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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작가: 고나름
소문은 참 빨랐다.

많은 대기업 인사 담당이 유월영과 접촉했다는 소식은 며칠 사이에 업계에 쫙 퍼졌다.

연재준과 몇몇 친구들은 주말에 경마장에 모여 작은 파티를 즐겼다.

그러다가 유월영에 관한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눈치 없기로 소문난 소은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

“재준이 형이 유 비서를 그냥 보내줬다는 게 사실이야?”

“당연히 사실이겠지. 우리 인사 담당자가 며칠 전에 유월영 씨 만나고 왔어. 직종이 잘 안 맞는지 아니면 나랑 재준이가 친구인 걸 알아서 그런 건지 보기 좋게 거절당했지만.”

이혁재가 친구인 연재준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는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검은색 기마복을 입고 백마에 올라탄 연재준은 그 존재로도 멋졌지만 왠지 오늘 따라 고민 있는 사람처럼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친구들이 유월영 얘기를 하는데도 그는 못 들은 것처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연재준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비록 최근 3년 사이 그의 신변에 여자라고는 유월영이 유일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그녀에게 잘해준 것도 아니었다.

친구들은 두 사람 사이에 대해 사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적 있었다.

약혼자도 아니고 한 번도 여자친구라고 인정한 적은 없지만 파트너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연재준은 한 번도 유월영을 위해 큰 돈을 쓴 적 없었다.

상류층 자제들은 애인이나 파트너를 만나면 비싼 명품을 선물하거나 다달이 용돈을 주는 게 통상적이었다. 예를 들자면 백유진이 매일 들고 다니는 C사 한정판 가방도 연재준이 사준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연재준과 함께 자란 이혁재가 정답에 가장 근접한 결론을 내놓았다. 이용하기 좋은 도구.

정상적인 욕구를 가진 남자로서 연재준도 욕망을 해결할 여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녀 관계에 정성을 쏟고 싶지 않아서 그나마 옆에 붙어 있는 유월영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컸다.

