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강이한은 한지음 때문에 이유영에게 이런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때의 강이한은 어땠는가? 강이한은 이유영에게 여러 차례 말했었다. 이유영이 자신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강이한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이 전부 사실이라며 오만하게 굴었고, 세상의 모든 유언비어를 믿으면서도 그녀만은 믿지 않았다. 이유영은 수없이 해명했지만 돌아온 건 언제나 차가운 말 한마디뿐이었다. “이유영, 이건 네가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야.”맞아, 그녀가 가장 많이 들어야 했던 말이 바로 이거였다. “무엇이나 당연한 건 없어요. 그 사람들은 그저 당신을 따르기로 한 것뿐이죠.”이유영은 앞에 놓인 우유를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복잡한 어조로 말했다. 박연준은 이유영의 말에 온몸이 경직되었다가, 이내 눈빛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그래, 그 얘긴 그만하자.”“...”“이제 서주에 왔는데, 앞으로 무슨 계획이라도 있어?”박연준이 그녀에게 물었다. ‘계획?’ 박연준의 질문에 이유영은 더욱 날카롭고 예리해진 박연준의 눈을 마주했다. 박연준은 멈칫하며 물었다.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야?”“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지금 아무것도 안 해도, 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에게는 충분한 복수가 될 테니까.”박연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 사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그저 그의 곁에 약혼자라는 명의로 있는 것만으로도 강이한에게는 복수가 될 테니까. 하지만, 과연 이유영에게 있어서 복수가 정말 그런 것일까? 박연준은 그녀를 탐색하듯 바라봤다. 박연준은 이유영이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의심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로열 글로벌을 관리할 정도의 사람이면서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 복수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박연준은 가볍게 웃었다. 못 믿겠다는 듯 말이다.이유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물었다. “왜, 믿지 못하겠어?”“이유영, 내가 널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야?”그랬다. 이유영에게 관심이
이유영은 박연준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순간 박연준은 그 미소에서 깊은, 그리고 위험한 무언가를 느꼈다. “내가 뭘 하려는 것 같아?”“...”이유영은 앞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박연준이 뭐라 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당신의 약혼녀로서, 최소한의 자유는 있는 거지?”“물론이지.”“점심은 기다리지 말고 알아서 먹어.”이 말을 남기고 이유영은 돌아서서 나갔다. 박연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은 쿵쿵 뛰고 있었다. ...이유영이 별장에서 나서자, 장혜주의 차가 도착해 있었다. 장혜주는 여진우가 붙여준 사람이었다. 차에 타자 장혜주는 봉투 하나를 이유영에게 건넸다. “요청하신 자료입니다.”“응, 고마워.”이유영은 자료를 받아 봉투를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그 안에는 서주 지역 내부의 박연준과 강이한의 세력 분포도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이 문서를 보고서야 비로소 그들의 세계가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깨달았다. 그리고 이 문서가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알 수 있었다. “한 가지 더 부탁할 게 있어.”“말씀하세요.”장혜주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서주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여진우의 사람들이 그녀의 주위를 철저히 감시하며 보호하고 있었다. 파리에서 이곳으로 오기까지, 정씨 가문 사람들은 이유영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이유영의 결정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그녀의 안전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박연준과 강이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사해 줘.”결국, 이유영은 이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과거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본인이 두 사람의 원한에 휘말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말이다. 예전에는 상관없었지만, 이제는 알아봐야 한다. 도대체 어떤 갈등 때문에 그녀가 이 혼란 속에 휘말린 것인지. “알겠습니다!”장혜주는 고개를
“만약 누군가를 찾으려 한다면...”강이한은 말하다가 갑자기 멈췄다.‘누군가를 찾는다고? 대체 누굴 찾으려는 거지?’강이한은 순간 생각에 잠겼다. 오래전에 기억이 떠오르는 듯하면서 마음이 찝찝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박연준도 이유영이 여진우 쪽 사람과 함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강이한과 마찬가지로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는 애써 화를 억눌렀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소름 돋을 정도로 섬뜩했다.“여진우 쪽 사람들 잘 감시해!”“네.”문기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이 타이밍에 이유영과 여진우가 연락을 맺고 있다는 게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유영이 서주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심상치 않았다.