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를 받아낸 유월영은 한 손에는 계약서를, 한 손에는 몸도 못 가누는 조서희를 부축하고 소은석과 함께 룸을 나왔다.복도를 둘러보던 소은석이 그녀에게 물었다.“유 비서, 괜찮아? 친구는 좀 어때?”“괜찮아요. 도와줘서 감사했어요.”유월영은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비록 억지로 끌려들어가서 술까지 마셨지만 그가 알맞은 시간에 나타나줘서 위기를 벗어난 것도 사실이었다.처음 보는 그녀의 진솔한 표정에 소은석은 쑥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고맙기는. 전에 나랑 같이 일하자던 말이나 진지하게 고민해 줘.”유월영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고 답했다.그녀는 집까지 데려다 준다는 소은석을 간곡히 거절하고 조서희를 부축해서 술집을 나갔다.소은석은 그녀가 자신의 도움을 진심으로 고마워해 줬다는 사실에 싱글벙글 웃으며 룸으로 돌아갔다.그는 연재준을 보자마자 부루퉁한 얼굴로 물었다.“재준 형, 아까 나 왜 밀쳤어?”연재준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힐끗 바라볼 뿐이었다.소은석은 눈치 없이 웃으며 계속해서 말했다.“하지만 괜찮아. 그 기회에 백마 탄 왕자가 되었으니까. 유 비서가 나한테 고맙다고 내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겠다고 했거든.”서지욱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보았다.술집 직원이 연재준에게 다가와서 공손하게 말했다.“대표님, 운전기사가 입구에 도착했습니다.”유월영은 조서희를 부축해서 길가에 나온 뒤, 택시를 기다렸다.조서희가 울먹이며 사과했다.“미안해, 친구야. 나 때문에 너까지 고생했네.”“그래. 너 때문에 고생 좀 했어. 그러니까 이번에 보너스 받으면 크게 한턱 쏴.”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조서희는 당연히 그러겠다고 흔쾌히 대답했다.둘 다 술기운 때문에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월영아, 네가 예약한 콜택시 차량번호가 어떻게 돼?”유월영은 핸드폰을 힐끗 보고는 대답했다.“뒷번호가 429로 되어 있는데?”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번호가 있었다.조서희가 눈을 빛내며 한 곳을 가리켰다.“저기 있어
세 여자가 뒤에 타고 연재준은 조수석에 타게 되었다.유월영은 어쩔 수 없이 콜택시를 취소했다.그녀는 이 자리가 가시방석 같았다.단지 자신의 주도권을 주장하고 싶었던 백유진도 그들이 정말 차에 탈 줄은 몰랐기에 적잖이 당황했다.하지만 연재준이 자신의 말 한마디에 그들을 태웠다는 생각에 다시 의기양양해졌다.그래도 어딘가 신경이 쓰여서 백미러로 연재준의 표정을 살폈는데 연재준은 조수석에서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었다.차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여기서 침묵만 지키고 있으면 조서희가 아니었다.연재준도 싫지만 갑자기 끼어든 백유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이 요망한 여자를 어떻게 하면 골탕먹일까 한참 고민했다.그러던 그녀는 앞에 놓인 수제 장식을 가리키며 말했다.“월영아, 저거 왠지 낯익은데 저거 네가 만든 거 아니야?”사실이었지만 유월영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만든 게 아니라 산 거야.”하지만 조서희는 곱게 넘어가 주지 않았다.“저거 네가 만든 거잖아. 며칠 저거 만든다고 영상도 찾아보고 했던 거 나 기억나는데. 그 뒤로 저게 안 보여서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여기 있었구나?”연재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 장식을 힐끗 바라보았다.조서희가 계속해서 떠들었다.“그리고 이 카시트도 네가 산 거잖아. 그때 나한테 검은색 차에 어떤 색상이 좋냐고 물어봤었는데.”백유진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차는 남자의 로망이자 두 번째 집이라고 하는데 이 안의 모든 장식이 유월영이 해준 거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울컥했다.불편해하는 백유진을 보자 조서희는 그제야 갑갑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친구의 속마음을 알지만 유월영은 더 이상 대답해 주지 않았다.대답할 상황도 아니었다. 찬 에어컨 바람이 불어와서 머리가 어지럽고 식은땀이 났다.다리 부상은 거의 다 나았지만 오늘 너무 체력을 쓴 탓인지 갑자기 통증이 심해졌다. 속도 울렁거리고 모든 게 불편했다.하필이면 이때, 백유진이 차가 향하는 방향을 보고 입을 열었다.“대표님, 월영 언니네 집에 먼
