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의 말에 응대해 주면 얘기가 더 길어질 것 같았기에 유월영은 가볍게 화제를 돌렸다.“서 대표님께서 알아서 해주신다고 하셨으니까 저는 이만 가볼게요.”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는 듯한 말투에 연재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그러다가 그녀가 정말 뒤돌아서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일주일이나 성깔 부렸으면 이제 화 풀릴 때도 되지 않았어?”유월영은 멈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니까 그는 아직도 그녀가 병원에서 오해 받은 일 때문에 화가 나서 성질을 부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그때는 정말 이성을 잃었던 것 같았다. 미친 여자처럼 사람들 보는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까지 질렀으니 그의 눈에는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유월영은 더 설명해 줄 말이 없었다. 이미 퇴사하기로 결정했고 그들 사이에 남은 것도 이제 없으니 예전처럼 그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가던 길을 갔다.연재준은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서지욱은 소은석과 김일주를 데리고 경찰서에서 나왔다.“나이도 어리지 않은 놈들이 폭행으로 경찰서에 잡혀와? 너희가 애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걸 보면 좀 맞아야겠네.”김일주가 감격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지욱 형,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이 일은 절대 아빠한테 비밀인 거 아시죠? 아빠가 알면 또 카드 정지시켜 버릴 거예요.”“입 다물어 줄 수는 있지. 앞으로 뭐든 할 때 생각이란 걸 좀 하고 행동해.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어릴 때 다 같이 자란 애들끼리 이게 무슨 망신이야.”서지욱은 이들 중에서도 성격이 가장 차분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매번 동생들이 사고를 칠 때면 그는 웃어른처럼 동생들을 훈계했다.“알았어요, 형.”김일주는 주변을 둘러보고 유월영이 보이지 않자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가버렸다.반면 계단을 내려온 소은석은 다짜고짜 연재준을 잡고 물었다.“재준 형, 유 비서는 어디 갔어? 벌써 돌아간 거야? 아
화들짝 놀라며 뒤돌아선 유월영의 눈에 강아지처럼 눈을 반짝이고 있는 소은석이 들어왔다.“어쩐지 주변에서 들리는 음악이 귀에 익다 했어. 밖에 있으면서 왜 거짓말했어?”유월영은 혓바닥을 깨물고 싶었다.근처에서 고객사 미팅을 하던 조서희한테 술에 좀 취한 것 같으니 데리러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평소에 그녀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친구가 아니었기에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달려 나온 것이었다.하지만 조서희가 룸 번호를 말해주지 않아서 복도에서 연락을 기다리고 있던 중에 소은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그때는 긴말하기 귀찮아서 대충 친척 핑계를 댔는데 그가 복도까지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유월영은 마지못해 사실을 얘기했다.“친구 연락 받고 왔어요.”하지만 이미 한번 거짓말했다가 들켜버렸기에 소은석은 그녀가 또 거절하는 줄 알고 그녀의 팔을 잡고 안으로 끌었다.“어차피 다 아는 얼굴들인데 뭘 그렇게 쑥스러워해? 우리가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재준 형도 안에 있단 말이야!”유월영은 이 남자가 참 눈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다른 사람이었으면 아무리 연인 사이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제 각자 갈 길을 가기로 한 지금 이런 식으로 그녀를 끌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게다가 오늘 밤, 연재준은 백유진을 대동하고 나왔다.지금 백유진은 연재준의 옆에 얌전히 앉아 생소한 환경에 적응이 안 되는 듯 불안한 표정으로 그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유월영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더 연재준의 옆으로 몸을 밀착시켰다.유월영은 이미 내려놨다고 생각했지만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안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그녀에게 아직은 시간이 필요했다.저들을 보고 있자니 처음 연재준에게 이끌려 그의 친구들을 만난 그날이 떠올랐다.그때는 그와 만난지 3개월째 되는 날이었는데 그에 대한 마음이 가장 강렬했던 시기였다. 그때 문을 열어준 사람도 소은석이었다.소은석은 그녀를 보자 당황하더니 고개를 돌려 안쪽에 대고 소리쳤다.“재준 형이 여자친구 데려왔어!”그녀는 당황해서 걸음
