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설명해 봐요.”이유영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지현우는 다가와서 굳은 표정으로 서류 뭉치를 그녀에게 건넸다.이유영은 보자마자 가슴이 철렁했다. 굳이 서류를 확인하지 않고 지현우의 표정만 봐도 뭔가 잘못 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서류를 확인한 그녀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원자재 교체 증명에 그녀의 친필 사인이 버젓이 있었다.“이게 무슨….”“지난 번에 원자재 문제로 의심 받았던 제품들 생산 일자를 확인해 봤는데 대표님이 사인하고 일주일 후에 생산된 제품들입니다.”이유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녀는 반복해서 서류를 확인했지만 그녀의 친필 사인이 맞았다. ‘내가 이런 서류에 사인했다고?’그녀는 고개를 들고 지현우를 보며 말했다.“난 이런 서류에 사인한 적 없어요!”이유영은 등골이 오싹했다.전혀 기억에 없는 서류였다.“대표님 글씨가 맞나요?”지현우가 정색하며 물었다.글씨체는 이유영의 것이 분명했으나 그녀는 이런 서류에 사인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교체된 원자재의 가격 차이를 확인해 보면 천문학적인 숫자였다.그것도 시중에서 판매되는 중에 가장 싸고 품질이 안 좋은 자재들만 모아놓은 서류였다.사인도 문제지만 그녀는 전혀 본 적도 없는 자재들이었다.“공장 쪽에서도 대표님께서 왜 이런 서류에 사인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답변이 왔습니다. 하지만 제품 자체는 우리 공장에서 생산해서 나간 것이 맞습니다.”“그래서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죠?”“회사는 어쩌면 생각보다 더 큰 위기를 맞게 될지도 모릅니다.”지현우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크리스탈 가든의 액세서리는 전부 한정판 제품이었다.생산 수량이 제한되어 있고 세트마다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브랜드의 제품에 단가가 5천원 도 안되는 자재가 섞인 것이다.중요한 건 이유영의 친필로 사인한 거라 조사가 내려온다면 이유영은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이 서류 내가 사인한 게 아닌 건 확실해요. 어떻게 된 건지 다시 알아봐 주세요.”이유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비록 강이한이 얼마나 비열한 인간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사람을 절박하게 할 줄은 몰랐다.그가 적을 상대할 때 얼마나 잔인한 수법을 썼는지 옆에서 지켜봤지만 그 수단을 자신에게 쓸 줄이야!아마 외삼촌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그녀는 경찰서에 잡혀갔을지도 모른다.이유영은 결국 강이한의 미친 정도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세강그룹.남자는 창가에 서서 먼산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그의 주변으로 서늘한 공기가 무겁게 맴돌고 있었다.핸드폰으로 문자를 확인한 조형욱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대표님. 한지음 씨가 다친 것 같습니다.”“어떻게 된 거지?”그의 목소리에서 긴장감이 묻어났다.그는 어린 한지음이 당한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렸다.오빠인 한지석은 자신을 위하다가 죽었는데 동생인 그녀는 결국 그와 이유영의 사랑 싸움에서 희생양이 되어버린 것이다.강이한은 조형욱을 시켜 최근 한지음에게 접근했던 사람들을 알아보게 했다.이유영과 한지음 사이에는 딱히 밀접한 접촉이 없었다. 다만 이유영의 계좌에서 빠져나간 돈을 받은 사람이 한지음을 찾아가서 협박했을 뿐이었다.온화하고 순종적인 줄로만 알았던 여자가 이렇게 악랄한 사람이었을 줄이야!“앞이 보이지 않아서 욕실에서 나올 때 미끄러졌는데 머리를 세면대에 박아서 피를 많이 흘렸다고 합니다.”“그렇게 심각해?”“네.”뒤돌아선 강이한은 결국 외투를 챙기고 밖으로 나갔고 조형욱이 그의 뒤를 따랐다.강이한의 본가.이유영이 생각했던 대로 교활한 강서희는 결국 그 세치혀로 강이한을 오빠로만 생각한다고 우겼다.그녀는 더럽고 추악한 여자들이 오빠에게 접근하는 게 싫어서 혼내줬을 뿐인데 그런 오해를 받을 줄은 모른다고 말했다.그렇게 겨우 진영숙의 화를 달랠 수 있었다.“사모님, 아가씨는 그런 사람 아니라고 제가 말했잖아요.”왕숙도 옆에서 거들었다.진영숙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강서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결국 표정을 누그러뜨렸다.“서희야.”“응, 엄마.”“넌 내 딸이고 가지지 말아야 할 욕
밖에서 온갖 소문이 돌고 있었지만 진영숙은 여전히 이유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배후에 버티고 있는 로열 글로벌 때문이었다.로열 글로벌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기업이었고 모든 사람들이 경외하는 존재였다.이유영은 곧 그런 로열 글로벌의 후계자로 당당히 서게 될 텐데 밖에서 떠도는 소문은 전혀 상관없었다.어차피 소문은 소문일 뿐, 결국 지나가게 되어 있다.“알겠어, 엄마.”강서희는 속으로 이유영에게 저주를 퍼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표정으로는 그 어떤 불만도 찾아볼 수 없었다.“다시는 그러면 안 돼!”진영숙은 전에도 경고를 무시한 강서희의 행위를 생각하며 강경하게 말했다.강서희는 서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다니까.”그렇게 한참을 잔소리를 늘어놓은 진영숙은 그제야 강서희를 올라가서 쉬게 했다.방 문을 닫은 순간, 강서희의 두 눈이 음침하게 빛났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이유영을 찢어버리고 싶었다.진영숙은 왕숙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아줌마가 잘 지켜봐. 서희가 이유영한테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게!”“걱정 마세요, 사모님. 아가씨가 그래도 제 말은 들으니까요.”