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이 말했다.“물론 제 의견을 거절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현명하신 분들께서 옳은 판단을 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두 회사가 거래를 트려고 접대 자리를 가지는 건 각자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너무 안 좋게 헤어지면 거래는 없던 일이 될 테고 물론 제 친구 회사에도 피해가 가겠지만 사장님들께도 이득이 없잖아요. 안 그래요?”일리 있는 말이었다.쌍방이 거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건 서로 이득을 취하기 위함이고 평등한 위치에 있었다. 다만 거래를 핑계로 여자직원들을 괴롭히기 좋아하는 남자들 특성상 오늘은 좀 과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거래를 없던 일로 하기에는 그들에게 가는 부담도 적지 않았다.한 남자가 유월영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말했다.“어디서 본 얼굴인데. 설마 당신… 연 대표랑 같이 다니던 그 비서 아니야?”다른 남자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어느 연 대표를 말하는 거야?”“신주시에 연 대표가 몇이나 더 있어? 해운그룹이지.”순식간에 분위기는 반전되고 남자들이 유월영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사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술자리를 파할 생각이 있었지만 이대로 둘을 보내주려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그래. 저 직원 데리고 나가도 좋아.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각자 한잔씩 올리면 오늘은 이만 보내주지.”룸에는 조서희를 제외하고도 여덟이나 있었다. 여덟 잔을 마시라는 소리였다.조서희가 비틀거리며 다가와서 말했다.“제… 제가 한잔씩… 올리겠습니다.”유월영은 친구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술잔을 들었다.“제가 이 잔을 마시면 내일은 계약서에 도장 찍는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좋아. 어디 마셔봐. 마시면 계약서에 당장 사인하지!”유월영은 잔을 들고 한 사람 한 사람 찾아가서 단숨에 원샷했다. 조서희는 친구가 안쓰러웠지만 마시지 않으면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을 알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다섯 잔 째가 되자 유월영은 이미 비틀거리고 있었다. 평소에 주량이 괜찮은 편이었지만 소은석 방에서 이미 폭탄주를 세
계약서를 받아낸 유월영은 한 손에는 계약서를, 한 손에는 몸도 못 가누는 조서희를 부축하고 소은석과 함께 룸을 나왔다.복도를 둘러보던 소은석이 그녀에게 물었다.“유 비서, 괜찮아? 친구는 좀 어때?”“괜찮아요. 도와줘서 감사했어요.”유월영은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비록 억지로 끌려들어가서 술까지 마셨지만 그가 알맞은 시간에 나타나줘서 위기를 벗어난 것도 사실이었다.처음 보는 그녀의 진솔한 표정에 소은석은 쑥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고맙기는. 전에 나랑 같이 일하자던 말이나 진지하게 고민해 줘.”유월영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고 답했다.그녀는 집까지 데려다 준다는 소은석을 간곡히 거절하고 조서희를 부축해서 술집을 나갔다.소은석은 그녀가 자신의 도움을 진심으로 고마워해 줬다는 사실에 싱글벙글 웃으며 룸으로 돌아갔다.그는 연재준을 보자마자 부루퉁한 얼굴로 물었다.“재준 형, 아까 나 왜 밀쳤어?”연재준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힐끗 바라볼 뿐이었다.소은석은 눈치 없이 웃으며 계속해서 말했다.“하지만 괜찮아. 그 기회에 백마 탄 왕자가 되었으니까. 유 비서가 나한테 고맙다고 내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겠다고 했거든.”서지욱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보았다.술집 직원이 연재준에게 다가와서 공손하게 말했다.“대표님, 운전기사가 입구에 도착했습니다.”유월영은 조서희를 부축해서 길가에 나온 뒤, 택시를 기다렸다.조서희가 울먹이며 사과했다.“미안해, 친구야. 나 때문에 너까지 고생했네.”“그래. 너 때문에 고생 좀 했어. 그러니까 이번에 보너스 받으면 크게 한턱 쏴.”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조서희는 당연히 그러겠다고 흔쾌히 대답했다.둘 다 술기운 때문에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월영아, 네가 예약한 콜택시 차량번호가 어떻게 돼?”유월영은 핸드폰을 힐끗 보고는 대답했다.“뒷번호가 429로 되어 있는데?”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번호가 있었다.조서희가 눈을 빛내며 한 곳을 가리켰다.“저기 있어