눈치 빠른 운전기사는 서둘러 차 창을 올려 소리를 차단했다.유월영은 손을 빼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을 귀찮게 해드릴 수는 없죠.”연재준이 말했다.“날 귀찮게 한 게 어디 한두 번이야?”유월영은 한 번도 귀찮게 한 적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더 논쟁하기 싫어서 고개를 끄덕였다.“어쨌든 이제 그런 말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니까요.”연재준이 비웃듯 물었다.“우리가 무슨 사이인데?”유월영은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백유진은 그들이 다시는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겠지만 그녀 역시 그와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그와 같은 공간에 있으면 숨이 막혔다.그녀가 말했다.“대표님, 차멀미가 심해서 차를 타고 가기는 어렵겠어요. 어차피 사는 곳이랑 멀지도 않으니까 걸어서 갈게요. 가능하면 서희만 아파트 입구까지 데려다주세요.”연재준은 짜증이 벌컥 치밀었다.“잔말 말고 타.”“정말 타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그 말을 끝으로 연재준은 차로 돌아가서 출발을 지시했다.조서희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월영이 아직 안 탔는데요!”“걸어서 돌아간대요.”“그래서 그러라고 했어요?”연재준은 백미러로 그녀를 힐끗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조서희가 이를 부드득 갈며 말했다.“그럼 나도 내릴게요.”그녀가 내리자마자 차는 휑하니 떠나가 버렸다. 조서희는 욕설을 퍼부으며 친구에게 다가갔다.그런데 유월영 상태가 이상했다.복부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지며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월영아!”조서희는 다급히 친구에게 달려갔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파랗게 질려 있었다.불길한 예감이 들었다.택시를 잡고 싶었지만 이 시간에 길가에 지나가는 택시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녀는 콜택시 어플을 열었지만 근처에는 건축물도 없어서 출발지점을 정확히 설정할 수 없었다.조서희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이때, 휑하니 떠나갔던 차가 다시 돌아왔다.조서희는 다급히 달려가서 차 창을 두드렸다.“대표님, 빨리 우리 월영이 좀 살려
유월영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숙취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신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가까운 곳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침대머리에 물 있어.”연재준?유월영은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돌렸다. 침대 가까이에 그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대표님이 왜… 여기에 있어요?”그녀는 뒤늦게 자신이 있는 곳이 병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손등에는 아직도 수액을 맞고 있었다.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어요?”연재준이 물었다.“어제 일 하나도 기억 안 나?”“술을 많이 마셔서 취했던 건 기억나요.”속이 울렁거리고 배가 아팠던 것 같은데 집에서 푹 쉬면 나을 일을 병원까지 올 필요가 있었나 싶었다.그녀는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다시 물었다.“어떻게 된 거예요?”연재준이 뜻 모를 표정으로 답했다.“유산했대.”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뜯겨 나가는 것 같았다.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머릿속이 하얘졌다.유산….이미 한 번 경험했고 다시는 없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또 유산이라니?그녀는 바람 불면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천장을 바라보았다.‘내가 아는 유 비서가 이렇게 나약한 사람이었나?’연재준은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농담이야. 생리래.”유월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지금 뭐라고 했어요?”연재준이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생리통에 빈혈인데 음주까지 해서 반응이 심하게 왔다고 하더라. 유 비서 친구가 이상한 소리 지껄이길래 나까지 놀랐잖아.”‘그러니까 그냥 생리통이었다고?’유월영의 안색이 조금씩 돌아왔다.지난번에 유산을 겪고 두 달이나 생리가 안 와서 걱정했는데 하필이면 어제 올 줄이야. 아마 술 취해서 감각이 무뎌졌던 것 같았다.‘다행이다.’연재준이 그녀의 얼굴색을 살피더니 물었다.“다행이라고 생각해?”유월영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대표님은요? 제가 유산일 수도 있다고 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나요?”그는 그
