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줄곧 강서희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엄마, 왜 그런 눈으로 봐?”강서희는 미묘한 진영숙의 눈빛에 소름이 돋았다.진영숙은 뭔가 놓친 것을 찾으려는 듯한 눈빛으로 강서희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강서희는 진영숙이 말이 없자 더 당황스러웠다.“이유영한테는… 사실 나도 사정이 있었어! 이유영이 날 그렇게 만들었어.”당황한 강서희가 횡설수설했다.전에도 엄격한 면이 있었던 진영숙이지만 지금처럼 진지하고 정색했던 적이 없었다.이유영의 진짜 신분이 공개된 뒤로 진영숙은 계속해서 강서희에게 이유영을 건들지 말라고 경고했다.이번에 강서희가 경찰서에 불려간 것도 이유영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퍼뜨렸다가 걸려서 경찰에 넘겨진 것이었다.분명 새로 판 계정이고 ip 관리도 확실하게 해서 문제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쉽게 잡혔다는 게 의아했다.강서희는 지금에 와서야 이유영이 더 이상 옛날에 당하기만 하던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그녀의 주변에는 수많은 인재가 있었고 강서희도 모르는 정보들을 가지고 있었다.강서희는 이유영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나타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처음에 이 일을 설계할 때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깔끔하게 처리했어야 했는데!’강서희는 정국진에게 꼬리를 잡히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그리고 해외로 도망갔는데 여태 연락이 닿지 않는 공범도 떠올랐다. 아직 미납금도 있는데 연락을 끊은 것을 보면 추적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지금 강서희가 두려운 것은 이유영이 그를 찾아내서 모든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었다.그녀는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진영숙을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다가가서 진영숙의 손을 잡았다.“엄마.”하지만 날이 선 진영숙의 시선은 쉽사리 좋아지지 않았다.“내가 잘못했어! 내가 잠깐 미쳤나 봐!”“왜지? 왜 그랬어?”진영숙이 날이 선 말투로 물었다.“엄마….”갑작스러운 질문에 강서
“아줌마, 그만 얘기해. 다 내 잘못이야!”강서희는 왕숙을 말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 모습을 보면 순한 양이 따로 없었다.하지만 진영숙은 쉽게 속지 않았다.그녀는 더 이상 강서희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 말투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진영숙은 원래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마음에 의심의 불꽃이 심어졌으니 그것을 전부 소멸시키기에는 부족했다.“아줌마는 나가 있어!”싸늘한 목소리에서 위엄이 묻어났다.왕숙은 뭐라도 더 말하고 싶었지만 기세등등한 진영숙의 모습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결국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강서희를 한번 쳐다보고는 마지못해 밖으로 나갔다.거실에 둘만 남게 되자 강서희는 잘못을 한 어린아이처럼 진영숙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매번 이런 얼굴을 할 때면 진영숙은 마음이 약해져 체벌을 멈추었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진영숙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강서희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엄마!”드디어 진영숙이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서희야, 솔직히 말해봐. 너 네 오빠를 어떻게 생각하니?”“뭐?”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강서희가 당황했다.이미 어젯밤 조사실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정신력을 다 소모했기에 지금은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있는 상태였다.“묻잖니.”강서희가 답이 없자 진영숙의 눈빛이 더 날카로워졌다.양녀를 아끼는 건 변함이 없지만 그 사랑에도 선이라는 게 있었다. 어릴 때 집으로 데려왔을 때부터 모든 사랑을 주며 키웠건만 그건 강서희를 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강서희에게 맞선 자리를 추천할 때도 여느 엄마들처럼 딸을 위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골랐다.세강을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진심으로 강서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서희를 며느리로 받아들인다는 얘기는 아니었다.예전에 왕숙이 비슷한 얘기를 꺼낸 적 있을 때도 버럭 화를 냈던 진영숙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한 결과, 진영숙은 딸의 마음을 어쩌면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본 적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오빠는 좋은 사람