유월영은 술잔을 집어 들고 세 잔 모두 원샷을 때렸다. 그리고 술잔을 거꾸로 들어 다 마셨다는 것을 인증하고는 웃으며 말했다.“마셨으니까 이제 됐죠? 은석 씨는 앞으로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랄게요. 오늘은 정말 급한 일이 있어 이만 가보겠습니다. 재밌게들 노세요.”연재준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말을 마친 유월영은 바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무도 그녀를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녀가 나가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누군가가 재미없다며 중얼거렸다.유월영이 원하던 바였다.여기서 시간 낭비할 바에야 깔끔히 마셔주고 자리를 뜨는 게 빨랐다.물론 당차게 거절하는 것도 좋지만 장소 가리지 않고 자존심만 세우면 오히려 저들의 재밋거리만 제공해 줄 뿐이었다.유월영은 연재준의 의견이 궁금하지 않았다. 반면 연재준은 그녀가 떠난 뒤, 담배를 비벼 끄고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술을 권했던 일당을 노려보았다.친구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그래?”아까부터 침묵만 지키고 있던 서지욱이 한마디 했다.“술까지 마시고 나갔으니 사고 당하기 쉬워. 재준이 너 안 따라가 봐도 돼? 여기 환경 복잡한 거 너도 알잖아.”백유진은 팔짱을 낀 손에 힘을 주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월영 언니는 워낙 술을 잘 마시니까 괜찮을 거예요. 친구를 찾는다고 했는데 대표님이 좀 나가서 같이 찾아주면 어떨까요?”하지만 연재준은 엉뚱한 얘기를 했다.“안 졸려? 졸리면 집에 데려다줄까?”백유진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그의 어깨에 기대며 사랑스럽게 말했다.“안 졸려요. 대표님이랑 있을래요.”소은석은 그제야 술이 좀 깨는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내가 한번 나가볼게.”한편, 조서희에게서 답장이 없자 유월영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받지를 않았다.어두컴컴한 복도에서는 알코올 냄새와 여자들 향수 냄새가 뒤섞여 불쾌한 냄새가 풍겼다.조금 전에 폭탄주를 연속으로 들이마셔서 그런지 냄새를 맡자마자 구역질이 올라왔다.정신없이 복도를 돌아다니
유월영이 말했다.“물론 제 의견을 거절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현명하신 분들께서 옳은 판단을 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두 회사가 거래를 트려고 접대 자리를 가지는 건 각자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너무 안 좋게 헤어지면 거래는 없던 일이 될 테고 물론 제 친구 회사에도 피해가 가겠지만 사장님들께도 이득이 없잖아요. 안 그래요?”일리 있는 말이었다.쌍방이 거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건 서로 이득을 취하기 위함이고 평등한 위치에 있었다. 다만 거래를 핑계로 여자직원들을 괴롭히기 좋아하는 남자들 특성상 오늘은 좀 과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거래를 없던 일로 하기에는 그들에게 가는 부담도 적지 않았다.한 남자가 유월영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말했다.“어디서 본 얼굴인데. 설마 당신… 연 대표랑 같이 다니던 그 비서 아니야?”다른 남자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어느 연 대표를 말하는 거야?”“신주시에 연 대표가 몇이나 더 있어? 해운그룹이지.”순식간에 분위기는 반전되고 남자들이 유월영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사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술자리를 파할 생각이 있었지만 이대로 둘을 보내주려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그래. 저 직원 데리고 나가도 좋아.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각자 한잔씩 올리면 오늘은 이만 보내주지.”룸에는 조서희를 제외하고도 여덟이나 있었다. 여덟 잔을 마시라는 소리였다.조서희가 비틀거리며 다가와서 말했다.“제… 제가 한잔씩… 올리겠습니다.”유월영은 친구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술잔을 들었다.“제가 이 잔을 마시면 내일은 계약서에 도장 찍는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좋아. 어디 마셔봐. 마시면 계약서에 당장 사인하지!”유월영은 잔을 들고 한 사람 한 사람 찾아가서 단숨에 원샷했다. 조서희는 친구가 안쓰러웠지만 마시지 않으면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을 알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다섯 잔 째가 되자 유월영은 이미 비틀거리고 있었다. 평소에 주량이 괜찮은 편이었지만 소은석 방에서 이미 폭탄주를 세
