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이 떠난 뒤 정국진은 제자리에 선 채 오래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이용하는 마음뿐이 아니라고? 그럼 설마...”마음속에 한 가지 답안이 떠오른 순간 정국진은 마음이 바짝 쪼여 들었다.집 안으로 들어가자 그는 이유영이 안색이 창백한 채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다가가서 물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아빠.”“그 사람이 너한테 찾아왔어?”“네.”박연준을 말하는 것이었다.원래는 모든 것이 까발려진 뒤에 이유영과 박연준의 사이도 철저하게 정리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박연준의 태도를 보아하니 그런 상황이 전혀 아닌 것 같았다.“너는 연준이를 어떻게 생각하는데?”정국진은 심각한 눈빛으로 이유영을 보며 물었다.‘어떻게 생각하냐고?’이 물음은 정말 이유영을 말문이 막히게 하였다.박연준은 비록 대놓게 체코에서 일었던 일에 관해 설명하진 않았지만 그가 했던 ‘난 그런 방식으로 너와 선을 긋지는 않아’라는 말은 이유영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하긴 박연준의 말이 다 맞는 말이었다. 그는 그날 이유영을 만나려고 했었다.그래서 아무리 박연준이 이유영에게 마음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런 방식으로 이유영을 대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하지만 그는...“이번에 또 나한테 이용할 게 뭐가 남았는지 누가 알아요?”그랬다. 지금 그녀가 박연준에게 남은 인상은 그녀를 이용하는 것밖에 없었다.마치 지금 박연준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는 이제 이유영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만 같았다.중요한 것은 그가... 도대체 뭘 하려는 것인지였다.이용, 그는... 길게 십 년에 달하게 그녀를 이용했다. 그러니 여기서 박연준의 심보가 어느 정도로 깊은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내가 보기에는 꼭 이용할 게 남아서 그러는 거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 같아!”정국진은 이유영을 보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걱정이 조금 담겨있었다.어찌 됐든 전에 박연준이 그녀를 이용했던 것은 다 강이한과 서주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서주가 어떤 꼴인지에 대해 정국진이 제일 잘
이유영의 대답을 들은 정국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으로는 강이한이 그런 요구를 제기했다고 생각하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강이한이 어떻게 감히... 아니면 사실 우리 유영이를 전혀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건가? 그런 게 아니면 왜...’“그럼 너는 다시 도원산으로 돌아갈 거야?”“당연히 안 가죠!”일이 이 지경까지 이른 이상 이유영은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었다.그리고 그녀는 강이한이 한지음을 위해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 한지음의 딸을 위해 계속 여진우의 일로 자신을 끊임없이 협박할 것인지 두고 볼 생각이었다.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이런 생각이 들자 이유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서러워졌다.정국진도 미간이 톡톡 뛰었다.“너는 이 일이 연준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맞다, 박연준!‘예전에 박연준이 한지음의 일과 관련이 있었듯이 이번의 백혈병도... 설마 박연준과 관련이 있는 거 아닐까?’이유영이 입을 열었다.“연준 씨는 관련이 없다고 했어요.”“넌 그 말을 믿어?”“당연히 안 믿죠!”이것이 바로 이유영이 지금 마음속으로 강이한을 멀리하고 있으면서도 박연준과 거리를 두는 이유였다.박연준은 그녀에게 이용당하는 것과 배신당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가증스러운지 물은 적이 있었다.이유영에게 있어서 이 두 가지는 피차일반이었다... 모두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정국진은 이유영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 기분이 조금 흐뭇해졌다.“지금의 네 모습이 보기 너무 좋아. 그런데 네 어머니가 걱정하셔.”정국진은 예전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랑에 얽매여있던 정유라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렸다.반대로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이유영은 지금 가족에 대한 사랑 외에 어떤 감정도 믿지 않았다.강이한이든 박연준이든, 이유영은 누구도 믿지 않았다.“아빠, 그런 감정이 기필코 무덤으로 변한다면 저는... 차라리 없는 게 나을 것 같아요!”이유영은 곁에 월이가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황천길을 걷게 될 뻔
