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영의 대답을 들은 정국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으로는 강이한이 그런 요구를 제기했다고 생각하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강이한이 어떻게 감히... 아니면 사실 우리 유영이를 전혀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건가? 그런 게 아니면 왜...’“그럼 너는 다시 도원산으로 돌아갈 거야?”“당연히 안 가죠!”일이 이 지경까지 이른 이상 이유영은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었다.그리고 그녀는 강이한이 한지음을 위해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 한지음의 딸을 위해 계속 여진우의 일로 자신을 끊임없이 협박할 것인지 두고 볼 생각이었다.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이런 생각이 들자 이유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서러워졌다.정국진도 미간이 톡톡 뛰었다.“너는 이 일이 연준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맞다, 박연준!‘예전에 박연준이 한지음의 일과 관련이 있었듯이 이번의 백혈병도... 설마 박연준과 관련이 있는 거 아닐까?’이유영이 입을 열었다.“연준 씨는 관련이 없다고 했어요.”“넌 그 말을 믿어?”“당연히 안 믿죠!”이것이 바로 이유영이 지금 마음속으로 강이한을 멀리하고 있으면서도 박연준과 거리를 두는 이유였다.박연준은 그녀에게 이용당하는 것과 배신당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가증스러운지 물은 적이 있었다.이유영에게 있어서 이 두 가지는 피차일반이었다... 모두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정국진은 이유영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 기분이 조금 흐뭇해졌다.“지금의 네 모습이 보기 너무 좋아. 그런데 네 어머니가 걱정하셔.”정국진은 예전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랑에 얽매여있던 정유라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렸다.반대로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이유영은 지금 가족에 대한 사랑 외에 어떤 감정도 믿지 않았다.강이한이든 박연준이든, 이유영은 누구도 믿지 않았다.“아빠, 그런 감정이 기필코 무덤으로 변한다면 저는... 차라리 없는 게 나을 것 같아요!”이유영은 곁에 월이가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황천길을 걷게 될 뻔
집사가 교제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소은지는 비로소 엔데스 현우가 다른 사람이 함부로 이곳을 드나들지 못하도록 사전에 당부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들여보내세요.”소은지는 손에 들고 있던 가위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그녀는 엔데스 명우의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집사가 그를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이 말을 듣자 도우미는 마치 죽을죄를 면하기라도 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니 방금 도우미는 거실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엔데스 명우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를 제대로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소문에 듣던 것보다 더 무서운 사람인 게 분명했다....5분 후, 딱 봐도 위험한 분위기에 겁을 먹은 도우미가 전전긍긍하며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에게 커피를 올렸다.소은지는 파르르 떨고 있는 도우미의 손을 보고 말했다.“먼저 내려가 있어요.”“네!”이 말을 듣자 도우미는 부리나케 도망갔다.도우미는 엔데스 명우가 너무 무서웠다. 특히 위험한 기색이 아른거리는 그의 눈빛은 마치 사람을 잡아먹을 것처럼 무서웠다.거실에는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만 남았다.엔데스 명우의 위험한 시선 속에서 소은지는 무덤덤하게 앞에 놓인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내가 내린 커피보다 못하지만, 그냥 있는 거 마셔.”그랬다. 소은지가 내린 커피는 맛이 아주 좋았다.그러나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엔데스 명우의 곁에 있기 전에 소은지는 사업적인 것 이외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매우 서툴렀었다.심지어 집에서 제대로 된 밥 한 끼를 먹으려면 이유영이 시간 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었다.하지만 엔데스 명우의 곁에 묶여있었던 뒤로부터 그녀는 커피도 끓일 줄 알고 차도 제법 잘 우리게 되었다. 그녀는 예전에 지루하다고 느꼈던 일들을 지금 아주 잘하게 되었다.“왜 대충 때워야 하는데?”남자의 말투에는 매서움이 가득했다.안 그래도 위험하던 분위기는 지금 썰렁함의 극치에 도달했다.소은지는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엔데스 명우는 말하면서 손에 힘을 더 꽉 주었다.마치 소은지는 그의 손안에 있는 작은 개미인 것처럼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가 소은지를 잡아 문지르는 것은 정말 쉬운 죽 먹기였다.