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여자가 뒤에 타고 연재준은 조수석에 타게 되었다.유월영은 어쩔 수 없이 콜택시를 취소했다.그녀는 이 자리가 가시방석 같았다.단지 자신의 주도권을 주장하고 싶었던 백유진도 그들이 정말 차에 탈 줄은 몰랐기에 적잖이 당황했다.하지만 연재준이 자신의 말 한마디에 그들을 태웠다는 생각에 다시 의기양양해졌다.그래도 어딘가 신경이 쓰여서 백미러로 연재준의 표정을 살폈는데 연재준은 조수석에서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었다.차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여기서 침묵만 지키고 있으면 조서희가 아니었다.연재준도 싫지만 갑자기 끼어든 백유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이 요망한 여자를 어떻게 하면 골탕먹일까 한참 고민했다.그러던 그녀는 앞에 놓인 수제 장식을 가리키며 말했다.“월영아, 저거 왠지 낯익은데 저거 네가 만든 거 아니야?”사실이었지만 유월영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만든 게 아니라 산 거야.”하지만 조서희는 곱게 넘어가 주지 않았다.“저거 네가 만든 거잖아. 며칠 저거 만든다고 영상도 찾아보고 했던 거 나 기억나는데. 그 뒤로 저게 안 보여서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여기 있었구나?”연재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 장식을 힐끗 바라보았다.조서희가 계속해서 떠들었다.“그리고 이 카시트도 네가 산 거잖아. 그때 나한테 검은색 차에 어떤 색상이 좋냐고 물어봤었는데.”백유진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차는 남자의 로망이자 두 번째 집이라고 하는데 이 안의 모든 장식이 유월영이 해준 거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울컥했다.불편해하는 백유진을 보자 조서희는 그제야 갑갑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친구의 속마음을 알지만 유월영은 더 이상 대답해 주지 않았다.대답할 상황도 아니었다. 찬 에어컨 바람이 불어와서 머리가 어지럽고 식은땀이 났다.다리 부상은 거의 다 나았지만 오늘 너무 체력을 쓴 탓인지 갑자기 통증이 심해졌다. 속도 울렁거리고 모든 게 불편했다.하필이면 이때, 백유진이 차가 향하는 방향을 보고 입을 열었다.“대표님, 월영 언니네 집에 먼
눈치 빠른 운전기사는 서둘러 차 창을 올려 소리를 차단했다.유월영은 손을 빼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을 귀찮게 해드릴 수는 없죠.”연재준이 말했다.“날 귀찮게 한 게 어디 한두 번이야?”유월영은 한 번도 귀찮게 한 적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더 논쟁하기 싫어서 고개를 끄덕였다.“어쨌든 이제 그런 말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니까요.”연재준이 비웃듯 물었다.“우리가 무슨 사이인데?”유월영은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백유진은 그들이 다시는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겠지만 그녀 역시 그와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그와 같은 공간에 있으면 숨이 막혔다.그녀가 말했다.“대표님, 차멀미가 심해서 차를 타고 가기는 어렵겠어요. 어차피 사는 곳이랑 멀지도 않으니까 걸어서 갈게요. 가능하면 서희만 아파트 입구까지 데려다주세요.”연재준은 짜증이 벌컥 치밀었다.“잔말 말고 타.”“정말 타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그 말을 끝으로 연재준은 차로 돌아가서 출발을 지시했다.조서희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월영이 아직 안 탔는데요!”“걸어서 돌아간대요.”“그래서 그러라고 했어요?”연재준은 백미러로 그녀를 힐끗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조서희가 이를 부드득 갈며 말했다.“그럼 나도 내릴게요.”그녀가 내리자마자 차는 휑하니 떠나가 버렸다. 조서희는 욕설을 퍼부으며 친구에게 다가갔다.그런데 유월영 상태가 이상했다.복부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지며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월영아!”조서희는 다급히 친구에게 달려갔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파랗게 질려 있었다.불길한 예감이 들었다.택시를 잡고 싶었지만 이 시간에 길가에 지나가는 택시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녀는 콜택시 어플을 열었지만 근처에는 건축물도 없어서 출발지점을 정확히 설정할 수 없었다.조서희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이때, 휑하니 떠나갔던 차가 다시 돌아왔다.조서희는 다급히 달려가서 차 창을 두드렸다.“대표님, 빨리 우리 월영이 좀 살려
