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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유월영은 차를 세운 뒤 조용히 그에게로 다가갔다.“대표님.”길이 어두컴컴해서 남자의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들었음에도 고개를 돌려 그녀를 봐주지 않았다.유월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멀지 않은 곳에 24시간 슈퍼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슈퍼에서 김밥 한 줄을 구매한 뒤, 레인지에 가열해서 연재준에게로 가져왔다.“저녁에 얼마 드시지도 않았잖아요. 자꾸 그러시면 속 버려요.”연재준은 말없이 그녀에게서 김밥을 받았다.유월영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무리 회장님 말씀이 과했다지만 좀 참지 그랬어요. 회장님 고혈압 도지면 위험한 거 아시잖아요. 작년에도 병원에 한 달이나 입원해 계셨는데….”연재준은 갑자기 싸늘한 미소를 짓더니 김밥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그녀를 끌고 차로 들어갔다.모든 동작이 그렇듯 당연하고 거침이 없었다. 유월영은 하늘이 빙 도는 느낌이 들더니 정신을 파는 사이 어느새 남자의 손이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왔다.당황한 그녀가 그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대표님!”비록 좁은 골목이라고는 하지만 길가는 행인들도 있었고 이런 장소에서는 싫었다.“이러지 마세요, 대표님! 여기서는 싫어요.”연재준은 그녀의 두 손을 꽉 잡아 머리 위로 고정한 채,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유 비서 거절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모든 사람의 비위를 맞추느라 거절도 못하는 사람일 줄 알았는데.”남자의 거친 숨결이 그녀의 민감한 귓가를 자극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꾹 참고 하지 않으려고 했던 말을 꺼냈다.“모두가 저를 좋아하는 건 아닌데요. 대표님은 저 싫어하시잖아요. 대표님은 백유진 씨 같은 스타일을 좋아하니까.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백유진 씨랑은 진심이세요? 아니면 그냥 잠깐의 호기심인가요?”그녀는 줄곧 연재준이 백유진에게 흥미를 가지는 정도라고만 생각했다.하지만 그날 그가 했던 말은 그녀의 모든 예상을 뒤엎었다.혼전 순결을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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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다음 날, 유월영은 연재준과 함께 스미스를 대동하고 신주에 있는 카누 공장으로 갔다.투자를 주 항목으로 하는 해운그룹은 국내 최고의 투자 회사 중 하나였다. 해외에도 많은 지사를 두고 공격적인 투자를 진행하면서 투자 업계에서 그들이 가지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회사의 이미지를 위해 그들은 종종 국가에서 지원하는 산업에 투자하기도 했다.스포츠 종목으 그 중 한 가지였고 카누 제작 사업에 대한 투자도 그러한 이유에서 시작했다.유월영은 어제의 상실감을 잊고 회사의 주요 책임자로서 연재준의 옆을 지키며 완벽한 비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스미스의 곤란한 질문에 대답하는 쪽은 주로 그녀의 담당이었고 필요하지 않은 말은 아꼈다.거대한 공장 내부에는 이미 제작이 완료된 각양각색의 카누가 진열되어 있었다. 공장장의 설명을 들은 스미스는 연신 대단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공장장이 자신 있게 말했다.“길이가 18미터 되는 작은 카누도 있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긴 카누를 제작 중에 있습니다. 제작이 완료되면 101미터가 될 겁니다. 우린 이 카누로 기니스 세계기록에 도전해서 세계에 신주 카누 산업을 알릴 생각입니다.”스미스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101미터나 되는 카누요? 그건 웬만한 건물 하나의 높이잖아요. 그런 거대한 배가 바다에 뜨면 정말 가관이겠는데요? 제가 조금 더 가까이 가서 봐도 되겠습니까?”공장장이 웃으며 말했다.“당연하죠. 사실 우리의 머리 위쪽에 있습니다.”고개를 들자 허공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선박이 보였다.공장장이 말했다.“공간을 너무 차지해서 공간을 절약한다고 밧줄로 고정해서 허공에 매달아 두었습니다. 아직은 기본 골조만 완성된 상태이고 아직 갈 길이 멉니다.”사람들이 거대 카누에 정신이 팔린 사이, 유월영은 어딘가에서 불편한 시선을 느꼈다.주변을 둘러보니 구석진 곳에서 모자를 쓴 한 남자가 카메라를 들고 그들이 있는 곳을 촬영하고 있었다.유월영은 바로 인상을 쓰며 공장장에게 물었다.“공장장님, 저 사람은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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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그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형 사고였다.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부상이 없는 사람들은 현장을 정리하고 부상자는 병원으로 옮겨졌다.