고개를 끄덕이는 그 모습을 보며 진영숙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 그녀는 서늘한 얼굴로 강서희의 손을 쳐냈다.“엄마?”강서희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진영숙을 바라보았다.진영숙은 날이 선 눈으로 강서희를 노려보며 질책했다.“내가 정말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그렇지 않니?”“엄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강서희는 당황한 얼굴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평생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 주던 엄마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속이 타들어갔다.예전에는 아무리 잘못을 해도 이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본 적이 없던 엄마였다.그런 엄마가 예전에 혐오스럽다는 듯이 이유영을 노려보던 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왜 이렇게 된 거지?“엄마!”짝!엄마 소리를 듣자마자 진영숙은 손을 번쩍 들어 강서희의 귀뺨을 때렸다.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이쪽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왕숙이 달려나왔다.“사모님, 갑자기 왜 이러세요?”강서희가 맞는 것을 보고 왕숙은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라했다.“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돌아온 아가씨예요. 이러시면 안 돼요, 사모님!”“은혜도 모르는 년!”진영숙은 욕설을 퍼부으며 당장이라도 강서희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았다.이미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고 충격으로 이성은 사라진지 오래였다.애지중지 키운 양녀가 자신의 소중한 아들에게 그런 생각을 품었다는 것을 진영숙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어쩌면 예전에 자신마저 강서희에게 속아서 놀아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더 분노가 치밀었다.“사모님, 잘 보세요. 사모님이 가장 아끼던 서희 아가씨잖아요. 작은 사모님이 아니라!”왕숙은 진영숙이 미쳐서 사람을 잘못 알아본다고 생각했다.예전에는 누구보다 강서희의 말을 들어주고 아껴주었던 진영숙이었다.진영숙의 악한 모습은 거의 이유영을 마주할 때만 드러났다.진영숙은 왕숙의 손길을 뿌리치고 강서희를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이한이는 네 오빠야!”“내가 널 딸로 거둔 건 너한테 그런 파렴치한 생각을 품으라고 거둔 게 아니란 말이다!
“천천히 설명해 봐요.”이유영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지현우는 다가와서 굳은 표정으로 서류 뭉치를 그녀에게 건넸다.이유영은 보자마자 가슴이 철렁했다. 굳이 서류를 확인하지 않고 지현우의 표정만 봐도 뭔가 잘못 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서류를 확인한 그녀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원자재 교체 증명에 그녀의 친필 사인이 버젓이 있었다.“이게 무슨….”“지난 번에 원자재 문제로 의심 받았던 제품들 생산 일자를 확인해 봤는데 대표님이 사인하고 일주일 후에 생산된 제품들입니다.”이유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녀는 반복해서 서류를 확인했지만 그녀의 친필 사인이 맞았다. ‘내가 이런 서류에 사인했다고?’그녀는 고개를 들고 지현우를 보며 말했다.“난 이런 서류에 사인한 적 없어요!”이유영은 등골이 오싹했다.전혀 기억에 없는 서류였다.“대표님 글씨가 맞나요?”지현우가 정색하며 물었다.글씨체는 이유영의 것이 분명했으나 그녀는 이런 서류에 사인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교체된 원자재의 가격 차이를 확인해 보면 천문학적인 숫자였다.그것도 시중에서 판매되는 중에 가장 싸고 품질이 안 좋은 자재들만 모아놓은 서류였다.사인도 문제지만 그녀는 전혀 본 적도 없는 자재들이었다.“공장 쪽에서도 대표님께서 왜 이런 서류에 사인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답변이 왔습니다. 하지만 제품 자체는 우리 공장에서 생산해서 나간 것이 맞습니다.”“그래서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죠?”“회사는 어쩌면 생각보다 더 큰 위기를 맞게 될지도 모릅니다.”지현우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크리스탈 가든의 액세서리는 전부 한정판 제품이었다.생산 수량이 제한되어 있고 세트마다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브랜드의 제품에 단가가 5천원 도 안되는 자재가 섞인 것이다.중요한 건 이유영의 친필로 사인한 거라 조사가 내려온다면 이유영은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이 서류 내가 사인한 게 아닌 건 확실해요. 어떻게 된 건지 다시 알아봐 주세요.”