유월영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숙취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신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가까운 곳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침대머리에 물 있어.”연재준?유월영은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돌렸다. 침대 가까이에 그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대표님이 왜… 여기에 있어요?”그녀는 뒤늦게 자신이 있는 곳이 병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손등에는 아직도 수액을 맞고 있었다.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어요?”연재준이 물었다.“어제 일 하나도 기억 안 나?”“술을 많이 마셔서 취했던 건 기억나요.”속이 울렁거리고 배가 아팠던 것 같은데 집에서 푹 쉬면 나을 일을 병원까지 올 필요가 있었나 싶었다.그녀는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다시 물었다.“어떻게 된 거예요?”연재준이 뜻 모를 표정으로 답했다.“유산했대.”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뜯겨 나가는 것 같았다.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머릿속이 하얘졌다.유산….이미 한 번 경험했고 다시는 없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또 유산이라니?그녀는 바람 불면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천장을 바라보았다.‘내가 아는 유 비서가 이렇게 나약한 사람이었나?’연재준은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농담이야. 생리래.”유월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지금 뭐라고 했어요?”연재준이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생리통에 빈혈인데 음주까지 해서 반응이 심하게 왔다고 하더라. 유 비서 친구가 이상한 소리 지껄이길래 나까지 놀랐잖아.”‘그러니까 그냥 생리통이었다고?’유월영의 안색이 조금씩 돌아왔다.지난번에 유산을 겪고 두 달이나 생리가 안 와서 걱정했는데 하필이면 어제 올 줄이야. 아마 술 취해서 감각이 무뎌졌던 것 같았다.‘다행이다.’연재준이 그녀의 얼굴색을 살피더니 물었다.“다행이라고 생각해?”유월영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대표님은요? 제가 유산일 수도 있다고 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나요?”그는 그
수액이 끝나고 간호사가 와서 바늘을 제거하자 유월영은 핸드폰을 꺼내 조서희에게 안부를 전했다.조서희는 출근해야 하기에 병원에 남을 수 없었다.유월영은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너무 졸려 그대로 눈을 감았다.점심 때가 되어 핸드폰이 울렸다.“누구세요?”수화기 너머로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야. 왜 매번 전화할 때마다 내 목소리를 못 알아들어? 내 번호 저장 안 했어?”“은석 씨?”“그래!”유월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죄송해요. 경황이 없어서 저장을 못했어요.”“괜찮아. 나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야. 이번에는 꼭 저장해 줬으면 좋겠어.”소은석은 잔뜩 들뜬 목소리로 떠들어댔다.“나 카톡도 이 번호로 되어 있어. 바로 추가하면 돼. 심심하면 문자 보내.”“알겠어요. 다른 일 없죠?”유월영이 물었다.“별일은 없고 어제 술을 많이 마셨던 거 같은데 괜찮나 해서 전화했어.”“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그럼 점심에 밥이라도 같이 먹자. 내가 그쪽으로 갈게.”어제 위기에서 도와줬던 사람이기에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점심은 제가 사야 할 것 같은데요.”“좋지.”전화를 끊고 퇴원한 유월영은 집으로 가지 않고 백화점에 들러 갈아입을 옷을 구매한 뒤, 화장실로 가서 간단하게 세수를 했다.태생이 미인이었고 피부도 좋았기에 립스틱 하나만 발라도 외출할 수 있었다.그런데 하필 이때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마주칠 줄은 몰랐다.그녀와 소은석이 근처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공교롭게 연재준과 백유진을 만났다.연재준은 새 정장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아마 병원을 나가고 바로 회사로 갔다가 백유진과 밥 먹으러 나온 것 같았다.그들의 위치가 구석진 곳에 있어서 유월영은 모른 척 지나가려 했으나 눈치 없는 소은석이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재준 형!”연재준은 두 사람을 발견하고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소은석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재준 형도 여기 다녀? 잘됐다. 나랑 유 비서도 금방 왔거든. 차라리 합석하