왕숙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드디어 무사히 넘겼다는 생각에 왕숙도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진영숙은 눈을 질끈 감고 생각에 잠겼다. 비록 끝까지 캐묻지는 않았지만 강서희가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기분이 착잡했다.강서희는 강이한을 위해서 몰래 했다고 했지만 진영숙은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게다가 강서희는 여태 제대로 된 연애 한번 해본 적 없었다.그녀는 그 어떤 사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고 가장 가까운 유일한 사내가 강이한이었다.한편, 강이한은 강주로 향했다.강서희와 진영숙도 소식을 들었다.한지음의 생활을 책임진 사람이 진영숙과 강서희였기에 강이한이 그쪽으로 이동했다는 소식은 재빨리 그들의 귀에 전해졌다.강주에 간 강이한은 한지음을 시켜 짐을 싸게 했다고 했다.대체 뭘 하려는 걸까?진영숙은 소식을 듣자마자 강이한에게 전화
강이한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그 여자는 널 여동생으로 인정하지도 않는데 언니는 무슨.”말투에서는 이유영을 향한 혐오와 실망이 가득 묻어났다.그는 이미 속으로 이유영을 극도로 배척하고 있었다.한지음은 잔뜩 날이 선 그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얼굴은 여전히 상처 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아무리 그래도 피를 나눈 자매잖아요.”그녀가 애써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강이한의 앞에서 한지음은 항상 이유영의 편을 드는 척했다.이유영이 전화를 걸어 네 엄마가 남의 가정을 망친 상간녀라고 했을 때도 한지음은 이유영의 편에서 서 말했다.나중에 한지음이 매체에 공개적으로 한지음은 자신의 동생이 아니라고 까발렸을 때도 그랬다.강이한은 한사코 언니라고 감싸는 한지음을 보며 안쓰러움을 느꼈다.“그 얘기는 그만하자. 내 말 들어.”강이한이 말했다.한지음이 더 뭐라고 하려는데 강이한의 핸드폰이 울렸다.발신자를 확인하니 진영숙이었다. 강이한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서희 집에 갔죠?”진영숙이 다짜고짜 물었다.“너 강주니?”짜증과 실망이 가득 담긴 말투였다.“네.”“한지음을 데리고 청하로 온다고?”청하와 강주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차로 고작 한 시간 거리에 있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진영숙은 한지음이 청하로 돌아오는 게 달갑지 않았다.옆 도시에 있으면 그래도 거리가 있어서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지만 같은 도시는 아니었다.“그렇게 됐어요.”엄마의 질문에 대해 강이한은 해명할 마음이 없었다.그의 일처리 방식은 항상 그랬다.“걔를 데리고 어디로 가려고 그러니? 본가에 데려오려고?”진영숙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한지음을 지금 본가로 데려오면 사람들이 또 뭐라고 할까?이유영이 그들에게서 완전히 돌아선 상황에 한지음까지 끼어들면 아마 다시는 되돌릴 수 없게 될 것이다.“홍문동으로 갈 겁니다.”강이한이 단호하게 말했다.안 그래도 화가 나 있던 진영숙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잠시 시간이 흐른
한지음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말 들을게요.”그 미소를 보고 나서야 강이한의 입가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조형욱은 이곳을 책임진 간병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간 있었던 일을 강이한에게 보고했다.강이한도 강서희와 한지음이 다녀간 이야기를 듣고 표정을 굳혔다.그는 완전히 엄마에게 실망했다. 한지석의 동생이기에 잘 대해주기를 바랐건만, 이런 대우를 할 줄이야!한편, 조민정은 크리스탈 가든으로 이이유영을 찾아갔다.동교 공사 현장 사고에 대한 조사 자료였다. 그리고 설계도안에서 제시한 사이즈 수치에 문제가 생겨서 건물이 무너졌다는 결론이 나왔다.“아니 처음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가….”이유영은 결국 말을 잇지 못했다.아마 이번 사고도 강이한의 작품일 것이다.그녀가 설계도안 수치를 열심히 계산하고 있을 때, 그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설계도안이 바뀌었어요.”조민정은 가짜 설계도면을 이유영의 앞에 내밀었다.외관 디자인은 이유영이 설계한 것과 똑같았지만 내부 수치가 미묘하게 달랐다.건축 디자인을 해본 사람이라면 사이즈 수치가 이상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이유영은 설계도면을 빤히 노려보며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민정 씨, 대신 해줘야 할 일이 있어요.”“뭔데요?”“강서희요.”이유영은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침착하자, 이유영! 침착해야 해!’강서희가 풀려났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찾아와서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 시비를 걸어올 것이다.이유영은 더 이상 그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표정에서 뭔가를 알아챈 조민정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그건 제가 처리할게요.”“나가 보세요.”조민정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이유영을 바라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현재 이유영이 처한 상황은 최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액세서리의 원자재가 바뀌었고 그걸 이유영이 결재했다는 서류 하나만으로 이유영의 현재 입지를 무너뜨리기엔 충분했다. 회사