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보며 여전히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당신은 당연히 나를 어떻게 할 수 있지.”“네가 봤을 때 내가 너를 이렇게 죽여버리면 나랑 현우는 형제를 계속할 수 있을까?”“어디 한번 그렇게 해 보든가.”소은지는 전혀 대수롭지 않았다.마치... 그녀는 자신의 목숨마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엔데스 명우랑 맞서 싸우고 있는 것만 같았다.지금 이 순간 엔데스 명우는 소은지의 눈에서 한치의 두려움도 읽어내지 못했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더니 지금의 소은지가 전형적인 그런 상황이었다.두 사람은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엔데스 명우 손의 힘도 점점 더 세졌다. 소은지가 정말 이대로 질식해서 기절할 것 같다고 생각되었을 때 결국 엔데스 명우가 손을 놓았다.“수술에 대해 한번 잘 생각해 봐!”“허!”‘수술? 아직도 헛된 꿈을 꾸고 있네?’엔데스 명우는 싸늘하게 소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수술해 줄 거 아니면 다시는 병원으로 찾아가지 마.”지금 설유나의 몸 상태는 아주 허약했으며 소은지의 성질을 받아줄 만큼의 기력도 없었다. 더군다나 소은지는 대쪽 같은 성격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악독한 마음씨도 갖고 있었다.아무리 설유나가 그 정도로 몸이 편찮다고 해도 소은지는 눈 깜짝 안 하고 상대방의 얼굴에 물을 뿌릴 수 있었다.“내가 지금 제일 하고 싶어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소은지는 똑바로 서서 벌겋게 단 자신의 목덜미를 주무르면서 엔데스 명우를 보며 입가에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난 그 여자의 얼굴에 뜨거운 물을 붓고 싶어!”“당신 죽고 싶어 안달 났어?”아니나 다를까 엔데스 명우의 분노는 순간 극치에 도달했다.“내가 아니라 당신이 지금 그 여자 때문에 죽으려고 달려드는 거잖아!”‘내가 죽고 싶어 안달 났다고? 청하시에서 잘
소은지와 엔데스 현우가 한편이 된 것은 다 이 거래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당연히 자신이 내놓은 정보가 엔데스 현우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거래인 이상, 변호사인 소은지는 자연스럽게 공평성을 따지게 되었다.“잘됐네요. 당분간 저도 최대한 당신을 도와서 엔데스 명우를 붙잡아 두고 있을게요!”소은지는 아주 구구절절 매섭게 말을 내뱉었다.그랬다. 그녀가 병원에서 분수없이 난리를 피웠던 것도 결국 엔데스 명우의 분노를 끌어내서 그를 병원에 묶어두기 위해서였다. 원래도 깊숙했던 엔데스 현우의 눈빛은 지금 소은지를 바라볼 때 더욱 깊어졌다. 그는 입을 열었다.“더는 그 사람을 건드리지 말아요!”어찌 됐든 엔데스 명우는 위험한 사람이었다. 만약 소은지가 계속해서 이렇게 난리를 피웠다가는 정말 사달이 날지도 모른다.소은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저는 그냥 일을 빨리 끝내버리고 싶어요.”그녀가 원한 건 자기 일을 빨리 끝내는 것이 아니라 엔데스 명우를 하루빨리 끝장내게 만드는 것이었다.정말이지 소은지는 진짜로 건드리면 안 되는 여자였다. 지금까지 그녀가 한 모든 것들은 다 엔데스 명우를 뒤엎어 버리기 위한 것들이었다.예전에 엔데스 명우의 손에 든 권력 때문에 소은지는 반격할 틈이 없었고 벗어날 길도 없었다. 마치 그것들은 자물쇠가 되어서 그녀를 묶어두는 것만 같았다.엔데스 명우가 그녀의 전부를 망가뜨린 이상 그녀는... 그의 손에 든 자물쇠를 망가뜨리기로 했다.소은지는 갑자기 뒤통수에서 손힘이 느껴졌다. 엔데스 현우는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살살 어루만졌다.“전기봉의 정보로 이미 충분해요. 당신은 더 이상 무엇을 할 필요가 없어요.”“당신...”소은지가 발버둥을 쳤지만 엔데스 현우의 힘은 점점 더 세졌다.순간... 두 사람의 거리는 아주 가까워졌다.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얼굴에 내려졌으며 그녀는 그저 가슴이 떨리는 것만 같았다.심장 박동도 따라서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소은지가 다른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엔데스 현우는 그녀
이 순간 오랫동안 소은지의 눈빛에 들어있던 단단함과 과감함도 따라서 조금 흔들렸다....한편, 강이한이 월이의 골수로 이온유에게 적합성 검사를 하고 싶다고 말한 뒤로 이유영은 다시 도원산으로 간 적이 없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의 일이 그렇게 끝이 난 것은 아니었다.아이가 사라졌다!결국 그날이... 오고 말았다.“아가씨, 아가씨. 월이 아가씨가 사라졌습니다. 어디에도 없습니다.”월이를 돌보던 도우미가 부랴부랴 달려오며 말했다.이유영은 손에 든 책을 내려놓고 망연하게 도우미를 바라보았다.‘이게 무슨 일이야?’“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원에서 콩이와 놀고 있었는데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습니다. 온 집안을 다 찾아봤습니다.”도우미는 애가 타서 울 지경이었다.이때 이유영의 심장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월이가... 집에서 사라지다니!?’그녀는 슝 하고 집을 나섰다. 지금 백산 별장은... 완전히 난리가 났다. 모든 도우미가 다 같이 아이를 찾고 있었다.“시시티브이를 돌려보세요!”이유영은 고함을 질렀다.이때 집사가 부리나케 달아오며 말했다.“아가씨, 어떤 사람이 월이 아가씨를 데려갔습니다.”“...”이 말을 들은 이유영은 순간 동공이 줄어들었다.‘데려갔다고? 누가?’그녀는 제일 빠른 속도로 모니터링 실로 달려갔다. 