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이 떠난 뒤 정국진은 제자리에 선 채 오래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이용하는 마음뿐이 아니라고? 그럼 설마...”마음속에 한 가지 답안이 떠오른 순간 정국진은 마음이 바짝 쪼여 들었다.집 안으로 들어가자 그는 이유영이 안색이 창백한 채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다가가서 물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아빠.”“그 사람이 너한테 찾아왔어?”“네.”박연준을 말하는 것이었다.원래는 모든 것이 까발려진 뒤에 이유영과 박연준의 사이도 철저하게 정리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박연준의 태도를 보아하니 그런 상황이 전혀 아닌 것 같았다.“너는 연준이를 어떻게 생각하는데?”정국진은 심각한 눈빛으로 이유영을 보며 물었다.‘어떻게 생각하냐고?’이 물음은 정말 이유영을 말문이 막히게 하였다.박연준은 비록 대놓게 체코에서 일었던 일에 관해 설명하진 않았지만 그가 했던 ‘난 그런 방식으로 너와 선을 긋지는 않아’라는 말은 이유영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하긴 박연준의 말이 다 맞는 말이었다. 그는 그날 이유영을 만나려고 했었다.그래서 아무리 박연준이 이유영에게 마음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런 방식으로 이유영을 대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하지만 그는...“이번에 또 나한테 이용할 게 뭐가 남았는지 누가 알아요?”그랬다. 지금 그녀가 박연준에게 남은 인상은 그녀를 이용하는 것밖에 없었다.마치 지금 박연준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는 이제 이유영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만 같았다.중요한 것은 그가... 도대체 뭘 하려는 것인지였다.이용, 그는... 길게 십 년에 달하게 그녀를 이용했다. 그러니 여기서 박연준의 심보가 어느 정도로 깊은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내가 보기에는 꼭 이용할 게 남아서 그러는 거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 같아!”정국진은 이유영을 보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걱정이 조금 담겨있었다.어찌 됐든 전에 박연준이 그녀를 이용했던 것은 다 강이한과 서주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서주가 어떤 꼴인지에 대해 정국진이 제일 잘
이유영의 대답을 들은 정국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으로는 강이한이 그런 요구를 제기했다고 생각하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강이한이 어떻게 감히... 아니면 사실 우리 유영이를 전혀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건가? 그런 게 아니면 왜...’“그럼 너는 다시 도원산으로 돌아갈 거야?”“당연히 안 가죠!”일이 이 지경까지 이른 이상 이유영은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었다.그리고 그녀는 강이한이 한지음을 위해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 한지음의 딸을 위해 계속 여진우의 일로 자신을 끊임없이 협박할 것인지 두고 볼 생각이었다.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이런 생각이 들자 이유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서러워졌다.정국진도 미간이 톡톡 뛰었다.“너는 이 일이 연준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맞다, 박연준!‘예전에 박연준이 한지음의 일과 관련이 있었듯이 이번의 백혈병도... 설마 박연준과 관련이 있는 거 아닐까?’이유영이 입을 열었다.“연준 씨는 관련이 없다고 했어요.”“넌 그 말을 믿어?”“당연히 안 믿죠!”이것이 바로 이유영이 지금 마음속으로 강이한을 멀리하고 있으면서도 박연준과 거리를 두는 이유였다.박연준은 그녀에게 이용당하는 것과 배신당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가증스러운지 물은 적이 있었다.이유영에게 있어서 이 두 가지는 피차일반이었다... 모두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정국진은 이유영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 기분이 조금 흐뭇해졌다.“지금의 네 모습이 보기 너무 좋아. 그런데 네 어머니가 걱정하셔.”정국진은 예전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랑에 얽매여있던 정유라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렸다.반대로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이유영은 지금 가족에 대한 사랑 외에 어떤 감정도 믿지 않았다.강이한이든 박연준이든, 이유영은 누구도 믿지 않았다.“아빠, 그런 감정이 기필코 무덤으로 변한다면 저는... 차라리 없는 게 나을 것 같아요!”이유영은 곁에 월이가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황천길을 걷게 될 뻔
