며 사랑스럽게 말했다.“안 졸려요. 대표님이랑 있을래요.”소은석은 그제야 술이 좀 깨는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내가 한번 나가볼게.”한편, 조서희에게서 답장이 없자 유월영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받지를 않았다.어두컴컴한 복도에서는 알코올 냄새와 여자들 향수 냄새가 뒤섞여 불쾌한 냄새가 풍겼다.조금 전에 폭탄주를 연속으로 들이마셔서 그런지 냄새를 맡자마자 구역질이 올라왔다.정신없이 복도를 돌아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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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유월영이 말했다.“물론 제 의견을 거절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현명하신 분들께서 옳은 판단을 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두 회사가 거래를 트려고 접대 자리를 가지는 건 각자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너무 안 좋게 헤어지면 거래는 없던 일이 될 테고 물론 제 친구 회사에도 피해가 가겠지만 사장님들께도 이득이 없잖아요. 안 그래요?”일리 있는 말이었다.쌍방이 거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건 서로 이득을 취하기 위함이고 평등한 위치에 있었다. 다만 거래를 핑계로 여자직원들을 괴롭히기 좋아하는 남자들 특성상 오늘은 좀 과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거래를 없던 일로 하기에는 그들에게 가는 부담도 적지 않았다.한 남자가 유월영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말했다.“어디서 본 얼굴인데. 설마 당신… 연 대표랑 같이 다니던 그 비서 아니야?”다른 남자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어느 연 대표를 말하는 거야?”“신주시에 연 대표가 몇이나 더 있어? 해운그룹이지.”순식간에 분위기는 반전되고 남자들이 유월영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사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술자리를 파할 생각이 있었지만 이대로 둘을 보내주려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그래. 저 직원 데리고 나가도 좋아.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각자 한잔씩 올리면 오늘은 이만 보내주지.”룸에는 조서희를 제외하고도 여덟이나 있었다. 여덟 잔을 마시라는 소리였다.조서희가 비틀거리며 다가와서 말했다.“제… 제가 한잔씩… 올리겠습니다.”유월영은 친구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술잔을 들었다.“제가 이 잔을 마시면 내일은 계약서에 도장 찍는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좋아. 어디 마셔봐. 마시면 계약서에 당장 사인하지!”유월영은 잔을 들고 한 사람 한 사람 찾아가서 단숨에 원샷했다. 조서희는 친구가 안쓰러웠지만 마시지 않으면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을 알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다섯 잔 째가 되자 유월영은 이미 비틀거리고 있었다. 평소에 주량이 괜찮은 편이었지만 소은석 방에서 이미 폭탄주를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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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계약서를 받아낸 유월영은 한 손에는 계약서를, 한 손에는 몸도 못 가누는 조서희를 부축하고 소은석과 함께 룸을 나왔다.복도를 둘러보던 소은석이 그녀에게 물었다.“유 비서, 괜찮아? 친구는 좀 어때?”“괜찮아요. 도와줘서 감사했어요.”유월영은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비록 억지로 끌려들어가서 술까지 마셨지만 그가 알맞은 시간에 나타나줘서 위기를 벗어난 것도 사실이었다.처음 보는 그녀의 진솔한 표정에 소은석은 쑥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고맙기는. 전에 나랑 같이 일하자던 말이나 진지하게 고민해 줘.”유월영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고 답했다.그녀는 집까지 데려다 준다는 소은석을 간곡히 거절하고 조서희를 부축해서 술집을 나갔다.소은석은 그녀가 자신의 도움을 진심으로 고마워해 줬다는 사실에 싱글벙글 웃으며 룸으로 돌아갔다.그는 연재준을 보자마자 부루퉁한 얼굴로 물었다.“재준 형, 아까 나 왜 밀쳤어?”연재준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힐끗 바라볼 뿐이었다.소은석은 눈치 없이 웃으며 계속해서 말했다.“하지만 괜찮아. 그 기회에 백마 탄 왕자가 되었으니까. 유 비서가 나한테 고맙다고 내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겠다고 했거든.”서지욱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보았다.술집 직원이 연재준에게 다가와서 공손하게 말했다.“대표님, 운전기사가 입구에 도착했습니다.”유월영은 조서희를 부축해서 길가에 나온 뒤, 택시를 기다렸다.조서희가 울먹이며 사과했다.“미안해, 친구야. 나 때문에 너까지 고생했네.”“그래. 너 때문에 고생 좀 했어. 그러니까 이번에 보너스 받으면 크게 한턱 쏴.”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조서희는 당연히 그러겠다고 흔쾌히 대답했다.둘 다 술기운 때문에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월영아, 네가 예약한 콜택시 차량번호가 어떻게 돼?”유월영은 핸드폰을 힐끗 보고는 대답했다.“뒷번호가 429로 되어 있는데?”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번호가 있었다.조서희가 눈을 빛내며 한 곳을 가리켰다.“저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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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세 여자가 뒤에 타고 연재준은 조수석에 타게 되었다.유월영은 어쩔 수 없이 콜택시를 취소했다.그녀는 이 자리가 가시방석 같았다.단지 자신의 주도권을 주장하고 싶었던 백유진도 그들이 정말 차에 탈 줄은 몰랐기에 적잖이 당황했다.하지만 연재준이 자신의 말 한마디에 그들을 태웠다는 생각에 다시 의기양양해졌다.그래도 어딘가 신경이 쓰여서 백미러로 연재준의 표정을 살폈는데 연재준은 조수석에서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었다.