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생은 반드시 해피엔딩의 모든 챕터: 챕터 21 - 챕터 30

693 챕터

제21화 담은 내가 더 커

“정아가 찾아서요.”나는 아무렇게나 둘러댔다.자정이 넘어 클라우드 호텔 주차장에 도착했을 땐 기선우는 이미 온몸에 성한 곳 하나 없었다.오버스러운 금목걸이를 한 뚱뚱한 남자 서너 명이 담배를 물고 있었다. 그러다 나를 발견하고는 비웃었다.“저분이 네가 연락한 빽이냐 이 자식아. 고작 아줌마를 불러왔어?”“설마 우리랑 하룻밤 보내는 걸로 목숨 값하려고?”입에 담을 수 없는 모욕적인 말이었다.나는 기선우 쪽으로 걸어가 그를 일으켰다. 멀쩡하던 젊은 사내가 눈탱이가 밤탱이 되어 못 알아볼 정도였고 그 모습은 꽤나 딱했다.“누나, 여기서 알바로 발레파킹 중이었는데 실수로 저분들 차를 살짝 긁었어요. 배상해 드린다고 했는데 2000만 원이나 달라고... 그렇게 많이는 없는데...”기선우가 작은 소리로 나에게 자초지종을 말해줬다.“무슨 차길래? 한번 봐봐.”내 물음에 기선우가 멀지 않은 곳을 가리켰다. 밝지 않은 불빛 아래 하얀 티구안이 세워져 있었다.고작 이 차로? 나는 자기도 모르게 눈쌀이 찌푸려졌다. 한 대가 4000만 원 정도일 텐데 조금 긁힌 거로 1000만 원이라니, 장사도 이런 장사가 없었다.“어때요 아가씨, 보상은 어떻게 하실라고?”“삐쩍 마른 게 가슴이 나보다도 작네. 하룻밤으로는 안되겠는데!”뚱뚱한 남자들이 상스러운 말을 계속 뱉어내자 기선우가 기를 쓰고 몸을 일으켜 세웠고 피로 얼룩진 손으로 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말 가려서 해! 아님 그냥 날 때려죽여!”그 말에 나는 살짝 놀랐다. 요즘 대학생들 다 이렇게 혈기왕성한 건가?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 내 뒤에 숨어 덜덜 떨 줄 알았는데 내 예상을 빗나갔다.기선우의 남자다운 모습에 뚱보들은 다시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나는 기선우를 몸 뒤로 숨겼고 무섭게 뚱보들을 쏘아보며 말했다.“3분만 기다려.”이렇게 말하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여기는 클라우드 호텔 소속이었고 기선우는 호텔 알바생이었다. 이런 일이 생기면 호텔 책임자가 나서서 해결하는 게 맞지만 아직까지 그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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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아무일도 없었어요

