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오늘 서재욱이랑 함께 호텔에서 얼마나 있었어?”“나를 내려줘!”화가 난 이유영은 짝 소리와 함께 강이한의 뺨을 내리쳤다.순간 강이한의 얼굴은 새까맣게 변했다.그리고 이유영을 바라보는 눈빛은 더욱 날카로워졌다.그는 이유영을 안은 채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말했다.“당신이 소은지를 만났으니 지금 그 여자가 어떤 상황에 엮여있는지도 잘 알겠네. 그 여자에게 한 마디 전해 줘!”“...”“엔데스 여섯째 도련님이랑 막무가내로 맞서지 말라고. 그리고 그런 생각들을 다 걷어치우라고 해. 그 여자는 여섯째 도련님한테 상대가 안 돼...”‘은지더러 생각을 걷으라고?’그건 어려울 거라는 것을 이유영은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지금 소은지가 마음속으로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 바로 엔데스 명우인데, 그녀더러 쉽게 마음을 거두라고 하는 것은 아마 쉬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강이한이 이유영을 안고 집안에 들어왔을 때, 이온유는 식탁에 앉아서 과일을 먹고 있었다. 이온유는 아주 허약해 보였으며... 아픈 사람처럼 창백해 보였다.이유영은 이온유를 보더니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런 이유영을 본 이온유는 무의식적으로 겁을 먹으며 강이한의 품에 있는 이유영을 바라보았다.“유영아.”그의 말투 속에는 어쩔 수 없다는 기운이 들어있었다.정말이지 이유영의 키는 이온유랑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다. 게다가 성격으로 봐서도 강이한은 그녀가 어린애 같아 보였다.이유영은 눈길을 이온유한테서 뗐지만, 강이한의 말에 대꾸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유영은 그들과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강이한의 태도를 보아하니 그가 이온유를 남몰라라 할 일은 없었다.그리고 강이한이 이온유를 어떻게 대하든 그건 이유영과 상관이 없어졌다.결론적으로 강이한은 이유영을 데리고 의무실 쪽으로 갔다.흰 가운을 입은 의료진을 봤을 때, 이유영은 어안이 벙벙했다.“뭐 하자는 거야?”그 순간 이유영의 머릿속에는 경보음이 울렸다.강이한의 의료진이 그녀에게 하려는 짓은 그녀를 핍박하는
한지음은 강이한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첫 순위에 놓여있었다. 그러니 이유영의 두 눈을 수술 시켜주면 서로 빚지는 게 없다는 말도 참으로 우스운 말이었다.이유영이 수술을 원했으며 진작에 수술하고도 남았을 것이지 지금까지 기다릴 필요가 전혀 없었다.의무실에서 나왔을 때, 이온유는 거실에 서 있었다. 이유영을 보더니 아이는 온통 두려움과 불안감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엄마.”“...”이온유가 말한 ‘엄마’라는 소리를 듣자, 순간 이유영은 정말 이 아이가 가엽게 느껴졌다.‘이 아이는 기억이 있고부터 이온유라는 이름을 가졌으니... 아마도 태어난 것 자체가 꾸며진 계획이었을지도 모르지.’아마도 이 아이의 존재는 처음부터 깊게 묻어둔 수였을지도 모른다.강이한은 따라 나온 뒤, 이유영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있는 이온유를 보았다. 아이의 눈에는 이유영에 대한 기대와 갈망으로 차 있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이온유가 자기를 다친다는 것을 느낀 순간, 특히 가까운 곳에서 한지음의 이목구비와 똑 닮은 얼굴을 보았을 때, 그녀는 번뜩 한지음을 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으며 생각도 안 하고 바로 아이의 손을 물리쳤다.쿵 소리와 함께 아무 방비가 없었던 이온유는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강이한은 순간 동공이 줄어들었다.“이유영!”그리고 그의 히스테리 한 분노의 외침 소리는 별장에서 울려 퍼졌다.장면은 다시금 혼란스러워졌다.이온유를 돌보는 도우미들은 이 상황을 본 순간, 놀라서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사모님, 왜 이러십니까? 온유 아가씨는 아직 어린애잖습니까?”강이한이 다가오기 전에 도우미들은 이미 달려와서 단번에 아이를 와락 품에 안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온통 이유영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마치 머리가 감전된 것만 같았다.그녀는 고의로 밀친 것이 아니었다.그저 한지음과 너무나도 닮은 이온유의 두 눈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손이 먼저 나갔던 것이었다.이온유는 도우미 아주머니의 품에서 겁이 가득 찬 눈으로,