이유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비록 강이한이 얼마나 비열한 인간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사람을 절박하게 할 줄은 몰랐다.그가 적을 상대할 때 얼마나 잔인한 수법을 썼는지 옆에서 지켜봤지만 그 수단을 자신에게 쓸 줄이야!아마 외삼촌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그녀는 경찰서에 잡혀갔을지도 모른다.이유영은 결국 강이한의 미친 정도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세강그룹.남자는 창가에 서서 먼산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그의 주변으로 서늘한 공기가 무겁게 맴돌고 있었다.핸드폰으로 문자를 확인한 조형욱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대표님. 한지음 씨가 다친 것 같습니다.”“어떻게 된 거지?”그의 목소리에서 긴장감이 묻어났다.그는 어린 한지음이 당한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렸다.오빠인 한지석은 자신을 위하다가 죽었는데 동생인 그녀는 결국 그와 이유영의 사랑 싸움에서 희생양이 되어버린 것이다.강이한은 조형욱을 시켜 최근 한지음에게 접근했던 사람들을 알아보게 했다.이유영과 한지음 사이에는 딱히 밀접한 접촉이 없었다. 다만 이유영의 계좌에서 빠져나간 돈을 받은 사람이 한지음을 찾아가서 협박했을 뿐이었다.온화하고 순종적인 줄로만 알았던 여자가 이렇게 악랄한 사람이었을 줄이야!“앞이 보이지 않아서 욕실에서 나올 때 미끄러졌는데 머리를 세면대에 박아서 피를 많이 흘렸다고 합니다.”“그렇게 심각해?”“네.”뒤돌아선 강이한은 결국 외투를 챙기고 밖으로 나갔고 조형욱이 그의 뒤를 따랐다.강이한의 본가.이유영이 생각했던 대로 교활한 강서희는 결국 그 세치혀로 강이한을 오빠로만 생각한다고 우겼다.그녀는 더럽고 추악한 여자들이 오빠에게 접근하는 게 싫어서 혼내줬을 뿐인데 그런 오해를 받을 줄은 모른다고 말했다.그렇게 겨우 진영숙의 화를 달랠 수 있었다.“사모님, 아가씨는 그런 사람 아니라고 제가 말했잖아요.”왕숙도 옆에서 거들었다.진영숙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강서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결국 표정을 누그러뜨렸다.“서희야.”“응, 엄마.”“넌 내 딸이고 가지지 말아야 할 욕
밖에서 온갖 소문이 돌고 있었지만 진영숙은 여전히 이유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배후에 버티고 있는 로열 글로벌 때문이었다.로열 글로벌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기업이었고 모든 사람들이 경외하는 존재였다.이유영은 곧 그런 로열 글로벌의 후계자로 당당히 서게 될 텐데 밖에서 떠도는 소문은 전혀 상관없었다.어차피 소문은 소문일 뿐, 결국 지나가게 되어 있다.“알겠어, 엄마.”강서희는 속으로 이유영에게 저주를 퍼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표정으로는 그 어떤 불만도 찾아볼 수 없었다.“다시는 그러면 안 돼!”진영숙은 전에도 경고를 무시한 강서희의 행위를 생각하며 강경하게 말했다.강서희는 서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다니까.”그렇게 한참을 잔소리를 늘어놓은 진영숙은 그제야 강서희를 올라가서 쉬게 했다.방 문을 닫은 순간, 강서희의 두 눈이 음침하게 빛났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이유영을 찢어버리고 싶었다.진영숙은 왕숙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아줌마가 잘 지켜봐. 서희가 이유영한테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게!”“걱정 마세요, 사모님. 아가씨가 그래도 제 말은 들으니까요.”왕숙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드디어 무사히 넘겼다는 생각에 왕숙도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진영숙은 눈을 질끈 감고 생각에 잠겼다. 비록 끝까지 캐묻지는 않았지만 강서희가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기분이 착잡했다.강서희는 강이한을 위해서 몰래 했다고 했지만 진영숙은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게다가 강서희는 여태 제대로 된 연애 한번 해본 적 없었다.그녀는 그 어떤 사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고 가장 가까운 유일한 사내가 강이한이었다.한편, 강이한은 강주로 향했다.강서희와 진영숙도 소식을 들었다.한지음의 생활을 책임진 사람이 진영숙과 강서희였기에 강이한이 그쪽으로 이동했다는 소식은 재빨리 그들의 귀에 전해졌다.강주에 간 강이한은 한지음을 시켜 짐을 싸게 했다고 했다.대체 뭘 하려는 걸까?진영숙은 소식을 듣자마자 강이한에게 전화