강이한은 불과 며칠도 되지 않은 시간에 높은 곳에 서 있던 이유영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이유영은 인터넷에 기재된 기사들을 보며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기세등등하게 세강그룹으로 찾아갔지만 강이한을 만나지도 못하고 조형욱에게 붙잡혔다.“이유영 씨, 대표님께서는 이유영 씨를 안으로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짝!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유영은 손을 뻗어 조형욱의 귀뺨을 쳤다.그 순간 조형욱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그는 날이 선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다.“크리스탈 가든 대표 자리에서 내려오더니 완전히 미쳤나 보네?”이때 앙칼진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정윤아가 팔짱을 끼고 나오더니 조형욱의 옆에 서서 비아냥거리는 눈으로 이유영을 쳐다보았다.짝!이유영은 그대로 손을 들어 정윤아의 귀뺨을 쳤고 그 바람에 들고 있던 커피포트가 바닥에 떨어져 커피가 사방으로 튕겼다.강 건너 불 구경하듯이 그들을 쳐다보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지금 나 쳤어?”“주제파악을 잘 못하는 것 같길래 정신 좀 차리라고!”이유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는 지금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강이한은 몰라도 그의 부하직원들마저 자신에게 무례를 저지르는 모습을 보고 참을 수 없었다.한지음의 절친인 정윤아는 안 그래도 꼴 보기 싫은 이유영에게 귀뺨을 맞자 그대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옆에 있던 조형욱이 그녀를 말렸다.“그만!”“이거 놔요!”정윤아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하지만 조형욱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정윤아는 바로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화가 나도 비서실장인 조형욱에게 대놓고 대들 수는 없었다.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이유영을 노려보며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뭐가 그렇게 잘났어? 지음이 며칠 전에 홍문동으로 들어갔어. 너 외삼촌한테도 곧 버림받을걸?”“정윤아 씨!”“조 실장님!”“자리로 돌아가!”조형욱은 정윤아의 어깨를 확 밀쳤다.정윤아는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조형욱을 노려보다가 결국 입을 다물고 씩씩거리며 자리를
“내가 못할 것 같아?”“아니요. 안 할 걸 알아요. 저 같은 사람을 위해 이러실 필요가 없거든요.”조형욱이 또박또박 말했다.확신에 찬 말투에 이유영은 웃음이 나왔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넌 강이한 사람이잖아. 그 인간이랑 관련된 사람들은 다 거슬려!”“굳이요?”“하! 뭐라고? 그래! 굳이 이럴 필요야 없지. 하지만 나 때문에 조 비서가 병원에 실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조형욱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순간, 팔뚝에서 알싸한 통증이 전해지더니 조형욱은 순간 숨이 확 막혔다. 그는 본능적으로 팔뚝을 잡고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이유영의 요염한 얼굴에 그의 피까지 뿌려지자 더 괴이하게 보였다.“네가 한 짓, 잘 감춰야 할 거야. 오늘은 그냥 경고하러 왔어. 하지만 다음에는 나도 어떻게 할지 몰라.”현장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유영이 미쳤다고 생각했다.안 그래도 강이한이 그녀의 숨통을 조르는 와중에 달려와서 그의 심복에게 상처를 입히는 행위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사실 상 인터넷에서 DNA 감정서가 돌아다니는 것을 봤을 때 그녀는 이미 미쳐버렸다.강이한이 결국 그녀를 미치게 만든 것이다.이유영은 조형욱을 지나쳐 강이한의 사무실 앞으로 가서 문을 걷어찼다.대표실 의자에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가 앉아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이유영은 말없이 과도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과도를 힘껏 들어 그의 사무실 책상에 박았다.“벌써 미쳐버린 건가?”사내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강이한, 네가 죽으면 이 모든 고통이 끝나겠지?”“고작 네 주제에 할 수 있을 것 같아?”남자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이유영은 남자의 서늘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할 수 있을까?그녀 역시 속으로 묻고 있었다.가능하다면 그녀는 칼을 강이한의 심장에 꽂아 넣고 싶었다.결국 이유영은 책상에 놓인 담배를 집어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외삼촌은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잖아.”“건드리지 않았어. 이유영 너를 둘러싼 보호막을
이런 상황에서마저 고개를 숙이지 않는 그녀의 대단한 자존심이 얄미웠다. 그 많은 일을 벌여놓고 왜 저렇게 당당할까?걸음을 멈춘 이유영은 고개를 돌리고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걸 준비한 이유가 결국 나를 고개 숙이게 하기 위해서잖아? 비굴하게 네 앞에서 비는 모습을 원한 거 아니야?”“강이한, 높은 곳의 공기도 좋지만 네가 갖은 수단 방법을 써서 나를 심연으로 끌어내린다고 네가 원하는 모습을 볼 수는 없을 거야.”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또박또박 말했다.그녀는 여전히 고귀한 여왕 같은 존재였고 그녀를 심연으로 끌어들인 존재가 오히려 추악한 존재였다.이유영은 도도한 걸음을 유지한 채 밖으로 나갔다. 세강그룹을 나온 이유영은 핸드폰으로 정국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난리가 났는데 그쪽에 소식이 안 들어갔을 리가 없었다.하지만 외삼촌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이유영은 점점 조바심이 났다.그녀는 갑자기 방향을 잃어버린 기분이 들면서 지난 생의 마지막 화면이 떠올랐다.