전생에서부터 이번 생까지, 두 사람의 사이는 셀 수 있을까?‘예전?’이유영은 더욱 비웃으며 말했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예전을 운운하는데?”이유영의 평온하고 비꼬는 웃음은 순간 강이한을 정신 차리게 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이유영한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마침 이때, 최익준의 차가 도착했다. 이유영은 차 소리를 듣고, 그리고 반짝이는 차 불빛을 보고는 강이한을 보며 웃었다. 더욱 진하고 비웃는 웃음이었다.이유영이 입을 열었다.“강이한, 내가 예전에 얼마나 악독한 사람이었든 간에 당신은 다 인정하고 그냥 넘겨버리는 수밖에 없잖아. 안 그래?”“...”“그리고 이온유, 내가 그 애랑 가까이해서 그 애를 다치게 한다고 생각하면 당신은 얼마든지 그 애를 데리고 파리를 떠나가면 되잖아!”“...”이 말을 들은 강이한은 머리가 띵 해나는 것만 같았다.이유영의 눈 밑은 평온함과 풍자함, 그리고는 막연함이었다, 이런 막연함은 전혀 아무것도 개의치 않는 것만 같았다.이유영이 이렇게 막연하다는 태도를 보이자 강이한의 마음은 유달리 당황했다.그는 입을 열어 뭐라고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순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해명?사실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생겼을 때 해명은 적지 않게 했었지만, 해명하는 중점이 틀렸었다. 지금...“유영아. 지음은 사실...”강이한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를 대답하는 건 쿵 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이유영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바로 차 문을 닫았다.강이한은 제자리에 선 채 찬바람만 맞았다.한참 동안,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이유영이 한지음과 이온유에 대한 저촉 심리가 얼마나 강렬한지 강이한은 보아낼 수 있었다.심지어 그의 곁에 이온유가 있으면 이유영이 있을 수 없고, 반대로 이유영이 있으면 이온유가 있을 수 없게 되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아무것도 모른다. 한지음이 그녀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지잉 핸드폰이 진동하였으며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이유영이 보내온 문자 메시지였다.그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이미 11시가 넘었다. 도우미는 나가 계셨고 이유영은 침대 옆의 울타리를 다 세웠다.이래야만 월이의 안전을 더 보장할 수 있었다.“엄마, 엄마.”꼬맹이는 헤헤 웃으면서 이유영의 몸 위로 바라 올랐는데 아주 신나 보였다.월이를 쳐다보는 이유영의 눈빛은 점점 더 자상해졌다.“우리 공주님!”꼬맹이는 이유영의 품에서 비비적거렸다. 아이의 몸은 아주 민첩한 것이 이유영의 품에서 구르는가 하면 또 그녀의 몸 위를 바라 올라가기도 하고 아니면 자신의 작은 얼굴로 이유영의 얼굴을 비비기도 했다.두 사람은 웃음꽃이 활짝 핀 상황에서 아주 화목하였다.이유영은 저도 모르게 이온유에게 부드럽게 대하는 강이한이 떠올랐다. 비록 그녀는 강이한에게 별 감정이 남아있진 않았지만, 그가 이온유를 대하는 모습을 생각하자 마음이 다소 조금 불편하였다.그건 아마도... 이유영이 강이한의 세계에서 항상 뒷전에 놓인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저도 모르게 월이와 이온유를 비교하게 되었다.‘만약 이온유와 월이에게 동시에 사고가 일어난다면 그때 강이한은... 아마도 예전에 나랑 한지음을 대했던 것처럼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치겠지?’이유영이 보기엔 강이한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지금 그가 이온유를 대하는 태도를 생각하면 정말 그럴지도 몰랐다.“엄마. 우유.”꼬맹이는 이유영의 품에서 비비적거리며 웅얼거리는 것이 딱 봐도 졸려 보였다.이유영은 월이를 제대로 안고는 흐리멍덩해진 꼬맹이의 눈을 보며 그저 마음이 떨리는 것만 같았다.‘우리 꼬맹이 왜 점점 갈수록... 닮아가지? 강이한과 월이를 최대한 못 마주치게 해야겠어.’딸은 갈수록 아버지를 닮아간다는 말이 있으니, 이유영은 지금 강이한이 파리에 있는 것 자체가 큰 복병이라고 생각했다.월이에게 우유를 풀어주자, 꼬맹이는 우유병을 안고 한쪽으로 돌아누웠다. 엉덩이가 이유영을 향한 채 조용하게 있는 월이의 모습은 정말 귀엽기 그지없었다.이유영이 작은 담요를 잡아당겨 월이에게 덮어주었더