집사가 교제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소은지는 비로소 엔데스 현우가 다른 사람이 함부로 이곳을 드나들지 못하도록 사전에 당부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들여보내세요.”소은지는 손에 들고 있던 가위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그녀는 엔데스 명우의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집사가 그를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이 말을 듣자 도우미는 마치 죽을죄를 면하기라도 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니 방금 도우미는 거실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엔데스 명우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를 제대로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소문에 듣던 것보다 더 무서운 사람인 게 분명했다....5분 후, 딱 봐도 위험한 분위기에 겁을 먹은 도우미가 전전긍긍하며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에게 커피를 올렸다.소은지는 파르르 떨고 있는 도우미의 손을 보고 말했다.“먼저 내려가 있어요.”“네!”이 말을 듣자 도우미는 부리나케 도망갔다.도우미는 엔데스 명우가 너무 무서웠다. 특히 위험한 기색이 아른거리는 그의 눈빛은 마치 사람을 잡아먹을 것처럼 무서웠다.거실에는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만 남았다.엔데스 명우의 위험한 시선 속에서 소은지는 무덤덤하게 앞에 놓인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내가 내린 커피보다 못하지만, 그냥 있는 거 마셔.”그랬다. 소은지가 내린 커피는 맛이 아주 좋았다.그러나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엔데스 명우의 곁에 있기 전에 소은지는 사업적인 것 이외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매우 서툴렀었다.심지어 집에서 제대로 된 밥 한 끼를 먹으려면 이유영이 시간 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었다.하지만 엔데스 명우의 곁에 묶여있었던 뒤로부터 그녀는 커피도 끓일 줄 알고 차도 제법 잘 우리게 되었다. 그녀는 예전에 지루하다고 느꼈던 일들을 지금 아주 잘하게 되었다.“왜 대충 때워야 하는데?”남자의 말투에는 매서움이 가득했다.안 그래도 위험하던 분위기는 지금 썰렁함의 극치에 도달했다.소은지는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엔데스 명우는 말하면서 손에 힘을 더 꽉 주었다.마치 소은지는 그의 손안에 있는 작은 개미인 것처럼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가 소은지를 잡아 문지르는 것은 정말 쉬운 죽 먹기였다.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보며 여전히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당신은 당연히 나를 어떻게 할 수 있지.”“네가 봤을 때 내가 너를 이렇게 죽여버리면 나랑 현우는 형제를 계속할 수 있을까?”“어디 한번 그렇게 해 보든가.”소은지는 전혀 대수롭지 않았다.마치... 그녀는 자신의 목숨마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엔데스 명우랑 맞서 싸우고 있는 것만 같았다.지금 이 순간 엔데스 명우는 소은지의 눈에서 한치의 두려움도 읽어내지 못했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더니 지금의 소은지가 전형적인 그런 상황이었다.두 사람은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엔데스 명우 손의 힘도 점점 더 세졌다. 소은지가 정말 이대로 질식해서 기절할 것 같다고 생각되었을 때 결국 엔데스 명우가 손을 놓았다.“수술에 대해 한번 잘 생각해 봐!”“허!”‘수술? 아직도 헛된 꿈을 꾸고 있네?’엔데스 명우는 싸늘하게 소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수술해 줄 거 아니면 다시는 병원으로 찾아가지 마.”지금 설유나의 몸 상태는 아주 허약했으며 소은지의 성질을 받아줄 만큼의 기력도 없었다. 더군다나 소은지는 대쪽 같은 성격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악독한 마음씨도 갖고 있었다.아무리 설유나가 그 정도로 몸이 편찮다고 해도 소은지는 눈 깜짝 안 하고 상대방의 얼굴에 물을 뿌릴 수 있었다.“내가 지금 제일 하고 싶어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소은지는 똑바로 서서 벌겋게 단 자신의 목덜미를 주무르면서 엔데스 명우를 보며 입가에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난 그 여자의 얼굴에 뜨거운 물을 붓고 싶어!”“당신 죽고 싶어 안달 났어?”아니나 다를까 엔데스 명우의 분노는 순간 극치에 도달했다.“내가 아니라 당신이 지금 그 여자 때문에 죽으려고 달려드는 거잖아!”‘내가 죽고 싶어 안달 났다고? 청하시에서 잘