계약서를 받아낸 유월영은 한 손에는 계약서를, 한 손에는 몸도 못 가누는 조서희를 부축하고 소은석과 함께 룸을 나왔다.복도를 둘러보던 소은석이 그녀에게 물었다.“유 비서, 괜찮아? 친구는 좀 어때?”“괜찮아요. 도와줘서 감사했어요.”유월영은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비록 억지로 끌려들어가서 술까지 마셨지만 그가 알맞은 시간에 나타나줘서 위기를 벗어난 것도 사실이었다.처음 보는 그녀의 진솔한 표정에 소은석은 쑥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고맙기는. 전에 나랑 같이 일하자던 말이나 진지하게 고민해 줘.”유월영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고 답했다.그녀는 집까지 데려다 준다는 소은석을 간곡히 거절하고 조서희를 부축해서 술집을 나갔다.소은석은 그녀가 자신의 도움을 진심으로 고마워해 줬다는 사실에 싱글벙글 웃으며 룸으로 돌아갔다.그는 연재준을 보자마자 부루퉁한 얼굴로 물었다.“재준 형, 아까 나 왜 밀쳤어?”연재준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힐끗 바라볼 뿐이었다.소은석은 눈치 없이 웃으며 계속해서 말했다.“하지만 괜찮아. 그 기회에 백마 탄 왕자가 되었으니까. 유 비서가 나한테 고맙다고 내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겠다고 했거든.”서지욱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보았다.술집 직원이 연재준에게 다가와서 공손하게 말했다.“대표님, 운전기사가 입구에 도착했습니다.”유월영은 조서희를 부축해서 길가에 나온 뒤, 택시를 기다렸다.조서희가 울먹이며 사과했다.“미안해, 친구야. 나 때문에 너까지 고생했네.”“그래. 너 때문에 고생 좀 했어. 그러니까 이번에 보너스 받으면 크게 한턱 쏴.”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조서희는 당연히 그러겠다고 흔쾌히 대답했다.둘 다 술기운 때문에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월영아, 네가 예약한 콜택시 차량번호가 어떻게 돼?”유월영은 핸드폰을 힐끗 보고는 대답했다.“뒷번호가 429로 되어 있는데?”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번호가 있었다.조서희가 눈을 빛내며 한 곳을 가리켰다.“저기 있어
세 여자가 뒤에 타고 연재준은 조수석에 타게 되었다.유월영은 어쩔 수 없이 콜택시를 취소했다.그녀는 이 자리가 가시방석 같았다.단지 자신의 주도권을 주장하고 싶었던 백유진도 그들이 정말 차에 탈 줄은 몰랐기에 적잖이 당황했다.하지만 연재준이 자신의 말 한마디에 그들을 태웠다는 생각에 다시 의기양양해졌다.그래도 어딘가 신경이 쓰여서 백미러로 연재준의 표정을 살폈는데 연재준은 조수석에서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었다.차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여기서 침묵만 지키고 있으면 조서희가 아니었다.연재준도 싫지만 갑자기 끼어든 백유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이 요망한 여자를 어떻게 하면 골탕먹일까 한참 고민했다.그러던 그녀는 앞에 놓인 수제 장식을 가리키며 말했다.“월영아, 저거 왠지 낯익은데 저거 네가 만든 거 아니야?”사실이었지만 유월영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만든 게 아니라 산 거야.”하지만 조서희는 곱게 넘어가 주지 않았다.“저거 네가 만든 거잖아. 며칠 저거 만든다고 영상도 찾아보고 했던 거 나 기억나는데. 그 뒤로 저게 안 보여서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여기 있었구나?”연재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 장식을 힐끗 바라보았다.조서희가 계속해서 떠들었다.“그리고 이 카시트도 네가 산 거잖아. 그때 나한테 검은색 차에 어떤 색상이 좋냐고 물어봤었는데.”백유진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차는 남자의 로망이자 두 번째 집이라고 하는데 이 안의 모든 장식이 유월영이 해준 거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울컥했다.불편해하는 백유진을 보자 조서희는 그제야 갑갑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친구의 속마음을 알지만 유월영은 더 이상 대답해 주지 않았다.대답할 상황도 아니었다. 찬 에어컨 바람이 불어와서 머리가 어지럽고 식은땀이 났다.다리 부상은 거의 다 나았지만 오늘 너무 체력을 쓴 탓인지 갑자기 통증이 심해졌다. 속도 울렁거리고 모든 게 불편했다.하필이면 이때, 백유진이 차가 향하는 방향을 보고 입을 열었다.“대표님, 월영 언니네 집에 먼
눈치 빠른 운전기사는 서둘러 차 창을 올려 소리를 차단했다.유월영은 손을 빼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을 귀찮게 해드릴 수는 없죠.”연재준이 말했다.“날 귀찮게 한 게 어디 한두 번이야?”유월영은 한 번도 귀찮게 한 적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더 논쟁하기 싫어서 고개를 끄덕였다.“어쨌든 이제 그런 말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니까요.”연재준이 비웃듯 물었다.“우리가 무슨 사이인데?”유월영은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백유진은 그들이 다시는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겠지만 그녀 역시 그와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그와 같은 공간에 있으면 숨이 막혔다.그녀가 말했다.“대표님, 차멀미가 심해서 차를 타고 가기는 어렵겠어요. 