차 안에서 이유영은 월이를 다시 안으려고 했지만, 순간 아이의 몸 상태가 엄청 심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월이는 잠시 경련을 하더니 어두운 불빛 아래서도 보일 정도로 얼굴에 빨간 점들이 돋아났다.이건 체온이 너무 높아서 생긴 것 같았다.이유영은 놀란 나머지 냉기를 한숨 들이켰다.“월아...”여진우는 월이를 감싼 담요를 휙 떼어내더니 월이의 몸에 있던 옷들을 다 벗겼다. 이것을 본 이유영은 마음이 싸늘했다.“너...”“아이 지금 체온이 너무 높아.”이렇게 열이 계속 났다가는 정말 큰일 날지도 몰랐다. 아직 채 2살도 안 되는 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이유영은 가슴이 턱턱 막혔다.금방 병원에 도착했다.의료진들은 이미 대기하고 있었으며 여진우를 본 순간 아주 공손하게 앞으로 다가왔다.“여진우 도련님!”그러고는 얼른 아이를 넘겨받고는 응급실로 들어갔다.이유영은 그들이 월이를 데려가는 것을 보고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여진우가 입을 열고 물었다.“집에 있었을 때 체온이 얼마였어?” “39.5도!”“왜 의사를 안 불렀어?”열이 났을 때 진작에 의사를 불러야 했다.이렇게까지 열이 높게 나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갑자기 열이 난 거야.”이유영은 온밤 별로 잠들지 않았다. 월이의 이마가 뜨겁다는 것을 느낀 순간, 이유영은 바로 체온을 쟀다.하지만 그때는 이미 체온이 높았으며 이유영은 전혀 반응할 겨를이 없었다.이유영은 응급실 쪽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눈을 한시도 떼지 못했다. 심장은... 이미 목구멍까지 차올랐다.이유영은 두려웠다!“진우야.”“난 네 오빠야.”“...”그 순간 이유영은 여진우의 말투가 유달리 무겁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엄숙하고 심각하게 압박 하에 이유영은 가족의 든든함을 절실하게 느꼈다.그녀는 기억이 있고부터 평생 줄곧 외동딸이었으며 주변에는 형제자매가 없었다.그 뒤에 갑자기 한지음이 나타났지만, 이유영은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었다.한지음한테서 제일 많이 받은 건 보복이었지 추호의 가족애를 느끼지
현장 분위기는 순간 터져버렸다.“진우야, 넌 먼저 아이랑 가...”여진우가 주먹을 꾹 쥐고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이유영이 입을 열었다.두 남자의 눈빛이 서로 마주친 순간, 마치 두 무리의 늑대가 서로 맞붙은 것처럼 살벌했다.“가라니까.”여진우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을 본 이유영은 매섭게 그에게 경고의 눈길을 보냈다.결국 여진우는 강이한을 한눈 째려보고는 자리를 떴다.월이는 이미 병실로 옮겨졌다.주차를 마치고 들어온 엄수현은 의사가 밀고 가는 아이를 힐끔 보았다... 비록 한 눈이었지만 그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앞에 있는 광경을 보았다. 특히 그의 앞으로 지나가는 여진우는 몸에서 차가운 기운을 가득 내뿜고 있었다.비록 그가 기운을 단속하긴 했지만, 서주에서 여진우를 만난 적 있었던 사람이라면... 그가 차가운 기운을 얼마나 많이 감추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여진우가 떠난 뒤, 강이한은 이유영을 소독수 냄새가 가득한 벽에다 대고 세게 누르고는 붉은 두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전화는 왜 안 받았어?”“지금 당신은 내가 매정하다고 탓하는 거야? 그 애가 아파서 엄마를 찾는데 내가 전화를 안 받았다고 지금 내게 뭐라고 하는 거야?”이유영은 비꼬며 강이한에게 되물었다.“...”순간 강이한의 두 눈은 분노 때문에 더욱 붉어졌다.강이한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이유영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그 애를 위해 나한테 전화를 얼마나 많이 한 거야? 아니면 당신은 여태껏 내가 어떤 태도인지 모르겠어?”‘알아볼 때도 됐잖아. 이젠 알아봐야지!’“유영아, 넌 온유한테 그렇게 대하면 안 돼!”이런 똑같은 말을 강이한은 정말 여러 번이고 말했다. 하지만 도대체 이유영이 왜 이온유를 그렇게 대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서 그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한지음에 관한 얘기가 나오기만 하면 뒤에 얼마나 큰 이야기가 엮여있는지를 막론하고 화제는 단 한 번도 계속 이어진 적이 없었다.“강이한, 내 딸도 열이 39.5도로 났어.