강이한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그 여자는 널 여동생으로 인정하지도 않는데 언니는 무슨.”말투에서는 이유영을 향한 혐오와 실망이 가득 묻어났다.그는 이미 속으로 이유영을 극도로 배척하고 있었다.한지음은 잔뜩 날이 선 그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얼굴은 여전히 상처 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아무리 그래도 피를 나눈 자매잖아요.”그녀가 애써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강이한의 앞에서 한지음은 항상 이유영의 편을 드는 척했다.이유영이 전화를 걸어 네 엄마가 남의 가정을 망친 상간녀라고 했을 때도 한지음은 이유영의 편에서 서 말했다.나중에 한지음이 매체에 공개적으로 한지음은 자신의 동생이 아니라고 까발렸을 때도 그랬다.강이한은 한사코 언니라고 감싸는 한지음을 보며 안쓰러움을 느꼈다.“그 얘기는 그만하자. 내 말 들어.”강이한이 말했다.한지음이 더 뭐라고 하려는데 강이한의 핸드폰이 울렸다.발신자를 확인하니 진영숙이었다. 강이한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서희 집에 갔죠?”진영숙이 다짜고짜 물었다.“너 강주니?”짜증과 실망이 가득 담긴 말투였다.“네.”“한지음을 데리고 청하로 온다고?”청하와 강주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차로 고작 한 시간 거리에 있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진영숙은 한지음이 청하로 돌아오는 게 달갑지 않았다.옆 도시에 있으면 그래도 거리가 있어서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지만 같은 도시는 아니었다.“그렇게 됐어요.”엄마의 질문에 대해 강이한은 해명할 마음이 없었다.그의 일처리 방식은 항상 그랬다.“걔를 데리고 어디로 가려고 그러니? 본가에 데려오려고?”진영숙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한지음을 지금 본가로 데려오면 사람들이 또 뭐라고 할까?이유영이 그들에게서 완전히 돌아선 상황에 한지음까지 끼어들면 아마 다시는 되돌릴 수 없게 될 것이다.“홍문동으로 갈 겁니다.”강이한이 단호하게 말했다.안 그래도 화가 나 있던 진영숙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잠시 시간이 흐른
한지음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말 들을게요.”그 미소를 보고 나서야 강이한의 입가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조형욱은 이곳을 책임진 간병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간 있었던 일을 강이한에게 보고했다.강이한도 강서희와 한지음이 다녀간 이야기를 듣고 표정을 굳혔다.그는 완전히 엄마에게 실망했다. 한지석의 동생이기에 잘 대해주기를 바랐건만, 이런 대우를 할 줄이야!한편, 조민정은 크리스탈 가든으로 이이유영을 찾아갔다.동교 공사 현장 사고에 대한 조사 자료였다. 그리고 설계도안에서 제시한 사이즈 수치에 문제가 생겨서 건물이 무너졌다는 결론이 나왔다.“아니 처음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가….”이유영은 결국 말을 잇지 못했다.아마 이번 사고도 강이한의 작품일 것이다.그녀가 설계도안 수치를 열심히 계산하고 있을 때, 그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설계도안이 바뀌었어요.”조민정은 가짜 설계도면을 이유영의 앞에 내밀었다.외관 디자인은 이유영이 설계한 것과 똑같았지만 내부 수치가 미묘하게 달랐다.건축 디자인을 해본 사람이라면 사이즈 수치가 이상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이유영은 설계도면을 빤히 노려보며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민정 씨, 대신 해줘야 할 일이 있어요.”“뭔데요?”“강서희요.”이유영은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침착하자, 이유영! 침착해야 해!’강서희가 풀려났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찾아와서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 시비를 걸어올 것이다.이유영은 더 이상 그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표정에서 뭔가를 알아챈 조민정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그건 제가 처리할게요.”“나가 보세요.”조민정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이유영을 바라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현재 이유영이 처한 상황은 최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액세서리의 원자재가 바뀌었고 그걸 이유영이 결재했다는 서류 하나만으로 이유영의 현재 입지를 무너뜨리기엔 충분했다. 회사
송연미는 소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버지께서 아직 현우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지 않으셨어.”그 말을 하면서 송연미의 목소리에는 묵직한 느낌이 담겨 있었다. 소은지는 그 무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소은지가 송연미를 바라보는 눈빛은 침묵 속에서 날카로움을 띠고 있었다.“네가 아직 여기 있기 때문이야.”송연미의 말은 직설적이었고 어느 정도 압박감이 배어 있었다.소은지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송연미는 오늘 밤 소은지가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소은지는 품에서 잠든 고양이를 조용히 쓰다듬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송연미가 그 고양이를 보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왜냐하면, 송연미도 고양이를 좋아했기 때문이다.아마 현우는 그것을 잊었을 것이다. 송연미와 현우의 사이가 좋았을 때, 송연미는 현우에게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좋아, 예쁜 고양이 한 마리 찾아 줄게.”그의 말은 여전히 소은지의 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그때 그들은 정말 행복했다. 