월이가 슈트를 입은 남자한테 안겨 가는 것을 보았을 때, 비록 그 남자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절반 정도 가려졌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그 남자가... 바로 이정이었다.강이한의 신변 사람이었다.‘강이한이 한 짓이었네...’ 그 순간 이유영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다.‘이 사람이... 감히!’...같은 시각, 월이는 감정센터로 데려와졌다. 이정은 바로 아이를 강이한의 눈앞으로 안고 왔다. 하지만 그는 월이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일단 데리고 가서 적합성 검사부터 시켜!”“네. 아이를 잠시 보살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바로 가서 안배하겠
이유영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지만 강이한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런데 전화를 거는 사람은 마치 미친 것처럼 한 번 또 한 번이고 연이어 전화를 걸어왔다.끝내 강이한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강이한...”전화 안에서는 이유영의 분노에 찼지만 인내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아무리 전자파를 통해서 귀에 들려왔다지만 여전히 그녀의 말투 속에 담긴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월이는 이유영에게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한 존재였다.‘아마도 박연준 때문이겠지?’예전에... 청하시에 있었을 때 박연준이 도대체 어떻게 그녀를 지키고 보호했는지에 대해 온 청하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유영이는 지금 서재욱의 아이를 낳은 것 때문에 박연준에게 미안한 거잖아. 서재욱과는 잘 되는 가능성이 없으니 이 아이한테 배로 잘해주는 거네?’“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어?”전화 안에서는 이유영의 참는 목소리가 들렸다.게다가 의료기구들이 부딪치는 차가운 소리도 들렸다. 이로부터 월이가 어떤 사람에게 잡혀갔다는 것을 안 뒤 이유영은 한걸음에 바로 이온유가 전에 있었던 병원으로 달려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하지만 이온유든 아니면 강이한이든 지금은 다 그쪽에 없었다.그래서 이유영은... 더욱 미칠 것 같았다.게다가 마음이 불안해졌다.‘서재욱의 딸 때문에 불안해졌네.’“유영아, 이 일이 끝난 뒤에 얘기하자.”강이한은 숨을 한 모금 크게 들이쉬고는 품 안에 안겨있는 아이를 보며 유달리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꼬맹이는 울다가 지쳤는지 이미 강이한의 품속에서 잠들었다. 곤히 잠든 아이의 얼굴은... 그에게 조금 익숙한 느낌을 주었다.전화 반대편의 이유영은 강이한의 말을 듣고 심장이 쿵쾅거렸다.“강이한, 한지음이 나한테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 당신은 꼭 월이로 그 여자의 딸을 구해줘야겠어?”그 순간 이유영의 말투는 유달리 싸늘했다.‘참 독하기도 해! 강이한, 넌 도대체 얼마나 독하길래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지?’“이번 일에 있어서 지음이 얘기를 들춰낼 필요가 없
이유영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강이한은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끝난 다음에?’끝난 다음에 결과가 어떻든 간에 강이한은 다 감당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온유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그는 정말 많은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그는... 잘 알고 있었다.만약 이번에 그가 진짜로 지금 품속에 있는 이 아이를 건드린다면 그럼 이유영은... 아마도 평생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유영이는 자신이 지음에게 빚진 것이 얼마나 많은지 하나도 몰라. 이번 딱 한 번만 하게 해줘!’그랬다. 한 번만...전화를 끊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이정이 돌아왔다.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보고는 또 무의식적으로 그의 품속에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곤히 잠은 월이의 모습은 강이한과 무척 닮았다.“도련님.”“안배 다 해 놨어?”“네.”“데리고 가!”강이한은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이정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다시 강이한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눈빛에서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했다.‘이 아이의 얼굴이 도련님과 이렇게나 닮았는데 설마 그걸 못 알아보신 거야?’“도련님.”이정은 바짝 긴장한 채 말했다.“왜?”“이 아이가 생긴 것이...”여기까지 말한 이정은 잠시 멈칫하더니 따라서 몸도 긴장으로 인해 뻣뻣해졌다.강이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뭐가?”그는 이정의 말귀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강이한은 다시 품속에서 깊이 잠든 월이에게 눈길을 주었지만 그저 조금 익숙한 감이 들었을 뿐이지 여전히 아무것도 보아내지 못했다.다들 사람은... 자기의 일에 대해서는 일관적으로 망연해진다는 말을 했었다.수많은 사람들이 보자마자 월이의 얼굴에서 강이한의 모습을 보아냈는데 정작 강이한 본인은 알아보지 못했다.“이 아이가 도련님과 많이 닮았습니다.”“...”‘날 닮았다고? 그럴 리가. 이 아이는 유영이와 서재욱의 아이잖아.’그의 분위기가 조금 더 차가워졌다.강이한이 서재욱의 일에 대해 엄청나게 꺼린다는 것을
