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정국진의 방에서 그 사진을 봤을 때 이유영은 알았다. 두 사람의 사이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그때는 강이한에 대한 막연함 때문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었다.하지만 오늘 공항에서 이유영은 강이한이 박연준을 증오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박연준의 미소에서도 강이한을 향한 원한을 읽어내었다.이런 증오와 이런 원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 아무도 믿지 않을 말이었다. 서재에서 봤던 사진처럼, 두 사람은 한때 사이가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관계가 완전히 깨졌을지도 모른다.이유영이 질문을 던진 그 순간, 강이한의 눈에는 고통스러움이 서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나는 그 사람과 아무 관계도 아니야.”그렇게 말하는 강이한의 말투는 차가웠다. 다만 그 속에 담긴 증오를 완전히 덮어버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절대로 그렇지 않을걸?’이유영은 입가에 비릿한 웃음을 걸고 말했다.“괜찮아. 두 사람이 무슨 관계든지 나랑은 상관이 없으니까.”‘그래, 상관없어.’한때는 신경 써야 할 것들을 모두 감췄던 강이한이다. 그래서 강이한이 서주와 관계가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러니 어떻게 강이한이 박연준과 무슨 사이인지를 알 수 있겠는가. 지금은 그 사건에 관심을 가질 때가 아니다. 강이한이 얘기해주지 않으니 더 물어도 소용은 없을 것이다.“내려.”“날 박연준한테로 데려다줘.”“이유영, 다시 한번 얘기한다. 내려!”강이한의 목소리는 더욱 심각해졌다.이유영은 강이한을 쳐다보았다.강이한은 약간 누그러진 표정으로 얘기했다.“그 사람은 널 이용하고 있어. 너도 알잖아!”‘그래. 그래서 이미 깨진 사이였지.’하지만 이유영이 입을 열었다.“우리 둘 사이에 있었던 10년 간의 일도 지나간 일로 할 수 있는데 이용당한 게 뭐가 어때서? 그걸 없던 걸로 하는 건 더 쉬운 일이지.”“...”강이한은 머리를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두 사람은 그 10년의 일을
강이한이 그렇게 말하자 이유영은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몰랐다.그러니까 강이한이 서주의 음식을 잘 먹는 것도 그런 이유라는 거겠지.대충 먹던 이유영은 결국 참지 못했다. 국물을 좀 마시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단맛이었으니. 단 국물은 이유영이 싫어하는 것이었다.“국수 좀 삶아달라고 할까?”이유영이 통 먹지 않자 강이한이 미간을 찌푸렸다.“됐어.”생각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국수도 단맛이겠지. 게다가 서주의 요리사가 파리나 청하의 음식을 만든다고 해도 단 맛일 것이다.하지만 준비하지 못했다는 말이 더욱 가슴 아팠다. 그러니까 이유영이 온다는 걸 알면서도 준비하지 않았다는 말이지 않은가. 만약 이온유나 한지음이었다면? 제대로 준비했을 것이다.핸드폰에 박연준의 번호가 떴다. “뭐 하려고.”“돌아갈 거야.”“이유영!”강이한은 잔뜩 화가 난 말투로 얘기했다.“난 그 사람 곁으로 돌아가야 해.”그 사람은 바로 박연준이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이 하는 모든 말에 짜증이 났다. 결국 그는 이성을 잃고 이유영의 핸드폰을 들고 바닥에 던져버렸다.이유영은 눈을 감았다.“이러면 화가 좀 풀려?”한바탕 싸우고 난 후, 이유영은 조금 진정이 되었다. 아까처럼 감정적이지 않았다.‘화가 풀리냐고?’그 말에 강이한은 더욱 화가 났다.“지금부터 우리 사이 모든 일은 내가 결정하는 거야.”강이한은 모든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그래?”이유영은 강이한을 보면서 비웃었다.“우리 사이에 언제 한번 내가 결정한 적이 있어?”“...”“내 망막도...!”“...”망막...그건 두 사람이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그건 강이한도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은 것들이다.“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난 한 번도...”“됐어!”강이한이 말을 마치기 전에 이유영이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그녀는 이제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강이한은 달랐다.이유영은 그때 사인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 누군가가 그녀의 필체를 모방해서 사인을 한 것이다.입술을 달싹인
하지만 그 일을 다시 언급할 때마다 마치 아무는 상처를 다시 찢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유영아.”‘뭘 얘기해야 하지? 이제는 뭐라고 얘기해야 하는 거지? 그전에는 모두 홧김에 한 말이었다고 해?’화가 나서 아까와 같은 말을 하긴 했으나 강이한은 한 번도 이유영의 각막을 한지음에게 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한 번도 날 믿은 적이 없잖아. 그러면서 왜 나한테 묻는 거야?”“난 그저...”“왜 그렇게 슬픈 척해?”그 말에 강이한은 말문이 막혔다. 슬픈 척이라니. ‘이유영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네가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어!”“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결국 나는 모든 것을 한지음에게 줘버렸으니까. 난 앞이 보이지 않아서 그 불바다에서 나오지도 못했지.”