가슴 쪽이 시원해졌다. 나는 지금 분명히 옷이 벗겨진 채로 흐트러진 모습일 것이다.이 모든 상황의 장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아 보였고 머리를 파묻으려 했다.재빨리 손을 뻗어 배인호를 막았다. 하지만 말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또 날 시험하려는 거예요?”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배인호의 눈 속에 담긴 욕망이 반으로 사그라들었다. 그는 몇 초 정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다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까 상황이 꿈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 행동은 빠르고 냉랭했다.나도 조용히 몸을 돌려 배인호와 등지고 누웠다. 마음속에 낙담만 커져갔다.언젠가 나도 배인호를 몸으로 유혹하려 했다. 그와 아이를 낳고 간단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었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이혼하고 각자의 생활을 살기를 바랐다.새벽이 되어서야 잠든 탓에 나는 12시가 되어서야 잠에서 깼다. 일어나 보니 문자가 여러 통 와있었다.한 통은 어머님이 보낸 문자였다. 볼일이 생겨 세종시로 돌아간다는 문자였다.또 한 통은 민정이었다. 상업성 콘서트 제안이었다.마지막 한 통은 모르는 번호였다. 하지만 내용이 아주 놀라웠다. 어제 기선우의 손을 잡고 주차장에서 나오는 사진이었고 각도로 봤을 땐 연인 같았지만 기선우는 많이 다쳐 있었고 조금 불쌍해 보였다.나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머릿속에 여러 가능성들이 떠올랐다. 파파라치한테 찍힌 건가? 아니면 어제 그 뚱보들이랑 한패인 사람들이 찍은 건가?아빠와 남편의 신분이 특별하긴 해도 난 항상 조용하게 지내왔다. 배인호와 결혼하고 나서는 정아도 잘 만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파파라치한테 찍히게 된 거지?아무리 생각해도 그럴듯한 원인이 생각나지 않았다. 모르는 번호로 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음이 들리자마자 그쪽에서 끊어버렸다.할 수 없이 문자를 보냈다.「누군지 물어봐도 될까요? 이름이라도 알려주세요.」만약 사진이 새나가면 기선우와의 사이가 아무리 결백하다 해도 자초지종을 모르는 누리꾼들에게 오해를 살 것이다. 그냥 조용히 얼굴 반반한 애와 잠시 즐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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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애인을 둔 사람의 각오

여기는 서울시 교외의 한 낡은 동네다. 90년대 말에 지은 직원 복지 아파트 단지 옆에 이미 폐업한 대형 화학공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그때 그 시절 서중석은 이 화학공장에서 근무하면서 여기의 아파트 한 채를 분양받았다.10년 전, 화학공장에 부도가 났고 배 씨 가문에 인수되었다. 하지만 그 뒤 별다른 계획 없이 계속 이곳에 방치해두고 있었다. 만약 어느 날 계획이 생긴다면 이 근처에 있는 모든 단지들을 모조리 철거해야 한다.자본가는 피도 눈물도 없다. 배인호 같은 천생 장사꾼은 더 계략에 능했다. 그가 허락한 철거 보상금은 딱 표준선을 맞췄고 한 푼도 더 주지 않았다.하지만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배인호가 서란을 위해 자선가로 탈바꿈했다는 것을 말이다.서중석이 대표로 배인호와 면담했고 충돌을 예상했지만 배인호는 의외로 배중석에게 매우 친절했다. 곧이어 배상 표준을 바꿨고 입주민들 모두 표준선을 훌쩍 넘는 금액을 보상받게 되었다.이러한 행보는 서란을 화나게 하면서도 감동받게 했다. 화나는 건 이러한 상황을 애초에 배인호가 만들었다는 거고 감동받은 건 배인호가 그녀를 위해 이렇게 많은 걸 해줬다는 거였다.나는 차 안에 앉아 단지에 켜진 불들을 올려다보며 사색에 잠겼다.전생에 나는 배인호가 철거 보상 방안을 바꾼 사실을 알고 아빠한테 알아봐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내막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배인호가 여자 하나를 위해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계산해 보니 그때는 배인호가 서란을 쫓아다닌지 반년쯤 되던 때였다. 반년밖에 안되었는데 이렇게 그녀에 미쳐있었다는 거다.서란이 몇 동 몇 호에 사는지까지는 모르는 터라 나는 차를 운전해 크지 않은 단지를 천천히 돌고 있었다. 담장도 없고 경비도 없는지라 여기저기 돌아다니기에는 편했다.마침 한바퀴를 다 돌았을 때 익숙한 부가티 한대가 보였다.배인호가 올블랙 차림으로 차 앞에 기대어 있었다. 긴 다리로 차에 편안하게 기대어 있었고 머리는 살짝 아래로 떨구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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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학교에서의 우연한 만남