소은지와 엔데스 현우가 한편이 된 것은 다 이 거래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당연히 자신이 내놓은 정보가 엔데스 현우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거래인 이상, 변호사인 소은지는 자연스럽게 공평성을 따지게 되었다.“잘됐네요. 당분간 저도 최대한 당신을 도와서 엔데스 명우를 붙잡아 두고 있을게요!”소은지는 아주 구구절절 매섭게 말을 내뱉었다.그랬다. 그녀가 병원에서 분수없이 난리를 피웠던 것도 결국 엔데스 명우의 분노를 끌어내서 그를 병원에 묶어두기 위해서였다. 원래도 깊숙했던 엔데스 현우의 눈빛은 지금 소은지를 바라볼 때 더욱 깊어졌다. 그는 입을 열었다.“더는 그 사람을 건드리지 말아요!”어찌 됐든 엔데스 명우는 위험한 사람이었다. 만약 소은지가 계속해서 이렇게 난리를 피웠다가는 정말 사달이 날지도 모른다.소은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저는 그냥 일을 빨리 끝내버리고 싶어요.”그녀가 원한 건 자기 일을 빨리 끝내는 것이 아니라 엔데스 명우를 하루빨리 끝장내게 만드는 것이었다.정말이지 소은지는 진짜로 건드리면 안 되는 여자였다. 지금까지 그녀가 한 모든 것들은 다 엔데스 명우를 뒤엎어 버리기 위한 것들이었다.예전에 엔데스 명우의 손에 든 권력 때문에 소은지는 반격할 틈이 없었고 벗어날 길도 없었다. 마치 그것들은 자물쇠가 되어서 그녀를 묶어두는 것만 같았다.엔데스 명우가 그녀의 전부를 망가뜨린 이상 그녀는... 그의 손에 든 자물쇠를 망가뜨리기로 했다.소은지는 갑자기 뒤통수에서 손힘이 느껴졌다. 엔데스 현우는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살살 어루만졌다.“전기봉의 정보로 이미 충분해요. 당신은 더 이상 무엇을 할 필요가 없어요.”“당신...”소은지가 발버둥을 쳤지만 엔데스 현우의 힘은 점점 더 세졌다.순간... 두 사람의 거리는 아주 가까워졌다.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얼굴에 내려졌으며 그녀는 그저 가슴이 떨리는 것만 같았다.심장 박동도 따라서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소은지가 다른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엔데스 현우는 그녀
이 순간 오랫동안 소은지의 눈빛에 들어있던 단단함과 과감함도 따라서 조금 흔들렸다....한편, 강이한이 월이의 골수로 이온유에게 적합성 검사를 하고 싶다고 말한 뒤로 이유영은 다시 도원산으로 간 적이 없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의 일이 그렇게 끝이 난 것은 아니었다.아이가 사라졌다!결국 그날이... 오고 말았다.“아가씨, 아가씨. 월이 아가씨가 사라졌습니다. 어디에도 없습니다.”월이를 돌보던 도우미가 부랴부랴 달려오며 말했다.이유영은 손에 든 책을 내려놓고 망연하게 도우미를 바라보았다.‘이게 무슨 일이야?’“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원에서 콩이와 놀고 있었는데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습니다. 온 집안을 다 찾아봤습니다.”도우미는 애가 타서 울 지경이었다.이때 이유영의 심장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월이가... 집에서 사라지다니!?’그녀는 슝 하고 집을 나섰다. 지금 백산 별장은... 완전히 난리가 났다. 모든 도우미가 다 같이 아이를 찾고 있었다.“시시티브이를 돌려보세요!”이유영은 고함을 질렀다.이때 집사가 부리나케 달아오며 말했다.“아가씨, 어떤 사람이 월이 아가씨를 데려갔습니다.”“...”이 말을 들은 이유영은 순간 동공이 줄어들었다.‘데려갔다고? 누가?’그녀는 제일 빠른 속도로 모니터링 실로 달려갔다. 월이가 슈트를 입은 남자한테 안겨 가는 것을 보았을 때, 비록 그 남자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절반 정도 가려졌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그 남자가... 바로 이정이었다.강이한의 신변 사람이었다.‘강이한이 한 짓이었네...’ 그 순간 이유영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다.‘이 사람이... 감히!’...같은 시각, 월이는 감정센터로 데려와졌다. 이정은 바로 아이를 강이한의 눈앞으로 안고 왔다. 하지만 그는 월이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일단 데리고 가서 적합성 검사부터 시켜!”“네. 아이를 잠시 보살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바로 가서 안배하겠
이유영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지만 강이한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런데 전화를 거는 사람은 마치 미친 것처럼 한 번 또 한 번이고 연이어 전화를 걸어왔다.끝내 강이한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강이한...”전화 안에서는 이유영의 분노에 찼지만 인내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아무리 전자파를 통해서 귀에 들려왔다지만 여전히 그녀의 말투 속에 담긴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월이는 이유영에게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한 존재였다.‘아마도 박연준 때문이겠지?’예전에... 청하시에 있었을 때 박연준이 도대체 어떻게 그녀를 지키고 보호했는지에 대해 온 청하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유영이는 지금 서재욱의 아이를 낳은 것 때문에 박연준에게 미안한 거잖아. 서재욱과는 잘 되는 가능성이 없으니 이 아이한테 배로 잘해주는 거네?’“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어?”전화 안에서는 이유영의 참는 목소리가 들렸다.게다가 의료기구들이 부딪치는 차가운 소리도 들렸다. 이로부터 월이가 어떤 사람에게 잡혀갔다는 것을 안 뒤 이유영은 한걸음에 바로 이온유가 전에 있었던 병원으로 달려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하지만 이온유든 아니면 강이한이든 지금은 다 그쪽에 없었다.