유월영은 그 뒤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식사에 집중했다. 그리고 연재준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소은석과는 거리를 둬야겠다고 다짐했다.그녀는 식사가 끝나고 데려다준다는 소은석의 말을 굳이 거절하지는 않았다.차에 오른 그녀는 그의 연락처를 저장하고 SNS를 팔로우했다. 들어가서 게시물을 잠깐 봤더니 백유진이 말한 문제 사진이 보였다.너무도 오해를 사기 쉬운 글귀였다.아파트 입구에 도착하자 유월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은석 씨, SNS에 올린 사진, 그거 지워주시면 안 될까요?”소은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사진을 왜 지워?”“사람들이 오해할 테니까요.”“그래? 난 별로 오해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유월영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재차 말했다.“지워주세요.”소은석은 입맛을 다시더니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알았어, 알았어. 우리 유 비서가 지우라면 지워야지.”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게시글을 내리고 핸드폰을 내려놓은 소은석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그럼 내일 같이 저녁 먹어!”유월영은 안전벨트를 풀며 덤덤히 말했다.“은석 씨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해 봤는데 저랑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소은석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왜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 난 유 비서만큼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 없다고 생각해. 그리고 어제 진지하게 좋은 쪽으로 고민해 본다고 했으면서 오늘 왜 이러는 거야?”“갑자기 마음이 변한 게 아니라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 본 결과 안 어울린다고 판단했어요. 저보다 적합한 사람을 구하길 바랄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차에서 내렸다.“조심히 가세요. 데려다줘서 감사했습니다.”자존심이 상한 소은석은 대답도 없이 가버렸다.사실 유월영은 한 번도 소은석과 같이 일하는 걸 진지하게 고민한 적 없었다. 단지 너무 매몰차게 거절하기 싫어서 식사 초대에 응했을 뿐이었다.어제 이후로 조금 더 생각해 보려고도 했지만 SNS 사진을 본 뒤로 생각이 바뀌었다.소은석과 같이 일하
본인 일가 회사에 들어왔던 소운은 지금 소사장이라 불린다. 그래서인지 그의 아버지는 이 생일파티를 빌어 그를 정식으로 협력 파트너에게 소개시켜 주고싶어 했다. 그저 여성 파트너가 필요했던 거였다면 소운의 연락 한번으로도 충분했겠지만 이번엔 사뭇 달랐다. 그의 여자친구들이라곤 전부 어리고 예쁘기만 한 모델이거나 인플루언서들이니 그들이 상권 응대 경험이 어디 있을까. 결코 첫 등장부터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기에 그는 콕 집어서 무조건 루장월을 원했다.루장월이 비운 그룹의 수석 비서 출신인 건 모두가 공공연히 아는 사실이니 어느 누가 프로페셔널한 면에서 그녀를 따라 잡을수 있단 말인가?!루장월은 잠시 고민에 빠지더니 이내 별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소 사장님, 사장님이 말씀하신 거예요. 제가 사장님 생일파티에 가서 사장님 도와 이 관문만 넘기면 그 뒤엔 저희 둘 더 이상 빚진거 없기로요.”“그럼!”......마침 다들 바에 있었던지라 입이 근질근질해난 소운은 루장월의 응답을 받자마자 그새를 못 참고 이 사실을 친구들에게 공유했다.“루 아가씨가 내 부탁 들어주겠대!”수옥조차도 조금은 의외라는 듯 말했다.“그 분 이미 너 거절하지 않았었나?”“여자들은 말야 속으론 좋으면서 겉으론 싫은 척 하거든. 이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내일 아침 일찍 사람 보내서 아가씨한테 예복 전해줘라고 해야겠어. 예쁘게 꽃단장하고 부담없이 내 생일파티에 참여하도록 말이지!”수옥이 그를 두어번 힐끗 쳐다본다.“너 애 좀 쓴다.”“그럼!”소운의 시선은 곧장 구석에 있는 문연주에게로 향했다.“연주 형, 왜 도통 말이 없어?”문연주가 천천히 눈꺼풀에 힘을 준다 . 칼에 베일 듯 날카롭고 수려한 이목구비, 눈가엔 그 어떤 온기도 남아있지 않은 채로 조용히 술 한 모금을 들이킨다. 엽혁연이 방해하지 말라고 소운을 다그쳤다.“쟤 저녁에 집 불려가서 밥 먹었어, 아님 여기 왜 왔겠냐?”제 아무리 눈치 없는 소운이라 해도 알아챌 수 있었다.매번 집에 돌아갈 때면 문
때마침 소운이 그녀를 데리러 나왔고 루장월은 바로 소운을 따라 가버렸다.그녀의 등 역시 상당 부분 노출이 돼있었다. 날개뼈며 허리라인이며, 걸음걸이는 또 어찌나 사뿐사뿐한지 소리 없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백유도 문주연의 눈빛을 주의깊게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연신 고개를 숙여 자신을 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그녀 역시 약한 편에 속하긴 했다. 하지만 보기 거북하게 약하달까, 듣기 좋게 말하면 그냥 학생 몸매였다. 문연주가 그녀에게 선물한 예복은 모 고등학교에서 정한 소녀풍이다. 쉬폰 스커트, 일자 어깨에 다이아몬드와 꽃 장식. 여리여리한 선녀 같기도 했다.원래는 너무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루장월한테 비교하고 나니 그녀의 뇌리에는 묘하게 “심심하다”는 단어가 맴돌았다. 