어차피 사는 곳이랑 멀지도 않으니까 걸어서 갈게요. 가능하면 서희만 아파트 입구까지 데려다주세요.”연재준은 짜증이 벌컥 치밀었다.“잔말 말고 타.”“정말 타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그 말을 끝으로 연재준은 차로 돌아가서 출발을 지시했다.조서희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월영이 아직 안 탔는데요!”“걸어서 돌아간대요.”“그래서 그러라고 했어요?”연재준은 백미러로 그녀를 힐끗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조서희가 이를 부드득 갈며 말했다.“그럼 나도 내릴게요.”그녀가 내리자마자 차는 휑하니 떠나가 버렸다. 조서희는 욕설을 퍼부으며 친구에게 다가갔다.그런데 유월영 상태가 이상했다.복부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지며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월영아!”조서희는 다급히 친구에게 달려갔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파랗게 질려 있었다.불길한 예감이 들었다.택시를 잡고 싶었지만 이 시간에 길가에 지나가는 택시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녀는 콜택시 어플을 열었지만 근처에는 건축물도 없어서 출발지점을 정확히 설정할 수 없었다.조서희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이때, 휑하니 떠나갔던 차가 다시 돌아왔다.조서희는 다급히 달려가서 차 창을 두드렸다.“대표님, 빨리 우리 월영이 좀 살려
유월영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숙취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신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가까운 곳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침대머리에 물 있어.”연재준?유월영은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돌렸다. 침대 가까이에 그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대표님이 왜… 여기에 있어요?”그녀는 뒤늦게 자신이 있는 곳이 병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손등에는 아직도 수액을 맞고 있었다.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어요?”연재준이 물었다.“어제 일 하나도 기억 안 나?”“술을 많이 마셔서 취했던 건 기억나요.”속이 울렁거리고 배가 아팠던 것 같은데 집에서 푹 쉬면 나을 일을 병원까지 올 필요가 있었나 싶었다.그녀는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다시 물었다.“어떻게 된 거예요?”연재준이 뜻 모를 표정으로 답했다.“유산했대.”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뜯겨 나가는 것 같았다.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머릿속이 하얘졌다.유산….이미 한 번 경험했고 다시는 없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또 유산이라니?그녀는 바람 불면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천장을 바라보았다.‘내가 아는 유 비서가 이렇게 나약한 사람이었나?’연재준은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농담이야. 생리래.”유월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지금 뭐라고 했어요?”연재준이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생리통에 빈혈인데 음주까지 해서 반응이 심하게 왔다고 하더라. 유 비서 친구가 이상한 소리 지껄이길래 나까지 놀랐잖아.”‘그러니까 그냥 생리통이었다고?’유월영의 안색이 조금씩 돌아왔다.지난번에 유산을 겪고 두 달이나 생리가 안 와서 걱정했는데 하필이면 어제 올 줄이야. 아마 술 취해서 감각이 무뎌졌던 것 같았다.‘다행이다.’연재준이 그녀의 얼굴색을 살피더니 물었다.“다행이라고 생각해?”유월영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대표님은요? 제가 유산일 수도 있다고 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나요?”그는 그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
이혁재는 전문가를 찾아가 시험관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의사가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길이 30cm에 달하는 바늘을 꺼내 보이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걸로 난자를 채취합니다.”의사의 말에 몇 초간 멍해 있던 이혁재가 물었다.“이걸로 제 아내의 자궁에 찔러서 난자를 채취한다고요?”“네, 그렇습니다.”이혁재는 순간 격분하며 소리쳤다.“당신들 사람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의사는 급히 진정시키려 했다.“선생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이 수술은 정식 절차에 따라 진행되며 산모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그러나 이혁재는 진정할 수 없었다.