그 모든 사실을 마주한 강이한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고통은 강이한을 빛이 보이지 않는 절망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그 순간 강이한은 차라리 불에 타서 죽은 게 본인이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강이한이 어떻게 버텨왔는지 죽어도 모를 것이다.‘해명해야 하나? 아니, 더는 소용 없어. 그런 과거를 내가 어떻게 해명하지?’마치 이유영이 말한 것처럼 이제 진실은 소용없었다. 강이한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그해의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전생의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니 모든 사건이 바뀐 것과 같다. 다만 그들에게 남은 것은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뿐이다.“강이한, 그거 알아? 그때 당신이 데려온 사람들이 나를 수술대에 묶을 때, 난 다시는 너를 보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어!”‘10년이 뭔 대수인가?’10년이라면 보통 다 잊고 다시는 돌이키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10년이 지나 지금 돌이켜 보아도 가슴이 아픈 것은 매한가지였다.“...”강이한은 가슴이 찢겨서 피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이유영은 결국 말하고 말았다.이유영에게 있어서는 상처일 뿐인 과거들을 그에게 들려줄 때 그녀는 어
그래, 그는 이미 틀렸다.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강이한은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강이한이 말했었다. 한지음은 마지막 순간까지 이유영을 위해 모든 걸 바쳤다고. 그녀는 이유영을 위해 모든 걸 내어줬다고! 그리고 자신 또한 수많은 고난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다고."강이한, 너희들은 애초에 용서받을 자격이 없어! 이 모든 건 너희의 업보야, 알겠어?"한지음이 마지막에 목숨을 걸고 그녀를 위해 희생했어도, 이유영은 감사해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한지음이 치러야 할 당연한 대가라고 생각했다.강이한이 절망을 감내하고 이곳까지 찾아온 것도, 이유영의 눈에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용서받을 자격이 없었고, 고난 역시 감당해야 할 고통과 절망이었다.“이유영!”강이한은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그녀가 그렇게 차갑게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밀려오는 고통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그 고통은 아프고도 무거웠다.이유영이 감내했던 수많은 고통과 절망은 얼마나 더 아팠을까."난 이제 박연준의 약혼녀야. 이제부턴 우리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야.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거야?"“난 용납할 수 없어!”이유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이한의 눈은 핏빛으로 물들었다.둘은 그저 침묵 속에서 오랫동안 서로를 마주 보았다. 심지어 공기마저 이 차가운 침묵에 얼어붙은 듯했다.이유영의 눈 속에 스친 한기를 보며, 강이한은 마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 가슴이 아려왔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였다.이유영의 냉정한 태도에 강이한은 알 수 있었다. 바로 이유영은 앞으로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내 말 충분히 이해했어?”마침내 이유영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더 차가웠다.이미 마음이 텅 비어버린 듯한 강이한은 그녀의 그 말을 들으며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로.‘충분히 이해했냐고? 그래, 충분히 이해했어!’이유영은 더없이 명확하게 말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같은 의미였다.그것은… 전생의
"살아있는 존재..." 이유영이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강이한이 계속 말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유영아... 정말로 이 모든 게 그냥 내 꿈이었으면 좋겠어.”‘그래, 그저 한낱 꿈이었으면 좋겠다.’이전 생, 그들 사이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마지막에 결국 그들의 인생에는 서로만이 존재했다.이유영에게는 박연준이 없었다!그리고 강이한에게도 이유영이 생각했던 것처럼, 한지음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지금의 이유영은 이 모든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그녀는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이 모든 것들이 그녀의 세계 속에서 무엇인지 따져보고 싶지도 않았다.그녀는 이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모든 진실도, 존재의 의미도 전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세계에는 박연준이 있고, 강이한의 세계에는... 버릴 수 없는 온건한 이온유가 있었다.지금의 이 길은 그들에게 막다른 골목이다! 강이한은 정말 이 모든 것이 그의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들 둘만이 존재하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오직 서로에게 서로만 있던 그 시절로 말이다."