유독 문연주의 눈에서 일종의 남자가 여자에게 느끼는 소유욕을 보고 난 뒤로는 더욱 아랫입술을 꽉 깨물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장월 언니 그날 분명 소운이랑 그냥 평범한 친구라고 하지 않았나, 언니 드레스 소운이랑 커플룩 아니야?”“아마도.” 문연주가 냉랭하게 대답했다.백유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린다.“장월 언니 진짜 예쁘네.”문연주가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는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몇마디 툭 내뱉는다.“너무 평범해. 그래도 여자는 청순한게 좋아.”백유의 입꼬리가 주체 못하고 올라간다, 그리고는 그를 향해 청순하게 웃어보였다.그녀는 문연주가 자신의 청순함을 좋게 본 것이라는걸 알고있었다.문연주가 말하는 소위 “평범하다”는 다른 사람들에겐 백퍼센트 화려하고 아름답다는 뜻이었다.과장 하나 보태는것 없이, 주장월이 파티장에 나타났을땐 단번에 모든 귀빈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수많은 남정네들의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따가운 눈총을 받은 소운이었지만 체면은 배로 치켜세워졌다. 그리고는 루장월에게 돌직구를 날렸다.“장월아, 넌 내가 본 제일 제일 제일 예쁜 여자야!”루장월이 웃으며 말했다.“도련님 나 너무 추켜세우지 마요.”“진짜
다음 순간, 그녀는 공격성이 다분한 웬 남자의 숨결에 압도되어 버렸다.“누구 찾아? 소운? 난 전에 왜 너희 둘 사이가 이토록 친근한 걸 몰랐을까? 나 몰래 걔랑 얼만큼이나 연락했어? 응?”“......문 사장님?”루장월은 충격에 정신줄을 놓은 듯이 말한다.문연주의 두 눈은 어둠 속에서도 빠져 들어갈 것마냥 그윽했다.“응.”루장월이 옅은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안도감은 금세 긴장감으로 바뀌었고 더욱 거세게 저항을 해댔다.“사장님, 저 좀 놔주세요.”“소운한테 관심이라도 생겼나 봐?”문연주는 그녀의 속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녀가 소운을 향해 웃어 보일때 부터 전혀 관심이 없는걸 단번에 알아챘으니 말이다.그가 뭐라 하든 관심 없었던 루장월은 소리 없이 몸부림만 쳐댔다. 그녀는 그저 소운에게 천진난만한 아이같은 귀여움이 있는것 같다고 여길 뿐이었다. 문연주는 조롱하듯 웃어 보이며 그녀를 곧장 창고 창문앞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창문 사이 작은 틈을 가리키며 말했다.“두 눈 똑바로 뜨고 잘 봐.”루장월의 시선이 홀린 듯 바깥 쪽으로 향한다.시선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인적 드문 뒤쪽 정원의 산 모형 속이었다. 거기에는 소운이 한 여자를 누르고 있었고 여자는 연신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화장실에 다녀온 그 짧은 얼마 사이에 벌써 다른 여자랑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니.천진난만한 귀여움? 뭔가 단단히 오해를 했나 보다, 이게 바로 재벌집 도련님의 민낯인 것을.루장월은 구역질 날 것 같은 걸 간신히 참고 기회를 잡아 문연주를 있는 힘껏 밀쳐냈다.“ 사장님 너무 앞서 나가셨어요. 전 소 도련님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다. 그저 도련님이 절 도와주신 적이 있었기에 오늘 밤 저도 도와드리려고 온 것 뿐이에요. 도련님이 뭘 하든 저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그러면서 그녀는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문고리에 손이 닿기도 전, 또 다시 그 남자에 의해 벽에 눌리고 말았다.슬슬 화가 나기 시작한 루장월이 입을 열어 그
“아니.”현시우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남자들끼리의 문제일 뿐이야. 별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유월영이 화를 내며 말했다.“별거 아니긴 개뿔!”현시우는 예상밖의 반응에 잠시 멍해졌다.유월영이 이렇게 거친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비록 심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위해 그랬다는 사실에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월영아, 욕은 하지 마.”“할 거야! 너도 싸움질을 했으면서 내가 욕하는 걸 뭐라고 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유월영은 그의 상처를 가까이서 살펴보며 점점 더 화가 났다.“도대체 너랑 싸운 사람이 누구야? 왜 싸운 건데?”현시우는 말하고 싶지 않아 아픈 팔다리를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월영아, 와서 안아줘.”“꿈 깨!”옆방에서 의무실 선생이 연재준의 얼굴에 멍이 든 곳에 약을 바르려고 했지만 그는 무표정하게 이를 피하며 말했다.“필요 없어요. 그냥 나가세요.”의무실 선생은 잠시 망설였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료 상자를 챙겨 방을 나갔다.두 소년의 부상은 비슷했다. 뼈나 근육에는 이상이 없었고 학교 보안요원이 빠르게 싸움을 말려 모두 표면적인 상처에 불과했다.방문이 닫히지 않았기 때문에 옆방에서 들리는 대화가 연재준의 귀에 고스란히 들려왔다.