그래서 이유영은... 더욱 미칠 것 같았다.게다가 마음이 불안해졌다.‘서재욱의 딸 때문에 불안해졌네.’“유영아, 이 일이 끝난 뒤에 얘기하자.”강이한은 숨을 한 모금 크게 들이쉬고는 품 안에 안겨있는 아이를 보며 유달리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꼬맹이는 울다가 지쳤는지 이미 강이한의 품속에서 잠들었다. 곤히 잠든 아이의 얼굴은... 그에게 조금 익숙한 느낌을 주었다.전화 반대편의 이유영은 강이한의 말을 듣고 심장이 쿵쾅거렸다.“강이한, 한지음이 나한테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 당신은 꼭 월이로 그 여자의 딸을 구해줘야겠어?”그 순간 이유영의 말투는 유달리 싸늘했다.‘참 독하기도 해! 강이한, 넌 도대체 얼마나 독하길래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지?’“이번 일에 있어서 지음이 얘기를 들춰낼 필요가 없
이유영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강이한은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끝난 다음에?’끝난 다음에 결과가 어떻든 간에 강이한은 다 감당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온유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그는 정말 많은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그는... 잘 알고 있었다.만약 이번에 그가 진짜로 지금 품속에 있는 이 아이를 건드린다면 그럼 이유영은... 아마도 평생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유영이는 자신이 지음에게 빚진 것이 얼마나 많은지 하나도 몰라. 이번 딱 한 번만 하게 해줘!’그랬다. 한 번만...전화를 끊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이정이 돌아왔다.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보고는 또 무의식적으로 그의 품속에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곤히 잠은 월이의 모습은 강이한과 무척 닮았다.“도련님.”“안배 다 해 놨어?”“네.”“데리고 가!”강이한은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이정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다시 강이한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눈빛에서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했다.‘이 아이의 얼굴이 도련님과 이렇게나 닮았는데 설마 그걸 못 알아보신 거야?’“도련님.”이정은 바짝 긴장한 채 말했다.“왜?”“이 아이가 생긴 것이...”여기까지 말한 이정은 잠시 멈칫하더니 따라서 몸도 긴장으로 인해 뻣뻣해졌다.강이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뭐가?”그는 이정의 말귀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강이한은 다시 품속에서 깊이 잠든 월이에게 눈길을 주었지만 그저 조금 익숙한 감이 들었을 뿐이지 여전히 아무것도 보아내지 못했다.다들 사람은... 자기의 일에 대해서는 일관적으로 망연해진다는 말을 했었다.수많은 사람들이 보자마자 월이의 얼굴에서 강이한의 모습을 보아냈는데 정작 강이한 본인은 알아보지 못했다.“이 아이가 도련님과 많이 닮았습니다.”“...”‘날 닮았다고? 그럴 리가. 이 아이는 유영이와 서재욱의 아이잖아.’그의 분위기가 조금 더 차가워졌다.강이한이 서재욱의 일에 대해 엄청나게 꺼린다는 것을
박연준은 어둠 속 이유영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꼭 괜찮아져야 해...”그 말은 깊고 아픈 감정이 담겨 있었다.마치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한 말이었다.이유영은 비 내리는 소리에 집중하며 박연준의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않았다. 강이한이 떠난 이후, 그들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이렇게 차가웠다.“탁탁탁!”하이힐 소리와 바퀴 소리가 뜰에서 울려 퍼지자 이유영은 미간을 찡그리며 일어섰다.“소은지 씨입니다.”이유영의 얼굴에 당황함이 스쳐 지나자 우지는 급히 이유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누구도 알지 못했다.하이힐 소리가 들렸을 때, 이유영의 마음속에 느껴진 감정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괴로웠다.홍문동이 불타던 그날도 이유영은 그 하이힐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후로 어둠 속에서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그것은 차가움의 상징처럼 느껴졌고 이유영에게 공포로 다가왔다.우지가 소은지라는 이름을 언급했을 때, 이유영은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소은지가 왜 여기에 온 건지 의문이었다.“유영아.”소은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은지야.”이유영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맞아, 나야.”“왜 갑자기...”