이것이 바로 인과응보야!" 이유영은 강이한의 눈에서 슬픔을 읽을 수 있었다.그의 말 속에서 후회가 느껴졌다.그가 어떻게 이 세계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유영은 그가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렇다.강이한은 후회했다.이 세계에 온 것을 말이다! 이번 생은 저번 생보다 더 어려웠다."그래, 이게 내 인과응보야." 이건 하늘이 준 기회가 아니라, 그에게 내려진 벌이었다."고통스럽다면 여기서 멈춰서." 이유영이 또박또박 얘기했다.멈추라니?강이한은 마음속으로 그 말을 되새겼다.잠깐이나마 그는 정말로 이유영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빠르게 사라졌다.대신 더 깊어진 집착이 마음속에서 피어났다."오늘부터, 너는 이 저택을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어!" 눈에 서렸던 슬픔은 사라졌고, 그의
박연준이 도착했다. 강이한의 사람들이 그를 강제로 막아섰다. 강이한과 박연준은 한치의 예의도 차리지 않으려는 것만 같았다."저 자식한테 당장 꺼지라고 해!" 강이한의 목소리에는 차가움과 분노가 가득했다. 이 순간, 이유영은 그의 눈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아픔 같은 감정을 보았다. 잠깐이지만 확실했다.그리고 이유영은 그 감정을 확실히 느꼈다. 강이한이 박연준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있다는 것일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예.”집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이유영은 그의 옆모습에서 시선을 거두고, 큰 창 너머로 눈을 돌렸다. 나뭇잎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마음이 날씨처럼 답답해졌다.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이유영이 비 오는 날을 싫어하게 된 것이.예전에 강이한과 함께 있을 땐 비 오는 날을 좋아했었다.강이한에게는 비 오는 날이 쉬는 날이라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비 오는 날을 일요일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는 언제나 홍문도에서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냈었다.지금도 분명 중요한 전화가 와서 자리를 떴지만, 비가 내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하지만 아마도 이제는 강이한이 곁에 있는 것이 싫어져서인지, 이유영은 비 오는 날도 싫어진 듯했다.강이한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입술을 움직여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목구멍으로 삼켜버렸다.이유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어디 가는 거야?""못 들었어? 저 사람은 날 데리러 온 거야."이유영의 말투는 아주 차가웠다.말이 끝나자, 손목에 강한 힘이 느껴졌다.강이한은 더욱 세게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이유영은 숨이 막힐 듯 아팠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다.그녀는 여전히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박연준이 널 어떻게 이용했는지 잊었어?"남자의 목소리에서는 위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또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예전에 박연준이 그녀 앞에 나타났을 때, 강이한은 그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었다.하지만
“...”순간 그는 목이 메었다.맞다. 과거에 이유영이 겪었던 모든 일은, 정말로 잔인했다. 그 일에 대해 무어라 여러 번 말하고 싶었지만, 항상 지금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떠올리며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어차피 저번 생의 일에 대해서는 이유영이 모든 걸 이미 말했었다. 그녀가 겪었던 고통들, 강이한이 한지음과 함께 이유영을 위해 무언가를 희생했던 모든 것.이는 모두 두 사람에게 업보로 돌아왔다. 이유영은 그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그리고 지금은...강이한이 입을 떼기 전에, 이유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넌 이온유를 구하려고 했을 때, 소월이에게도 아주 잔혹했어.”강이한은 머릿속이 윙하고 울리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은 백지장이 되어버렸다. 잔혹했다고? 그가 어떻게 자신의 딸에게 잔혹할 수 있겠는가? “아니야, 유영아!”“당신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는 걸 알아. 하지만 당신은 결국 그렇게 했어!”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강하고 무겁게 그의 죄책감을 짓눌렀다.마치 죄책감이 강이한의 어깨 위로 무겁게 얹히는 것만 같았다.그들 사이에는 새로운 길이 생겼고 두 사람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한 것과 같았다. 강이한이 어떠한 강경한 태도와 집념을 품고 있든, 이유영의 가득 찬 증오를 막을 수는 없었다.그래, 이유영은 강이한을 증오하고 있다. 이유영이 직접 말하기도 했다. 이번의 증오는 이전의 증오와는 달랐다. 과거에는 그저 그와 서로 관계없는 삶을 살기 바랐다. 그러나 이번엔, 그녀가 서주에 온 만큼 그를 향한 증오로 인해 그와 죽고 못 살 원수가 될 것이 분명했다.“도대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이유영이 등을 돌리는 순간, 강이한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그의 목소리에는 고통이 스며들어 있었다.이유영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에는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이 감춰져 있었다.강이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돌아본다