사람들은 박연준 약혼녀 신분으로 나타난 그녀를 박연준 라인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박연준이든 박연준 쪽 사람이든 다들 그렇게 쉬운 사람들이 아니었다.이유영이 아무리 덤덤한 태도를 보인다고 해도 그 일을 쉽게 넘길 리는 없을 것이다. 이번엔 강이한 뿐만 아니라 박연준까지 처리하려고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만약 이유영이 십 년 전 강이한이 그녀에게 접근한 이유와 박연준이 십 년 동안 그녀를 이용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다들 속이 빤했다.“되돌려보낼까요?”문기원은 은근히 걱정되었다.강이한과 달리 문기원은 박연준 곁에 오래전부터 함께 해온 사람이었기에 모든 일을 거의 다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문기원도 이유영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는 걸 더 잘 알고 있었다.박연준은 담배 한 대를 물고 길게 빨아들이며 눈살을 찌푸렸다.강이한이 이유영이 서주로 오는 걸 계속 원치 않고 심지어 오는 걸 막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그런데 박연준은 그와 달리 계속 당당한 태도를 보였었다. 그러나 지금 이유영이 여진우와 연락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약간 마음이 켕겼다.‘설마?’“문기원.”“네, 대표님.”“네가 보건대 이유영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나를 더 미워할까 아니면 강이한을 더 미워할까?”“...”문기원은 순간 흠
“하지만 이유영 씨가 힘들어할 때마다 옆에 같이 있어 주셨잖습니까. 이유영 씨가 어떤 태도를 보이든지요.”“...”“연준 님은 이유영 씨가 기댈 곳이었습니다.”문기원이 진지한 말투로 얘기했다.박연준은 미간을 약간 찡그렸다.하지만 문기원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사실 박연준과 이유영 사이는...강이한이 용서받을 수 없다면 박연준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여진우의 사람을 잘 지켜보고 있어.”그렇게 생각하면서 박연준은 더 한층 차가워진 말투로 얘기했다.어찌 되었든 이유영이 그해의 일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문기원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만약 여진우의 사람들을 방해하려고 한다면 그때는...”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이유영이 여진우의 사람을 시켜 정보를 알아내게 한다면 그 속도는 얼마나 빠를까. 게다가 여진우의 사람은 타지의 사람도 아니니 정보를 찾기 더욱 수월할 것이다.그렇다면 이유영은 원하는 정보를 아주 빠르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하지만 만약 그녀를 방해한다면...여진우의 사람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이니 빠르게 눈치채고 반격하려 할 것이다. 그러면 박연준에게는 독이 될 것이다.문기원이 그렇게 얘기하자 박연준은 미간을 더욱 세게 찌푸렸다.깊은 주름이 생긴 미간을 꾹 누르면서 박연준이 물었다.“그래서 네 뜻은 뭔데.”“이유영 씨부터 건드려야합니다.”‘이유영? 알아보지 말라고 하게?’이유영이 박연준과 강이한 사이의 오묘한 관계를 눈치챘다는 것은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 전에 조사해 보지 않은 이유는 아마 서주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게다가 이유영은 강이한과 다른 접점이 생기질 않기를 원했으니 여기에 신경 쓸 사이가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그분도 이유영 씨가 연준 님 곁에 있는 것을 어쩌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욱 조급해할 겁니다.”“...”문기원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어제 박연준이 강이한 앞에서 이유영을 데려가지 않았다.하지만 강이한 같은 사람이 이유영을 순순히
“...”문기원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나서 불안한 눈빛으로 박연준을 바라보았다. “이유영이 서주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연준 님과 강이한의 일은 결국 그녀에게 드러날 운명이었어요.”그랬다. 이전에 이유영과 강이한이 서로 상관없이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서주의 모든 일들이 영원히 이유영의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온유의 병을 생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온유가 강이한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딸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병은 분명히 상황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영천로.이유영은 카페에서 나와 강이한이 길가의 한 대형 SUV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았다. 네모난 차체, 눈부신 검은색과 남자의 강렬한 이미지가 결합하였다. 이유영은 그 모습을 보고 순간 표정이 어두워졌다. 남자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오자, 이유영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나를 따라다니는 거야?”“여진우에게 무슨 조사를 시켰어?”강이한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차가운 표정의 이유영이 입꼬리를 올리고 냉소적하면서 말했다. “당연히 조사했지, 당신이 서주에서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강이한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이유영은 계속 말했다. “이전에 파리에서 당신이 서주에서 벌인 모든 일을 들었을 때, 정말 놀랐어.”“...”“강이한, 지금 와서 보니, 우리의 그 10년이 정말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들었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이 모든 것을 실제로 마주했을 때 그제야 자신이 그의 앞에서 얼마나 바보처럼 행동하고 있었는지를 알았다.“여진우에게 무슨 조사를 시켰든지, 그만둬. 더 이상 진행하지 마!”“...”‘그만두라고? ‘강이한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을 보며, 이유영은 그 기운이 자신에게 보여주던 차가운 기운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의 한계를 건드린 듯한 느낌이었다.“나는 계속 조사할 거야. 당신은 어떻게 할 건데?”이유영은 욱해서 강이한을 바라