이유영은 마치 미친 것처럼 온 파리를 다 뒤집어버릴 기세였다. 조금 전 그녀는 사람을 데리고 이온유가 전에 있었던 병원으로 찾아갔다.하지만 이온유든 아니면 월이든 전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핸드폰에는 줄곧 강이한의 연락처 화면이 떠 있었다.강이한은 전화를 끊은 뒤로부터 단 한 번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뒤로는 심지어 핸드폰이 꺼져있었다.“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연결된 후에는 통화료가 부과됩니다.”차가운 안내 소리는 이유영을 절망하게 했다.전화가 끊어지자마자 여진우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이유영은 울먹임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그녀는 강이한이 이토록 억지로 나올 줄 올랐다. 강이한은 정말... 한지음과 이온유를 위해라면 못 하는 짓이 없었다.전에 이유영은 전혀 생각지 못했었다. 하지만... 충분히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지금 당장 돌아와!”“너...”“지금 모든 출구를 다 막아버렸어. 이쪽의 수술실도 다 막아버렸어. 감히 그놈한테 수술해 줄 사람이 없을 거야!”‘수술해 줄 사람이 없을 거라고?’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유영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강이한은 달랐다. 지금 그들이 상대하는 사람은 강이한이였다.이 세상에 그가 못 하는 일이라고는 없었다.‘전생에 강이한은 사람을 시켜 나를 수술대에 올릴 수 있었지. 그것처럼 이번 생에도 월이를 수술대에 올릴 수...’여기까지 생각한 이유영은 그저 가슴이 답답하고 시린 것 같았고 눈앞마저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다.그녀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오빠, 월이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돼.”이유영은 한 글자 한 글자 떨리는 말투로 말했다.그랬다. 월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었다. 그게 무엇이든 다 일이 생기면 안 되었다.“걱정하지 마. 그럴 리 없어!”전화 반대편의 여진우는 아주 굳건하게 두 마디를 내뱉었다.그런데 지금 상대방이 아무리 어떤 메시지를 이유영에게 전달한다고 해도 그녀
임소미는 이유영이 백산 별장을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심지어 반산월로 돌아가는 것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결국 이유영은 무력감 속에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서재에서 정국진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네 두 눈은 지금...”정국진의 목소리에는 멈춘 말 속에 깊은 안타까움이 묻어났고, 이유영은 그 감정을 생생히 느꼈다.“아빠...”“수술은 빨리 받는 게 좋겠다. 그래야 네 엄마도 마음이 놓일 테니까.”“하지만 저는...”“걱정할 필요 없다. 네게 가장 뛰어난 의사를 붙여줄 테니.”정국진은 이유영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이유영을 달래며 말했다.사실 정국진과 임소미는 누구보다도 긴장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수술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모든 준비를 더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아빠...”“응?”“아빠... 저, 너무 무서워요.”그동안 가족들이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 이유영은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이유영은 정말로 무서웠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그 고통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지금까지 그토록 자신의 두 눈을 지켜 왔건만 결국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마음속에서 숨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밀려왔다.전생에서 눈을 떴을 때, 이유영을 감싼 건 끝없는 어둠뿐이었다. 그 공포와 혼란은 그녀를 미치게 할 지경이었다.지난 생에서 이유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어둠 속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한순간에 어둠 속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시야가 어두워져 가는 과정을 느껴야 했다.그 느린 과정이 그녀에게는 더욱 고통스러웠다.“무서워하지 마라. 우리 모두 네 곁에서 함께할 거야.”“네...”이유영은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주르르 떨어졌다.그래, 두려워하지 말자. 이번 생은 전생과는 다르니까. 비록 전생의 운명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이번에는 가족들이 곁에 있어.전생에는 어둠 속에서 이유영 곁에는 강이한