다행히 선박은 골조만 완성된 상태라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기에 유월영도 골절상을 피할 수 있었다. 만약 완성된 선박이었다면 그 결과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이 사고로 크게 다친 사람은 하필 스미스였다. 그는 현장에서 머리를 맞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누군가는 이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었다.공장장은 부상자를 병원으로 이송한 뒤, 사건의 자초지종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조사 결과, 골조를 지탱하고 있던 4번 끈이 풀리면서 평형을 잃고 추락했다는 결론이 나왔다.그런데 끈이 왜 갑자기 풀린 걸까?병실로 찾아온 공장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결과를 보고했다.“4번 끈이 갑자기 풀려서 일어난 사고입니다. 하지만 공장 내부에는 CCTV가 없어서 끈이 풀린 이유는 밝혀내기 어려울 것 같아요. 기억을 되짚어 보면 사고 직전에 그 위치에 머무른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연재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듣고 있었지만 화가 많이 난 상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게 누굽니까.”공장장은 시선을 회피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그게….”병상에 있던 유월영이 입을 열었다.“저예요.”연재준의 시선이 유월영에게 쏠렸다.조금 전 사고로 그녀는 머리가 흐트러지고 옷도 먼지투성이가 되었으며 가녀린 종아리에는 두터운 붕대를 감고 있어 조금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연재준은 갑자기 어젯밤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눈시울을 붉히며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던 그녀의 모습도 지금처럼 안쓰러웠었다.그는 숨을 고르고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거기 서서 뭐 했어?”유월영은 자초지종을 사실대로 말했다.“백유진 씨가 이 사업 회사에 금전적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그 질문에 대답했죠.”공장장이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돈이 되고 안 되고가 어딨겠습니까. 카누 제작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쉽지 않아요. 물에 뜰 수 있는 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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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간호사가 다가와서 백유진의 손바닥에 소독약을 발라주었다. 다친 곳이 쓰렸는지 백유진은 얕은 신음을 토해냈다.그러자 연재준은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가며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괜찮아?”“괜찮아요. 별로 심각한 상처도 아닌걸요.”백유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대표님은 어깨 안 아파요? MRI 검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연재준의 어깨는 백유진을 감싸는 과정에서 모서리에 부딪혀 부상을 입었다.연재준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난 괜찮아.”그는 백유진의 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상처 다 아물기 전에는 물에 닿으면 안 되는 거 알지? 감염되면 흉터 남을 수도 있어. 이따가 집으로 가정부 한 명 보낼게.”“저 혼자 잘할 수 있어요. 대표님은 가끔 저를 너무 어린애로 보시는 것 같아요.”유월영은 차가운 눈빛으로 알콩달콩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최근 들어 쌓인 피로와 실망감이 폭발하여 그녀의 이성을 잠식시켰다.그녀는 말없이 다친 다리를 끌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한걸음 움직이려 할 때마다 발바닥에서 극심한 통증이 전해졌다.이 사고로 가장 심각한 부상을 입은 쪽은 유월영이었다. 하지만 연재준은 그녀에게 그 어떤 관심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손바닥 조금 벗겨진 유월영을 걱정하며 가정부까지 보내주겠다고 했다.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끝장을 보자!그녀는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백유진, 아까 했던 말 끝까지 사실이라고 주장할 거지?”“언니, 저는 줄곧 언니를 동경해 왔어요. 저도 언니를 도와주고 싶지만 이렇게 심각한 사고가 났는데 언니를 위해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요….”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라.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의 말이 사실이라고, 자신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했다.유월영이 다시 물었다.“정말 내가 그 끈 건드리는 거 네 눈으로 봤어?”