이유영이 가까이 다가오자 박연준은 그녀의 가냘픈 모습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박연준의 곁에 다다르자마자 그는 서둘러 자신의 트렌치코트를 벗어 그녀의 머리 위에 덮어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단단히 끌어안으며 귀가에 나지막이, 약간 질책하듯이 말했다.“그 사람이 너를 이렇게 내보낸 거야?!”남자의 차가운 향기가 이유영의 곁을 맴돌았다. 그리고 그녀의 뒤쪽 멀리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가자.”이유영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박연준의 따스함에 대답하듯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박연준은 말없이 멀리 서 있는 사람의 붉은 눈을 바라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그래서 누가 이긴 걸까? 이곳에 이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이유영은 너무나 차분했고 차가울 정도로 매정했다. 감정이 철저히 사라진 듯한 그 차가움은 보는 이로 하여금 서늘함마저 느끼게 했다.박연준은 이유영을 태우고 차에 올랐다. 강이한의 사람들은 막지 않았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느껴질 정도였다.차 안에서 이유영은 창밖의 낯선 풍경을 바라보며 여전히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후회해?”박연준이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유영은 그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서주 식물은 파리랑 완전히 달라.”박연준은 입을 다물었다. ‘참... 사람 애태우는 데는 도가 텄다니까.’ 이유영이 생각했던 것처럼, 이곳의 모든 것은 파리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식물뿐만 아니라 건물조차도 그렇다. 이곳 사람들은 커다란 별장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강이한의 크리스탈 별장을 보았을 때도 그 규모가 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는 박연준의 별장도 그에 못지않게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나무로 된 복도 바깥에 비가 내리고 빗방울이 야자수에 떨어졌다. 이유영이 입을 열었다.“여기는 비가 자주 오는 것 같네.”“여기는 이런 날씨야. 한 달에 반 이상은 비가 내려서 날씨가 습해.”‘그렇구나.’이런 날씨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았지만 이유
임소미는 이유영이 백산 별장을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심지어 반산월로 돌아가는 것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결국 이유영은 무력감 속에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서재에서 정국진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네 두 눈은 지금...”정국진의 목소리에는 멈춘 말 속에 깊은 안타까움이 묻어났고, 이유영은 그 감정을 생생히 느꼈다.“아빠...”“수술은 빨리 받는 게 좋겠다. 그래야 네 엄마도 마음이 놓일 테니까.”“하지만 저는...”“걱정할 필요 없다. 네게 가장 뛰어난 의사를 붙여줄 테니.”정국진은 이유영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이유영을 달래며 말했다.사실 정국진과 임소미는 누구보다도 긴장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수술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모든 준비를 더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아빠...”“응?”“아빠... 저, 너무 무서워요.”그동안 가족들이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 이유영은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이유영은 정말로 무서웠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그 고통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지금까지 그토록 자신의 두 눈을 지켜 왔건만 결국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마음속에서 숨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밀려왔다.전생에서 눈을 떴을 때, 이유영을 감싼 건 끝없는 어둠뿐이었다. 그 공포와 혼란은 그녀를 미치게 할 지경이었다.지난 생에서 이유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어둠 속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한순간에 어둠 속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시야가 어두워져 가는 과정을 느껴야 했다.그 느린 과정이 그녀에게는 더욱 고통스러웠다.“무서워하지 마라. 우리 모두 네 곁에서 함께할 거야.”“네...”이유영은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주르르 떨어졌다.그래, 두려워하지 말자. 이번 생은 전생과는 다르니까. 비록 전생의 운명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이번에는 가족들이 곁에 있어.전생에는 어둠 속에서 이유영 곁에는 강이한