“이승연이 손가락에 바늘 하나만 찔려도 아픈데 이런 무시무시한 바늘을 아내 몸에 넣겠다고요? 미친 짓이야!”그는 곧바로 차를 몰아 이승연이 있는 로펌으로 갔다.“이승연!”그녀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부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승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미쳤어?”“당신이 정말 시험관 아기를 하러 간다면 나 진짜 미쳐버릴 거야!”이혁재는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제발 내 생각 한 번만 해 줄 수 없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아이가 그렇게나 중요해? 그 아이가 나보다 더 중요해?”이승연은 그의 붉어진 눈과 분노, 억울함이 섞인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보였다.“네가 먼저 말해봐. 왜 그렇게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그 순간, 이혁재는 폭발하며 외쳤다.“몰라서 물어? 내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몰라? 당신이 그 사고로 다쳐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나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이 누워 있는 모습을 지켜봤어! 다신 그런 꼴을 못 봐!”“당신이 괜찮아질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누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당신이 아이 하나를 위해 다시 건강을 걸겠다고 한다면 난 절대 못 해. 절대!”이승연은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말했다.“나도 더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이혁재는 믿을 수 없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의학적으로 35세 이상의 임산부를 고령 산모로 정의하는 이유는 나이가 증가할수록 염색체 이상, 임신성 당뇨병, 고혈압 같은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산부가 이런 문제를 겪는 건 아니며 사람마다 다릅니다.”이혁재가 물었다.“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은가요?”“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즉, 그들이 아이를 원한다면 가질 수는 있지만 이승연의 건강이 크게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병원을 나서며 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우리, 아이 가지지 말자.”이승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의사가 아직 가능하다고 했잖아. 좋은 소식 아니야?”“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야! 난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누나 몸이 상하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이혁재의 단호한 태도는 1%의 타협도 없었다. 두 사람은 3분간 대치하다 결국 이승연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이혁재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거의 모든 일에서 아내에게 맞춰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결국 그는 부부 생활을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마치 순결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이승연은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며 도발했지만 이혁재는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경고했다.“그만해! 더 장난치면 난 손님방에서 잘 거야.”이승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잠옷 끈이 흘러내려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손님방에 간다고? 정말?”이혁재는 다시 반응해 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차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다음 날, 이승연은 그에게 쇼핑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열어본 이혁재는 남성용 순결 벨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그는 그것을 살지 말지 10초 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쇼핑몰 창을 닫고 억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순수한’ 한 달을 보냈다.이혁재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기