소은지의 예고 없는 방문에 이유영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지금 이유영에게 가장 답답한 일이 바로 소은지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는 소은지를 돕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답답한 마음이 이유영을 괴롭게 했다.“현우 씨가 너한테 가라고 해서 왔어.”소은지가 말했다.그 말이 끝나자, 소은지는 이유영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은 약간의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이유영은 소은지의 손을 반대로 잡으며, 현우가 소은지를 보낸 것이라면, 아마 엔데스 명우는 이 시점에서 매우 바쁜 상황일 것임을 짐작했다.이유영은 소은지가 안쓰러웠다.소은지 역시 이유영의 텅 빈 눈을 보며 가슴 속에서 숨 막히는 고통이 퍼졌다. 현우가 이유영의 시력이 거의 없다고 말했을 때는 그저 듣기만 했지만, 이유영이 정말로 보
시간이 지나면서 이유영의 마음속에는 어쩔 수 없이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 이유영은 이런 기분이 싫었다.“오늘은 어때?”한 남자가 그녀의 옆에 나타나 덩굴 의자에 앉았다.이유영은 이미 이 의자의 냄새에 익숙해졌다.익숙함, 그건 정말 무서운 것이었다. 처음 여기 왔을 때는 모든 것이 낯설었고 의자나 의자에 앉을 때마다 딱딱한 느낌만 들곤 했다.강이한이 이유영을 위해 덩굴 의자를 가져다주었고 그 위에 부드러운 쿠션을 깔아 주었다. 이유영은 덩굴 의자에서 나는 냄새가 좋았다.화려한 소파는 아니지만 그 자리는 이유영에게 편안함을 주었다.그러나 박연준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그녀의 얼굴은 차가워졌다.“아니.”이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그는 매일 아침 마치 일과처럼 그녀에게 묻곤 했지만 여전히 같은 대답만 했다.이유영은 남자의 기운이 조금 더 강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염 선생은 의술이 뛰어난 분이시니 걱정하지 마. 스트레스를 받으면 오히려 몸 상태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박연준은 사람을 위로하는 거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유영이 이렇게 오랜 시간 약을 복용했음에도 전혀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마음이 조금 다급해졌다.남자의 말을 듣고 이유영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말했다.“이제 바로 네가 보고 싶었던 거 아니야?”“...”그 말을 들은 박연준의 마음은 점점 더 조여왔다.“유영아, 내가 너한테 무엇을 원하는지 너도 알잖아. 왜 이렇게 날 비꼬는 거야?”맞다, 이유영은 알고 있었다.이유영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강이한과의 관계가 그렇게 엉망이 되어 버린 사람도 결국 중요한 순간에는 한 편에 서 있었다.그들이 이유영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녀는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우리 이러지 말자, 응?”박연준의 목소리는 씁쓸했다.박연준은 한때 이유영과의 관계가 이렇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박연준의 마음은 점점 더 조여오고 있었다.이유영은 차갑게 대답했다.“괴롭다면 떠나도 좋아.”이유영의 분위기와 태도는 박연준의 마음을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한쪽은 날카롭고 잔인했고 다른 한쪽은 두려움 없는 조롱을 던졌다.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소은지가 딱 그랬다.엔데스 명우가 아무리 강압적이고 위압적인 인물이라 해도 소은지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소은지의 눈빛에 비친 두려움 없는 모습이 그의 마음을 더욱 자극했다. 차라리 그녀의 눈을 빼버리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야만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여섯째 도련님!”여섯째 도련님이라니.엔데스 명우는 처음으로 이런 모욕감을 느꼈다. 그전에는 감히 아무도 그러지 못했다.특히 여자들은 그에게 끊임없이 구애했지, 감히 이렇게 대들지 못했다. 소은지는 정말 대단했다.남자는 소은지의 뺨을 찰싹찰싹 때리더니, 돌아서며 말했다.“소은지, 기다리고 있겠어.”“...”“현우가 너를 버리는 날을 기다리고 있을게.”남자의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묻어났다.마치 그 일이 눈앞에서 곧 벌어질 것처럼.남자가 더 말하지 않아도 소은지는 알 수 있었다. 일단 현우가 그녀를 버리면,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엔데스 명우의 무자비한 복수뿐이었다.그들의 앙숙 관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오히려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하지만 소은지는 이 사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마치 두려움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남자가 문까지 가다가 발을 멈추고 살짝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넌 엔데스 가문 남자들을 너무 쉽게 생각해!”심지어 너무 착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들은 늑대들이었다...마지막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무엇이든 하는 남자들. 소은지는 그들 사이에 갇혀 이제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소은지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엔데스 명우가 떠나고 소은지의 얼굴에는 짙은 어둠만 남아 있었다......파리는 지금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엔데스 현우는 사람을 보내 소은지를 전용기를 태웠다.비행기가 밤하늘로 날아오르는 순간, 소은지는 파리