이유영은 이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시력이 급격히 나빠진 원인이 바로 알프산 방문 때문이라는 사실도.알프산을 다녀온 후 이유영의 시력은 점점 더 악화하였고 자극을 받은 듯한 이상 증상들이 서서히 나타났다.“강한 빛도 견디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런 곳에 갈 생각을 했니?”임소미는 완전히 화가 나 있었다.이제 이유영이 어디를 가든 임소미는 더 이상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 장소가 이유영의 눈에 큰 해를 끼칠 수 있는 곳이라면 더욱더.“엄마, 정말 별일 아니에요...”이유영이 조용히 말했다.“더 이상 말하지 마!”임소미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잠깐 잊고 있었어요.”이유영은 진심으로 말했다.미리 알았더라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이전에도 의사가 주의를 당부한 적이 있었지만, 눈 덮인 곳에 갈 일이 거의 없었기에 점점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그러다 이번에 큰 자극을 받게 되었고 일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줄은 이유영 자신도 몰랐다.“잊었다고? 그 잊음 때문에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할 수도 있는데, 그걸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니?”임소미의 목소리에는 분노를 넘어선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임소미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유영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엄마, 미안해요!”“미안하다는 말은 필요 없어. 나는 네가 건강하게 지내는 것만 바랄 뿐이야, 알겠니?”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었다.어떤 상황에서도 자식이 잘 지내길 바랄 뿐이었다.이유영은 그 말에 가슴이 따뜻해졌다.이유영은 손을 뻗어 임소미의 가냘픈 허리를 감쌌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임소미는 여전히 이렇게 날씬하고 아름다웠다.임소미는 평소에도 관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알겠어요, 엄마. 화 풀어요, 네? 저, 수술받을게요.”“유영아...”“엄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네?”임소미의 품에 안긴 이유영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임소미는 심장이 떨릴 정도로 안쓰러웠다.임소미는 이유영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우지는 빠르게 물을 닦아냈다.손바닥에 남은 차가운 물기는 이유영에게 시력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했다.언젠가 이유영의 두 눈은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그 공포는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서서히 퍼져 나왔다.아침에 물 한 잔을 쏟은 이후, 이유영은 하루 종일 우지와 우현의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이유영은 이제 옷장 속에서 강렬하고 선명한 색깔의 옷들만 겨우 식별할 수 있었다.나머지 색깔들은 이미 모두 희미한 회색빛으로 뒤덮여 있었다.아침 식탁.우지는 조심스럽게 죽을 이유영 앞에 놓으며 말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 아직 조금 뜨거울 수 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이유영이 숟가락을 집으려고 할 때, 우지는 바로 숟가락을 건네주었다.“고마워요.”이유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거센 혼란이 몰아치고 있었다.가슴은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았다.그때, 임소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유영은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엄마.”“왜 아침 같이 먹으러 오지 않았어?”“좀 늦게 일어났어요. 엄마 먼저 드세요.”“그럼 오전에는 꼭 돌아와서 월이랑 같이 놀아 줘. 네가 이곳에 안 온다고 하면 월이가 속상해할 거야.”“네, 알겠어요.”월이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유영은 가슴이 더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월이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이유영의 마음속에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전화를 끊고 난 후.이유영의 세계는 다시금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이유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여진우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마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만약 임소미와 정국진에게 이유영만 존재했다면... 그들은 얼마나 더 힘들어하셨을까?다행스러움과 무거움이 동시에 몰려왔다.아침 식사 후.이유영은 운전기사의 차를 타고 백산 별장으로 돌아갔다.