이렇게 될 거면 회귀한 의미가 과연 있는지도 의심이 됐다.비록 강이한 앞에서는 애써 당당하고 강한 척했지만 홀로 남아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니 초라하기 그지없었다.지난 생처럼 한지음에게 망막을 빼앗기고 홍문동에서 화재로 죽는 일은 없었지만 강이한이 비열한 수단으로 자신을 저격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다.도망가자!이게 본능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강이한은 미쳤고 그런 미친 상태에서 이미 강서희와 한지음을 믿기로 마음먹었다.아무리 강력한 증거를 들이밀어도 그는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그는 완전히 한지음에게 미쳐 있었다.그런 미친 인간에게 보복을 당하는 입장이니 앞으로도 매일이 지옥일 것이다.그녀는 심지어 청하에 남아 있는 자체가 수명을 태우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회귀할 기회가 주어진 것은 강이한의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하지만 이내 그녀는 그런 생각을 포기했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
임소미는 혈압이 치솟았고 화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내 말이 틀렸나요?”“틀렸냐고? 제대로 된 일을 한 적은 있고? 당신만 제대로 된 선택을 했더라면 유영이와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임소미는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격렬히 외쳤다.진영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임소미의 말이 맞았다. 진영숙은 두 사람 관계에서 많은 잘못을 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강이한은 사라졌고 강서희도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월이 뿐이었다.오늘 이곳에 와서 월이를 보게 된 순간, 월이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자리 잡았다.“사람 불러!”임소미가 크게 외치자 집사들과 도우미들이 급히 달려왔다.“이 여자를 당장 내쫓아!”“당신이 감히 그럴 수 있을까?”“뭐라고?”임소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이 여자는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조금 전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아이에게 조금의 정이라도 남아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모든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결국 그녀는 후회라는 감정을 모르는 인간이었다.진영숙이 오늘 여기 온 것도, 월이에게 다정하게 굴었던 것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마지막 발악이었다.그녀의 말은 그저 그럴싸한 포장일 뿐 사실은 월이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리고 뻔뻔하게도 무례하기까지 했다.진영숙은 임소미의 눈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매서운 날카로움뿐이었다.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우리 아들이 왜 서주를 떠났는지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임소미, 당신들은 정말 단 한치의 양심 가책도 못 느꼈어?”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는지 시간대와 상황을 조합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특히 떠나기 전, 시윤이 건넨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유영이 용성시에서 수술을 받았던 그 시기에 강이한은 서주에
강이한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절망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수술을 받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한때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무력했는지를 그는 이제서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파리에서 진영숙은 다시 백산 별장을 찾았다. 여전히 강이한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시윤은 강이한이 이정과 신시욱을 데리고 떠났다고 말했다.그 두 사람의 능력을 생각하면 강이한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은 어머니로서 절망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를 수소문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정말이지, 당신은...”백산 별정까지 찾아온 진영숙의 뻔뻔함에 임소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응수했다.진영숙은 한때 유능한 여성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감히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대우였다.“저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 좀 봐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없던 고통이 서려 있었다.그렇다. 지금의 진영숙에겐 주변에 기댈 친척도 함께할 가족도 없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손녀인 월이 뿐이었다.오늘도 그녀는 월이를 위해 여러 장난감을 준비해 왔지만 임소미는 그 모든 행동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당신도 어머니였잖아요. 제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잖아요.”