이젠 늦었다.강이한은 그녀를 절대 놓아주지 않았지 않은가.‘이제 그만두라고? 늦었어!’쿵, 택시 문이 닫히는 순간 강이한을 향한 이유영의 마음도 같이 닫히는 것만 같았다....저택으로 돌아오자 이유영은 저택 곳곳에 피어 있는 튤립을 바라보며 복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점심.이유영이 떠날 때 박연준에게 함께 점심을 먹지 않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박연준은 마치 그녀가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1시까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침과 맛이 다르네.”여전히 세무의 음식 맛이지만, 이유영의 미각은 매우 예민했다. 한 입 먹자마자 아침의 요리사와는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맞은편의 박연준은 앞에 놓인 레드 와인을 한 모금 마신 후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유 맛조차 잘못 느낀다면, 더 이상 남길 필요가 없으니까.”그의 말은 무심한 듯 다정했다. 이유영은 박연준을 무관심하게 바라보았다. 박연준의 눈빛은 여전히 온화했다. 그러나 그런 온화함이 오히려 이유영에게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이렇게 부드러운 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람을 착취하는 일을 하고 있다니, 정말 무섭다.“왜 그렇게 나를 바라보는 거야?” 남자가 레드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이유영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당신이 무섭다고 생각해.”이유영은 솔직하게 말했다. 박연준은 웃었다.“한때는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나는 다 먹었어.” 그렇게 말하면서 이유영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사실은 박연준을 마주하니 식욕이 없어진 것이었다.“너무 적게 먹었어. 좀 더 먹어!” 박연준은 강한 명령조로 얘기했지만 이유영은 대답하지 않고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런 이유영을 바라보며 박연준은 한숨을 내쉬었다.‘이 작은 고양이 같은 여자를...’문기원이 올 때, 박연준은 거의 한 병의 레드 와인을 마신 상태였다. 박연준의 마음속이 얼마나 괴로운지 알 수 있었다. “연준 님.” ‘
그래, 지금! 이게 바로 핵심이다. “신씨 가문은 그녀와 강이한의 관계를 알고 있으니, 그들과 강이한의 관계를 더욱 강화할 거다. 이 기간 동안 그녀를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해.” 오늘 이유영이 혼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사실 박연준이 여진우의 사람들이 이유영이 서주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이유영의 곁에서 이유영을 지켜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서주는... 이유영이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으니, 박연준도 주의해야 한다. “네.” 문기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연준의 뜻을 이해했다. 이유영을 데려오기로 결정했으니, 절대 이유영이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각. 이유영은 위층에서 소은지와 통화 중이다. 전화 너머 소은지의 목소리에는 이유영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다. “나는 현우 씨가 말하는 걸 다 들었어. 유영아, 돌아오는 게 좋지 않을까?” 서주가 도대체 어떤 상황인지, 이유영은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이전에 정국진이 왔을 때 정국진은 이유영을 끌어들이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그때 이유영은 그리 잘 알고 있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괜찮아, 나 걱정하지 마.” “유영아.” “괜찮아 은지야, 나 먼저 끊을게.” “잠깐만.” 이유영이 전화를 끊기 전에 소은지가 그녀를 불렀다. 이제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소은지도 더 이상 이유영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은 소월이가 이 모든 일의 도화선이 되었다. 강이한은 왜 하필 아이를 건드린 것인지! 왜 그깟 한지음을 위해 이유영에게 이렇게 큰 상처를 준 건지!이유영은 그저 담담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어떤 여자가 남편이 제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참을 수 있을까? 본인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괜찮지만, 아이?왜 아이에게 잘해주지 않는가?특히 강이한이 이온유, 즉 한지음의 딸을 소중히 안고 그렇게 행동한 것에 대해 이유영은 화가 치밀었다. 그 증
이유영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박연준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이 서주의 과일차, 맛이 별로야.” “원하면 내일 파리 쪽의 걸 가져다줄게.” “청하의 걸 가져다줘. 나는 그게 맛이 더 좋아.” 청하에서 자란 그녀는 파리로 돌아와도 청하의 맛이 더 익숙했다. 박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기봉. 그 사람의 행방을 알려달라고 하면 알려줄 거야?” “...”박연준은 잠시 멈칫했다. 찻잔을 들고 있는 손이 굳어졌다. 이유영을 바라보는 박연준의 눈빛이 의미심장해졌다.이유영도 그를 바라보며 같은 눈빛을 보냈다. 두 사람은 이렇게 깊은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도 상대의 마음을 읽으려 했다. 이런 심리 전술은 이유영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이미 다른 위험에 처했을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박연준이 웃었다. “이유영, 너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 앞에서 숨길 노력도 안 하겠다는 거야?” ‘숨길 노력?’이유영도 웃었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나는 너희와 달라. 