유월영이 현시우를 걱정하며 하는 말들이 하나하나 그의 귀에 들어왔다.연재준은 그 말을 들으며 살을 도려내는 고통이 있다면 이와 같을 거라고 느꼈다.학교는 싸움에 대해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고 다만 두 학생의 부모에게만 이 사실을 알렸다.연민철은 이미 아들 연재준을 신경 쓰지 않았고 반면 현시우의 가족은 이 소식에 크게 놀랐다.현시우는 어릴 때부터 감정 기복이 별로 없고 차분한 성격으로 한 번도 싸움을 하거나 심지어 다툰 적도 없었다.그런 그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것도 학교 안에서 참지 못하고 싸움을 벌인 건지 현씨 가문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당시, 현시우의 어머니인 연회 부인은 현씨 가문에서 사모님으로 은둔하며 지냈다.하지
현시우가 유월영을 집까지 데려다주며 단호하게 말했다.“내일 내가 대신 병가를 낼 테니까 너는 집에서 푹 쉬어. 책도 보지 말고 문제도 풀지 마.”유월영은 그의 강압적인 태도에 살짝 당황하며 대답했다.“괜찮아. 나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의사 말 못 들었어? 네가 과로로 쓰러진 거라고. 시간이 부족하면 중요하지 않은 일부터 줄여야 해. 월영아, 모든 걸 다 해내려고 하지 마. 그리고 모든 걸 완벽하게 하려고도 하지 마.”현시우는 그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유월영은 항상 모든 일을 포기하지 못하고 최선을 다해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집착과 강박은 결국 그녀를 지치게 만들고 말았다.사람의 몸은 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유월영은 신중히 고민한 끝에 어머니에게 댄스 수업을 그만두겠다고 말했고 학교의 댄스 동아리도 탈퇴하기로 결정했다.춤은 그녀에게 단순한 취미였지만 이제는 정상적인 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었기에 잠시 내려놓는 것이 맞았다. 대학에 가거나 졸업 후 여유가 생기면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주말과 월요일까지 3일이 지나고 유월영은 학교로 돌아왔다. 몸 상태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감기도 거의 나아 약간의 콧물만 남아 있었다.유월영이 등교한 날, 연재준은 유월영의 교실 앞을 지나쳤다. 친구들과 웃으며 대화하는 그녀의 얼굴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발걸음을 돌렸다.병원에서 그는 원래 깨어난 유월영에게 잃어버린 옥불을 따질 계획이었지만 아버지로부터 온 전화로 인해 급히 돌아가야 했다. 부모님의 이혼 문제 논의에 꼭 참석해야 했던 것이다.그리고 익명의 영웅이 될 생각이 없었던 그는 방과 후 그녀를 찾아갈 계획이었다.연재준이 유월영의 반으로 향하던 중, 현시우와 마주쳤다. 연재준은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치려 했지만 현시우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그날 월영이를 병원으로 데려다줘서 고마워.”연재준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고맙다면 네가 아니라 본인이 와서 말해야지. 넌 대리인이야?”현시우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담담히
운전기사는 연재준의 상태를 걱정하며 우산을 들어주었지만 연재준은 비에 젖은 창백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그는 다시 병원으로 향했고 병실에 도착했을 때 유월영은 링거를 다 맞고도 여전히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연재준은 침대 옆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고 그의 몸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한참을 서 있던 그는 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유월영, 이제 너는 나한테 빚졌어.”그녀 때문에 잃어버린 것은 그녀가 반드시 갚아야 할 것이었다.얼마 후, 유월영이 천천히 눈을 떴다. 침대 앞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물웅덩이와 함께 현시우가 앉아 있었다.“...”유월영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병원이었지만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목이 쉬고 아픈 느낌이 들었다.“목 아파? 편도선염이야. 당분간 말하지 마.”현시우는 탁자에 있던 따뜻한 물을 들고 한 팔로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을 한 모금씩 먹이며 부드럽게 상황을 설명했다.“너 열이 나서 길에서 쓰러졌어. 다행히 누군가 널 병원으로 데려왔어.”“기절했다고?”유월영은 놀란 눈으로 현시우를 바라봤다. 폭우 속에서 길을 헤매던 기억은 있었지만 쓰러졌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따뜻한 물이 목을 적시니 조금은 나아졌지만 여전히 목이 아팠다.유월영이 억지로 몇 마디를 이어갔다.“누가...날 병원에 데려왔어?”현시우는 물컵을 내려놓고 그녀가 좀 더 편히 누울 수 있도록 베개를 정리했다.“간호사 말로는 너랑 같은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었는데 이름을 남기지 않았대.”“시험 끝나고 널 찾으러 갔는데 네 짝꿍이 네가 집에 갔다고 했어. 근데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걱정돼서 네 집으로 갔거든. 근데 네가 없더라.”유월영의 가족조차 그녀가 어디 갔는지 몰랐고 현시우가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위험에 빠진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가족들과 함께 학교에서 집까지의 길을 수색했다. 그러다 편