“...그런 헛소리를 믿어?”“당연히 안 믿지. 중요한 건 그 집에 CCTV가 있다는 거야. 영상 속에서 그의 행동이 정말 이상했거든. 정신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말이야. 만약 정신병으로 판정된다면 내 의뢰인은 원하는 판결을 받기 어려워질 거야. 귀찮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그러니 날 귀찮게 하지 마.”이승연이 사건 얘기를 마친 뒤, 이혁재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 아이 문제로 마음 쓰고 있진 않은지 조심스럽게 그녀를 몇 번 훔쳐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고민으로 보였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밤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다. 이혁재는 별다른 생각 없이 누워 있었지만 불을 끄자마자 이승연이 몸을 돌려 그의 위로 올라탔다.이승연의 이런 행동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혁재는 순간적으로 놀라며 긴장했다.“여보...”이승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헤쳤다. 그녀가 행동하기도 전에 이혁재는 이미 흥분한 상태가 되었다. 마치 뼈다귀를 발견한 강아지처럼 그는 즉각 반응하며 그녀의 실크 잠옷을 벗겼다.뜨거운 밤이 네 시간 넘게 지속된 후, 새벽에야 모든 것이 끝났다. 이혁재는 기진맥진한 이승연을 안아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콘돔 사용을 거부한 이유를 곱씹었다.‘혹시 누나도 아이를 원하기 시작한 걸까?’욕조 옆에서 물결을 손가락으로 장난치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여보, 혹시 아이를 갖고 싶어진 거야?”이승연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졸린 눈으로 대답했다.“모르겠어.”“내가 정말로 아이를 좋아해서 갖고 싶은 건지, 아니면 첫 아이를 잃고 그걸 잊지 못해 다시 아이를 ‘찾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아마도 내가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할 거야.”이혁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하나로 부족해?”이승연은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밀치며 답했다.“...저리가.”이승연이 아이에
유월영이 딸 고윤아를 낳은 후, 가족 외에 이 아이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 사람은 이승연이었다.유월영이 봉현진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사는 이승연은 바쁜 일정에도 3일마다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그녀는 유월영보다도 윤아에게 더 신경을 썼다. 매번 아이를 위한 선물을 사 왔는데 지난번에는 액운을 막아준다는 작은 방울이 달린 은팔찌를, 이번에는 귀여운 아기용품을 들고 나타났다.“너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아이의 성장이 조금 느껴지자 다음번에는 신상 옷을 사줘야겠다고 계획까지 세웠다.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윤아가 승연 언니를 대모로 모셔야 할 것 같네.”이승연이 윤아를 보기 위해 올 때마다 남편 이혁재도 동행했지만 그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아이가 아니라 아내를 따라오는 데만 신경 썼다. 한 번도 윤아를 안아본 적이 없는 그는 윤아에게 가장 무관심한 사람 중 하나였다.이 사실을 눈치챈 연재준이 물었다.“너, 우리 딸한테 무슨 불만 있어?”이혁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니, 그냥 난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관심이 없을 뿐이야.”연재준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그래? 그럼 예전에 이 변호사가 임신했을 때는 왜 그렇게 들떴었는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혁재는 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경계의 눈빛으로 이승연 쪽을 확인한 뒤 그녀가 듣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내 아내 앞에서 그 얘기 꺼내지 마!”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윤아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아니야. 넌 이 변호사가 네가 아이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첫 아이를 잃은 걸 떠올릴까 봐 두려운 거지.”역시, 연재준은 이혁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이승연은 올해 35세였다.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뒤 매일 운동과 요가를 하며 건강을 유지했지만 의학적으로 고령 산모에 해당했다. 더구나 첫 아이를 잃은 사고로 자궁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 임신하