이유영은 이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시력이 급격히 나빠진 원인이 바로 알프산 방문 때문이라는 사실도.알프산을 다녀온 후 이유영의 시력은 점점 더 악화하였고 자극을 받은 듯한 이상 증상들이 서서히 나타났다.“강한 빛도 견디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런 곳에 갈 생각을 했니?”임소미는 완전히 화가 나 있었다.이제 이유영이 어디를 가든 임소미는 더 이상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 장소가 이유영의 눈에 큰 해를 끼칠 수 있는 곳이라면 더욱더.“엄마, 정말 별일 아니에요...”이유영이 조용히 말했다.“더 이상 말하지 마!”임소미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잠깐 잊고 있었어요.”이유영은 진심으로 말했다.미리 알았더라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이전에도 의사가 주의를 당부한 적이 있었지만, 눈 덮인 곳에 갈 일이 거의 없었기에 점점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그러다 이번에 큰 자극을 받게 되었고 일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줄은 이유영 자신도 몰랐다.“잊었다고? 그 잊음 때문에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할 수도 있는데, 그걸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니?”임소미의 목소리에는 분노를 넘어선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임소미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유영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엄마, 미안해요!”“미안하다는 말은 필요 없어. 나는 네가 건강하게 지내는 것만 바랄 뿐이야, 알겠니?”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었다.어떤 상황에서도 자식이 잘 지내길 바랄 뿐이었다.이유영은 그 말에 가슴이 따뜻해졌다.이유영은 손을 뻗어 임소미의 가냘픈 허리를 감쌌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임소미는 여전히 이렇게 날씬하고 아름다웠다.임소미는 평소에도 관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알겠어요, 엄마. 화 풀어요, 네? 저, 수술받을게요.”“유영아...”“엄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네?”임소미의 품에 안긴 이유영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임소미는 심장이 떨릴 정도로 안쓰러웠다.임소미는 이유영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우지는 빠르게 물을 닦아냈다.손바닥에 남은 차가운 물기는 이유영에게 시력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했다.언젠가 이유영의 두 눈은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그 공포는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서서히 퍼져 나왔다.아침에 물 한 잔을 쏟은 이후, 이유영은 하루 종일 우지와 우현의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이유영은 이제 옷장 속에서 강렬하고 선명한 색깔의 옷들만 겨우 식별할 수 있었다.나머지 색깔들은 이미 모두 희미한 회색빛으로 뒤덮여 있었다.아침 식탁.우지는 조심스럽게 죽을 이유영 앞에 놓으며 말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 아직 조금 뜨거울 수 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이유영이 숟가락을 집으려고 할 때, 우지는 바로 숟가락을 건네주었다.“고마워요.”이유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거센 혼란이 몰아치고 있었다.가슴은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았다.그때, 임소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유영은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엄마.”“왜 아침 같이 먹으러 오지 않았어?”“좀 늦게 일어났어요. 엄마 먼저 드세요.”“그럼 오전에는 꼭 돌아와서 월이랑 같이 놀아 줘. 네가 이곳에 안 온다고 하면 월이가 속상해할 거야.”“네, 알겠어요.”월이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유영은 가슴이 더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월이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이유영의 마음속에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전화를 끊고 난 후.이유영의 세계는 다시금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이유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여진우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마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만약 임소미와 정국진에게 이유영만 존재했다면... 그들은 얼마나 더 힘들어하셨을까?다행스러움과 무거움이 동시에 몰려왔다.아침 식사 후.이유영은 운전기사의 차를 타고 백산 별장으로 돌아갔다.