몇 분 뒤, 기선우가 전화를 걸어왔다. 말투는 몹시 황송했다.“누나, 이 돈 뭐예요? 학비쯤은 제가 마련할 수 있어요.”“너 아직 학생이고 공부가 본분이야. 학점 때문에 졸업 못하면 어떡해?”침대에 누운 채로 전화를 받아서 그런지 나는 목소리가 조금 풀려있었다.“누나 말 들어. 서울대 좋은 학교야. 시간을 알바에만 쏟아붓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 졸업해서 좋은 직장 얻으면 그때 갚아도 돼.”“그래도 저는...”기선우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목이 메는 듯했다.내 마음도 씁쓸해졌다. 그러면서 내가 너무 간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단순한 애를 잘 이용하고 있다. 기선우는 내가 착한 줄로만 알고 있다. 사실은 양의 탈을 쓴 승냥이인데 말이다.기선우 같은 출신으로 서울대에 입학하고 서울에서 살아남으려면 다른 사람보다 더 큰 노력을 감수해야 한다. 서란만 빼면 나는 기선우와 같은 불굴의 성품을 가진 사람을 진심으로 좋게 보고 있다.“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앞으로 돈 부족하면 나한테 얘기해. 후원한다고 생각할 테니까. 졸업해서 직장 찾으면 그때 갚으면 돼. 그래도 마음에 걸리면 이자 조금 보태서 갚으면 돼.”나는 이렇게 덧붙였다.이 정도 돈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기선우를 도우면서 내 마음도 조금은 편해질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기였다.기선우도 많이 쪼들렸을 게 뻔했다. 아니면 개강 전날까지 알바할 리가 없었다.전화를 끊고 기선우는 돈을 받았다. 그러고는 카톡을 보내왔다.「고마워요 누나. 앞으로 꼭 갚을게요.」 답장은 하지 않았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잠에 들었다.이튿날 일찍 잠에서 깬 나는 정성껏 치장을 했다. 하얀 드레스는 우아함을 자아냈고 연한 화장으로 미모를 더 뽐냈다. 첼로를 챙겨 이기사와 서울대로 향했다.학교로 다시 돌아오니 감개무량했다. 생기발랄한 신입생들을 보아하니 갓 대학에 입학했을 때가 떠올랐다. 엊그제 같았다.그때의 나는 기쁨에 들떠있었다. 배인호가 다니는 학교에 합격해 그와 학우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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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갑자기 들이닥친 유명세

청담동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점심시간이었다. 윤 집사가 돌아온 나를 보더니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여전히 때깔 좋은 음식들을 보니 배인호와 서란이 떠올라 갑자기 밥맛이 뚝 떨어졌다. 젓가락도 건드리지 않고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사모님, 혹시 어디 편찮으세요? 의사라도 불러드릴까요?”윤 집사가 친절하게 올라와서 물었다.그녀가 서란의 어머니만 아니었어도 나는 진심으로 윤 집사와 같은 도우미를 좋아했을 것이다.“아니에요. 그냥 입맛이 없어서 그래요. 다른 도우미 분들이랑 같이 드세요.”침대에 누운 채로 짜증스럽게 말했다.윤 집사도 감히 더 묻지 않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온갖 사색에 잠겼다가 잠에 들었다. 정아가 연거푸 연락만 해대지 않았어도 나는 이튿날까지 쭉 이어 잤을 것이다.정아의 크나큰 목청에는 훙분이 가득 차 있었다.“와 대박!!! 여신님!!! 서울대 여신 첼리스트가 돌아왔다!!”“잉?”잠을 덜 깬지라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링크 보냈어. 한번 봐봐. 지금 당장!”민정이 이렇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부재중 통화를 확인하니 세희와 민정이 모두 3통이나 와 있었다. 역시나 모두 받지 못했다.민정이 보내온 카톡을 확인했다. 실눈을 뜨고 링크를 열어보니 동영상이었다. 내용은 오늘 서울대 콘서트홀에서 한 연주였다.나는 제일 좌측 자리에 있었다. 누가 찍었는지 몰라도 이따끔 나를 줌인해서 찍었다. 마치 날 짝사랑하는 사람이 찍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아래는 네티즌들의 열광적인 호응이었다. 아우라 미녀에, 전 서울대 음악과 여신에, 댓글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복잡해 잠이 확 깼다.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당연히 기분이 좋았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 꽤 즐기고 있었다.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칭찬해 주는 사람이 적은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은 아버니의 신분 덕이었다. 순수히 나의 개인 매력만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 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마지막 영상까지 보고 나니 정아가 때를 맞춰 전화를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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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배인호 기채우기