내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항상 분명히 알고 있어!”뒤에서 수작을 부리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박연준이 말했다. “그럼 지금 너는 뭘 원하는데?” ‘뭘 원해?’ “전기봉의 소식이 필요해!”“너 정말 솔직하네!”“당연하지.”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항상 겉으로 드러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박연준은 다시 침묵했다. 이유영도 침묵했지만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연준이 그녀에게 답을 주기를. 박연준이 말했다. “유영아.” “응?” “그걸 제외한 다른 건 다 줄게, 괜찮아?” 이 순간 박연준은 부드럽게 얘기했다. 이유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박연준은 계속 말했다. “전기봉의 일이랑 널 10년 동안 이용한 일이랑 퉁치자는 거야.” 그녀가 전기봉의 소식을 엔테스 명우에게 팔았던 그 사건. 단
임소미는 이유영이 백산 별장을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심지어 반산월로 돌아가는 것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결국 이유영은 무력감 속에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서재에서 정국진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네 두 눈은 지금...”정국진의 목소리에는 멈춘 말 속에 깊은 안타까움이 묻어났고, 이유영은 그 감정을 생생히 느꼈다.“아빠...”“수술은 빨리 받는 게 좋겠다. 그래야 네 엄마도 마음이 놓일 테니까.”“하지만 저는...”“걱정할 필요 없다. 네게 가장 뛰어난 의사를 붙여줄 테니.”정국진은 이유영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이유영을 달래며 말했다.사실 정국진과 임소미는 누구보다도 긴장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수술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모든 준비를 더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아빠...”“응?”“아빠... 저, 너무 무서워요.”그동안 가족들이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 이유영은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이유영은 정말로 무서웠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그 고통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지금까지 그토록 자신의 두 눈을 지켜 왔건만 결국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마음속에서 숨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밀려왔다.전생에서 눈을 떴을 때, 이유영을 감싼 건 끝없는 어둠뿐이었다. 그 공포와 혼란은 그녀를 미치게 할 지경이었다.지난 생에서 이유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어둠 속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한순간에 어둠 속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시야가 어두워져 가는 과정을 느껴야 했다.그 느린 과정이 그녀에게는 더욱 고통스러웠다.“무서워하지 마라. 우리 모두 네 곁에서 함께할 거야.”“네...”이유영은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주르르 떨어졌다.그래, 두려워하지 말자. 이번 생은 전생과는 다르니까. 비록 전생의 운명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이번에는 가족들이 곁에 있어.전생에는 어둠 속에서 이유영 곁에는 강이한
이유영은 이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시력이 급격히 나빠진 원인이 바로 알프산 방문 때문이라는 사실도.알프산을 다녀온 후 이유영의 시력은 점점 더 악화하였고 자극을 받은 듯한 이상 증상들이 서서히 나타났다.“강한 빛도 견디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런 곳에 갈 생각을 했니?”임소미는 완전히 화가 나 있었다.이제 이유영이 어디를 가든 임소미는 더 이상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 장소가 이유영의 눈에 큰 해를 끼칠 수 있는 곳이라면 더욱더.“엄마, 정말 별일 아니에요...”이유영이 조용히 말했다.“더 이상 말하지 마!”임소미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잠깐 잊고 있었어요.”이유영은 진심으로 말했다.미리 알았더라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이전에도 의사가 주의를 당부한 적이 있었지만, 눈 덮인 곳에 갈 일이 거의 없었기에 점점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그러다 이번에 큰 자극을 받게 되었고 일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줄은 이유영 자신도 몰랐다.“잊었다고? 그 잊음 때문에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할 수도 있는데, 그걸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니?”임소미의 목소리에는 분노를 넘어선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임소미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유영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엄마, 미안해요!”“미안하다는 말은 필요 없어. 나는 네가 건강하게 지내는 것만 바랄 뿐이야, 알겠니?”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었다.어떤 상황에서도 자식이 잘 지내길 바랄 뿐이었다.이유영은 그 말에 가슴이 따뜻해졌다.이유영은 손을 뻗어 임소미의 가냘픈 허리를 감쌌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임소미는 여전히 이렇게 날씬하고 아름다웠다.임소미는 평소에도 관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알겠어요, 엄마. 화 풀어요, 네? 저, 수술받을게요.”“유영아...”“엄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네?”임소미의 품에 안긴 이유영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임소미는 심장이 떨릴 정도로 안쓰러웠다.