임소미는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봐준다고? 당신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이유영이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진영숙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뱃속의 아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헌신적인 할머니 행세를 하니 임소미는 화가 났다.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으로밖에 안 보였다.진영숙의 눈엔 고통이 어렸다.“저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임소미의 말에 그녀는 도무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무리 자존심 강한 진영숙이라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과거
그녀는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강이한을 떠난 뒤 어둠 속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었다.신시욱과 이정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침묵에 잠겼다. 그 질문은 그들 사이에서도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이 그때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보냈는지, 사실 그들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또렷하게 남아 있는 건 그녀가 깊은 괴로움 속에 잠겨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그리고 그녀가 괴로워할수록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의 고독이 얼마나 잔혹한 감정인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그녀는 깊은 절망 속에 빠져 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은 어쩌면 그때의 이유영보다 더한 심연 속에서 절망을 겪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벌하고 있었다.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똑같이 겪기 위해 같은 어둠 속에 몸을 던졌다.“선생님. 각막 이식 수술 관련 소식이 들어왔습니다.”신시욱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천시에 머무는 동안, 신시욱과 이정은 한 번도 수술 신청을 멈춘 적이 없었다.그들은 강이한을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이유영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그도 절대 강행하지 않았다.이유영이 시력을 잃었을 때, 그녀는 가족들이 몰래 준비했던 이식 수술조차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오랫동안 기다려 온 기회 앞에서 강이한은 조용히 거절했다.“필요 없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두 사람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두 사람은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필요 없다고?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선생님.”신시욱의 목소리는 긴장감에 더욱 떨려왔다.그 어떤 강인한 남자라고 해도 이 순간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떨림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최근 며칠간 그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강이한은 자신을 벌하며 살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정말 이미 충분했다.‘받아야 할 벌은 다 받았는데 왜 여전히 자신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어둠 속에서 지낸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어둠 속에서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새들의 지저귐이 더 또렷하게 들리고 사소한 바람 소리 하나에도 감각이 예민해졌다.강이한은 우천시에 있는 주택 마당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천시에 오늘같이 이렇게 따스한 햇살이 비추던 때가 언제였던가?이정이 조심스레 다가와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햇살은 있어도 아직은 쌀쌀하네요.”말은 없었지만 강이한은 이정의 발걸음 소리와 숨소리로 그가 신시욱이 아님을 알아차렸다.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그때의 이유영도 지금처럼 감각이 예민했을까?“이정.”“네.”“유영이는 이 마당이 어떤 모습인지 전혀 보지 못했겠지?”“네.” 이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은 이곳에서 몇 개월을 머물렀지만 실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 마당은 끝내 그녀에게 낯선 곳으로 남게 되었다.지금 그녀를 우천시로 다시 데려온다 한들 스스로 길을 찾아올 수도 없을 것이다.강이한은 낮게 중얼거렸다.“하지만 유영이는 이 마당에 뭐가 있는지는 알고 있었어.”그렇다. 보지 못했어도 그녀는 감각으로 모든 것을 구분했다. 마치 지금의 강이한처럼.이정이 조심스레 물었다.“이럴 가치가 있었습니까?”그가 이곳에 온 이후, 누군가가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가치가 있었는지는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그것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유영에게 진 빚은 결코 눈 한 쌍으로는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이건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예전에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던 이유영의 손짓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졌다. 