세 여자가 뒤에 타고 연재준은 조수석에 타게 되었다.유월영은 어쩔 수 없이 콜택시를 취소했다.그녀는 이 자리가 가시방석 같았다.단지 자신의 주도권을 주장하고 싶었던 백유진도 그들이 정말 차에 탈 줄은 몰랐기에 적잖이 당황했다.하지만 연재준이 자신의 말 한마디에 그들을 태웠다는 생각에 다시 의기양양해졌다.그래도 어딘가 신경이 쓰여서 백미러로 연재준의 표정을 살폈는데 연재준은 조수석에서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었다.차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여기서 침묵만 지키고 있으면 조서희가 아니었다.연재준도 싫지만 갑자기 끼어든 백유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이 요망한 여자를 어떻게 하면 골탕먹일까 한참 고민했다.그러던 그녀는 앞에 놓인 수제 장식을 가리키며 말했다.“월영아, 저거 왠지 낯익은데 저거 네가 만든 거 아니야?”사실이었지만 유월영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만든 게 아니라 산 거야.”하지만 조서희는 곱게 넘어가 주지 않았다.“저거 네가 만든 거잖아. 며칠 저거 만든다고 영상도 찾아보고 했던 거 나 기억나는데. 그 뒤로 저게 안 보여서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여기 있었구나?”연재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 장식을 힐끗 바라보았다.조서희가 계속해서 떠들었다.“그리고 이 카시트도 네가 산 거잖아. 그때 나한테 검은색 차에 어떤 색상이 좋냐고 물어봤었는데.”백유진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차는 남자의 로망이자 두 번째 집이라고 하는데 이 안의 모든 장식이 유월영이 해준 거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울컥했다.불편해하는 백유진을 보자 조서희는 그제야 갑갑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친구의 속마음을 알지만 유월영은 더 이상 대답해 주지 않았다.대답할 상황도 아니었다. 찬 에어컨 바람이 불어와서 머리가 어지럽고 식은땀이 났다.다리 부상은 거의 다 나았지만 오늘 너무 체력을 쓴 탓인지 갑자기 통증이 심해졌다. 속도 울렁거리고 모든 게 불편했다.하필이면 이때, 백유진이 차가 향하는 방향을 보고 입을 열었다.“대표님, 월영 언니네 집에 먼
눈치 빠른 운전기사는 서둘러 차 창을 올려 소리를 차단했다.유월영은 손을 빼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을 귀찮게 해드릴 수는 없죠.”연재준이 말했다.“날 귀찮게 한 게 어디 한두 번이야?”유월영은 한 번도 귀찮게 한 적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더 논쟁하기 싫어서 고개를 끄덕였다.“어쨌든 이제 그런 말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니까요.”연재준이 비웃듯 물었다.“우리가 무슨 사이인데?”유월영은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백유진은 그들이 다시는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겠지만 그녀 역시 그와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그와 같은 공간에 있으면 숨이 막혔다.그녀가 말했다.“대표님, 차멀미가 심해서 차를 타고 가기는 어렵겠어요. 어차피 사는 곳이랑 멀지도 않으니까 걸어서 갈게요. 가능하면 서희만 아파트 입구까지 데려다주세요.”연재준은 짜증이 벌컥 치밀었다.“잔말 말고 타.”“정말 타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그 말을 끝으로 연재준은 차로 돌아가서 출발을 지시했다.조서희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월영이 아직 안 탔는데요!”“걸어서 돌아간대요.”“그래서 그러라고 했어요?”연재준은 백미러로 그녀를 힐끗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조서희가 이를 부드득 갈며 말했다.“그럼 나도 내릴게요.”그녀가 내리자마자 차는 휑하니 떠나가 버렸다. 조서희는 욕설을 퍼부으며 친구에게 다가갔다.그런데 유월영 상태가 이상했다.복부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지며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월영아!”조서희는 다급히 친구에게 달려갔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파랗게 질려 있었다.불길한 예감이 들었다.택시를 잡고 싶었지만 이 시간에 길가에 지나가는 택시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녀는 콜택시 어플을 열었지만 근처에는 건축물도 없어서 출발지점을 정확히 설정할 수 없었다.조서희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이때, 휑하니 떠나갔던 차가 다시 돌아왔다.조서희는 다급히 달려가서 차 창을 두드렸다.“대표님, 빨리 우리 월영이 좀 살려