이승연은 속았다고 느꼈다.이 남자의 따뜻함에 넘어가 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금 기분 좋겠지? 드디어 내 유산을 손에 넣게 됐으니.”이혁재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유산, 유산, 유산. 왜 항상 이 얘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야?’그는 복잡한 심정을 억누르며 허리를 숙여 그녀의 배를 감싸안았다.“여보, 내가 돈이 부족해 보여? 난 돈이 부족하지 않아. 지금 있는 돈으로 다음 생까지 살아도 충분해. 그 많은 돈을 뒀다 뭐 하겠어? 난 당신 돈을 원하지 않아. 그 유산이 당신한테 주는 부담을 덜어주고 싶을 뿐이야. 난 그냥 당신을 돕고 싶어. 내가 어떻게 해야 날 믿어줄 거야?”이승연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녀는 그런 시선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잠시 후,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충성스러운 강아지를 다독이듯. 이혁재는 항상 그녀에게 충실한 강아지처럼 느껴졌다.그 후로 두 사람은 함께 평생을 보내기로 결심했고 아이가 태어나면 행복한 세 식구가 될 거라고 믿었다.그러나 불행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법정에서 사고가 발생하며 아이를 잃었고 이승연은 깊은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의사는 깨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처음 한 달 동안 이혁재는 살이 빠져 송장처럼 변해갔다. 그는 며칠씩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으며 잠조차 자지 않았다. 생존 본능에 이끌려 겨우 물 한 모금을 마시곤 했지만 결국 집에서 쓰러지고 말았다.공주연이 아들을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다. 의사들은 그가 극심한 기아 상태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거의 굶어 죽을 뻔했다.이혁재가 깨어났을 때 공주연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뺨을 내리쳤다.“넌 네 엄마도 필요 없니? 네 아빠는 이미 날 버렸어. 세상에선 네가 전부야! 그런데 너마저 날 버리려 해?”하지만 이혁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공주연은 울면서 말했다.“승연이 아직 죽지 않았어! 곧 깨어날 거야. 그런데
이혁재의 시점사실, 두 사람의 불화와 이별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갈등이 발생했다.이혁재의 어머니인 공주연이 이승연에게 출산을 재촉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공주연은 겉으로는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승연의 유산을 노리고 있었다.그녀의 계산은 간단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씨 성을 가진 그 아이가 이승연의 유산을 당당히 상속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이혁재 역시 어머니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아이에게 상속자가 생기면 이승연의 친척들도, 우리 가족도 유산에 대한 욕심을 접고 물러나겠지. 그러면 그녀의 부담도 줄어들 거야.”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로 이승연에게 가서 아이를 갖자고 제안했다.그러나 이 말을 들은 이승연은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가 지금 따로 살고 있는 상황에서 아이를 갖자고?”그리고 이내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결혼 전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여기에 사인하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마.”이승연은 이미 이혁재가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그녀의 유산 때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혁재는 말로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치사한 방법을 선택했다.그녀가 복용하는 피임약을 엽산제와 임신 보조제로 몰래 바꿔치기한 것이다. 결국 이승연은 그의 의도대로 임신하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이승연은 약을 바꿔치기한 사실에 격분했고 심지어 이혁재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반면, 이혁재는 호텔에서 이승연과 오성민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오성민과 다시 만나고 있다고 오해했다.그날, 두 사람은 처음으로 크게 다퉜고 이혁재는 한강에 뛰어내릴 생각까지 했다.“너 정말 적당히 좀 해라.”연재준이 기가 막혀 혀를 찼다.“뭘 적당히 하라고!”이혁재는 술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내 첫사랑은 이제 날 원하지 않는데, 내가 살아서 뭐 하겠어!”서지욱이 나서서 말렸다.“그렇게 미련이 남으면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