그 누구도 그때가 마지막 평화로운 순간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 후, 그들은 각자의 길을 갔고 서로 다른 인생의 궤도로 나아갔다.송연미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가 기다린 것은 현우가 약속한 예쁜 고양이가 아니라 아버지가 그녀를 엔데스 운빈에게 시집보내려는 계획이었다.송연미는 강하게 반항했다. 미친 듯이 도망치려 했지만 결국 가문 내의 압박과 협박에 못 이겨 결국 무너지게 되었다.송연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하루를 겪었다.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모든 것이 단번에 깨져버렸고 그녀는 고통과 분노 속에서 절망했다.그래서 그녀는 그 사건에 연루된 모든 사람을 미워하게 된 것이다.“너랑 엔데스 운빈의 관계 때문에 네 아버지가...”소은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송연미를 바라보았다.도대체 이 가문은 어떤 집안인 걸까?소은지가 말을 끝내지 않았지만 송연미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는
하지만 소은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그녀는 어딘가 고독한 기운이 스며드는 걸 느끼며, 자신이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넌 어떻게 생각해? 나와 현우 씨, 나름 함께 고난을 겪어온 사이 아닌가?”소은지는 송연미에게 시선을 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소은지의 말에 송연미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송연미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고 눈 속에는 질투의 불씨가 번뜩였다.하지만 송연미는 엔데스 가문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인 만큼 그런 감정들은 금세 억누를 수 있었다.“엔데스 가문이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어.”중대하다?소은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현우가 자신을 이렇게 급하게 파리에서 떠나게 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다섯째 도련님이 큰형수를 데려갔어.”“...”그 말을 듣고 소은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송연미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송연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렴풋이 알았지만 사태가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에 여전히 충격을 받았다.“소은지, 너 모르지?”“뭘 말하는 거야?”“예전에 회장님 세대 때, 집안 권력을 둘러싼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소은지는 조용히 송연미의 말을 들었다.송연미가 소은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송연미 말대로 소은지는 그들의 권력 다툼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아버지가 그러셨어. 그 당시 엔데스 회장님은 정말 무서운 분이었다고. 지금의 여섯째 도련님보다 훨씬 더 무서웠대.”“...”그 말을 들은 소은지는 온몸이 얼어붙은 듯 굳어졌다.소은지는 가족 모임 때 한 번 마주쳤던 차가운 눈빛의 백발 회장님을 떠올렸다.단 한 번의 시선으로도 그녀를 얼어붙게 할 만큼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분이었다.엔데스 명우조차 이미 충분히 무서운 존재였는데, 회장님은 그보다 더했다니. 엔데스 가문이란 현우가 말한 것처럼, 정말로 끝없는 심연이었다.“다섯째 도련님이 큰형수를 데리고 간 이유는 미도로 여행을 간다고 했지만 사실은 큰형이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기 때문이야.”단서 하나로
한때 청하시에 머물던 시절.소은지는 너무 많은 것을 보아온 탓에 결혼이라는 단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본 적이 없었다.남자를 광적으로 사랑한다는 것 역시 그녀에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불같이 뜨거운 사랑이 결국 아픔으로 끝난다면, 그런 사랑은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특히 현우의 내면을 어느 정도 들여다본 지금, 그녀의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하지만 여자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감정 문제에 있어서는 순진하다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과거에 소은지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비웃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그래, 여자가 순진할 수도 있지. 그렇지만 마지막에 우는 건 그 여자가 아닐 수도 있어.”소은지의 말은 냉소적이었고 태도는 언제나 가벼워 보였다. 마음을 주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소은지는 여자가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아야 더 행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왜 굳이 목숨까지 걸어야 할지 모를 그런 감정에 휘말려야 할까?