유월영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숙취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신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가까운 곳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침대머리에 물 있어.”연재준?유월영은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돌렸다. 침대 가까이에 그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대표님이 왜… 여기에 있어요?”그녀는 뒤늦게 자신이 있는 곳이 병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손등에는 아직도 수액을 맞고 있었다.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어요?”연재준이 물었다.“어제 일 하나도 기억 안 나?”“술을 많이 마셔서 취했던 건 기억나요.”속이 울렁거리고 배가 아팠던 것 같은데 집에서 푹 쉬면 나을 일을 병원까지 올 필요가 있었나 싶었다.그녀는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다시 물었다.“어떻게 된 거예요?”연재준이 뜻 모를 표정으로 답했다.“유산했대.”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뜯겨 나가는 것 같았다.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머릿속이 하얘졌다.유산….이미 한 번 경험했고 다시는 없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또 유산이라니?그녀는 바람 불면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천장을 바라보았다.‘내가 아는 유 비서가 이렇게 나약한 사람이었나?’연재준은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농담이야. 생리래.”유월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지금 뭐라고 했어요?”연재준이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생리통에 빈혈인데 음주까지 해서 반응이 심하게 왔다고 하더라. 유 비서 친구가 이상한 소리 지껄이길래 나까지 놀랐잖아.”‘그러니까 그냥 생리통이었다고?’유월영의 안색이 조금씩 돌아왔다.지난번에 유산을 겪고 두 달이나 생리가 안 와서 걱정했는데 하필이면 어제 올 줄이야. 아마 술 취해서 감각이 무뎌졌던 것 같았다.‘다행이다.’연재준이 그녀의 얼굴색을 살피더니 물었다.“다행이라고 생각해?”유월영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대표님은요? 제가 유산일 수도 있다고 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나요?”그는 그
수액이 끝나고 간호사가 와서 바늘을 제거하자 유월영은 핸드폰을 꺼내 조서희에게 안부를 전했다.조서희는 출근해야 하기에 병원에 남을 수 없었다.유월영은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너무 졸려 그대로 눈을 감았다.점심 때가 되어 핸드폰이 울렸다.“누구세요?”수화기 너머로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야. 왜 매번 전화할 때마다 내 목소리를 못 알아들어? 내 번호 저장 안 했어?”“은석 씨?”“그래!”유월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죄송해요. 경황이 없어서 저장을 못했어요.”“괜찮아. 나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야. 이번에는 꼭 저장해 줬으면 좋겠어.”소은석은 잔뜩 들뜬 목소리로 떠들어댔다.“나 카톡도 이 번호로 되어 있어. 바로 추가하면 돼. 심심하면 문자 보내.”“알겠어요. 다른 일 없죠?”유월영이 물었다.“별일은 없고 어제 술을 많이 마셨던 거 같은데 괜찮나 해서 전화했어.”“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그럼 점심에 밥이라도 같이 먹자. 내가 그쪽으로 갈게.”어제 위기에서 도와줬던 사람이기에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점심은 제가 사야 할 것 같은데요.”“좋지.”전화를 끊고 퇴원한 유월영은 집으로 가지 않고 백화점에 들러 갈아입을 옷을 구매한 뒤, 화장실로 가서 간단하게 세수를 했다.태생이 미인이었고 피부도 좋았기에 립스틱 하나만 발라도 외출할 수 있었다.그런데 하필 이때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마주칠 줄은 몰랐다.그녀와 소은석이 근처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공교롭게 연재준과 백유진을 만났다.연재준은 새 정장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아마 병원을 나가고 바로 회사로 갔다가 백유진과 밥 먹으러 나온 것 같았다.그들의 위치가 구석진 곳에 있어서 유월영은 모른 척 지나가려 했으나 눈치 없는 소은석이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재준 형!”연재준은 두 사람을 발견하고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소은석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재준 형도 여기 다녀? 잘됐다. 나랑 유 비서도 금방 왔거든. 차라리 합석하
유월영은 그 뒤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식사에 집중했다. 그리고 연재준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소은석과는 거리를 둬야겠다고 다짐했다.그녀는 식사가 끝나고 데려다준다는 소은석의 말을 굳이 거절하지는 않았다.차에 오른 그녀는 그의 연락처를 저장하고 SNS를 팔로우했다. 들어가서 게시물을 잠깐 봤더니 백유진이 말한 문제 사진이 보였다.너무도 오해를 사기 쉬운 글귀였다.아파트 입구에 도착하자 유월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은석 씨, SNS에 올린 사진, 그거 지워주시면 안 될까요?”소은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사진을 왜 지워?”“사람들이 오해할 테니까요.”