“얘기하세요.”이유영은 아주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마치 엄수현이 무슨 얘기를 할 것을 알아차린 것만 같았다.오늘 도원산에서 떠날 때, 이유영은 강이한 주변의 사람들이 원념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마음이 참 독해... 고작 어린애인데 아이한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그래서 지금 엄수현이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도 이유영이 도대체 어떤 여자인지를 얘기하려고 하는 줄로 생각했다.엄수현은 이유영을 보더니 안색이 어두워졌다.이유영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내내 두 사람은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으며 분위기는 점점 심각해졌다.이유영이 엘리베이터에서 나가려는 순간, 엄수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사모님, 그 아이가 왜 도련님을 닮았죠?”엄수현의 말이 끝나자, 이유영은 머리가 팡 터지는 것만 같았다.이유영은 고개를 돌려 충격이 가득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두 눈으로 엄수현을 바라보았다.‘이 사람... 월이를 딱 한 눈 보았는데 월이와 강이한이 닮았다는 것을 보아낸 거야?’이유영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이 순간 이유영의 마음속에 어떤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저녁에 침대 위에서 이유영은 월이의 변화를 보면서 강이한이 파리에 있는 한 시종 큰 복병이 될 것으로 생각했었다.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이렇게나 빨리 현실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강이한 주변의 엄수현이 이렇게 쉽게 눈치를 챘다니 그녀는 정말 믿기지 않았다.이유영은 크게 숨을 몇 모금 들이켰지만, 여전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사모님, 만약 도련님이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면 사모님께 더...”“더 잘해 줄 거라고요?”엄수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유영은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이유영의 호흡은 조금 가빠졌다.‘강이한의 신변에서 지내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냐? 강이한이 나한테 잘해 줄 거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이유영은 연달아 심호흡을 몇 번 하고는 그제야
병실 안에서 여진우는 침대 위에서 곤히 잠든 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열이 난 아이는 쉽게 졸려 했기에 집에서 병원으로 오는 길 내내 한 번도 깨어나지 않았다.여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꼬맹이의 작은 코와 입이 다 그 사람이랑 많이 닮았어!”이유영은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조금 전 엄수현이 자기를 막아선 것이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만약 그녀를 막지 않고 바로 강이한에게 사실을 얘기했으면 아마 전 파리가 떠들썩해졌을 것이었다.강이한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이렇게 큰 난리를 피우는 사람인데 만약 아이의 정체를 알아버리면 일이 어떤 지경까지 이르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그 얘기는 그만해줘.”“강이한이 아까 서주 쪽에 전화했대.”“또 너를 건드렸어?”이유영은 골치가 아파 나는 것만 같았다.강이한의 성격은 줄곧 이랬다. 일의 시비곡직을 따지지도 않고,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매번 일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놨다.예전에 결혼하기 전에 이유영은 강이한의 성격이 이런 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 인간은 왜 성격이 점점 더 지랄 같아지는 거 같지!?’“강이한이 너에게 나를 정씨 저택에서 내보내라고 제기했어?”“어.”확실히 그 말을 했었다.하지만 이유영은 그저 강이한이 미친 사람같이 느껴졌다. 이혼까지 한 마당에 이런 짓거리까지 만들어 내다니 이유영은 어이가 없었다.“연회는 3일 뒤에 진행될 거야.”“그럼, 네 쪽에는...”“넌 서재욱 씨 쪽이나 신경 써.”3일 뒤, 연회에서 여진우와 이유영의 신분은 드러나게 될 것이다.그럼, 강이한은 자연스럽게 더 이상 여진우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었다.하지만 서재욱 쪽은?강이한이 이유영에게 하는 짓거리를 보면, 서재욱과 이유영에게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안 이상, 강이한은 절대 서재욱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 뻔했다.그 사람과는 얘기가 전혀 안 통하는 것이 문제였다. 자격이 없다고, 그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말해도 그는 전혀 듣지를 않았다. 강이한은 그저