바꿔 말하면 유월영이 그에 대한 감정을 숨기려고 안간힘을 쓸 때, 연재준은 사실 아무런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백유진은 좀 특별한 경우였다. 그들은 지금도 그녀에게 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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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준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아까운 게 아니라 내가 유 비서를 배신했다고 생각하겠지. 넌 유 비서랑 내가 결혼까지 가기를 바랐던 사람 중 한 명이잖아.”그의 부모님을 제외하고 그녀와 언제 결혼하냐고 재촉했던 사람들 중에 서지욱도 있었다.서지욱은 의미심장한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유 비서는 정말 매력 넘치는 사람이야. 그런 사람을 풀어주면 주변에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늑대들이 이때다 싶어 달려들걸? 난 네가 나중에 후회할까 봐 걱정이야.”연재준이 담담히 답했다.“그 여자는 그런 사람 아니야.”“너 아닌 다른 남자에게는 눈길도 안 준다 그건가? 그렇게 자신 있어?”연재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친구를 힐끗 바라보고는 말했다.“그렇게 관심 있으면 너도 한번 시도해 봐.”“너 정말 못된 자식이구나.”그 말을 끝으로 서지욱은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서 걸었다. 연재준이 이렇게 자신 있어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3년 동안 유월영은 그에게 너무 순종적이었기 때문이었다.그녀는 마치 연재준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 같았다. 출근 시간이 아닐 때도 연재준이 부르면 무조건 뛰어나왔고 거의 쉬는 날 없이 일했다.그런 날이 지속되다 보니 연재준은 그녀를 자신이 명령하면 무조건 복종하는 시종 취급했다.아마 지금도 연재준은 백유진 때문에 그녀가 삐져서 관심 받으려고 고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서지욱도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고 생각했다.옆에서 보기에도 유월영은 연재준을 깊게 사랑하고 있었다.반면, 연재준의 생각이야 어떻든 유월영이 모두가 탐내는 인재임은 확실했다. 모임이 끝난 뒤, 소은석은 서지욱을 따로 불러 유월영의 연락처를 알아냈다.소은석은 전국적으로 소문난 바람둥이였다. 예쁜 여자만 보면 가지고 싶어 안달했는데 그런 그마저 꽤 오래 전부터 유월영에게 관심을 보였다. 다만 연재준 눈치가 보여서 대놓고 다가가지 못했을 뿐이었다.이제 두 사람이 갈라서기로 했으니 당연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그에게 친구 여자는 건드리지 않는 신조 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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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월영은 술잔을 집어 들고 세 잔 모두 원샷을 때렸다. 그리고 술잔을 거꾸로 들어 다 마셨다는 것을 인증하고는 웃으며 말했다.“마셨으니까 이제 됐죠? 은석 씨는 앞으로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랄게요. 오늘은 정말 급한 일이 있어 이만 가보겠습니다. 재밌게들 노세요.”연재준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말을 마친 유월영은 바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무도 그녀를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녀가 나가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누군가가 재미없다며 중얼거렸다.유월영이 원하던 바였다.여기서 시간 낭비할 바에야 깔끔히 마셔주고 자리를 뜨는 게 빨랐다.물론 당차게 거절하는 것도 좋지만 장소 가리지 않고 자존심만 세우면 오히려 저들의 재밋거리만 제공해 줄 뿐이었다.유월영은 연재준의 의견이 궁금하지 않았다. 반면 연재준은 그녀가 떠난 뒤, 담배를 비벼 끄고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술을 권했던 일당을 노려보았다.친구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그래?”아까부터 침묵만 지키고 있던 서지욱이 한마디 했다.“술까지 마시고 나갔으니 사고 당하기 쉬워. 재준이 너 안 따라가 봐도 돼? 여기 환경 복잡한 거 너도 알잖아.”백유진은 팔짱을 낀 손에 힘을 주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월영 언니는 워낙 술을 잘 마시니까 괜찮을 거예요. 친구를 찾는다고 했는데 대표님이 좀 나가서 같이 찾아주면 어떨까요?”하지만 연재준은 엉뚱한 얘기를 했다.“안 졸려? 졸리면 집에 데려다줄까?”백유진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그의 어깨에 기대며 사랑스럽게 말했다.“안 졸려요. 대표님이랑 있을래요.”소은석은 그제야 술이 좀 깨는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내가 한번 나가볼게.”한편, 조서희에게서 답장이 없자 유월영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받지를 않았다.어두컴컴한 복도에서는 알코올 냄새와 여자들 향수 냄새가 뒤섞여 불쾌한 냄새가 풍겼다.조금 전에 폭탄주를 연속으로 들이마셔서 그런지 냄새를 맡자마자 구역질이 올라왔다.정신없이 복도를 돌아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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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월영이 말했다.“물론 제 의견을 거절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현명하신 분들께서 옳은 판단을 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두 회사가 거래를 트려고 접대 자리를 가지는 건 각자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너무 안 좋게 헤어지면 거래는 없던 일이 될 테고 물론 제 친구 회사에도 피해가 가겠지만 사장님들께도 이득이 없잖아요. 안 그래요?”일리 있는 말이었다.쌍방이 거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건 서로 이득을 취하기 위함이고 평등한 위치에 있었다. 다만 거래를 핑계로 여자직원들을 괴롭히기 좋아하는 남자들 특성상 오늘은 좀 과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거래를 없던 일로 하기에는 그들에게 가는 부담도 적지 않았다.한 남자가 유월영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말했다.“어디서 본 얼굴인데. 설마 당신… 연 대표랑 같이 다니던 그 비서 아니야?”다른 남자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어느 연 대표를 말하는 거야?”“신주시에 연 대표가 몇이나 더 있어? 해운그룹이지.”순식간에 분위기는 반전되고 남자들이 유월영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사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술자리를 파할 생각이 있었지만 이대로 둘을 보내주려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그래. 저 직원 데리고 나가도 좋아.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각자 한잔씩 올리면 오늘은 이만 보내주지.”룸에는 조서희를 제외하고도 여덟이나 있었다. 여덟 잔을 마시라는 소리였다.조서희가 비틀거리며 다가와서 말했다.“제… 제가 한잔씩… 올리겠습니다.”유월영은 친구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술잔을 들었다.“제가 이 잔을 마시면 내일은 계약서에 도장 찍는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좋아. 어디 마셔봐. 마시면 계약서에 당장 사인하지!”유월영은 잔을 들고 한 사람 한 사람 찾아가서 단숨에 원샷했다. 조서희는 친구가 안쓰러웠지만 마시지 않으면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을 알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다섯 잔 째가 되자 유월영은 이미 비틀거리고 있었다. 평소에 주량이 괜찮은 편이었지만 소은석 방에서 이미 폭탄주를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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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시우가 유월영을 집까지 데려다주며 단호하게 말했다.“내일 내가 대신 병가를 낼 테니까 너는 집에서 푹 쉬어. 책도 보지 말고 문제도 풀지 마.”유월영은 그의 강압적인 태도에 살짝 당황하며 대답했다.“괜찮아. 나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의사 말 못 들었어? 네가 과로로 쓰러진 거라고. 시간이 부족하면 중요하지 않은 일부터 줄여야 해. 월영아, 모든 걸 다 해내려고 하지 마. 그리고 모든 걸 완벽하게 하려고도 하지 마.”현시우는 그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유월영은 항상 모든 일을 포기하지 못하고 최선을 다해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집착과 강박은 결국 그녀를 지치게 만들고 말았다.사람의 몸은 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유월영은 신중히 고민한 끝에 어머니에게 댄스 수업을 그만두겠다고 말했고 학교의 댄스 동아리도 탈퇴하기로 결정했다.춤은 그녀에게 단순한 취미였지만 이제는 정상적인 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었기에 잠시 내려놓는 것이 맞았다. 대학에 가거나 졸업 후 여유가 생기면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주말과 월요일까지 3일이 지나고 유월영은 학교로 돌아왔다. 몸 상태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감기도 거의 나아 약간의 콧물만 남아 있었다.유월영이 등교한 날, 연재준은 유월영의 교실 앞을 지나쳤다. 친구들과 웃으며 대화하는 그녀의 얼굴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발걸음을 돌렸다.병원에서 그는 원래 깨어난 유월영에게 잃어버린 옥불을 따질 계획이었지만 아버지로부터 온 전화로 인해 급히 돌아가야 했다. 부모님의 이혼 문제 논의에 꼭 참석해야 했던 것이다.그리고 익명의 영웅이 될 생각이 없었던 그는 방과 후 그녀를 찾아갈 계획이었다.연재준이 유월영의 반으로 향하던 중, 현시우와 마주쳤다. 연재준은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치려 했지만 현시우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그날 월영이를 병원으로 데려다줘서 고마워.”연재준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고맙다면 네가 아니라 본인이 와서 말해야지. 넌 대리인이야?”현시우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담담히