수액이 끝나고 간호사가 와서 바늘을 제거하자 유월영은 핸드폰을 꺼내 조서희에게 안부를 전했다.조서희는 출근해야 하기에 병원에 남을 수 없었다.유월영은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너무 졸려 그대로 눈을 감았다.점심 때가 되어 핸드폰이 울렸다.“누구세요?”수화기 너머로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야. 왜 매번 전화할 때마다 내 목소리를 못 알아들어? 내 번호 저장 안 했어?”“은석 씨?”“그래!”유월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죄송해요. 경황이 없어서 저장을 못했어요.”“괜찮아. 나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야. 이번에는 꼭 저장해 줬으면 좋겠어.”소은석은 잔뜩 들뜬 목소리로 떠들어댔다.“나 카톡도 이 번호로 되어 있어. 바로 추가하면 돼. 심심하면 문자 보내.”“알겠어요. 다른 일 없죠?”유월영이 물었다.“별일은 없고 어제 술을 많이 마셨던 거 같은데 괜찮나 해서 전화했어.”“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그럼 점심에 밥이라도 같이 먹자. 내가 그쪽으로 갈게.”어제 위기에서 도와줬던 사람이기에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점심은 제가 사야 할 것 같은데요.”“좋지.”전화를 끊고 퇴원한 유월영은 집으로 가지 않고 백화점에 들러 갈아입을 옷을 구매한 뒤, 화장실로 가서 간단하게 세수를 했다.태생이 미인이었고 피부도 좋았기에 립스틱 하나만 발라도 외출할 수 있었다.그런데 하필 이때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마주칠 줄은 몰랐다.그녀와 소은석이 근처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공교롭게 연재준과 백유진을 만났다.연재준은 새 정장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아마 병원을 나가고 바로 회사로 갔다가 백유진과 밥 먹으러 나온 것 같았다.그들의 위치가 구석진 곳에 있어서 유월영은 모른 척 지나가려 했으나 눈치 없는 소은석이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재준 형!”연재준은 두 사람을 발견하고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소은석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재준 형도 여기 다녀? 잘됐다. 나랑 유 비서도 금방 왔거든. 차라리 합석하
유월영은 그 뒤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식사에 집중했다. 그리고 연재준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소은석과는 거리를 둬야겠다고 다짐했다.그녀는 식사가 끝나고 데려다준다는 소은석의 말을 굳이 거절하지는 않았다.차에 오른 그녀는 그의 연락처를 저장하고 SNS를 팔로우했다. 들어가서 게시물을 잠깐 봤더니 백유진이 말한 문제 사진이 보였다.너무도 오해를 사기 쉬운 글귀였다.아파트 입구에 도착하자 유월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은석 씨, SNS에 올린 사진, 그거 지워주시면 안 될까요?”소은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사진을 왜 지워?”“사람들이 오해할 테니까요.”“그래? 난 별로 오해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유월영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재차 말했다.“지워주세요.”소은석은 입맛을 다시더니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알았어, 알았어. 우리 유 비서가 지우라면 지워야지.”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게시글을 내리고 핸드폰을 내려놓은 소은석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그럼 내일 같이 저녁 먹어!”유월영은 안전벨트를 풀며 덤덤히 말했다.“은석 씨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해 봤는데 저랑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소은석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왜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 난 유 비서만큼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 없다고 생각해. 그리고 어제 진지하게 좋은 쪽으로 고민해 본다고 했으면서 오늘 왜 이러는 거야?”“갑자기 마음이 변한 게 아니라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 본 결과 안 어울린다고 판단했어요. 저보다 적합한 사람을 구하길 바랄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차에서 내렸다.“조심히 가세요. 데려다줘서 감사했습니다.”자존심이 상한 소은석은 대답도 없이 가버렸다.사실 유월영은 한 번도 소은석과 같이 일하는 걸 진지하게 고민한 적 없었다. 단지 너무 매몰차게 거절하기 싫어서 식사 초대에 응했을 뿐이었다.어제 이후로 조금 더 생각해 보려고도 했지만 SNS 사진을 본 뒤로 생각이 바뀌었다.소은석과 같이 일하