여진우가 돌아왔을 때, 강이한은 여전히 정원 한가운데 서 있었고 떠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심코 집 안쪽을 힐끗 보았다.여진우는 주먹을 가볍게 쥔 채 천천히 강이한에게 걸어갔다. 두 사람이 마주 선 순간, 공기는 팽팽하게 얼어붙었다.“지금 상황에 여기까지 올 여유가 있다니, 놀라운 일이군.”여진우가 말했다.서주의 상황은 어떠한가? 정국진이 발을 뗀 이후 이유영은 서주와 거리를 두었지만 여진우만큼은 그곳의 변화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지금 서주는 강이한과 박연준에게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서주의 혼란 속에서도 강이한은 이곳까지 올 결심을 한 것이다.강이한은 여진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이유영을 떠올리게 할 만큼 닮아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강이한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전생에, 강이한은 이유영과 여진우가 남매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사실 조금만 더 주의 깊게 봤더라면 그들의 닮은 점을 쉽게 알아차렸을 것이다.그랬다면 서주에서 여진우를 만났을 때 이유영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알았을지도 모른다.“널 과소평가했어. 이렇게 빠져나올 줄이야!”강이한은 서주를 언급하며 말했다.여진우가 만약 능력이 없었다면, 이번 서주 사태는 여진우에게도 큰 위기가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여진우는 담담히 말했다.“인생은 많은 선택지로 이루어져 있지만 때로는 중요한 것 중 일부를 포기해야 해!”여진우의 말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강이한은 여진우의 말을 곱씹으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중요한데 포기한다고?여진우는 강이한이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이어갔다.“하지만 너한텐 포기라는 건 없어 보이네.”“...”“예를 들면, 이온유...”이온유. 그렇다.강이한과 이유영 사이의 핵심 갈등은 연서였고 그 문제를 가로막는 가장 큰 존재는 바로 이온유였다.강이한은 여진우를 바라보며 입술을 다물었다.여진우는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등을 돌려 집 안으로 걸어가며 조용히 말했다.“서주로
“정 선생임...”강이한은 믿기 어렵다는 듯 정국진을 바라보았다.강이한이 정국진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정국진은 냉정하게 말했다.“설마 또 ‘그저 아이일 뿐’이라는 말을 꺼내려는 건 아니겠지?”과거에.강이한은 이유영 앞에서 여러 차례 그저 아이일 뿐이라는 말을 강조해 왔다.그저 아이일 뿐이니까 이유영이 모든 걸 감당해야 한다는 뜻인가? 월이가 희생해도 괜찮다는 의미였던 걸까?그 순간.정국진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강이한의 가슴에 무거운 돌처럼 내려앉았고,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의 마음을 깊이 찔러 들어왔다.누구나 이성적으로는 옳고 그름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일이 되면 감정은 편애를 피할 수 없다.그리고 강이한의 편애는 분명히 한지음과 한지음의 딸에게 쏠려 있었다.그는 당시 상황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입장에서만 내린 판단이었을 뿐이었다. 이유영과 아이에게는 그의 모든 행동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강이한, 이번이 마지막이다.”정국진은 강경하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여기서 떠나!”그의 말투에는 명백한 경고와 위협이 담겨 있었다.정국진은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강이한은 그 자리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정국진이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긴 대화 속에서 드러난 결론은 단 하나였다.강이한에게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유영과 월이가 그들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처음부터 끝까지.한지음도, 한지음의 딸도 그저 강이한에게 중요한 존재일 뿐이었다.월이와 이유영은 어떤 의무도 없었고 받아들일 이유도 없었다.하지만 강이한은?그는 도대체 왜 그랬던 걸까? 강이한과 이유영의 관계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백산 별장.임소미는 아이를 안고 집 안을 천천히 걸으며 달래고 있었다. 아이의 감정은 이제서야 조금씩 진정되고 있었다.월이는 강이한의 딸이었다. 그러나 그를 본
강이한은 눈썹을 찌푸린 채, 여전히 이유영과 임소미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그만 쳐다봐!”정국진이 말했다.정국진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훨씬 날카롭고 단호했다. 외조카와 친딸의 무게는 결코 같을 수 없었다.많은 일이 있었다. 비록 이유영이 서주에서 돌아온 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도 정국진은 여진우를 통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다.그렇기에 지금 정국진의 태도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강이한은 정국진을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방금...”“네가 본 대로다. 유영이의 시력은 급격히 악화했고 의사 말로는 수술하지 않으면 시력을 잃는 건 시간문제라고 하더군.”정국진의 차가운 말이 강이한을 가로막았다.강이한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숨 막히는 답답함에 사로잡혔다.이유영이...“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유영이 엄마 말로는, 박연준이 유영이를 알프산으로 데려갔다더군.”알프산? 강이한의 표정이 굳었다.“...”박연준이 이유영을 알프산으로 데려갔다는 사실을 들은 순간, 강이한의 마음은 불안과 긴장으로 가득했었다.이유영의 몸 상태로는 그런 추운 지역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예상하지 못했다. 문제가 단순히 추위뿐만 아니라 두 눈까지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는.