‘둘이 찻집으로 밥 먹으러 온 건가?’마음속에 호기심이 생겼다.하지만 이내 빠르게 헤어 나왔다. 그들이 여기서 무엇을 하든 내가 상관할 바 아니었다. 멀지 않은 훗날 각자 제 갈 길 갈 사람들이었다.밥을 먹고 있는데 민정이 갑자기 좋은 소식을 들려줬다.“아 맞다. 이쁜이들, 통지할 거 있어. 나 허겸이랑 결혼하기로 했어!”민정의 말에 사레가 들려 죽을 듯이 기침했다.정아와 세희도 눈이 휘둥그레졌다.“대박, 너도 결혼이라는 무덤에 들어가기로 한 거야?”“다른 사람은 무덤일지 몰라도 나랑 허겸은 아니야. 무덤이 아니라 사랑의 성을 쌓는 거라고.” 민정은 허겸에 대해 자신만만했다. 얼굴로만 봐도 둘은 너무 잘 어울렸다. 하지만 출신으로 봤을 때 허 씨 가문은 이 씨 가문보다 못했기에 민정이에게 감히 함부로 대하진 못할 것이다.“남자는 하나같이 다 믿을게 못 돼. 민정아, 사랑에 눈 돌아가면 안 돼.”정아가 제일 다급해 했고 민정의 어깨를 잡고는 세게 흔들어댔다.“정신 차려! 반년만 더 고민해 보자.”민정이도 우리의 마음을 알고 있기에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웃으면서 정아의 손을 떼어냈다.“어이구, 너네는 결혼을 너무 무섭게만 생각해서 그래. 너네들이 다시 사랑의 희망으로 불타오르게끔 이 언니가 힘써볼게.”정아가 계속 설득하려 했지만 나는 정아에게 눈치를 줬다. 정아가 뜻을 알아채고는 입을 닫았다.좋은 친구긴 해도 우리의 뜻만 전달하면 되지 너무 많이 간섭해서는 안 된다.“화장실 좀.”밥을 먹고 다른 애들은 차를 마시며 입가심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랫배가 아파와 자리에서 일어났다.룸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계속 걸어갔다. 그중 한 방을 지나치는데 안에서 노성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인호 형 찐 사랑을 만났구나!”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계속 밖에서 듣고 있었다.박준이 깨고소해 하며 노성민의 말을 이었다.“근데 이걸 어째? 아가씨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데. 배 사장 매력도 안 먹힐 때가 있구나.”“남자친구도 있는데 포기하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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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헤어질까