“그래? 난 별로 오해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유월영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재차 말했다.“지워주세요.”소은석은 입맛을 다시더니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알았어, 알았어. 우리 유 비서가 지우라면 지워야지.”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게시글을 내리고 핸드폰을 내려놓은 소은석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그럼 내일 같이 저녁 먹어!”유월영은 안전벨트를 풀며 덤덤히 말했다.“은석 씨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해 봤는데 저랑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소은석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왜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 난 유 비서만큼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 없다고 생각해. 그리고 어제 진지하게 좋은 쪽으로 고민해 본다고 했으면서 오늘 왜 이러는 거야?”“갑자기 마음이 변한 게 아니라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 본 결과 안 어울린다고 판단했어요. 저보다 적합한 사람을 구하길 바랄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차에서 내렸다.“조심히 가세요. 데려다줘서 감사했습니다.”자존심이 상한 소은석은 대답도 없이 가버렸다.사실 유월영은 한 번도 소은석과 같이 일하는 걸 진지하게 고민한 적 없었다. 단지 너무 매몰차게 거절하기 싫어서 식사 초대에 응했을 뿐이었다.어제 이후로 조금 더 생각해 보려고도 했지만 SNS 사진을 본 뒤로 생각이 바뀌었다.소은석과 같이 일하
본인 일가 회사에 들어왔던 소운은 지금 소사장이라 불린다. 그래서인지 그의 아버지는 이 생일파티를 빌어 그를 정식으로 협력 파트너에게 소개시켜 주고싶어 했다. 그저 여성 파트너가 필요했던 거였다면 소운의 연락 한번으로도 충분했겠지만 이번엔 사뭇 달랐다. 그의 여자친구들이라곤 전부 어리고 예쁘기만 한 모델이거나 인플루언서들이니 그들이 상권 응대 경험이 어디 있을까. 결코 첫 등장부터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기에 그는 콕 집어서 무조건 루장월을 원했다.루장월이 비운 그룹의 수석 비서 출신인 건 모두가 공공연히 아는 사실이니 어느 누가 프로페셔널한 면에서 그녀를 따라 잡을수 있단 말인가?!루장월은 잠시 고민에 빠지더니 이내 별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소 사장님, 사장님이 말씀하신 거예요. 제가 사장님 생일파티에 가서 사장님 도와 이 관문만 넘기면 그 뒤엔 저희 둘 더 이상 빚진거 없기로요.”“그럼!”......마침 다들 바에 있었던지라 입이 근질근질해난 소운은 루장월의 응답을 받자마자 그새를 못 참고 이 사실을 친구들에게 공유했다.“루 아가씨가 내 부탁 들어주겠대!”수옥조차도 조금은 의외라는 듯 말했다.“그 분 이미 너 거절하지 않았었나?”“여자들은 말야 속으론 좋으면서 겉으론 싫은 척 하거든. 이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내일 아침 일찍 사람 보내서 아가씨한테 예복 전해줘라고 해야겠어. 예쁘게 꽃단장하고 부담없이 내 생일파티에 참여하도록 말이지!”수옥이 그를 두어번 힐끗 쳐다본다.“너 애 좀 쓴다.”“그럼!”소운의 시선은 곧장 구석에 있는 문연주에게로 향했다.“연주 형, 왜 도통 말이 없어?”문연주가 천천히 눈꺼풀에 힘을 준다 . 칼에 베일 듯 날카롭고 수려한 이목구비, 눈가엔 그 어떤 온기도 남아있지 않은 채로 조용히 술 한 모금을 들이킨다. 엽혁연이 방해하지 말라고 소운을 다그쳤다.“쟤 저녁에 집 불려가서 밥 먹었어, 아님 여기 왜 왔겠냐?”제 아무리 눈치 없는 소운이라 해도 알아챌 수 있었다.매번 집에 돌아갈 때면 문
사무실에서 유월영은 턱을 괴고 마우스를 움직이며 인터넷에 넘쳐나는 이혁재의 스캔들 뉴스를 보고 있었다.이혁재의 호텔 방에서 일어난 일을 누군가가 인터넷에 올렸고 이미 댓글들이 폭발하고 있었다.그녀는 웃으며 평가했다.“이 제목 누가 지었는지 정말 잘 지었네요. [해성 그룹 임원 이혁재 혼인 중 외도, 호텔에서 현장 발각]이라니. 혁재 씨의 신분에 회사 이름도 나오고, 제목까지 자극적으로 지어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네요.”“게다가 지금 해성 그룹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상황이라 작은 움직임도 큰 주목을 받는데 뉴스 제목에 해성 그룹을 걸었으니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도 당연하겠죠.”한세인이 말했다.“저도 봤어요. 댓글에선 해성 그룹이 안팎으로 온갖 나쁜 일은 다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오성민은 이혁재 씨를 망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같아요.”유월영이 마우스를 내려놓고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손을 배 위에 포개며 물었다.“부정적 여론의 최적 대응 시간이 얼마였죠?”“골든타임은 24시간이에요. 물론 빠를수록 좋습니다.”유월영이 미소를 지었다.“그럼 내보내요.”이혁재의 외도 스캔들은 오전 내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고 그는 순식간에 쓰레기 남편으로 전락했다.