임소미는 이유영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우지는 빠르게 물을 닦아냈다.손바닥에 남은 차가운 물기는 이유영에게 시력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했다.언젠가 이유영의 두 눈은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그 공포는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서서히 퍼져 나왔다.아침에 물 한 잔을 쏟은 이후, 이유영은 하루 종일 우지와 우현의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이유영은 이제 옷장 속에서 강렬하고 선명한 색깔의 옷들만 겨우 식별할 수 있었다.나머지 색깔들은 이미 모두 희미한 회색빛으로 뒤덮여 있었다.아침 식탁.우지는 조심스럽게 죽을 이유영 앞에 놓으며 말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 아직 조금 뜨거울 수 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이유영이 숟가락을 집으려고 할 때, 우지는 바로 숟가락을 건네주었다.“고마워요.”이유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거센 혼란이 몰아치고 있었다.가슴은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았다.그때, 임소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유영은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엄마.”“왜 아침 같이 먹으러 오지 않았어?”“좀 늦게 일어났어요. 엄마 먼저 드세요.”“그럼 오전에는 꼭 돌아와서 월이랑 같이 놀아 줘. 네가 이곳에 안 온다고 하면 월이가 속상해할 거야.”“네, 알겠어요.”월이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유영은 가슴이 더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월이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이유영의 마음속에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전화를 끊고 난 후.이유영의 세계는 다시금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이유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여진우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마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만약 임소미와 정국진에게 이유영만 존재했다면... 그들은 얼마나 더 힘들어하셨을까?다행스러움과 무거움이 동시에 몰려왔다.아침 식사 후.이유영은 운전기사의 차를 타고 백산 별장으로 돌아갔다.임소미는 이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날, 한지음이 떠난 후, 이유영은 손으로 배를 감싸안고 한동안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이유영의 머릿속에는 강이한을 떠난 뒤, 아이와 함께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이 가득했다.당시의 이유영에게는 눈을 뜨면 온통 어둠뿐인 날들이 이어졌고 어떤 처참한 미래가 닥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만 같았다.강이한을 떠나겠다는 결심은 확고했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를 알게 되는 순간, 그 용기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이유영은 두려웠고 미칠 것 같았다.자기 삶이 아무리 비참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유영이 강이한의 결정을 기다리기도 전에, 이유영 스스로 선택을 내리기도 전에 모든 것이 한 차례 대화재로 끝이 났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한지음을 용서하라고 했다.한지음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이유영을 위해 희생했다고 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결코 알지 못했다.그것이 오직 자신의 문제였다면, 어쩌면 모든 것을 잊고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아이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용서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이유영이 아이를 위해 온갖 고통을 겪었던 그 마지막 시간 속에서 이미 결정되었다.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어떤 희생을 했든 한지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네, 좋아요! 사모님께 가서 바로 말씀드릴게요. 사모님께서 아가씨가 수술을 빨리 받겠다고 결정하신 걸 들으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우지가 기쁜 얼굴로 방을 나가는 모습을 본 이유영은 그저 고개를 천천히 저을 뿐이었다.그날 밤.이유영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새벽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결과를 받아들이는 일은 이유영에게조차 쉽지 않았다.오랜 세월 지켜온 신념들이 의사의 진단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어두운 방 안.어스름한 방안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이유영을 응시하고 있었다.차가운 손가락 끝이 이유영의 목 아래 울퉁