임소미는 이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날, 한지음이 떠난 후, 이유영은 손으로 배를 감싸안고 한동안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이유영의 머릿속에는 강이한을 떠난 뒤, 아이와 함께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이 가득했다.당시의 이유영에게는 눈을 뜨면 온통 어둠뿐인 날들이 이어졌고 어떤 처참한 미래가 닥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만 같았다.강이한을 떠나겠다는 결심은 확고했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를 알게 되는 순간, 그 용기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이유영은 두려웠고 미칠 것 같았다.자기 삶이 아무리 비참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유영이 강이한의 결정을 기다리기도 전에, 이유영 스스로 선택을 내리기도 전에 모든 것이 한 차례 대화재로 끝이 났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한지음을 용서하라고 했다.한지음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이유영을 위해 희생했다고 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결코 알지 못했다.그것이 오직 자신의 문제였다면, 어쩌면 모든 것을 잊고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아이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용서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이유영이 아이를 위해 온갖 고통을 겪었던 그 마지막 시간 속에서 이미 결정되었다.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어떤 희생을 했든 한지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네, 좋아요! 사모님께 가서 바로 말씀드릴게요. 사모님께서 아가씨가 수술을 빨리 받겠다고 결정하신 걸 들으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우지가 기쁜 얼굴로 방을 나가는 모습을 본 이유영은 그저 고개를 천천히 저을 뿐이었다.그날 밤.이유영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새벽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결과를 받아들이는 일은 이유영에게조차 쉽지 않았다.오랜 세월 지켜온 신념들이 의사의 진단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어두운 방 안.어스름한 방안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이유영을 응시하고 있었다.차가운 손가락 끝이 이유영의 목 아래 울퉁
의사가 이유영의 상태를 면밀히 점검했다.그 결과, 백산 별장과 반산월은 조명에 한층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했다.임소미와 정국진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모든 조명을 다시 교체했다.밤이 되면 이유영이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고 낮에도 햇빛이 강하면 외출을 엄격히 제한했다.임소미가 이유영의 눈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으니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눈에 자극을 주지 않도록 모든 것이 신중히 조율되었다.백산 별장에 밤이 찾아왔다.사람들은 모두 조명이 너무 어둡다고 느꼈고 시야가 흐릿한 이유영조차도 조명이 이전보다 더 어두워졌음을 느꼈다.“엄마, 이 정도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저는 이미 제대로 볼 수 없는걸요.”이유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유영이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지금의 이 조명은 이유영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하지만 임소미는 딸의 말을 단호히 받아쳤다.“나도 알아. 이 조명이 사람들한테 너무 어둡게 느껴질 거라는 거. 그래도 강한 빛이 네 눈에 더 큰 손상을 줄 수도 있잖아.”임소미는 단호히 말했다.“...”하지만 이렇게 어두운 조명은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눈에 자극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됐어. 엄마 말대로 해. 네 수술이 성공하기 전까진 이 조명 상태 그대로 유지할 거야.”임소미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이유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알겠어요.”이유영은 엄마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임소미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이유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그날 밤.이유영이 반산월로 돌아왔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에게 말했다.“조명을 모두 교체했습니다. 이제 아가씨의 눈에는 크게 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안경은 꼭 착용하셔야 합니다.”“안경이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알겠어요.”예전엔 눈이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안경을 굳이 쓰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어졌다.