“가고 싶어?”“가면 안 돼?”소은지는 차갑고 비꼬는 표정으로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았다.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남자는 빠르게 다가와 그녀의 목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목이 부서질 듯한 압력이 느껴졌다.소은지의 등이 차가운 벽에 밀쳐졌고 집사와 하인들이 다가가려 하자 남자가 고함쳤다.“다 꺼져!”집사와 하인들은 그 자리를 떠날 용기가 나지 않아 얼어붙어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두려운 것이었다.“나가세요.”이 남자가 미친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소은지의 눈빛에는 오히려 두려움이 없었다.집사와 하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뭇거렸다. 나갈 수도, 안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소은지는 목소리를 높여 다시 말했다.“다들 나가세요!”“...”사모님의 엄한 명령에 마음이 조여왔지만 결국 모두 급히 자리를 떠났다.엔데스 명우와 소은지만 남았을 때, 소은지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증인들은 다 나갔어. 네 마음대로 해.”소은지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았다.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표정은 예전에 그와 함께 있을 때와 똑같았다. 그가 아무리 고문해도 그녀는 항상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었다.명우가 소은지를 가장 아프게 해도, 소은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행동했다.마치 그녀의 세계에는 고통도 두려움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소은지에게는 약점이 없었다.한때 엔데스 명우는 이런 여자가 길들여지면 엄청난 성취감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녀의 교만한 뼈 구조마저 너무 미워서 하나하나 뜯어내고 싶을 정도였다.그녀의 오만함은 뼈와 피에서부터 자라 세포로 뻗어 나온 듯했다. 그렇게 끈질기게 자라 아무리 짓밟고 억눌러도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엔데스 명우는 소은지의 두 눈을 직접 도려내고 싶을 정도로 그녀의 눈빛이 싫었다.그녀는 항상 무관심하고 두려움 없는 눈빛으로 명우를 바라봤기 때문이다.“왜? 안 때릴 거야?”“그렇게 쉽게 내 손에 죽고 싶어?”“흥!”하긴, 이렇게 쉽게 그녀를 보내줄 순 없었
소은지는 누군가를 한 번도 깊이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송연미의 눈 속에서 마치 그런 깊은 사랑을 보는 것 같았다. 상대를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만큼의 사랑이었다.송연미의 눈에 담긴 감정은 차분하고 억제된 것이었으며 심지어 극단적이고 날카롭게 느껴졌다.모두 그 한 사람만을 위한 감정이었다.처음 송연미를 봤을 때, 엔데스 가문의 여자들 사이에서 송연미는 유난히 고독하고 차가운 아름다움으로 돋보였다.엔데스 가문에 변화가 생기자 송연미는 반산월에서 그녀는 네 번째 사모님과 송씨 가문의 아가씨답지 않은 태도를 보였고 미친 듯이 화를 냈었다.아버지가 사촌 여동생을 양녀로 삼으려는 얘기를 했을 때, 송연미는 절망적이면서도 차분한 모습이었다.이유영에게서 보았던 것, 즉 결혼의 끝을 생각하면 소은지는 감정에 대해 믿음을 가질 수가 없었다.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하지만 그런 사랑이 송연미에게서 보인 것이다. '그가 좋다면 나는 뭐든지 괜찮다'는 그런 사랑을.그 사랑은 소은지가 감정에 대해 가지고 있던 모든 생각을 뒤엎어 버렸다. 송연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소은지는 이제 송연미가 불쌍하고 애석하게 느껴졌다.엔데스 운빈과 송씨 가문과의 관계를 깨면서까지 현우에게 분노를 표출했고 송연미를 파리에서 떠나게 한 이유도 현우 때문이었다.그리고 지금, 아버지가 사촌을 입양한 사실을 참고 있는 이유도 현우 때문이었다.이런 여자가 감정적으로 더 이상 할 수 없는 일이 있을까?“난 오늘 밤 떠나.”잠시 후 소은지는 송연미에게 이렇게 말했다."..."송연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눈 속에 기쁨이 스쳤다.“진짜로 떠날 거야?”“응.”소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소은지는 진심이었다.송연미가 한숨을 돌린 듯했다. 마치 그 전까지의 모든 계획이 소은지에게 걸려 있었던 것처럼.이제 소은지가 입을 열었으니 그들도 다음 단계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소은지는 송연미의 반응을 보며 송연미의 눈 속에서 깊고 날카