집사가 교제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소은지는 비로소 엔데스 현우가 다른 사람이 함부로 이곳을 드나들지 못하도록 사전에 당부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들여보내세요.”소은지는 손에 들고 있던 가위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그녀는 엔데스 명우의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집사가 그를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이 말을 듣자 도우미는 마치 죽을죄를 면하기라도 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니 방금 도우미는 거실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엔데스 명우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를 제대로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소문에 듣던 것보다 더 무서운 사람인 게 분명했다....5분 후, 딱 봐도 위험한 분위기에 겁을 먹은 도우미가 전전긍긍하며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에게 커피를 올렸다.소은지는 파르르 떨고 있는 도우미의 손을 보고 말했다.“먼저 내려가 있어요.”“네!”이 말을 듣자 도우미는 부리나케 도망갔다.도우미는 엔데스 명우가 너무 무서웠다. 특히 위험한 기색이 아른거리는 그의 눈빛은 마치 사람을 잡아먹을 것처럼 무서웠다.거실에는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만 남았다.엔데스 명우의 위험한 시선 속에서 소은지는 무덤덤하게 앞에 놓인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내가 내린 커피보다 못하지만, 그냥 있는 거 마셔.”그랬다. 소은지가 내린 커피는 맛이 아주 좋았다.그러나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엔데스 명우의 곁에 있기 전에 소은지는 사업적인 것 이외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매우 서툴렀었다.심지어 집에서 제대로 된 밥 한 끼를 먹으려면 이유영이 시간 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었다.하지만 엔데스 명우의 곁에 묶여있었던 뒤로부터 그녀는 커피도 끓일 줄 알고 차도 제법 잘 우리게 되었다. 그녀는 예전에 지루하다고 느꼈던 일들을 지금 아주 잘하게 되었다.“왜 대충 때워야 하는데?”남자의 말투에는 매서움이 가득했다.안 그래도 위험하던 분위기는 지금 썰렁함의 극치에 도달했다.소은지는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엔데스 명우는 말하면서 손에 힘을 더 꽉 주었다.마치 소은지는 그의 손안에 있는 작은 개미인 것처럼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가 소은지를 잡아 문지르는 것은 정말 쉬운 죽 먹기였다.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보며 여전히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당신은 당연히 나를 어떻게 할 수 있지.”“네가 봤을 때 내가 너를 이렇게 죽여버리면 나랑 현우는 형제를 계속할 수 있을까?”“어디 한번 그렇게 해 보든가.”소은지는 전혀 대수롭지 않았다.마치... 그녀는 자신의 목숨마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엔데스 명우랑 맞서 싸우고 있는 것만 같았다.지금 이 순간 엔데스 명우는 소은지의 눈에서 한치의 두려움도 읽어내지 못했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더니 지금의 소은지가 전형적인 그런 상황이었다.두 사람은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엔데스 명우 손의 힘도 점점 더 세졌다. 소은지가 정말 이대로 질식해서 기절할 것 같다고 생각되었을 때 결국 엔데스 명우가 손을 놓았다.“수술에 대해 한번 잘 생각해 봐!”“허!”‘수술? 아직도 헛된 꿈을 꾸고 있네?’엔데스 명우는 싸늘하게 소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수술해 줄 거 아니면 다시는 병원으로 찾아가지 마.”지금 설유나의 몸 상태는 아주 허약했으며 소은지의 성질을 받아줄 만큼의 기력도 없었다. 더군다나 소은지는 대쪽 같은 성격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악독한 마음씨도 갖고 있었다.아무리 설유나가 그 정도로 몸이 편찮다고 해도 소은지는 눈 깜짝 안 하고 상대방의 얼굴에 물을 뿌릴 수 있었다.“내가 지금 제일 하고 싶어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소은지는 똑바로 서서 벌겋게 단 자신의 목덜미를 주무르면서 엔데스 명우를 보며 입가에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난 그 여자의 얼굴에 뜨거운 물을 붓고 싶어!”“당신 죽고 싶어 안달 났어?”아니나 다를까 엔데스 명우의 분노는 순간 극치에 도달했다.“내가 아니라 당신이 지금 그 여자 때문에 죽으려고 달려드는 거잖아!”‘내가 죽고 싶어 안달 났다고? 청하시에서 잘
소은지와 엔데스 현우가 한편이 된 것은 다 이 거래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당연히 자신이 내놓은 정보가 엔데스 현우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거래인 이상, 변호사인 소은지는 자연스럽게 공평성을 따지게 되었다.“잘됐네요. 당분간 저도 최대한 당신을 도와서 엔데스 명우를 붙잡아 두고 있을게요!”소은지는 아주 구구절절 매섭게 말을 내뱉었다.그랬다. 그녀가 병원에서 분수없이 난리를 피웠던 것도 결국 엔데스 명우의 분노를 끌어내서 그를 병원에 묶어두기 위해서였다. 원래도 깊숙했던 엔데스 현우의 눈빛은 지금 소은지를 바라볼 때 더욱 깊어졌다. 그는 입을 열었다.“더는 그 사람을 건드리지 말아요!”어찌 됐든 엔데스 명우는 위험한 사람이었다. 만약 소은지가 계속해서 이렇게 난리를 피웠다가는 정말 사달이 날지도 모른다.소은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저는 그냥 일을 빨리 끝내버리고 싶어요.”그녀가 원한 건 자기 일을 빨리 끝내는 것이 아니라 엔데스 명우를 하루빨리 끝장내게 만드는 것이었다.정말이지 소은지는 진짜로 건드리면 안 되는 여자였다. 지금까지 그녀가 한 모든 것들은 다 엔데스 명우를 뒤엎어 버리기 위한 것들이었다.예전에 엔데스 명우의 손에 든 권력 때문에 소은지는 반격할 틈이 없었고 벗어날 길도 없었다. 마치 그것들은 자물쇠가 되어서 그녀를 묶어두는 것만 같았다.엔데스 명우가 그녀의 전부를 망가뜨린 이상 그녀는... 그의 손에 든 자물쇠를 망가뜨리기로 했다.소은지는 갑자기 뒤통수에서 손힘이 느껴졌다. 엔데스 현우는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살살 어루만졌다.“전기봉의 정보로 이미 충분해요. 당신은 더 이상 무엇을 할 필요가 없어요.”“당신...”소은지가 발버둥을 쳤지만 엔데스 현우의 힘은 점점 더 세졌다.순간... 두 사람의 거리는 아주 가까워졌다.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얼굴에 내려졌으며 그녀는 그저 가슴이 떨리는 것만 같았다.심장 박동도 따라서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소은지가 다른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엔데스 현우는 그녀