지금 자신이 어둠 속에서 겪고 있는 공포는 당시 그녀가 느낀 감정에 닿을 수조차 없었다.점심 식사 시간.“쨍그랑.”강이한이 손을 뻗는 순간, 접시와 그릇이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기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유영은 자신의 몸에 강이한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남은 인생에서도 강이한과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얽히는 일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월이의 일로 인해 그녀는 너무도 깊은 상처를 입었고 강이한을 평생 용서할 수 없었다.그런 사람의 눈을 자신이 기증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리고 강이한 역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수술 전에 모든 철수 준비를 마친 것이고 이유영에게는 아무것도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이미 많은 상처를 준 이후, 아무리 많은 것을 베푼다 해도 이유영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자신과 이유영 사이에는 어떠한 선택지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과감하게 그녀의 손을 놓은 것이다.‘이렇게 되면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빚진 것이 없게 되는 걸까?’하지만 단순히 눈을 기증했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유영아, 왜 강이한에 관해 묻는 거야? 혹시...”소은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국 그녀는 언제나 이유영 편이었다.특히 수술 전, 마지막으로 강이한을 마주했을 때 그가 남긴 말을 들은 후로 그녀조차도 강이한을 용서할 수 없다고 느꼈다.“나랑 장난해?”소은지의 말에 이유영의 표정은 단숨에 싸늘해졌다.그 차가운 기색을 확인한 소은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래, 그렇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소은지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나는 그냥 권력에 그토록 집착했던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서주를 내려놓았는지 궁금했을 뿐이야.”“음모일지도 모르지.”소은지는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화제를 서둘러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했다.“...”‘음모’라는 단어에 이유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소은지는 그녀의 웃음을 보고 또 한 번 안도했다.“ 월이 보러 왔을 때,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뭐라고 했는데?”“일어날 일은 언제든지 다시
강이한은 서주에서의 모든 일을 철수하고 사라졌다. 그와 함께하던 사람들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그저 강이한의 또 다른 속임수일 거라고 생각했다.강이한과 박연준, 두 사람은 누군가를 철저하게 속이는 데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박연준은 진짜로 서주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고 진영숙은 파리에서 집요하게 강이한의 행방을 묻고 다녔다. 그걸 보며 이유영은 강이한이 정말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무슨 생각해?”반산월에서 소은지는 이유영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이유영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은지야.”“응?”“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해?”서주의 현 상황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만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이유영은 점점 확신에 가까워졌다.강이한은 정말 그의 사람들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그는 마치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 듯했다.권력을 중시하던 인물이었기에 은둔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강이한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조용히 지낼 성격이 아니었다.“뭐라고?”소은지는 이유영의 갑작스러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물었다.이유영은 소은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강이한이... 정말 사라졌어.”“그래. 그 얘기 예전에도 했었잖아.”이유영이 이제서야 이 사실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소은지는 알아챌 수 있었다.예전엔 믿지 않았던 이유영의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녀는 강이한의 실종을 인정하고 있었다.강이한과 박연준은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그리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다.연서의 사건이 터진 이후, 그녀는 두 사람을 음모로 가득 찬 사람들로 생각했고 그래서 처음 강이한이 사라졌다고 했을 때도 이유영은 그것을 단순한 음모의 연장이라 여겼다.두 사람은 늘 서로 무관한 척 행동했지만 그 뒤에는 누구도 상상 못 할 거대한 연관성이 있었던 것이다.신지수는 여러 번 전화를 걸어왔다.강이한이 서주를 떠난 후, 신씨 가문도 연쇄적으로 피해를 보았고 그녀는 그 일을 처리하면서