의사가 이유영의 상태를 면밀히 점검했다.그 결과, 백산 별장과 반산월은 조명에 한층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했다.임소미와 정국진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모든 조명을 다시 교체했다.밤이 되면 이유영이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고 낮에도 햇빛이 강하면 외출을 엄격히 제한했다.임소미가 이유영의 눈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으니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눈에 자극을 주지 않도록 모든 것이 신중히 조율되었다.백산 별장에 밤이 찾아왔다.사람들은 모두 조명이 너무 어둡다고 느꼈고 시야가 흐릿한 이유영조차도 조명이 이전보다 더 어두워졌음을 느꼈다.“엄마, 이 정도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저는 이미 제대로 볼 수 없는걸요.”이유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유영이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지금의 이 조명은 이유영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하지만 임소미는 딸의 말을 단호히 받아쳤다.“나도 알아. 이 조명이 사람들한테 너무 어둡게 느껴질 거라는 거. 그래도 강한 빛이 네 눈에 더 큰 손상을 줄 수도 있잖아.”임소미는 단호히 말했다.“...”하지만 이렇게 어두운 조명은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눈에 자극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됐어. 엄마 말대로 해. 네 수술이 성공하기 전까진 이 조명 상태 그대로 유지할 거야.”임소미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이유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알겠어요.”이유영은 엄마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임소미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이유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그날 밤.이유영이 반산월로 돌아왔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에게 말했다.“조명을 모두 교체했습니다. 이제 아가씨의 눈에는 크게 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안경은 꼭 착용하셔야 합니다.”“안경이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알겠어요.”예전엔 눈이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안경을 굳이 쓰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어졌다.
임소미의 가슴은 비수로 찔린 듯 아팠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낸 끝에 다시 찾은 딸이니,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조금 전, 의사가 임소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도 몰랐다.“이유영 씨가 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의사의 한마디는 그녀가 실명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했다.“정말 강이한을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어!”임소미는 울먹이며 감정을 터뜨렸다.강이한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이 눈이 이렇게 된 이유는 모두 강이한이 한지음 때문에 이유영을 감옥에 넣었기 때문이다.만약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이유영도 그 끔찍한 화재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임소미는 지금껏 이유영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딸의 흐릿해진 눈은 매 순간 그녀에게 그날의 고통을 떠올리게 했다.이유영은 어떤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던 걸까?“그만하세요, 엄마.”강이한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유영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강이한에 대한 이유영의 감정은 이제 미움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어머니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는 몰랐다.이유영 역시 한 아이의 엄마였다. 자식이 상처받을 때 부모가 느끼는 그 분노와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렇다.바로 그때도 이런 감정이었다.강이한이 아이와 관련된 일에서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이유영은 그의 목을 비틀고 싶은 심정이었다.더군다나 임소미는...어릴 적부터 이유영과 함께하지 못했기에 딸이 이런 상처를 입은 걸 본 순간 느꼈을 분노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수술하면 안 되겠니?”임소미의 목소리는 떨림으로 가득했다.그래, 수술.이 눈은 어서 빨리 수술을 받아야 했다.그 끔찍한 화재로 인해 이유영의 두 눈은 너무나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기본 재활치료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오직 수술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엄마, 수술은 저한테도 위험
박연준은 전기봉 하나로도 이미 머리가 아팠다.그런데 이유영까지 그에게 지나치게 냉혹하게 굴었다.이유영의 눈에는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강이한에게 비친 이유영의 모습은 모든 것을 잃고 허공을 바라보는 사람 같았다.이온유가 집으로 돌아왔다.아이에게 놀고 싶다는 욕구는 본능이었다. 퇴원 후 며칠간 쉬고 나니 매일 밖에 나가고 싶어 했다.“아빠.”온유는 어느새 훌쩍 자란 모습이었다.온유가 방으로 들어온 것을 본 강이한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끄며 물었다.“어디 갔다 왔어?”“놀이공원이요!”놀이공원 이야기가 나오자, 온유의 얼굴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그곳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아마도... 어릴 적에 가고 싶을 때 가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야 놀이공원을 좋아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이번 달은 놀이공원은 쉬자, 알겠지?”“네.”온유는 작은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아빠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아이였다.놀기 좋아하면서도 말을 잘 들었다.강이한은 온유를 안으며 속상한 듯 말했다.“몸이 이제 막 나았으니,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해야 해.”“정 아저씨가 한적한 곳만 골라 데려갔어요.”온유는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강이한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공공장소는 어디든 위험이 도사릴 수 있었다.