누리꾼들이 비난하는 와중에 점심시간 동안 갑자기 한 영상이 나타나 인터넷에 빠른 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그 영상에는 이혁재가 정신을 잃은 채 두 명의 직원에게 방으로 옮겨지고 침대에 던져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었다. 직원들은 대화를 나누며 말했다.“여자 도착했어?”“도착했대.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오는 중이야. 먼저 이 남자 옷을 벗기자.”동영상에서는 직원들은 합심해 이혁재의 옷을 모두 벗기고 있었다. 물론 노출 장면은 모자이크 처리되었다.옷을 모두 벗기고 이불을 덮어준 후 방에는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 바로 그 화영이였다.“다 됐어?”“술에 수면제를 넣었어. 해 뜨기 전까진 못 깨어날 거야.”“알겠어. 이제 나가 봐.”화영은
유월영이 멍해 있자 연재준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당신도 전에 나를 가지고 장난쳤잖아. 난 그러면 안 돼?”“...”유월영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냉랭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연재준은 차가 도로로 들어서는 것을 바라보며 자기 손끝을 내려다보았다.손끝에는 그녀의 립스틱 자국이 남아 있었다.그는 이유 모를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닦아내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이혁재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날 저녁, 이혁재는 배 사장을 데리고 온천 호텔에서 식사를 대접했고 배 사장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이곳 공기가 정말 좋군요. 자동차 배기가스나 공장 오염 같은 게 없는 것 같아요.”이혁재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사장님께서 전원생활을 좋아하신다고 들어서 이 호텔을 고른 겁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여기 사람들이 말하길 아침 공기가 더 좋다고 하네요. 내일 아침 식사 후에 산속을 걸으면서 산림욕을 즐기시는 게 어떨까요?”배 사장의 눈이 반짝였다.“그거 정말 좋겠군요.”“그럼 지금 마사지하러 가실까요?”이혁재가 말했다.“여기 직원분들 모두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이시랍니다. 호텔 사장님이 약자를 돕고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장애인분들에게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하더군요.”배 사장이 감탄하며 말했다.“정말 훌륭한 분이시군요. 저는 이렇게 사회에 공헌하는 기업가를 좋아합니다. 그 사장님이 누구신지 꼭 한번 만나보고 싶네요.”이혁재가 모호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나중에 제가 알아보겠습니다.”“좋습니다.”그들은 함께 마사지실로 향했고 두 명의 청각장애인 마사지사가 자신을 소개하며 그들을 맞이했다.그들은 마사지를 받으며 계약 연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고 직원이 친절하게 디저트와 칵테일을 가져다주었다.칵테일 도수가 높지는 않았지만 마사지는 너무나도 편안한 탓인지 이혁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다.그리고 마사지사 두 명이 이내 무언의 눈빛을 교환했다.…이혁재가 깨어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연재준은 차를 몰고 유월영의 사무실로 갔다.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아 유월영의 차를 찾아낸 뒤 그녀 차 옆에 차를 세웠다.시간을 보니 12시 30분이었다. 유월영은 회사에 하루 종일 머무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주로 오전에 업무를 처리한 뒤 점심때 회사를 나서곤 했다.유월영이라면 굳이 매일 출근 도장을 찍을 필요가 없었고 시간은 더 중요한 일을 위해 쓰여야 했다.연재준은 참을성 있게 한 시간가량 기다렸고 그제야 그녀가 한세인과 함께 회사를 나서고 있었다.한세인은 차에서 내리는 연재준을 빠르게 발견하고 유월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유월영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유월영은 오늘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헤어밴드로 장식했다. 그리고 하얀색 쉬폰 블라우스에 고급스러운 블랙 스커트를 매치하여 전체적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유월영은 그대로 연재준을 향해 걸어왔고 작은 굽의 힐이 시멘트 바닥 위에서 맑은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그녀가 우선 입을 열었다.“이제 모퉁이를 돌 때마다 연 대표님 만나는 게 놀랍지도 않네요.”연재준의 시선이 유월영이 착용한 진주 귀걸이에 향했다. 광택이 도는 고급 진주는 그녀의 피부색과 잘 어울렸다.그는 뜬금없이 말했다.“해성 그룹에 꽤 큰 거래 파트너가 있어. 성은 배 씨인데 갑자기 반년 짜리 계약을 체결하겠다고 하더군.”유월영의 눈이 반짝였다.“그래요?”“혁재가 그를 접대하고 있어.”연재준이 물었다.