이 순간 오랫동안 소은지의 눈빛에 들어있던 단단함과 과감함도 따라서 조금 흔들렸다....한편, 강이한이 월이의 골수로 이온유에게 적합성 검사를 하고 싶다고 말한 뒤로 이유영은 다시 도원산으로 간 적이 없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의 일이 그렇게 끝이 난 것은 아니었다.아이가 사라졌다!결국 그날이... 오고 말았다.“아가씨, 아가씨. 월이 아가씨가 사라졌습니다. 어디에도 없습니다.”월이를 돌보던 도우미가 부랴부랴 달려오며 말했다.이유영은 손에 든 책을 내려놓고 망연하게 도우미를 바라보았다.‘이게 무슨 일이야?’“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원에서 콩이와 놀고 있었는데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습니다. 온 집안을 다 찾아봤습니다.”도우미는 애가 타서 울 지경이었다.이때 이유영의 심장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월이가... 집에서 사라지다니!?’그녀는 슝 하고 집을 나섰다. 지금 백산 별장은... 완전히 난리가 났다. 모든 도우미가 다 같이 아이를 찾고 있었다.“시시티브이를 돌려보세요!”이유영은 고함을 질렀다.이때 집사가 부리나케 달아오며 말했다.“아가씨, 어떤 사람이 월이 아가씨를 데려갔습니다.”“...”이 말을 들은 이유영은 순간 동공이 줄어들었다.‘데려갔다고? 누가?’그녀는 제일 빠른 속도로 모니터링 실로 달려갔다. 월이가 슈트를 입은 남자한테 안겨 가는 것을 보았을 때, 비록 그 남자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절반 정도 가려졌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그 남자가... 바로 이정이었다.강이한의 신변 사람이었다.‘강이한이 한 짓이었네...’ 그 순간 이유영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다.‘이 사람이... 감히!’...같은 시각, 월이는 감정센터로 데려와졌다. 이정은 바로 아이를 강이한의 눈앞으로 안고 왔다. 하지만 그는 월이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일단 데리고 가서 적합성 검사부터 시켜!”“네. 아이를 잠시 보살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바로 가서 안배하겠
이유영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지만 강이한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런데 전화를 거는 사람은 마치 미친 것처럼 한 번 또 한 번이고 연이어 전화를 걸어왔다.끝내 강이한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강이한...”전화 안에서는 이유영의 분노에 찼지만 인내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아무리 전자파를 통해서 귀에 들려왔다지만 여전히 그녀의 말투 속에 담긴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월이는 이유영에게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한 존재였다.‘아마도 박연준 때문이겠지?’예전에... 청하시에 있었을 때 박연준이 도대체 어떻게 그녀를 지키고 보호했는지에 대해 온 청하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유영이는 지금 서재욱의 아이를 낳은 것 때문에 박연준에게 미안한 거잖아. 서재욱과는 잘 되는 가능성이 없으니 이 아이한테 배로 잘해주는 거네?’“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어?”전화 안에서는 이유영의 참는 목소리가 들렸다.게다가 의료기구들이 부딪치는 차가운 소리도 들렸다. 이로부터 월이가 어떤 사람에게 잡혀갔다는 것을 안 뒤 이유영은 한걸음에 바로 이온유가 전에 있었던 병원으로 달려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하지만 이온유든 아니면 강이한이든 지금은 다 그쪽에 없었다.그래서 이유영은... 더욱 미칠 것 같았다.게다가 마음이 불안해졌다.‘서재욱의 딸 때문에 불안해졌네.’“유영아, 이 일이 끝난 뒤에 얘기하자.”강이한은 숨을 한 모금 크게 들이쉬고는 품 안에 안겨있는 아이를 보며 유달리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꼬맹이는 울다가 지쳤는지 이미 강이한의 품속에서 잠들었다. 곤히 잠든 아이의 얼굴은... 그에게 조금 익숙한 느낌을 주었다.전화 반대편의 이유영은 강이한의 말을 듣고 심장이 쿵쾅거렸다.“강이한, 한지음이 나한테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 당신은 꼭 월이로 그 여자의 딸을 구해줘야겠어?”그 순간 이유영의 말투는 유달리 싸늘했다.‘참 독하기도 해! 강이한, 넌 도대체 얼마나 독하길래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지?’“이번 일에 있어서 지음이 얘기를 들춰낼 필요가 없
이유영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강이한은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끝난 다음에?’끝난 다음에 결과가 어떻든 간에 강이한은 다 감당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온유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그는 정말 많은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그는... 잘 알고 있었다.만약 이번에 그가 진짜로 지금 품속에 있는 이 아이를 건드린다면 그럼 이유영은... 아마도 평생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유영이는 자신이 지음에게 빚진 것이 얼마나 많은지 하나도 몰라. 이번 딱 한 번만 하게 해줘!’그랬다. 한 번만...전화를 끊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이정이 돌아왔다.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보고는 또 무의식적으로 그의 품속에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곤히 잠은 월이의 모습은 강이한과 무척 닮았다.“도련님.”“안배 다 해 놨어?”“네.”“데리고 가!”