임소미는 이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날, 한지음이 떠난 후, 이유영은 손으로 배를 감싸안고 한동안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이유영의 머릿속에는 강이한을 떠난 뒤, 아이와 함께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이 가득했다.당시의 이유영에게는 눈을 뜨면 온통 어둠뿐인 날들이 이어졌고 어떤 처참한 미래가 닥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만 같았다.강이한을 떠나겠다는 결심은 확고했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를 알게 되는 순간, 그 용기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이유영은 두려웠고 미칠 것 같았다.자기 삶이 아무리 비참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유영이 강이한의 결정을 기다리기도 전에, 이유영 스스로 선택을 내리기도 전에 모든 것이 한 차례 대화재로 끝이 났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한지음을 용서하라고 했다.한지음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이유영을 위해 희생했다고 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결코 알지 못했다.그것이 오직 자신의 문제였다면, 어쩌면 모든 것을 잊고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아이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용서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이유영이 아이를 위해 온갖 고통을 겪었던 그 마지막 시간 속에서 이미 결정되었다.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어떤 희생을 했든 한지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네, 좋아요! 사모님께 가서 바로 말씀드릴게요. 사모님께서 아가씨가 수술을 빨리 받겠다고 결정하신 걸 들으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우지가 기쁜 얼굴로 방을 나가는 모습을 본 이유영은 그저 고개를 천천히 저을 뿐이었다.그날 밤.이유영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새벽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결과를 받아들이는 일은 이유영에게조차 쉽지 않았다.오랜 세월 지켜온 신념들이 의사의 진단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어두운 방 안.어스름한 방안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이유영을 응시하고 있었다.차가운 손가락 끝이 이유영의 목 아래 울퉁
의사가 이유영의 상태를 면밀히 점검했다.그 결과, 백산 별장과 반산월은 조명에 한층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했다.임소미와 정국진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모든 조명을 다시 교체했다.밤이 되면 이유영이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고 낮에도 햇빛이 강하면 외출을 엄격히 제한했다.임소미가 이유영의 눈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으니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눈에 자극을 주지 않도록 모든 것이 신중히 조율되었다.백산 별장에 밤이 찾아왔다.사람들은 모두 조명이 너무 어둡다고 느꼈고 시야가 흐릿한 이유영조차도 조명이 이전보다 더 어두워졌음을 느꼈다.“엄마, 이 정도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저는 이미 제대로 볼 수 없는걸요.”이유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유영이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지금의 이 조명은 이유영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하지만 임소미는 딸의 말을 단호히 받아쳤다.“나도 알아. 이 조명이 사람들한테 너무 어둡게 느껴질 거라는 거. 그래도 강한 빛이 네 눈에 더 큰 손상을 줄 수도 있잖아.”임소미는 단호히 말했다.“...”하지만 이렇게 어두운 조명은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눈에 자극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됐어. 엄마 말대로 해. 네 수술이 성공하기 전까진 이 조명 상태 그대로 유지할 거야.”임소미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이유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알겠어요.”이유영은 엄마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임소미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이유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그날 밤.이유영이 반산월로 돌아왔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에게 말했다.“조명을 모두 교체했습니다. 이제 아가씨의 눈에는 크게 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안경은 꼭 착용하셔야 합니다.”“안경이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알겠어요.”예전엔 눈이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안경을 굳이 쓰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어졌다.