“당신의 생각은 어때?”유월영이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정말 저를 끝까지 도우려는 건가요?”“...”옆에서 듣고 있던 한세인은 그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두 분이서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건가?’‘왜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거지?’해성 그룹이 고객을 접대하는 일을 연재준은 왜 유월영에게 말하는지, 이게 어떻게 그녀를 돕는 것인지 한세인은 알 수가 없었다.연재준이 유월영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 끝까지 도우려고. 그러니까 나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연재준도 힐끗 이혁재의 핸드폰 화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이렇게 메시지를 많이 보냈는데도 이 변호사님이 널 차단하지 않은 걸 보면 그냥 널 방해 금지 모드로 설정한 것 같네.”이혁재는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한 놈은 아내가 옆에 없고, 다른 한 놈은 아내가 다른 사람의 옆에 있고. 이렇게 감정 불화가 있는 두 놈이 나 같은 화목한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을 괴롭히고 있네.‘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라는 속담이 딱 맞아.”연재준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서지욱을 향해 말했다.“이제 내가 법원에서 전해준 말을 믿겠지.”서지욱은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3년 동안 조용히 있길래 정말 욕심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완전히 변태가 된 거였네.”이혁재는 얼음물을 한 모금 마시며 갑자기 뭔가를 떠올리듯 찡그렸다.“짜증 나네. 오늘 밤에 회식이 있다니.”그는 연재준에게 고개를 까딱하며 말했다.“넌 아내도 없잖아. 그 회식 네가 대신 가.”연재준이 담담히 말했다.“널 찾아온 거지 날 찾아왔냐?”이혁재는 혀를 차며 말했다.“회사가 다 망해가고 있는데 아내와 알콩달콩하게 보낼 밤을 방해하다니 정말 죽여 마땅한 죄지.”연재준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간 됐으니 준비하고 가. 배 사장이 신주시에 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 잘 접대해. 그럼 너에게도 좋은 일이 생길 거야.”이혁재도 그 말에 동의하며 시간을 확인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그는 바로 접시를 들고 밥을 국에 말아 몇 분 만에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휴지로 입을 닦으며 손을 흔들었다.“간다.”서지욱은 미간을 누른 채 생각에 잠겼다.그리고 여유롭게 식사를 마저 하고 있는 연재준을 보며 말했다.“오늘 너 기분 꽤 좋아 보인다?”연재준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그래?”서지욱이 말했다.“마르세유에서 돌아온 이후로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아. 근데 내가 알기로는 아직 월영 씨랑 화해도 못 했고 월영 씨는 4월에 현시우랑 결혼 준비 중이라고 하던
유월영은 그의 말에 반박하기도 귀찮아 대꾸하지 않았다.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시간을 확인해 보니 4시 44분이었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정말 죽음을 숫자로군. 흥미로운데.”유월영이 말했다.“혁재 씨 그 말이 오성민을 자극했어요.”“전에 말했듯이 오성민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에요. 자존감이 높을수록 더 예민한 법이죠. 혁재 씨가 그의 치부를 그렇게 쑤셔댔으니 그의 표정이 얼마나 어두웠는지 봤어요? 그는 지금 미쳐가고 있으니 앞으로의 일이 더 재밌어질 거예요.”연재준은 그녀가 이렇게 여유롭게 계획을 세우는 모습을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응.”...어느덧 늦은 밤이 되고, 집에 온 오성민은 계속해서 이승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며칠 전만 해도 그녀는 그의 전화를 받았지만 이제는 길고 긴 전화벨 소리만 울릴 뿐 받지도 끊지도 않았다.마치 예전처럼.예전의 오성민은 이승연이 전화를 받지 않아도 이렇게까지 괴롭지 않았었다. 그녀의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자신이 치유되는 것 같았으니까.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달콤한 맛을 본 그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며칠간 이승연과 그토록 바랬던 시간을 누렸던 그는 이제 다시 그녀를 “잃는” 다는 걸 견딜 수 없었다.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승연아, 제발 전화를 받아줘. 제발, 승연아!”전화벨 소리가 끊기자 오성민은 안경을 벗어 책상 위로 힘껏 내던졌다!활짝 풀어헤친 셔츠 깃 사이로 가슴이 격렬하게 오르내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하지만 그의 화는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일어나 부하의 옷깃을 잡고 음침한 얼굴로 물었다.“내가 이혁재의 치부를 찾아보라고 했는데, 찾아냈어? 응?”이승연은 감정적으로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바람을 피웠을 때 그녀는 단칼에 관계를 끊었고 이혁재가 여자 모델과의 소문이 났을 때도 이혼을 생각했다.이승연은 그동안의 정이 남아 있어 관계를 끊지 못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녀는 한 번 결심하면 망설임 없이 관계를 끝냈다.그래서 그는 이혁재가