차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여기서 침묵만 지키고 있으면 조서희가 아니었다.연재준도 싫지만 갑자기 끼어든 백유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이 요망한 여자를 어떻게 하면 골탕먹일까 한참 고민했다.그러던 그녀는 앞에 놓인 수제 장식을 가리키며 말했다.“월영아, 저거 왠지 낯익은데 저거 네가 만든 거 아니야?”사실이었지만 유월영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만든 게 아니라 산 거야.”하지만 조서희는 곱게 넘어가 주지 않았다.“저거 네가 만든 거잖아. 며칠 저거 만든다고 영상도 찾아보고 했던 거 나 기억나는데. 그 뒤로 저게 안 보여서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여기 있었구나?”연재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 장식을 힐끗 바라보았다.조서희가 계속해서 떠들었다.“그리고 이 카시트도 네가 산 거잖아. 그때 나한테 검은색 차에 어떤 색상이 좋냐고 물어봤었는데.”백유진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차는 남자의 로망이자 두 번째 집이라고 하는데 이 안의 모든 장식이 유월영이 해준 거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울컥했다.불편해하는 백유진을 보자 조서희는 그제야 갑갑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친구의 속마음을 알지만 유월영은 더 이상 대답해 주지 않았다.대답할 상황도 아니었다. 찬 에어컨 바람이 불어와서 머리가 어지럽고 식은땀이 났다.다리 부상은 거의 다 나았지만 오늘 너무 체력을 쓴 탓인지 갑자기 통증이 심해졌다. 속도 울렁거리고 모든 게 불편했다.하필이면 이때, 백유진이 차가 향하는 방향을 보고 입을 열었다.“대표님, 월영 언니네 집에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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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눈치 빠른 운전기사는 서둘러 차 창을 올려 소리를 차단했다.유월영은 손을 빼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을 귀찮게 해드릴 수는 없죠.”연재준이 말했다.“날 귀찮게 한 게 어디 한두 번이야?”유월영은 한 번도 귀찮게 한 적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더 논쟁하기 싫어서 고개를 끄덕였다.“어쨌든 이제 그런 말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니까요.”연재준이 비웃듯 물었다.“우리가 무슨 사이인데?”유월영은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백유진은 그들이 다시는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겠지만 그녀 역시 그와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그와 같은 공간에 있으면 숨이 막혔다.그녀가 말했다.“대표님, 차멀미가 심해서 차를 타고 가기는 어렵겠어요. 어차피 사는 곳이랑 멀지도 않으니까 걸어서 갈게요. 가능하면 서희만 아파트 입구까지 데려다주세요.”연재준은 짜증이 벌컥 치밀었다.“잔말 말고 타.”“정말 타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그 말을 끝으로 연재준은 차로 돌아가서 출발을 지시했다.조서희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월영이 아직 안 탔는데요!”“걸어서 돌아간대요.”“그래서 그러라고 했어요?”연재준은 백미러로 그녀를 힐끗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조서희가 이를 부드득 갈며 말했다.“그럼 나도 내릴게요.”그녀가 내리자마자 차는 휑하니 떠나가 버렸다. 조서희는 욕설을 퍼부으며 친구에게 다가갔다.그런데 유월영 상태가 이상했다.복부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지며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월영아!”조서희는 다급히 친구에게 달려갔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파랗게 질려 있었다.불길한 예감이 들었다.택시를 잡고 싶었지만 이 시간에 길가에 지나가는 택시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녀는 콜택시 어플을 열었지만 근처에는 건축물도 없어서 출발지점을 정확히 설정할 수 없었다.조서희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이때, 휑하니 떠나갔던 차가 다시 돌아왔다.조서희는 다급히 달려가서 차 창을 두드렸다.“대표님, 빨리 우리 월영이 좀 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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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유월영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숙취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신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가까운 곳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침대머리에 물 있어.”연재준?유월영은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돌렸다. 침대 가까이에 그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대표님이 왜… 여기에 있어요?”그녀는 뒤늦게 자신이 있는 곳이 병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손등에는 아직도 수액을 맞고 있었다.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어요?”연재준이 물었다.“어제 일 하나도 기억 안 나?”“술을 많이 마셔서 취했던 건 기억나요.”속이 울렁거리고 배가 아팠던 것 같은데 집에서 푹 쉬면 나을 일을 병원까지 올 필요가 있었나 싶었다.그녀는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다시 물었다.“어떻게 된 거예요?”연재준이 뜻 모를 표정으로 답했다.“유산했대.”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뜯겨 나가는 것 같았다.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머릿속이 하얘졌다.유산….이미 한 번 경험했고 다시는 없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또 유산이라니?그녀는 바람 불면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천장을 바라보았다.‘내가 아는 유 비서가 이렇게 나약한 사람이었나?’연재준은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농담이야. 