임소미의 가슴은 비수로 찔린 듯 아팠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낸 끝에 다시 찾은 딸이니,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조금 전, 의사가 임소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도 몰랐다.“이유영 씨가 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의사의 한마디는 그녀가 실명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했다.“정말 강이한을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어!”임소미는 울먹이며 감정을 터뜨렸다.강이한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이 눈이 이렇게 된 이유는 모두 강이한이 한지음 때문에 이유영을 감옥에 넣었기 때문이다.만약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이유영도 그 끔찍한 화재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임소미는 지금껏 이유영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딸의 흐릿해진 눈은 매 순간 그녀에게 그날의 고통을 떠올리게 했다.이유영은 어떤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던 걸까?“그만하세요, 엄마.”강이한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유영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강이한에 대한 이유영의 감정은 이제 미움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어머니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는 몰랐다.이유영 역시 한 아이의 엄마였다. 자식이 상처받을 때 부모가 느끼는 그 분노와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렇다.바로 그때도 이런 감정이었다.강이한이 아이와 관련된 일에서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이유영은 그의 목을 비틀고 싶은 심정이었다.더군다나 임소미는...어릴 적부터 이유영과 함께하지 못했기에 딸이 이런 상처를 입은 걸 본 순간 느꼈을 분노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수술하면 안 되겠니?”임소미의 목소리는 떨림으로 가득했다.그래, 수술.이 눈은 어서 빨리 수술을 받아야 했다.그 끔찍한 화재로 인해 이유영의 두 눈은 너무나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기본 재활치료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오직 수술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엄마, 수술은 저한테도 위험
박연준은 전기봉 하나로도 이미 머리가 아팠다.그런데 이유영까지 그에게 지나치게 냉혹하게 굴었다.이유영의 눈에는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강이한에게 비친 이유영의 모습은 모든 것을 잃고 허공을 바라보는 사람 같았다.이온유가 집으로 돌아왔다.아이에게 놀고 싶다는 욕구는 본능이었다. 퇴원 후 며칠간 쉬고 나니 매일 밖에 나가고 싶어 했다.“아빠.”온유는 어느새 훌쩍 자란 모습이었다.온유가 방으로 들어온 것을 본 강이한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끄며 물었다.“어디 갔다 왔어?”“놀이공원이요!”놀이공원 이야기가 나오자, 온유의 얼굴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그곳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아마도... 어릴 적에 가고 싶을 때 가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야 놀이공원을 좋아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이번 달은 놀이공원은 쉬자, 알겠지?”“네.”온유는 작은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아빠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아이였다.놀기 좋아하면서도 말을 잘 들었다.강이한은 온유를 안으며 속상한 듯 말했다.“몸이 이제 막 나았으니,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해야 해.”“정 아저씨가 한적한 곳만 골라 데려갔어요.”온유는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강이한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공공장소는 어디든 위험이 도사릴 수 있었다.한 차례 병을 겪고 난 뒤, 강이한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자리 잡았다. 그래서 온유가 그런 곳에 가는 것이 늘 불안했다.“온유야.”“네, 아빠.”“아빠가 며칠 동안 출장을 가야 해. 집에서 얌전히 있어야 한다, 알겠지?”“아빠는 온유를 안 데려가요?”아빠가 출장을 간다는 말에 작은 아이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그도 그럴 것이.이온유에게 있어서 강이한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그런 아빠가 집을 떠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서운함이 얼굴에 드러난 것이었다.강이한은 말했다.“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네 몸은 이제 막 나아졌잖아, 응?”“네.”작은 아이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꿈도 꾸지 마!”