“들어가, 우린 먼저 가볼게.”배인호가 화를 꾹꾹 누르며 이우범한테 이렇게 말하고는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이우범은 그렇게 계속 무표정으로 나를 바라봤고 이미 내 목적을 간파한 듯했다.배인호의 발걸음이 너무 빨라 끌려가다가 넘어질 뻔했다.“인호 씨 뭐 잘못 먹었어요? 화장실 가서 옷 바꿔 입을 시간은 줘야죠.”나도 화가 나서 배인호에게 막말을 해댔다.배인호는 그제서야 내가 왜 이우범을 시켜 생리대를 사다 달라고 했는지 생각난 듯 어두운 표정으로 나를 끌고 화장실로 향했다.“빨리 바꿔 입고 나와!”나는 손목을 문질렀다. 배인호는 진짜 난폭하기 그지없었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손목에 멍이 들 지경이었다.서란은 나와 몸무게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데 그녀가 과연 배인호를 버텨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배인호와 서란이 침대에 같이 있는 상상을 했다. 처음에 배인호는 무조건 억지로 밀어붙일 테지만 서란도 점점 그에게 빠져들 것이다. 그에 따라 잠자리도 점점 부드러워질 것이다.‘미쳤지, 미쳤어. 왜 이런 야릇한 상상을 하고 그래!’나는 신속히 옷을 갈아입고 이상한 상상을 머리속에서 지우고는 화장실에서 나갔다.배인호가 나를 보더니 말했다.“가자.”화가 많이 가라앉은 듯했다.나는 친구들이 있는 채팅방에 문자를 했다. 그러고는 배인호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생각과는 달리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차를 운전하는 조각상 같았다.집에 도착했고 배인호는 혼자서 서재로 향했다. 나는 바로 쉬고 싶어 얼른 샤워하러 갔다.머리를 말리고 나오는데 배인호가 들어왔다. 무슨 눈빛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썩 좋지는 않았다.“허지영, 얘기 좀 하자.”배인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나는 머리를 끄덕였다.10분 뒤, 나는 배인호의 뜻을 대략 정리했다.어떻게 놀든 서로 간섭하지 말자는 이 조항에 부가적인 요구가 더 생겼다. 그와 친구 사이인 사람과는 절대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전에 말했던 인스타에 올리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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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빈털터리로 나간다고 하면

웃는 얼굴도 보여준 적 없는 배인호가 나한테 비굴해지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전생에 수모를 겪고 나니 이제야 비로소 내가 배인호의 천생연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하지만 기선우는 달랐다. 그는 환생을 하지 않았으니 서란이 왜 이렇게 충동적으로 헤어지자고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그는 빨리 취하고 싶은지 쉬지 않고 술을 들이부었다.옆에 앉은 나는 그 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한번 환생한 사람으로서 배인호에게 처참하게 당하고 싶지 않으면 헤어지라고 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배인호가 이렇게 빨리 뜻을 이루는게 싫었다.“누나. 저 진짜 라니 많이 사랑해요. 우리 집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라니보다 부족한 남자인 건 알지만 노력하려고 했어요...”기선우는 이미 많이 마셨고 주사를 부리기 시작했다.“알지, 다 알지.”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경쟁자가 많긴 했지만 라니는 끝내 저를 선택했어요. 그때는 진짜 째질 듯이 기뻤고요. 후회하지 않게 하겠다고 맹세했어요. 그런 라니가 왜 변한 걸까요? 저 이제 어떡해요? 가슴이 진짜 너무 아파요...”기선우는 눈이 빨개서 울분을 토해냈다.너무 불쌍했다. 기선우가 계속해서 술을 들이부으려고 하는 걸 막았다.“너무 슬퍼하지 마. 변한 게 아닐 수도 있잖아. 생각해 봐. 그 문자는 그냥 대시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고 근데 아직 성공하지는 못했다는 거잖아. 성공했으면 기회를 달라고 사정하지는 않겠지.”기선우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축 처진 채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이번엔 달라요. 전에도 이런 상황 있었는데 그때는 제가 오해할 가봐 저한테 먼저 남김없이 다 말해줬었거든요.”“무슨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을 거야. 이럼 어때? 시간 봐서 밥 먹자고 라니랑 약속 잡아볼게. 얘기도 좀 해보고.”나는 기선우를 애써 달랬다.“고마워요 누나.”기선우가 애써 웃어 보였다.“고마울 것까지. 우리 친구잖아.”얼마 뒤 기선우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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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이우범에게 털어놓기