  • 천억대 몸값 비서님   제936화

    운전기사는 연재준의 상태를 걱정하며 우산을 들어주었지만 연재준은 비에 젖은 창백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그는 다시 병원으로 향했고 병실에 도착했을 때 유월영은 링거를 다 맞고도 여전히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연재준은 침대 옆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고 그의 몸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한참을 서 있던 그는 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유월영, 이제 너는 나한테 빚졌어.”그녀 때문에 잃어버린 것은 그녀가 반드시 갚아야 할 것이었다.얼마 후, 유월영이 천천히 눈을 떴다. 침대 앞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물웅덩이와 함께 현시우가 앉아 있었다.“...”유월영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병원이었지만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목이 쉬고 아픈 느낌이 들었다.“목 아파? 편도선염이야. 당분간 말하지 마.”현시우는 탁자에 있던 따뜻한 물을 들고 한 팔로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을 한 모금씩 먹이며 부드럽게 상황을 설명했다.“너 열이 나서 길에서 쓰러졌어. 다행히 누군가 널 병원으로 데려왔어.”“기절했다고?”유월영은 놀란 눈으로 현시우를 바라봤다. 폭우 속에서 길을 헤매던 기억은 있었지만 쓰러졌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따뜻한 물이 목을 적시니 조금은 나아졌지만 여전히 목이 아팠다.유월영이 억지로 몇 마디를 이어갔다.“누가...날 병원에 데려왔어?”현시우는 물컵을 내려놓고 그녀가 좀 더 편히 누울 수 있도록 베개를 정리했다.“간호사 말로는 너랑 같은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었는데 이름을 남기지 않았대.”“시험 끝나고 널 찾으러 갔는데 네 짝꿍이 네가 집에 갔다고 했어. 근데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걱정돼서 네 집으로 갔거든. 근데 네가 없더라.”유월영의 가족조차 그녀가 어디 갔는지 몰랐고 현시우가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위험에 빠진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가족들과 함께 학교에서 집까지의 길을 수색했다. 그러다 편