이혁재는 복도로 돌아와 이승연을 보자 표정을 풀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애기야.”이승연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예쁘고도 도도하게 말했다.“그렇게 부르지 마!”이혁재는 웃으며 달래듯 말했다.“그럼 뭐라고 불러야 해?”이승연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예전처럼 불러.”이혁재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말했다.“내가 예전에 뭐라고 불렀더라? 갑자기 기억이 안 나네.”이승연은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의 장난스러운 표정에 결국 몇 초 후 항복하며 말했다.“여보.”이혁재는 음료 뚜껑을 열어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다른 건 없어?”이승연은 작게 웅얼거리며 말했다.“자기.”이혁재가 바로 대답했다.“그래!”이승연이 그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이혁재가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들었는데, 요즘 인터넷에서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남자를 ‘여보’라고 부른다더라고. 누나도 나를 그렇게 불러도 돼. 나 괜찮아.”이승연은 그의 철면피에 정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화를 내기도 지쳐 고개를 돌려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이혁재는 바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추며 말했다.“복숭아 맛이 꽤 달콤하네. 이제 집에 가자, 여보.”이승연은 입술을 꾹 다물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함께 걸어갔다.복도의 구석에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며 유월영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그 옆에서 연재준이 그녀를 지켜보며 물었다.“왜 웃는 거야?”유월영은 기분이 좋았다. 요즘 사람들이 달콤한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연애는 역시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걸 보는 게 더 재미있네.”그녀는 벽에 기대며 무심하게 말했다.“이혁재 씨가 연 대표님 지인들 중에서 연애를 가장 잘하는 것 같네요.”연재준이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그가 책임을 떠넘기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정반대에요. 그는 지금 자신과 승연 언니 사이의 관계를 예전처럼 되돌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거라고요.” 유월영이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느긋하게 걸었다.
이혁재가 벌린 온갖 난리를 겪고 나니 이승연은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날 어린애처럼 달래지 마.”이혁재가 능청스럽게 말했다.“여보와 누나 사이에서 이 변호사님은‘애기’라는 별명을 고른 거잖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제부터 당신을 애기라고 부를게.”이승연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정말 그렇게 부른다면 네 입을 찢어버릴 거야.”이혁재가 히죽거리며 그녀의 입가에 키스했지만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잠시만 앉아 있어. 내가 마실 거 사 올게.”그녀의 입술이 건조해져서 트고 있었다.“응.”자판기는 다른 복도에 있었고 이혁재는 복숭아 맛 음료 두 병을 골랐다.그때 갑자기 오성민이 나타나 그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넌 말장난으로 이승연을 속이고 있는 거야.”이혁재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자판기에서 결제하며 무심히 말했다.“내가 내 아내랑 어떻게 지내는지는 당신이 간섭할 일이 아니야.”오성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그녀는 그렇게 해서 마음속의 두려움을 극복한 게 아니야! 그건 그냥 눈 가리고 아웅, 본질을 피해 가는 것일 뿐이라고!”이혁재가 웃으며 말했다.“정말 이상하다 말이지. 왜 꼭 두려움을 극복해야 해?”자판기가 덜컹 소리를 내며 음료 두 병을 떨어뜨렸다.