본인 일가 회사에 들어왔던 소운은 지금 소사장이라 불린다. 그래서인지 그의 아버지는 이 생일파티를 빌어 그를 정식으로 협력 파트너에게 소개시켜 주고싶어 했다. 그저 여성 파트너가 필요했던 거였다면 소운의 연락 한번으로도 충분했겠지만 이번엔 사뭇 달랐다. 그의 여자친구들이라곤 전부 어리고 예쁘기만 한 모델이거나 인플루언서들이니 그들이 상권 응대 경험이 어디 있을까. 결코 첫 등장부터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기에 그는 콕 집어서 무조건 루장월을 원했다.루장월이 비운 그룹의 수석 비서 출신인 건 모두가 공공연히 아는 사실이니 어느 누가 프로페셔널한 면에서 그녀를 따라 잡을수 있단 말인가?!루장월은 잠시 고민에 빠지더니 이내 별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소 사장님, 사장님이 말씀하신 거예요. 제가 사장님 생일파티에 가서 사장님 도와 이 관문만 넘기면 그 뒤엔 저희 둘 더 이상 빚진거 없기로요.”“그럼!”......마침 다들 바에 있었던지라 입이 근질근질해난 소운은 루장월의 응답을 받자마자 그새를 못 참고 이 사실을 친구들에게 공유했다.“루 아가씨가 내 부탁 들어주겠대!”수옥조차도 조금은 의외라는 듯 말했다.“그 분 이미 너 거절하지 않았었나?”“여자들은 말야 속으론 좋으면서 겉으론 싫은 척 하거든. 이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내일 아침 일찍 사람 보내서 아가씨한테 예복 전해줘라고 해야겠어. 예쁘게 꽃단장하고 부담없이 내 생일파티에 참여하도록 말이지!”수옥이 그를 두어번 힐끗 쳐다본다.“너 애 좀 쓴다.”“그럼!”소운의 시선은 곧장 구석에 있는 문연주에게로 향했다.“연주 형, 왜 도통 말이 없어?”문연주가 천천히 눈꺼풀에 힘을 준다 . 칼에 베일 듯 날카롭고 수려한 이목구비, 눈가엔 그 어떤 온기도 남아있지 않은 채로 조용히 술 한 모금을 들이킨다. 엽혁연이 방해하지 말라고 소운을 다그쳤다.“쟤 저녁에 집 불려가서 밥 먹었어, 아님 여기 왜 왔겠냐?”제 아무리 눈치 없는 소운이라 해도 알아챌 수 있었다.매번 집에 돌아갈 때면 문
때마침 소운이 그녀를 데리러 나왔고 루장월은 바로 소운을 따라 가버렸다.그녀의 등 역시 상당 부분 노출이 돼있었다. 날개뼈며 허리라인이며, 걸음걸이는 또 어찌나 사뿐사뿐한지 소리 없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백유도 문주연의 눈빛을 주의깊게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연신 고개를 숙여 자신을 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그녀 역시 약한 편에 속하긴 했다. 하지만 보기 거북하게 약하달까, 듣기 좋게 말하면 그냥 학생 몸매였다. 문연주가 그녀에게 선물한 예복은 모 고등학교에서 정한 소녀풍이다. 쉬폰 스커트, 일자 어깨에 다이아몬드와 꽃 장식. 여리여리한 선녀 같기도 했다.원래는 너무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루장월한테 비교하고 나니 그녀의 뇌리에는 묘하게 “심심하다”는 단어가 맴돌았다. 유독 문연주의 눈에서 일종의 남자가 여자에게 느끼는 소유욕을 보고 난 뒤로는 더욱 아랫입술을 꽉 깨물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장월 언니 그날 분명 소운이랑 그냥 평범한 친구라고 하지 않았나, 언니 드레스 소운이랑 커플룩 아니야?”“아마도.” 문연주가 냉랭하게 대답했다.백유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린다.“장월 언니 진짜 예쁘네.”문연주가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는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몇마디 툭 내뱉는다.“너무 평범해. 그래도 여자는 청순한게 좋아.”백유의 입꼬리가 주체 못하고 올라간다, 그리고는 그를 향해 청순하게 웃어보였다.그녀는 문연주가 자신의 청순함을 좋게 본 것이라는걸 알고있었다.문연주가 말하는 소위 “평범하다”는 다른 사람들에겐 백퍼센트 화려하고 아름답다는 뜻이었다.과장 하나 보태는것 없이, 주장월이 파티장에 나타났을땐 단번에 모든 귀빈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수많은 남정네들의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따가운 눈총을 받은 소운이었지만 체면은 배로 치켜세워졌다. 그리고는 루장월에게 돌직구를 날렸다.“장월아, 넌 내가 본 제일 제일 제일 예쁜 여자야!”루장월이 웃으며 말했다.“도련님 나 너무 추켜세우지 마요.”“진짜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