  • 천억대 몸값 비서님   제935화

    연재준의 화난 표정은 유월영을 바라보며 점점 누그러졌다.그녀는 너무 말랐고 얼굴이 창백했다. 입술에는 핏기가 없었으며 온몸이 빗물로 흥건해져 안쓰럽기 그지없었다.게다가 두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건 드문 일이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수건을 들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과 목에 흐르는 빗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다 부드러운 피부에 손이 닿자 순간적으로 손을 홱 뒤로 뺐다.소년의 얼굴에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귓불은 점점 붉어졌다.연재준은 숨을 멈추고 다시 유월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고 그는 그제야 살짝 안도했다.그녀가 자신을 기회를 노리는 이상한 변태라고 생각하는 건 원하지 않았다.연재준도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다.지난 18년간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던 자신이 왜 교내 축제에서 춤추는 그녀를 보고 이렇게 빠져들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유월영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너 그렇게 예쁘지도 않아. 사람 보는 눈도 별로고.”“왜 하필 현시우 같은 놈을 좋아하는 거야? 사람들은 항상 나랑 현시우를 비교하잖아. 그러니 너도 내 이름을 들어봤을 텐데...내가 너 대신 농구공도 막아줬고 도서관에서 햇빛도 가려줬잖아. 다 잊은 거야?”그는 자신의 기억을 곱씹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우리 함께 변태 선생을 잡은 적도 있잖아. 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거지...왜 한 번도 날 찾지 않았어?”“내가 너 앞을 그렇게 여러 번 지나갔는데 넌 왜 나한테 아는 척도 안 했어? 현시우가 나랑 친해지지 말라고 해서 그런 거야? 너 그렇게 말을 잘 듣는 아이였어?”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중얼거렸다.“나도 나름 괜찮게 생겼잖아. 남자 친구를 바꿔보는 게 어때? 내가 현시우보다 너한테 더 잘해줄 자신 있는데. 유월영, 내 말 들려?”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그는 이렇게 많은 말을 했지만 유월영은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연재준은 그녀가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

  • 천억대 몸값 비서님   제934화

    유월영은 줄곧 모범생이었다. 지각이나 조퇴는커녕 항상 성적도 우수했기에 선생님들은 항상 그녀를 신뢰했다. 그래서 그녀가 조퇴를 요청하자 선생님은 별다른 질문 없이 허락해 주었다.다만 유월영의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자 선생님은 부모님께 연락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유월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그녀는 어머니가 자전거를 탈 줄 모르고 아버지는 성격이 급했기에 아버지와 접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게다가 선생님은 그녀와 현시우가 가까운 사이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사적인 문제에 간섭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이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발언권이 크지 않았다.선생님은 현시우가 차량을 보내줄 것이라고 짐작하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조퇴 허가서를 작성해 주었다.“비가 많이 올 수도 있으니 밖에 오래 머물지 말고 빨리 집으로 가렴. 내일도 몸이 안 좋으면 꼭 병가를 내고 쉬어.”“감사합니다, 선생님.”갑작스러운 폭우가 내렸지만 유월영은 현시우에게 연락하지 않았다.그녀는 어젯밤 이미 그가 오늘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고작 20분 거리인데 그를 찾는다 건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다.비가 온다고 해도 우산을 가지고 있으니 괜찮을 거라 여겼다.그러나 유월영은 집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힘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갑작스러운 폭우가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쏟아졌고 강풍과 빗물 때문에 숨쉬기조차 어려웠다.유월영은 허둥지둥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쳤지만 강한 바람에 우산이 뒤집히고 순식간에 옷이 젖어버렸다.앞이 점점 보이지 않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휘청였다.그때 멀리서 날카로운 경적이 들렸다.빠르게 달려오는 트럭을 발견한 유월영이 급히 뒤로 물러섰지만 발밑에서 미끄러운 무언가를 밟아 넘어질 뻔했다.그 순간 강한 손길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그 사람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유월영은 그의 가슴에 부딪히며 싸한 솔잎 향이 풍겨왔다.본능적으로 그의