연재준의 화난 표정은 유월영을 바라보며 점점 누그러졌다.그녀는 너무 말랐고 얼굴이 창백했다. 입술에는 핏기가 없었으며 온몸이 빗물로 흥건해져 안쓰럽기 그지없었다.게다가 두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건 드문 일이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수건을 들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과 목에 흐르는 빗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다 부드러운 피부에 손이 닿자 순간적으로 손을 홱 뒤로 뺐다.소년의 얼굴에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귓불은 점점 붉어졌다.연재준은 숨을 멈추고 다시 유월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고 그는 그제야 살짝 안도했다.그녀가 자신을 기회를 노리는 이상한 변태라고 생각하는 건 원하지 않았다.연재준도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다.지난 18년간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던 자신이 왜 교내 축제에서 춤추는 그녀를 보고 이렇게 빠져들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유월영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너 그렇게 예쁘지도 않아. 사람 보는 눈도 별로고.”“왜 하필 현시우 같은 놈을 좋아하는 거야? 사람들은 항상 나랑 현시우를 비교하잖아. 그러니 너도 내 이름을 들어봤을 텐데...내가 너 대신 농구공도 막아줬고 도서관에서 햇빛도 가려줬잖아. 다 잊은 거야?”그는 자신의 기억을 곱씹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우리 함께 변태 선생을 잡은 적도 있잖아. 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거지...왜 한 번도 날 찾지 않았어?”“내가 너 앞을 그렇게 여러 번 지나갔는데 넌 왜 나한테 아는 척도 안 했어? 현시우가 나랑 친해지지 말라고 해서 그런 거야? 너 그렇게 말을 잘 듣는 아이였어?”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중얼거렸다.“나도 나름 괜찮게 생겼잖아. 남자 친구를 바꿔보는 게 어때? 내가 현시우보다 너한테 더 잘해줄 자신 있는데. 유월영, 내 말 들려?”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그는 이렇게 많은 말을 했지만 유월영은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연재준은 그녀가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
유월영은 줄곧 모범생이었다. 지각이나 조퇴는커녕 항상 성적도 우수했기에 선생님들은 항상 그녀를 신뢰했다. 그래서 그녀가 조퇴를 요청하자 선생님은 별다른 질문 없이 허락해 주었다.다만 유월영의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자 선생님은 부모님께 연락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유월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그녀는 어머니가 자전거를 탈 줄 모르고 아버지는 성격이 급했기에 아버지와 접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게다가 선생님은 그녀와 현시우가 가까운 사이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사적인 문제에 간섭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이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발언권이 크지 않았다.선생님은 현시우가 차량을 보내줄 것이라고 짐작하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조퇴 허가서를 작성해 주었다.“비가 많이 올 수도 있으니 밖에 오래 머물지 말고 빨리 집으로 가렴. 내일도 몸이 안 좋으면 꼭 병가를 내고 쉬어.”“감사합니다, 선생님.”갑작스러운 폭우가 내렸지만 유월영은 현시우에게 연락하지 않았다.그녀는 어젯밤 이미 그가 오늘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고작 20분 거리인데 그를 찾는다 건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다.비가 온다고 해도 우산을 가지고 있으니 괜찮을 거라 여겼다.그러나 유월영은 집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힘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갑작스러운 폭우가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쏟아졌고 강풍과 빗물 때문에 숨쉬기조차 어려웠다.