연재준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끼어들었다.“같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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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그런데 유월영의 대답은 예상밖이었다.“10분이면 돼.”백유진은 당황한 듯, 그녀를 바라봤고 연재준은 인상을 찌푸렸다.유월영은 다리 통증을 참으며 침대를 짚고 공장장에게 다가갔다.“공장장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공장장은 흔쾌히 대답했다.“말씀하세요.”유월영은 소리를 낮춰 말했다.“아까 공장을 촬영하던 그 인플루언서 좀 찾아주세요. 아마 부상자 명단에 있었으니 응급실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공장장은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감사해요. 부탁 좀 드릴게요.”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듣지 못했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연재준은 싸늘한 표정으로 유월영을 쏘아보고 있었고 반면 백유진의 표정은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유월영이 일부러 연기하는 건지, 진짜 증거가 있어서 저러는 건지 분간이 잘 서지 않았다.잠시 후, 나갔던 공장장이 검은 가방을 들고 돌아왔다.그는 그 가방을 유월영에게 건네며 말했다.“그 친구는 사정을 듣고 이걸 전달해 달라고만 하더군요. 사람들 앞에 나서기 좀 불편하다면서요.”유월영은 가방을 받아 카메라를 꺼냈다.그랬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이 카메라였다.그 수상한 남자가 눈치가 이토록 빠를 줄은 몰랐는데 예상밖이었다.유월영은 더 고민할새도 없이 카메라를 열어 영상을 찾았다.공장 내에서 느꼈던 이상한 기시감은 딱 들어맞았다. 그 남자는 그녀를 찍고 있었다. 공장뿐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찍힌 사진도 수두룩했다.백유진이 물었다.“그 카메라는 뭐예요?”공장장이 대신 답해주었다.“오늘 공장에 한 인플루언서가 방문했는데 카누 제작 과정을 찍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거든요. 이건 그 청년이 당시 가지고 있던 카메라입니다. 유 비서님이 왜 갑자기 이걸 가져다달라고 했는지는 저도 모르겠군요.”백유진은 아무도 보지 못하게 주먹을 꽉 쥐었다.유월영은 사진첩을 뒤지다가 영상 하나를 찾아내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그리고 원했던 장면을 찾아 정지 버튼을 누르고는 카메라를 백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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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그제야 유월영은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이건 저와 백유진 씨와의 약속이에요. 대표님을 포함해서 현장에 있던 모두가 증인이죠. 저는 약속을 이행했을 뿐이에요. 뭐가 문제 있나요? 또 제가 잘못했다고 하실 건가요?”온몸에 가시를 세우고 반격하는 그녀의 모습은 연재준이 평소 알던 유 비서가 아니었다.그녀의 모습이 연재준은 낯설었다.“쟤가 저를 모함하고 저를 사고 범인으로 몰아갔어요. 그 끈, 쟤가 당기고 저한테 뒤집어씌웠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대표님은 쟤 말만 믿고 같이 저를 범인으로 몰아갔죠. 아마 제가 사실을 밝혀내지 않았으면 억울해서 한강다리에서 뛰어내려도 죄책감을 못 이겨 자살한 사람으로 낙인 찍혔을 거예요. 제가 왜 이런 억울함을 혼자 감당해야 하죠? 저는 억울함을 당하기만 해야 하나요?”유월영은 연재준의 싸늘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에서 전에 없던 단호함이 보였다.“만약 스미스 씨가 이번 사고로 심각한 부상을 당했더라면 저는 제가 잘못한 일이 아닌데도 그분을 찾아가서 배상하고 사과해야 했나요? 귀뺨 한 대면 많이 봐준 거예요.”연재준은 한 번도 이런 모습의 유월영을 본 적 없었다.그가 기억하는 그녀의 모습은 온순하고 순종적이며 욕심이 없었다.침대에 엎드려 울고 있던 백유진이 고개를 들더니 소리쳤다.“맞아요. 제가 언니를 모함했어요. 귀뺨 한 대 맞은 거? 맞을 짓을 했으면 맞아야죠!”“하지만 하필 그 시각에 사고가 있었고 마침 그 자리에 언니가 있어서 거짓말을 좀 보탰을 뿐이에요. 영상 어디에도 제가 줄을 잡아당기는 모습은 찍히지 않았어요. 그럼 언니도 지금 저를 모함한 거 아닌가요? 언니가 지금 하는 말과 행동이 저랑 다를 게 뭐가 있어요!”유월영은 기가 차다는 듯이 상대를 노려보았다.이 새내기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처럼 바보는 아닌 모양이었다. 물론 정말 멍청했더라면 연재준의 마음을 잡지도 못했겠지만.백유진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계속해서 말했다.“대표님 옆에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언니가 질투 났어요.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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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뭐라고?!”“그 개 같은 연놈들, 잘 먹고 잘 살라 그래!”