  • 천억대 몸값 비서님   제933화

    “준비는 다 끝난 거예요? 거주지, 의사, 그리고 돌봐줄 사람까지.”연재준이 물었다.“그래. 신 씨 아저씨가 다 준비해 주셨어.”어머니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래요.”신씨 아저씨라...연재준의 어머니는 내심 죄책감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묶어놓은 족쇄에서 벗어나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됐다.하지만 아들은 비록 성숙하고 독립적으로 보이더라도 아직 고등학생일 뿐이었고 과연 그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재준아, 걱정하지 마. 너희 아빠랑 이혼 합의서에 분명히 명시했어. 그가 재혼하더라도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도록. 연씨 가문과 해운 그룹은 앞으로 반드시 네 것이 될 거야.”이것이 그녀가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연재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는 지금 가문과 해운 그룹에 큰 미련이 없었다. 만약 정말 필요하다면 아버지가 열 명, 스무 명의 자식을 더 낳더라도 자신의 힘으로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가 굳이 애쓸 필요는 없었다.그는 마지막으로 허리를 굽혀 어머니를 안아주며 말했다.“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몸 잘 돌보세요. 방학 때 시간이 나면 찾아갈게요.”어머니는 감동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상자를 꺼냈다.“이걸 네게 주려고 가져왔어.”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투명하고 맑은 옥불이 들어 있었다.연재준은 그것을 알아보았다.“외할머니께서 남기신 거잖아요.”“그래. 외할머니께서 법사에게 받은 거라 아주 영험하다고 하셨어. 평안을 빌어주는 거야.”연재준은 다시 어머니에게 돌려주며 말했다.“어머니가 갖고 계세요.”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가 가지고 다니면 내가 마음이 놓일 것 같아.”결국 연재준은 옥불을 꺼내 목에 걸고 어머니를 배웅했다.차가 떠난 후, 그는 옥불을 교복 안쪽에 넣어 피부에 닿도록 하고 학교로 들어갔다.평소에도 말수가 적던 그는 오늘따라 더욱 차갑고 냉랭한 분위기를 풍겼다.쉬는 시간에 평소 그와 친했던 몇몇 친구

  • 천억대 몸값 비서님   제932화

    아침 6시 45분.유월영은 학교로 걸어가던 중 그녀의 짝꿍을 만나 두 사람이 함께 걸었다. 하지만 오늘 유월영의 상태는 조금 축 처져 보였고 짝꿍도 이를 알아차렸다.“너 어디 아픈 거야? 어젯밤 또 늦게까지 문제집 풀었어?”“아니야, 어젯밤은 꽤 일찍 잤는데 그냥 좀 어지러워. 왜 그런지 모르겠어.”짝꿍이 그녀의 이마를 만져봤지만 열은 없었다.“나 페퍼민트 오일 가져왔는데, 발라줄까?”“좋아, 고마워.”“뭘 이런 걸로.”유월영은 월반으로 들어온 학생이라 반에서 나이가 가장 어렸고 짝꿍보다도 두 살 어리니 마치 어린 여동생 같았다.페퍼민트 오일을 바른 후 짝꿍에게 돌려줄 때, 짝꿍의 시선은 먼 곳에 가 있었다.“저기 차 옆에서 누군가랑 얘기하고 있는 남학생이 연재준 아니야. 주변에 경호원들도 지키고 있네.”유월영은 제대로 듣지 못하고 짝꿍이 아는 사람을 본 줄 알고 물었다.“그럼 가서 인사라도 할래?”짝꿍은 과장되게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누가 감히 그래!”아무도 연재준에게 괜히 인사하러 가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짝꿍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빨리 가자, 빨리!”하지만 유월영은 달리자 머리가 더 아픈 느낌이 들었다.연재준은 고개를 돌리다 우연히 소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치마가 바람에 살짝 펴지며 만들어낸 곡선을 본 그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재준아.”차 안에서 여자가 그를 불렀다.연재준은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차 안을 바라보며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두 분이 합쳐서 일흔 살이나 되셨는데 아직도 스스로 내린 결정에 책임질 수 없다면 그동안 헛산 거예요.”여자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내가 정말 참을 만큼 참아왔어. 하지만 요즘 네 아빠가 자기 비서랑 동거를 시작했어. 더는 못 견디겠어, 미칠 것 같아. 나 정말 이혼해야겠어. 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내가 진짜로 미쳐버릴 거야.”연재준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몸 안에서 느껴지는 그 애매한 아픔을 완화하려 했다.이 여자는 그의 친어