강이한은 신지수에게 냉정히 잘라 말했다.신지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말 차갑기 짝이 없네. 그 연회에서 내가 너에게 첫눈에 반했을 땐, 최소한 미소 하나쯤은 보여줄 수 있었잖아.”첫눈에 반했다고? 신지수가? 신씨 가문의 사람이 무슨 낭만적인 감정 따위를 가질 여유가 있겠는가? 라이터가 ‘딸깍’ 소리를 내며 불꽃을 피웠고 강이한은 담배를 천천히 피워 물었다. 신지수는 담배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신지수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연서가 당신들 사이의 깊은 골이라는 건 너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안 그래?”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연서라는 존재는 실재하는 사람이었다.그렇기에 연서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늘 잠재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언젠가는 드러날 수밖에 없는 진실이었다.신지수의 말이 끝나자, 강이한은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신지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두 사람 사이엔 이제 어떤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아 보여.”“신지수!”강이한의 목소리가 더 깊어지고 무거워졌다.강이한의 표정에는 이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고집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신지수가 말했다.“네가 이유영의 딸을 이용해 한지음의 딸을 구하려 했다는 소문을 들었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신지수가 이 사실을 처음 듣게 되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비록 오랜 세월 서주에 있었지만 그래도 강이한은 이유영을 꽤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그런데 굳이 왜 한지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행동을 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강이한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닥쳐!”그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강이한의 몸에서 냉랭한 기운이 흘러나왔다.신지수는 비아냥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강이한, 사실 이유영도 너한테 그렇게 중요한 존재는 아니지, 그렇지?”“언제부터 이유영과 친한 사이였어?”신지수가 이유영의 이름을 너무나 친근하게 부
“그때, 너는 왜 한 번도 멈출 생각 하지 않았는데?”과거에도, 이번 생에서도, 홍문동 사건에서도 강이한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이번 생에서 이유영을 감옥에 보낸 일도 마찬가지였다.심지어 월이를 이온유를 구하는 도구로 이용하려 할 때조차 그는 멈출 줄 몰랐다.그런데 그런 강이한이 무슨 자격으로, 무슨 염치로 이유영에게 멈추라 말할 수 있는가?“만약 그 여자였대도 넌 똑같이 행동했을까?”그 여자는 연서였다.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강이한의 숨소리가 순간적으로 거칠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왜 말이 없어?”강이한의 불규칙한 호흡을 들으며 이유영의 목소리는 더욱 차갑게 내려앉았다.전화기 너머, 강이한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갔다.만약 이유영이 연서였다면, 한지음과 이온유에게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까?“안 그랬을 거야, 맞지?”강이한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이유영은 차가운 조소를 담아 말을 이었다.강이한의 마음은 폭풍 속 배처럼 거칠게 흔들렸다.두 사람은 전화기 너머로 대치하며 날 선 긴장감을 이어갔다.이유영이 말했다.“강이한, 너 정말 잔인하다.”“유영아...”막상 강이한이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진짜 잔인한 건가?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잔인함 이상의 존재였다.이유영이 차갑게 말했다.“다시는 전화하지 마.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이제는 들을 마음이 없으니까.”이 말을 끝으로 이유영은 전화를 끊었다.세상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이유영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졌고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방금 전 통화에서 이유영이 던진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약 연서였다면, 그 일들이 벌어졌을까?’이유영은 강이한의 주저함과 침묵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연서라는 여자가 강이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한편, 전화기 너머의 강이한.강이한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엉켜 흔들리고 있었다.이유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