유월영은 그날로 사무실에 있던 개인 물건을 집으로 옮겼다. 그러다 보니 룸메이트인 조서희에게도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다.계속되는 조서희의 질문 압박에 그녀는 결국 최근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자초지종을 들은 조서희는 불같이 화를 내며 욕설을 퍼부었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던 그녀는 냉장고에서 찬 맥주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마시고는 유월영에게 물었다.“그래서 이대로 퇴사한다고?”유월영은 다친 다리에 연고를 바르며 덤덤히 말했다.“연재준에게서 떨어지라고 매일같이 권고했던 사람이 너 아니었어? 퇴사했다니까 갑자기 너무 섣부른 판단 같아?”“당연히 그건 아니지. 친구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는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이야. 하지만 그 여우년만 득을 본 것 같아서 그게 좀 걸려.”한참을 씩씩거리던 조서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래서 너 퇴사한다니까 연재준 그 자식은 뭐래?”“내가 할 말만 하고 나왔는데 아무 말 없었어.”조서희가 물었다.“쫓아 나오지도 않았어?”“응.”그녀가 느린 걸음걸이로 힘겹게 병원 대문까지 나와 택시를 기다릴 때, 백유진을 태운 연재준이 병원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았다.조서희가 잔뜩 성난 표정으로 말했다.“네가 퇴사 결정을 한 건 당연히 잘한 일이지만 그 자식이 한 번도 안 잡았다는 건 좀 그러네.”친구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유월영은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그녀도 3년이나 그를 위해 일하고 억울함만 잔뜩 안고 회사를 떠난다는데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그의 모습에 실망을 많이 했다.어쩌면 그녀는 그가 후회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원했을지도 모른다.아마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연재준은 보통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하늘이 그에게 좋은 출신과 외모, 능력까지 줬기에 그의 주변에 인재는 넘쳐났다.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오히려 유월영이 조서희를 위로했다.“좋게 생각하자. 퇴사하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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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소문은 참 빨랐다.많은 대기업 인사 담당이 유월영과 접촉했다는 소식은 며칠 사이에 업계에 쫙 퍼졌다.연재준과 몇몇 친구들은 주말에 경마장에 모여 작은 파티를 즐겼다.그러다가 유월영에 관한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눈치 없기로 소문난 소은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재준이 형이 유 비서를 그냥 보내줬다는 게 사실이야?”“당연히 사실이겠지. 우리 인사 담당자가 며칠 전에 유월영 씨 만나고 왔어. 직종이 잘 안 맞는지 아니면 나랑 재준이가 친구인 걸 알아서 그런 건지 보기 좋게 거절당했지만.”이혁재가 친구인 연재준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는 불만스럽게 대꾸했다.검은색 기마복을 입고 백마에 올라탄 연재준은 그 존재로도 멋졌지만 왠지 오늘 따라 고민 있는 사람처럼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친구들이 유월영 얘기를 하는데도 그는 못 들은 것처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생각해 보면 연재준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비록 최근 3년 사이 그의 신변에 여자라고는 유월영이 유일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그녀에게 잘해준 것도 아니었다.친구들은 두 사람 사이에 대해 사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적 있었다.약혼자도 아니고 한 번도 여자친구라고 인정한 적은 없지만 파트너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연재준은 한 번도 유월영을 위해 큰 돈을 쓴 적 없었다.상류층 자제들은 애인이나 파트너를 만나면 비싼 명품을 선물하거나 다달이 용돈을 주는 게 통상적이었다. 예를 들자면 백유진이 매일 들고 다니는 C사 한정판 가방도 연재준이 사준 것이었다.어릴 때부터 연재준과 함께 자란 이혁재가 정답에 가장 근접한 결론을 내놓았다. 이용하기 좋은 도구.정상적인 욕구를 가진 남자로서 연재준도 욕망을 해결할 여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녀 관계에 정성을 쏟고 싶지 않아서 그나마 옆에 붙어 있는 유월영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컸다.바꿔 말하면 유월영이 그에 대한 감정을 숨기려고 안간힘을 쓸 때, 연재준은 사실 아무런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백유진은 좀 특별한 경우였다. 