배씨 그룹 3% 지분이 나에게 유혹이 큰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빈털터리로 나간다고 해서 굶어죽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하루라도 빨리 이 시비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생활을 꿈꿀 수 있다.“안돼.”배인호의 망설임 없는 대답은 매우 의외였다.“인호 씨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내가 방해가 될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나는 끝내는 못 참고 그에게 귀띔했다.서란을 보름 정도 쫓아다녔으니 그녀의 남다른 점을 발견했을 것이다. 여자 연예인들한테도 이렇게 마음을 쓴 적이 없었다.배인호의 눈까풀이 축 처져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참 지나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그렇진 않을 거야.”배인호처럼 총명한 사람이 왜 감정에서는 이렇게 무디고 기어코 끝을 보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나는 한숨이 쉬고는 방으로 올라갔다. 더 이상 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이튿날 기선우가 문자를 보내왔다.「누나. 저 라니랑 잘 풀었어요. 좋은 말씀해 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다음에 꼭 밥살게요.」잠깐의 생각에 잠겼지만 답장은 하지 않았다. 배인호의 기분이 안 좋아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샤워를 마치고 아침 먹으러 내려왔다. 배인호는 이미 소파에 앉아 있었고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윤 집사님, 아침 메뉴는 뭐예요?”그를 지나쳐 다이닝룸으로 갔다.“소고기 탕면이에요. 어제 계란 조림을 좀 했는데 좋아하시면 탕면에 하나 놓아 드릴게요. 맛있어요.”윤 집사가 이렇게 말하며 면을 담기 시작했다. 푹 곤 제비집과 과일도 준비했다.구미가 당긴 나는 앉아서 먹기 시작했고 얼마 뒤 배인호도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윤 집사가 똑같은 아침을 대령했다.밥을 먹던 중 배인호의 전화기 울렸다. 확인한 그의 얼굴이 티 나게 어두워졌고 두 숟가락쯤 뜬 탕면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내일 오전 9시 우리 집으로 가는 거 잊지 마요.”나는 배인호가 까먹지 않게 귀띔했다.배인호는 대꾸하지 않고 거실에서 사라졌다.서란의 문자일 가능성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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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차 얻어타기

내가 배인호에게 이 모든 걸 알려준다고 해도 배인호는 여전히 내키는 대로 할 것이다. 그렇게 제멋대로인 사람이 서란을 손에 넣지 않고서는 포기란 없을 것이다.서란에게 이 모든 걸 알려준다고 해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죄책감에 때문에 나를 보기가 힘들어 배인호를 더 거세게 피하고 거절하겠지만 돌아오는 건 배인호의 더 강력한 수단일 것이다.기선우는 배인호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 기선우에게 알려준다고 한들 그가 할 수 있는게 없다. 나랑 원 나이트를 보내 배인호에게 모욕감을 줌으로써 심리적인 안정을 찾는 거, 아마 그뿐일 것이다.“그럼 왜 나한테 알려주는 거예요?”이우범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이제 알겠죠. 나는 속고 있는게 아니라 이혼하고 싶은데 인호 씨가 안 해주는 거예요.”마음속에 씁쓸함이 피어올랐다.“그래서 이우범씨가 더이상 배인호씨 막지 말았으면 좋겠어요.”이우범은 내가 배인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제일 잘 알고 있다. 그는 배인호와 같이 자랐고 그만큼 우리의 10년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봐 왔다.갑자기 내가 이런 말을 하니 이우범은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보였고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확신해요?”나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힘차게 말했다.“네. 확신해요!”이우범이 그 뒤로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헤어질 때가 되어사야 그가 한마디 했다.“체념하는 것도 좋아요.”예전에 나는 너무 집착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가 잡고 놓지 않으면 반드시 호응이 있을 줄 알았다.이우범은 방관자로서 이 결혼이 나만의 일방적인 고집임을 제일 잘 알고 있었다.돌아가는 길에 나는 전례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다른 사람도 끝내 내가 배인호를 내려놓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왔고 기분 좋게 잠에 들었다.아빠 생신을 축하드리러 가봐야 해서 이튿날 조금 빨리 잠에서 깼다. 선물을 준비하고 배인호에게 문자를 보냈다.“오늘 우리 집 가는 거 잊지 마요.”저번생의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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