강이한은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이정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다시 강이한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눈빛에서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했다.‘이 아이의 얼굴이 도련님과 이렇게나 닮았는데 설마 그걸 못 알아보신 거야?’“도련님.”이정은 바짝 긴장한 채 말했다.“왜?”“이 아이가 생긴 것이...”여기까지 말한 이정은 잠시 멈칫하더니 따라서 몸도 긴장으로 인해 뻣뻣해졌다.강이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뭐가?”그는 이정의 말귀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강이한은 다시 품속에서 깊이 잠든 월이에게 눈길을 주었지만 그저 조금 익숙한 감이 들었을 뿐이지 여전히 아무것도 보아내지 못했다.다들 사람은... 자기의 일에 대해서는 일관적으로 망연해진다는 말을 했었다.수많은 사람들이 보자마자 월이의 얼굴에서 강이한의 모습을 보아냈는데 정작 강이한 본인은 알아보지 못했다.“이 아이가 도련님과 많이 닮았습니다.”“...”‘날 닮았다고? 그럴 리가. 이 아이는 유영이와 서재욱의 아이잖아.’그의 분위기가 조금 더 차가워졌다.강이한이 서재욱의 일에 대해 엄청나게 꺼린다는 것을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
임소미는 혈압이 치솟았고 화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내 말이 틀렸나요?”“틀렸냐고? 제대로 된 일을 한 적은 있고? 당신만 제대로 된 선택을 했더라면 유영이와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임소미는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격렬히 외쳤다.진영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임소미의 말이 맞았다. 진영숙은 두 사람 관계에서 많은 잘못을 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강이한은 사라졌고 강서희도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월이 뿐이었다.오늘 이곳에 와서 월이를 보게 된 순간, 월이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자리 잡았다.“사람 불러!”임소미가 크게 외치자 집사들과 도우미들이 급히 달려왔다.“이 여자를 당장 내쫓아!”“당신이 감히 그럴 수 있을까?”“뭐라고?”임소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이 여자는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조금 전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아이에게 조금의 정이라도 남아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모든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결국 그녀는 후회라는 감정을 모르는 인간이었다.진영숙이 오늘 여기 온 것도, 월이에게 다정하게 굴었던 것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마지막 발악이었다.그녀의 말은 그저 그럴싸한 포장일 뿐 사실은 월이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리고 뻔뻔하게도 무례하기까지 했다.진영숙은 임소미의 눈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매서운 날카로움뿐이었다.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우리 아들이 왜 서주를 떠났는지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임소미, 당신들은 정말 단 한치의 양심 가책도 못 느꼈어?”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는지 시간대와 상황을 조합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특히 떠나기 전, 시윤이 건넨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유영이 용성시에서 수술을 받았던 그 시기에 강이한은 서주에
강이한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절망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수술을 받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한때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무력했는지를 그는 이제서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파리에서 진영숙은 다시 백산 별장을 찾았다. 여전히 강이한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시윤은 강이한이 이정과 신시욱을 데리고 떠났다고 말했다.그 두 사람의 능력을 생각하면 강이한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은 어머니로서 절망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를 수소문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정말이지, 당신은...”백산 별정까지 찾아온 진영숙의 뻔뻔함에 임소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응수했다.진영숙은 한때 유능한 여성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감히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대우였다.“저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 좀 봐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없던 고통이 서려 있었다.그렇다. 지금의 진영숙에겐 주변에 기댈 친척도 함께할 가족도 없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손녀인 월이 뿐이었다.오늘도 그녀는 월이를 위해 여러 장난감을 준비해 왔지만 임소미는 그 모든 행동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당신도 어머니였잖아요. 제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잖아요.”