“눈부신 설원과 강한 햇빛이 유영이의 눈에 치명적인 자극과 손상을 남겼어. 지금 시력이 이렇게 된 것도 그 탓이지.”정국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강이한은 이미 느끼고 있던 가슴속 고통이 정국진의 이 말로 인해 더욱 심해졌다.결국... 박연준이 이유영을 알프산으로 데려간 탓에 그녀의 시력이 이렇게 빠르게 악화한 것인가?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강이한은 마치 폭풍우가 휘몰아치듯 혼란스러웠다. 얼어붙은 광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정국진은 강이한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시 찾아오지 마라.”기회는 이미 넘칠 만큼 주어졌다. 강이한은 그 소중한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말았을
이유영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고 그대로 넘어질 것만 같았다. 그 순간, 허리에 전해진 강한 힘이 이유영을 단단히 붙잡아주었다.익숙한 기운이 스며들며 이유영을 감싸안았다.중심을 되찾는 순간, 이유영은 본능적으로 그를 밀쳐냈다. 그 사람은... 바로 강이한이었다. 자신이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남자.“와아아...”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순간, 이유영의 차가운 눈빛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이유영은 당황한 듯한 모습으로 서둘러 아이에게 달려갔다.“월이야, 월이야.”이유영은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엄마, 무서워요!”“괜찮아. 엄마가 여기 있잖아.”“나쁜 사람! 나쁜 사람이에요...”작은 아이는 두려운 목소리로 강이한을 보고 외쳤다.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강이한은 아이의 입에서 '나쁜 사람'이라는 말이 터져 나오는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나쁜 사람... 이의 기억 속 자신은 그저 그런 존재일 뿐이었다.그래, 이게 바로 그가 아이에게 남긴 흔적이었다.이것이 바로 그의 존재가 남긴 기억이었다.“그래, 맞아.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하지만 괜찮아. 엄마가 있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어떤 나쁜 사람도 월이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다치지 않게 막아낼 수 있었다.이유영은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강이한은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며, 그 고요한 광경이 가슴을 날카롭게 찢어놓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이 밀려왔다. 그때, 소란을 들은 하인들과 집사들이 급히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들 역시 강이한을 보자 긴장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이내 임소미와 정국진도 급히 현장에 도착했다.임소미는 강이한을 보자마자 적대감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여긴 왜 온 거야?”임소미의 말투는 한 치의 호의도 담겨 있지 않았다.“유영이를 좀 봐.”정국진이 임소미에게 말했다.임소미는 강이한에 대한 불만이 아무리 많아도 이유영의 이름이 언급되자 그 감정을
임소미는 이유영이 백산 별장을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심지어 반산월로 돌아가는 것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결국 이유영은 무력감 속에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서재에서 정국진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네 두 눈은 지금...”정국진의 목소리에는 멈춘 말 속에 깊은 안타까움이 묻어났고, 이유영은 그 감정을 생생히 느꼈다.“아빠...”“수술은 빨리 받는 게 좋겠다. 그래야 네 엄마도 마음이 놓일 테니까.”“하지만 저는...”“걱정할 필요 없다. 네게 가장 뛰어난 의사를 붙여줄 테니.”정국진은 이유영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이유영을 달래며 말했다.사실 정국진과 임소미는 누구보다도 긴장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수술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모든 준비를 더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아빠...”“응?”“아빠... 저, 너무 무서워요.”그동안 가족들이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 이유영은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이유영은 정말로 무서웠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그 고통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지금까지 그토록 자신의 두 눈을 지켜 왔건만 결국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마음속에서 숨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밀려왔다.전생에서 눈을 떴을 때, 이유영을 감싼 건 끝없는 어둠뿐이었다. 그 공포와 혼란은 그녀를 미치게 할 지경이었다.지난 생에서 이유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어둠 속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한순간에 어둠 속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시야가 어두워져 가는 과정을 느껴야 했다.그 느린 과정이 그녀에게는 더욱 고통스러웠다.“무서워하지 마라. 우리 모두 네 곁에서 함께할 거야.”“네...”이유영은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주르르 떨어졌다.그래, 두려워하지 말자. 이번 생은 전생과는 다르니까. 비록 전생의 운명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이번에는 가족들이 곁에 있어.전생에는 어둠 속에서 이유영 곁에는 강이한