사랑은 진심을 다한 사람이 결국 패배자가 되는 잔인한 게임 같았다.소은지는 너무 많은 상처받은 여자들을 보아왔다.그리고, 너무나 많은 상처받은 남자들도 보아왔다.하지만 그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스스로 감정을 억누르려 애썼던 소은지는, 현우를 마주하는 순간 이미 마음이 깊이 흔들리고 있었다.“얼마나 걸릴까요?”소은지는 현우를 바라보며 물었다.우천시로 떠나는 것에 관한 질문이었다.현우가 소은지를 우천시로 보내려 한다는 건, 현재 파리의 상황이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걸 암시하는 것이었다.시간은 얼마나 필요한 걸까?“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한 달 정도 걸릴 거예요.”한 달이라는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소은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엔데스 가문이 정말로 벼랑 끝에 다다른 걸까?소은지는 깊은숨을 내쉬며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답답함을 억눌렀다.“네.”짧은 한마디.그러나 그 짧은 대답 안에 담긴 복잡한 감정은 오직 소은지만이 느낄 수 있었다....소은지에게 우
엔데스 명우는 설선비와 설유나의 일에 대해 스스로 깊은 죄책감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 죄책감을 보상이라는 형태로 주변 몇몇 사람들에게 쏟아부었다.하지만 복수를 결코 잊지 않는 성격답게, 이 모든 보상 또한 결국 갚으려는 계산일지도 모른다.“제가 알아서 할게요.”소은지가 현우에게 차분히 말했다.그 말을 듣고 현우는 그녀를 감싸던 팔이 잠시 멈췄다. 한참을 생각하던 현우는 말했다.“제가 바래다줄게요.”“...”바래다준다니? 어디로?“일곱째 도련님?”“이유영은 지금 우천시에 머물고 있어요. 은지 씨도 잠시 그쪽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소은지는 현우의 품에서 벗어나 그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았다.“상황이 그렇게까지 심각한 거예요?”“전기봉을 강이한이 찾아냈어요.”“...”전기봉. 이 중요한 인물을 찾는 일은 지금까지 그들에게 최우선 과제였다.전기봉이 나타나면 모든 일이 해결될 단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그를 찾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모두에게 고통 그 자체였다.이제는...소은지는 깊은숨을 내쉬었다.“찾아냈다고요?”“네.”이제 엔데스 가문의 운명은 앞으로의 며칠간 모든 것이 결정될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소은지는 현우의 표정을 보며 더욱 불안해졌다.“하지만 전...”“지금 우천시에는 박연준이 있어요. 은지 씨도 그쪽에 있으면 더 안전할 거예요.”지금의 파리는 너무 위험했다.어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그런 위험은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벅찼다. 청하시에 있던 시절, 평화롭게 지내던 소은지의 삶에 갑작스럽게 파리의 사건들이 찾아왔던 것처럼, 그 충격은 소은지가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만약 우천시에 있었다면, 소은지는 지금처럼 위태롭지는 않았을 것이다.지금 파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란 속에서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그리고 그 분노는 누구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하지만 저는...”소은지는
기다리는 매 순간이 고통스러웠다. 강이한, 박연준, 그리고 이유영. 세 사람의 얽힌 관계는 이제 누구도 명확히 정의할 수 없었다.한편, 파리에서는 엔데스 가문이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었다.강이한은 서주로 돌아갔고 그와 관련된 문서는 점점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엔데스 명우와 엔데스 현우도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했다.반산월.남자의 손에서 피어오르는 시가 연기가 희미하게 실내를 감싸고 있었다. 소은지는 품에 작은 고양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섰고 그 순간 현우의 묵직한 눈빛이 그녀를 스쳤다.현우는 소은지를 보자 순간적으로 표정을 가다듬었다.“이 녀석을 꽤 잘 돌본 모양이에요. 아주 잘 자랐네요.”길에서 처음 이 고양이를 주웠을 때는 겨우 갓난 새끼 고양이였다.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작은 생명체였는데 지금은 소은지의 품에서 부드럽고 윤기 나는 털로 감싸인 작은 생명체로 자라 있었다. 여전히 조그마했지만 이제는 생명의 따뜻함과 안정을 느낄 수 있었다.소은지는 작은 고양이를 품에 안은 채 현우의 옆에 앉았다.“작은 동물들은 금세 자라잖아요.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죠.”아이는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이 필요했다.반면, 동물들은 마음만 쓰면 빠르게 자라는 모습을 보여줬다.“...”소은지가 아이를 언급하자, 현우는 마음 한구석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아이 좋아해요?”