임소미는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봐준다고? 당신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이유영이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진영숙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뱃속의 아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헌신적인 할머니 행세를 하니 임소미는 화가 났다.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으로밖에 안 보였다.진영숙의 눈엔 고통이 어렸다.“저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임소미의 말에 그녀는 도무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무리 자존심 강한 진영숙이라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과거
그녀는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강이한을 떠난 뒤 어둠 속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었다.신시욱과 이정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침묵에 잠겼다. 그 질문은 그들 사이에서도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이 그때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보냈는지, 사실 그들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또렷하게 남아 있는 건 그녀가 깊은 괴로움 속에 잠겨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그리고 그녀가 괴로워할수록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의 고독이 얼마나 잔혹한 감정인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그녀는 깊은 절망 속에 빠져 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은 어쩌면 그때의 이유영보다 더한 심연 속에서 절망을 겪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벌하고 있었다.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똑같이 겪기 위해 같은 어둠 속에 몸을 던졌다.“선생님. 각막 이식 수술 관련 소식이 들어왔습니다.”신시욱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천시에 머무는 동안, 신시욱과 이정은 한 번도 수술 신청을 멈춘 적이 없었다.그들은 강이한을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이유영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그도 절대 강행하지 않았다.이유영이 시력을 잃었을 때, 그녀는 가족들이 몰래 준비했던 이식 수술조차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오랫동안 기다려 온 기회 앞에서 강이한은 조용히 거절했다.“필요 없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두 사람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두 사람은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필요 없다고?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선생님.”신시욱의 목소리는 긴장감에 더욱 떨려왔다.그 어떤 강인한 남자라고 해도 이 순간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떨림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최근 며칠간 그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강이한은 자신을 벌하며 살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정말 이미 충분했다.‘받아야 할 벌은 다 받았는데 왜 여전히 자신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어둠 속에서 지낸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어둠 속에서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새들의 지저귐이 더 또렷하게 들리고 사소한 바람 소리 하나에도 감각이 예민해졌다.강이한은 우천시에 있는 주택 마당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천시에 오늘같이 이렇게 따스한 햇살이 비추던 때가 언제였던가?이정이 조심스레 다가와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햇살은 있어도 아직은 쌀쌀하네요.”말은 없었지만 강이한은 이정의 발걸음 소리와 숨소리로 그가 신시욱이 아님을 알아차렸다.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그때의 이유영도 지금처럼 감각이 예민했을까?“이정.”“네.”“유영이는 이 마당이 어떤 모습인지 전혀 보지 못했겠지?”“네.” 이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은 이곳에서 몇 개월을 머물렀지만 실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 마당은 끝내 그녀에게 낯선 곳으로 남게 되었다.지금 그녀를 우천시로 다시 데려온다 한들 스스로 길을 찾아올 수도 없을 것이다.강이한은 낮게 중얼거렸다.“하지만 유영이는 이 마당에 뭐가 있는지는 알고 있었어.”그렇다. 보지 못했어도 그녀는 감각으로 모든 것을 구분했다. 마치 지금의 강이한처럼.이정이 조심스레 물었다.“이럴 가치가 있었습니까?”그가 이곳에 온 이후, 누군가가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가치가 있었는지는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그것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유영에게 진 빚은 결코 눈 한 쌍으로는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이건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예전에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던 이유영의 손짓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졌다. 