임소미의 가슴은 비수로 찔린 듯 아팠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낸 끝에 다시 찾은 딸이니,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조금 전, 의사가 임소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도 몰랐다.“이유영 씨가 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의사의 한마디는 그녀가 실명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했다.“정말 강이한을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어!”임소미는 울먹이며 감정을 터뜨렸다.강이한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이 눈이 이렇게 된 이유는 모두 강이한이 한지음 때문에 이유영을 감옥에 넣었기 때문이다.만약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이유영도 그 끔찍한 화재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임소미는 지금껏 이유영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딸의 흐릿해진 눈은 매 순간 그녀에게 그날의 고통을 떠올리게 했다.이유영은 어떤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던 걸까?“그만하세요, 엄마.”강이한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유영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강이한에 대한 이유영의 감정은 이제 미움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어머니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는 몰랐다.이유영 역시 한 아이의 엄마였다. 자식이 상처받을 때 부모가 느끼는 그 분노와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렇다.바로 그때도 이런 감정이었다.강이한이 아이와 관련된 일에서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이유영은 그의 목을 비틀고 싶은 심정이었다.더군다나 임소미는...어릴 적부터 이유영과 함께하지 못했기에 딸이 이런 상처를 입은 걸 본 순간 느꼈을 분노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수술하면 안 되겠니?”임소미의 목소리는 떨림으로 가득했다.그래, 수술.이 눈은 어서 빨리 수술을 받아야 했다.그 끔찍한 화재로 인해 이유영의 두 눈은 너무나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기본 재활치료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오직 수술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엄마, 수술은 저한테도 위험
박연준은 전기봉 하나로도 이미 머리가 아팠다.그런데 이유영까지 그에게 지나치게 냉혹하게 굴었다.이유영의 눈에는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강이한에게 비친 이유영의 모습은 모든 것을 잃고 허공을 바라보는 사람 같았다.이온유가 집으로 돌아왔다.아이에게 놀고 싶다는 욕구는 본능이었다. 퇴원 후 며칠간 쉬고 나니 매일 밖에 나가고 싶어 했다.“아빠.”온유는 어느새 훌쩍 자란 모습이었다.온유가 방으로 들어온 것을 본 강이한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끄며 물었다.“어디 갔다 왔어?”“놀이공원이요!”놀이공원 이야기가 나오자, 온유의 얼굴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그곳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아마도... 어릴 적에 가고 싶을 때 가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야 놀이공원을 좋아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이번 달은 놀이공원은 쉬자, 알겠지?”“네.”온유는 작은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아빠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아이였다.놀기 좋아하면서도 말을 잘 들었다.강이한은 온유를 안으며 속상한 듯 말했다.“몸이 이제 막 나았으니,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해야 해.”“정 아저씨가 한적한 곳만 골라 데려갔어요.”온유는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강이한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공공장소는 어디든 위험이 도사릴 수 있었다.한 차례 병을 겪고 난 뒤, 강이한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자리 잡았다. 그래서 온유가 그런 곳에 가는 것이 늘 불안했다.“온유야.”“네, 아빠.”“아빠가 며칠 동안 출장을 가야 해. 집에서 얌전히 있어야 한다, 알겠지?”“아빠는 온유를 안 데려가요?”아빠가 출장을 간다는 말에 작은 아이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그도 그럴 것이.이온유에게 있어서 강이한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그런 아빠가 집을 떠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서운함이 얼굴에 드러난 것이었다.강이한은 말했다.“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네 몸은 이제 막 나아졌잖아, 응?”“네.”작은 아이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꿈도 꾸지 마!”