생리래.”유월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지금 뭐라고 했어요?”연재준이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생리통에 빈혈인데 음주까지 해서 반응이 심하게 왔다고 하더라. 유 비서 친구가 이상한 소리 지껄이길래 나까지 놀랐잖아.”‘그러니까 그냥 생리통이었다고?’유월영의 안색이 조금씩 돌아왔다.지난번에 유산을 겪고 두 달이나 생리가 안 와서 걱정했는데 하필이면 어제 올 줄이야. 아마 술 취해서 감각이 무뎌졌던 것 같았다.‘다행이다.’연재준이 그녀의 얼굴색을 살피더니 물었다.“다행이라고 생각해?”유월영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대표님은요? 제가 유산일 수도 있다고 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나요?”그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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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수액이 끝나고 간호사가 와서 바늘을 제거하자 유월영은 핸드폰을 꺼내 조서희에게 안부를 전했다.조서희는 출근해야 하기에 병원에 남을 수 없었다.유월영은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너무 졸려 그대로 눈을 감았다.점심 때가 되어 핸드폰이 울렸다.“누구세요?”수화기 너머로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야. 왜 매번 전화할 때마다 내 목소리를 못 알아들어? 내 번호 저장 안 했어?”“은석 씨?”“그래!”유월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죄송해요. 경황이 없어서 저장을 못했어요.”“괜찮아. 나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야. 이번에는 꼭 저장해 줬으면 좋겠어.”소은석은 잔뜩 들뜬 목소리로 떠들어댔다.“나 카톡도 이 번호로 되어 있어. 바로 추가하면 돼. 심심하면 문자 보내.”“알겠어요. 다른 일 없죠?”유월영이 물었다.“별일은 없고 어제 술을 많이 마셨던 거 같은데 괜찮나 해서 전화했어.”“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그럼 점심에 밥이라도 같이 먹자. 내가 그쪽으로 갈게.”어제 위기에서 도와줬던 사람이기에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점심은 제가 사야 할 것 같은데요.”“좋지.”전화를 끊고 퇴원한 유월영은 집으로 가지 않고 백화점에 들러 갈아입을 옷을 구매한 뒤, 화장실로 가서 간단하게 세수를 했다.태생이 미인이었고 피부도 좋았기에 립스틱 하나만 발라도 외출할 수 있었다.그런데 하필 이때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마주칠 줄은 몰랐다.그녀와 소은석이 근처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공교롭게 연재준과 백유진을 만났다.연재준은 새 정장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아마 병원을 나가고 바로 회사로 갔다가 백유진과 밥 먹으러 나온 것 같았다.그들의 위치가 구석진 곳에 있어서 유월영은 모른 척 지나가려 했으나 눈치 없는 소은석이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재준 형!”연재준은 두 사람을 발견하고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소은석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재준 형도 여기 다녀? 잘됐다. 나랑 유 비서도 금방 왔거든. 차라리 합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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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유월영은 그 뒤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식사에 집중했다. 그리고 연재준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소은석과는 거리를 둬야겠다고 다짐했다.그녀는 식사가 끝나고 데려다준다는 소은석의 말을 굳이 거절하지는 않았다.차에 오른 그녀는 그의 연락처를 저장하고 SNS를 팔로우했다. 들어가서 게시물을 잠깐 봤더니 백유진이 말한 문제 사진이 보였다.너무도 오해를 사기 쉬운 글귀였다.아파트 입구에 도착하자 유월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은석 씨, SNS에 올린 사진, 그거 지워주시면 안 될까요?”소은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사진을 왜 지워?”“사람들이 오해할 테니까요.”“그래? 난 별로 오해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유월영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재차 말했다.“지워주세요.”소은석은 입맛을 다시더니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알았어, 알았어. 우리 유 비서가 지우라면 지워야지.”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게시글을 내리고 핸드폰을 내려놓은 소은석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그럼 내일 같이 저녁 먹어!”유월영은 안전벨트를 풀며 덤덤히 말했다.“은석 씨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해 봤는데 저랑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소은석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왜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 난 유 비서만큼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 없다고 생각해. 그리고 어제 진지하게 좋은 쪽으로 고민해 본다고 했으면서 오늘 왜 이러는 거야?”“갑자기 마음이 변한 게 아니라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 본 결과 안 어울린다고 판단했어요. 저보다 적합한 사람을 구하길 바랄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차에서 내렸다.“조심히 가세요. 데려다줘서 감사했습니다.”자존심이 상한 소은석은 대답도 없이 가버렸다.사실 유월영은 한 번도 소은석과 같이 일하는 걸 진지하게 고민한 적 없었다. 단지 너무 매몰차게 거절하기 싫어서 식사 초대에 응했을 뿐이었다.어제 이후로 조금 더 생각해 보려고도 했지만 SNS 사진을 본 뒤로 생각이 바뀌었다.소은석과 같이 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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