지금 자신이 어둠 속에서 겪고 있는 공포는 당시 그녀가 느낀 감정에 닿을 수조차 없었다.점심 식사 시간.“쨍그랑.”강이한이 손을 뻗는 순간, 접시와 그릇이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기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유영은 자신의 몸에 강이한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남은 인생에서도 강이한과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얽히는 일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월이의 일로 인해 그녀는 너무도 깊은 상처를 입었고 강이한을 평생 용서할 수 없었다.그런 사람의 눈을 자신이 기증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리고 강이한 역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수술 전에 모든 철수 준비를 마친 것이고 이유영에게는 아무것도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이미 많은 상처를 준 이후, 아무리 많은 것을 베푼다 해도 이유영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자신과 이유영 사이에는 어떠한 선택지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과감하게 그녀의 손을 놓은 것이다.‘이렇게 되면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빚진 것이 없게 되는 걸까?’하지만 단순히 눈을 기증했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유영아, 왜 강이한에 관해 묻는 거야? 혹시...”소은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국 그녀는 언제나 이유영 편이었다.특히 수술 전, 마지막으로 강이한을 마주했을 때 그가 남긴 말을 들은 후로 그녀조차도 강이한을 용서할 수 없다고 느꼈다.“나랑 장난해?”소은지의 말에 이유영의 표정은 단숨에 싸늘해졌다.그 차가운 기색을 확인한 소은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래, 그렇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소은지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나는 그냥 권력에 그토록 집착했던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서주를 내려놓았는지 궁금했을 뿐이야.”“음모일지도 모르지.”소은지는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화제를 서둘러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했다.“...”‘음모’라는 단어에 이유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소은지는 그녀의 웃음을 보고 또 한 번 안도했다.“ 월이 보러 왔을 때,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뭐라고 했는데?”“일어날 일은 언제든지 다시
강이한은 서주에서의 모든 일을 철수하고 사라졌다. 그와 함께하던 사람들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그저 강이한의 또 다른 속임수일 거라고 생각했다.강이한과 박연준, 두 사람은 누군가를 철저하게 속이는 데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박연준은 진짜로 서주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고 진영숙은 파리에서 집요하게 강이한의 행방을 묻고 다녔다. 그걸 보며 이유영은 강이한이 정말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무슨 생각해?”반산월에서 소은지는 이유영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이유영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은지야.”“응?”“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해?”서주의 현 상황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만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이유영은 점점 확신에 가까워졌다.강이한은 정말 그의 사람들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그는 마치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 듯했다.권력을 중시하던 인물이었기에 은둔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강이한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조용히 지낼 성격이 아니었다.“뭐라고?”소은지는 이유영의 갑작스러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물었다.이유영은 소은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강이한이... 정말 사라졌어.”“그래. 그 얘기 예전에도 했었잖아.”이유영이 이제서야 이 사실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소은지는 알아챌 수 있었다.예전엔 믿지 않았던 이유영의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녀는 강이한의 실종을 인정하고 있었다.강이한과 박연준은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그리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다.연서의 사건이 터진 이후, 그녀는 두 사람을 음모로 가득 찬 사람들로 생각했고 그래서 처음 강이한이 사라졌다고 했을 때도 이유영은 그것을 단순한 음모의 연장이라 여겼다.두 사람은 늘 서로 무관한 척 행동했지만 그 뒤에는 누구도 상상 못 할 거대한 연관성이 있었던 것이다.신지수는 여러 번 전화를 걸어왔다.강이한이 서주를 떠난 후, 신씨 가문도 연쇄적으로 피해를 보았고 그녀는 그 일을 처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