유월영은 허둥지둥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쳤지만 강한 바람에 우산이 뒤집히고 순식간에 옷이 젖어버렸다.앞이 점점 보이지 않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휘청였다.그때 멀리서 날카로운 경적이 들렸다.빠르게 달려오는 트럭을 발견한 유월영이 급히 뒤로 물러섰지만 발밑에서 미끄러운 무언가를 밟아 넘어질 뻔했다.그 순간 강한 손길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그 사람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유월영은 그의 가슴에 부딪히며 싸한 솔잎 향이 풍겨왔다.본능적으로 그의
“준비는 다 끝난 거예요? 거주지, 의사, 그리고 돌봐줄 사람까지.”연재준이 물었다.“그래. 신 씨 아저씨가 다 준비해 주셨어.”어머니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래요.”신씨 아저씨라...연재준의 어머니는 내심 죄책감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묶어놓은 족쇄에서 벗어나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됐다.하지만 아들은 비록 성숙하고 독립적으로 보이더라도 아직 고등학생일 뿐이었고 과연 그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재준아, 걱정하지 마. 너희 아빠랑 이혼 합의서에 분명히 명시했어. 그가 재혼하더라도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도록. 연씨 가문과 해운 그룹은 앞으로 반드시 네 것이 될 거야.”이것이 그녀가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연재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는 지금 가문과 해운 그룹에 큰 미련이 없었다. 만약 정말 필요하다면 아버지가 열 명, 스무 명의 자식을 더 낳더라도 자신의 힘으로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가 굳이 애쓸 필요는 없었다.그는 마지막으로 허리를 굽혀 어머니를 안아주며 말했다.“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몸 잘 돌보세요. 방학 때 시간이 나면 찾아갈게요.”어머니는 감동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상자를 꺼냈다.“이걸 네게 주려고 가져왔어.”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투명하고 맑은 옥불이 들어 있었다.연재준은 그것을 알아보았다.“외할머니께서 남기신 거잖아요.”“그래. 외할머니께서 법사에게 받은 거라 아주 영험하다고 하셨어. 평안을 빌어주는 거야.”연재준은 다시 어머니에게 돌려주며 말했다.“어머니가 갖고 계세요.”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가 가지고 다니면 내가 마음이 놓일 것 같아.”결국 연재준은 옥불을 꺼내 목에 걸고 어머니를 배웅했다.차가 떠난 후, 그는 옥불을 교복 안쪽에 넣어 피부에 닿도록 하고 학교로 들어갔다.평소에도 말수가 적던 그는 오늘따라 더욱 차갑고 냉랭한 분위기를 풍겼다.쉬는 시간에 평소 그와 친했던 몇몇 친구
아침 6시 45분.유월영은 학교로 걸어가던 중 그녀의 짝꿍을 만나 두 사람이 함께 걸었다. 하지만 오늘 유월영의 상태는 조금 축 처져 보였고 짝꿍도 이를 알아차렸다.“너 어디 아픈 거야? 어젯밤 또 늦게까지 문제집 풀었어?”“아니야, 어젯밤은 꽤 일찍 잤는데 그냥 좀 어지러워. 왜 그런지 모르겠어.”짝꿍이 그녀의 이마를 만져봤지만 열은 없었다.“나 페퍼민트 오일 가져왔는데, 발라줄까?”“좋아, 고마워.”“뭘 이런 걸로.”유월영은 월반으로 들어온 학생이라 반에서 나이가 가장 어렸고 짝꿍보다도 두 살 어리니 마치 어린 여동생 같았다.페퍼민트 오일을 바른 후 짝꿍에게 돌려줄 때, 짝꿍의 시선은 먼 곳에 가 있었다.“저기 차 옆에서 누군가랑 얘기하고 있는 남학생이 연재준 아니야. 주변에 경호원들도 지키고 있네.”유월영은 제대로 듣지 못하고 짝꿍이 아는 사람을 본 줄 알고 물었다.“그럼 가서 인사라도 할래?”짝꿍은 과장되게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누가 감히 그래!”아무도 연재준에게 괜히 인사하러 가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짝꿍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빨리 가자, 빨리!”하지만 유월영은 달리자 머리가 더 아픈 느낌이 들었다.연재준은 고개를 돌리다 우연히 소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치마가 바람에 살짝 펴지며 만들어낸 곡선을 본 그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재준아.”차 안에서 여자가 그를 불렀다.연재준은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차 안을 바라보며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두 분이 합쳐서 일흔 살이나 되셨는데 아직도 스스로 내린 결정에 책임질 수 없다면 그동안 헛산 거예요.”여자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내가 정말 참을 만큼 참아왔어. 하지만 요즘 네 아빠가 자기 비서랑 동거를 시작했어. 더는 못 견디겠어, 미칠 것 같아. 나 정말 이혼해야겠어. 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내가 진짜로 미쳐버릴 거야.”연재준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몸 안에서 느껴지는 그 애매한 아픔을 완화하려 했다.이 여자는 그의 친어