대체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큰 압박감을 주었고 그 느낌이 너무나도 무겁고 답답했다.송연미는 단호하게 말했다.“왜냐하면 현우는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이기 때문이야.”그 말은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왜?”송연미의 아버지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이 일은 거의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엔데스 가문의 회장은 현우에게 무언가를 남겼을 거야. 그분이 가장 아끼던 사람은 바로 현우였으니까.”가장 아끼던 사람이 현우라고? 그렇다면 이렇게 복잡한 상황을 남겨둔 것 자체가 이상했다. 그 회장이 정말로 자신의 사람을 아꼈다면 이런 일들이 벌어졌을 리가 없었다.“내 아버지가 쥐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파리에서의 권력이었어. 네 좋은 친구인 이유영에게 물어보면, 내 아버지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거야.”송연미도 소은지를 오랫동안 지켜보며 소은지는 강압적인 방식보다는 부드러운 접근이 더 효과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동안 써왔던 여러 방법이 소은지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결국, 이 모든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소은지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일이 너무 복잡하고 방대하기도 했고 현우가 이 사건에 소은지를 전혀 끌어들이지 않아서 이 복잡한 관계를 파악하기 힘들었다.“정씨 가문은 이 일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거야?”소은지는 문득 그렇게 물었다.정씨 가문은 매우 큰 상업 제국이었다. 정국진은 언제나 무사히 지나갔고 그만큼 이 사람이 능숙하다는 뜻일 것이다.정씨 가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송연미는 이렇게 말했다.“만약 이유영 옆에 강이한과 박연준이 없었더라면, 엔데스 가문이 정국진을 그냥 놔뒀을 리가 없어.”하지만 아쉽게도 정씨 가문의 유일한 딸 이유영은 강이한과 박연준과 관계가 있었고,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손에 쥐고 있었다.따라서 이유영을 함부로 다룰 수 없다는 것이었다.사실 송연미가 가장 부러워한 사람은 바로 이유영이었다.왜냐하면 이유영이 이 파리에서 보았던
송연미는 소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버지께서 아직 현우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지 않으셨어.”그 말을 하면서 송연미의 목소리에는 묵직한 느낌이 담겨 있었다. 소은지는 그 무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소은지가 송연미를 바라보는 눈빛은 침묵 속에서 날카로움을 띠고 있었다.“네가 아직 여기 있기 때문이야.”송연미의 말은 직설적이었고 어느 정도 압박감이 배어 있었다.소은지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송연미는 오늘 밤 소은지가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소은지는 품에서 잠든 고양이를 조용히 쓰다듬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송연미가 그 고양이를 보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왜냐하면, 송연미도 고양이를 좋아했기 때문이다.아마 현우는 그것을 잊었을 것이다. 송연미와 현우의 사이가 좋았을 때, 송연미는 현우에게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좋아, 예쁜 고양이 한 마리 찾아 줄게.”그의 말은 여전히 소은지의 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그때 그들은 정말 행복했다. 그 누구도 그때가 마지막 평화로운 순간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 후, 그들은 각자의 길을 갔고 서로 다른 인생의 궤도로 나아갔다.송연미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가 기다린 것은 현우가 약속한 예쁜 고양이가 아니라 아버지가 그녀를 엔데스 운빈에게 시집보내려는 계획이었다.송연미는 강하게 반항했다. 미친 듯이 도망치려 했지만 결국 가문 내의 압박과 협박에 못 이겨 결국 무너지게 되었다.송연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하루를 겪었다.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모든 것이 단번에 깨져버렸고 그녀는 고통과 분노 속에서 절망했다.그래서 그녀는 그 사건에 연루된 모든 사람을 미워하게 된 것이다.“너랑 엔데스 운빈의 관계 때문에 네 아버지가...”소은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송연미를 바라보았다.도대체 이 가문은 어떤 집안인 걸까?소은지가 말을 끝내지 않았지만 송연미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는