그들은 지금도 그녀에게 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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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연재준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아까운 게 아니라 내가 유 비서를 배신했다고 생각하겠지. 넌 유 비서랑 내가 결혼까지 가기를 바랐던 사람 중 한 명이잖아.”그의 부모님을 제외하고 그녀와 언제 결혼하냐고 재촉했던 사람들 중에 서지욱도 있었다.서지욱은 의미심장한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유 비서는 정말 매력 넘치는 사람이야. 그런 사람을 풀어주면 주변에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늑대들이 이때다 싶어 달려들걸? 난 네가 나중에 후회할까 봐 걱정이야.”연재준이 담담히 답했다.“그 여자는 그런 사람 아니야.”“너 아닌 다른 남자에게는 눈길도 안 준다 그건가? 그렇게 자신 있어?”연재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친구를 힐끗 바라보고는 말했다.“그렇게 관심 있으면 너도 한번 시도해 봐.”“너 정말 못된 자식이구나.”그 말을 끝으로 서지욱은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서 걸었다. 연재준이 이렇게 자신 있어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3년 동안 유월영은 그에게 너무 순종적이었기 때문이었다.그녀는 마치 연재준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 같았다. 출근 시간이 아닐 때도 연재준이 부르면 무조건 뛰어나왔고 거의 쉬는 날 없이 일했다.그런 날이 지속되다 보니 연재준은 그녀를 자신이 명령하면 무조건 복종하는 시종 취급했다.아마 지금도 연재준은 백유진 때문에 그녀가 삐져서 관심 받으려고 고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서지욱도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고 생각했다.옆에서 보기에도 유월영은 연재준을 깊게 사랑하고 있었다.반면, 연재준의 생각이야 어떻든 유월영이 모두가 탐내는 인재임은 확실했다. 모임이 끝난 뒤, 소은석은 서지욱을 따로 불러 유월영의 연락처를 알아냈다.소은석은 전국적으로 소문난 바람둥이였다. 예쁜 여자만 보면 가지고 싶어 안달했는데 그런 그마저 꽤 오래 전부터 유월영에게 관심을 보였다. 다만 연재준 눈치가 보여서 대놓고 다가가지 못했을 뿐이었다.이제 두 사람이 갈라서기로 했으니 당연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그에게 친구 여자는 건드리지 않는 신조 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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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유월영은 다급히 중재에 나섰다.“김 대표님도 식사하러 오셨죠? 여기 버섯 수프가 맛있어요. 이따가 한번 드셔보세요. 그리고 지난번에 했던 제안, 며칠 더 고민해 보고 연락드릴게요.”김일주는 소은석을 힐끗 노려보고는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그래요. 이따가 꼭 먹어볼게요. 그리고 긍정적인 답,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 기억해 주세요.”말을 마친 그는 직장 동료라는 여자를 끌고 다른 테이블로 옮겼다.유월영이 고개를 돌리자 소은석은 다급히 말했다.“유 비서, 이러는 게 어딨어? 저 인간 제안 고민하지 말고 내 제안이나 고민해 줘. 나 진심아리고.”“뭐가 진심이라는 거죠?”유월영이 물었다.“진심으로 유 비서를 우리 회사로 영입하고 싶다고. 나 회사 경영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혼자서 운영 못해. 난 누구보다 유 비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고.”소은석은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걱정 마. 난 악덕 상사가 될 생각도 없고 직원들 일하는데 간섭할 생각도 없어. 모든 건 유 비서의 판단에 맡길 거야!”유월영은 아까 보였던 경박한 그의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났지만 지금 보니 이 사람 성격이 원래 그런 것 같았다. 오히려 조금 재밌을 것 같기도 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겠다고 답했다.고민해 본다는 애매한 대답에도 소은석은 입이 귀에 걸려서 무조건 기념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졸라댔다. 그는 사진을 SNS에 올리고 사랑과 일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았다는 문구와 함께 게시했다.유월영은 그의 연락처를 따로 저장하지 않았기에 SNS도 팔로우 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 그가 그런 사진을 올린 줄도 모르고 있었다.마침 SNS를 하던 서지욱이 사진을 보고 그대로 옆에 있는 연재준에게 건넸다.연재준은 그걸 보고도 딱히 표정 변화가 없었다.식사가 끝난 뒤, 유월영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소은석은 꼭 집에 데려다준다며 차를 가지러 갔다.유월영은 어쩔 수 없이 정문에서 그를 기다렸다.10여분이 지나가도 온다고 하던 소은석은 보이지 않았다. 전화해서 무슨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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