이유영은 이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시력이 급격히 나빠진 원인이 바로 알프산 방문 때문이라는 사실도.알프산을 다녀온 후 이유영의 시력은 점점 더 악화하였고 자극을 받은 듯한 이상 증상들이 서서히 나타났다.“강한 빛도 견디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런 곳에 갈 생각을 했니?”임소미는 완전히 화가 나 있었다.이제 이유영이 어디를 가든 임소미는 더 이상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 장소가 이유영의 눈에 큰 해를 끼칠 수 있는 곳이라면 더욱더.“엄마, 정말 별일 아니에요...”이유영이 조용히 말했다.“더 이상 말하지 마!”임소미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잠깐 잊고 있었어요.”이유영은 진심으로 말했다.미리 알았더라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이전에도 의사가 주의를 당부한 적이 있었지만, 눈 덮인 곳에 갈 일이 거의 없었기에 점점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그러다 이번에 큰 자극을 받게 되었고 일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줄은 이유영 자신도 몰랐다.“잊었다고? 그 잊음 때문에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할 수도 있는데, 그걸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니?”임소미의 목소리에는 분노를 넘어선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임소미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유영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엄마, 미안해요!”“미안하다는 말은 필요 없어. 나는 네가 건강하게 지내는 것만 바랄 뿐이야, 알겠니?”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었다.어떤 상황에서도 자식이 잘 지내길 바랄 뿐이었다.이유영은 그 말에 가슴이 따뜻해졌다.이유영은 손을 뻗어 임소미의 가냘픈 허리를 감쌌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임소미는 여전히 이렇게 날씬하고 아름다웠다.임소미는 평소에도 관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알겠어요, 엄마. 화 풀어요, 네? 저, 수술받을게요.”“유영아...”“엄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네?”임소미의 품에 안긴 이유영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임소미는 심장이 떨릴 정도로 안쓰러웠다.임소미는 이유영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우지는 빠르게 물을 닦아냈다.손바닥에 남은 차가운 물기는 이유영에게 시력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했다.언젠가 이유영의 두 눈은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그 공포는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서서히 퍼져 나왔다.아침에 물 한 잔을 쏟은 이후, 이유영은 하루 종일 우지와 우현의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이유영은 이제 옷장 속에서 강렬하고 선명한 색깔의 옷들만 겨우 식별할 수 있었다.나머지 색깔들은 이미 모두 희미한 회색빛으로 뒤덮여 있었다.아침 식탁.우지는 조심스럽게 죽을 이유영 앞에 놓으며 말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 아직 조금 뜨거울 수 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이유영이 숟가락을 집으려고 할 때, 우지는 바로 숟가락을 건네주었다.“고마워요.”이유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거센 혼란이 몰아치고 있었다.가슴은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았다.그때, 임소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유영은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엄마.”“왜 아침 같이 먹으러 오지 않았어?”“좀 늦게 일어났어요. 엄마 먼저 드세요.”“그럼 오전에는 꼭 돌아와서 월이랑 같이 놀아 줘. 네가 이곳에 안 온다고 하면 월이가 속상해할 거야.”“네, 알겠어요.”월이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유영은 가슴이 더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월이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이유영의 마음속에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전화를 끊고 난 후.이유영의 세계는 다시금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이유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여진우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마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만약 임소미와 정국진에게 이유영만 존재했다면... 그들은 얼마나 더 힘들어하셨을까?