하지만 소은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그녀는 어딘가 고독한 기운이 스며드는 걸 느끼며, 자신이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넌 어떻게 생각해? 나와 현우 씨, 나름 함께 고난을 겪어온 사이 아닌가?”소은지는 송연미에게 시선을 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소은지의 말에 송연미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송연미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고 눈 속에는 질투의 불씨가 번뜩였다.하지만 송연미는 엔데스 가문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인 만큼 그런 감정들은 금세 억누를 수 있었다.“엔데스 가문이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어.”중대하다?소은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현우가 자신을 이렇게 급하게 파리에서 떠나게 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다섯째 도련님이 큰형수를 데려갔어.”“...”그 말을 듣고 소은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송연미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송연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렴풋이 알았지만 사태가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에 여전히 충격을 받았다.“소은지, 너 모르지?”“뭘 말하는 거야?”“예전에 회장님 세대 때, 집안 권력을 둘러싼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소은지는 조용히 송연미의 말을 들었다.송연미가 소은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송연미 말대로 소은지는 그들의 권력 다툼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아버지가 그러셨어. 그 당시 엔데스 회장님은 정말 무서운 분이었다고. 지금의 여섯째 도련님보다 훨씬 더 무서웠대.”“...”그 말을 들은 소은지는 온몸이 얼어붙은 듯 굳어졌다.소은지는 가족 모임 때 한 번 마주쳤던 차가운 눈빛의 백발 회장님을 떠올렸다.단 한 번의 시선으로도 그녀를 얼어붙게 할 만큼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분이었다.엔데스 명우조차 이미 충분히 무서운 존재였는데, 회장님은 그보다 더했다니. 엔데스 가문이란 현우가 말한 것처럼, 정말로 끝없는 심연이었다.“다섯째 도련님이 큰형수를 데리고 간 이유는 미도로 여행을 간다고 했지만 사실은 큰형이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기 때문이야.”단서 하나로
한때 청하시에 머물던 시절.소은지는 너무 많은 것을 보아온 탓에 결혼이라는 단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본 적이 없었다.남자를 광적으로 사랑한다는 것 역시 그녀에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불같이 뜨거운 사랑이 결국 아픔으로 끝난다면, 그런 사랑은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특히 현우의 내면을 어느 정도 들여다본 지금, 그녀의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하지만 여자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감정 문제에 있어서는 순진하다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과거에 소은지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비웃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그래, 여자가 순진할 수도 있지. 그렇지만 마지막에 우는 건 그 여자가 아닐 수도 있어.”소은지의 말은 냉소적이었고 태도는 언제나 가벼워 보였다. 마음을 주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소은지는 여자가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아야 더 행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왜 굳이 목숨까지 걸어야 할지 모를 그런 감정에 휘말려야 할까?사랑은 진심을 다한 사람이 결국 패배자가 되는 잔인한 게임 같았다.소은지는 너무 많은 상처받은 여자들을 보아왔다.그리고, 너무나 많은 상처받은 남자들도 보아왔다.하지만 그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스스로 감정을 억누르려 애썼던 소은지는, 현우를 마주하는 순간 이미 마음이 깊이 흔들리고 있었다.“얼마나 걸릴까요?”소은지는 현우를 바라보며 물었다.우천시로 떠나는 것에 관한 질문이었다.현우가 소은지를 우천시로 보내려 한다는 건, 현재 파리의 상황이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걸 암시하는 것이었다.시간은 얼마나 필요한 걸까?“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한 달 정도 걸릴 거예요.”한 달이라는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소은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엔데스 가문이 정말로 벼랑 끝에 다다른 걸까?소은지는 깊은숨을 내쉬며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답답함을 억눌렀다.“네.”짧은 한마디.그러나 그 짧은 대답 안에 담긴 복잡한 감정은 오직 소은지만이 느낄 수 있었다....소은지에게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