현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소은지는 잠시 멈칫했다.아이를 좋아하냐고?“좋아한다, 싫어한다로 설명할 수 없어요.”“왜요?”“아마도...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봐요.”소은지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아이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일까? 존중과 보살핌이 있어야 하는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였다.그러나 소은지가 지금까지 보아온 아이들은 대부분 그보다 더 복잡했다.청하시에서 일하며 소은지는 직업 특성상 아이들과 얽힌 상황을 자주 마주해야 했다.처음엔 서로 사랑하던 부부가 결국 이혼을 앞두고는 지독히 싸우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우리, 결혼하자.”이유영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연준이 갑자기 말했다.“...”공기가 그 순간 얼어붙은 듯 정적이 흘렀다.이 남자, 미쳤나 봐.이유영은 박연준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볼 수는 없었지만 텅 빈 두 눈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압박감을 주었다.박연준은 그런 이유영의 눈빛에 묘한 불안함을 느꼈다.이유영은 차갑게 박연준이 있는 방향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침묵 속에서 전해지는 무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유영아.”“서주...”서주?“네가 원하는 건 결국 우리 아버지의 지원이야?”지원? 자신이 지금까지 보여온 확신마저 이유영에게는 이익을 위한 계산으로 보인단 말인가?“괜찮아. 세상 모든 일은 사실 네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는 걸 알려줄게.”“흥!”박연준의 다짐이 이유영에게는 터무니없게만 들렸다.“내가 기회를 줄 것 같아?”이유영은 단호했다.박연준이 자신을 이용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싫었다. 그런데 이제 가족까지 이용하려 하다니. 박연준은 정말로 터무니없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박연준, 그런 기회를 줄 생각은 추호도 없어.”이유영은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날카롭게 내뱉었다.이유영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같은 말을 했었고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없었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깊은 증오가 서려 있었다.이유영의 마음속에 쌓인 분노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었다.만약 지금 이유영이 시력을 잃지 않았다면 분명 서주로 돌아가 강이한과 박연준을 혼란의 중심으로 몰아넣었을 것이다.박연준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그날, 서재에서 박연준이 강이한에게 물었다.“이유영이 시력을 되찾으면, 서주를 가장 먼저 공격할 거야.”이유영은 신씨 가문을 알고 있었다.이유영과 신씨 가문이 어떤 관계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신지수가 이유영 편에 선다는 건 그 둘 사이가 단순하지 않다는 걸 보여줬다.그런데 서주 자체가 워낙 복잡하니
박연준의 해명은 이유영에게 공허하고 무력하게 들렸다.오늘의 박연준은 이유영을 더욱 놀라게 했다. 박연준이... 강이한을 두둔하다니.결국 한 여자를 사랑했던 두 사람이었으니, 원수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뜻인가?이유영은 이 상황이 비참하면서도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유영아, 넌 이렇게까지 힘들어하지 않아도 돼.”이유영의 모습을 바라보며 박연준은 내심 괴로워하고 있었다.“그만하라고!”이유영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연서는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금기와도 같은 이름이었다. 연서의 존재는 강이한과 박연준이 이유영에게 수년 동안 안긴 모욕과 같았다.연서의 이름이 떠오를 때마다 이유영은 자신이 강이한과 박연준의 세계에서 어떤 존재였는지를 절감했다.이유영은 외부에서 보이는 것처럼 특별한 사람도 아니었고 스스로 믿고 싶었던 그런 존재도 아니었다.이유영의 존재는 결국 그들의 세계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착각에 불과했다.그것이 바로 이유영이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 속에서 차지했던 자리였다. 가소롭고 비참하기 그지없는 자리.“유영아, 나는 변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야. 하지만 이번만큼은 내 진심을 알아줬으면 좋겠어.”“또 무슨 꿍꿍이인지 어떻게 알아?”이유영의 목소리는 억누른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박연준의 몸은 이유영의 차가운 말 한마디에 순간 굳어버렸다.그 말은 이유영이 박연준을 어떤 사람으로 보는지 명확히 보여줬다. 언제 어디서든 사람을 조종하고 계산하는 그런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분위기가 더욱 얼어붙었고 우지와 우현은 한 발짝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현재 식당의 분위기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웠다....시간은 계속 흘러갔다.이유영은 매일 약을 먹고 하루 세 끼를 빠짐없이 챙겼다. 그러나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었다. 강이한이 곁에 있었을 때, 이유영은 강이한이 내민 사탕을 자연스럽게 입에 넣었었다.하지만 지금은?박연준이 사탕을 내밀어도 이유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강이한에게 차가웠던 만큼 박연준에게도