이혁재는 음료를 바로 꺼내지 않고 오성민을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어떤 사람들은 인생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좌절이나 어려움들이 사실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작은 걸림돌인데도, 굳이 극복해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하지. 그냥 피해 가면 안 돼? 왜 굳이 쓸데없이 고통을 자처해야 하지?”오성민이 비웃었다.“말도 안 되는 소리군!”이혁재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서 난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당신은 어때?”“들리는 얘기로는 당신 부모도 썩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들었어. 온 가족이 형만 편애했다고 하던데. 이렇게 보니 우리 상황이 조금 비슷하네. ““내 아버지도 두 명의
이혁재가 뻔뻔하게 말했다.“나를 봐봐. 매일 당신한테 달라붙어서 뽀뽀해 달라고 안아 달라고 하고 1분이라도 못 보면 떼를 쓰잖아. 내가 꼭 애 같지 않아? 응? 어차피 내가 연하이기도 하잖아, 나를 아들로 봐도 아무 문제 없어.”이승연은 그의 헛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이혁재는 단도직입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나 병 있어. 그리고 당신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그러니까 나를 떠나지 마. 누나가 원하는 건 뭐든 할게.”“...”이승연은 더는 대꾸할 힘이 없어 그를 밀쳤다. 다만 이번엔 아까처럼 혐오감에 의한 거부가 아니라 그의 엉뚱한 발언에 기가 차서 그와 거리를 두고 싶었던 것이다.하지만 이혁재는 그녀를 다시 품에 끌어안았다.이승연은 거의 기진맥진했지만 오랫동안 그녀를 짓눌렀던 고통이 점차 사라지는 걸 느꼈다.그녀는 눈을 감으며 나지막이 이혁재의 말을 되풀이했다.“당신 잘못 아니야...”이혁재가 대답했다.“그럼 당연히 내 잘못이 아니지. 나도 완전히 억울한 피해자야. 그러니까 나를 미워하면 안 돼.”그의 당당한 태도는 마치 모든 액운을 쓸어내는 빗자루 같았고 이승연의 마음속 어두운 생각들이 깨끗하게 지워졌다.이승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품에서 익숙한 향기가 났다.그녀는 매일 아침 이 향기 속에서 깨어났고 그녀를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이혁재가 갑자기 자신의 넥타이를 풀어 헤쳐 이승연의 눈을 가렸다.“법정을 설 용기가 없어도 상관없어. 안 보면 되지. 자, 눈을 가려줄게.”그는 넥타이를 그녀의 머리 뒤에서 묶으며 말했다.“눈을 가리고 법정에 서면 안 된다는 법도 없잖아?”식물인간으로 지냈던 3년 동안 어둠에 익숙해져서인지 눈앞이 깜깜해지자 이승연은 오히려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이혁재는 고개를 숙여 넥타이를 사이에 두고 그녀의 눈 위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눈을 가려도 참 예쁘네. 이렇게 예쁜 여자가 누구 아내지? 아, 내 아내네.”이승연은 그의 황당한 발언들을
이혁재는 순간 흠칫했다. 그러고 나서야 깨달았다.깨어난 뒤 왜 그에게 그런 태도를 보였는지.이승연은 그날 자신과 아이를 구해내지 못한 이혁재를 줄곧 마음속 깊이 원망하고 있었다.이혁재는 이승연의 힘에 밀려 몇 걸음 물러섰다.그러다 갑자기 정신을 차린 그는 밀어낸 이승연의 손을 잡아채며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여보.”이혁재는 느낄 수 있었다. 이승연은 사랑싸움이 아닌 진심으로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이혁재의 팔을 꽉 잡은 그녀의 손톱이 그의 살에 파고들었다. 이승연은 그를 향해 울부짖었다.“이거 놔!”오성민도 뒤따라왔고 큰 소리로 외쳤다.“승연이한테서 손 떼!”오성민이 이승연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갑자기 나타난 두 명의 경호원에게 가로막혔다.그 경호원들이 이혁재의 사람이라 생각하고 화를 냈지만 어쩔 수 없었다.여기는 법원이니 감히 손을 쓸 수 없었다.하지만 사실, 이 경호원들은 유월영의 사람들이었고 그녀는 이승연의 첫 재판을 걱정해서 직접 법정에 와 있었다.하지만 예상 밖으로 연재준도 법정에 나타났고 그 순간, 복도 모퉁이에서 두 사람이 시선이 마주쳤다.연재준은 손을 입가에 대며 말했다.“쉿.”“...”급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유월영은 그에게 물었을 것이다.“그렇게 회사를 내팽개치고 하루 종일 날 따라다녀도 돼요?”정말 그렇게 한가하다면 병원에나 가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이혁재는 주변 사람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픔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이승연을 꼭 안고 말했다.“여보, 내 말 좀 들어봐...당신은 나를 벗어날 수 없어. 내가 하는 말 다 듣고 나서도 여전히 내가 싫다면 그땐 내가 떠날게. 더는 귀찮게 하지 않을게.”이승연이 여전히 몸부림쳤지만 이혁재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빠르게 말했다.“3년 전 그 일은 내 잘못이 아니야.”그는 또렷하게 말했다.“그때 내 자리는 방청석이었고 내 앞에는 몇 줄의 좌석과 다른 방청객들이 있었어.사건이 터졌을 때 모두 놀라 도망치기 바빴고 내 앞을 막아섰어. 난 좌석을 지나 혼란스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