강이한은 신지수에게 냉정히 잘라 말했다.신지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말 차갑기 짝이 없네. 그 연회에서 내가 너에게 첫눈에 반했을 땐, 최소한 미소 하나쯤은 보여줄 수 있었잖아.”첫눈에 반했다고? 신지수가? 신씨 가문의 사람이 무슨 낭만적인 감정 따위를 가질 여유가 있겠는가? 라이터가 ‘딸깍’ 소리를 내며 불꽃을 피웠고 강이한은 담배를 천천히 피워 물었다. 신지수는 담배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신지수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연서가 당신들 사이의 깊은 골이라는 건 너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안 그래?”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연서라는 존재는 실재하는 사람이었다.그렇기에 연서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늘 잠재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언젠가는 드러날 수밖에 없는 진실이었다.신지수의 말이 끝나자, 강이한은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신지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두 사람 사이엔 이제 어떤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아 보여.”“신지수!”강이한의 목소리가 더 깊어지고 무거워졌다.강이한의 표정에는 이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고집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신지수가 말했다.“네가 이유영의 딸을 이용해 한지음의 딸을 구하려 했다는 소문을 들었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신지수가 이 사실을 처음 듣게 되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비록 오랜 세월 서주에 있었지만 그래도 강이한은 이유영을 꽤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그런데 굳이 왜 한지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행동을 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강이한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닥쳐!”그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강이한의 몸에서 냉랭한 기운이 흘러나왔다.신지수는 비아냥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강이한, 사실 이유영도 너한테 그렇게 중요한 존재는 아니지, 그렇지?”“언제부터 이유영과 친한 사이였어?”신지수가 이유영의 이름을 너무나 친근하게 부
“그때, 너는 왜 한 번도 멈출 생각 하지 않았는데?”과거에도, 이번 생에서도, 홍문동 사건에서도 강이한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이번 생에서 이유영을 감옥에 보낸 일도 마찬가지였다.심지어 월이를 이온유를 구하는 도구로 이용하려 할 때조차 그는 멈출 줄 몰랐다.그런데 그런 강이한이 무슨 자격으로, 무슨 염치로 이유영에게 멈추라 말할 수 있는가?“만약 그 여자였대도 넌 똑같이 행동했을까?”그 여자는 연서였다.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강이한의 숨소리가 순간적으로 거칠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왜 말이 없어?”강이한의 불규칙한 호흡을 들으며 이유영의 목소리는 더욱 차갑게 내려앉았다.전화기 너머, 강이한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갔다.만약 이유영이 연서였다면, 한지음과 이온유에게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까?“안 그랬을 거야, 맞지?”강이한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이유영은 차가운 조소를 담아 말을 이었다.강이한의 마음은 폭풍 속 배처럼 거칠게 흔들렸다.두 사람은 전화기 너머로 대치하며 날 선 긴장감을 이어갔다.이유영이 말했다.“강이한, 너 정말 잔인하다.”“유영아...”막상 강이한이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진짜 잔인한 건가?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잔인함 이상의 존재였다.이유영이 차갑게 말했다.“다시는 전화하지 마.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이제는 들을 마음이 없으니까.”이 말을 끝으로 이유영은 전화를 끊었다.세상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이유영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졌고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방금 전 통화에서 이유영이 던진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약 연서였다면, 그 일들이 벌어졌을까?’이유영은 강이한의 주저함과 침묵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연서라는 여자가 강이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한편, 전화기 너머의 강이한.강이한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엉켜 흔들리고 있었다.이유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