이유영은 사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꼭 이래야만 하는 걸까?“나는 나를 벌주는 게 아니야. 그냥... 정말로 익숙해진 거야.”고통도 결국 어떤 이에게는 습관이 될 수 있었다.“...”이유영의 눈빛은 점점 더 깊어졌다.“서주 쪽 상황은 지금 어때?”“강이한은 돌아갔어.”박연준의 대답이었다.강이한이 돌아간 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박연준이 서주 이야기를 꺼내는 동안 이유영의 눈빛은 더 어두워져만 갔다.이유영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연준이 먼저 말했다.“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미워?”그 사람, 강이한을 말하는 것이었다.“...”강이한이 정말 미웠다. 그러나 미움에도 강약이 있는 법, 이유영은 극단적인 두 가지 감정을 모두 겪어야 했다.“미워.”“그가 죽기를 바랄 정도로?”박연준은 멈추지 않고 물었다.“...”이유영은 다시 침묵했다.강이한이 죽기를 바랄 정도인가? 그렇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망설임 없이 모든 걸 내어줄 수 있듯, 누군가를 진심으로 미워할 때도 그 감정은 이렇게까지 깊어질 수 있었다.그것이 이유영의 강이한에 대한 미움이었다.“뭐가 문제야?”이유영의 말투는 차가워졌다. 이 주제를 더 이상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강이한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유영에게 너무 무거웠다.“너도 나를 그렇게 미워해?”박연준이 시험 삼아 물었고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그럼 너에게 어떤 감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강이한과 박연준에게 그녀가 품을 수 있는 감정은 미움뿐이었다.많은 고통과 고난을 겪은 후에도 그들의 모든 것을 용서할 만큼 이유영은 그렇게 착하지 않았다.박연준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따뜻한 손바닥으로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하지만 이유영은 바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그 태도는 냉정했고 그녀의 감정은 고스란히 드러났다.박연준은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눈에 상처가 어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속 답답함을 억누르듯 말했다.“네가
강이한이 정국진에게 말했다.염 선생의 조언에 따라 내린 결정이었고 이유영을 평생 어둠 속에 두지 않겠다고 말했다.최대한 빨리 모든 것을 처리해 이유영의 시력을 회복시키겠다고도 덧붙였다.“자신을 벌하고 있는 거예요.”한참을 침묵하던 정국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임소미는 그 말을 듣자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정말 자신을 벌하고 있는 걸까?그렇다.정국진의 말이 맞았다. 강이한은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벌하고 있었다.그것은 아마도 과거의 잘못에 대해 속죄하려는 그의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죄는 너무도 무거웠다. 과연 이런 방식으로 속죄가 가능할까?...강이한은 떠났다.잠시 후 월이가 임소미의 목을 끌어안고 재잘거리며 들어왔다.“할머니, 아까 모르는 사람이 준 거 안 먹었어요.”“정말 잘했구나.”월이의 말을 들은 임소미의 마음은 더없이 씁쓸했다. 이 모든 것이 강이한이 자초한 일이었고 그의 업보였다. 누구도 그에게 가혹하다고 비난할 수 없었다. 그는... 조금도 불쌍하지 않았다.하지만 정말 그럴까?임소미는 이유영이 평생 월이를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려왔다.그리고 강이한이 오늘 월이를 마지막으로 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임소미의 가슴은 더욱 무거워졌다.“할머니, 엄마는 언제 돌아와요?”월이는 정말 이유영이 보고 싶었다. 어머니에 대한 아이의 의존은 본능적이었다.“곧 돌아올 거야.”“할머니, 제 아빠는 누구예요?”“...”임소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미 불편했던 호흡은 월이의 질문을 듣고 더욱 답답해졌다.월이의 아빠는...“월이, 아빠가 보고 싶니?”임소미는 감정을 억누르며 물었다.아빠가 보고 싶냐는 질문에 월이는 고개를 기울였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왜?”“아빠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사랑하지 않는다고?월이가 기억하는 한, 월이의 세상에는 아빠가 존재한 적이 없었다. 항상 엄마인 이유영 혼자뿐이었다.아이는 단순했고 이유영의 외로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