다행스러움과 무거움이 동시에 몰려왔다.아침 식사 후.이유영은 운전기사의 차를 타고 백산 별장으로 돌아갔다.임소미는 이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날, 한지음이 떠난 후, 이유영은 손으로 배를 감싸안고 한동안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이유영의 머릿속에는 강이한을 떠난 뒤, 아이와 함께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이 가득했다.당시의 이유영에게는 눈을 뜨면 온통 어둠뿐인 날들이 이어졌고 어떤 처참한 미래가 닥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만 같았다.강이한을 떠나겠다는 결심은 확고했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를 알게 되는 순간, 그 용기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이유영은 두려웠고 미칠 것 같았다.자기 삶이 아무리 비참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유영이 강이한의 결정을 기다리기도 전에, 이유영 스스로 선택을 내리기도 전에 모든 것이 한 차례 대화재로 끝이 났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한지음을 용서하라고 했다.한지음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이유영을 위해 희생했다고 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결코 알지 못했다.그것이 오직 자신의 문제였다면, 어쩌면 모든 것을 잊고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아이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용서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이유영이 아이를 위해 온갖 고통을 겪었던 그 마지막 시간 속에서 이미 결정되었다.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어떤 희생을 했든 한지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네, 좋아요! 사모님께 가서 바로 말씀드릴게요. 사모님께서 아가씨가 수술을 빨리 받겠다고 결정하신 걸 들으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우지가 기쁜 얼굴로 방을 나가는 모습을 본 이유영은 그저 고개를 천천히 저을 뿐이었다.그날 밤.이유영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새벽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결과를 받아들이는 일은 이유영에게조차 쉽지 않았다.오랜 세월 지켜온 신념들이 의사의 진단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어두운 방 안.어스름한 방안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이유영을 응시하고 있었다.차가운 손가락 끝이 이유영의 목 아래 울퉁
의사가 이유영의 상태를 면밀히 점검했다.그 결과, 백산 별장과 반산월은 조명에 한층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했다.임소미와 정국진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모든 조명을 다시 교체했다.밤이 되면 이유영이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고 낮에도 햇빛이 강하면 외출을 엄격히 제한했다.임소미가 이유영의 눈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으니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눈에 자극을 주지 않도록 모든 것이 신중히 조율되었다.백산 별장에 밤이 찾아왔다.사람들은 모두 조명이 너무 어둡다고 느꼈고 시야가 흐릿한 이유영조차도 조명이 이전보다 더 어두워졌음을 느꼈다.“엄마, 이 정도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저는 이미 제대로 볼 수 없는걸요.”이유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유영이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지금의 이 조명은 이유영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하지만 임소미는 딸의 말을 단호히 받아쳤다.“나도 알아. 이 조명이 사람들한테 너무 어둡게 느껴질 거라는 거. 그래도 강한 빛이 네 눈에 더 큰 손상을 줄 수도 있잖아.”임소미는 단호히 말했다.“...”하지만 이렇게 어두운 조명은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눈에 자극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됐어. 엄마 말대로 해. 네 수술이 성공하기 전까진 이 조명 상태 그대로 유지할 거야.”임소미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이유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알겠어요.”이유영은 엄마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임소미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이유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그날 밤.이유영이 반산월로 돌아왔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에게 말했다.“조명을 모두 교체했습니다. 이제 아가씨의 눈에는 크게 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안경은 꼭 착용하셔야 합니다.”“안경이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알겠어요.”예전엔 눈이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안경을 굳이 쓰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