한 차례 병을 겪고 난 뒤, 강이한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자리 잡았다. 그래서 온유가 그런 곳에 가는 것이 늘 불안했다.“온유야.”“네, 아빠.”“아빠가 며칠 동안 출장을 가야 해. 집에서 얌전히 있어야 한다, 알겠지?”“아빠는 온유를 안 데려가요?”아빠가 출장을 간다는 말에 작은 아이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그도 그럴 것이.이온유에게 있어서 강이한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그런 아빠가 집을 떠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서운함이 얼굴에 드러난 것이었다.강이한은 말했다.“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네 몸은 이제 막 나아졌잖아, 응?”“네.”작은 아이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꿈도 꾸지 마!”강이한은 신지수에게 냉정히 잘라 말했다.신지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말 차갑기 짝이 없네. 그 연회에서 내가 너에게 첫눈에 반했을 땐, 최소한 미소 하나쯤은 보여줄 수 있었잖아.”첫눈에 반했다고? 신지수가? 신씨 가문의 사람이 무슨 낭만적인 감정 따위를 가질 여유가 있겠는가? 라이터가 ‘딸깍’ 소리를 내며 불꽃을 피웠고 강이한은 담배를 천천히 피워 물었다. 신지수는 담배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신지수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연서가 당신들 사이의 깊은 골이라는 건 너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안 그래?”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연서라는 존재는 실재하는 사람이었다.그렇기에 연서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늘 잠재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언젠가는 드러날 수밖에 없는 진실이었다.신지수의 말이 끝나자, 강이한은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신지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두 사람 사이엔 이제 어떤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아 보여.”“신지수!”강이한의 목소리가 더 깊어지고 무거워졌다.강이한의 표정에는 이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고집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신지수가 말했다.“네가 이유영의 딸을 이용해 한지음의 딸을 구하려 했다는 소문을 들었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신지수가 이 사실을 처음 듣게 되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비록 오랜 세월 서주에 있었지만 그래도 강이한은 이유영을 꽤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그런데 굳이 왜 한지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행동을 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강이한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닥쳐!”그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강이한의 몸에서 냉랭한 기운이 흘러나왔다.신지수는 비아냥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강이한, 사실 이유영도 너한테 그렇게 중요한 존재는 아니지, 그렇지?”“언제부터 이유영과 친한 사이였어?”신지수가 이유영의 이름을 너무나 친근하게 부
“그때, 너는 왜 한 번도 멈출 생각 하지 않았는데?”과거에도, 이번 생에서도, 홍문동 사건에서도 강이한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이번 생에서 이유영을 감옥에 보낸 일도 마찬가지였다.심지어 월이를 이온유를 구하는 도구로 이용하려 할 때조차 그는 멈출 줄 몰랐다.그런데 그런 강이한이 무슨 자격으로, 무슨 염치로 이유영에게 멈추라 말할 수 있는가?“만약 그 여자였대도 넌 똑같이 행동했을까?”그 여자는 연서였다.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강이한의 숨소리가 순간적으로 거칠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왜 말이 없어?”강이한의 불규칙한 호흡을 들으며 이유영의 목소리는 더욱 차갑게 내려앉았다.전화기 너머, 강이한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갔다.만약 이유영이 연서였다면, 한지음과 이온유에게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까?“안 그랬을 거야, 맞지?”강이한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이유영은 차가운 조소를 담아 말을 이었다.강이한의 마음은 폭풍 속 배처럼 거칠게 흔들렸다.두 사람은 전화기 너머로 대치하며 날 선 긴장감을 이어갔다.이유영이 말했다.“강이한, 너 정말 잔인하다.”“유영아...”막상 강이한이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진짜 잔인한 건가?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잔인함 이상의 존재였다.이유영이 차갑게 말했다.“다시는 전화하지 마.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이제는 들을 마음이 없으니까.”이 말을 끝으로 이유영은 전화를 끊었다.세상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이유영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졌고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방금 전 통화에서 이유영이 던진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약 연서였다면, 그 일들이 벌어졌을까?’이유영은 강이한의 주저함과 침묵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연서라는 여자가 강이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한편, 전화기 너머의 강이한.강이한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엉켜 흔들리고 있었다.이유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