연재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고 현시우가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이러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너도 알 텐데, 유월영은 내 여자 친구야.”연재준은 그제야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나랑 무슨 상관인데.”그리고는 그들을 지나쳐 곧장 걸어갔다.현시우의 친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시우야, 쟤네 너희 집이랑 관계 좋은 거 아니었어?”현시우가 미묘하게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그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거든. 그래서 더 마음에 안 들어.”그 감정은 꼭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마음에 들지 않고 타고난 기운이 맞지 않아 본능적으로 싫어지기도 한다.친구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그런데 걔가 유월영을 좋아한다니 좀 의외네. 전에 누가 춤 동아리에서 걔 봤다고 해서 그냥 지나가다가 본 줄 알았는데, 사실 월영이를 보러 간 거였나 봐.”현시우가 드물게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월영이는 걔가 감히 좋아할 만한 사람이 아니야.”점심시간유월영은 짝꿍과 함께 식당으로 가며 점심으로 뭘 먹을지 고민하고 있었다.학교의 급식은 맛있기로 유명해서 매일 ‘어떤 메뉴를 선택할까’라는 행복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두 여학생은 진지하게 메뉴를 논의하느라 뒤에 있는 사람들을 알아채지 못했다.“저 여자애 현시우 여자 친구 아니야?”옆에 있던 친구의 말에 연재준이 무심하게 대답했다.“걔가 네 귀에 대고 말하던? 유월영이 자기 여자 친구라고?”“그건 아니고. 현시우가 방과 후마다 월영이를 집에 데려다주고 월영이도 자주 현시우 보러 반에 오잖아. 지난 주말에는 놀이공원에서 둘이 같이 있는 걸 본 사람도 있다던데. 이게 여자 친구 아니면 뭐겠어? 남매겠냐?”연재준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단 한 마디를 내뱉었다.“학생 때 연애하면 좋을 게 없어.”친구는 말문이 막혔다.“너랑 연애하는 것도 아닌데...하긴 너랑 연애할 용기 있는 사람도 없잖아.”“...”연재준은 그를 무시하고 성큼성
“어쩔 수 없지.”현시우는 처음부터 그녀와 다툴 생각조차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절대 그녀를 이길 수 없었다. 특히, 유월영의 기분이 나빠지기라도 하면 그는 바로 달래기 바빴다.현시우가 텀블러 뚜껑을 열어 건네며 말했다.“마셔. 내가 직접 탄 거야. 그러니 꼭 다 마셔야 해.”유월영은 평소 물을 잘 마시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현시우는 매일 아침 그녀에게 물을 챙겨주기 시작했다. 마치 풋풋한 남자 친구가 도시락을 준비하듯이.유월영이 마지못해 텀블러를 받아서 들며 물었다.“이게 무슨 물이야?”“귤이랑 레몬을 넣어 우린 거야. 네가 좋아하는 새콤달콤한 맛이지. 맛있어.”그녀가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따뜻하네?”현시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찬물은 몸에 안 좋아.”유월영이 투덜댔다.“넌 왜 우리 아빠보다 더 아빠 같아? 내 잠자는 거, 물 마시는 거, 심지어 찬 거 먹는 것까지 간섭하잖아.”현시우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장난스레 말했다.“어제는 오빠라고 부르라고 해도 안 부르더니, 오늘은 Daddy라고 부르고 싶어?”유월영은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Father와 Daddy가 미묘하게 다른 뜻을 가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개방적인 사람이 아니었기에 현시우의 농담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이내 그를 쫓아가며 때리기 시작했다.현시우는 웃으며 그녀의 두 손을 잡아 자신의 무릎 위로 끌어올렸다. 둘이 장난을 치고 있던 그 순간, 교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유월영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갈색 농구공이 바닥을 굴러 책상에 부딪혔다.“...이게 뭐야?”현시우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누군가 농구를 하고 있네.”“복도에서?”유월영이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현시우가 짤막하게 대답했다.“날이 어두워졌으니 집에 데려다줄게.”유월영은 문득 중요한 걸 떠올렸다.“먼저 이 문제 푸는 거 가르쳐줘.”현시우는 펜을 쥔 채 투덜댔다.“가끔 진심으로 의심스러워. 너 나를 공짜 가정교사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