  • 천억대 몸값 비서님   제931화

    연재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고 현시우가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이러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너도 알 텐데, 유월영은 내 여자 친구야.”연재준은 그제야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나랑 무슨 상관인데.”그리고는 그들을 지나쳐 곧장 걸어갔다.현시우의 친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시우야, 쟤네 너희 집이랑 관계 좋은 거 아니었어?”현시우가 미묘하게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그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거든. 그래서 더 마음에 안 들어.”그 감정은 꼭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마음에 들지 않고 타고난 기운이 맞지 않아 본능적으로 싫어지기도 한다.친구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그런데 걔가 유월영을 좋아한다니 좀 의외네. 전에 누가 춤 동아리에서 걔 봤다고 해서 그냥 지나가다가 본 줄 알았는데, 사실 월영이를 보러 간 거였나 봐.”현시우가 드물게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월영이는 걔가 감히 좋아할 만한 사람이 아니야.”점심시간유월영은 짝꿍과 함께 식당으로 가며 점심으로 뭘 먹을지 고민하고 있었다.학교의 급식은 맛있기로 유명해서 매일 ‘어떤 메뉴를 선택할까’라는 행복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두 여학생은 진지하게 메뉴를 논의하느라 뒤에 있는 사람들을 알아채지 못했다.“저 여자애 현시우 여자 친구 아니야?”옆에 있던 친구의 말에 연재준이 무심하게 대답했다.“걔가 네 귀에 대고 말하던? 유월영이 자기 여자 친구라고?”“그건 아니고. 현시우가 방과 후마다 월영이를 집에 데려다주고 월영이도 자주 현시우 보러 반에 오잖아. 지난 주말에는 놀이공원에서 둘이 같이 있는 걸 본 사람도 있다던데. 이게 여자 친구 아니면 뭐겠어? 남매겠냐?”연재준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단 한 마디를 내뱉었다.“학생 때 연애하면 좋을 게 없어.”친구는 말문이 막혔다.“너랑 연애하는 것도 아닌데...하긴 너랑 연애할 용기 있는 사람도 없잖아.”“...”연재준은 그를 무시하고 성큼성

  • 천억대 몸값 비서님   제930화

    “어쩔 수 없지.”현시우는 처음부터 그녀와 다툴 생각조차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절대 그녀를 이길 수 없었다. 특히, 유월영의 기분이 나빠지기라도 하면 그는 바로 달래기 바빴다.현시우가 텀블러 뚜껑을 열어 건네며 말했다.“마셔. 내가 직접 탄 거야. 그러니 꼭 다 마셔야 해.”유월영은 평소 물을 잘 마시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현시우는 매일 아침 그녀에게 물을 챙겨주기 시작했다. 마치 풋풋한 남자 친구가 도시락을 준비하듯이.유월영이 마지못해 텀블러를 받아서 들며 물었다.“이게 무슨 물이야?”“귤이랑 레몬을 넣어 우린 거야. 네가 좋아하는 새콤달콤한 맛이지. 맛있어.”그녀가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따뜻하네?”현시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찬물은 몸에 안 좋아.”유월영이 투덜댔다.“넌 왜 우리 아빠보다 더 아빠 같아? 내 잠자는 거, 물 마시는 거, 심지어 찬 거 먹는 것까지 간섭하잖아.”현시우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장난스레 말했다.“어제는 오빠라고 부르라고 해도 안 부르더니, 오늘은 Daddy라고 부르고 싶어?”유월영은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Father와 Daddy가 미묘하게 다른 뜻을 가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개방적인 사람이 아니었기에 현시우의 농담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이내 그를 쫓아가며 때리기 시작했다.현시우는 웃으며 그녀의 두 손을 잡아 자신의 무릎 위로 끌어올렸다. 둘이 장난을 치고 있던 그 순간, 교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유월영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갈색 농구공이 바닥을 굴러 책상에 부딪혔다.“...이게 뭐야?”현시우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누군가 농구를 하고 있네.”“복도에서?”유월영이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현시우가 짤막하게 대답했다.“날이 어두워졌으니 집에 데려다줄게.”유월영은 문득 중요한 걸 떠올렸다.“먼저 이 문제 푸는 거 가르쳐줘.”현시우는 펜을 쥔 채 투덜댔다.“가끔 진심으로 의심스러워. 너 나를 공짜 가정교사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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